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승에 물려 죽어도 道 구하겠다

부산 .동래 범어사의 하동산(河東山) 큰 스님은

현대한국불교중흥조 가운데 한분이셨다.

동산 스님은 1890년 충북 단양에서 출생, 서울에 있던 경성의전에서

의학을 공부했으나 고모부였던 오세창(吳世昌) 선생의 분부로

백용성(白龍城) 스님을 찾아뵙고 가르침을 구하였다.

이 자리에서 백용성 스님으로부터 “육신의 병을 고치는 사람이

의사인데, 중생의 병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배가 아프고

종기가 나고 상처가 나는 것은 육신의 병이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은 마음의 병이니, 육신의 병만 고친들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라는 법문을 듣고 홀연히 발심, 양의사가 되는

길을 내던지고 용성 스님을 은사로 삭발 출가하여 깨달음을 얻었다.

그 후 스님은 석왕사, 해인사를 거쳐 부산 동래 범어사 조실로

계시면서 기라성 같은 수많은 제자를 길러냈고 성철 스님을

비롯해서 광덕, 지유, 능가, 정관, 무진장 스님 등 걸출한

범어사 문중의 인물을 배출했다.

청담, 효봉, 금오 스님 등과 더불어 불교정화운동을 펼치셨고

1965년 4월24일 세수 75세, 법랍 53세로 범어사에서 열반에 드셨다.

‘설법제일 하동산’이라는 말이 유행할 만큼 스님의 법회는

언제나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아무리 가난한 절도 동산 스님이

한 번 다녀가시면서 법회를 열기만 하면 “3년 먹을 양식이

들어온다”고 할 만큼 ‘복을 몰고 다니는 큰 스님’으로

사부대중의 추앙을 받았다.

‘설법제일’ 명성 전국에 퍼져

동산 스님이 출가하여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은사이신 용성 큰 스님은 제자를 큰 그릇으로 만들기 위해

당시 평안도 맹산 우두암에 머물고 계시던 한암 스님

문하로 제자 동산을 보냈다.

그러나 한암 스님은 얼른 동산을 받아주지 않았다.

“내가 자네를 받아주지 못하겠으니 돌아가라고 하면

어찌 하겠는가?”

한암 스님이 이렇게 말씀하시자 동산은 결연히 그 자리에서

이렇게 대답했다.

“만일 스님께서 내치시면 암자 밖 바위틈에 토굴이라도 파고

먼발치에서라도 스님을 모시겠습니다.”

마침 날이 어두워지면서 맹수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암 스님이 다시 물었다.

“저 산짐승들 소리를 듣지 못하는가? 암자 밖에는

사나운 산짐승들이 우굴거리는데 그래도 바위틈에 토굴을 파겠는가?”

“예 스님. 도를 구하지 못하고 취생몽사하느니 차라리 도를 구하고

토굴에서 산짐승 밥이 되는 게 나을 것입니다.”

동산이 이렇게 결연한 각오로 대답을 올리자 한암 스님이 빙긋이

웃으셨다.

“남의 집 자식이라 내쫓지도 못하겠구나. 여기서 머물게나.”

“천마리 닭 속 봉황 있다”

동산 스님이 범어사 청풍당에서 참선수행자 20여명을 지도하고

계실 때였다.

이 당시 사찰의 운영권은 대처승들이 쥐고 있었고 청정 비구 스님들은

대처승들의 눈치를 보아가며 얹혀사는 형편인지라

수좌들의 양식마저도 대처승들에게 얻어먹는 처지였다.

그런데 범어사 청풍당에서 참선수행을 하는 청정 수좌의 수가

7,8명이었을 때는 그럭저럭 스님들의 양식이 해결되었으나 그 수가

점점 불어나 20여명에 이르니 걸핏하면 저녁 끓일 양식도 없을 때가

많았다.

그러니 죽을지경인 것은 청풍당 살림을 맡은 원주 스님.

대처승인 본절 주지는 양식을 되도록이면 적게 주려고 아우성이지,

청풍당 조실 동산 스님은 찾아오는 스님은 무조건 다 받아들이지,

식량은 모자라지… 그래서 원주 스님이 동산 스님께 통사정을 했다.

“스님, 이제 제발 더 이상은 새 식구를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죽 끓일 양식도 모자랍니다 스님.”

“무슨 소리냐?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붙잡지 않는 게

불가의 도리이거늘 감히 어찌 수행하겠다고 찾아오는 수행자를

내치란 말이냐?”

“수행자 수만 많다고 다 도인 되겠습니까?”

“이것 봐라! 닭이 천 마리면 그 중에서 한두 마리는 봉황이 나오는

법이다.”

동산 스님은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그 후로도 오는 사람은 막지 않았고,

삭발출가 하겠다면 누구도 거절하지 않고 제자로 삼았다.

그래서 동산 스님의 제자가 무려 백여명을 훨씬 넘었다.

1952년 6월6일.

당시 부산에 피난해 있던 정부에서는 부산 금정산 범어사에서

전몰장병합동위령제를 거행하게 되었다.

특히 이날 위령제에는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삼부요인과

유엔군사령관도 참석했다.

불같은 성품 대통령을 꾸짖다

이날 법주는 동산 스님이었다.

동산 스님은 이날 몹시 화가 나 있었다.

오전 10시에 법회를 열기로 되어 있었는데 대통령이 한 시간이나

늦게 도착한 때문이었다.

동산 스님이 법당에 들어서자 대통령이 중절모자를 쓴 채

유엔군사령관에게 법당 안을 설명하면서 부처님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뭐라고 설명하고 있었다.

이 모습을 본 동산 스님이 느닷없이 소리를 질렀다.

“이것 보시오! 일국의 대통령이라는 분이 감히 어디서 부처님께

손가락질을 하고 있단 말씀이시오!”

“아이구 이거 내가 큰 실수를 했소이다.

이 외국인 손님들에게 부처님을 소개해 드리느라고 그만 실수를

했소이다.”

“그리고 법당 안에 들어오셨으면 누구나 모자를 벗어야 합니다.”

동산 스님이 또 한번 큰 소리로 그렇게 말하자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유엔군사령관 등이 얼른 모자를 벗었다.

이날 합동 위령제를 마치고 돌아간 이승만 대통령은 범어사의

도인 스님 하동산 스님을 다시 뵙고 ‘좋은 말씀을 듣고자’ 당시

내무부장관을 맡고 있던 백성욱 박사를 범어사로 보내 동산 스님을

모셔오도록 했다.

“내 평생 나에게 호통을 친 사람이 두 분이요.

한 분은 김구 선생이셨고, 또 한 분은 범어사 하동산 스님이시니,

그 분을 꼭 내 집무실로 모시고 오시오.”

이승만 대통령은 내무부장관에게 간곡히 당부했다.

그러나 백성욱 내무부장관이 동산 스님을 모시러 왔을 때

동산 스님은 한마디로 대통령의 초청을 거절했다.

“대통령이든 소통령이든 나를 보려면 자기가 와야지 내가 왜 가노?!” 동산 스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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