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우경(賢愚經) 제06권
30.월광왕두시품(月光王頭施品)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비사리(毘舍離)의 암라(菴羅)나무 동산에 계셨다.
그 때 부처님께서는 현자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4신족(四神足)을 가진 사람은 능히 한 겁을 더 오래 살 수 있다. 그런데 나는 4신족을 극히 잘 닦았다. 그러면 나는 지금 얼마나 더 오래 살겠느냐?”
이렇게 세 번까지 말씀하셨다.
그 때 아난은 악마에게 홀려 부처님의 분부를 듣고도 잠자코 대답하지 않았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너는 일어나 한적한 곳에 가서 생각해 보라.”
현자 아난은 자리에서 일어나 숲 속으로 갔다.
아난이 떠난 뒤에 악마 파순(波旬)은 부처님께 나아가 아뢰었다.
“세존께서는 세상에 계시면서 오랫동안 교화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사람을 두루 제도하시어 생사를 벗어난 사람의 수는 강가의 모래알 같습니다. 더구나 이제 늙으셨으니 열반에 드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땅의 흙을 조금 집어 손톱 위에 얹으시고 악마에게 말씀하셨다.
“땅의 흙이 많은가, 손톱 위의 흙이 많은가?”
악마는 대답하였다.
“땅의 흙이 아주 많고 손톱 위의 흙은 말도 안 됩니다.” “내가 제도한 중생은 손톱 위의 흙과 같고, 아직 제도하지 못하고 남은 중생은 온 땅덩이의 흙과 같으니라.”
부처님께서는 이어 말씀하셨다.
“지금부터 석 달 뒤에 나는 열반에 들 것이다.”
파순은 그 말씀을 듣고 기뻐하면서 떠났다.
그 때 아난은 숲 속에 앉아 있다가 갑자기 잠이 들었다. 꿈에 허공을 두루 덮은 큰 나무를 보았다. 그 나무는, 가지와 잎사귀가 울창하고 꽃과 열매가 무성하였으며, 일체 중생이 모두 그것을 힘입었고, 그 나무의 공덕은 갖가지로 기묘하여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일어나 그 나무에 불어닥치자 가지와 잎사귀가 부러지고 떨어졌다. 그리하여 중생들이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아난은 놀라 깨어 마음이 두렵고 불안하였다. 그래서 생각하였다.
‘꿈에 본 나무는 뛰어나고 묘하기 한량이 없어 온 천하가 모두 그 은혜를 입었는데, 무슨 인연으로 바람을 만나 그처럼 부러졌는가. 지금 부처님께서 일체 중생을 덮어 기르는 것은 마치 그 큰 나무와 같다. 행여나 부처님께서 열반에 들려고 하시는 것은 아닐까?’
이렇게 생각하자 겁이 더럭 나서 부처님께 나아가 예배하고 아뢰었다.
“저는 아까 이러이러한 꿈을 꾸었습니다. 부처님께서 행여나 열반에 드시려는 것은 아닙니까?”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네 말과 같다. 나는 석 달 뒤에 열반에 들 것이다. 나는 아까 너에게, ‘네 가지 신족을 얻은 사람은 능히 한 겁을 더 오래 살 수 있다. 나는 4신족을 극히 잘 닦았다. 그러면 나는 지금 얼마나 더 오래 살겠는가?’라고 이렇게 세 번이나 물었지마는 너는 대답하지 않았다. 네가 간 뒤에 악마가 내게 와서 열반에 들기를 권하였다. 그래서 나는 이미 허락하였느니라.”
아난은 이 말씀을 듣자 슬프고 아찔하며 괴로움에 가슴이 막혀 어쩔 줄을 몰랐다. 제자들은 그 말을 서로 전해 듣고 모두 슬퍼하면서 부처님께 몰려왔다.
그 때 부처님께서는 아난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것은 덧없는 것이거늘 누가 영원히 존재하겠느냐? 나는 너희들을 위하여 할 일을 이미 마쳤고, 할 말을 다 하였다. 다만 너희들은 부지런히 닦고 익혀야 한다. 무엇 때문에 근심하고 슬퍼하느냐? 그것은 수행에 아무 도움도 없느니라.”
