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엄사의 돌함좌 사리
개운 3년 병오[諒賂] 10월 29일 강주계(康州界) 임도 대감(任道大監) 주첩(往貼)에 『선종(禪終)의 백엄사(伯嚴寺)는 초팔현(草八縣)―지금의 초계(草溪)다.―에 있는데, 절의 중 간유 상화(幹遊上座)는 나이 39세이나, 절을 처음 세운 때는 알지 못한다.』고 했다.
다만 고전(古傳)에, 앞대인 신라 때에 북택청(北宅廳) 터에다 이 절을 지었는데, 중간에 오랫동안 헐어 폐지되었다.
지난 병인년(1026)에 사목곡(沙木谷)의 양부(陽孚)스님이 이 절을 고쳐 짓고 주지(住持)가 되었다가, 정축년(1037)에 세상을 떠났다는 기사가 있다.
을유년[1045]에 희양산(羲陽山)의 극양(兢讓) 스님이 와서 10년을 살다가 또 을미년(1055)에 다시 희양(羲陽)으로 되돌아 가는데, 그 때 신탁(神卓) 스님이 남원(南原) 백암수(白嵒藪)로부터 이 절에 와서 규정대로 주지를 했다.
또 함옹(咸雍) 원년[1065] 11월에 이 절의 주지인 득오미정 대사(得奧微定太師) 석수립(釋秀立)이 절의 상규(常規) 10조를 정했는데, 새로 5층 석탑을 세워 진신 불사리 42낱을 모시고, 사재로써 보(寶)를 세워 『해마다 공양할 일. 특히 이 절의 법을 지키던 경승(敬憎)이었던 엄흔(嚴款)―백흔(伯欣)의 두 명신(切神)과 근악(近岳)등 3위 앞에 보(寶)를 세워 공양할 일-민간에 전해오기를 엄흔(嚴欣) · 백흔(伯欣)두 사람이 집을 내놓아 절을 만들었으므로 그 때문에 절 이름을 백엄사(伯嚴寺)라 했으며, 이에 호법신(護法神)이 되었다고 한다.―금당(金堂) 약사여래(藥師如來) 앞의 나무주발에는 매달 초하룻날 공양미를 갈아놓을 일』 등이다.
이하의 조목은 기록하지 않는다.
<삼국유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