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에 수입된 사리

신라에 수입된 사리

국사에 이런 기사가 있다. 진흥왕 때인 태청(太淸) 기사(549)에 양(梁)에서 심호(沈湖)를 시켜 사리(舍利) 몇 알을 보내어 왔다.

선덕왕 때인 정관 17년 계묘(643)에 자장법사가 당 나라에서 가지고 온 부처의 머리뼈와 부처의 어금니와 부처의 사리 백낱과 부처가 입던 붉은 옷에 금점이 있는 가사 한 벌에서 그 사리는 세부분으로 나누어 한 부분은 황룡사 탑에 두고 한 부분은 태화사(太和寺) 탑에 두고 한 부분은 가사와 함께 통도사 계단에 두었다.

그 나머지는 어디에 두었는지 알 수 없다.

통도사의 계단에는 층이 둘이 있는데, 윗층 가운데에는 가마솥을 엎어 놓은 것과 같은 돌뚜껑(石蓋)을 모셔 놓았다. 민간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옛날 본조에서 전후로 두 안렴사(按廉使)가 와서 계단에 예를 하고 돌뚜껑을 들고 들여다보니 첫번에는 긴 구렁이가 돌함(函) 속에 있는 것을 보았고. 다음번에는 큰 두꺼비가 돌 속에 쪼그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그 후부터는 그 돌뚜껑을 감히 들어 보지 못했다 한다.

근일 상장군(上壯軍) 김공(金公) 이생(利生)과 유시랑(庾侍郞)이 군사에게 시켜 돌뚜껑을 굳이 들게 했더니 그 속에는 작은 돌함이 있고,돌함 속에는 유리통(琉璃筒)이 들어 있는데, 통 속에는 사리(舍利)가 겨우 네 낱 뿐이었다. 서로 돌려서 보며 경려했는데, 통이 조금 상해서 금이 간 곳이 있었다.

이에 유공은 수정함(水情函) 하나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마침내 기부하여 함께 간수해 두게 하고, 그 사실을 기록했으니, 그 때는 강도(江都=강화도)로 서울을 옮긴지 4년째인 을미년[1235]이었다.

또 고기(古記)에서는 사리 백 개를 세 곳으로 나누어 간수해 두었다 했는데, 이제 다만 세 개뿐이라고 한다. 이미 그것이 숨겨졌다가 나타났다가 함이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니, 수가 많고 적음은 괴이 여길 것이 없다.

또 민간에서는 황령사탑이 불타던 날에 돌함이 동쪽 부분에 처음으로 큰 얼룩이 생겼는데, 지금까지 그대로 있다고 한다.

그 때는 곧, 요(遼)의 응력(應曆) 3년 계측[953]이며 본조 광종(光宗) 5년이니, 탑이 서번째 불탔을 때였다. 조계(曹溪) 무의자(無衣子)가 시에서 『듣거대, 황령사에서 탑이 불타던 날에, 연이어 탄 일면에도 틈남데가 없었다.』고 말한 것이 곧 이것이다.

지원(至元) 갑자년[1264]이래로 원(元)나라 사신과 본국의 사신이 다투어 와서 그 돌함에 예하고 사방의 행각승(行脚僧)들도 몰려 와서 참례 했다. 몰려와서 참례했다.

어느 날인가는 돌함속의 유리통이 모래알처럼 부수어져 돌함 밖으로 나타났다.

이상한 향기가 강렬하게 풍기며 여러 날 동안 없어지지 않은 일이 종종 있었으니, 이는 말세에 나타난 한 지방의 기이한 일이었다.

당나라 대중(大中) 5년 신미(851)에 견당사(遣唐使) 원흥(元弘)이 당에서 가지고 온 부처의 어금니와―지금은 그 있는 곳을 알 수 없으나, 신라 문성왕(文聖王)때 일이다.―후당(後唐) 동광(同光)원년 계미(923) 곧 본조 태조 즉위 6년에 견량사(遣梁使) 원홍(元弘)이 당에서 가지고 온 5백 나한상(羅漢像)은 지금 북숭산(北崇山) 신광사(神光寺)에 있다.

송(宋)의 선화(宣和) 원년 기해―기해 예종 15년―(1119)에 입공사(入貢使) 정극영(정(鄭)克永) 이지미(李之美) 등이 가지고 온 부처의 어금니는 지금 내전(內殿)에 모셔 둔 것이 그것이다.

