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계사 눈속에서도 칡꽃이 피눈곳 쌍계사
삼법·대비 두 스님이 육조 대사의 사리를 중국 당나라로부터 모셔와 이곳에 모시고 절을 짓게 된 이야기가 각훈 스님의 「육조정상동래연기(六祖頂相東來緣起)」에 나와 있는데, 이는 곧 지금 쌍계사의 창건 배경이기도 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삼법 스님은 평소 혜능 대사의 높은 덕망을 흠모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714년(성덕왕 13) 육조 대사가 입적했다는 소식을 듣고 친견의 인연이 없음을 한탄 하였다.
그러다 지금의 전라북도 익산 지역인 금마 미륵사의 규정(圭晶) 스님이 당에서 돌아오며 육조가 직접 지은 법보단경(法寶壇經)을 가져와 그것을 읽어 보고는 가르침을 친히 듣는 듯한 감동을 받았다.
삼법 스님은 그 글에서, “내가 간 후 5~6년에 나의 머리를 취할 사람이 있으리라.” 하는 내용을 읽고 직접 당에 가서 그 정골을 신라로 가져오겠다고 마음먹었다.
721년(성덕왕 20)에 이르러 김유신(金庾信)의 부인이기도 했던 비구니 법정(法淨) 스님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 당에 건너간 뒤 입당(入唐)한 후 경주 백률사의 스님 대비 스님을 만나 관련 정보를 얻고, 또한 장사 장정만의 도움을 입어 마침내 육조 혜능 대사의 정상(頂相)을 얻을 수 있었다.
삼범 스님은 대비 스님과 함께 귀국하였는데, 꿈에 한 노사(老師)가 현몽하여, “강주(康州) 지리산 아래 설리갈화처(雪裏葛花處)에 봉안하라.”는 말을 받았다.
강주는 진주의 옛 이름이고, “설리갈화처”란 곧 눈 속에 칡꽃이 핀 곳이라는 뜻이다. 삼법, 대비 두 스님은 현몽대로 강주의 지리산 아래에 왔는데 때가 한 겨울인 12월이라 눈 때문에 길을 제대로 찾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난감해 하는 두 스님 앞에 한 쌍의 호랑이가 나타나서 길을 인도하였다. 함께 따라가 보니 큰 석문 안으로 터가 있었다. 그 곳은 봄날같이 따스하였으며 과연 칡꽃이 난만하게 피어 있었다. 두 스님은 바로 이곳이 인연처라 깨닫고 옥천사라는 절을 짓고 석함에다 정상을 봉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