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천왕반야바라밀경(勝天王般若波羅蜜經) 제3권
05. 법성품(法性品)
그때 승천왕이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대고 합장하며 부처님을 향하여 머리를 땅에 대고 발에 예를 드리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희유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如來)·응공(應供)·정변지(正遍知)께서는 시원스럽게 미묘한 큰 신통력을 설하셨습니다. 모든 부처님 여래께서는 무슨 인연으로 이것을 얻었습니까? 원하옵건대 세존께서 분별하여 설명하여 주십시오.”
부처님께서 승천왕에게 말씀하셨다.
“대왕이여, 모든 부처님 여래는 행함이 매우 깊어 불가사의하며 과(果)를 얻는 것도 또한 그러하니라.”
승천왕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모든 부처님 여래께서는 어떤 법을 행하셨기에 매우 깊고 불가사의하다고 합니까?”
부처님께서 승천왕에게 말씀하셨다.
“대왕이여, 모든 부처님 여래의 법성과 인과는 불가사의하며 공덕과 법과 중생을 이익하게 함도 이와 같으니라.”
승천왕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무엇을 법성이 불가사의하다고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대왕이여, 모든 중생의 음(陰)·계(界)·입(入) 가운데에서 시작을 알 수 없는 옛날부터 상속하여도 청정한 법성(法性)의 체(體)를 물들이지 못하며, 일체의 마음과 식(識)도 반연하여 일으키지 못하며, 모든 다른 각관(覺觀)도 분별하지 못하며, 삿된 생각을 사유함도 인연하지 못하며, 법은 삿된 생각을 여의어 무명(無明)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런 까닭에 12인연을 따라 생기지도 않아 모양이 없다[無相]고 하니, 즉 만든 법이 아니요 생김도 없고 멸함도 없고 끝도 없고 다함도 없어 스스로의 모양이 항상 머물러 있느니라.
대왕이여,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 법성이 청정함을 알아서 이와 같이 더러움에 물드는 것도 없고 집착함도 없고 번뇌[垢穢]를 멀리 여의고 모든 번뇌에서 뛰어넘어 해탈을 얻으니, 이 성품은 곧 모든 부처님 법의 근본이요 공덕과 지혜가 그로 인하여 생기며 체의 성품[體性]이 밝고 청정하여 불가사의한 것이니라.
대왕이여, 내가 지금 비유로 말해줄 터이니, 그대는 자세히 들으라.”
왕이 세존께 아뢰었다.
“예, 그러하겠습니다. 듣기를 원하옵니다.”
부처님께서 승천왕에게 말씀하셨다.
“비유하건대 값을 매길 수 없는 여의보배 구슬을 잘 꾸미고 빛나게 다듬어서 희고 깨끗하고 사랑할 만하고 형체가 원만하며 지극히 청정하여 더럽거나 흐림이 없으나, 진흙탕에 떨어져 많은 세월이 지난 후에라도 어떤 사람이 주워서 검사해보고 가지고 보호하여 떨어지지 않게 함과 같이, 법의 성품도 그러하여 비록 번뇌에 덮여 있어도 물들지 않으며 반드시 뒤에 다시 나타나는 것이니라.
대왕이여, 모든 부처님 여래는 모든 중생들의 자성(自性)이 청정하여 비록 외부로부터 묻은 먼지와 같은 번뇌에 덮여 가리워져 있더라도 속의 자성에까지 이르지 못함을 아시느니라. 이런 까닭에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함에 마땅히 이렇게 생각해야하느니라.
‘나는 마땅히 용맹하고 부지런히 정진하여 닦아 모든 중생을 위하여 매우 깊은 반야바라밀을 설하여 그 번뇌를 없애리라. 일체 중생은 다 성품이 청정하니, 따라서 그들에 대해 하열(下劣)하다는 생각을 내지 말고 마땅히 존중할 것이며 그들은 곧 나의 스승이니 법답게 공경하리라.’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은 마음을 먹으면 반야의 지혜[闍那]와 대비(大悲)가 생겨나느니라.
대왕이여,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아비발치(阿鞞跋致 : 不退轉)의 자리[地]에 들어가는 것이니라.
대왕이여,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 다시 이런 생각을 해야 한다.
‘이 모든 번뇌는 힘이 없고 능함도 없으며 자체가 허망하여 청정함과 서로 어긋난다. 왜냐 하면 살바야(薩婆若 : 一切智)를 등진 까닭이다. 청정한 법의 성품은 모든 법의 근본이나, 자성은 근본이 없고 번뇌는 허망하여 다 삿된 생각을 따라 전도되어 생겨날 뿐이다.’
대왕이여, 비유하면 4대(大)는 허공에 의지하여 서 있고 허공은 다시 의지함이 없으니, 번뇌도 그러하여 법성에 의지하되 법성은 의지함이 없느니라.
대왕이여,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 여실하게 보고 알아서 거스르거나 거역함이 일어나지 않고 수순하는 까닭에 번뇌가 생기지 않느니라.
대왕이여, 보살마하살이 번뇌를 관찰함에 물들거나 집착함이 생기지 않느니라. 만약 스스로 물들어 집착한다면 어떻게 설법하여 타인을 생사에서 벗어나게 하겠는가? 이런 까닭에 보살은 집착하는 마음을 끊어 없애고 여실하게 설교하여 중생의 결박을 풀어주는 것이니라.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 다시 이런 생각을 한다.
‘만약 생사 가운데 하나의 번뇌가 있어서 중생을 이익 되게 한다면 내가 받아 거둘 것이다.’
또한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 다시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옛날 모든 부처님께서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마땅히 이와 같이 행하였을 것이다. 무슨 까닭인가? 모든 부처님 여래께서 옛날 불도를 닦을 때[因地]에도 이와 같이 배워서 보리를 이룬 까닭으로 이 두 가지 연을 갖게 된 것이다.’ 이런 까닭에 보살은 가지가지 방편으로 이 법의 성품을 아느니라.
대왕이여, 이와 같은 법의 성품은 한량없고 끝이 없으며, 모든 번뇌에 덮여숨겨진 것이다. 생사의 흐름을 따라 6도에 침몰하여 무명의 긴 밤에 중생심을 따라 돌고 돈 까닭으로 중생의 성품이라 하는 것이니라.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함에 있어서 싫어하여 여의는 마음을 일으켜 다섯 가지 번뇌의 욕심[五塵 : 五境]을 없애고 위없는 도를 닦으니, 이때 이 성품을 벗어났다[出離]고 하느니라. 일체의 고통을 넘어선 까닭에 고요함[寂靜]이라 하고 구경의 법이 되며 일체 세간이 즐겨 구하는 것이니라. 일체종지에 항상 미묘하게 머물러서 이 법성으로 인하여 자재로움을 얻어 법왕의 자리를 받게 되느니라.
