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리사 창건설화
아직 겨울이라기엔 이른 늦가을이었다.
옷은 비록 남루했지만 용모가 예사롭지 않은 한 고구려인이 신라 땅 일선군(지금의 경상북도 선산)에 있는 부자 모례장자 집을 찾아왔다.
“어떻게 제 집엘 오시게 되었는지요?”
모례장자는 행색과는 달리 용모가 순수한 낯선 객에게 점잖고 융숭하게 대하면서도 일말의 경계를 금할 수 없었다.
“나는 묵호자라는 고구려 승려입니다.”
인연이 있는 땅이라 찾아왔으니 나를 이곳에 묵을 수 있도록 주선하여 주십시오.”
당시는 신라에 불교가 공인되지 않은 때인지라(눌지왕 때) 모례장자는 묵호자의 불법에 관한 설명이 쉽게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전생부터의 인연이었는지 아무래도 낯선 객이 신비스럽고 큰 불도를 알고 있는 대인인 듯하여 지하에 밀실을 지어 편히 지내게 했다.
이 무렵. 조정에서는 중국에서 의복과 함께 보내온 향의 이름과 쓰는 법을 몰라 사람을 시켜 나라 안을 두루 돌아다니며 알아보게 했다.
이 소문을 들은 묵호자는 사람을 불러 친히 일러줬다.
“이는 향이라는 것으로 태우면 그윽한 향기가 풍기지요. 만일 이를 태우면서 정성이 신성한 곳에 까지 이르도록 간곡히 축원하면 무슨 소원이든지 영험이 있을 것입니다.”
그 후. 얼마가 지난 뒤, 나라에서는 묵호자를 청하는 사신을 보내왔다.
“공주마마가 위독하옵니다. 백방으로 약을 쓰고 의원을 불러 치료를 했으나 전혀 효험일 없어 이렇게 모시러 왔사오니 어서 궁궐로 함께 가주시지요.”
불법을 펴기 위해 숨어서 때를 기다리던 묵호자는 때가 온 듯 선뜻 승낙하고 서라벌로 향했다.
묵호자는 공주가 누워 있는 방에 들어가 향을 피우고 불공을 드렸다.
그윽한 향기가 방 안에 차츰 퍼져 가득하고 묵호자의 염불이 끝나자 공주는 감았던 눈을 스르르 뜨면서 제정신을 찾았다.
왕은 기뻐하며 묵호자에게 소원을 물었다.
“빈승에게는 아무것도 구하는 일이 없습니다. 다만 천경림에 절을 세워서 불교를 널리 펴고 국가의 복을 비는 것을 바랄 뿐입니다.”
왕은 즉시 이를 허락하여 불사를 시작케 했다. 묵호자는 그때부터 숨겨 둔 불명 아도란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왕이 세상을 뜨고 새 임금이 등장하자 나라에서는 하루아침에 아도화상을 해치려 했다.
아도는 제자들과 함께 다시 모례장자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들은 그곳에서 경을 가르치고 설법했다. 많은 신봉자가 따르는 가운데 낮에는 소와 양을 1천 마리씩 길렀다.
그렇게 5년의 세월이 흐른 뒤 아도화상은 행선지도 밝히지 않고 훌쩍 그곳을 떠났다.
모례장자가 가는 길을 물었으나
“나를 만나려거든 얼마 후 칡순이 내려올 것이니 칡순을 따라오시오.”
라는 말을 남겼을 뿐이었다.
그 해 겨울, 과연 기이하게도 정월 엄동설한에 모래장자 집 문턱으로 칡순이 들어왔다.
모례장자는 그 줄기를 따라갔다. 그곳엔 아도화상이 있었으니 그곳이 바로 신라불교의 초전지인 지금의 도리사 터였다.
“잘 오셨소, 모례장자. 내 이곳에 절을 세우려 하니 이 망태기에 곡식 두말을 시주하시오.”
아도화상은 모례장자 앞에 작은 망태기를 내놓고 시주를 권했다.
모례장자는 기꺼이 승낙을 하고는 다시 집으로 내려와 곡식 두 말을 망태기에 부었으나 어인 일인지 망태기는 2말은 커녕 2섬을 부어도 차지 않았다. 결국 모례장자는 재산을 다 시주하여 도리사를 세웠다.
모례장자의 시주로 절을 다 지은 아도화상이 잠시 서라벌 나들이를 하고 돌아오는데 절이 세워진 태조산 밑에 때아닌 복사꽃이 만개하여 눈이 부셨다.
아도화상은 이에 절 이름을 「도리사」라 칭했고 마을 이름을 도개마을이라 했다.
지금도 도리사 인근 마을에 가면 양과 소 천 마리를 길렀던 곳이라 해서 「양천골」「우천골」이라 부르고, 도개동 윗마을에는 외양간이 있었다 해서 「우실」이라 부른다.
또 모례장자의 집터는 「모례장자터」 그리고 유뮬운 「모례장자샘」이라 하는데, 모례장자 샘에서는 지금도 맑은 물이 샘솟고 있다.
이 마을에서는 긴 화강암을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엇갈리게 짜 맞추어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