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양(靑陽) 장곡사(長谷寺)에서의 어느 날이었다.
경허 스님이 곡차를 잘 드신다는 소문을 듣고 인근 마을 사람들이 곡차와 파적을 비롯한 안주 여러 가지를 정성껏 마련해 가지고 스님께 바쳤다.
마을 선비들과 술자리가 무르익은 뒤 옆에 앉아 있던 만공 스님이 큰스님의 법문을 듣고자 넌지시 한 말씀 여쭈어보았다.
“스님, 저는 혹 술이 있으면 들기도 하고, 없으면 안 듭니다.
이런 파적도 굳이 먹으려고도 하지 않고, 생기면 굳이 안 먹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스님께서는…..”
할 때 경허 스님이 제자의 말을 끊으며 대꾸하기를 “허어, 자네는 벌써 그런 무애(無碍) 경계에 이르렀는가.
나는 그렇지를 못하여 술이 먹고 싶으면 제일 좋은 밀씨를 구하여 밀을 갈아 김을 매고 가꾸어 밀을 베어 떨어져 누룩을 만들어 술을 빚고 걸러 이렇게 먹을 테야.
또 파전이 먹고 싶으면 파씨를 구하여 밭을 일구어 파를 심고 거름을 주며 알뜰히 잘 가꾸어 이처럼 파적을 부쳐 가지고 꼭 먹어야 하겠네.” 하였다.
이 말씀에 만공 스님은 등에서 땀이 나면서도 오싹해지고, 정신이 아찔하며 자기의 견해가 너무 얕고, 스님의 경지는 하늘같이 높아서 상대가 아님을 알고 스님의 무애 역행(無碍逆行)하시는 도리를 깊이 깨달았다.
어느 날 경허 스님은 만공 스님과 함께 먼길을 나섰다.
어느덧 한낮이 가까워 오고 있었다.
길은 첩첩 산중이고 사람의 집은 눈에 띄지 않는데 시장기가 들기 시작했다.
굽이진 산길을 돌아 어느 산마루턱에 당도하였을 때, 저 쪽에서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곳에 오색 깃발 같은 것들이 늘어져 있었다.
상여의 행렬이 고개 마루턱에서 쉬는 중이었던 모양이다.
스님은 만공 스님을 데리고 장례 행렬 앞으로 다가갔다.
상여 앞에서 합장을 한 다음, 음식을 청했다.
“시장해서 음식을 좀 청합니다.”
“행상(行喪) 길이니 술밖에 더 있나요?”
한 상여꾼이 장난스럽게 대꾸를 하자, 스님은 태연히 말했다.
“술이 있으면 술을, 고기가 있으면 고기를 주시지요.”
사람들이 모두 눈을 크게 떴다.
“아따 참, 원 별 중들 다 보겠네.”
어떤 사람은 빈정거리듯이 산 쪽을 보며 뇌까렸다.
점잖은 한 회장(會葬)꾼이 말했다.
“아니 대사(大師)가 어찌 술을 달라 하시오?
곡차라 하지도 않고.”
스님은 그를 보며 대답했다.
“시장한데 한 잔 하면 되지, 굳이 다른 말할 게 뭐 있겠소.”
사람들은 어이가 없다는 듯 “그렇다면촵촵촵촵촵촵 하고, 술 한 대접을 듬뿍 떠서 내놓았다.
막걸리였다.
경허 스님은 술잔을 받지 않고, 손을 내저었다.
“잔이 너무 작습니다. 차라리 바가지나 동이째 주시오.”
그러나, 기가 막히는 한편 기괴한 흥미를 느낀 군중의 한 사람이 “워디, 동이째 내 줘 봐.”
하고 술이 가득 담긴 동이를 들어 경허 스님 앞에 내 놓았다.
스님은 그것을 단숨에 비워냈다.
처음부터 끝까지 보고 있던 상주(喪主)의 마음이 움직였다.
틀림없이 도(道)가 높은 대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상장(喪杖)을 짚고 스님에게로 가서 공손히 물었다.
“무애행(無碍行)을 하시는 도가 높은 스님들 같사온데 스님들의 자비로움으로 망인(亡人)이신 우리 아버님의 명당(明堂)을 하나 잡아 주실 수 없는지요?”
스님은 느닷없이 큰 소리를 버럭 질러댔다.
“명당은 해서 뭐에 써? 죽으면 다 썩은 고기 덩어리밖에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극진한 대접을 하느라 하면서도 이 말을 들은 상제들은, 별안간 주정꾼의 주사처럼 표변한 걸승(乞僧)의 말투에 어이가 없는데다 울화까지 치밀어 모두 달려 들 형세였다.
둘째, 셋째, 넷째 상제들이 우르르 몰려 들며 기세가 험악했다.
“아니, 워디서 떠돌던 중놈들이 대막대기[喪杖]을 들어 당장에 후려칠 기세였다.
“네 이놈들!”
하며, 스님은 두 팔을 걷어 올리고 딱 버티고 섰다.
스님과 만공 스님은 모두 6척이 넘는 건장한 체구로 위세가 매우 당당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이 뜻밖의 사태를 회장꾼들은 그저 멍청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 때 맏상제가 흥분한 아우들을 헤치고, 다시 앞으로 나섰다.
“스님 말씀이 지당합니다.
‘장자(莊子)의 『남화경』에도 있듯이 사람이 죽으면 까막까치나 구더기의 밥이 되는 것이지요.
우리들이 미흡해서 알아뵙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자손된 도리를 그렇지 못해서요.”
상주는 행상길을 재촉해 떠날 차비를 했다.
잠자코 있던 경허 스님은 중얼거렸다.
“모든 것은 다 허망할 뿐이니, 죽고 사는 것 원래 그러하므로, 만약 모든 것이 참으로 허망한 줄 알면 그대들도 참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일세.”
생멸(生滅)의 실상(實相)을 설(設)할 즈음에, 상여 행렬은 고개를 넘어갔다.
고개 너머로 상여의 구슬픈 소리가 암암히 바람결에 멀어져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