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파스님의 원력

용파스님의 원력

남해의 큰 섬 거제도에는 매일같이 목탁소리가 끊이지 않고 울려 퍼졌다.

주야를 가리지 않고 기도하는 용파스님은 그 자신을 불사르고라고 조선의 불교를 다시 굳건하게 세우고픈 일념이었다. 그가 거제도에 들어온 지도 벌써 백일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그는 염불삼매에 들어 열심히 기도했다. 때로는 침식도 잊고 잠시도 틈을 주지 않고 정진하였다.

그가 그렇게 열심히 기도에 매진하게 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조선 제22대 정조(1776–96 재위) 때의 일이다. 당시는 유교를 국교로 삼고 불교를 배척하는 일이 극에 달해 있었다.

특히 정조대왕 때는 유명한 암행어사가 있었는데 바로 박문수였다. 그의 민정시찰은 매우 공평했으며, 서릿발 같은 날카로움으로 지방관료들은 박문수가 나타났다 하면 사시나무 떨듯하였다.

그가 사불산 대승사에 이르렀을 때, 마침 젊은 스님네들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장기를 두고 있었다. “장 받아라, 상장 받아라.” “상장이라구?” “보라구 상장 아니야 상장.” 곁에서 훈수를 들고 있던 스님이 수세에 몰리고 있는 편을 거들었다.

“이 마로 상을 치고 차로 도리어 장을 부르면 되잖아. 자 차장 받아라.” 승리가 눈앞에 놓였다고 생각한 스님이 훈수를 들고 있는 스님을 향해 눈을 부라리며 씨근거렸다. “왜 다된 밥에 재를 부리고 있어. 재수 없게스리. 에잇 더러워.” “뭐, 재수가 없다구? 더럽다구?” 그리하여 장기를 두던 스님네들은 한판 붙게 되었다.

한참 씨근거리며 상스러운 말이 오가는 것을 보고, 박문수는 법당 앞에 이르러 법당을 향해 소변을 보았다.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수도하는 중이 염불하고 참선을 해야 하는 건데. 원 이건 말세로군. 그리고 공부가 익은 중이라면 중생교화에 나서야 되는 거 아니야. 어디 두고보자. 어떻게든 나오겠지.’ 박문수가 오줌을 누고 있는데 장기를 두던 한 스님이 냅다 소리쳤다.

“거 뉘신지는 모르나 그래도 점잖은 분 같은데, 법당 앞에서 실례를 하다니 좀 무례하지 않소이까. 도대체 뉘시오?” 박문수가 시치미를 떼고 말했다. “여기가 부처님을 모신 법당이었소? 난 또 마구간인 줄 알고 그랬지.” “마구간이라니? 법당에 불상이 모셔진 게 보이지도 않소이까?”

“아, 내가 가만히 들어 보니 말이니 상이니 하는 것들이 오락가락합디다. 그러니 마구간으로밖에 더 알겠고? 만일 부처님을 모신 도량이라면 염불소리가 난다든가 경을 읽는다든가 참선을 해야 되는 거 아니든가요?” 박문수한테 따지고 들던 스님네들은 할 말을 잊어버렸다.

박문수가 말했다. “앞으로는 이렇게 추한 모습을 보이지 마시오. 만일 그러지 않으면 크나큰 봉변을 당할 것이외다.” 그렇게 해 놓고 박문수는 나라에 이러한 사실을 품하였다. “지금 전국의 사찰에는 무위도식하는 중들이 들끓고 있습니다. 염불이나 간경, 참선을 하고 있어야 할 중들이 장기나 두고 싸움질이나 하고 있으니 한심한 일입니다.

이들에게 일거리를 주어 놀고 먹는 자들이 없게 해야 할 줄로 삼가 아뢰나이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정조는 전국 사찰에 영을 내렸다. “앞으로 모든 사찰에서는 종이를 뜨고 산자에 잣을 곁들인 잣박산을 만들어 올리도록 하라. 만일 무위도식하는 승려가 있을 시에는 어명으로 엄히 다스리겠노라.”

그래서 남도지방의 절에서는 종이를 떠서 진상하고 금강산을 비롯한 산간의 사찰에서는 잣박산 따위를 만들어 진상하였다. 심지어는 지방의 양반으로 행세하는 작자들까지 스님네에게 족보용 종이를 대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또 일부 잔칫집에서는 잣박산을 비롯한 유과를 올리라고 하기도 했다. 일이 이쯤 되고 나니 정말 공부를 하고자 하는 스님네들도 부역에 시달리느라 경을 읽고 참선을 할 틈이 없었다.

