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사 만경대설화
관악산은 진산(鎭山)이고 청계산은 청룡산(靑龍山)으로 서로 마주 보고 있다. 옛날에는 비가 오려고 하면 진산과 청룡산이 함께 울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옛날에 천지개벽을 할 때 배를 타고 다니며 돌을 주어 망경대를 만들었는데, 관악산 꼭대기인 영주대(연주대)에 배를 대고 돌을 모았다고 한다.
큰 비가 와서 홍수가 났는데, 관악산 꼭대기만 빼고는 모두 물에 잠겼으므로 배를 탔다는 것이다.
청계산 정상의 이름은 이 때 여러 경치를 주워 모아서 만들었다고 하여 만경대(萬景臺)라고 불렀던 것이라고 한다.
이성계가 왕씨를 치고 조선을 건국한 후 “충신은 불사이군이다, 신하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하여 조준의 동생 조견이 청계산으로 은거했다.
조견은 당시의 실력가로 꼭 회유해야 민심을 수습시키고 이성계가 정치를 할 수 있는데, 은거해 버렸으니 매우 곤란한 일이었다.
이전에는 조견과 이성계는 친구 간으로 조견은 장관, 이성계는 군사령관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루는 이성계가 방원과 함께 조견이 여막을 짓고 은거하고 있는 곳을 찾아갔다.
방원이 와서는,
“조선생 문을 여시오. 임금께서 오셨으니 문을 좀 여시오”
라고 하니 조견은 내다보지도 않고,
“나는 그런 사람을 알지 못한다.”
라며 문을 열지 않았다.
나는 임금이라는 말을 처음 듣는다는 뜻이었다.
그러자 이성계가 아들인 방원을 옆으로 비키게 한 후
“자네 친구 이성계일세, 문 좀 열게”
라고 하자 비로소 문을 열어 주었다.
문안으로 들어선 이성계가
“나를 좀 도와주게, 백성들을 안정시켜야 할 것이 아닌가.”
라며 조정에 나올 것을 권하였으나, 조견은 묵묵부답으로 대답이 없었다.
할 수 없이 여막을 나온 이성계는 친구를 위하여 청계사 옆에 큰 집을 지어주고 여막에서 나오기를 바라였으나 조견은 여주로 도망을 하고 말았다.
조견은 청계산에 있으면서 매일 산위에 올라가 서울(개성)을 바라보며, 언제 다시 왕씨가 이씨를 물리치고 다시 집권할 수 있을 지 기다리며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봉우리를 만경대(萬景臺)에서 망경대(望京臺)로 고쳐 불렀다.
여주로 도망간 후 이방원은 조견을 그대로 두면 불리하다 생각해 사람을 시켜 죽게 하였다.
조견이 숨을 거두기 전에 자손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죽거든 비석을 세우는데, 비문을 고려충신조모지묘(高麗忠臣趙某之墓)라고 쓰라”
고 하였다.
자식들이 생각해보니 고려충신이라고 쓰면 곧 집안이 멸문지화를 당할 것이므로 개국공신이라고 비문을 해 세웠다.
그러나 그 얼마 후에 하늘에서 뇌성과 함께 벼락이 쳐서 비석의 허리가 부러졌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