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과 사명의 신통력

서산과 사명의 신통력

‘서산대사전기’를 보면 사명대사가 서산대사의 제자가 된 동기와 인연이 재미있게 기록되어 있다.

묘향산에는 사명이 주석하고 있었고, 금강산 장안사에는 서산이 주석하고 있었다. 본디 서산대사의 ‘서산’이란 묘향산을 가리키는 말이며, 이는 서산대사가 묘향산에 오랫동안 주석하고 있었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런데 서산대사보다 뒤늦게 묘향산에 들어갔던 사명대사는 서산대사의 명성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았다.

서산대사는 묘향산을 떠나 금강산에 머물고 있다고 했다. “서산대사가 그처럼 뛰어나다고? 어디 내가 한 번 겨루어 보아야지.” 그는 결심을 굳히자 묘향산을 한달음에 내리달렸다. 의복이나 옷매무새는 남루했지만 그 위엄은 대단하여 천하를 압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는 축지법을 썼다. 축지법이란 말 그대로 거리를 축소시키는 법이다.

평안도에서 황해도로, 황해도에서 경기도 동부로, 닷 강원도로 내닫는 사명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평균 시속 60킬로미터를 달리는 사명대사의 축지법인지라 묘향산을 아침에 떠났는데 한낮에 벌써 금강산 입국에 이르렀다. 서산대사보다 스물세 살이나 아래인 사명대사는 자존심을 건드리는 풍문을 처음에는 못들은 척했다.풍문에 의하면 사명대사가 서산대사보다 한 수 아래라느니 어쩌느니 했다.

‘남아 대장부로 태어나 그런 풍문을 듣고 그냥 있을 수야 없지. 암, 차라리 도술을 겨루어서 지든 이기든 분명하게 하고, 만약 지면 깨끗하게 인정하는 게 사나이다운 모습이야.’ 사명대사는 들떠 있었다. 금강산을 오르다 잠시 멈춰 서서 대자연의 빼어남을 감상하였다. 참으로 아름다운 산이었다. 사명대사는 혼자 중얼거렸다. “이처럼 훌륭한 산이 또 있을까. 이곳에서 도술을 겨룬다는 것은 또 얼마나 멋진 추억이 될까. 신출귀몰한 서산대사의 실력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나의 묘기로 그분을 궁지로 몰아넣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해야지.” 금강산 장안사 골짜기는 유달리 아름다웠다.

마침 가을이라 단풍은 절정에 이르렀고 시냇물 소리도 한결 맑게 들렸다. 사명대사는 감탄조로 중얼거렸다. “아, 누가 가을을 일러 황혼이라 했던가. 누가 황혼을 일러 시듦이라 했던가. 가을이 없었다면 어찌 사계의 아름다움을 알며 황혼이 없었다면 삶의 과정을 어찌 이해할 수 있으리.” 사명대사가 계곡을 오를 무렵, 서산대사는 굴리던 염주를 멈추고 상좌에게 말했다.

“이 길로 내려가 묘향산에서 오시는 사명스님을 마중토록 하여라.” 상좌는 깜짝 놀랐다. 아니, 그 유명한 사명대사가 온다니. 상좌는 마음이 설레기 시작했다. 그러나 마음을 진정하면서 서산대사에게 여쭈었다. “사명스님이 우리 장안사에 오신다는 전갈을 받은 적이 없는데요, 스님.” “허허, 골짜기를 내려가다 보면 냇물이 거꾸로 흐르는 곳이 있을 것이니라. 그것은 사명대사가 올라 오시고 있는 증거니라. 어서 속히 영접토록 해라.” 상좌는 고개를 갸웃했다.

‘물이 거꾸로 흐르다니, 아무래도 이상한 일이야. 그나저나 큰스님은 참으로 대단한 분이셔. 만약 정말로 사명스님이 오신다면 큰스님께서는 앞일을 내다보시는 게 분명해.’ 상좌는 서산대사에 대한 존경의 염을 더했다. 그는 절문을 나서며 혼자말처럼 말했다. ‘정말 사명대사가 오시는 걸까? 아니면 서산 큰스님께서 나를 시험하시려는 것은 아닐까?’ 평소에 그리 흔치 않던 서산대사의 분부인지라 상좌는 한편 의아해 하면서도 골짜기를 내려갔다. 얼마쯤 내려가던 상좌는 깜짝 놀랐다. 비탈길 아래 흐르는 계곡물이 분명 거슬러 올라오고 있었다.

