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쪽 귀가 없는 정취보살
“부인, 말 좀 물읍시다.” 지나던 여인은 걸음을 멈추고 합장한 채 스님 앞에 공손히 섰다.
“여기서 덕기방으로 가려면 어느쪽으로 가야 합니까?” 부인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글쎄요, 제가 알기로는 덕기방이라는 고장은 없는데요. 제가 이곳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잔뼈가 굵었습니다만, 처음 들어보는 이름입니다.” 스님은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렇군요. 으음, 나무관세음보살.” 부인이 말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이름도 다 있네요.” “이상하다니요?” “우리 딸 이름이 덕기입니다. 스님이 찾고 계신 고장 이름과 똑같지 않습니까?” “그랬군요. 아, 아.” 스님은 부인의 얘기를 자세히 들었다.
이 고장의 지리와 풍속과 생활환경 등은 그 전에 외귀스님에게 들은 그대로지만, 마을 이름은 그런 이름이 없었다. 스님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사굴산 파의 개조인 범일국사였다. 외귀스님은 이름은 알 수 없으나 글자 그대로 한쪽 귀가 없는 외귀에서 비롯한 별칭인데 당나라 명주의 개국사 낙성대법회에서 만난 스님이다.
태화연간(827-835)은 신라 흥덕왕 2년에서 9년까지 해당한다. 낙성대법회에는 중국의 고승과 신도들은 물론 신라의 고승 대덕과 불자들도 수만 명 참석했다. 이날 법회가 끝날 무렵이었다. 말석에 앉아 있던 한 스님이 범일스님 곁으로 다가왔다. 한 쪽 귀가 없는 스님이었다. 그가 말했다. “스님, 혹시 신라에서 오신 분이 아니신가요?” “그렇습니다. 해동 신라에서 왔습니다.
무슨 일이신지요?” “부탁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그러면서 머뭇거렸다. “말씀하시지요. 무슨 부탁이신지.” 범일스님이 다시 묻자 그는 말했다. “소승은 신라와 접경지대인 명주계 익명현, 즉 평양 덕기에 살고 있습니다. 부탁이란, 스님께서 귀국하시면 꼭 한 번 저를 찾아 주셨으면 하는 것입니다.” 범일이 대답했다.
“그리 어려운 부탁도 아니시군요.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 스님은 확인이라도 하듯 거듭 다짐을 받고 한 쪽 귀가 없는 자기를 잊지 말아 달라고까지 했다. 그가 이어 말했다. “감사합니다. 그곳에 오시면 반드시 좋은 일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불연이 있어 말세 중생의 복전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더욱이 찾아 뵙겠다고 범일은 대답했다.
범일은 반가웠다. 이국땅에서는 고향의 까마귀라도 반가운 법이라고 하지 않던가. 하물며 같은 인간이면서 같은 불제자이지 않은가. 둘은 십년지기나 된 듯 많은 얘기를 나누고 헤어졌다. ‘귀국하면 꼭 한 번 찾아봐야겠군.’ 범일은 여러 조사들과 스승들을 찾아다니며 불법을 익혔다. 마침내 공부가 익어 제안선사인 염관에게서 법을 이어 받고 대중 원년인 847년, 즉 신라 문성왕 9년에 신라로 돌아왔다.
귀국하자마자 범일스님은 사굴산사를 창건하고 사굴산파를 크게 부흥시켰다. 사굴산파란 구산선문 중의 한 파로 신라인들에게 감로의 범음을 전하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중생교황에 여념이 없던 범일스님은 당나라에서 만난 외귀스님과의 약속을 까마득하게 잊어버렸다.
그렇게 10여 년이 지났다. 헌안왕 2년(858), 2월이 보름날 밤이었다. 범일스님은 이상한 꿈을 꾸었다. 중국에서 만난 왼쪽 귀 없는 스님이 창문 앞에 와서 말하는 것이었다.
“스님, 저를 잊으셨습니까?” 범일스님이 머리를 긁적이며 미안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 스님이시군요. 중국에서 만난 스님 맞지요?” “예, 맞습니다.” “찾아뵙지 못해 정말 죄송합니다.” “절을 창건하시고 중생제도에 여념이 없으시니 그럴 수도 있는 일이지요.” “정말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지난날 개국사 낙성대법회에서 소승과 언약한 일을 잊으신 것 같아 상기시켜 드리고자 이처럼 찾아온 것입니다.”
“예, 정말 까마득히 잊었습니다.” “좋습니다. 하여간 덕기방에서 꼭 뵈올 수 있는 인연이 있길 진심으로 기대하겠습니다. 소승은 이만 물러갑니다.” “아니, 벌써 가시게요?” 범일스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외귀스님은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범일스님은 꿈을 깨고도 너무나 생생하여 마치 현실인 양 어리둥절했다.