그래서 뜻 있는 사람들은 환속해 버리는 일까지 생겼다. 한편 이러한 상황을 본 용파스님은 정조대왕에게 상소를 올리기도 하고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여 스님들의 부역을 중지시키려 했으나 허사였다. 임금에게 상소문이 올라가지도 못하고 밑에서 모두 개봉되어 불살라지곤 했던 것이다. 부처님의 가피로 이 어려운 난국을 타개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는 거제도에 들어가 기도를 시작했던 것이다.

처음에 거제도를 향하여 떠날 때 백일 동안 먹을 양식만 준비했다. 준비해 간 양식도 떨어지고 백일기도가 끝났지만 들리는 소식은 여전했다. 여전히 스님네가 종이를 뜨고 잣박산을 만들어 지방의 관료들과 나라에 진상하느라 엄청난 고통을 치르고 있었다.

용파스님은 생각했다. ‘내 죽는 한이 있더라도 힘을 얻지 못한다면 이곳을 나가지 않으리라. 나가면 어차피 종이 뜨는 일이나 해야 할 것이다. 나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스님네에 대한 나라의 대우가 달라지지 않는 한 이곳을 나가지 않으리라. 언젠가는 힘도 얻고, 부처님의 가피력으로 소원이 성취될 것이다.’ 이제는 쌀 한 톨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나 용파스님은 오로지 염불기도에만 전심전력하였다.

그러던 중 하루는 어떤 노인이 나타나 용파스님에게 물었다. “미련한 스님이시구려. 그렇게 기도한다고 해서 누가 알아주기나 할 것 같소이까?” 용파스님이 대답했다. “이제는 누가 알아주고 말고를 떠나 오로지 힘을 얻고 소원을 성취하고자 할 따름입니다. 이제 소승은 모든 것을 부처님께 맡겨 버렸습니다.” 노인이 말했다. “그래도 기도를 하려면 주린 배는 채워야 않겠소이까?” “그래야겠지만 당장 먹을 게 없지 않습니까?” 노인이 진지하게 말했다.

“요 아래 바닷가에 나가면 석화가 피어 있을 것이오. 우선 그 석화를 뜯어 자시면 허기는 면할 것이오.” 용파스님이 노인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바닷가로 나가니 과연 석화가 만발하였다. 용파스님은 석화를 채취하여 배불리 먹고 나니 몇 끼니를 굶어도 배가 고프지 않았다. 그렇게 한 사흘을 더 견뎠다. 하루는 엄청난 태풍과 함께 산더미 같은 파도가 밀려왔다 밀려가곤 했다. 파도소리에 놀라 염불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보니 배 한 척이 해변에 닿아 있었다.

바람도 자고 파도도 가라앉자 용파스님은 목탁을 놓고 배에 가 보았다. 그런데 거기에는 소금 한 말과 쌀 두 가마니가 실려 있었다. 용파스님은 차마 그 쌀과 소금을 가져 올 수 없었다. 부처님 계율에 주지 않는 것은 풀 한 포기 바늘 한 개라도 취하지 말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쌀과 소금을 보고도 가져가지 못하는 그의 발걸음은 물먹은 솜마냥 무거웠다. 그런데 누군가 앞에 우뚝 서서 가로막는 사람이 있었다.

그 노인이었다. “스님, 어째서 빈 손으로 오시오?” 용파스님이 대답했다. “주지 않는 것을 취함은 불여취의 계를 범하는 일입니다. 한데 어떻게 가져 올 수 있겠습니까?” 노인이 말했다. “스님의 생각은 장하오만 그러나 그것은 매우 소승적인 사고 올시다. 임자가 없는 것이니 가져다 드시도록 하오.” “하지만…” “이는 부처님께서 스님의 갸륵한 정성에 가피로써 보내 드린 것이니 주저하지 말고 가져다 드시구려.” 노인은 말을 마치고 이내 사라졌다.

용파스님은 뭔가 머리에 스치는 것이 있었다. 그는 쌀 두 가마니와 소금 한 말을 기도 공양미로 생각하고 가져다 놓았다. 그로부터 1년 후, 용파스님은 마침네 신통을 얻었다. 거제도에 들어갈 때는 배를 타고 들어갔으나 나올 때는 바닷물 위를 걸어서 나왔다. 충무 사람들은 이를 보고 용이 파도를 타고 나오는 것과 같다고 하여 용파라고 하였다. 혹은 낭파라고 하기도 했다. 그는 서울로 올라와 물장사를 했다. 남대문 밖에서 물을 길어 광화문 네거리에 와서 팔곤 했다.

