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정사 비단장수의 구도심
아주 옛날 비단행상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청년이 있었는데, 그는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효심 지극한 아들이었다. 어느 날 비단 짐을 짊어지고 강원도 대관령 고개를 넘어가다가 고갯마루에서 잠시 쉬게 된 그는 이상한 노스님을 한 분 발견하였다. 누더기를 입은 노스님이 길가 풀섶에 선 채 한참이 지나도록 꼼짝을 않는 것이었다.
“왜 저렇게 서 있을까? 소변을 보는 것도 아니고…. 거참 이상한 노릇이네.”
한참을 바라보던 청년은 궁금증을 견디지 못해 노스님 곁으로 다가갔다.
“스님! 아까부터 여기서 무얼 하고 계십니까?”
눈을 지그시 감고 서 있는 스님은 아무 말이 없었다. 여전히 눈을 감고 서 있는 노스님은 청년이 재차 묻자 얼굴에 자비로운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
“잠시 중생들에게 공양을 시키고 있는 중이라네.”
꼼짝도 하지 않고 서있기만 하면서 중생에게 공양을 시킨다니 도무지 알 수 없는 노릇이라 청년은 궁금증이 더욱 커졌다.
“어떤 중생들에게 무슨 공양을 베푸십니까?”
“옷 속에 있는 이와 벼룩에게 피를 먹이고 있네.”
“그런데 왜 그렇게 꼼짝도 않고 서 계십니까?”
“내가 움직이면 이나 벼룩이 피를 빨아 먹는데 불편할 게 아닌가.”
스님의 말을 들은 청년은 커다란 감동을 받았다. 비단장수를 그만두고 스님을 따라가 제자가 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였으나, 순간 청년의 뇌리에는 집에 계신 홀어머니가 떠올랐다.
잠시 망설이는 동안에 노스님은 발길을 옮겼고, 생각에 잠겼던 청년은 눈앞에 스님이 보이지 않자 비단 보퉁이를 팽개친 채 산길을 오르고 있는 노스님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스님은 청년이 다가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갔다. 이윽고 오대산 동대 관음암에 도착하자 스님은 청년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대는 어인 일로 날 따라왔는고?”
“저는 비단을 팔아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비단장수입니다. 오늘 스님의 인자하신 용모와 자비행을 보고 문득 수도하고 싶은 생각이 일어 이렇게 쫓아왔습니다. 부디 제자로 받아주십시오.”
청년은 간곡히 청했다.
“수도승이 되겠단 말이지. 그렇다면 시키는 대로 무슨 일이든지 다할 수 있겠느냐?”
“예 스님! 무슨 일이든지 시키기만 하십시오. 이 몸 힘닿는 대로 다할 것입니다.”
청년의 결심이 굳은 것을 확인한 노스님은 그의 출가를 허락하였고, 이튿날 아침 스님은 비단장수인 신입 행자를 가까이 불렀다.
“오늘 중으로 부엌에 저 큰 가마솥을 옮겨 새로 걸도록 해라.”
청년은 흙을 파다 짚을 섞어 반죽한 후 정성껏 솥을 새로 걸었다. 한낮이 기울어서야 일이 끝났다.
“스님, 솥 거는 일을 다 마쳤습니다.”
“오냐, 알았다.”
스님은 점검을 하기 위해 부엌으로 들어가서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걸긴 잘 걸었다만 이 아궁이에는 이 솥이 너무 커서 별로 필요치 않을 것 같으니 저쪽 아궁이로 옮겨 걸도록 해라.”
청년은 다음날 한마디 불평도 없이 스님이 시킨 대로 솥을 떼어 옆 아궁이에 다시 걸기 시작했다. 솥을 다 걸고 부뚜막을 곱게 맥질하고 있는데 노스님이 기척도 없이 불쑥 부엌에 나타났다.
“인석아, 이걸 솥이라고 걸어 놓은 거냐! 한쪽으로 틀어졌으니 다시 걸거라!”
노스님은 짚고 있던 석장으로 솥을 밀어내려 앉혀 버렸다. 청년이 보기엔 전혀 틀어진 곳이 없었지만 스님의 다시 하라는 분부를 받았으므로 불평 한마디 없이 새로 솥을 걸었다.
그렇게 솥을 옮겨 걸고 허물어 다시 걸기를 아홉 번 반복하였다. 9번 만에 노스님은 청년의 구도심을 인정했고, 솥을 아홉 번 고쳐 걸었다는 뜻에서 구정(九鼎)이라는 법명을 내렸다.
법명을 받은 구정스님은 고향의 어머니에게 달려가 자초지종을 말하자, 이야기를 다 들은 노모는 아들의 손을 꼭 잡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오! 참으로 장하구나. 대단한 결심을 했으니 어미 걱정은 추호도 하지 말거라. 어디 산 입에 거미줄 치겠느냐. 부다 열심히 수행 정진하여 큰스님 되는 일이 이 어미에게 효도하는 일이니 명심토록 해라.”
그 길로 집을 떠나 산으로 돌아온 구정스님은 뒷날 크게 명성을 떨친 구정선사가 되었고 스님의 수행은 오늘에도 입산 출가자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