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신춤을 춘 관음보살
경흥국로는 신라 문무왕 때로부터 신문왕에 걸쳐 크게 활약한 고승이다. 국로라는 호칭은 국존이란 호칭과 아울러 국사에게 주어지는 것인데 국사보다도 더 존경받을 만한 어른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경흥국로는 생몰 연대가 정확하지는 않으나 원효(617–686)스님과 동시대를 산 스님이라 추정되고 있다.
또한 원효 다음으로 가장 많은 저서를 남겼으며 그의 전생애는 저술 활동에 바쳐졌다. 속성은(수)씨이고 웅천주(즉, 오늘날의 충남 공주) 사람이다. 열여덟 살에 출가하여 삼장에 통달하였다.
그는 삼랑사에 오래도록 주석했는데 그의 사상를 종합해 보면 법상종의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가 국로에 추대된 것은 문무왕이 서거하면서 신문왕에게 신칙하였기 때문인데, 신문왕 원년(681)에 세상을 떠나기 앞서 태자이자 왕위에 오를 신문왕과 대신들이 있는 자리에서 말했다. “짐이 세상을 떠나간 뒤에도 언제나 부처님의 자비와 평등을 정치사상에 그대로 반영하여 나라를 다스려 가도록 해라.
그리고 삼랑사에 주석하시는 경흥화상을 국사로 받들도록 하라. 그 스님은 대단한 학승이며 우리 신라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충분히 감당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짐의 말을 명심하라.” “그 스님의 불교적 사상 갈래는 어느 쪽이옵까?” “짐이 알고 있기로는 경흥화상의 사상적 갈래는 법상종에 해당한다. 법상종의 가르침은 우주만유의 본체보다도 현상을 세밀히 분류 관찰하는 것으로 종지를 삼는다.
물론 거기서 도출되는 결과는 오로지 식일 따름이라고 하여 식이 모든 삼라만상 온갖 존재를 나타내게 되었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므로 법상종을 유식종이라고도 한다.” 말을 마치고 문무왕은 눈을 감았다. 신문왕은 즉위하자마자 선왕의 칙령대로 경흥스님을 국사로 모시고 한 단계 더 추앙하는 뜻으로(국로)라 호칭하였다.
경흥국로가 삼랑사에 머물면서 저술 할동과 국가자문역으로 정진하던 중 뜻하지 않은 병을 얻었다. 훌륭하다는 의원이 와서 진맥을 하고 좋다는 약은 다 써 보았지만 한 달이 넘도록 전혀 차도가 없었다. 신문왕도 근심에 싸여 어의에게 명령을 내렸다. “그대는 짐의 주치의로서 짐 이외에는 다른 사람의 병을 볼 수가 없다. 하지만 경흥국로께서 입적하시게 된다면 우리 신라로서는 막대한 손실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그대가 경흥국로의 병을 낫게 하도록 하라.” 마침내 어의까지 동원되었지만 도저히 병은 차도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경흥국로께서는 안에 꼐시옵니까? 지나가던 객승 문안이옵니다.” 사람들은 뜻하지 않게 나타난 비구니에 대해 야릇한 호기심을 일으켰다. “어디서 오신 스님이신지?” “지금 온 곳을 따질 처지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국로께서 몸져 누우셨다는 소식을 접하고 문병하러 왔으니 들어가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당돌한 비구니의 위력에 눌려 시자는 비구니를 경흥국로에게 안내했다. “어서 오시게. 어디서 오신 스님이신가?” “큰스님과 같은 고향에서 온 사람입니다.”
“나와 같은 고향이라고?” “사람은 누구나 온 곳을 모르기 때문에 고향이 같을 수밖에 없지요. 그건 그렇고 스님의 병세는 좀 어떠신가요? 이렇게 늦게 찾아뵈어 송구스럽습니다.” “여전하네. 앞으로 좀 나아지겠지.” 비구니스님은 국로가 누워있는 침상 곁으로 다가앉으며 손을 내밀어 국로의 이마를 만져 보고 손목을 잡아 진맥을 했다.
이윽고 비구니스님이 말했다. “제가 알고 있기로는 스님의 병환은 지나친 신경성입니다. 그리고 피로가 겹쳐서 생긴 병이므로 과로와 신경성를 풀어 버려야 낫습니다. 비록 비구니의 얘기라 할지라도 신우가 하는 말이라 생각하시고 들어 주십시오.” “원 별말씀을. 어서 말해 보시게.” “그러지요.” 비구니는 말을 마치자 일어서더니 춤을 추기 시작했다. 병신춤이었다. 손과 발, 다리를 비틀기도 하고 몸을 꼬기도 하며 얼굴을 갖가지로 변화시키는 병신춤이었다.