전하는 얘기에 의하면, 옛날의 의상법사가 당나라에 들어가서 종남산 지상사(至相寺) 지엄존자(智儼尊者)가 있는 곳에 이르니, 그 이웃에 도선율사(道宣律師)가 있었다.

늘 하늘의 공양을 받고, 재를 올릴 때마다 하늘의 주방에서 음식을 보내 왔다.

하루는 도선율사가 의상법사를 재에 청했다.

의상이 와서 자리에 앉은 지가 오래 되었는데 하늘의 공양은 때가 지나도 이르지 않았다.

의상이 빈 바리때로 돌아가니 천사는 그제야 내려왔다.

율사가 물었다.

「오늘은 어째서 늦었소?」

천사는 답했다.

「온 골짜기에 신병(神兵)이 가로막고 있으므로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그제야 율사는 의상법사에게 신의 호위가 있음을 알고 그의 도력(道力)이 자기보다 나음에 굴복하여 그 공구(供具)를 그대로 남겨 두었다가 이튿날 또 지엄과 의상 두 대사를 재에 청하여 그 사유를 자세히 말했던 것이다.

의상법사는 도선율사에게 조용히 말했다.

「 율사는 이미 천제(天帝)의 존경을 받고 계시다니, 듣건대 제석궁(帝釋富)에는 부처님의 마흔 이(齒) 가운데는 한 어금니가 있다고 하니, 우려들을 위하여 천제에게 청해서 그것을 인간에게 내려 보내어 복받게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그 후에 율사는 천사와 함께 그 뜻을 상제(上帝)에게 전했더니 상제는 7일을 기한으로 의상에게 보내주었다.

후대 송나라의 휘종(徵宗)때 와서 사도(邪道=도교)를 받드니 그 때 나라 사람은 도참(圖讖)을 퍼뜨렸다.

「금인(金人)이 나라를 멸망시킨다.」

도사(道士)의 무리들이 일관(日官)을 움직여서 위에 아뢰었다.

「금인(金人)이란 것은 불교의 이름이니, 장차 국가에 불리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조정의 의논은 장차 불교를 없애고, 승려(憎侶)를 무찔러 죽이고, 경전(經典)을 불사르고, 별도로 조그만 배를 만들어 부처의 어금니를 실어 바다에 띄워 어디든지 인연 따라 퍼내 보내려고 하였다.

그 때 마침 본조[고려]의 사신이 송(宋)에 가 있다가 그 사실을 듣고, 천화룡(天努茸) 50령(領)과 저포(楮布) 3백필을, 배를 호송하는 내사(內史=관원)에게 뇌물을 주어 몰래 부처의 어금니를 받고, 다만 빈 배만 바다에 띄우게 했다.

고려의 사신들은 부처의 어금니를 얻어가지고 돌아와 그 사실을 위에 아뢰니, 이에 예종(睿宗)은 크게 기뻐하여 그것을 십원전(十員殿) 왼쪽 소전(小殿)에 모셨다.

그리고 그 전문(殿門)은 늘 자물쇠로 걸고 밖에는 향과 촛불을 설치해 놓고 매양 친히 행차하는 날에만 전문을 열고 예했다.

임진년 고종 19년(1232)에 강화(江華)로 서울을 옮길 때 내관(內官이) 총망한 가운데 부처의 어금니를 그만 잊어버리고 챙기지 못했다.

병신년[고종 23년] 4월에 왕의 원당(願堂)인 신효사(神孝寺)의 석온광(蘊光)이 부처의 어금니에 절을 올리기를 청하여 왕에게 사뢰니, 왕은 내신(內臣)을 시켜 궁중을 두루 찾아보았으나 찾아내지 못했다.

이 때 어사대(御史臺) 시어사(侍御史) 최충(崔沖)이 설신(薛伸)에게 명하여 급히 여러 알자(謁者)의 방에 물었더니 모두 어쩔 줄 몰랐다.

내신(內臣)·김승로(金承老)가 아뢰었다.

「임진년에 서울을 옮길 때의 자문일기(紫門日記=궁중일기)를 조사해 보시지요.」

그 말대로 조사해 보니 일기에는

「입내시대부경(入內恃大府卿) 이백전(率白全)이 부처 이의 함(函)을 받았다.」

고 쓰여 있었다.

이백전을 불러 힐문(詰問)하니 그는 대답했다.

