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남사 안성군수 김위
때는 조선조 9대 숙종때의 일이다. 경상도 안동땅에 김위(金瑋)라고 하는 가난한 선비가 살고 있었다. 어느해 가을비가 여러번 치른 과거(科擧)였지만 실망하지 않고 항양을 향해 올라 가다가 경기도 안성(安城)땅에 다달아 날이 저물게 되었다.
큰 길에서 얼마쯤 떨어진 곳에 내(川)가 한 있고 내를 건너면 20여호나 되는 조그마한 마을이 있었는데, 마을 뒤에는 높은 산이 솟아있고 마을 옆쪽으로 나무가 우거진 곳에 큰 기와집 한 채가 눈에 띄었다. 김위는 그 기와집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대문에 당도하여
“이리 오너라”
하고 불러 보았으나 인기척이 없고 몇번 소리를 치자 그제서야 노인이 문을 부시시 열고 나왔다.
지나가는 과객인데 날이 저물어 하룻밤 재워 줄것을 간청하니 노인은 선뜻 친절한 기색으로 김위를 맞이 하였다.
김위는 노인과 함께 방에 들어가 서로 통성명을 하니 “이진사(李進士)”라고 하였다.
집안을 살펴보니 홀로된 젊은 며느리와 늙은 이진사가 살고 있었는데 노인의 집안 이야기인즉 , 3년전에 외아들이 갑작스레 죽었는데 아직 시체도 못 찾았고 왜 죽었는지 조차도 알길이 없어 답답한 마음으로 나날을 보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먼 길을 걸어온 김위는 그날밤 피로가 겹쳐 초저녁부터 곤하게 잠이 들었다.
한 밤중 잠속에서도 소변이 급하여 밖으로 나와 변소를 찾으려고 이집 담장을 돌아서는데 가까운 곳에서 인기척이 나는 것이었다.
잠시 숨어서 그쪽을 살펴보니 검은 그림자가 담장을 넘어가는 것이었다.
도적이 들어온 줄 알고 김위는 일단 소변을 급히 누고 안채로 들어가 동정을 살폈다.
별채에서 남녀의 소근거리는 소리가 나서 김위는 대뜸 집히는 것이 있어 자기 방으로 들어와 누워서 이 집안에 대한 일을 곰곰히 생각하다가 새벽잠이 들고 말았다.
이튿날 아침 밥을 얻어 먹고 이진사에게 인사를 드리니 한사코 하루밤 더 묵어가라는 것이었다.
김위는 어제밤 일이 머리 속에서 떠나지를 않아 마음이 개운치 않은 생각이 들어 하루밤을 더 묵기로 작정을 했다.
가을해가 서산에 매달릴 무렵이었다.
까마귀가 백운간을 날고 때마침 동네 가운데를 흘러가는 시냇물 저 편에서 소를 타고 처량하게 피리를 불며 가는 초동(草童) 아이가 있어 김위는 어듯 낙조(落照)라는 시제(詩題)가 떠올라 시 한수를 읊었다. 그리고 무심코 김위는 피리를 불며가는 초동의 뒤를 따라가서 그 아이가 들어가는 농가집 울타리 뒤에까지 다달았다.
그러자 초동아이가 자기 어머니에게 말하는 것을 쉽사리 들을 수 가 있었다.
“어머니 이진사네 집말야… 그집 며느리의 친정이 여주(驪州)래요, 그리고 박참봉네 글방 접장인 철근이도 여주 사람이라고 아까 나뭇꾼 아이들이 그러던데”
라고 초동이 말을 하니까 그의 어머니는 깜짝 놀라는 목소리로
“너 어린애가 뭘 안다고 그런 소리를 함부로 하느냐? 큰일날라고, 쉬!”
하면서 어린애의 입을 틀어 막는 것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이진사집에 대해서는 이상한 생각이 드는 판에 김위는 귀가 번쩍 띄었다.
“오냐 그렇다면 어젯밤 일이 심상치 않은 일이었구나 여하간 과거나 치르고 나서 볼 일이다.”
이렇게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이튿날 김위는 이진사께 작별인사를 하고 한양을 향해 바쁜 걸음으로 떠났다.
그럭 저럭 과천(果川)을 지나 남태령(南泰領)고개 마루턱에 이른 김위는 나무 밑에 앉아서 쉬고 있었다. 자고 온 이진사집 일이 머리에 떠 올랐다. 나중에는 이진사 노인의 생명까지도 위험하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도 들고 초동 아이의 말이 또한 머리를 스쳐간다.
그러던 중 그곳에서 지은 시를 또 한번 읊었다.
김위는 주위에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별안간 수풀 속에서 한 사람이 튀어 나오며 담배불을 청하면서 노형이 지어 읊은 시가 썩 잘된 시라고 칭찬을 하는 것이었다.
구절마다 신명이 일러준 싯귀 같다고 하며 어떻게 그 시를 지었느냐고 했다.
김위는 안성 땅에서 해질 무렵에 동네를 거닐다가 시상(詩想)이 떠올라 지은 것이라고 했으나 그 사람은 우연이 아니라 귀신이 붙은 글 같다며 끝구절에 초동이 피리를 불며 돌아 온다는 대목이 특히 그러하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김위는 그 선비와 동행이 되어 남태령 고개를 넘어 가면서 마침내 안성땅에서 있었던 일로서 그 집의 딱한 사정과 내려가는 길에 다시 한번 들려 그 내용을 캐 보겠다는 말로 이야기 했다.