상좌는 고개를 두리번거려 사명대사를 찾았다. 과연 저만치 스님 한 분이 늠름하게 올라오고 있었다. 상좌는 그가 사명대사임을 한눈에 알아봤다. 풍문에 듣던 대로 긴 수염을 가슴까지 늘어뜨리고 있었다. 상좌는 서산대사의 예지에 다시 한번 감격하면서 그 스님 앞에 공손히 합장했다. “어서 오십시오. 사명대사님.” 사명대사는 깜짝 놀랐다. 온다는 기별도 하지 않았고, 또 난데없이 웬 젊은 상좌가 자기를 기다리다 이름까지 알아맞추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어떻게?” 사명대사는 더 긴말을 하지 않았다. 상좌에게 내심 놀라는 상황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먼 길에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겠습니다. 저는 서산 큰스님의 상좌이옵고, 큰스님의 분부 받자와 사명대사님을 마중나왔사옵니다.” “그래, 큰스님께서는 평안하시오이까?” 사명대사는 짐짓 안부부터 물었다.

상좌가 합장으로 답하자 사명대사는 일단 말을 적게 하는 것이 상책이라 생각하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상좌가 앞장을 서 길을 안내했다. 상좌는 소문으로만 듣던 사명대사를 직접 모시게 되니 괜스레 누구에겐가 자랑이라도 하고 싶어졌다. 이윽고 장안사에 이르렀다. 법당문이 열리면서 서산대사가 막 법당을 나서려는 찰나였다. 사명대사는 인사할 틈도 주지않고 공중에 날아가던 참새 한 마리를 잡아 손아귀에 쥐곤 첫 말문을 열었다.

“서산 큰스님, 제 손아귀에 들어 있는 이 참새가 죽을까요? “살까요?” 사명대사는 “죽일까요, 살릴까요”라고 묻지 않고 “죽일까요, 살릴까요”라고 물은 것이다. 사명대사의 손안에 있는 새가 죽고사는 것은 새 자체에게 있는 게 아니라, 그것은 전적으로 사명대사에게 달려 있었다. 이도 저도 택하기 어려운 질문 앞에 서산대는 태연히 입을 열였다. “허허, 사명대사. 이 빈도의 발이 지금 한 발은 법당 안에 있고, 또 한 발은 법당 밥에 있는데 이 몸이 밖으로 나가겠는가, 안으로 들어가겠는가?” 이 또한 난처한 물음이었다.

역시 들고 나는 것은 서산의 마음 여하에 달려 있었다. 안으로 든다고 하면 한 발을 마저 밖으로 내놓을 것이요, 밖으로 난다고 하면 다른 한 발을 안으로 들일 것이었다. 사명은 생각했다. “어서 답해 보시게, 사명.” 사명은 대답했다. “그야 밖으로 나오시지요. 멀리서 객이 오는데 밖으로 나오심이 당연한 도리 아니겠습니까?” “잘 맞주셨네. 사명. 그대가 그 먼 길을 한달음에 달려 오셨는데 어찌 문밖에 나아가 영접하지 않겠는가.” 이미 모든 문제가 해결된 듯 서산대사는 사명을 어서 올라오라 손짓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명대사는 아직도 손에 참새를 쥐고 있기에 명확한 답을 듣고 싶었다.

사명대사가 말했다. “고맙습니다, 큰스님. 하오나 이 참새는 어찌 되겠는까?” 서산대사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불도를 닦는 분이 어찌 무단살생을 하시겠는가” “과연, 큰스님께서도 맞추셨습니다.” 당대 두 고승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사명대사는 자기가 온 사유를 말하고 이번에는 도술로 겨루어 보자고 했다. 사명대사는 자신이 지고 온 바랑에게 바늘이 가득 담긴 그릇을 꺼내 놓았다. 그는 가부좌를 하고 선정에 들었다. 그리고 한참 바늘을 응시했다.