대왕이여,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함에 있어서 처음과 중간과 제일 위의 자리에서 법성을 관찰함에 모든 것이 평등하고 본래 고요하여 다 걸림이 없니, 마치 온갖 물질[衆色]이 허공을 채우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라.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함에 있어서 모든 부처님께서 설하신 온갖 수행을 진실되게 알아서 헤아림과 같이 수행하느니라.
법성의 공덕은 자세히 설할 수 없는데, 두 가지 모양이 없고, 같고 다른 경계를 넘어서 평등하고 똑같은 모양이기에 감각이나 감관으로는 행하지 못할 것이니라.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사람의 모양[人相], 법의 모양[法相], 이 두 가지 모양을 없애지만, 모든 범부는 집착하여 얽매여서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며 법의 성품을 얻지도 못하느니라.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곧 이와 같은 법의 성품을 통달하여 가령 중생에 있어서도 둘도 없고 다름도 없느니라. 무슨 까닭인가? 여여(如如)하며 다르지 않기 때문이니라.
대왕이여,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함에 있어서 이 법성에 의하여 모든 선근을 닦아 삼계[三有]에 들어와서 중생을 이익하게 하며, 비록 무상함을 나타내나 진실은 아니니라. 무슨 까닭인가?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여실하게 법의 성품을 보기 때문이니라. 방편을 구족하고 대비의 원력으로 중생을 버리지 않으나 이승(二乘)의 범부는 이와 같은 대비의 본원이 없느니라. 이런 까닭에 원만하고 청정한 법의 성품을 보지 못하느니라.
대왕이여,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이와 같이 법성을 관함에 일체 성인이 닦을 것도 없고 닦을 법도 없으며, 행할 것도 없고 행할 법도 없느니라. 또한 마음도 없고 마음의 법도 없으며, 업도 없고 과실도 없으며, 괴로움도 없고 즐거움도 없느니라. 이와 같이 보는 것을 평등함을 얻었다고 하며 다른 것을 멀리 여의지도 않고 광대하게 수순하여, 나도 없고 내 것도 없으며, 높음도 없고 낮음도 없으며, 진실하여 다함이 없고, 항상 머물러 밝고 청정하느니라. 무슨 까닭인가? 모든 성인의 법이 이로 말미암아 성취되며 이 성품으로 인하여 성인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니라.
대왕이여, 모든 부처님 여래의 끝없는 공덕과 함께하지 못하는 법[不共法]은 이 성품에서 생기며 이 성품으로 말미암아 나오느니라.
대왕이여, 모든 성인의 지계·선정·지혜의 품성[品]이 이 성품에서 나오고, 모든 부처님과 보살의 반야바라밀이 이 성품에서 나오느니라. 이 성품은 고요하여 모든 이름과 모양을 초월하며 이 성품은 곧 진실함이라 전도됨을 여의며, 이 성품은 다르게 변하지 않는 까닭에 성인의 지혜 경계와 같다고 말하고, 제일의(第一義)라고 하느니라.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며, 항상 하지도 않고 단멸하지도 않으며, 생사도 아니고 열반도 아니니라.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으며, 같음도 여의고 다름도 여의며,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느니라.
대왕이여,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함에 다시 이런 생각을 하느니라.
‘법의 성품은 모양을 여의고, 일체법은 모양을 여의어 둘도 없고 다름도 없다.’ 무슨 까닭인가? 일체법은 모양을 여의니, 곧 법의 성품이 모양을 여읨이니라. 법성이 모양을 여의니 일체 중생도 모양을 여의고 법계도 같이 모양을 여의며, 법계가 모양을 여의니 일체법도 모양을 여읨이니라. 이와 같이 모양을 여의니 구하여도 얻을 수 없음이니라.
법성이 여여하니 중생도 여여하고 동일하여 둘이 없으며, 중생이 여여하니 법성도 여여하여 동일하여 둘이 없느니라. 또한 법성이 여여하니 일체법도 여여하여 둘도 없고 다름도 없으며, 일체법이 여여하니 모든 부처님도 여여하여 둘도 없으며 다름도 없느니라. 법성이 여여하니 과거·미래·현재도 여여하여 서로 어기어 거역하지 않으며, 과거가 여여하니 미래도 여여하며 또한 서로 어기어 거역하지 않느니라. 과거·미래·현재가 여여하니 곧 이 음(陰)·계(界)·입(入)이 여여하고, 음·계·입이 여여하니 곧 이 더럽고 청정함[染淨]도여여하며, 더러움과 청정함이 여여하니 곧 이 생사와 열반도 여여하고, 생사와 열반이 여여하니 곧 이 일체법이 여여하느니라.
대왕이여, 이렇게 여여하다는 것은 곧 다르지 않다는 것을 말함이니, 변함도 없고 생기지도 않고 다툼도 없고 진실한 것이니라. 다툼이 없는 까닭에 이름하여 여여라고 하느니라. 여실한 지견에 모든 법이 생기지 않고 모든 법이 비록 생겨도 여여하여 움직이지 않으며, 여여함에 비록 모든 법이 생겨도 여여함은 생기지 않느니라. 이것을 일컬어 법신은 청정하고 변함이 없어 마치 허공과 같고 견줄 것이 없다고 하고, 삼계에 한 법도 미칠 자가 없으며, 두루 중생의 몸에도 더불어 같은 자가 없느니라. 청정하여 때를 여의어 본래 더럽지 않고 자성이 밝고 청정하여 자성이 생기지도 않고 일어나지도 않으며, 마음과 뜻과 알음알이[識]에 있으면서도 마음과 뜻과 알음알이의 성품이 아니니라. 곧 이것이 공이요 모양이 없음이고 서원도 없음이며, 허공계에 두루한 모든 중생의 처소로서 모든 것에 평등하여 끝도 없고 헤아릴 수도 없으며 다르지도 않고 구별되지도 않느니라. 색도 아니고 색을 여읨도 아니며, 수(受)·상(想)·행(行)·식(識)도 아니고 수·상·행·식을 여읨도 아니며, 지(地)·수(水)·화(火)·풍(風)의 요소[大]도 아니고 지·수·화·풍의 요소를 여읨도 아니며, 생김도 생김을 여읨도 아니니라. 비록 생사를 거스르나 열반을 따르지도 않고,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며, 코로 냄새 맡지 못하고, 혀로 맛보지 못하느니라. 몸으로 깨닫지 못하고, 뜻으로도 알지 못하느니라. 마음·뜻·알음알이[心意識]에 있지도 않고, 마음과 뜻과 알음알이를 여의지도 않느니라.
