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정사 신효거사와 신기한 깃털
공주 사람인 신효거사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늙은 홀어머니를 혼자 힘으로 모셔야 하는 어려운 처지였다. 그는 어렵고 힘든 일을 불평 한 마디 없이 열심히 하는 성실한 효자였으나 가정형편은 점점 더 기울어져 가기만 했다.
어느 날 병이 든 어머니가 고기를 먹고 싶다고 하였으나 하루하루 겨우 끼니를 이어가는 형편에 대접할 길이 막막하였다.
그는 직접 산에 가서 짐승을 잡아오려고 활을 메고 사냥을 하러 나섰으나, 사냥에는 전혀 경험이 없는지라 하루종일 산을 헤맸지만 토끼 한 마리 잡을 도리가 없었다.
해가 저물어갈 무렵 낙담한 채 집으로 돌아오려는데, 돌연히 학 다섯 마리가 머리 위로 날아가기에 마지막 안간힘을 다해 겨냥하여 활시위를 당겼다.
그러나 학은 다 날아가 버리고 깃 하나만 땅에 떨어지므로 무심코 이를 집어 눈에 대보았다. 그랬더니 자기 앞을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이 노루ㆍ개ㆍ돼지 등의 갖가지 동물로 보이고 깃을 눈에서 떼면 전과 같이 모두 사람으로 보였다.
이것은 필시 살생하고자 마음먹은 업보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신효는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면서 도저히 다시 사냥할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어머니께 드릴 고기를 구할 수 없게 된 그는 곰곰이 생각한 끝에 냇가로 나가 자신의 넓적다리를 칼로 베어내었다. 이로 인해 많은 피가 흘러 냇물이 붉게 물들게 되었는데, 그때 마침 그곳을 지나던 왕의 사자가 이 괴이한 광경을 보고 달려와서 그에게 물었다.
“그대는 어찌하여 귀중한 몸을 칼로 베어 내느냐?”
“예, 사실은 어머니께 드릴 고기를 구할 수 없어 제 살이나마 베어 드리려고 이렇게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시자는 감격하여 궁에 돌아오자마자 즉시 왕에게 사실을 아뢰니, 이를 전해들은 왕은 놀라면서 말하였다.
“이와 같은 효성은 일찍이 고금을 통해 들어본 일이 없도다. 이를 세상에 널리 알려 효행의 귀감이 되게 하라.”
임금은 또한 신효에게 1백 섬의 쌀을 하사하여 어머니를 정성껏 봉양하도록 명하였다. 이로 인해 그는 어머니에게 고기반찬을 해드리며 효성을 다할 수 있었으나 몇 해 안 가서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고 말아, 신효는 자신의 집을 원(院)으로 만들고 출가하여 수도생활을 시작하였다.
사방을 유랑하던 중 아무래도 자신의 마음에 드는 사람다운 사람을 만날 수 없던 차에 어느덧 경주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사람 많은 경주에서도 깃을 대고 보면 모두가 동물로 보여, 다시 동해안을 따라 북상하여 명주(강릉)에 이르렀다.
이곳에서는 학의 깃으로 보니 사람으로 보이는 숫자가 많아,
“여기가 수도할 만한 곳이구나”
하고 산세와 순박한 인심에 끌려 여기저기를 순회하였다. 그러던 중 인품이 좋은 한 노파를 만나게 되어 물어보았다.
“이 고장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이 어디입니까?”
“여기서 서령(대관령)을 넘어 한참 가면 북으로 뚫린 골짜기가 있는데 그리로 가시오.”
이 말을 한 노파는 다름 아닌 관음보살의 화신이었다. 신효거사는 노파가 일러 준대로 찾아가서 이윽고 성오평에 이르게 되었다.
지나는 사람에게 이곳이 어디인지 물으니, 신라시대 자장율사에 의해 이룩된 월정사 입구라고 대답해주었다. 그가 월정사에 머무르면서 수도하게 된 며칠 후 다섯 명의 스님이 찾아와 묻는 것이었다.
“네가 가지고 있는 내 가사 한 폭을 어찌했느냐?”
“제가 어찌 스님의 가사자락을 가지고 있겠습니까?”
“네가 평소 들고 다니던 학의 깃이 내 가사자락이니라.”
신효거사는 깜짝 놀라 자신이 들고 있던 깃을 보니 스님의 가사자락과 같았으며, 그 스님이 입고 있는 가사의 떨어진 부분에 꼭 맞는 것이었다.
깃을 내주고 나니 다섯 스님은 말없이 돌아갔는데, 신효거사는 그들이 오대산(五大山)의 화신임을 깨닫게 되었다.
즉 오대산의 북대ㆍ동대ㆍ중대ㆍ서대ㆍ남대에 상주하는 보살들로서, 그 후 월정사에서는 한때 법당 안에 이들 5존상을 모신 일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