그는 임금님을 만나게 되길 진심으로 빌었다. 하지만 벼슬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고 승려를 천시하던 때여서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3년이 흘러갔다. 그는 언젠가는 임금을 만나뵐 수 있으리라는 신념을 단 하루도 버린 적이 없었다. 마침내 소원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어느 날 정조가 무예청 별감을 대동하고 민정시찰을 나가던 중이었다. 그런데 한강 쪽에서 오색구름이 일고 있는 게 보였다.

그것은 마치 용이 여의주를 놓고 희롱하듯 서로 엉기고 뒤틀려 올라가는 것이었다. 정조가 말했다. “저기 저것이 무엇이더냐?” 별감이 정조임금이 가리키는 쪽을 보니 서기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아무래도 좋은 징조인 것 같사옵니다, 전하.” 별감이 허리를 굽혔다. “별감은 지체말고 달려가 그 서기가 뉘 집에서 왜 일어나는지 소상히 알아 보고하도록 하라.” “황공하여이다,

전하.” 별감은 서기가 일고 있는 방향을 향해 달려갔다. 그 빛은 다 쓰러져 가는 오두막에서 나오고 있었다. ‘참 별일도 다 있군. 이처럼 가난한 집에서 서기가 일고 있다니.’ 그렇게 생각하면서 별감은 문을 두드렸다. 방안에는 웬 노인이 덥수룩한 모습에 누더기 옷을 이불삼아 덮고 누워 있었다. 별감이 말했다.

“노인장은 뉘시오?” 노인이 대답했다. “시골에서 올라온 승려외다. 이름은 용파라고 하지요.” 별감이 말했다. “스님이 이런 누추한 곳에서 뭘 하고 계시오이까?” 용파스님은 전후사정을 모두 얘기하고 정조대왕을 한 번 뵙고 싶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별감은 용파스님을 정조대왕에게 안내했다. “그래, 서기가 방광하는 것으로 보아 보통 중은 아닌 듯한데 나를 만나고자 하는 까닭이 무엇인고?” 용파스님은 허리를 궆혀 예를 올리고 조용하면서도 아주 냉정하게 말했다. “황공하옵니다, 전하. 소승이 대왕님을 뵙고자 함은 다름이 아니옵니다. 수년 전부터 이 나라 모든 사찰에 부역을 내리시어 수도승들이 공부할 짬이 없사옵니다. 불교는 역사 이래로 나라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 왔던 게 사실입니다.

하오나 몇몇 무위도식하는 승려들로 인해 전체 사찰의 불교승려들이 공부할 틈도 없이 부역에 시달린다면 장차 이 나라의 정신적 지주를 잃는 것이 되옵니다. 사람 중에는 잘난 사람도 있고 못난 사람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승려 중에서도 게으른 자가 있는가 하면 부지런한 자도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통촉하옵소서.” 정조가 끝까지 다 듣고는 자세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그대의 말을 듣고 보니 일리가 있도다. 내 그 일을 시정할테니 염려하지 않아도 좋으리라.” “황공하여이다, 전하.” “하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느니라.” “하교하옵소서, 전하. 어떠한 조건이옵니까?” “나는 이미 나이가 많아 앞으로 얼마나 더 정사를 돌볼지 알 수가 없도다. 그런데 왕통을 이을 자손이 없으니 주야로 근심이 깊도다. 그대는 어떤 방법으로든 나에게 왕자를 보게 해달라. 이것이 조건이니라.” 조건 가운데 가장 어려운 조건이었다. 용파스님이 말했다. “전하, 전하께서는 반드시 그 소원을 이루실 것이옵니다. 자고로 부처님 전에 지극한 정성으로 기도하며 성취하지 못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저 혼자서는 어렵사오니 소승의 도반인 농산과 함께 기도하게 하여 주옵소서.” “좋다. 그대의 뜻대로 하라.” 용파스님은 당당하게 말했다. “전하께서는 원하시는 바는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오나 전하께서 협조하여 주옵시면 그 일이 더욱 빠를까 하옵니다.” “내가 왕자를 얻고자 함인데 무엇인들 돕지 못하랴. 그래 그 협조란 것이 무엇인고?” “황공하여이다, 전하. 소승이 기도하는 동안 전하께서도 기도하는 마음으로 불교를 옹호하시고 그 가르침을 전하는 승려를 보호하여 주옵소서.” “그것은 국법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더냐, 허허 참.” “특별히 표시를 내어 협조해 주길 바라는 것이 아니옵니다.

