지옥고를 면한 아버지

지옥고를 면한 아버지

사경이란 경전을 베끼는 일을 말한다. 옛날에는 인쇄술이 발달하지 않아 모든 경전을 손으로 직접 베껴 써서 공부하는 교재로 삼기도 하고 돌려보기도 했다.

요즈음은 인쇄술과 제책술이 발달, 한 번에 수천 수만 권을 찍어낼 수 있으니 사경은 요즈음의 인쇄술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손으로 한 자 한 자 베껴 쓰는 일은 정신 집중을 필요로 한다.

인쇄를 하는 방법으로 경판에 새겨진 것을 먹물을 칠하고 종이를 눌러 찍어내기가 있었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고 거의 대부분은 손으로 옮겨 쓰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만일 사경하는 데 있어서 한 자라도 틀리거나 빠뜨리면 새로 써야만 하는 정신적 물리적 부담을 안고 있는 게 사경이었다.

컴퓨터에 입력을 한 뒤 마음대로 옮겨 놓거나 교정을 보는 것과 같은 일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고종17년(1880)가을, 정진대사는 그의 부모님을 위해 사경을 했다. 사경의 대상은 ‘법화경’이었다.

법화경은 ‘묘법연화경’이라고도 한다. 모두 일곱 권이며 구성 내용은 28품으로 되어 있다.

일불승의 원리를 설명하고 있으며, 이는 보살, 송문, 연각의 삼승을 종합하여 비유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일불승, 일승의 내용은 제법의 실상이다.

부처님의 경전 중 ‘화엄경’과 같은 맥락에서 평가되는 최고의 가르침이다.

정진대사는 울산 태생으로 그의 아버지는 손유상이라고 했다. 일찍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세상사에 대한 허무를 느끼고 출가하여 독경과 참선으로 높은 경지를 체득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정진스님은 꿈을 꾸었다.

그는 꿈속에서 그렇게도 그리던 아버지를 만났다. 어떤 노스님이 밤에 와서 정진스님을 만나고 싶다는 말을 시자로부터 전해 들은 그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어디서 오신 스님이신지 안으로 드십시오. 쓴 차라도 한 잔 대접하겠습니다. 자.” 정진스님이 안으로 들기를 권했지만 노승은 오히려 정진스님에게 밖으로 나오라고 했다.

“신승은 본디 가야산에 살고 있는데 스님을 뵙고 긴히 할말이 있어 이렇게 왔소이다만 가면서 얘기를 나누도록 하십시다. 그냥 나오시구려.” 정진스님이 바랑을 챙기고 두루마기를 걸치려 하자 노승이 말했다.

“행장을 차릴 시간이 없소. 그냥 갑시다. 빨리 나오시오.” 말을 마친 노승은 이미 문을 나서고 있었다.

범어사 일주문 밖을 나선 노승은 문득 사자의 모습으로 변하더니 정진스님에게 등을 돌리고 타기를 재촉하는 듯했다.

래 겁이 많은 정진이었지만 해칠 의향이 없는 것 같은 사자의 등에 반은 호기심으로 반은 두려움으로 올라탔다.

사자는 어디론가 쏜살같이 달려갔다. 무서운 나머지 눈을 질끈 감았다 떠보니 정진을 태운 사자는 바다 위를 나르고 있었다.

푸른 바다가 끝없이 펼쳐져 있는 위를 날면서 정진은 문득 뛰어내리고픈 충동을 느꼈다. 사자는 이름도 방향도 알 수 없는 곳에 내려섰다. 거기는 숲과 바위가 온통 바다에 둘러싸여 있는 작은 섬이었다.

인가가 없는 것으로 보아 무인도가 분명했다.

정진을 내려 놓은 사자는 눈 깜짝할 사이에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는 망명한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자연의 위대한 질서에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그가 벌린 입을 다물 생각도 없이 서 있는데 누군가 어깨를 두드리는 사람이 있었다. 뒤를 돌아 보니, 초라한 옷차림의 노인이었다.

“스님은 어디에서 오셨소?” “네 처사님, 범어사에서 왔습니다.” “그럼 범어사의 정진스님을 알고 있습니다?

아직 서른이 채 못 되었을 것 같은데…” “제가 정진이라 합니다. 손정진.” “성이 손씨라 하셨소?” “그렇습니다.