사리불은 세존께서 열반에 드신다는 말을 듣고 못내 놀라워하면서 곧 아뢰었다.
“저는 지금 차마 세존께서 열반에 드시는 것을 뵐 수 없습니다. 제가 먼저 열반에 들고 싶습니다. 원컨대 세존께서는 허락하여 주소서.”
이렇게 세 번 되풀이하였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때를 알아 하라. 일체 성현은 모두 열반하느니라.”
사리불은 부처님의 허락을 받고는 옷을 바르게 하고 꿇어앉아 무릎 걸음으로 부처님을 백 번 돌고, 부처님 앞으로 다가가서 몇 구절 게송으로 부처님을 찬탄한 뒤에, 부처님의 두 발을 받들어 정수리에 공손히 얹었다. 이렇게 세 번 하고는 합장하고 부처님 곁에 서서 아뢰었다.
“저는 지금 최후로 부처님을 뵈옵니다.”
합장하고 엄숙하게 공손히 물러나 떠났다.
그는 사미 균제(均提)를 데리고 나열기(羅閱祇)의 본고장으로 갔다. 거기서 사미 균제에게 분부하였다.
“너는 성 안과 촌락으로 돌아다니면서, 국왕과 대신과 옛 친구와 여러 시주들에게 ‘모두 와서 이별하자’고 전하여라.”
균제는 스승의 발에 예배하고 두루 돌아다니면서 알렸다.
우리 스승 사리불은 지금 여기 오셔서 열반에 들려고 하십니다. 뵙고 싶은 분은 곧 가 보십시오.”
그 때 아사세왕(阿闍世王)과 그 나라의 장자와 신도와 네 무리들은 균제의 말을 듣고 모두 슬퍼하면서 똑 같은 소리로 말하였다.
“존자 사리불은 법의 대장으로서 중생들이 우러러보는 어른이신데 어찌 그리 빨리 열반에 드시는가.”
그리고는 모두 그리로 달려가 그 앞에서 예배하고 문안하며 제각기 아뢰었다.
“듣건대, 존자께서 목숨을 버려 열반에 드시려 한다 하니, 이제 우리들은 의지할 곳을 잃겠습니다.”
사리불은 여러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일체는 덧없는 것이어서 한번 난 이는 모두 죽는 것이요, 삼계(三界)가 모두 괴로운데 그 누가 편안할 수 있겠소? 당신들은 전생의 복으로 부처님 세상을 만났소. 부처님 법은 듣기 어렵고 사람의 몸은 얻기 어렵소. 정성껏 복업을 닦아 생사를 건너도록 하시오.”
이와 같이 여러 가지 방편으로 널리 대중을 위해 그 병을 따라 약을 주었다.
그 때 대중들은 설법을 듣고 초과(初果)와 나아가 3과(果)를 얻은 이도 있었고, 집을 떠나 아라한이 되는 이도 있었으며, 또 서원을 세워 불도를 구하는 이도 있었다. 그리고 그 설법을 듣고는 예배하고 돌아갔다.
사리불은 새벽이 되어 몸과 마음을 바로 하고 생각을 매어 앞에 두고는 첫째 선정[禪]에 들었다. 첫째 선정에서 일어나 둘째 선정에 들고, 둘째 선정에서 일어나 셋째 선정에 들며, 셋째 선정에서 일어나 넷째 선정에 들었다. 넷째 선정에서 일어나 허공 경계의 선정에 들고, 허공 경계에서 일어나 의식 경계에 들며, 의식 경계에서 일어나 아무 것도 없는 경계에 들고, 아무 것도 없는 경계에서 일어나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요, 없는 것도 아닌 경계에 들고,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요, 없는 것도 아닌 경계에서 일어나 생각 끊은 선정에 들고, 생각 끊은 선정에서 일어나 열반에 들었다.
그 때 제석천은 사리불이 이미 열반에 든 것을 알고 많은 하늘 무리와 백천 권속을 데리고 제각기 꽃과 향 따위의 공양거리를 가지고 허공을 메우면서 그곳에 이르러 모두 슬피 부르짖었는데, 눈물은 쏟아지는 비와 같았으며 온갖 꽃은 흩어져 무릎에까지 쌓였다. 그리고 제각기 말하였다.
