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순 공주의 출가
조선 태조(1392–1398재위)에게는 8남 1녀가 있었다.
위로 내리 8남을 두었고 막내가 공주로서 온갖 사랑을 독차지했다. 태조는 두 사람의 부인을 두었다. 제1부인은 신의 왕후 한씨였고 제 2부인은 신덕 왕후 강씨였다. 신의 왕후 한씨에게서 이방우, 방과, 방의, 방간, 방원, 방연 등 6형제가 태어났고 신덕 왕후 강씨에게서는 방번, 방석, 경순 공주가 태어났다. 그 가운데 방과가 정종(I398–1400재위)이었고 방원은 태종(1400–1418재위)이 되었다. 그러니까 경순 공주는 태조 이성계의 외동딸이며 제1차 왕자의 난 때 피해를 당하여 몰래 피신, 동대문 밖 창신동에 위치한 청룡사로 출가를 한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경순 공주가 단지 난을 피하기 위해 출가했을 뿐 불심이 없었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녀는 아버지인 태조의 불심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우바이였다.
태조는 조선의 건국 일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무학왕사를 비롯하여 수많은 고승들의 도움을 받았고, 또 많은 교류를 하기도 했다. 오대산 상원사에서는 문수동자를 친견하여 그 친견한 모습대로 조성한 것이 문수동자상이라고도 한다. 태조가 즉위하자 곧바로 대두된 것이 태자 책립의 문제였다. 대체로 태자는 맏아들, 즉 적자가 되는 것이 평소 있어 온 전례였으나 태조에게 있어서는 그게 그렇지 않았다.
특히, 배극렴은 개국공신인 다섯째 아들 방원을 태자로 봉하는 것이 옳다고 적극적으로 나섰다. 방원이 없었더라면 태조의 쿠데타는 성공할 수 없었고, 또 이성계 자신도 태조의 자리에 나아갈 수 없었음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태조의 생각은 달랐다. 개국의 공이 방원에게 있었음은 인정을 하면서도 그는 계비인 신덕 왕후 강씨의 소생인 방 번을 태자로 세우고 싶었다.
여기에는 강씨의 입김이 작용하기도 했다. 한씨는 태조가 즉위할 때 이미 세상을 떠났고 태조가 정을 붙일 곳은 강씨뿐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있어서 자신의 소생을 태자로 옹립해 달라는 말은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방번은 지나치게 똑똑하였으므로 배극렴을 비롯한 신하들은 그가 태자로 옹립되는 데 대해 일말의 불안을 안고 있었다.
신하들은 가급적이면 그네들의 뜻을 순순히 따르는 조금은 멍청한 사람을 내세을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배극렴은 말했다. “전하, 방석이 방번보다는 더 나을 줄 아뢰옵니다. 어차피 강씨의 소생을 태자로 책립하시려 한다면 방번보다는 여러 모로 뛰어난 방석을 택하소서.” 이 태조는 배극렴 등의 의견을 따라 방석을 태자로 책립했다. 여기에 불만을 품은 한씨 소생의 여섯 왕자들은 내심 칼을 갈고 있었다.
특히 방원은 가끔씩 입에 거품을 물면서까지 태조의 처사에 대한 심한 불만을 토로하곤 했다. 그렇다고 태조의 즉위 초부터 쿠데타를 일으킬 수는 없었다. 방원은 7년간이나 때를 기다리며 준비를 했다. 태조 7년(1398) 8월 마침내 방원은 거사를 일으켜 태조를 몰아내고 왕의 자리에 오르려 했다. 그러나 측근에서 과도기적 시기에는 다른 사람을 앉히는 것이 좋다고 극구 반대하는 바람에 허수아비로 그의 형인 방과를 추대하였다.
그가 곧 정종이다. 이 왕자의 난에서 방원은 강씨의 소생인 방번과 방석을 무참히 도륙했다. 본디 정치란 것이 피도 눈물도 없는 아주 냉정한 것이라지만 방원은 아버지를 몰아내고 형을 허수아비로 앉혔으며 게다가 이복 동생 둘을 죽인 것이다. 그때 왕자의 난을 피하여 청룡사로 출가한 이가 바로 경순 공주였다.
그녀는 일찍이 홍원군 이제와 결흔하여 신혼의 단꿈을 꾸고 있었다. 이때 태조 이성계는 계비의 소생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외동딸 경순 공주를 불러 말했다. “경순 공주야, 아무래도 세태가 심상치 않구나. 어찌하면 좋 겠느냐? 아무래도 화를 당하기 전에 무슨 조치를 취해야 할 것 같은데 …” 아버지의 말을 듣고 있던 경순 공주도 착잡하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렇다고 뽀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어깨를 들먹이며 흐느끼는 공주를 향해 태조는 입을 열었다. “어떠냐? 너 출가해 보지 않겠느냐? 애비가 되어 딸에게 출가를 권한다는 게 마음 내키는 일은 아니다만 어찌하겠느냐. 공주, 말을 해보려무나.” 공주가 말했다. “아바마마, 절이란 소녀가 알고 있기로는 불도를 닦아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도량이지 세인의 도피처는 아니라고 봅니다. 저는 도피하는 생각으로는 절대로 출가하지 않겠습니다.
