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묵조사 노모의 영전에 불후의 제문을 지어 바쳤다.

진묵조사가 상운암에 주석하실 때이다. 사찰경제가 어려워 진묵조사를 제외한 모든 승려들이 결제를 앞두고 식량확보를 위해서 탁발에 나섰다. 승려들이 멀리 탁발을 나가 한 달 남짓하여 돌아왔는데, 진묵조사를 찾으니 탁발 떠날 때 보았든 좌선자세로 두눈을 감고 선정에 들어 있었다. 진묵조사의 얼굴에는 거미줄이 처지고, 무릎사이에는 먼지가 쌓여 있었다. 승려들이 놀라 거미줄을 걷어내고 먼지를 쓸어내고서 큰 절을 하여 “아무개 돌아왔습니다.”하고, 인사를 드리니 진묵조사는 그제서야 선정에서 눈을 뜨고 이렇게 말하였다.

“너희들은 어찌도 이리 빨리 돌아왔느냐?”

진묵조사는 출가승려이지만, 어머니를 떠나지 않고 어머니를 당시 왜막실에(현재, 완주군 용진면 아중리)에 모시고 효도를 다하였다. 노모가 모기떼의 극성에 고통을 받자 진묵조사는 왜막실을 관장하는 산신을 불러 모기떼가 일제히 사라져 나타나지 않도록 명령하였다고 한다.

마침내 노모는 세상을 떠났다. 진묵조사는 애통히 울부짖으면서 노모생전에 약속한 천하의 명당인 ‘천년향화지지’에 안장하였다. 그리고 노모의 왕생극락을 발원하며 승려들과 함께 지극지성으로 49제를 올리었다. 그 때, 진묵조사는 슬피 울면서 노모의 영전에 다음과 같은 불후의 제문을 지어 바쳤다.

胎中十月之恩何以報也 膝下三年之養未能忘矣

열달동안 태중의 은혜를 무엇으로 갚으리요/슬하에서 삼년동안 길러주신 은혜 잊을 수가 없습니다.

萬歲上更加萬歲子之心 猶爲嫌焉百年內未滿百年

만세 위에 다시 만세를 더 하여도 자식의 마음에는 부족한데/백년 생애에 백년도 채우지 못하시었으니

母之壽何其短也 單瓢路上行乞一僧旣云已矣

어머니의 수명은 어찌 그리 짧습니까/한 표주박을 들고 노상에서 걸식하는 이 중은 이미 말할것도 없거니와

橫차閨中未婚小妹寧不哀哉

비녀를 꽂고 아직 출가하지 못한 누이동생이 어찌 슬프지 않겠습니까

上壇了下壇罷僧尋各房 前山疊後山重魂歸何處

상단불공과 하단의 제가 끝나니 승려는 각기 방으로 찾아가고/앞산 뒷산 첩첩산중인데 어머니의 영혼은 어디로 가시었습니까.

嗚呼哀哉

아! 슬프기만 합니다!

진묵조사가 어머니의 영전에 바친 제문은 전국승려에게 전파되었다. 그 제문을 받아 읽은 승려들 가운데는 각기 떠나온 어머니를 생각하고, 효도를 하지 못한 자책감에 대성통곡하는 승려가 부지기수였다. 어쩌면 진묵조사의 제문은 만세를 두고 불교가 존재하는 한, 모든 승려들의 사모곡의 제문이 될 것이다.

진묵조사는 노모생전에 약속한 대로 노모를 천년향화지지에 안장하였다. 그곳은 현재 전북 김제군 만경면 화포리 조앙산이다. 누구의 입에선가 진묵조사의 어머니인 조의씨를 두고 성모(聖母)라는 존칭이 붙여졌다. 누구의 입에선가, 진묵조사 어머니의 묘소의 풀을 깎고, 향화를 바치고, 공양을 올리고 기도하면, 한 가지 소원은 성취할 수 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묘소옆에는 성모암(聖母庵)이 들어서고, 또다른 사찰이 창건되었다. 곧이어 경향각지에서 성모의 묘소를 친견하고 기도하기 위해 향화와 공양을 올리기 위한 순례자들이 줄을 이었다. 성모의 묘소에는 한 시도 빠짐없이 촛불이 밝혀지고 향화가 피워 올랐으며 순례자들의 기도소리가 끝이지 않았다. 진묵조사는 노모와의 약속대로 ‘무자손천년향화지지’에 노모를 모신 것이다. 한국의 역사에 묘소앞에 촛불 밝히고, 향피우며 온갖 공양물을 올리면서 기도하는 곳은 유일하게 진묵조사의 어머니 묘소뿐일 것이다.

어느 날, 진묵조사는 스스로 삭발하고, 목욕하고나서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는 지팡이를 끌고서 산문을 나가 개울을 따라 걷다가 지팡이를 세우고, 물가에 서서 손가락으로 물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가르키면서 시자에게 말했다.

“저것은 석가모니불의 그림자이니라. 알겠느냐?”

시자는 의아하게 생각하여 대답하였다.

“아닙니다. 화상의 그림자입니다.”

진묵조사는 힘겹게 웃으며 다시 말하였다.

“너는 화상의 가짜 그림자만 알았지. 석가모니의 참모습은 알지 못하는구나.”