“존자의 지혜는 큰 바다같이 깊고, 상대를 따라 변론할 때에 그 음성은 솟는 샘물 같았으며, 계율과 선정과 지혜를 갖춘 법의 대장으로서 항상 부처님을 따라 널리 법륜(法輪)을 굴리시더니, 어찌 그리 빨리 열반에 드시는가.”
도시와 촌락의 안팎 사람들은 사리불이 이미 열반에 들었다는 말을 듣고, 모두 소유[酥油]와 향과 꽃 따위의 공양거리를 가지고 달려와 슬퍼하고 사모하며, 어쩔 줄을 모르면서 가지고 온 것으로 공양하였다.
그 때 제석천은 비수갈마(毘首羯磨)에게 명령하여 온갖 보배를 모아 높은 수레를 장엄하고 그 위에 사리불을 모셨다. 여러 하늘과 용과 귀신과 국왕과 신민들은 부르짖으면서 배웅하였다. 넓고 편편한 곳에 이르렀을 때 제석천은 여러 야차들에게 분부하였다, “바닷가에 가서 우두전단(牛頭栴檀)을 가져 오라.”
야차들은 분부를 받고, 곧 나무를 가지고 와서 쌓아 큰 무더기를 만들고, 사리불의 몸을 그 위에 두고 소유를 쏟고 불을 놓아 화장하였다. 그리고 예배하고 공양하고는 제각기 돌아갔다.
불이 꺼진 뒤에 균제 사미는 스승의 사리를 거두어 발우에 담고, 세 가지 법복을 챙겨 가지고 부처님께 나아가 예배한 뒤에 꿇어앉아 아뢰었다.
“저의 스승 사리불은 이미 열반에 들었습니다. 이것은 그 사리요, 이것은 가사와 발우입니다.”
현자 아난은 이 말을 듣고 마음이 어지러워졌고, 슬퍼하다가 슬픔이 복바쳐 부처님께 아뢰었다.
“지금 법의 대장인 존자님은 이미 열반에 들었습니다. 우리는 누구를 의지합니까?”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사리불은 이미 죽었으나 그의 계율과 선정과 해탈과 해탈지견(解脫知見)의 이러한 법신은 죽지 않았느니라. 그리고 사리불은 오늘만 내가 열반에 드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어 먼저 죽은 것이 아니라, 지나간 세상에서도 내가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해 나보다 먼저 죽었느니라.”
현자 아난은 합장하고 아뢰었다.
“알 수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과거에도 먼저 죽었다는 그 일은 어떠합니까? 원컨대 설명하여 주소서.”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먼 옛날 한량없고 수없고 헤아릴 수 없는 아승기겁 전에 이 염부제에 전타바라비(旃婆羅脾)[진(晉)나라 말로는 월광(月光)이라는 뜻이다]라는 큰 나라의 왕이 있었다. 그는 염부제의 8만 4천 나라와 6만 산천과 80억 촌락을 통솔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에게는 2만 부인과 궁녀가 있었다.
첫째 부인의 이름은 수마단(須摩檀)[진(晉)나라 말로는 화시(花施)라는 뜻이다]이요, 1만 대신 중에서 제일가는 이의 이름은 마전타(摩旃)[진(晉)나라 말로는 대월(大月)이라는 뜻이다]였다. 또 왕에게는 5백 태자가 있었는데 첫째 태자 이름은 시라발타(尸羅跋)[진(晉)나라 말로는 계현(戒賢)이라는 뜻이다]였다.
그 왕이 사는 성 이름은 발타기바(跋耆婆)[진(晉)나라 말로는 현수(賢壽)라는 뜻이다]인데, 그 성의 세로와 너비는 4백 유순이요, 금·은·유리·수정으로 되었으며, 사방에는 대개 1백20개의 문이 있었고, 거리와 골목은 편편하고 서로 잇닿아있었다.
