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장사 장군샘과 희묵스님
(한국지명연역고)(내장산) 조에 의하면 내장사는 본디 영은사라 불렸다.
백제 제30대 무왕 37년(636)에 영은조사가 창건하여 그의 이름을 땄기 때문이라 한다. 내장사라 불리게 된 것은 1938년 매곡선사가 현재의 위치로 옳겨 새롭게 중창하며서 붙인 이름이다. 이 내장사를 중심으로 한 내장산에는 재미있는 설화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데, 다름아닌 장군샘에 관한 것이다. 조선 제13대 명종(1545–67재위) 때의 일이다.
단풍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내장산 영은사에 희묵스님이라는 고승이 주석하고 있었다. 그는 힘이 세기로 천하장사라는 별명이 따라다니곤 했다. 하루는 땔나무를 하러 산에 올랐다. 험한 산세도 산세려니와 울창한 숲은 한낮에도 햇빛을 보기가 어려웠고 또한 산짐승들도 많이 살고 있었다. 낫을 들고 나뭇가지를 쳐 서너 단 했을 때였다.
뭔가 기분이 섬뜩하다고 느낀 희묵스님은 비탈 위를 바라보았다. 시커먼 천연동굴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호기심이 일자 그는 동굴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옳겼다. 내부는 어두웠다. 바로 그때 두개의 불이 동굴 안에서 번쩍 빛났다. ‘아마 눈 큰 놈(호랑이)이 있는 모양이로군. 틀림없어.’ 그렇게 생각한 희묵스님은 오른손에 들고 있는 낫을 더욱 힘주어 잡았다.
여차하면 내리찍을 기세로 살금살금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였다. “어홍.” 집채만한 호랑이가 희묵스님을 향하여 고함소리와 함께 달려들였다. 순간 희묵스님은 새끼 호랑이들을 분명히 보았다. 제새끼를 위해 외부 침입자를 경계하던 어미 호랑이가 모성애의 본능을 발휘하여 달려든 것이다. 그때 벼락 같은 고함이 터져 나왔다.
“이노옴!” 희묵스님의 고함이 얼마나 컸던지 동굴 안이 쩌렁쩌렁 올이며 천정과 벽 쪽에서 바윗조각들이 후두둑 떨어졌다. 달려들던 호랑이가 주춤하고 서 버렸다. 그놈도 분명히 놀란 것이다. 희묵스님 또한 자세 하나 흐트러뜨리지 않은 채 달려드는 호랑이를 피할 생각도 않고 우뚝 서 있었다. 그 다음 순간적으로 희묵스님은 호랑이를 향해 달려들였다. 한 손으로는 호랑이 목을 죄며 다른 한 손으로는 들고 있고 낫등으로 일격을 가했다. 그는 호랑이를 죽일 마음은 애초부터 없었다.
그러기에 낫등으로 내려친 것이다. 호랑이는 다시 한번 비명을 치더니 그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참으로 놀라운 괴력이었다. 마침 그때, 희묵스님이 호랑이와 싸우던 장면을 목격한 사람이 있었다. 영은사 아래 사하촌 사람으로 평소 희묵스님을 존경해 오던 터였는데, 바로 그러한 장면을 직접 보고 나서는 참으로 존경하는 마음을 굳혔다. 희묵스님은 쓰러져 있는 호랑이를 주물러 회생시킨 뒤 호령하였다.
“어서 네 새끼들을 돌볼아라. 그리고 앞으로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사람한테는 덤벼들지 말아라. 알겠느냐?” 호랑이는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새끼들이 기다리고 있는 동굴 저편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 소문이 퍼져 나가자 동네 사람들은 물론 전국 각지어서 승속을 초월하여 희묵스님을 만나 보고자 모여들어 내장산 일대는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또 한 번은 스님이 아랫마을로 시주를 하러 내렸갔다. 마침 동네에서는 큰 황소 두 마리가 서로 뿔을 맞대고 싸우고 있었고 사람들는 그 소를 뜯어말리려 애쓰고 있었다.
이를 본 희묵스님이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앞으로 썩 나서며 말했다. “멀리 비켜나십시오. 가까이 갔다가 행여 크게 다칠지도 모릅니다.”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희묵스님은 황소 곁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는 홯소를 향해 고함을 질렀다.
“네, 이놈! 아무리 축생이기로서니 싸움질이나 해서야 쓰겠느냐? 이노옴!” 싸우던 홯소가 스님이 고함소리에 놀라 잠깐 떨어지는가 싶더니 희묵스님을 향해 한꺼번에 돌진해 왔다. 그러나 희묵스님은 비키지 않았다. 순간, 스님의 두 팔이 동시에 나가든가 싶었는데 어느새 두 손에 각각 황소의 뿔 하나씩을 거머쥐고 재주를 한 번 넘었다. 황소들은 목이 꺾이면서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이 광경을 바라본 사람들은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우와.” “와.” “야, 대단한 괴력이다.” 희묵스님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손을 툭툭 털면서 밖으로 빠져 나왔다. 황소 두 마리는 한참 만에야 버르적거리더니 일어났고 각각 주인의 끌려갔다. 그의 소문은 꼬리를 물고 퍼져 나갔다.
한 번은 호랑이와 대적을 했고 또 한 번은 한꺼번에 황소 두 마리를 대적했으니 소문이 퍼져 나가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그 당시 힘이 세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스님이 또 한사람 있었다. 희묵스님의 일화를 소문으로 들어서 알게 된 그는 은근히 자존심이 상했다. 한 번 겨루어 보고 싶었다. 그리고 희묵스님이 50대인데 비해 자신은 20대 후반이었기 때문에 더욱 자신만만했다.