대왕이여, 이것을 법성이라 이름하는 것이니라.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이 법을 통달하여 청정하게 수행하면, 삼천대천세계 가운데 어떠한 염부제의 성읍이나 취락에서도 보살은 다 색신(色身)을 나타내니, 나타난 몸이란 색도 아니고 모양도 아니니라. 그러나 색과 모양을 나타내며, 6근의 경계가 아니되 중생을 교화하여 항상 쉼이 없느니라. 이 몸은 항상함이 없어서 내가 없고 괴로움이며 부정한 법임을 설하기 위함이니라. 중생에게 고요한 성품이 있음을 환하게 알아서 한량없는 가지가지의 몸을 나타내 보여 선교방편으로 그들이 교화를 받아 온갖 몸을 알면 만든 자도 없고 받는 자도 없어 마치 목석과 같으니 중생을 위하여 청정행을 설하는 것이니라.
대왕이여,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법성을 통달하면 곧 자재로움을 얻어 이동함이 없느니라. 지혜의 업을 일으키어 신통에 유희하여 가지가지로 나타내어 자재로움에 안주하며, 또한 가지가지 위의를 나타내며 자유자재로 일체종지(一切種智)에 나아가 모든 법을 다 통달하느니라.
대왕이여, 반야바라밀은 이와 같이 자재로워 이것이 다함이 없는 모양으로 일체처에 두루 하여 색이 없이 색을 나타내고, 자유자재로 두루 모든 중생의 마음을 보며 여실하게 마음을 보고 심성을 자재로이 기억하여 생각하며, 끝없는 수의 겁에 상속하며 끊어지지 않고 자유롭게 변화하여 해탈한 모양에 머무느니라. 자재로 번뇌를 다하되[漏盡] 중생을 위하는 까닭에 번뇌가 다함을 증득하지 않고[不證] 또한 자재로 세상에 나오니 이것이 성인의 지혜의 경계인 것이니라.
자재함이 매우 깊어 성문과 연각이 헤아리지 못하고 자재함이 견고하여 마귀가 파괴하지 못하며, 도량에 이르러 불법을 성취하여 가장 제일이 되느니라.
자재로 수순하여 큰 법륜을 굴리고 자재로 일체 중생을 고르게 교화하며, 자재로 자리[位]를 받고 법을 얻는 것도 자재로 하느니라.
대왕이여,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여실하게 매우 깊은 법성을 통달하여 이런 자재를 얻느니라.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이 자재를 닦아 곧 모든 선정·해탈·삼매·삼마발제를 얻어 욕계·색계·무색계에 얽매이지 않느니라. 무슨 까닭인가? 일체의 허망한 분별과 번뇌에 얽매임으로 전도되어 집착하는 모양을 멀리 여의며, 다음 생을 받을 때 자재로 태어나고 얽매임이 없으며, 만약 멸도를 나타내고자 함도 또한 자재하며, 그 태어나는 것을 따라 항상 대승을 가지고 불법을 성취하며, 시방을 통하여 궁구해 찾아도 부처님의 법은 마침내 얻지 못하니, 모든 법은 부처님 법과 동일하여 항상하지도 않고 끊어지지도 않느니라. 무슨 까닭인가? 이 법을 궁구하여 찾아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니라. 여실한 이치로 궁구하여 찾아도 얻지 못하니, 이 법은 있다고도 말하지 못하고 없다고도 말하지 못하느니라. 또한 이름과 모양이 없으며 이 경계를 넘어서 만약 이름과 모양 을 여의면 곧 이것이 평등이요, 만약 법이 평등하면 곧 집착이 없고 집착할 것도 없으니 이 법이 진실이니라. 그러나 만약 진실함에 다시 집착하면 곧 이것이 허망이므로 집착하지 않는 까닭에 곧 허망함도 아니요, 걸리어 집착할 것이 없으면 마음이 곧 무애하나니, 무애는 바로 막힘이 없음이요 막힘이 없으면 곧 다툼이 없고 다툼이 없으면 바로 허공이 되느니라. 이 법은 욕계에도 매여 있지 않고 색계에도 매여 있지 않으며, 무색계에도 매여 있지 않나니, 만약 일체처에 속하여 매인 바가 없으면 이 법은 색도 없고 모양도 없고 형상도 없느니라. 만약 색도 없고 모양도 없고 형상도 없다면 이 법은 마땅히 그 경계를 따르지만, 그러나 앎을 여의고 또 아는 것을 여의는 것이니라. 무슨 까닭인가? 이 가운데는 적은 법을 깨달을 수 있다든가 적은 법을 깨달았다 함이 없으니, 이것을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평등함을 통달함이라고 하느니라.
대왕이여,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 대자·대비·대희(大喜)·대사(大捨)를 보며, 나를 보지 않고 중생을 보지 않으며, 수명을 보지 않고 남[人]을 보지 않느니라. 비록 보시를 행하되 마음을 조복하고, 계의 모양을 여의되 마음이 청정하게 계를 가지며, 다함이 없는 마음으로 인욕을 수행하고, 마음을 여의어 정진하며, 고요한 마음으로 선정을 닦고, 마음에 인연하는 것이 없이 반야를 수행하느니라.
마음에 4처(處)를 생각하면서 평등한 마음으로 정근(正勤)을 수행하며, 희론하는 마음을 여의고, 모든 신족(神足)을 닦으며, 중생을 분별하여 모든 근(根)을 관찰하고, 죄[愆失]의 마음을 여의고 모든 근(根 : 五根)과 역(力 : 十力)을 닦으며, 분별하는 마음으로 깨달음의 갈래[覺分 : 七覺支]를 관찰하느니라. 또한 공 들이는 마음[功用心] 없이 바른 도를 닦고 익히며, 마음에 집착하는 바 없이 청정한 믿음이 있고, 자연지(自然智)의 지혜로 모든 법을 생각하고, 평등지(平等智)의 마음으로 모든 삼매를 닦으며, 분별하지 않는 마음으로 반야바라밀을 관하느니라.