마침내 그는 지팡이를 어깨에 메고 자신의 선실로 돌아와 가부좌를 하고서 제자들을 불러 작별의 말을 하였다.

“나는 이제 떠나갈 것이다. 물을 것이 있으면 지금 물어 보아라.”

제자들은 숨죽여 흐느끼면서 물었다.

“대사께서 돌아가신 뒤에는 종승(宗乘=법맥)을 뉘에게 잇겠습니까?”

진묵조사는 잠시 묵상에 잠겼다가 깨어나 말하였다.

“무슨 종승이 있겠느냐?”

진묵조사는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열반에 들으려 하였다. 제자들은 이구동성으로 간청하였다.

“종승을 누구에게 잇겠습니까? 하교하여 주소서.”

진묵조사는 힘겹게 눈을 떠 간청하는 제자들을 딱한 듯 보면서 마지못해 이렇게 말하였다.

“굳이 종승을 잇는다면, 명리승이지만, 정장노(靜長老= 서산, 휴정대사)에게 붙여 두어라.”

이윽고 진묵조사는 자신의 열반종 소리를 들으면서 영원한 대적삼매(大寂三昧)에 들어가니 그 때, 그의 세수가 72세요, 법랍이 52이니 곧 계유(1632)년 10월 28일이었다.

진묵조사의 부음을 전해들은 봉곡선생은 대성통곡하며, ” 대사는 승려이면서, 행은 진실한 유자(儒者)였다고 증언하고, 애도 하였다.

이 글을 쓰는 필자는 2003년 어느 봄 날, 홀로 진묵조사의 어머니의 묘소가 있는 곳을 방문하였다. 과연, 성모암이 있었고, 진묵조사의 어머니는 어느 사이에 성모(聖母)요, 신앙의 대상으로 추존되어 기도 예배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묘소 앞에는 젊은 비구니 스님이 가사장삼을 정제하고 목탁을 치면서 소리높여 불호를 부르는 정근기도를 하고 있었고, 수십명의 여신도들이 다투어 촛불을 밝히우고 향로에 향을 피우며, 꽃과 과일, 밥, 쌀, 등 공양을 올리고, 또 지폐를 묘소앞에 바치고 기도발원을 하며 무수히 큰절을 올리고 있었다. 어느 여신도는 염주를 헤아리며 삼천배를 올리고 있었다.부산넘버가 붙은 관광버스가 계속 몰려들어 오고 있었다. 그 기이한 신앙의 풍경에 필자는 아연하였다. 불교를 바로 배우고 깨달은 불자라면 납득이 안가는 신앙의 행위들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필자는 고개를 가로 저어 딱하게 보았지만, 어찌하랴? 민심이 신앙의 대상을 정해 버렸는데…. 역시 진묵조사는 대단한 인물이었다.

진묵조사의 진영을 모신 ‘진묵전(震默殿)’을 찾으니 전면의 네 기둥에는 앞서의 취흥이 도도했을 때의 뱃포큰 시가 주련(柱聯)에 적혀 있었다.

전각안에는 이상한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진묵조사와의 진영과 어머니의 진영, 그리고, 진묵조사의 시집간 여동생마저 처녀 시절의 진영으로 신앙의 대상으로 봉안되어 있었다. 그 가족은 일제히 단상에 불상처럼 앉아 중생의 재앙을 멸하고, 복(福)을 주는 전능한 신(神)이 되어 있었다. 그곳에는 남녀신도들이 역시 촛불을 밝히고 헌향,헌화, 쌀, 과일 등과 지폐를 놓고 다투워 소리높여 중생의 소망을 이루려는 기도를 하고 있었다.

필자는 단상의 인물들을 보면서 순간, 전각이 떠나가라 앙천대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필자의 돌연한 웃음에 기도하는 남녀들이 걱정스럽게 쳐다보았고, 특히 단상에서 신앙의 대상이 된 진묵조사와 어머니, 여동생이 당황해 하는 듯 보였다. 아마 살아 움직일 수 있다면, 그들은 단상에서 황급히 단하로 내려왔을 것이다. 진묵조사의 여동생의 모습은 같은 화공의 솜씨인가, 춘향이나 논개처럼 예쁘게 그려 있었다. 그녀는 영원한 성처녀(聖處女)로 봉안되어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일자출가에 구족이 승천한다’, 는 불가의 교훈이 진묵조사의 가족에게 해당되는 것 같았다. 진묵전에 진묵조사의 온가족이 향화를 받는데 그곳의 단상에는 여전히 진묵조사의 부친의 모습은 없었다. 어머니에게 지극히 효도를 보인 진묵대사가 어찌 부친은 챙기지 않았을까? 화두삼아 궁구해보자. 만고의 효자가 왜?

이상한 신앙의 풍경에 놀라운 마음으로 귀로에 오르려고 소나무 숲속을 걷는데, 노송아래에서 한 노승이 묘소에서 기도하는 중생들을 멀리 바라보면서 흐뭇한 얼굴로 파안대소를 터뜨리고 있었다. 필자가 가까이 가서 인사를 하려니 얼핏 초의선사의 진영을 닮아 있었다. 필자가 눈을 부비고 다시 확인하고자 하니 홀연 그 노승의 모습은 연기처럼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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