또 그 나라에는 네 줄의 나무가 있었는데, 그것도 금·은·유리·수정으로 되어있었다. 금 가지에는 은 잎이요, 은 가지에는 금 잎이며, 유리 가지에는 수정 잎이요, 수정 가지에는 유리 잎이었다. 또 여러 보배 못도 금·은·유리·수정으로 되어있었고, 못 밑의 모래도 네 가지 보배로 되어 있었다.
왕의 안 궁전은 둘레가 40리인데, 순전히 금·은·유리·수정으로 되어있었다. 그래서 그 나라는 풍족하고 윤택하여 인민들은 즐거워했으며 진기하고 묘한 것은 이루 다 일컬을 수 없었다.
그 때 왕은 정전(正殿)에 앉았다가 갑자기 이렇게 생각하였다.
‘대개 사람이 세상에 살면서 높고 호화로우며 부하고 귀하면 천하가 공경하고 우러러보아 한번 말을 내면 어기는 이가 없으며, 진기한 다섯 가지 쾌락을 마음대로 누릴 수 있나니, 이런 과보는 다 덕을 쌓고 복을 닦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이다.
마치 농부가 봄에 널리 뿌림으로 해서 가을과 여름에 풍성하게 거두는데, 봄이 와도 부지런히 뿌리지 않으면 가을과 여름에 바랄 것이 없는 것처럼, 나도 지금 그와 같아서 전생에 복을 닦았기 때문에 지금 이런 묘한 결과를 얻었다. 지금 또 심지 않으면 뒤에 바랄 것이 무엇인가.’
이렇게 생각하고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나는 지금 묘한 보배 창고의 물건을 내어 성문과 저자에 두고 큰 보시를 행하되, 그 중생들이 일체 필요로 하는 것에 따라 모두 나누어 주리라.’
또 8만 4천의 여러 작은 나라에 영을 내려 모두 창고를 열어 일체 중생에게 보시하게 하였다. 신하들은 말하였다.
좋습니다. 대왕님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그리고는 금당기[金幢]를 세우고 금북[金鼓]을 쳐서 널리 영을 내려 왕의 인자한 조칙을 전하여 멀고 가까운 데나 안팎 사람들을 모두 듣고 알게 하였다. 그러자 그 나라의 사문이나 바라문으로서 빈궁하고 외로운 사람들은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옷이 필요한 이에게는 옷을 주고, 밥이 필요한 이에게는 밥을 주며, 금·은의 보물이나, 병에 따라 약을 구하는 이에게는 모두 필요한 것을 그 마음에 맞추어 베풀었다. 그래서 염부제 안의 모든 신민들은 왕의 은혜를 입고 끝없이 즐거워했다. 그리고 그 덕을 노래하고 찬탄하는 소리가 거리에 가득 찼고, 좋은 이름이 사방에 멀리 퍼져 모두 왕의 은혜로운 교화를 우러러 사모하였다.
그 때 변방에 있는 작은 나라의 왕 비마사나(毘摩斯那)는 월광왕(月光王)의 아름다운 이름이 높고 크다는 말을 듣고, 마음으로 질투하여 누워도 자리가 편안하지 않았다. 그래서 생각하였다.
‘월광을 없애지 않으면 내 이름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 이제 방편으로써 여러 도사와 삯꾼들을 모집하여 이 일을 처리하리라.’
이렇게 생각하고, 곧 명령하여 그 나라 안의 범지(梵志)들을 불러 온갖 맛있는 음식을 준비하여 공경하고 받들어 섬기면서 그 마음을 어기지 않았다. 석 달이 지난 뒤에 여러 범지들에게 말하였다.
‘내게는 지금 어떤 걱정이 내 마음을 싸고 있어 밤낮으로 들볶고 있는데, 어떻게 하면 이것을 풀 수 있겠는가? 당신네 도사들은 내가 받드는 분들이오. 부디 방법을 생각하여 나를 도와 이 걱정을 없애도록 하오.’
바라문들은 아뢰었다.
‘대왕은 어떤 걱정이 있습니까? 저희들에게 알려 주소서.’
왕은 곧 말하였다.
