솥을 아홉 번 건 구정선사
“네 이놈, 그렇게 늦게 나와서야 어떻게 신용을 지킬 수 있겠느냐?” 노승의 불호령에 젊은이는 몸둘 바를 몰랐다. 인시에 만나기로 한 약속인데 이미 인시를 친 지도 꽤나 오래되었기 때문이었다. “내일 다시 나오너라. 인시가 칠 때까지 나와야 하느니라.” “큰스님, 죄송합니다. 내일은 일찍 나오겠습니다. 부디 용서하여 주옵소서.” 노승은 젊은이의 어깨를 툭툭치면서 부드럽게, 그러나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
“젊은 사람이 늙은이보다도 동작이 굼떠서야 쓰겠는가? 세상을 잘 살아가려면 신용이 있어야 하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약속을 저버린다면 어찌 되겠는가. 알았으면 내일 다시 오너라.” 젊은이는 벌써 두 번째, 약속 시간보다 늦게 나간 것이었다. 한 번은 늦잠을 자다가 묘시는 되어서야 나갔고, 그리고 오늘은 인시중에 나갔던 것이다.
연거푸 이틀을 내리 노승보다 늦게 나간 젊은이는 잠을 아주 약속 장소에 가서 자야겠다고 생각했다. 젊은이는 그날 밤 삼경이 되자 노승과의 약속 장소로 나갔다. 밤하늘의 무수한 별들이 곧 쏟아져 내릴 것만 같은 고즈넉한 밤이었다.
초겨울로 접어드는 밤의 공기는 제법 살 속을 파고들었다. 젊은이는 이미 갈등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거, 추운데 괜히 나왔나? 이러다가 혹시 얼어 죽기라도 하는 거 아냐? 그렇지만 노스님께서 도를 배우기 위해서는 어떠한 시련과 고통도 참아야 한다고 하셨으니 이 정도 초겨울 날씨쯤이야 당당하게 참아 내야지.’ 청년은 비단장수였다. 그날 그날 비단을 팔아 겨우 생계를 유지해 가던 젊은이가 하루는 대관령을 넘던 중 고갯마루에서 쉬고 있었다.
그와 때를 같이하여 노승 한 분이 누더기 옷을 입고 고갯마루에 서서 벌써 여러 시간을 꼼짝 않고 있었다. 비록 누더기는 입었지만 노승에게서 풍겨오는 인자하면서도 천지를 가늠할 만한 풍모에 젊은이는 끌리듯 다가갔다. “실례지만 큰스님께서는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시옵니까? 제가 뵙기에 큰스님께서는 벌써 몇 시간째 서서 꼼짝 않고 계시는데요.” 노스님이 웃으며 말했다.
“중생들에게 공양할 시간을 주고 있는 것일세.” “중생들이라뇨? 어떤 중생 말입니까?” “내 이 누더기 속에서 나와 더불어 살아가는 중생이 있네. 소위 이라고 하지. 이 이들이 내 피를 빨아 먹으려면 내가 가만히 있어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가만히 있는 것일세.” 이 말을 들은 젊은이는 크나큰 감동을 받았다. 젊은이는 문득 세속의 삶이 하찮게 여겨졌다. 이런 노승을 따라간다면 커다란 배움이 있을 것 같았다.
그는 마음 속에 노스님의 제자가 될 결심을 굳혀갔다. “큰스님! 큰스님을 모시고 큰 가르침을 받고 싶습니다. 제자로 받아 주십시오. 힘껏 정진하겠습니다.” 젊은이의 말이 떨어지자 노승은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중 되는 일이 어찌 작은 일이랴. 세상의 영화를 탐내려는 것도 아니요, 부유함을 바라는 것도 아니다.
등 따습고 배불리 먹기 위함이 아닌 것이다. 세상의 욕락을 버리기 위함이요, 우주, 인생의 진리를 깨달아 부처가 되기 위함이요, 만중생을 제도하기 위함이다. 거기에는 어떠한 시련과 역경도 참아 내야 하는 인고의 시간을 필요로 하는 법이다. 그런데도 자네가 능히 할 수 있겠는가?” 젊은이가 대답했다. “어떠한 어려움도 능히 참겠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내가 너를 인도하리니 내일 새벽 인시 정각에 이곳에서 만나도록 하자.” 그렇게 해서 나온 지 이틀, 그런데 그 이틀 모두 큰스님보다 늦게 나와 꾸지람만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아예 삼경에 와서 노스님을 기다리고 있을 참이었다. 살 속을 파고드는 냉기가 젊은이에게 시간을 더디게 가게 만들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잠이 들었다. 그는 누가 흔들어 깨우는 바람에 잠에서 깨어났다. 노스님이 서 계셨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번에야 틀림없는 합격이겠지?’ 그러는 중에 노승의 호령이 떨어졌다.