그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 자신을 책했다. 그러나 자책하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안 범일스님은 그 다음날 아침 시자 한 사람을 대동하고 덕기방을 찾아나섰다. 일행이 낙산 밑 어느 마을에 이르러 잠시 쉬면서 사람들에게 덕기방의 위치를 묻고 있을 때 우연히 그 여인을 만난 것이었다. 여인이 말했다.
“제 딸이 올해로 여덟 살입니다. 그애는 이상하게도 같은 또래의 동네 아이들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습니다.” 범일스님이 호기심이 나서 물었다. “그럼, 어떻게 놉니까?” “그 애는 항상 남촌에 있는 냇가에서 혼자 놀다가 돌아오곤 하죠.” “혼자 논다?” “예, 그래서 누구하고 놀았느냐고 물으면 언제나 이상한 얘기만 늘어 놓죠.” “이상한 얘기라니요?” 범일스님은 점점 호기심이 일었다.
“예, 참으로 이상한 일이지요. 금색동자하고 놀았대요. 그 금색동자가 누구냐고 하면 온몸이 황금으로 된 남자아이라지 뭡니까. 남녀가 유별한데…” “허!” 범일스님이 호기심을 보이자 여인은 말을 계속했다. “우리 딸 아이는 그 금색동자와 놀면서 매일같이 글을 배운다고 합니다.” “글을요?” “예, 스님.” “부인, 부인의 딸을 좀 만날 수 있을까요? 부탁합니다.”
“예, 그렇게 해 드리지요.” 말을 마치기 무섭게 부인이 앞서면서 길을 안내했다. 부인의 딸 덕기라는 여자아이는 매우 귀엽고 예쁘게 생겼다. 덕기는 제 엄마의 말과 똑같이 대답했다. 범일스님은 덕기에게 안내를 부탁했다. “얘야, 나를 그곳으로 안내해 주렴.” 고개를 끄덕인 덕기가 깡총거리며 앞장을 섰다.
남촌 시냇가에 이르러 돌다리 밑을 살펴보니 부처님 형상이 나타났다. 황금색의 돌부처였다. 불상을 살펴보던 범일스님은 자기의 눈을 의심했다. “아니, 이 분은?!” 부인과 덕기가 범일스님의 놀라는 표정을 보며 물었다. “무슨 일이 있으신지요?”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그저…”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중국의 개국사 낙성대법회에서 만난 외귀스님과 너무나도 닮은 부처님 형상을 보고 내심 경탄을 금하지 못했다. 더욱이 그 불상은 왼쪽 귀가 없었다. 범일스님은 부처님께 절을 올렸다. 시자도 따라서 절을 올렸고 부인과 덕기도 덩달아 절을 했다. 그때 물 속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나는 정취보살이니라. 낙산사에 가면 내가 안치될 수 있는 자리가 이미 마련되어 있느니라. 나를 그곳으로 옮기거라. 오늘에야 비로소 인연을 만나 내 거처할 장소로 옮겨 앉게 되었구나.” 그 소리에 일행은 다시 한번 놀랐다. 그러나 무엇보다 덕기가 칭얼대며 아쉬워했다. “스님, 그 금색동자는 제 동무입니다. 개가 없으면 전 어떻게 하지요?” 우는 덕기를 달래느라 일행은 진땀을 흘렸다. 범일스님이 돌부처를 모시고 낙산사에 이르니 관세음보살 옆에 빈 자리가 하나 있었다.
그 빈 좌대에 안치시키니 미리 만들어 놓은 듯 한치의 오차도 없이 꼭 들어맞았다. 보살상이 안치되자 법당 안에는 오색의 서기가 어리면서 성스러운 향내가 가득했다. 의상대사가 관음굴에서 들은 관음보살의 말씀대로 정취보살이 되돌아온 것이다.
범일스님은 120여 년이나 앞서 살다 간 의상대사의 말씀을 되새기면서 부처님의 인연이 얼마나 소중한 가를 새삼 느꼈다. 범일스님은 신라 문성왕(839–856) 때 활약한 고승이다. 일명 품일이라고도 하는데 태화 연간에 입당하여 명주 개국사 등지에서 마음을 배우고 문헌왕 9년에 귀국, 신라에 처음으로 교외별전의 선을 전했다.
그는 굴산조사라는 명칭 외에 도불산에 주석하면서 후학들을 제접하였기에 그의 문하를 일컬어 도불산문이라고도 했다.
<동봉스님이 풀어쓴 불교설화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