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갑사 창건설화
신라말엽, 왕은 기우는 국운을 걱정하여 지금의 전라남도 영암군 월출산 기슭에 99칸의 대찰을 세우도록 명했다.
당시 왕궁 이외의 건물은 백 칸을 넘지 못하도록 국법에 정해져 있어 왕은 아쉬움을 금치 못한 채 99칸 대웅보전을 신라에서 가장 아름답고 웅장하게 건립할 것을 명하였다.
이때 서까래를 맡은 목공이 사보라 노인이었다. 건물이 아름답고 웅장하려면 하늘을 차고 나는 듯 치솟은 지붕의 멋을 한껏 살려했는데, 이를 위해 서까래를 가장 잘 다듬는 당대의 뛰어난 대목 사보라 노인에게 일이 맡겨진 것이었다.
팔순이 넘은 노인은 이 불사를 필생의 작업으로 삼아 온 정성을 다해 젊은 목수의 도움도 마다하고 5백여 개의 서까래를 깎고 다듬었다.
그런데 상량을 며칠 앞두고 낱낱이 자로 재면서 깎은 서까래가 계획보다 짧게 끊겨져 있음을 알게 되었다. 노인은 깊은 한숨을 몰아쉬며 재고 또 재어 보았으나 결과는 마찬가지, 노인은 절망하였고 그만 자리에 눕고 말았다.
며칠을 침식을 끊고 사람을 멀리하는 노인을 보고 이를 걱정하던 며느리가 간곡히 그 까닭을 묻자 노인은 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러나 이를 들은 며느리 역시 무거운 근심 속에 잠길 뿐 대책이 없었다.
그러던 며칠 후 상량을 사흘 앞두고 공사를 맡은 벼슬아치들이 영문도 모르고 사보라 노인의 병문안을 왔다.
병문안을 마치고 돌아가는 벼슬아치들을 전송하던 그때 며느리의 눈에 한 줄의 가지런한 서까래가 두 줄로 보였다.
며느리는 문득 깨달아 노인에게 달려가 짧은 서까래를 겹쳐 대면 더 웅장하고 튼튼할 것이라 고했다. 이에 노인은 생기를 되찾아 공사현장으로 달려가 마치 춤을 추는 듯 날렵하게 기둥과 기둥, 대들보에서 처마 끝을 재고 부연을 켜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웅장하고 아름다운 대찰을 완성하였으며 도갑사는 우리나라 최초로 부연을 단 건물을 지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