‘저 월광왕은 이름과 덕망이 멀리 퍼져 사방의 먼 나라들도 모두 그 교화를 받드는데, 오직 나만이 비루하여 그런 아름다운 명예가 없다. 내 소원은 그를 없애고자 하는 것이오. 어떤 방법을 써야 그 일을 능히 치를 수 있겠소?’
바라문들은 이 말을 듣고 모두 왕에게 아뢰었다.
‘저 월광왕이 사랑과 은혜로 일체 중생을 윤택하게 하고, 빈궁과 액난에 걸린 사람을 가엾이 여겨 구제하는 것은 마치 백성들의 부모와 같거늘, 우리들이 무슨 심사로 이 나쁜 음모를 꾸미겠습니까? 차라리 자살할지언정 이 일은 할 수 없습니다.’
바라문들은 제각기 흩어져 가면서 공양도 돌아보지 않았다.
비마사나는 더욱 걱정하며 산란하여 두루 영을 내려 널리 모집하였다.
‘누가 나를 위해 월광왕의 머리를 벨 수 있겠는가. 나는 나라를 나누어 반을 다스리게 하고 딸을 주어 아내를 삼게 하리라.’
그 때 어느 산 중턱에 바라문이 있었는데, 이름이 노도차(勞度差)였다. 그는 왕의 영을 듣고 그 모집에 응하였다. 왕은 매우 기뻐하여 거듭 그에게 말하였다.
‘진실로 이 일을 치러 내면 약속을 어기지 않으리라. 만일 갈 수 있다면 언제쯤 떠나겠는가?’
바라문은 대답하였다.
‘가는 도중에 필요한 양식을 준비해 주십시오. 지금부터 이레 뒤에 떠나겠습니다.’
그리고 바라문은 제 몸을 보호하는 주문을 외웠다. 이레가 되어 그는 와서 왕에게 하직하였다. 왕이 그에게 필요한 것을 주어 그는 길을 떠났다.
그 때 월광왕의 나라에는 갖가지 변괴가 나타났다. 땅이 군데군데 갈라지고 번개가 치며 별이 떨어지고, 짙은 안개에 낮이 어두워지며 뇌성이 울고 벼락이 쳤다. 새들은 허공에서 몹시 슬피 울고 깃이 빠지고, 호랑이와 표범과 승냥이와 이리 떼의 짐승들은 제 몸을 던지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또 내닫기도 하면서 울고 부르짖었다.
8만 4천의 여러 작은 왕들은 모두 대왕의 금당기가 부러지고 금북이 찢어지는 꿈을 꾸었다. 대월(大月) 대신은 귀신이 와서 왕의 금관을 빼앗는 꿈을 꾸었다. 그들은 모두 근심에 잠겨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였다.
그 때 성문을 맡은 신(神)은 바라문이 왕의 머리를 얻으려고 하는 것을 알고 마음이 산란하여 아무도 성 안에 들여 놓지 않았다. 바라문은 성문을 몇 바퀴 돌았으나 들어갈 수 없었다.
수타회천(首會天)은 월광왕이 머리를 보시함으로써 보시가 원만하게 될 것을 알고 꿈을 통해 왕에게 말하였다.
‘왕은 꼭 보시하고 여럿의 마음을 거스르지 마시오. 지금 왕의 머리를 얻으려는 사람이 성문 밖에서 들어오지 못하고 있으니, 시주를 위한 일이 그렇지 않소.’
왕은 놀라 깨어 곧 대월 대신에게 분부하였다.
‘너는 여러 성문에 가서 사람을 막지 말라고 분부하라.’
대월 대신은 곧 성문으로 갔다. 성문을 맡은 신은 형상을 나타내어 대월에게 아뢰었다.
‘어떤 바라문이 다른 나라에서 와서 나쁜 마음을 품고 왕의 머리를 얻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대신은 대답하였다.
‘만일 그런 일이 있다면 그것은 큰 불상사다. 그러나 왕의 명령이 있으니 어길 수가 없다. 어떻게 하겠는가?’
그래서 성문을 맡은 신은 사람을 막지 않았다. 대월 대신은 혼자 생각하였다.