그래서 낙조시도 그 무렵 우연하게 생각이 나서 글을 지었노라고 했다.
어느덧 한양 장안에 도착했다. 과거날을 맞으니 각처에서 구름같이 모여든 여러 선비들 틈에 끼어 김위도 한 자리에 앉아 과거를 보게 되었다.
그런데 이상하고도 신기한 것은 과거의 큰 제목이 바로 낙조였다.
김위는 서슴치 않고 안성땅 이진사의 마을에서 지어서 읊었던 시 여덟귀를 써 올려서 과거에 급제를 하였다.
혹시 당시의 시감이거나 시관(試官)으로 내정된 어떤 재상이 일부러 위장을 하고 남태령을 거닐며 과거보러 들어오는 선비들의 동정을 정탐하다가 김위가 그 글을 짓게된 동기를 듣고 그런 제목을 냈는지도 모를 일이다.
또 한편 이진사의 아들이 억울하게 죽음을 당하자 그 영혼이 김위로 하여금 그 일을 해결해 달라는 계시에서 그랬는지도 모른다는 말도 있으나 그러한 일들은 알 수 없는 것으로서 후일에 까지도 밝혀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김위는 여러번 낙방을 하던 끝에 이번에는 천우신조(天佑神助)로 급제를 하였다.
그러고 보니 안성 이진사집과 그 마을 생각이 두터워졌다.
실은 안성탕에서 묵는 동안 그 시를 읊은 것이 우연치고는 너무나 기묘하고 그래서 급제 한 것인 즉 이진사일을 잊어버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김위는 자진해서 안성군수(安城郡守)를 희망한 것이다. 안성군수가 된 김위는 부임후 자기 얼굴이 군민에게 널리 알려지기 전에 우선 미행으로 이진사의 마을을 찾았다.
물론 이진사는 구면인지라 전보다 더욱 친절히 대해 주었으나 며칠전에 와서 밥 사발이나 축내고 간 사람이 왜 또 왔는가하며 며느리로부터 푸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래도 김위는 꾹 참고 그전처럼 이집 사랑에 묵으면서 이진사와 좀더 자세하게 물었던 것이다.
이튿날 김위 안성군수는 펄근이라는 접장이가 무엇인가, 까닭이 있는 사람이라고 예측을 하고 전과 같이 과객 차림으로 붓장수를 가장하여 박참봉이 있는 글방으로 찾아 가게 되었다.
마침 철근이가 고향인 여주에 간 지 며칠 되었다고 하자 김위는 내일 갈 것이니 하룻밤만 재워 달라고 부탁을 하여 그 서당(書堂)에서 아이들 틈에 하룻밤을 새우게 되었다.
그가 박참봉의 집 글방에서 접장이가 되어온 것은 박참봉과는 친척 관계에 있기 때문이며, 접장이 되어 온 해는 이진사의 아들이 장가를 들던 해와 같은 해였다.
그리고 아이들의 주고 받는 이야기 속에서 철근이가 총각이라는 것과 공부에는 열성이 없고 밤낮 동네 마실 주막에 다닌다는 것이다.
주막에 가서 알아본 즉 오는 시간 나가는 시간을 따져보니 밤마다 이진사집 담을 넘어 들어가는 시간과 딱 맞아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김위는 모든 것을 철저히 조사하여 그 뒤 관가로 돌아왔다. 안성군수 김위는 부임하자마자 철근이를 체포하였다.
이미 정탐한 대로 여러가지 용의점을 제시하고 엄중히 문초한 결과 마침내 무서운 죄상을 자백하였다. 철근은 여주 고향에서부터 이진사의 며느리가 될 처녀와 정을 나누고 지내다가 그 처녀의 부모가 정해준 안성으로 시집을 가게 되자 부모에게 졸라서 안성 이진사의 마을로 글방 잡장이 되어온 것이었다.
그래서 대개 밤이 되면 주막으로 놀러가는 척 하고는 마실 주막에 잠깐 들리고 이진사의 집으로 가서 그 며느리와 정을 통해온 것이었다.
더욱 가공할 일은 그러한 불의의 짓을 하기 위하여 어느 사이엔가 이진사의 외아들을 목매어 죽여서 집 앞 연못 물속에 던져 버렸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자세히 알아낸 김위는 그 연못의 물을 퍼내고 아들의 시체를 건져내어 후히 장사를 지내 주었다.
그리하여 극악무도한 철근을 극형에 처하였고 이진사의 며느리는 이진사의 애원으로 관비로 삼아 목숨만은 살려 주었다.
이진사에게는 김위의 주선으로 양자를 세워주어 그 아들과 함께 여생을 안락하게 지내게 되었다고 한다. 김위는 이진사 집일로 해서 신조(神助)의 글귀를 얻어 과거에 급제하였으니 모두가 우연한 것이 아니요, 이진사를 위한 천의(天意)이기도 하다는 뜻에서 김군수는 평생을 두고 이진사를 정성껏 돌봐 주었으며 군민에게는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그 후 안성군민의 이름으로 김군구(金郡守)의 선정비를 세워 그 공을 길이 찬양 하였다고 하나 현재는 아무 흔적이 없고 다만 말로서만 전해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