전하의 마음이 중요할 따름이옵니다. 옛말에 밥도 본인이 먹어야 배가 부른 거시요, 남 먹는 것만 보고 있어서는 배가 불러오지 않는다 하였사옵니다. 전하께서 왕자를 진실로 원하실진대 소승의 간청을 물리치지 마옵소서.” 그렇게 해서 용파스님과 농산스님은 3백 일을 기한으로 정하고 기도에 들어갔다. 용파스님은 수락산 내원암에서 기도를 했고 농산스님은 삼각산 금선암에서 불철주야 정진을 했다. 물론 승려가 종이를 만들어 나라에 진상하는 폐습도 없어졌고 잣박산을 만드는 일도 없어졌다.

그러나 다른 사람도 아니요, 왕자를 낳게 하는 기도는 그리 쉬운 게 아니었다. 더욱이 왕자가 되려면 무한한 복덕을 지은 자라야 가능한 것이다. 용파스님은 ‘범망경’의 말씀을 떠올렸다. ‘왕자로 태어나는 것은 여간한 복덕이 아니다. 보살행을 무수히 닦은 자라야 왕자의 몸을 받아날 수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용파스님은 삼매에 들어 혜안으로 살펴보았다. 왕자로 태어날 자격을 갖춘 사람이 흔치 않았다. 농산스님이나 자신이 아니고는 불가능함을 알았다.

그러나 용파스님은 불상조성이다 사원건축이다 해서 벌여 놓은 불사가 너무나 많았다. 대신 농산스님은 일단 불사가 없었다. 용파스님은 농산스님에게 편지를 썼다. “우리가 다같이 임금의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하여 전국 사찰의 부역에 대한 폐습도 없어졌습니다. 한데 임금께서 모처럼 바라시는 바를 우리가 들어드리지 못한다면 백성된 자의 도리가 아닌 것 같습니다. 미안하기는 하지만 스님께서 궁중에 전생하여 왕자로 태어남이 어떠하오? 내 마땅히 해야만 할일이오나 벌여 놓은 불사가 너무나도 많아 그러하오니 스님께서 살피시기 바랍니다.”

금선암에서 기도정진하던 농산스님은 용파스님의 글월을 받고 망설였다. 견성성불을 목표로 하는 수행자가 부처님께서도 헌신짝 버리듯 차 버린 왕자의 자리를 자청한다는 것이 본의가 아니었기 대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생각했다. ‘내 한 생을 늦추는 한이 있더라도 조선의 불교를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구나. 내가 왕자로 태어나는 수밖에.’ 그는 답장을 썼다. 용파스님의 부탁대로 왕자로 태어나겠다는 답신이었다. 그들은 다시 기도에 들어갔다. 3백 일의 기도가 끝날 무렵이었다.

하루는 정조대왕이 꿈을 꾸니 꿈속에 한 스님이 나타나 말했다. “소승은 삼각산 금선암에서 전하의 왕손을 빌던 농산이라는 사람입니다. 저와 같이 기도하는 용파스님의 권유로 상감마마의 대를 이어 왕자로 태어나고자 왔사오니 물리치지 마옵소서.” 정조대왕은 꿈을 깨고도 그 꿈이 하도 선명하여 왕비에게 그 전말을 얘기했다.

그런데 왕비도 똑같은 꿈을 꾸었다는 것이다. 임금은 사람을 시켜 금선암에 보내어 사실을 알아보게 하였다. 과연 농산스님이 3백 일 기도를 마치던 날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보고답은 정조임금은 쌀과 온갖 비용을 넉넉히 보내어 농산스님의 장례를 치르도록 주선했고 용파스님에게도 큰 상을 내려 그 공적을 치하했다. 얼마 후 왕비가 잉태했고 그리하여 태어난 이가 정조의 뒤를 이으니 순조임금(1800–34 재위)이었다.

그러므로 순조임금의 전생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삼각산 금선암에서 기도정진하던 농산스님이었던 것이다.

<동봉스님이 풀어쓴 불교설화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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