멈추어 쉬는 마음으로 삼마지를 닦고, 보는 것이 없는 마음으로 비바사나를 닦으며, 생각함이 없는 마음으로 부처님을 생각하여 닦고, 법계를 통달하여 평등한 마음으로 법을 생각[念]하여 닦으며, 머무는 바가 없는 마음으로승(僧)을 생각하여 닦느니라. 본심이 청정하여 중생을 교화함에 분별이 일어나지 않는 법계의 마음으로 일체법을 가지며, 허공과 같은 마음으로 불국토를 청정하게 하며, 얻는 바가 없는 마음으로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고, 나아가고 물러감이 없는 마음으로 아비발치(阿鞞跋致)를 얻으며, 상이라는 마음을 멀리 여의어 상이 있는 것을 보지 않고, 삼계가 평등한 마음으로 도량을 장엄하며, 마음이 모든 법을 깨달아 알고, 법륜을 굴리되 설하고 듣는 것을 보지 못하며, 열반을 나타내보이되 생사의 본성이 평등함을 아느니라.
대왕이여,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이와 같은 모든 법을 관함에 보는 것을 보지 않고 보이는 것을 보지 않으나, 즉시 유희 자재함을 얻느니라. 무슨 까닭인가? 스스로의 마음이 청정하면 일체 중생의 청정함을 보기 때문이니라.
대왕이여, 비유하면 허공은 일체가 두루 가득함과 같이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마음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이 법을 설할 때 대중 가운데 팔만 사천의 사람과 하늘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얻고 삼만 이천 보살이 무생법인을 얻었으며, 팔만 사천 중생이 티끌(塵)을 멀리하고 때[垢]를 여의어 법의 눈이 청정함을 얻었으며, 일만 이천 비구가 다 누진(漏盡)을 얻었다.
부처님께서 승천왕에게 말씀하셨다.
“대왕이여,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마음에 청정함을 얻어 깊고 큼이 바다와 같으며, 공덕과 지혜는 측량할 수 없느니라. 보살마하살이 세상에 나타나시고 모든 공덕의 보배를 중생이 그것을 쓰는 것에서부터 나아가 보리에 이르기까지도 다함이 없으며 보살의 공덕도 없어지지 않느니라. 마치 큰 바다에서 갖가지 보배가 쏟아져 나옴과 같으니라.
보살의 지혜는 매우 깊고 들어가기 어려워 성문과 연각이 건널 자가 없으며, 또한 큰 바다에 작은 짐승이 들어가지 못하듯 보살의 지혜도 광대무변하다. 왜냐 하면 집착도 없고 머묾도 없고 빛깔도 없고 모양도 없기 때문이니라. 보살의 지혜는 처음에서 마지막까지 차례로 점점 깊어져서 처음 보리심에서 뒤에 살바야(薩婆若)에 이르기까지 보살의 법 그대로이다. 번뇌와 악지식과는 같이 함께 머물러 있지 못하며 세간의 지혜[世間智]가 만약 보살의 지혜 가운데 들어온다면 한 모양이요 한 맛이니[一相一味], 즉 모양 없는 살바야요 분별 없는 맛인 것이니라.
보살마하살이 일체법을 관함에 법은 늘어나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나니, 무슨 까닭인가? 법성은 깊고 평등한 것임을 통달했기 때문이니라. 보살마하살은 대자비의 힘으로 본래 서원을 어기지 않으며 모든 성인이 의지할 곳이고 모든 중생에게 영겁으로 설법하여도 다함이 없느니라.
대왕이여,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이와 같이 매우 깊은 법성을 통달하였느니라.
대왕이여, 보살마하살은 세속의 온갖 법을 잘 통달하여 비록 모든 물질을 설하여도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며, 이 물질을 추구하여도 끝내 집착하지 않나니, 수·상·행·식도 이와 같으니라. 또한 비록 땅에 대해 설할지라도 진실함이 아니고 땅을 추구하여도 끝내 집착하지 않나니, 물·불·바람·허공·식(識)도 이와 같으니라. 비록 눈의 대상을 설하나 진실함이 아니요 눈의 대상을 추구하여도 끝내 집착하지 않나니, 귀·코·혀·몸·뜻도 이와 같으니라. 비록 다시 나를 설하여도 진실함이 아니며 추구하여 찾아보아도 끝내 집착하지 않으며, 중생·목숨·사람을 양육하는 것[養育人]·행위하는 것[作者]·수명이라는 것[壽者]·안다는 것[知者]·본다는 것[見者]도 이와 같으니라.
비록 세간을 설하여도 진실함이 아니요 세간을 추구하여도 끝내 집착하지 않으며, 비록 세간법을 설하여도 진실함이 아니요 세간법을 추구하여도 끝내 집착하지 않으며, 비록 부처님법을 설하여도 진실함이 아니요 부처님 법을 추구하여도 끝내 집착하지 않으며, 비록 보리를 설하여도 진실함이 아니요 보리를 추구하여도 끝내 집착하지 않느니라.
대왕이여, 대개 언설이 세간의 도리라고 이름하나 이는 진실함이 아니니라. 그러나 만약 세간의 진리[世諦]가 없다면 제일의제(第一義諦)는 설할 수 없느니라.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 세속의 진리를 통달하되 제일의제를 어기지 않고, 곧 그것을 통달하여 법은 생김도 없고 멸함도 없고 허물어짐도 없고, 이것도 없고 저것도 없음을 알며, 온갖 언어와 문자의 희론을 여의느니라.
대왕이여, 제일의(第一義)란 말을 떠나 고요하고 성지(聖智 : 正智)의 경계여서 변하거나 파괴됨이 없는 법이니라.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오시거나 세상에 나오시지 않거나 성품과 모양은 항상 머무나니, 이것을 보살이 제일의제에 통달하였다고 하느니라.”
그때 승천왕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만약 모든 법은 생기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자성이 공하여 여의었다 한다면 어떻게 부처님께서 세간에 출현하시어 법륜을 굴리며, 어떻게 보살이 생김이 없는 법에서 생김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승천왕에게 말씀하셨다.
“대왕이여, 법은 멸하지 않는 까닭에 생기지 않는다. 무슨 까닭인가? 성품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세간 도리[世諦]의 인연 때문에 생기고 멸함이 있다고 보나 이것은 다 허망하여 진실로 있는 것이 아니니라.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선교방편으로 인연의 법을 보아 세간의 도리가 다 공하여 있는 것이 없고, 견실함을 보지 못하며, 있는 것 같으나 그림자 같고 불꽃 같고 메아리 같고 허깨비 같아서 불안하게 요동하며, 인연을 좇아 생기는 줄 아느니라.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로써 모든 법이 공하며 나아가 인연에서 생겨난 것임을 보고 이렇게 생각하느니라.