그의 이름은 희천이었다. 희천스님이 내장산 영은사로 희묵스님을 찾아왔다. “젊은 객승 문안이옵니다. 희묵스님을 친견코자 해서 이렇게 왔습니다.” 보기에도 힘을 좀 쓰게 생겼다. 키는 7자에 가까웠고 몸무게도 어림잡이 2백 근 이상 나갈 듯싶었다. 두 눈은 형형했으며 한 번 사람을 쏘아보면 그 눈빛에 상대방이 얼어 버릴 것만 같았다.
“내가 희묵이오. 어인 일로 나를 찾아오셨소이까?” 희천이 바라보니 희묵스님은 키도 그리 크지 않았고 몸집도 작았다. 하지만 그가 천하장사라는 별명을 지니고 있는 이상 쉽사리 보아 넘길 수도 없었다. “소승, 큰스님 문하에서 공부를 하고 싶습니다. 허락하여 주옵소서. 그리고 큰스님께서는 천하장사라 하시던데 그 또한 전수받고 싶습니다.”
“천하장사라? 허허. 남들이 그렇게 말들은 하고 있지만 나는 수행하는 중일뿐이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오.” 희묵스님은 매우 겸손했다. 그러나 희천스님은 젊은 패기로 희묵스님을 이겨 보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희천은 도저히 희묵스님을 당할 재간이 없음을 알고 진실로 마음을 굽혀 그의 제자가 되기로 마음을 먹었다. 희천스님은 희묵스님이 어떻게 힘을 기르는지 알고 싶었고, 또 배우기로 했다.
하지만 희묵스님은 특별히 운동을 한다거나 체력 단련을 하지도 않았다. 희천은 희묵스님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폈다. 희묵스님은 새벽 예불을 끝내고 나서 어김없이 등산을 했다. 특별히 장비를 갖추고 하는 것이 아니라 평소의 차림새로 등산을 했다. 희천은 희묵스님의 뒤를 밟았다. 영은사 뒷산을 오르는 스님은 나는 듯이 빨랐다.
이윽고 한참을 오른 희묵스님은 산 중턱에서 물을 한 움큼 마시고는 곧바로 산을 내려가는 것이었다. 그 다음 다음날도 희묵스님의 행동은 마치 정해진 길을 오가는 시계추마냥 일정했다.
‘그렇다면 저 샘물에 혹시 힘을 길러 주는 어떤 특유의 성분이 있는 것은 아닐까?’ 희천스님은 그렇게 생각하고 희묵스님의 뒤를 이어 그 샘물을 움켜 마셨다. 그렇게 한 파수가 흘러갔고 다시 한 파수가 끝나 갈 무렵, 희천은 생각지도 않았던 어떠한 힘을 느꼈다. 무엇보다도 물맛이 좋았다. 희천도 전국의 약수터에서 좋다는 물은 다 맞보았지만 내장산 영은사 뒷편의 샘물만큼 맛좋은 약수는 아직까지 없다고 생각했다.
한편 희묵스님은 아무래도 희천의 거동이 수상하다고 생각했다. 그 동안 희묵스님의 뒤를 밟던 희천은 이미 알아낼 것을 알아낸 뒤라 방심하고 있었고, 이번에는 오히려 희묵스님의 미행을 당했다. 희묵스님은 희천이 자기만 알고 있는 샘물을 마시고 있음을 알아냈다. 희천이 막 물을 마시고 있을 때 난데없이 고함소리가 들려 왔다. 스승 희묵스님의 음성이었다.
“네, 이놈, 어찌하여 스승의 허락도 없이 맘대로 샘물을 마시고 있느냐?” 물을 마시는 것이 무슨 죄일까마는 갑작스레 당한 일에다가 스승만이 알고 있는 샘물을 폭로시켰다는 생각에 희천은 송구스런 마음을 어쩔 줄 몰라 했다. 희묵스님은 제자를 시험하기 위해 산봉우리로 올라가 크고작은 돌들을 산 아래로 던졌다.
희천스님 역시 원래 힘이 센데다가 젊은 혈기로 스승이 굴리는 돌들을 모두 받아 차곡차곡 쌓기 시작했다. 지금도 내장사에 가면 그때 희천스님의 받아 쌓았다는 돌무더기가 남아 있다.
하여튼 두 스님은 모두 힘이 세기로 유명했으며 그 힘은 바로 내장사(당시의 영은사) 뒷산에 있는 샘물에서 비롯되었다 하여 그 샘물을 장군샘이라 불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희묵스님와 희천스님은 승병을 진두지휘하여 왜병에 맞서 싸웠으며 승병들은 두 스님을 장군으로 호칭하였다. 그래서 그 산봉우리를 장군봉이라 부르며 그 샘을 장군샘이라고도 했다.
산장에서 희묵스님의 지휘처소였다는 장군바위, 또는 용바위가 있고 산의 북쪽 기슭 밑의 신선대 부근에는 성터의 흔적이 남아 있다. 내장사 주차장이 있는 사하촌 입구에서 왼쪽으로 백양사 가는 같이 있다. 이 고개는 승병들이 주둔던 곳으로 유군치라 불린다. 희묵스님과 희천스님이 바로 이 유군치에서 왜병들을 쳐부수었다. 두 스님은 그들의 왕성한 힘을 이처럼 국수를 수호하는 일에 썼다.
내장사 일대에는 이들의 얘기가 신화처럼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동봉스님이 풀어쓴 불교설화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