말미를 주십시오.” “그렇게 하려무나. 한 번 잘 생각해 보고 결정해도 좋을 것 이다.” 공주는 자기의 처소로 돌아왔다. 세상이 온통 회색빛인 듯 싶었다. 들녘에서는 오곡이 무르익어 가고 있었지만 그것들이 전혀 홍미롭게 여겨지지 않았다. 그녀는(법화경)을 꺼내 읽었다. 삼계가 화택이라는 비유에 특히 눈길이 갔다. 한참을 뚫어져라 경전을 들여다보던 경순 공주는 드디어 결심을 했다.(그렇다. 이 세상은 불타는 집과 같다. 나는 이 불타는 집을 빠져 나가야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이 불타는 집으로부터 나가도록 해야 한다. 나 경순 공주는 출가하리라. 출가란 불 타는 집을 벗어남이다. 어디로 갈 것인가? 아니 그것은 부왕께 상의하면 된다.) 경순 공주는 부왕 이성계를 찾았다. “아바마마, 소녀는 출가를 결심했습니다. 이 세상은 불타는 집과 같다는 부처님의 말씀을 읽고 깨달은 바가 있습니다.
아바마마의 뜻으로서가 아니라 소녀 스스로의 뜻으로 출가를 하겠습니다. 세간으로부터 도피하고자 출가함이 아니라 진정으로 불도를 닦아 깨달음을 얻고자 출가하고자 함입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잘 생각했다. 장하구나, 공주야.” 태조는 공주를 데리고 동대문 밖 청룡사를 찾았다. 청룡사에 서는 태조와 경순 공주가 온다는 전갈을 받고 그들 부녀를 맞을 준비를 하느라 부산했다. 청룡사에는 고려 말 공민왕의 왕비였던 혜비가 나라가 망하자 이곳에 와서 삭발을 하고 비구니의 길을 걷고 있었다. 혜비는 공주를 맞아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다.
그 눈물은 반가움의 눈물이기에 앞서 인간으로서 이 고통스런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이의 눈물이기도 했다. “공주나 나나 똑같은 처지가 되었구려. 칼로써 잡은 자 칼로 써 망한다더니, 고려를 무참히 도륙한 공주의 형제들이 이젠 부왕을 몰아내고 형제를 죽여 자리를 탐내다니, 이것이 불타는 집이 아니겠소. 하여간 잘 왔구려. 부처님 시봉 잘하고 열심히 정진하오.” 공주는 비구니스님인 혜비의 말을 듣고 자존심이 상했지만 그렇다고 대답할 특별한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부왕과 형제들이 지은 업이 있다면 그 과보는 제가 받겠습 니다. 저는 각오를 단단히 했습니다. 큰스님, 부디 어리석은 저를 이끌어 주십시오. 그리고 앞으로는 스님께서도 혜비라는 이름을 쓰고 있지 않듯 제게서도 공주라는 이름을 거두어 주십시오” 두 비구니스님은 그로부터 어려운 일이나 쉬운 일이나 슬픈 일이나 기쁜 일이나 늘 함께 하고 함께 풀어가는 좋은 도반이 되었다.
이에 앞서 공주는 태조와 작별할 때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아바마마, 소녀는 이제 출가의 길을 갑니다. 아바마마와 오라버니들이 지은 업보가 행여 있으시다면 제 몸이 다하는 날까지 참회하며 대신 받겠습니다. 아바마마께서도 뜻하지 않게 지어온 업연들을 참회하시면서 사십시오.” 공주의 눈물과 간청을 듣는 태조도 눈물을 삼켰다.
정종 2년(1400) 1월 제 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다. 이는 한씨 소생끼리의 싸움이었다. 제 4남인 방간과 제 5남인 방원과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었는데 결국은 방간이 사로잡혀 귀양을 가고 그곳에서 모진 고문 끝에 죽음을 맞게 되었다.
태조는 동복 형제간의 싸움에 통분을 느껴 한양의 청공사에 머물고 있는 경순 공주를 만나 보고 함흥으로 가서 두문불출하였다. 여기서 나온 말이 이른바 ‘함흥차사’였다. 물론 공주가 태조를 만나뵈온 것도 태조가 태종 원년 3월 함흥으로 가기 전 들러서 만났던 것이 마지막이었다. <동봉스님이 풀어쓴 불교설화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