그런데 노인께서는 뉘신데 이처럼 아무도 살지 않는 섬에 홀로 계십니까?” “글쎄요! 그나저나 한 가지만 더 물어봅시다. 혹시 아버지의 이름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정진스님은 꼬치꼬치 개묻는 노인에 대해 약간의 불쾌감을 느꼈다.

“도대체 노인은 뉘신데 남의 사생활을 캐물으십니까? 노인께서는 밝히지 않으시고 말입니다. 말씀드리지요. 저의 아버지는 유자, 상자를 쓰시는 손유상 씨라고 하고 제 속가 이름은(고덕)입니다.

그리고 제 고향은 울산이고요. 또, 제 나이까지 말씀드릴까요? 제 나이는 올해 스물아홉입니다. 다 되었습니까?” 노인은 정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덥석 손을 내밀며 정진의 손을 잡았다.

노인이 말했다. “내다. 내가 바로 네 아비되는 손유상이다. 잘 보아라. 그리고 너는 내 아들 손고덕이고…” 그 말에 정진은 노인을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

틀림없이 돌아가신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그가 열다섯 살 때 돌아가신 아버지의 모습을 기억하지 못할 리 없었다. 부자는 서로 얼싸안고 해후의 눈물과 기쁨을 나누었다.

“아버지, 어언 일이십니까? 살아 계셨군요, 아버지!” “나는 살아 있는 게 아니란다. 알다시피 나는 죽은 지 여려 해가 되었다만 요사지옥에 빠져 온갖 고통을 받고 있단다.

선악의 업보는 너무나 역연한 것이더구나. 아무리 좋은 곳에 태어나고자 해도 악한 일을 한 자는 나쁜 곳에 떨어지고 설사 지옥에 떨어지고자 하더라도 복을 지은 자는 좋은 곳에 태어나게 되는 법이다.

내 생전에 많은 죄를 지었더니 죽은 뒤에는 지옥에 떨어져 그 과보를 다 받아야 하는구나.” 정진스님이 말했다.

“어떤 죄를 지으셨길래요?” “네가 열 살 때, 가을이었단다.

우린 농사를 잘 지어 울산에서는 꽤나 넉넉한 축에 들었었단다. 그때, 문수암에 계시는 한 비구스님이 우리 집에 탁발하러 오셨는데 줄 쌀이 없다고 몽둥이로 내쫓은 적이 있었단다.

그뿐만이 아니다. 혹 네 어미가 절에 나가 스님들을 만나기라도 하면 나는 그것을 곱게 보아 주지 못했단다.

스님들을 욕하고, 시주하기를 꺼리고. 불교의 인과응보설을 터무니없는 말이라고 일축했단다.

사람은 한 번 태어나 사는 데까지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지 내생이 어디 있겠느냐는 생각이었단다.

죽음의 세계를 보고 온 사람이 없으니 믿을 수가 없다고도 했다. 그런데 그렇게 삼보를 비방하고 부처님의 인과응보와 윤회전생설을 부인한 과보로 이토록 지옥에 떨어졌구나. 너는 행여 죄 짓지 말아야 한다.”

정진스님은 아버지의 고통을 짐작하며 눈물을 흘렸다. 노인이 말을 이었다. “여기 염부제에 와서 들은 얘기다만 울진 부사로 있던 정익수는 생건에 매점매석과 부동산 투기, 백성들을 못살게 군 죄 지옥에 떨어졌다가 그의 아들 정태산이란 자가 아버지를 위해 ‘법화경’을 천 번 독송하고 스님네에게 보시를 많이하는가 하면 절을 지어 부처님께 공양한 공독으로 하늘나라에 태어났다고 한다.

그래서 부탁인데 너는 나를 위해 ‘법화경’ 한 질을 써서 만 번만 읽어다오. 그렇게 되면 내가 괴로움을 벗어나 즐거움을 얻고 마침내 천상락을 받게 될 것이다.” 정진스님은 일만 점의 ‘법화경’ 독송이라는 말에 곰곰이 생각한 뒤 말했다. “일만 번을 독송하려면 적어도 60년은 걸려야 합니다. 이틀에 한 번 정도 읽는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제 나이 벌써 서른줄에 접어들었고 경을 베끼는 데도 반 년은 걸릴 것입니다. 저야 평생토록이라도 할 수 있겠지만 아버지가 앞으로 60년은 더 있어야 지옥고를 면하게 되실 터이니 그것이 걱정입니다.” 노인이 말했다. “사경을 정성껏 하고 경을 만 번 독송하려면 네 말대로 아무리 빨리 읽는다 해도 60년은 족히 걸릴 게다. 그러니 사경를 한 뒤에는 경전의 제목을 만 번만 독송하면 된단다.