잠시 후 바늘은 먹음직스런 국수로 변해 있었다. 사명대사는 서산대사를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의 표정은 굉장히 자신만만했다. 이를 지커보던 서산대사가 말했다. “스님이 바늘을 국수로 만들었으니, 참으로 장한 도술이시네. 내 마침 시장하던 차인데 그 국수를 먹어도 될는지?” “그렇게 하십시오, 하하.” “그럼” 서산대사는 그릇을 들어 담겨 있던 국수를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잠시 후 서산대사는 입 안에서 바늘을 뱉어 놓았다. 이를본 사명대사는 내심 크게 놀랐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은 채 이번에는 계란을 꺼냈다. 사명대사가 말했다. “이번에는 제가 계란을 쌓아 보겠습니다.” 그리고는 계란을 한 줄로 쌓아올렸다. 이를 끝까지 지커본 서산대사는 그 계란을 하나하나 떼 내어 위에서부터 한 줄로 쌓아 내렸왔다. 사명대사는 초조해졌다. “아래서 위로 쌓기도 어려운데 큰스님께서는 위에서부터 아래로 쌓으시는군요. 제가 열세입니다.”

“그럴 리가 있겠는가.” 서산대사는 매우 겸손하게 말했다. 사명대사는 한 번 더 겨루기로 했다. 사명은 하늘을 우러렀다. 그때였다. 구름 한 점없이 맑게 개었던 장인사 골짜기의 가을 하늘에 갑자기 먹장구름이 뒤덮였다. 이윽고 천지를 뒤흔드는 천둥번개와 함께 장대같은 빗줄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지상의 모든 것을 쓸어버릴 듯한 무서운 위세였다. 서산대사가 말했다.

“사명대사는 기분이 좋았다.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이번에는 서산대사의 도술이 뛰어나다 해도 어쩔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사명대사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허허, 뭘요. 큰스님께서는 아마 이 바를 멈추게 하실 수 있으시겠지요. 뿐만 아니라 하늘로 되돌릴 수도 있으시리라 봅니다만…” 사명대사는 이미 내린 비를 어쩔 수 없을 것이라 하여 쐐기를 박은 것이다. 서산대사가 말했다.

“허허, 사명스님이 미리 알아 주시니 고맙기 그지없구려.” “아니, 그러시다면…”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설마 내린 비를 되돌릴 수는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서산대사는 방금 전에 사명대사가 한 것처럼 합장을 하고 하늘을 응시했다. 숨막히는 순간이 흘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토록 줄기차기 퍼븟던 빗줄기가 하늘로 하늘로 거슬러 올라갔다. 풀잎과 나뭇잎에 내렸던 빗방울도 하늘을 항해 날아올랐고 장안사 골짜기를 메우고 흐르던 급류도 모두 빗방울로 변해 하늘로 하늘로 날아올랐다. 뿐만이 아니었다.

그 빗방울들은 모두 아름다운 새로 변하여 창공을 날았다. 다시 맑게 개인 하늘에는 아름다운 새의 지저귐과 환희로 가득했다. 사명대사는 서산대사 앞에 긴 수염을 펄럭이며 선뜻 무릎을 끓었다. “서산 큰스님, 진작 알아뵙지 못했습니다. 과연 큰스님은 만천하의 스승이십니다 그간 저의 교만함을 꾸짖어 주십시오. 이몸 비록 미약하나마 큰스님의 가르침을 이어 가고자 하오니 저를 제자로 삼아 법도에 이르도록 가르침을 주시옵소서.” 사명대사는 눈물을 흘리며 제자가 되길 간청했다.

서산대사도 마음이 흡족했다. “진정 그러하다면 나 또한 즐겁지 않겠는가. 그대같이 훌륭하고 슬기로운 자를 제자로 맞게 되었으니, 기쁘구려.” 그들은 합장한 채 오래도록 부처님 앞에 서 있었다. 그날부터 사명대사는 서산대사의 수제자가 되었다.

<동봉스님이 풀어쓴 불교설화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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