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남사 미양고지
옛부터 풍수지리설은 사람의 마음을 더욱 간절하게 움직이게 한다. 특히 내가 잘되면 그만이지만 천에 한번이라고 일이 잘못되면 조상의 탓이라고 원망을 하고 조상 묘지를 옮기며 그 자리는 좋지가 않다는 등 말이 많았다.
이 모든 것이 자기의 욕심이며 현실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사리 판단이 어렵게 되면 남의 말과 풍문을 잘 듣게 되어 나중에는 도가 지나쳐 패가 망신을 하는가 하면 아까운 목숨마져도 초개와 같이 잃게되는 수가 비일비재하다.
여기에 소개하는 이야기 역시 엉뚱한 풍수지리설을 믿고 전설의 주인공이 된 고몽룡(高夢龍)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할까 한다.
지금으로부터 250여년 전의 일이었다.
경기도 안성군 미양땅 심촌(沈村)이라고 하는 동리에 고몽룡이라고 하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이 사람은 어려서부터 성질이 급하고 하고자하는 일은 우겨서라도 하고야마는 괴팍한 성격을 가졌다.
배움에 있어서도 시경을 읽는 것 보다는 [정감록(鄭鑑錄)]과 같은 잡서적을 즐겨 읽고 도술을 몹시 좋아해 몸에 익히기도 하고 남달리 욕심도 많아서 엉뚱한 생각을 많이 하였다.
어느해 부친이 작고하매 지관을 불러 묘자리를 보게 하였다.
사날(3~4일)을 두고 묘자리를 보러 다니던 지관이 이곳(지금의 미양면 고지리)에 묘를 쓰면 장차 운이 대통하여 나라에 큰 재목이 될 것이라고 일러 주었다.
더우기 지관의 말이 농사를 지어 벼 한말을 찧어 쌀이 도로 한말이 되면 당신이 마음먹은 대로 큰 일을 한번 해보시오.하고 일러주는 것이었다. 몽룡은 지관의 말대로 시행을 하였다.
그런데 신기 하게도 그 다음 해 부터는 가세가 점점 번성하고 재물도 많이 불어나 동네에서도 이름이 나는가 하면 근처에서도 고몽룡하면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이며 특히 고몽룡도사라고 불려지게끔 되었다.
이렇게 되다보니 자기가 신봉하는 [정감록]을 이용하여 나라에 큰 재목이 아니라 일인지하 만인지상인 재상에 점점 뚜렷한 것을 알고(정감록에 이르기를 가운데 손가락 셋째 마디의 끝까지 손금이 올라가면 임금이 된다고 적혀있음) 일부로 칼로 손가락을 째어 손금을 만들었다.
그리고 자기가 익혀온 신통술을 연마하여 부푼꿈을 키웠다.
그리하여 정부에서는 군사를 동원하여 몽룡의 졸개들을 치니 그들은 혼비백산하여 사방으로 흩어지고 관군에게 모두 항복하고 목숨만 살려 달라고 애원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두목이 몽룡을 놓쳤으니 관군들은 몽룡의 뒤를 쫓아 미양땅 보촌(保村)까지 다다르게 되었는데, 관군들은 이곳에서 몽룡을 놓지자 몽룡의 가족은 물론이고 근친까지도 대역죄로 다스려 참수를 하고 몽룡의 행방을 찾기 위하여 집안을 다시 샅샅히 뒤지니 사람은 커녕 개미새끼 한마리 없는데 이상하게도 그가 거쳐하는 방 시렁위에 사람 몸통만한 맹충이 찰싹 붙어있는 것이 아닌가.
관군들은 신경이 날카로운 끝이라 이 맹충을 칼로 내려치니, 그 맹충은 병력같은 소리와 함께 시뻘건 피를 뿜으며 두 동강이 나면서 몽룡의 토막시체가 나딩굴어졌다.
몽룡을 죽인 관군들은 또 다시 그의 집을 헐고 그 자리에다 못을 파서 몽룡의 시체와 세간을 모두 그 연못에 넣어 버리고 부친 산소까지 파해쳐 버렸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산소를 파해칠 때 한마리의 송아지가 세발을 세우고 앞발 하나만을 땅에 굻고 않아 울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설에 따라 동리 사람들은 이 연못의 물을 펴내지 않았다고 하는데 지금으로부터 한 오십년전에 가뭄이 하도 심하여 이 마을에 사는 한 농부가 이 연못물을 퍼서 논에 대다가 연못물이 다 없어질 즈음 전해 내려오는 전설도 있고 하여 한번 못속을 볼까하고 물을 부지런히 다 퍼내자 별안간 뇌성병력이 치며 소나기가 내려 퍼부으므로 그는 겁이나서 물을 푸다 중지하고 마을로 뛰어 들어가다가 벼락을 맞아 죽었다고 한다.
이 연못 바닥은 고금을 막론하고 보지 못한 못(池)이라 하여 옛부터 이자리의 못을 고지(古池)라 하였다고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각주 : 안성장(安城場)외곽을 흐르는 안성천(安城川)은 안성장을 보러오는 사람이면 건너야할 냇가인 것이다. 그 냇가의 건너편에 도구머리(지금의 道基洞)라는 마을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