그 비구니의 모습은 마치 11면 관음의 모습처럼 다양하기 그지없었다. 혹은 자비의 표정으로, 혹은 희자의 표정으로, 또 혹은 분노의 표정으로 얼굴 모습을 자유자재로 변화시켰다. 그 춤새가 하도 우스워 경흥국로는 자신이 국로라는 사실도 잊고 실컷 웃어 댔다. 나중에는 방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웃어 대는 바람에 밖에 있던 시자와 대중들과 다른 수 많은 사람들까지 모여와 비구니의 병신춤을 바라보며 삼랑사 경내는 온통 웃음의 도가니가 되었다.
눈물이 펑펑 쏟아지기도 했고 너무나 웃어서 배가 아프기까지 했다. 비구니의 병신춤이 끝났을 때, 경흥국로는 몸이 거뜬하다고 느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것은 기적이었다. 그토록 한 달 남짓을 병마와 싸워 왔는데, 단 몇 시간 실컷 웃고 나니 아무렇지도 않게 병이 나아 버린 것이다. 비구니는 국사의 병이 완전히 나은 것을 확인하고는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지만 경흥국로와 시자들도 웃는 데 빠져 있어서 비구니가 돌아가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국로가 시자에게 말했다. “아까 그 비구니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 아느냐?” “잘 모르옵니다.” “그러면 빨리 뒤를 밟아 거처를 알아오도록 해라.” “네, 큰스님.” 그렇게 해서 시자는 비구니가 사라진 쪽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비구니는 석장을 짚고 남항사 쪽으로 가고 있었다. 남항사는 삼랑사 남쪽에 있는 절이었다. 뒤따르는 경흥국로의 시자가 걸음을 빨리하여 남항사 앞에 이르자 비구니의 모습은 이미 절 안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시자는 절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사방을 둘러보았으나 비구니의 모습은 찾을 길이 없었다. 요사채에도 후원에도 뒤꼍에도 없었다. 마침 비구가 한 사람 요사에서 나왔다.
“저, 실례지만 말씀 좀 묻겠습니다.” “말씀하시지요. 무슨…?” “혹시 이 절에 비구니가 살고 있지는 않는지요?” “여기는 비구들의 처소입니다. 비구니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그럼, 나이 30대 초반의 젊은 비구니가 이리로 들어왔는데 보셨습니까? 키는 자그마하지만 수려한 얼굴이던데?” 비구는 다시 한번 고개를 저었다. 시자는 생각했다. ‘제가 가봤자 이 남항사지. 그새 어디로 갔을려고.’ 시자는 법당 안으로 들어갔다. 대체적으로 스님네가 절을 방문하면 제일 먼저 찾는 곳이 법당이라는 데에 생각이 미친 것이었다. 법당에는 11면 관세음보살이 모셔져 있었다. 그 보살상은 대나무 석장을 짚고 있었다.
아까 경흥국로 방에서 본 바로 그 석장이었다. 시자는 그 길로 삼랑사로 돌아왔다. “틀림없이 그 11면 관음보살이 경흥 큰스님의 병을 고쳐 주시기 위해 현신한 것이야. 내 짐작이 틀림없을 거야.” 시자는 경흥국로에게 그가 본 대로 소상하게 말했다. 얘기를 듣고 난 경흥국로가 시자를 대동하고 남항사 법당 관음전에 이르러 보니 그 11면 관음보살이 바로 자신의 병을 낮게 한 비구니의 모습과 너무나 흡사했다.
국로는 관음강 앞에 합장하고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관세음보살님은 온갖 신통력을 구족하시고 지혜와 방편을 고루 닦으셨네. 관세음보살님은 사방세계 온갖 국토에 몸을 나타내지 않는 곳 없네. 나의 병든 몸 고쳐 주시고자 비구니의 모습을 보이시고 나의 마음 일깨우시고자 웃음이 명약임을 설파하셨네. 관세음보살님은 모든 중생의 자애로운 어머니 자식이 병들면 어루만지는 어머니의 따스한 손길처럼 중생이 병드니 관세음보살은 병신춤으로 이 내 몸에서 고통을 제거하셨네. 아! 당신은 진정 성자십니다.
당신은 진정 아름다우십니다. 당신은 진정, 저와 우리 모두의 의지처이십니다.
<동봉스님이 풀어쓴 불교설화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