‘만일 이 바라문이 기어코 왕의 머리를 얻으려고 하면 일곱 가지 보배로 된 머리를 각각 5백 개씩 만들어 그것으로 바꾸자.’
그는 명령하여 그것을 만들게 하였다.
그 때 그 바라문은 지름길로 궁전 앞에 와서 큰 소리로 외쳤다.
‘나는 먼 곳에 있으면서 왕이 공덕을 위해 일체를 보시하여 남의 뜻을 거스르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일부러 멀리서 왔는데, 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왕은 그 말을 듣고 그를 맞이하여 예배하고 문안하였다.
‘먼 길을 오느라 피로하지나 않은가. 네 소원대로 하라. 나라나 도시나 처자·보배·수레·임금 수레·코끼리·말이나 일곱 가지 보배나 종이나 하인 등 무엇이나 가지고 싶다면 그것을 모두 주리라.’
바라문은 말하였다.
‘일체의 바깥 물건은 아무리 보시하여도 그 복덕의 과보는 크고 넓지 못합니다. 몸의 살을 보시하여야 그 복이 묘합니다. 그래서 나는 일부러 멀리서 왔습니다. 왕의 머리를 얻고 싶습니다. 만일 허물하지 않으신다면 부디 보시하십시오.’
왕이 이 말을 듣고 못내 기뻐하자 바라문은 물었다.
‘만일 내게 그 머리를 보시한다면 언제 주시겠습니까?’
왕은 말하였다.
‘지금부터 이레 뒤에 주리라.’
그 때 대월 대신은 일곱 가지 보배로 된 머리를 가지고 와서 달래면서 바라문에게 말하였다.
‘저 왕의 머리는 뼈와 살과 피가 합해서 된 더러운 물건인데 무엇 하려고 그것을 구하는가. 지금 너에게 일곱 가지 보배로 된 머리를 가지고 와서 대신하고 싶은데 너는 이것을 가져라. 이것을 다른 것으로 바꾸면 넉넉히 종신토록 부자가 될 것이다.’
바라문은 말하였다.
‘나는 이것은 쓸 데가 없습니다. 왕의 머리를 얻어야 내 마음에 차겠습니다.’
대월 대신이 갖가지로 달래었으나 그는 영영 마음을 돌리지 않았다. 그래서 하도 분해 일곱 갈래로 심장이 찢어져 왕 앞에서 죽었다.
그 때 왕은 신하들에게 명령하였다.
‘하루 8천 리를 달리는 코끼리를 타고 여러 나라에 두루 알려라. 월광왕은 이레 뒤에 그 머리를 바라문에게 보시할 것이다. 와서 보고 싶은 이는 빨리 달려오라고.’
그러자 8만 4천의 여러 왕들은 모두 잇달아 와서 왕을 보고 그 앞에서 가슴을 치면서 말하였다.
‘이 염부제 사람들은 왕의 은혜를 입고 모두 풍족하고 즐겁게 지내면서 아무 근심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하루 아침에 한 사람을 위하여 많은 백성들을 아주 버리고, 다시는 가엾이 여기지 않습니까? 원컨대 저희들을 가엾이 여겨 그 머리를 보시하지 마소서.’
1만 대신들은 모두 땅에 몸을 던지고 왕 앞에서 가슴을 치면서 말하였다.
‘저희들을 가여워하시고 불쌍히 여기시어, 그 머리를 보시함으로써 영원히 버리지 마소서.’
2만 부인들도 땅에 몸을 던지고 왕을 우러러 아뢰었다.
‘저희들을 보호하여 버리지 마소서. 만일 그 머리를 보시하신다면 저희들은 누구를 의지하겠습니까?’
또 5백 태자들은 왕 앞에서 울면서 말하였다.
‘저희들은 아직 어리고 외로운데 어디로 돌아가야 합니까? 원컨대 저희들을 가엾이 여겨 머리를 보시하지 마시고, 저희들을 길러 인륜을 성취하게 하소서.’
이에 대왕은 여러 신민(臣民)과 부인과 태자들에게 말하였다.