‘이들 모든 법을 지금 보건대 생겨남이 있고 머무름이 있고 멸함이 있느니라. 어떤 인연으로 생겨나고 어떤 인연으로 멸할까?’ 곧 무명을 인연한 까닭으로 모든 행(行)이 있고 행에 의하여 식(識)이 생기고, 식에서 명색(名色)이 생기고, 명색에서 6입(入)이 생기고, 6입에서 촉(觸)이 생기고 촉에서 수(受)가 생기는 까닭에 범부가 애(愛)를 일으키며, 갈애(渴愛)에 의해 취(取)가 생기고, 취를 인연한 까닭에 곧 유(有)가 상속하며, 유로 말미암아 생(生)하고, 생은 곧 노(老)가 있고, 노에서 사(死)·우(憂)·비(悲)·고뇌(苦惱)가 있게 된다고 아느니라. 이런 까닭에 수행하여 무명을 끊고자하는 것이며 만약 무명이 끊어지면 나머지 열한 개의 부분도 다시 멸하는 것이니라. 비유하면 만약 사람의 몸에서 목숨[命根]이 끊어지면 나머지 근(根)은 쓰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라.
대왕이여, 삿된 견해를 가진 외도는 해탈을 구하기 위하여 다만 죽음만 끊고자 하고, 생(生)을 끊는 것은 알지 못하느니라. 만약 법이 생기지 않으면 곧 멸함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니,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흙덩이를 사자에게 던지면 사자는 사람을 쫓아오므로 흙덩이는 스스로 쉬는 것과 같으니라. 보살도 그러하여 다만 생겨남만 끊으면 죽음은 저절로 멸하게 된다. 개는 오직 흙덩이를 쫓고 사람을 쫓을 줄 모르므로 흙덩이가 끝내 쉬지 못하느니라. 외도도 그러하여 생겨남을 끊는 것은 알지 못하여 끝내 죽음을 여의지 못하느니라.
대왕이여,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모든 법의 생멸 인연을 잘 아느니라.
대왕이여,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인연으로 생기는 법이 공하여 진실로 있는 것이 없음을 알아 아만을 일으키지 않으며, 만약 바라문·찰리·거사·장자의 집에 태어나도 존귀함과 호걸스런 부자란 두 가지 아만을 일으키지 않느니라. 만약 빈천한 집에 태어나면 스스로 숙업이 매우 청정하지 않아서 하열하게 태어나는 과보를 받았음을 알고 마음에 싫어함이 생겨 곧 출가하여 이렇게 사유하느니라.
‘나의 이 몸은 잡업(雜業)으로 얻은 것이기에 다시 청정한 선업[淨業]을 닦아 스스로 청정하게 하고 남도 그렇게 하리라.’
스스로가 이미 생사를 건넜으면 또한 다시 남도 건너게 하고, 스스로가 벗어남을 구하였으면 또한 남도 얽매임을 벗어나게 하며, 이런 인연으로 곧 정진하는 마음이 생겨 게으름에 떨어지지 않고, 도를 막는 악법은 다 끊어 없애고 도를 돕는 선한 법은 마땅히 모두 늘어나게 하여 부지런히 정진한다.
또한 이런 생각을 한다.
‘나는 무거운 짐을 지고 있으니 마땅히 스스로 일체 번뇌를 없애고 중생을 제도하여 게으르지 않으리라.’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스승을 친근하여 많이 들었거나 적게 들었거나 알거나 모르거나 계를 지키거나 파계를 하거나 다만 부처님같이 생각하며 같이 배우는 이를 공경하여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지금 스승에 의하여 배워 익히고 선을 닦아, 아직 만족하지 못한 것은 다 만족하게 하고, 번뇌가 아직 다하지 못하였으면 그것을 끊어 다하게 하고, 선한 법을 옹호하고 선하지 않은 것은 버리며, 일체종지로 세간을 연민 히 여길 것이다.’
대비의 복전(福田)은 고요하여 하늘과 사람의 스승이요, 나의 큰 스승이니 이로움[吉利]을 잘 얻으며, 일체 하늘과 사람이 모두 법왕으로 섬기고 스승으로 삼느니라.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 다시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부처님께서 청정계를 말씀하시되 설령 몸과 목숨을 위해서라도 또한 헐거나 범하지 않아야 한다고 하셨으며, 세존께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수순하는 것이 부처님께 공양하는 것이다 하셨다. 만약 바라문·찰리·거사·장자가 가지가지 음식을 신심으로 베풀어 주면 법과 같이 받아쓰되 그 사람의 과보가 헛되지 않게 하며, 베푸는 자나 먹는 자가 같이 함께 이익을 얻을 것이다.’
바라문·찰리·거사·장자가 사문의 이름으로써 보살을 불러 복전이라는 생각을 하면 보살은 마땅히 이치와 같이 헤아리고 정법을 수행하며, 곧 사문의 공덕과 복전의 공덕이 나타나게 해야 하느니라.
보살은 이와 같이 스스로 수행하고 남도 교화하여 일찍이 쉬어서 행하지 않음이 없느니라.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함에 이와 같이 수행하면 일체 세간에 수순하여, 성내는 자를 보면 하열하다는 마음을 내고, 높고 거만한 자를 보면 내가 없다는 생각을 일으키며, 삿되고 왜곡된 사람을 보면 정직한 생각을 일으키고, 거짓말하는 사람을 보면 여실한 말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일으키며, 입이 험한 사람에게는 항상 고운 말을 설하고, 굳세고 강한 자에게는 부드럽고 평화로움을 나타내 보이고, 참혹하게 악독한 사람을 보면 자비와 인욕을 행하며, 삿된 법을 믿는 사람을 보면 대자(大慈)의 마음을 낼 것이고, 고통 받는 중생을 보면 대비심을 일으킬 것이며, 간탐하거나 질투하는 사람을 보면 보시를 행할 것이니라.
대왕이여,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이와 같이 세상의 지혜[世智]를 따라 청정한 불국토에 태어나니, 무슨 까닭인가? 지계는 모자람이 없고 모든 잡된 더러움을 여의며, 평등한 마음을 닦아 중생의 처소에서 큰 선근을 갖추고, 명리를 집착하지 않으며, 청정한 믿음으로 과보를 바람이 없고, 부지런히 정진하여 게으르지 않고, 모든 선정을 닦아 산란한 법을 여의며, 미묘한 지혜를 많이 듣고 익혀 모든 근(根)은 모자람이 없이 날카로운 지혜를구족하며, 항상 대자비를 닦아 성냄의 고통을 멀리 여의니 이런 인연으로 청정한 부처님 나라에 태어나느니라.”
그때 승천왕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설하신 바와 같이 지계 등의 법을 닦아 불국토에 태어난다면 한 가지만 수행하여도 불국토에 태어납니까?”
