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승에서 만난 친구

저승에서 만난 친구

“근홍이가 죽었다. 애이고, 우리 불쌍한 근홍이가 죽었어. 부처님도 무심하시고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우리 착한 근홍이를 어쩌자고 이리도 빨리 데려가신담. 아이고 아이고오” 경상북도 울산군 원남면 상서리 이규진 씨 집안은 온통 울음바다가 되었다.

아들 근홍이 뜻하지 않은 사고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아침 밥을 멀정히 먹고 친구를 만나러 이웃 부락으로 간다고 한 아들이 변사체로 발견된 것이다. 이규진 씨 집안은 대대로 불교를 신봉하는 독실한 불자 가정이었다. 가까운 문수암에 올라가 기도도 열심히 했다.

언젠가 두 부부는 백중기도에 동참하기 위해 아직 소년 티를 벗지 못한 아들을 데리고 문수암을 찾았다. 법회가 한참 무르익고 있었다.

스님은 주장자를 들고 법상에 올랐다. 법당 안은 쥐죽은 듯 고요했다. 이윽고 큰스님의 법문이 시작되었다. 법문 내용은 인과의 도리를 알고, 죄가 있으면 부처님께 참회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두 내외와 아들 근홍이도 귀를 세우고 듣고 있었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착한 일을 많이 한 사람은 선한 과보를 받고 악한 짓을 많이 한 사람은 악한 과보를 받는 다고요. 그러므로 절대로 죄를 짓고는 못 사는 법입니다.

오늘이 마침 자자일이고 하니, 여러 시주님들께서는 마음과 언어와 몸으로 지은 죄가 혹 있으시면 부처님 앞에서 참회하십시오. 참회하면 죄가 가벼워지고 참회하지 않으면 죄는 더욱 깊어집니다. 어느 날 부처님께서는 이런 게송을 읊으셨습니다. 전생의 일을 알고자 하는가? 금생에 받는 것이 그것이오. 내생의 일을 알고자 하는가? 금생에 짓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예로부터 이 자자일에는 참회 의식이 있어 왔습니다.

(자자일)이란(참회하는 날)이란 뜻입니다…” 그때 법문을 듣던 근홍이는 살그머니 법당을 빠져 나왔다. 그는 혼자 생각했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정말, 인과법이 맞는 것일까? 어떻게 그것을 믿을 수 있어? 누가 저승까지 갔다 온 사람이라도 있대?” 근홍이는 숙부에게 1백 원을 꾸고 갚지 못했다. 아직 경제력이 없는 소년이 갚을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벌써 여러 해가 지났지만 아직 갚지 못했고 또 갚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백원이란 당시(1938년)로서는 어마어마한 거금이었다. “인과법을 믿지 않는 사람은 부처님의 제자가 아닙니다. 아무리 불교 경전에 대해 통달하지 못한 바가 없다 하더라도 입으로만 외고 마음에 느낌이 없다면 불자가 아닙니다.

인과법이 무서운 줄 알고 그것을 실생활에 반영하는 것이 참된 불자입니다…” 법당에서는 큰스님의 법문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그 후 몇 해가 지나서 근홍이는 숙부에게 돈을 갚지 않을 방도를 구상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숙부의 뒤를 밟다가 정말 우연하게도 숙부가 이웃집 유부녀와 정을 나누는 것을 보게 되었다.(됐다. 저것만 물고 늘어지면 아무리 숙부라도 조카에게서 돈을 받아 낼 수는 없어. 아니야! 내가 돈을 갚을 게 아니라 오히려 돈을 더 뜯어내야지.) 며칠 뒤 숙부가 근홍이를 찾아와 빌린 돈을 갚으라 독촉했다.

숙부는 돈이 필요했던 것이다. 간부에게 조금이나마 보태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때 근홍이는 숙부의 약점을 들어 위협했다. 돈은 줄 수 없으며 만약 계속 빚독촉을 할 경우 다 불어 버리겠다고 위협했다. 숙부는 아무 말도 못하고 돌아갔다.