“자고로 도를 닦는 사람은 광음을 금쪽같이 아껴야 하거늘 이렇게 무가치하게 보내다니. 그래 몇 시에 나왔느냐?” “네, 큰스님! 어젯밤 삼경에 이곳에 왔습니다.” “그렇다면 어젯밤 삼경부터 지금 이 시각까지 자네는 시간을 너무 헤프게 썼어. 약속이란 서로간에 시간을 절약해서 헛된 낭비를 줄이기 위해 하는 것인데, 그처럼 일찍 나왔으니 자네는 그만큼의 시간을 낭비한 셈이다.” “시간의 낭비라고요?” “약속이란 일각을 먼저 나오면 자신의 일각을 낭비함이며, 일각을 늦게 나오면 상대방의 일각을 낭비시킴이니라. 내일 다시 나오너라.” 나흘째 되는 날, 젊은이는 시간을 맞추어 나갔다. 지난 아침 되돌아오면서 거리를 짐작해 놓았으므로 얼마가 걸리는가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노승보다 간발의 차이로 먼저 도착했다. 그러자 노승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앞서 걷기 시작했다. 젊은이는 스님을 따라갔다. 오대산 동대 관음암이었다. 관음암에 도착한 노스님이 젊은이를 돌아보며 물었다. “자네는 어째서 내 뒤를 졸졸 따라 왔는가. 어떤 목적이라도 있는가? 젊은이가 대답했다. “네, 큰스님. 중이 되고 싶습니다. 저를 제자로 받아 주십시오. 가르침을 달게 받겠나이다.” “뭐, 중이 되고 싶다고? 그렇다면 어떤 일이라도 능히 참고 해내겠느냐?” “네, 큰스님!” “너 솥은 걸어보았느냐? 그렇다면 우리 절 솥을 다시 걸어야 하겠으니 너는 오늘부터 솥을 걸도록 해라.” 젊은이는 솥을 걸었다.
그의 솥 거는 솜씨는 이미 인근 지역에 소문이 날 정도였다. 그만큼 그는 솥 거는 일에는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노승은 ‘오늘부터’라는 말을 남겼다. 솥은 하나뿐이었다. 젊은이는 한나절도 채 걸리지 않아 솥을 아주 근사하게 걸어 놓았다. 그는 중얼거렸다. “아마 노스님께서 돌아오셔서 보시면 마음에 흡족하실 거야. 암.” 들뜬 마음으로 젊은이는 노승이 돌아오길 기다렸다. 저녁 때가 되어 탁발에서 돌아온 노승에게 젊은이는 자랑스레 말했다. “큰스님 솥을 다 걸었습니다.
한 번 보시지요.” 노승은 젊은이를 따라 부엌으로 갔다. 노승은 솥 건 것을 보더니 혀를 차면서 말했다. “음! 솥을 잘못 걸었구나. 다시 걸어라.” 말을 마치고 노승은 조실로 돌아갔다. 젊은이는 다시 솥을 걸었다. 초겨울이었다. 바깥 날씨가 저녁 때가 되니 더욱 쌀쌀했다. 그는 짚을 썰어 흙에 섞어 잘 이겼다. 그리고 솥을 걸었다. “큰스님, 솥을 다 걸었습니다.” 조실에서 노승은 끙 하더니 부엌으로 나왔다.
노승은 주장자로 새로 건 솥을 꾹 눌러버렸다. 아직 굳지 않은 부뚜막은 쉽게 무너져 내렸다. “잘못 되었으나 다시 걸어라.” 젊은이가 보기에는 잘못 된 곳이 없었지만, 그는 전혀 불평 한 마디 하지 않고 다시 걸었다. 청년은 이와 같이 허물고 다시 걸고 하기를 아홉 번이나 거듭하였다. 아홉 번에 이르도록 그는 불평 한 마디 하지 않았다. 아홉 번째 솥을 걸었을 때 노승은 비로소 인정을 했다.
“으음! 그래, 이제 제대로 걸렸구나.” 젊은이가 보기에는 처음이나 마지막이나 마찬가지였지만 노승의 인정을 받고 보니 기뻤다. 노승은 젊은이에게 출가할 것을 허락하고 그의 머리를 깎아 제자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솥을 아홉 번이나 걸었다는 뜻에서 ‘구정’이란 불명을 지어주었다.
구정스님은 그 후 열심히 정진하고 하심하여 마침내 대선지식이 되었으며 후학들의 귀감이 되었다.
<동봉스님이 풀어쓴 불교설화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