부처님께서 승천왕에게 말씀하셨다.
“대왕이여, 만약 보살마하살이 앞에 설한 가지가지의 법 가운데에서 청정하게 한 가지를 수행하면 온갖 법을 닦는 것과 같아서 이와 같이 한 가지를 수행하여도 정토에 태어나느니라. 무슨 까닭인가? 하나하나의 수행 가운데 여러 가지 수행이 갖추어져 있는 까닭이니라.
대왕이여,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함에 이와 같은 수행으로 정토에 태어나며 태(胎)에 의해 더럽혀지지 않느니라. 무슨 까닭인가? 보살마하살은 부처님의 상을 만들고 가람의 지붕을 수선하고 여래의 탑 앞에 향을 개어 바르고 태우는 향을 공양하며, 혹은 향탕으로 불상을 씻고 가람 안에 더러운 흙을 쓸고 씻기 때문이니라. 보살마하살은 부모의 몸과 스승[師僧]과 같이 배우는 이와 모든 사문을 공양하고 살펴보되 평등한 마음으로 다 공양하고, 이 선근을 일체 중생을 위하여 되돌리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하여 청정함을 얻게 하느니라.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곧 세속을 여의는 것이니라. 무슨 까닭인가? 마음에 집착함[取著]이 없고 붕당(朋黨)에 물들지 않고 모든 경계를 뒤로 하며, 사랑의 인연을 멀리 여의고 경계에 물들지 않으며, 세존께서 설하신 계를 여실하게 수행하며, 욕심을 줄이고 만족할 줄 알며, 네 가지 물건[事]을 마땅하게 따르고 만족하고, 넘칠 때는 마음에 항상 두려워하며 고요함을 즐겨 여의느니라.
대왕이여, 이와 같이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세속법에 집착하지 않고 청정한 행[淨命]을 얻어 위의에 거짓이 없고 말과 뜻에 속임이 없으니, 시주(施主) 앞에는 끝내 속이지 않고 위의를 나타내어 고요하고 천천히 걸어서 몸 앞의 육 척 정도를 보지만 단월(檀越 : 시주자)을 등지면 제멋대로 기탄없이 하고, 시주 앞에서 이양(利養)을 위하 않고 소리를 낮추어 가느다란 말과 부드럽고 아름다운 말로 그들의 뜻에 순종하지만 단월을 등지면 스스로 방종하며, 남에게 보시를 행하는 것을 보면 입으로는 필요치 않다고 말하지만 마음으로는 진실로 쓰고자 하니, 이와 같은 것을 이름하여 내심이 번뇌로 뜨거워 입으로는 욕심이 적음을 나타내고 마음으로는 이익을 탐한다고 하느니라.
대왕이여,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 이런 거짓은 다 없고 이로움을 구하는 모습을 여의며, 만약 단월을 보더라도 삼의(三衣)가 낡고 발우가 없으며 탕약이 필요하다고 말하지 않느니라. 혹 시주 앞에서 아무 단월은 이 물건을 보시하였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니라. 그 사람이 나를 계를 잘 지키고 들은 것이 많고 크게 자비[大悲]하며 마음이 청정하다고 말하지만, 비록 그렇게 찬탄하나 나는 이런 덕이 없으니, 오직 마땅히 수행하여 시주의 은혜에 보답할 것이다. 보살마하살은 응당히 이와 같이 자기를 칭찬하거나 남을 헐뜯거나 속인[白衣]에 수순하여 이양(利養)을 구하지 않느니라.
만약 다른 사람에게 보시하더라도 성내지 말고 아첨하고 굽혀서 재물을 취하지 않고 친함을 속여서 남을 해롭게 하거나 물건을 취하지 않을 것이요, 남을 희롱하여 재물을 취하지 않을 것이요, 단월이 자기가 찬탄하는 사람이나 설법하는 사람이나 대중에게 보시하려 하든지, 아직 아무에게도 마음 둔 곳이 없던지 혹은 보시를 결정하지 못했으면 보살은 그 가운데 들어가서 몫을 취해서는 안 되느니라. 만약 보시의 재물을 받으면서 마땅히 이것은 내가 가져야 한다, 이것은 나의 물건이다라고 고집하지 않을 것이요, 마땅히 스승[師僧]이나 부모 및 다른 가난한 이에게 보시를 돌려주어 고르게 수용할 것이요, 만약 재물이 다하여 없어도 근심하지 않을 것이며, 며칠간 얻지 못하여도 마음으로 고뇌하지 않을 것이니라.
대왕이여, 보살마하살은 보시를 받더라도 되돌려 주니, 두 가지가 모두 청정하느니라. 행이 청정한 까닭에 마음이 피로하지 않다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함에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하여 오랫동안 생사에 머물러 있어도 싫어하고 걱정하지 않으며, 만약 악마의 일이 있고 온갖 고통에 시달려도 마음이 물러남이 없느니라. 만약 사람이 이승(二乘)의 도를 행하고자 하면 그를 위하여 설법하되 피로해 하거나 꺼려하지 않느니라.
보살은 스스로 보리를 돕는 법을 닦아 싫어하거나 게으름이 없느니라.
대왕이여,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이와 같이 정진하면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을 행하여 수순한다. 무슨 까닭인가?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 모든 방일을 여의고 마음을 항상 근신하여 자기 몸을 잘 거두어서 악하고 선하지 못한 모든 법을 짓지 않으며 입도 또한 그러하다.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 비록 현재는 두려움에 처하여 있을지라도 미래의 악하고 선하지 못한 모든 법을 끊어서 생기지 않게 하며, 말은 반드시 이치에 맞게 항상 설법하여 가르치고 법이 아니면 말하지 않느니라. 더러운 업[穢業]은 다 버리고 순수한 청정행을 닦아 부처님의 가르침을 훼손하지 않으며, 번뇌의 부정한 법을 멀리 여의니 이것을 여래의 바른 가르침을 옹호하고 악하고 선하지 못한 모든 법을 다 끊어 여읜다고 하느니라.
대왕이여,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 이와 같이 부처님의 청정한 가르침에 수순하여 모든 중생을 보고 얼굴에 먼저 웃음을 띠고 찡그림이 없나니, 왜냐 하면 마음이 더러움을 여의어 모든 근이 청정하고 더럽지 않으며, 번뇌를 여의어서 마음에 성냄이 없고 안으로 한(恨)을 맺음이 없기 때문이니라.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곧 많이 들음을 얻느니라. 생사를 관찰하여 여실하게 알고, 탐욕의 불이 훨훨 타오르고 성냄의 불이 태우며, 어리석음의 불이 항상 어지럽게 미혹함을 또한 여실하게 아느니라. 유위(有爲)는 무상하고 일체행은 고통이며, 모든 법은 내가 없고[無我] 세간 중생은 희론에 탐착하지만 일체법 가운데는 오직 열반만이 있어서 마침내 고요하느니라.
