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계사 중창설화
파계사에는 조선후기 숙종 때 현응대사(玄應大師)가 일으킨 삼중창 대한 설화가 전한다.
조선에 들어 억불정책으로 인해 사람 취급조차 제대로 받지 못한 스님들은 갖가지 부역에 시달려야만 했다.
이러한 사정은 파계사도 예외는 아니어서 어느 날 현응스님은 파계사만이라도 부역을 없애고자 하리라는 원(願)을 세우고, 7백여 리의 길을 걸어 한양성에 이르렀다.
그러나 당시에는 승려의 도성출입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남대문 밖에서 머물면서 한강물을 져다가 민가에 날라주며 때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어느덧 3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러던 어느 날 숙종은 남대문 2층에 올랐더니 남대문 밖의 세 번째 집 위에서 청룡과 황룡이 찬란한 광명을 놓아 하늘에 사무치는 꿈을 꾸었다.
그리하여 왕은 ‘남대문 밖 세 번째 집에 가서 사람이 있거든 데리고 오라’는 명령을 내렸고, 마침내 현응스님은 숙종을 알현하게 되었다.
왕은 스님에게 한양에 온 까닭을 물었다. 스님이 불교계의 어려움과 승려의 부역에 대해 자세히 아뢰면서 소원을 말하자, 아들이 없었던 숙종은 스님에게 한양백리 이내의 기도처에서 생남기원(生男祈願)을 해 줄 것을 청하였다.
현응스님은 쾌히 수락하고 때마침 한양 가까이에 와 있던 금강산 만회암(萬灰庵)의 농산대사(聾山大師)와 각각 수락산 내원암(內院庵)과 북한산 금선암(金仙庵)에서 기도를 시작하였다.
70여일이 지났을 때 현응스님은 선정(禪定)에 들어 이 나라 백성들 중 임금의 지위에 오를 복을 지닌 사람을 관찰하였다.
그러나 한 나라의 앞날을 이끌만한 사람은 보이지 않았고, 왕의 소원을 이룰 수 있도록 하려면 자신이 죽든지 농산대사가 죽는 수밖에 없었다.
현응스님은 파계사의 일을 처리하기 전에는 죽을 수 없어 농산대사에게 간곡한 편지를 올려 왕자의 몸으로 태어날 것을 청하게 되었는데, 이에 농산대사는
“내가 나라의 위축(爲祝)기도를 맡은 것으로 인(因)을 삼았는데, 기도를 마치기도 전에 과(果)가 벌써 돌아왔구나, 아 50년 동안 망건을 쓰고 있어야 한다는 말인가”
라 말하고 백일기도를 회향한 날 밤에 입적(入寂)하였다.
그날 밤 농산대사는 숙종과 숙빈(淑嬪) 최씨의 꿈에 현몽하였고, 그 이듬해인 1694년(갑술)에 왕자로 탄생하여 커서 영조가 되었는데, 실로 그의 예언대로 52년 동안 재위하였다.
이에 숙종은 파계사를 중창하도록 명하고, 파계사 반경 40리(里)에서 거두어들이는 세금 모두를 파계사에 주도록 하였다.
그러나 현응대사는 세금을 주는 대신 왕실의 위패(位牌)를 파계사 경내에 모심으로써 유생들의 행패는 물론 각종 부역의 피해 없이 승려들이 수행에만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게 하였다.
현재에도 부도밭 옆에는 ‘대소인개하마비(大小人皆下馬碑)’가 남아 있는데 이는 바로 그때 세운 것이라 한다.
현재 절에는 보물 제992호 관세음보살좌상, 보물 제1214호 영산회상탱, 유형문화재 제7호 원통전, 문화재자료 제7호 설선당, 문화재자료 제8호 산령각, 문화재자료 제9호 산령각, 문화재자료 제10호 진동루, 문화재자료 제11호 기영각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