그 후로 근홍이의 협박은 점점 도가 높아 갔다. 숙부는 숙부대로 조카의 입을 틀어막기 위해 안간힘을 썼고 살림은 점점 줄어들었다. 집안에서는 단지 두 사람만 알고 있었다. 근홍이의 부모도 근홍이가 숙부한테 돈을 빌렸는지 어떤지를 몰랐고, 또 한 숙부가 근홍이한테 약점을 잡혀 협박당하고 있는 줄도 몰랐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이 변사체로 발견되었고, 이규진 씨 내 외는 땅을 치면서 통곡을 했다. 마을 사람들은 근홍이가 죄값을 치른 것이라고도 했고 또는 착한 근홍이가 그렇게 죽은 것은 필시 무슨 곡절이 있을 것이라고도 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감성이 풍부한 나이여서 자살했을 가능성도 높다고들 했다.

하지만 이규진 씨 내외는 그런 얘기들을 바람결에 날려 보내곤 했다. 세월이 흐르자 두 사람의 슬픔도 조금은 진정되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어느 날 근홍이의 숙부는 살인죄가 적용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다. 이유는 조카를 죽였다는 것이었다.

직접 죽이지는 않았지만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죽이도록 배후에서 조종했다는 결론이 나왔고, 마침내 그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다. 다시 이태가 지난 어느 날, 이웃 마을에 사는 젊은이가 물에 빠져 세상을 떠났다. 근홍이의 숙부 아들이 물에 빠져 허우적대자 이를 본 젊은이가 물에 뛰어들었다가 상대방을 살리고 자신은 기력이 떨어져 그만 죽고 만 것이다. 이 젊은이의 이름은 정휴였다. 정휴의 부모들은 자식의 시신을 앞에 놓고 너무나도 뜻밖의 슬픔에 몸을 가누지조차 못했다. 장례는 사흘장으로 지내리라 생각하고 사람을 시켜 상역을 했다.

관은 장지에 도착했고 하관시가 되어 사람들은 광중에 관을 내렸다. 얼굴이 통곡과 눈물로 뒤범벅이 된 정휴의 아버지가 첫 삽을 떠서 관에 넣는 순간 무슨 소리가 관으로부터 새어 나왔다. 사람들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밖으로 뛰쳐 나왔다. 귀신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관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고 신음소리와 함께 사람의 말소리가 더욱 또렷하게 들렸다.

“갑갑해요. 이 문 좀 열어주세요…” 정휴의 부친은 퍼뜩 정신이 들었다. 그는 광중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사정없이 관 뚜껑을 열어 젖혔다. 시신은 묶인 채로 있었다. 그는 시신을 밖으로 끄집어내어 염을 풀었다. “휴!” “살았구나. 내 아들 정휴가 살아났구나. 여보, 부인. 그리고 여러분! 우리 아들 정휴가 죽지 않았어요. 살아 있다구요. 아이구! 이 녀석아.”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아직도 반신반의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게 문제가 되진 않았다. 연장도 그대로 팽개 친 채 모두들 집으로 돌아왔다. 정휴는 그날 저녁 신비한 얘기를 시작했다. 죽어서 저승을 보고 온 얘기를 실감나게 얘기했다. 가족들은 물론, 죽었다 살아난 정휴를 보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로 사랑방은 초만원을 이루었다. “제가 죽어 어떤 곳을 가게 되었습니다.

거기에는 대귈 같은 집들이 즐비했는데 웅장한 대문들은 굳게 닫혀 있었습니다. 즐비한 집들을 지나니 큰 개울이 있었습니다. 그곳 사람들은 그 개울을 삼도천이라 불렀습니다. 삼도천을 건너니 개울 저편에 한 무사가 칼을 들고 제게 옷을 벗으라 했습니다. 저는 하는 수 없이 옷을 벗었지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모두 벗어 다리 건너 길 옆에 서 있는 커다란 나무에 걸었습니다.