만약 남의 설법을 들으면 뜻을 사유하여 다른 사람에 전하고 대자비를 일으켜 견고한 뜻을 세울 것이다. 또한 법을 듣지 못하면 생각하고 닦는 것 또한 없을 것이다. 이런 까닭에 지혜를 듣는 것은 마치 문자의 근본과 같은 것이다. 모든 지혜는 그로 인하여 생기며 이미 많이 들었으면 곧 정법을 지켜 나갈 것이니라.
대왕이여, 앞으로 다가올 말세에 정법이 멸하려 할 때에는 어떤 한 중생이 부지런히 수행하기를 즐거워하더라도 사람들이 매우 깊은 법을 설함이 없어 법의 횃불을 만나지 못할 것이니, 그때 보살이 그를 위하여 매우 깊은 묘법을 드러내어 연설하는 것이니라. 말하자면 반야바라밀이란 모든 중생에게 지계와 선정과 지혜를 얻게 하고, 또 그것을 칭찬하는 말을 일컫느니라. 선남자여, 이와 같이 말세에 정법이 멸할 때 너희들은 보리심을 발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하여 중생을 이익하게 해야 하느니라. 이 반야바라밀은 삼세 모든 부처님께서 행하신 것이므로 너희가 만약 부지런히 닦으면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로 가는 것이 멀지 않을 것이니, 무슨 까닭인가? 반야바라밀은 보리를 여의지 않기 때문이니라.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곡식을 심어서 이미 이삭이 나오면 마땅히 수확이 멀지 않았음을 아는 것과 같이 보살도 그러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하다가 반야바라밀을 들으면 마땅히 부처님께 가는 것이 멀지 않다는 것을 아느니라.
대왕이여,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반야바라밀을 여의어 버리고 다시 다른 법에 의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한다고 한다면 이런 이치는 없다. 마치 왕자가 그 부왕을 버리는 것과 같아 다시 다른 사람에게서 태자가 되기를 바란다면 결정코 얻지 못할 것이니, 보살도 그러하여 살바야(薩婆若)를 구하려면 반드시 반야바라밀을 인연하여 얻어야 하느니라. 비유하면 송아지가 만약 젖을 얻고자 한다면 반드시 그 어미에게 의하여야 하고, 만약 다른 소에게 간다면 얻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라.
대왕이여,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늘 가까이하여 항상 법왕자가 되고, 상호로 몸을 장엄하고 좋은 꽃으로 몸의 모습을 장식하며, 모든 감관[根]이 모자람이 없고, 여래께서 행하시던 곳에서 항상 유행할 것이며, 행하는 도는 부처님 여래께서 깨달은 바에 따라 깨달을 것이니라. 세간의 고뇌하는 중생을 구호하며 부처님께서 설하여 가르치는 바를 잘 통달하여 항상 범행(梵行)을 닦아 여래의 살바야 성(城)을 수호해야 하느니라.
대왕이여,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 법왕자가 되어 제석·범천·사천왕이 모두 존중한다. 무슨 까닭인가? 보살도를 행하여 물러나지 않으며 모든 악마가 움직이지 못하고, 불법(佛法)에 안주하여 일체법을 통달하며, 공하고 평등한 이치에서 밖의 인연을 믿지 않으니, 이와 같이 불법의 지혜에 안주하여 성문·벽지불과 함께하지 않고 세간을 뛰어넘어 무생법인(無生法忍)에 머무는 것이니라.
대왕이여,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 여실하게 일체 중생의 마음의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상·중·하의 품위를 알며, 또 여실하게 선한 마음과 견고한 마음을 알며, 여실하게 알고 나서 각각을 위하여 모두 상대하여 고치는 법[對治法]을 설한다. 이와 같이 하면 중생을 잘 교화하게 되는 것이니라.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함에 만약 어떤 중생이 마땅히 부처님의 몸을 보고 교화하여 제도함을 받고자 하면, 보살마하살은 부처님의 몸을 나타내어 설법하며, 마땅히 보살의 몸으로 교화하여 제도할 자는 보살의 몸을 나타내며, 마땅히 벽지불의 몸으로 교화를 받을 자는 또한 벽지불의 몸을 나타내느니라. 마땅히 성문의 몸으로 교화를 받을 자는 성문의 몸을 나타내며, 마땅히 제석천·범천왕·바라문·찰리·장자·거사의 몸으로 교화를 받을 자는 다 각각을 위하여 나타내 보여서 제도하며 해탈하게 하느니라. 대왕이여,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니라.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 심성이 자비하고 평화롭고 정직하고 부드럽고 착하며, 모든 아첨과 왜곡됨과 질투와 더러움 없이 마음이 항상 청정하고, 언어가 거칠지 않으며 욕설을 멀리 여의고 인욕을 많이 행하고 중생을 친절하게 이끌어주느니라.
대왕이여,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 곧 안락한 곳에 있게 되니, 왜냐 하면 바른 견해와 청정한 견해를 구족하기 때문이니라. 청정한 행은 행하는 경계와 마음이 상응함이요 만약 마음이 서로 어긋나면 악하여 선하지 못한 법이니, 이와 같이 경계가 더럽혀지는 것은 행하지 않느니라.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함에 같이 배우는 사람을 보면 마음에 기쁨이 생겨서 재물이든 혹은 법이든 남과 같이 쓰며, 오직 한 가지 도(道)만을 행하니, 말하자면 부처님의 도이고 오직 부처님만을 스승으로 하여 다른 사람은 존경하지 않느니라.
대왕이여,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 이와 같이 있는 곳이 안락하여 모든 거두어들이는 법[攝法]을 갖추어 중생을 거두어들이고, 이익을 베풀며 안락을 베풀고 끝없이 베풀어서 중생을 거둬들이고, 이익 되는 말·뜻 있는 말·법다운 말·다르지 않은 말로 중생을 거둬들이느니라. 재물의 이익함이 고르게 하고 몸의 이익함이 고르게 하며, 명(命)의 이익이 또한 고르게 하고 생활 도구[資具]의 이익이 평등하게 중생을 거둬들이느니라.