‘나의 근본을 생각해 보면, 이 몸을 받은 뒤로 여러 가지 생사를 겪은 지 이미 오래 되었다. 혹 지옥에 있을 때에는 하루 동안에도 났다가는 이내 죽어 무수히 몸을 버렸다. 즉, 재의 강[灰河]·쇠평상·끓는 똥·불수레·숯구덩이와 그 밖의 여러 다른 지옥에서 몸이 타고 찔리며 삶기고 굽히면서 몸을 버리고 또 버렸으나 복의 과보는 아주 없었다.
만일 축생으로 태어나면 서로 잡아먹기도 하고 혹은 사람에게 죽어 온갖 입에 몸을 이바지할 때에는 무수히 몸이 부서지기도 하였고, 또 불에 데어 터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몸을 헛되이 버렸을 뿐이요, 아무런 복의 과보도 없었다.
만일 아귀 세계에 떨어지면 몸에서 불이 나왔으며 혹은 나는 바퀴가 날아와 내 목을 베면 끊어졌다가는 다시 살아났다. 이와 같이 무수히 몸을 죽였지마는 아무런 복의 과보도 없었다.
만일 인간에 태어나면 재물과 여자를 다투어 눈을 부릅뜨고 잔뜩 성을 내어 서로 해치며, 또는 군사를 일으켜 마주 진을 치고는 서로 베고 끊었으니, 이렇게 몸을 죽인 것도 또한 무수하였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 때문에 항상 많은 몸을 죽였으나 일찍 복을 짓지 못한 채 이 목숨을 버렸느니라.
지금 이 내 몸은 여러 가지 더러운 물건으로서 오래 가지 못하고 마침내 버리고 말 것이다. 이 위태롭고 약하며 더러운 머리를 버려 큰 이익과 바꾸는 것이거늘 왜 주지 않겠는가. 나는 이 머리를 바라문에게 보시하고, 그 공덕으로 맹세코 불도(佛道)를 구할 것이다. 만일 불도를 성취하여 공덕을 완전히 갖추면 갖가지 방편으로써 너희들을 고통에서 건질 것이다. 지금 내 보시할 마음은 바야흐로 무르익으려 한다. 부디 나의 위없는 도의 뜻을 막지 말라.’
여러 신민들과 부인과 태자는 왕의 말을 듣고 잠자코 말이 없었다.
그 때 왕은 바라문에게 말하였다.
‘만일 내 머리를 가지고자 하면 지금이 바로 그 때이다.’
바라문은 말하였다.
‘지금 왕은 신민과 대중들에게 둘러싸였고, 나는 홀몸이니 형세가 약하여 여기서는 왕의 머리를 벨 수 없습니다. 만일 그 머리를 내게 주고 싶으시면 저 후원으로 가십시다.’
그 때 왕은 여러 작은 왕과 태자와 신민들에게 분부하였다.
너희들이 진실로 나를 사랑하고 공경하거든 저 바라문을 해치지 말라.’ ‘이렇게 말하고, 바라문과 함께 후원으로 들어갔다. 바라문은 다시 왕에게 말하였다.
왕은 아직 젊고 역사의 힘을 가졌습니다. 만일 머리를 베는 고통을 받으면 혹 도로 후회할지 모르겠습니다. 왕의 머리털을 저 나무에 굳게 맨 뒤에 라야 머리를 벨 수 있겠습니다.’ ‘왕은 그 말을 따라, 가지와 잎이 무성하고 튼튼한 한 나무를 골라 굳게 매려고 나무를 향해 꿇어앉아 머리를 나무에 매고, 바라문에게 말하였다.
‘너는 내 머리를 베어 내 손바닥에 떨어뜨려라. 그리고는 내 손에서 가져 가라. 지금 나는 내 머리를 너에게 준다. 그러나 나는 이 공덕으로 악마나 범천·제석천 혹은 전륜성왕이나 삼계(三界)의 즐거움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 이로써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를 구하고, 맹세코 중생들을 구제하여 열반의 즐거움에 이르게 할 것이다.’
그 때 바라문은 손을 들어 머리를 베려 하였다. 나무신은 그것을 보고 매우 괴로워하면서 말하였다.
‘이런 사람을 왜 죽이려 하는가’
곧 손으로 바라문의 귀를 잡아 목을 비트니 손과 다리는 꼬이고 칼은 땅에 떨어져 꼼짝하지 못하였다.