알몸으로 얼마 동안 걷다 보니 앞에 또 하나의 마을이 있었는데 집들은 모두 우람하게 지어져 있었습니다. 마침 한 대문 앞에 어떤 젊은이가 알몸으로 앉아 있는 게 눈에 띄었습니다. 가까이 가서 그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고는 하마터면 저는 소리를 지를 뻔했습니다. 바로 우리 이웃 마을에 사는 이규진 씨의 아들 근홍이었기 때문입니다.” 얘기를 듣던 사람들은 모두 놀랐다. “뭐? 근홍이가 거기에 있었다구?” “예, 그렇습니다.

분명히 그는 제 절친한 친구 근홍이였습니다. 제가 근홍이를 알아보지 못할 리 없잖습니까?” “그야, 그렇지, 자네하고는 불알 친구인데다 같은 서당에서 공부한 동문이 아니던가. 아무렴, 당연하지. 암.” “근홍이가 제게 말했습니다.(너, 정휴 아니냐? 네가 여기에 어쩐 일이야?) 제가 말했습니다.(그래, 나는 정휴일세. 그런데 자네는 웬일인가? 왜, 여기 이렇게 처량하게 혼자 앉아 있느냐고?) 근홍이는 제가 아직 이곳에 올 때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저승사자들이 잘못 알고 잡아 온 것이라고도 했습니다. 그 친구는 제게 염라대왕을 친견하게 해주겠다면서 저를 데리고 그 문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곳은 이 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무시무시한 곳이었습니다. 험상궂게 생긴 무사들이 도열해 있었고 그들은 모두 창이나 칼 또는 채찍을 들고 있었습니다. 그들 사이를 빠져서 안쪽 깊숙이 이르니 넓은 광장이 나타났습니다.

사방은 온통 촛불로 무 늬를 이루었고 광장 한복판에는 분수대가 있었습니다. 분수에 서 뿜어져 나오는 물은 온통 보랏빛이었습니다. 분수대를 돌아 더 들어가니 거기 웬 노인이 앉아 있는데 얼른 보기에도 그는 염라대왕이 분명했습니다. 근홍이와 저는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노인은 제게 이름을 물었습니다.

제가 이름을 대자 노인은 사자들을 부르더니 호되게 꾸짖었습니다.(이놈들아! 이 젊은이는 아직 올 때가 안 되었는데 어째서 데려왔느냐? 당장 이 젊은이를 내보내고 다른 사람을 잡아 오너라. 빨리 가거라) 노인은 흰 수염을 어루만지며 내려오더니 제 손을 덥썩 잡으며 참으로 미안하다고 했습니다.

부하들이 잘못 알고 그리 된 것이니 양해하라며 거듭 머리를 숙였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우리 애들이 잘못해서 그리 된 것이니 과히 허물치 마시게나. 여기는 자네처럼 착한 일을 한 사람이 올 곳이 아니야. 그리고 설사 왔다고 하더라도 우린 반드시 내보내네. 인간세상에 돌아가거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인과의 도리를 많은 사람들에게 깨우쳐 주기 바라네. 미안하이, 어서 가게나.

그리고 너 이 근홍 너는 네 친구를 여러 군데 안내해서 구경을 시켜 주고 속히 돌아오너라. 만약 지체할 시는 네 죄가 더욱 커지리라) 저는 근홍이와 함께 염라대왕 앞을 물러나왔습니다. 그는 저승의 여러 곳을 구경시켜 주었습니다. 마치 박람회장을 돌아보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많은 부담을 느꼈습니다.” 사람들은 정휴의 말을 들으며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이윽고 정휴 어머니가 말했다.

