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를 낼 줄 모르는 스님

우리 중생들은 누구나 세 가지 큰 병에 걸려있다.

그 세 가지 큰 병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탐내고, 성질내고, 어리석음에 빠지는 일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일찍이 우리에게 삼독심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그것이 곧 성불의 길이라 일러주셨다.

그러나 삼독심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늘 다짐하면서도 순간순간 ‘아차!’ 하는 사이에 삼독심에 빠지고 마는 것이 바로 우리 어리석은 중생이다.

특히 어처구니없는 일, 못된 일을 당했을 때 화를 내지 않기란 참으로 힘든 일이다.

우리가 늘 인욕바라밀을 강조하는 것도 억울한 일, 분한 일, 고통스런 일을 참고 견디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잘 알기 때문이다.

참고 견디는 인욕바라밀이 쉬운 것이라면 우리가 그토록 강조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노스님인줄 뻔히 알면서도 “영감님, 하나님의 은덕으로 오래오래 사십시오.

할렐루야!”하며 놀리고 지나가는 이교도 청년의 뒤에다 대고 합장하며 “감사합니다” 인사했던 스님, 고암 스님.

고암 스님께는 참으로 화내는 일, 성질내는 일이 아예 없었던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고암 스님이 제주도 포교당에 머물고 계실 때에는 이런 일도 다 있었다.

포교당과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병원이 자리 잡고 있었다.

어느 날 아침 고암 스님께서 도량 청소를 하시다 생전 처음 보는 괴상한 물건을 목격하게 되었다.

마당을 쓸던 빗자루 끝에 걸린 괴상한 물건은 노스님의 시선과 호기심을 붙들기에 충분했다.

스님은 저만큼 떨어져서 도량 청소를 하고 있던 제자 선효를 불렀다.

“여보시게, 이것이 대체 무엇인가?”

제자 선효가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세상에! 바로 그것은 옆집 병원에서 누군가가 쓰고 던져버린 불결한 물건이었는데, 스님께 얼른 설명 드리기도 불경스러운 그런 물건이었다.

“이게 대체 무슨 물건인가?”

“아, 예, 저… 이것은 피임용 고무풍선입니다….”

천하에 몹쓸 인간들 같으니라구. 세상에 그래 병원에서 저 상스러운 콘돔을 써먹고 나서 그걸 하필이면 신성한 불교 포교당 마당으로 던졌다는 말인가! 제자는 정말이지 화가 났다.

“도로 저 집으로 던져버릴까요?”

제자가 그렇게 말하며 금방이라도 그 불결한 물건을 집어 던질 듯이 덤볐다. 그런데 고암 스님은 손을 내저어 말리셨다.

“이 사람아, 저 집에서 이쪽으로 던진 것은 우리더러 치워달라고 부탁한 것이지 도로 자기네 쪽으로 던져달라고 한 것이 아닐세.

또 설령 우리가 저쪽으로 던져버리면 저쪽에서는 또 우리가 사용하고 던진 것으로 잘못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야.

그러니 우리가 조용히 치워버리세.”

그러면서 스님은 그 불결한 물건을 손수 치우셨다.

고암 스님은 그런 분이셨다.

절 욕심마저 초탈

욕심을 버린다, 욕심을 버린다, 다짐을 하면서도 도량을 가꾸고 여법하게 도량을 장엄하고, 가능하면 많은 중생들에게 부처님의 자비를 널리 전하고 싶은 욕심, 그것을 우리는 욕심이라 부르지 않고 서원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우리의 고암 스님은 어쩌면 스님으로써의 원초적인 욕심이랄 수 있는 절 욕심마저도 이미 초탈한 그런 분이었다.

경상남도 김해시의 포교당이 빚더미에 몰려 문을 닫을 지경이라는 말을 듣고 고암 스님은 제자 효경과 함께 포교당으로 들어가셨다.

고암 스님이 와계신다는 말이 퍼지자 신도들이 다시 모여들었다.

스님께서는 전심전력 법회를 열고 기도를 붙여 몇 달 만에 포교당이 짊어지고 있던 빚을 깨끗이 다 갚았다.

그래도 스님께서는 돈 지출을 줄이기 위해 엄동설한인데도 방 한 칸에만 연탄불을 피우게 하고 제자와 한방을 쓰면서 정진하셨다.

이제 김해포교당은 누가와도 살만한 형편이 되었는데 이때 부산 범어사 동래포교당이 빚더미에 몰려 문을 닫을 지경이라는 딱한 소식이 전해졌다.

그러니 고암 스님이 오셔서 동래포교당을 구해 주십사 하는 것이었다.

“그래, 여기 이 김해포교당은 이제 누가와도 살만하게 되었으니 동래로 가야지.”

고암스님은 두말없이 동래포교당으로 옮겨 기도법회를 열고, 도량을 정비, 찾아오는 불자들에게 차별 없는 자비법문을 언제나 내려주셨다.

“동래포교당에 도인스님이 와 계신다”는 소문이 번지자 신도들이 다시 모여들었고 그동안 값을 치루지 못해 불상을 빼앗겼던 포교당이 아연 다시 활기를 찾았다.

고암 스님은 동래포교당으로 가신지 얼마 되지 않아 그동안 포교당이 짊어지고 있던 빚을 모두 다 청산하고 활력 넘치는 포교당으로 일으켜 세웠다.

이제는 동래포교당은 누가 와서 살아도 어려움이 없게 되었다.

그러자 또 고암 스님은 미련 없이 동래포교당을 떠나셨다.

절에 대한 욕심과 미련조차도 버려야 한다는 게 고암 스님의 수행관이였던 것이다.

오죽하면 제자들에게 “주지를 하고 싶으면 있던 절 주지 자리를 탐내지 말고 스스로 새로 절을 지어서 주지를 하라”고 당부하셨을 것인가.

평생 밥·빨래까지 손수해

고암 스님은 세수 70이 넘으신 뒤에도 당신의 옷을 언제나 손수 빨아 입으셨다.

상좌나 손상좌가 이것을 뒤늦게 알고 쫓아가 빨랫감을 빼앗으려 해도 스님은 두 바퀴, 세 바퀴 몸을 돌려가면서도 결코 남에게 빨랫감을 맡기는 일이 없었다.

제자들이 곤하게 잠자는 꼭두새벽에 스님은 밖으로 나가 당신의 옷을 손수 빨았는데, 열반에 드시기 직전까지도 이 일만은 그치지 않으셨다.

뿐만 아니라 제자 대원이 미국 하와이에 대원사를 창건할 때에는 고암 노스님이 현지에 머무시며 제자의 사찰창건을 돕고 계셨는데, 불편한 컨테이너박스에서 생활하시면서도 제자들이 자고 있는 한밤중에 미리 일어나셔서 제자들이 먹을 아침공양을 손수 지어 놓으시곤 하였다.

어떻게든, 무슨 일이든 제자의 불사를 도와야겠다는 일념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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