그 때 대왕은 곧 나무신에게 말하였다.
‘나는 옛날부터 이 나무 밑에서 9백99개의 머리를 베어 보시하였다. 지금 이 머리를 보시하면 꼭 천 개가 찰 것이요, 이 머리를 보시하고 나면 내 보시는 원만히 성취될 것이니, 너는 내 위없는 도의 마음을 방해하지 말라.’
그 때 나무신은 왕의 이 말을 듣고 도로 바라문을 본래와 같이 놓아 주었다. 그러자 바라문이 땅에서 일어나 다시 칼을 잡고 왕의 머리를 베니, 머리는 왕의 손바닥에 떨어졌다.
그 때 천지는 여섯 가지로 진동하여 여러 하늘들의 궁전이 흔들려 편치 않았다. 하늘들은 모두 두려워하면서 그 까닭을 괴상히 여기다가 이내 보살이 일체 중생을 위해 머리를 버려 보시한 것을 보았다. 그들은 모두 내려와 그 놀라운 일에 감격하여 슬퍼하며 눈물을 흘렸는데, 눈물이 비와 같았다. 그리고 찬탄하였다.
‘월광대왕은 머리를 보시하였다. 단바라밀(檀波羅蜜)이 이제 원만하게 되었다.’
그 때 그 소리는 천하에 두루 퍼졌다. 비마선왕(毘摩羨王)은 이 말을 듣고 기뻐 뛰다가 깜짝 놀라 심장이 찢어져 죽었다.
그 때 바라문은 왕의 머리를 베고 떠났다. 여러 신민들과 부인과 태자들은 왕의 머리를 보고 몸을 땅에 던지고 같은 소리로 슬피 부르짖으면서 까무러쳤다가 다시 깨어났다.
어떤 이는 슬픔이 맺혀 피를 토하고 죽었으며, 어떤 이는 놀라움에 빠져 정신을 잃었고, 어떤 이는 제 머리털을 쥐어뜯었으며, 어떤 이는 제 옷을 잡아 찢었고, 어떤 이는 두 손으로 제 얼굴을 할켰다. 그리고 울면서 이리 가고 저리 가고 하다가 땅에서 뒹굴었다.
그 때 바라문은 왕의 머리 냄새가 싫어 땅에 던져 짓밟고 떠났다.
어떤 사람은 그 바라문에게 말하였다.
‘너는 혹독하기 그처럼 심하구나. 그것을 쓰지 않을 바에야 무엇 하러 구하였던가.’
바라문이 길을 갈 때에, 보는 사람마다 모두 꾸짖고 아무도 밥을 주는 이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굶주리고 피로하여 매우 고통스러웠다. 길에서 어떤 사람에게 소식을 물어 비마선왕이 이미 목숨을 마친 줄을 알았다. 그는 실망하고 번민하다가 심장이 일곱 갈래로 찢어져 피를 토하고 죽었다.
비마선왕과 노도차 바라문은 목숨을 마친 뒤에 모두 아비지옥에 떨어졌고, 그 밖의 신민들로서 왕의 은혜를 우러러 슬픔에 맺혀 죽은 이는 모두 천상에 났느니라.
아난이여, 너는 알고 싶으냐? 그 때의 월광왕은 지금의 이 내 몸이요, 비마선왕은 지금의 저 파순(波旬)이며, 노도차 바라문은 지금의 조달(調達)이요, 나무신은 지금의 저 목련이며, 대월 대신은 지금의 사리불이니라.
그 때에도 그는 내가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해 나보다 먼저 죽더니, 오늘에 와서도 내가 열반에 드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해 먼저 죽었느니라.”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현자 아난과 여러 제자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슬픔과 기쁨이 엇갈렸다. 이에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모두 부처님 공덕과 놀라운 행을 찬탄하였다.
그리고 모두 알뜰히 수행하여 네 가지 도의 결과[四道果]를 얻은 이도 있었고,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의 마음을 내는 이도 있었다. 그리고 모두 크게 기뻐하여 공경히 받들어 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