“그래, 어떤 부담이 있었느냐?” 정휴는 좌중을 한 번 돌아보고 말을 계속했다. “천국과 지옥을 고루 구경시켜 주었는데 천국은 착한 일을 한 사람이 가서 태어나는 곳이었고, 지옥은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이 죽어서 가는 곳이었습니다. 인과의 도리가 너무나도 명백하다는 데에 대한 심적 부담이었습니다. 하여간 구경을 다 마치고 나니 근홍이가 제게 말했습니다.(정휴, 자네는 훌륭한 사람이니 죄를 짓지 않았겠지만 앞으로도 행여 죄를 지어서는 안 되네. 나는 인간세상에 있을 때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이곳에 온 것일세.) 제가 말했습니다.(어떤 죄를 지었는데?) 그가 말했습니다.(나는 나의 숙부에게 돈 백 원을 꾸었었네. 내가 좋아하는 여자아이가 있었는데 어떻게 하다 보니 결혼도 하기 전에 그만 덜컥 임신을 시켰지 뭔가.

그래서 그 일을 처리하기 위해 숙부에게 돈을 빌렸지. 하지만 경제력이 없는 나로서는 갚을 길이 막막했다네. 해서 숙부의 약점을 잡아 돈을 갚지 않기로 했지. 그런데 어느 날 우리 숙부가 이웃 마을 유부녀와 그렇고 그런 사이임을 직접 목격하게 되었네. 나는 그것을 약점으로 잡아 숙부를 협박했고 급기야는 숙부가 보낸 사람에 의해 피살되었네. 그러한 일로 우리 숙부도 2년 전에 이곳에 왔고, 또 숙부가 보낸 사람은 아까 염라대왕이 잡아들이라고 한 사람이라네.)(음! 그렇게 되었군 그래.)(부탁이 있네. 자네가 인간세상에 나가거든 이러한 사실을 그대로 얘기하고 나를 위해서 재를 베풀어 주게나. 절에 가서 재를 베풀어 부처님과 스님네를 지성껏 공양하고 부처님의 경전을 읽어 주면 내 죄가 조금은 가벼워질 걸세. 명심하게나. 스님네에게 보시를 많이 해야 내 죄가 가벼워지네. 어서 가게) 그렇게 해서 저는 다시 환생하게 된 것입니다.” 정휴의 얘기를 듣는 사람들은 모두들 손에 땀을 쥐었다.

정휴는 사람들과 함께 이웃 마을 상서리로 이규진 씨 댁을 찾았다. 그리고 얼마 전 자신이 겪은 저승의 얘기를 털어놓았다. 이규진 씨는 근홍이의 죽음과 그의 숙부의 죽음, 그리고 근홍이의 숙부가 부리던 하인의 죽음을 두고 인과의 도리가 너무나도 역연한 데 놀랐다.

그들은 죽은 아들을 위해 문수암에 올라가 큰 재를 베풀고 스님네에게 공양하였다. 목련존자가 그의 어머니를 지옥에서 구원키 위해 스님네에게 재를 베풀어 공양 한 것처럼 성대하게 치렀다. 재가 끝난 뒤, 어느 날 정휴의 꿈속에 근홍이가 다시 나타났다.

그가 말했다. “나는 정휴 자네가 베풀어 준 덕으로 염라국을 벗어나 도리 천궁에 태어나게 되었네. 자네도 앞으로 45년 뒤에는 이곳 도리천궁으로 오게 되어 있네. 참으로 고맙네.” 꿈을 깨고 난 정휴는 머리를 흔들면서 정신을 차렸다.

그는 부처님의 경전 구절을 음미했다. 선의 열매가 익기 전에는 선한 사람도 재앙을 받는다. 선의 열매가 익은 뒤에는 선한 사람은 복을 받는다. 악의 열매가 익기 전에는 악한 사람도 복을 받는다. 악의 열매가 익은 뒤에는 악한 사람은 재앙을 받는다.

<동봉스님이 풀어쓴 불교설화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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