「집에 가서 다시 저의 일기를 찾아보겠습니다.」

그는 집에 가서 조사해 보고는 좌번(左番)알자(謁者) 김서룡(金瑞龍)이 부처 이의함을 받은 기록을 찾아다가 바치었다.

김서룡을 불러 물으니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또 김승로가 아뢰는 대로 임진년에서 지금의 병신년까지 5년 동안의 어불당(御佛堂)과 경령전(景靈驗)의 숙직한 자들을 잡아 가두고 심문했으나 이렇다 할 결말이 나지 않았다.

3일을 지나 밤중에 김서룡의 집 담 안으로 무슨 물건 던지는 소리가 났다.

불을 켜서 살펴보니, 곧 부처의 어금니가 든 함이었다.

함은 본디 속 한 겹은 침향합(沈香合)이요, 다음 겹은 순금합(純金合)이며, 다음바깥 겹은 백은함(白銀函)으로서 각 함의 폭은 서로 맞게 되어 있었는데 그 때는 다만 유리함(琉璃函)과 부처님의 이 뿐이 없다.

김서룡은 함을 찾은 것을 기뻐하여 대궐에 들어가서 아뢰었다.

유사(有司)는 죄를 논하여 김서룡과 양전(兩畿=瀏佛 -景雲殿)의 상수들을 모두 죽이려 하니 친앙부(晋陽府)에 서 아뢰었다.

「불사(佛事) 때문에 사람들을 많이 상해함은 옳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모두 놓아 주었다.

다시 명하여 십원전(十員殿) 안뜰에다 불아전(佛牙殿)을 특히 만들어 그 곳에 부처님의 함을 모시게 하고 장사(將士)에게 지키게 했다.

또 길일(吉日)을 가려 신효사(神孝寺)의 상방(上房) 온광(蘊光)을 청하여 승도(憎徒) 30명을 거느리고 궁 안에 들어와서 재를 올리고 정성을 들이게 했다.

그날 입직(入直)한 승선(承宣)·최홍(崔弘)과 상장군 최공연(崔公衍).이영장(李令長)과 내시(內侍), 다방(茶房=다방 관원)등이 불아전(佛牙殿) 뜰에서 왕을 모시고 서서 차례로 불아함(佛牙函)을 머리에 이고 정성을 들이니, 불아함의 구멍 사이에 나타나는 사리(舍利)는 그 수효를 헤일 수도 없었다.

진양부(들購府)에서는 백은합(白銀合)에 그것을 담아 모셨다.

이 때 임금은 신하들에게 말했다.

「내가 부처의 어금니를 잃은 후 스스로 네 가지 의심이 생겼소.

첫째 의심은 천궁(天宮)의 7일 기한이 차서 하늘로 올라갔을까?

둘째 의심은 국난(國難=몽고의 난)이 이처럼 심하니 부처의 이는 신성한 것이었으므로 인연있는 평화로운 나라로 옮아갔을까?

셋째 의심은 재물을 탐낸 소인(小人)이 그 함을 도적질했다가 구렁에 버렸을까?

넷째 의심은 도적이 보물을 훔쳐 갔으나, 밖에 드러 내놓을 수 없었으므로 집안에 감추어 두었을까?

그랬는데 이제 넷째번 의심이 맞았소.」

그리고 소리를 내어 크게 우니, 온 뜰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눈물을 흘리고 헌수(猷壽)하며, 이마와 팔을 불에 태운 사람도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이 실록(實錄=실기)은 그 당시 내전(內殿)에서 향을 사르고 기도하던 전 지림사(祉林寺) 대선사 각유(覺猷)에게서 얻은 것이다.

그는 그때 친히 본 일이라 하면서 나에게 기록케 했다.

또 경오년(元宗 11년-1270 강화에서 개경(開京)으로 환도할 때의 난리는 낭패(狼狽)가 심함이 임진년 천도하던 해보다도 더했다. 십원전(十員殿)의 감주(監主)였던 선사 심감(心鑑)은 위험함을 무릅쓰고 불아함(佛牙函)을 가지고 나왔으므로 적난(賊難=삼별초 난)에서 화를 면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사실이 대궐에 알려지니 왕은 그 공을 크게 포상(褒賞)하여 명찰(이름 있는 절)에 옮겨 주었으므로 심감은 지금 빙산사(氷山寺)에 살고 있다.

이일도 또한 그 각유에게서 친히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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