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령의 화신과 눈속의 파초

총령의 화신과 눈속의 파초

보리달마(菩提達摩)는 남인도 향지 국왕의 셋째 아들이다.

일찍이 출가하여 반야다라(般若多羅)에게 법을 받고 반년 동안 그를 섬기다가 양나라 보통 원년 서기 520년 9월에 광주 남해에 이르러 소주 자사 소앙의 소개로 금릉에 있는 양무제와 만나 문답을 이루게 되었다.

「짐이 위래(位來)에 절을 짓고 경을 쓰고 스님들을 대접하기 이루 말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이 했는데, 그 공덕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조금도 공덕이 없습니다.」

「어째서 공덕이 없습니까?

「인천소과(人天小果―인간이나 천상의 福報를 초래하는 業)는 유루(有漏―타락이 있는 것)의 인(因)이라

비록 있다 할지라도 참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 어떤 것을 참된 공덕이라 합니까?」

「깨끗한 지혜, 깨끗한 마음은 그 몸이 공적하여 말로 이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무제는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도리어 대사를 사마외도로 취급 하였다.

이에 대사는 곧 무제를 하직하고 강을 건너 숭산 소림사(少林寺)에 들어가 날마다 벽만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일러 벽관바라문(壁觀婆羅門)이라 일렀다.

이렇게 앉아 있기 9년, 하루는 눈이 무릎에 닿게 쌓였는데 신광이란 중이 와서 감로(甘路)의 법문을 일러 주실 것을 간청했다.

그러나 스님은 적연부동(寂然不動), 돌아보는 일이 없었다.

밤이 깊어 눈이 허리에 차자 비로소 민망히 여겨 신광에게 물었다.

「너는 무엇을 구해 문 가운데 그렇게 서 있는냐?」

「오직 원하오니, 큰 자비를 베푸시사 어리석은 중생을 제도해 주십시오.」

「모든 부처님들의 위없는 도는 광겁(曠劾-오랜 세월)에도 만나기 어렵거니 어찌 그 조그마한 덕과 지혜, 가벼운 만심(慢心)으로 진승(眞乘)에 오르려 하는가?

단지 수고로움만 더할 뿐이다.」

신광이 이 말씀을 듣고 크게 뉘우쳐 기쁜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곧 칼을 빼어 왼쪽 팔을 치니 팔이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눈 속에서 파초 한 잎이 올라와 그를 바쳤다.

「모든 부처님이 최초에 법을 구할 때 법을 중히 하므로 몸을 잊었는데 너는 이제 팔을 끊어 나에게 바치니 가히 그 마음을 알겠다.」

하시고

「이제부터 너의 이름을 혜가(懇可)라 하라.」하였다.

그래도 신광은 마음이 펀안치가 못했다.

「스님 저의 마음이 편안치가 못합니다. 스님께서는 저로 하여금 마음에 안정을 얻게 하여 주십시오.」 「그래, 그러면 그 마음을 이리로 가져오너라. 내가 너의 마음을 편안케 해 주리라.」

그러나 마음은 찾아도 가히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요, 더구나 갖다 바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마음은 찾아도 가히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면 너의 마음이 이제 편안해졌으리라.」

대동(大同) 원년 10월 대사가 장차 열반에 드시려고 시자(侍者)들을 불러 놓고,

「내 이제 열반에 들려하니 이제 너희들은 각기 얻은 바를 말해보라.」

시자 도부(道副)가,

「저의 소견은 문자에 집착하지도 않고 문자를 떠나지도 않는 것이 도를 씀이 되나이다.」

「너는 나의 살이다.」

하시자, 다음에 비구니 총지(摠持)가,

「저의 소견은 가섭불(迦葉佛)의 나라를 보고 기쁘기 그지 않사오나 한번 보고 다시보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너는 나의 가죽이다.」

도육(道育) 이,

「4대(大)가 본래 공하고 5음(陰)이 있지 아니하니 저의 소견은 가히 한 법도 믿음이 없나이다.」

「너는 나의 뼈다.」

하고, 다시 혜가가 곧 앞으로 나가 절 세 번을 하고 본 자리에 돌아와 서니,

「너는 나의 골수다.」

하였다.

「세존께서 정법안장 열반묘심(正法眼藏·涅槃妙心)을 가섭존자에게 전하여 여기 나에게 이르렀으니 나도 너에게 그것을 다시전하여, 아울러 믿음의 표시로 가사 1령을 주노니 잘 붙들어가지라.

이것은 나의 멸후2 백 년에서 그치리라.」

예언하시고 끝으로 게송(揭頌)한 수를 읊으셨다.

「내 본래 이 땅에 옴은 법을 전하고 미정(迷情)을 구하고자 함이라. 한 꽃에 다섯 잎이 피었으니 결과는 자연히 이루어지리라.」

대사의 입적(入寂)이 알려지자 나라 사람들이 떼로 몰려와 웅이산 정림사지(定林寺址)에 장사 지냈는데 이듬해 정월 위사(魏使) 송운(宋雲)이 인도에 갔다 돌아오다 총령(怒嶺)이란 고개에서 신 한 짝을 지팡이 끝에 걸고 홀로 걸어가시는 대사를 보았다.

「스님, 어디로 가십니까?」

「동토와 인연이 다하여 본국으로 가는 길일세.」

하고 그 신 한 짝을 친 종이에 쌓아주며,

「이것을 갔다 나라에 전하면 가히 알바가 있으리라.」

하였다.

사신이 대사를 작별하고 본국에 돌아오니 그 날이 바로 대사별후 백일이 되는 날이었다.

나라에서는 송운의 말을 듣고 괴이하게 생각하여 웅이의 장지를 열어보니 대사의 신체는 간 곳이 없고 단지 바른쪽 신 한 짝만 남아 맞춰보니 한 컬레가 분명했다.

이에 무제가 이 소식을 듣고 무릎을 치고 탄식 하며 가로되,

「진불(眞佛)을 알아보지 못하고 사승 취급을 하였으니 천불(千佛)이 탄생한들 어찌 이 죄를 다할 수 있으랴!」

하고 대성통곡하였다 한다.

<佛祖歷代通載券 九一二十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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