‘나무묘법연화경”나무묘법 연화경”나무묘법연화경’하고 독송한다면 하루면 족할 것이다. 그리고 보다 중요한 것은 나를 위해 네 자신이 확철대오하여 대도인이 되는 것이다.”

말을 마치자 노인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정진스님은 노인을 부르다 꿈이 깨었다. 꿈을 깨고 나서도 너무나 선명하여 오래도록 앉아 있던 그는 일단은 사경를 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러나 문제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첫째, 자신은 참선하는 중으로 신도들의 반연도 없었고 그 자신 또한 무일푼이라 사경할 비용이 없었다. 둘째, 그는 독경을 하고 염불을 하고 참선을 했지만 글씨에는 자신이 없었다. 부처님의 고귀한 말씀을 쓸 줄 모르는 자신의 운필로 개발새발 그려 놓고 싶지는 않았다. 셋째, 누가 글씨를 잘 쓰는지 알고 있는 사람이 없었다. 하기야 그것은 찾아다니면 가능하리라 생각했다.

정진스님은 속가에 홀로 계신 어머니를 찾았다. 그녀는 홀로 된 몸으로 외손자 하나를 거두고 있었다. 정진스님을 보자 대뜸 말했다. “속세로 치면 아들이지만 불가로 치면 스님이오. 스님이 속가를 찾아다니는 것은 그리 썩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니 특별한 일이 아니면 들어오지 말고 그대로 돌아가시오.” 그리고는 방문을 닫아 버렸다.

정진스님은 문 밖에 서서 꿈 얘기를 하고 함께 화주하러 다닐 것을 제안했다. 그제서야 노파는 방문을 열어 주고 정진스님을 아들로 받아들였다. 두 모자는 전국을 돌며 3년 동안이나 탁발화주를 했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법화경’과의 인연을 맺어주기 위함도 깃들여 있었다. 3년이 지나니 제법 많은 돈이 모였다.

정진스님은 당시 명필로 소문이 난 통도사의 김경운스님에게 특별히 부탁을 했다. 경운스님은 본디 순천 조계산 선암사가 재적본사이며 통도사 백련암에 머물고 있었다.

경운스님은 검은 비단에 금니로 ‘법화경’을 쓸 것을 제안했다. 그런데 문제는 붓이었다. 여기에 쓰이는 붓은 살아있는 족제비의 꼬리털을 뽑아서 맨 붓이라야 했기 때문이다. 경운스님이나 정진스님이나 산 족제비를 구할 수가 없어 애를 태웠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점심 공양을 마치고 녹차를 우려 마시노라니 난데없는 황금빛 족제비 한 마리가 방으로 뛰어들었다. 사람을 보고도 달아나려고도 않았다. 족제비는 방 한가운데 가만히 엎드려 있었다. 경운스님이 비로소 알아차리고 시자를 시켜 족제비 꼬리를 조금 자르게 하니 그제서야 족제비는 밖으로 나갔다.

그리하여 금니로 쓴 ‘법화경’한 질이 무사히 이루어지는데 일곱 달이 걸렸다. 정진스님은 ‘법화경’을 부처님 앞에 모셔 놓고 기도를 올렸다. 꼬박 하루 만에 ‘나무묘법연화경’만 번을 하고 회향했다. 회향할 때는 ‘법화경’사경 비용을 제하고 남은 돈으로 음식을 장만하고 스님네 옷을 한 벌씩 하여 고루 공양하였다.

성대한 회향식이었다. 그날 밤 정진스님과 그의 어머니 꿈에 손유상이 나타나 화사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네가 ‘법화경’을 사경하고, 옷가지와 음식을 스님네에게 공양하며 천도제까지 겸하여 지내준 공덕으로 나는 지옥고를 면하고 천상락을 받게 되었구나.” 그리고는 구름을 타고 하늘 저편으로 가물가물 사라져 갔다. 그 후로 정진스님은 참선하고 염불하는 사이사이 늘 ‘법화경’을 독송하였고 또 널리 강설하였다고 한다.

<동봉스님이 풀어쓴 불교설화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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