대왕이여, 이익을 베푼다는 것은 법의 보시이고, 안락을 베푼다는 것은 재물[資生]의 보시며, 끝없이 베푼다는 것은 도를 나타내 보이는 것이니라. 이익 되는 말이란 그들에게 선함이 생기게 함이고, 뜻이 있는 말이란 그들에게 이치를 보게 하는 것이며, 법다운 말[如法語]이란 부처님의 가르침을 수순함이고, 다르지 않는 말[不異語]은 여실(如實)하게 법을 설하는 것이니라. 재물의 이익이 고르다는 것은 먹고[食] 삼키고[取] 마시고[飮] 양치하고[嗽] 핥을 수 있는[舐] 것과 의복 등이요, 몸의 이익이 고르다는 것은 거두어 보호하여 자기 몸을 이익하게 하고 남에게도 그러함이고, 명[命]의 이익이 고르다는 것은 진주·유리·산호·마노는 밖의 명[外命]을 위함을 이름하고, 생활 도구의 이익이 고르다는 것은 코끼리·말·수레[車乘] 등 일체 청정한 재물이니라.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함에는 스스로 행함과 더불어 다른 이에게도 모두 똑같은 것이니라.
대왕이여,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 태어날 때 단정함을 받으며 항상 닦고 익히어 위의가 고요하며 거짓이 없고 청정하며, 겉과 속이 따뜻하여 다른 사람들이 보고 좋아하며 보는 이마다 싫어함이 없고, 사람의 뜻을 기쁘게 하고 일체 중생이 사랑하고 존중하는 바라 그를 보는 자는 다 선심을 발하고 성내는 자는 마음이 곧 풀어지느니라.
대왕이여,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 이와 같이 단정하며 곧 의지함을 감당하여 중생을 수호하고 번뇌를 멸하게 하며, 장차 중생을 생사의 끝없는 광야에서 벗어나게 하며, 중생을 세간의 험난함에서 건져주며, 권속이 없는 이에게 친구가 되어 주고, 번뇌에 병든 이에게는 훌륭한 의원이 되어주느니라. 구호해줄 자가 없는 이는 구호하여 주고 귀의할 곳이 없는 이는 귀의할 곳이 되어 주며 어두운[無明] 중생에게는 법의 횃불이 되어주느니라.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이렇듯 모든 중생을 위하여 의지처가 되며, 모든 질병을 고쳐주는 약나무 가운데 왕과 같으니, 비유하면 선견천의 큰 나무[善見大樹]는 뿌리·줄기·가지·잎·꽃·과일·색·향기·맛·감촉이 다 중생의 온갖 병을 치료하는 것과 같으니라.
대왕이여,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함도 이와 같아 처음 발심하면서부터 모든 중생을 위하여 갖가지 병과 모든 번뇌의 병을 고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살마하살의 공덕과 지혜를 질병이 있는 자가 보고 들으면 다 낫느니라.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함에 항상 공덕과 상응하며 감당하는 힘에 따라서 삼보에 공양하며, 만약 질병이 있으면 탕약을 베풀고, 만약 기갈이 든 이에게는 음식을 베풀어 주고, 만약 추워서 떠는 이를 보면 의복을 베풀어 주며, 스승[師僧]과 화상(和上)을 마음을 다하여 받들어 섬기고 같이 법을 배우는 사람을 합장·공경하며, 가람을 세우고 전원(田園)을 보시하고, 때때로 형편에 따라 여러 스님께 베풀며, 아랫사람이나 노예를 부릴 때는 법답게 대하고 사문·바라문·도를 닦는 이가 이름과 덕이 있다고 들으면 때때로 나아가 뵈어야 하느니라.
대왕이여,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 모든 선함이 생기고 교묘한 방편이 있어 중생을 교화하며, 이 불국토에서 몸을 옮기지 않고 한량없는 모든 부처님 세계에 다니면서 정법을 물으며, 이 불국토에서 몸을 옮기지 않고 한량없는 여러 부처님 세계를 다니면서 정법을 들으며, 이 불국토에서 몸을 옮기지 않고 한량없는 여러 불국토의 여래께 공양함을 나타내 보이며, 이 불국토에서 몸을 옮기지 않고 한량없는 여러 부처님 세계를 다니면서 위없는 보리의 양식[資糧]을 성취하며, 이 불국토에서 몸을 옮기지 않고 한량없는 여러 부처님 세계에 다니면서 만약 불도를 이룬 보살이 있으면 공경하며 공양하고, 이 불국토에서 몸을 옮기지 않고 한량없는 세계에 성도함을 나타내 보이며, 이 불국토에서 몸을 옮기지 않고 한량없는 불국토에 법륜을 굴림을 나타내며, 이 불국토에서 몸을 옮기지 않고 한량없는 불국토에 열반을 나타내 보이며, 이 불국토에서 몸을 옮기지 않고 한량없는 불국토에서 제도해야 할 이를 위하여 변화하는 몸[化身]을 보여 모두 보게 하나, 또한 분별하여 뜻을 지음도 없느니라.”
그때 승천왕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무엇을 보살하마살이 여러 가지로 변화하되 분별심이 없다고 합니까?”
부처님께서 승천왕에게 말씀하셨다.
“비유하면 해와 달이 사천하(四天下)를 비추되 자신이 빛을 만들어[爲作光明] 천하를 비춘다고 분별함이 없는 것과 같으니, 중생은 업보에 따라 스스로 해와 달의 빛이 천하를 비춘다고 느끼느니라.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도 이와 같아 비록 화신(化身)을 나타내어도 분별함이 없나니, 무슨 까닭인가? 중생은 각각 숙세의 선업이 있고, 보살마하살은 옛날 인지(因地 : 수행의 位)에서 수행할 때 중생을 제도하기를 발원하였기 때문이다. 이 원력으로 그 생각하는 바를 따라서 다 분별심이 없는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니라.
대왕이여,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 이와 같은 가장 교묘한 방편으로 교화하여 속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향한다. 무슨 까닭인가? 보살마하살은 보시[檀]를 행함이 구족하고, 지계가 청정하여 뚫리거나 모자라거나 잡됨이 없고, 계의 모임[戒聚]이 청정하여 모든 성문과 벽지불의 경계를 넘었으며, 인욕·정진·선정·지혜[般若]·방편·원(願)·역(力)·지(智)를 구족하고, 여래 세존과 함께하지 못하는 일체의 공덕을 구족하여 이미 성문과 벽지불의 지위[地]를 초월하였느니라.
대왕이여, 보살이 초지(初地)에서 십지(十地)에 이르기까지 반야바라밀을 행하니, 이와 같이 닦아 행하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느니라.”
이와 같이 법문을 설할 때 대중 가운데 이만 천자가 번뇌를 멀리하고 때를 여의어 법의 눈이 청정함을 얻었고, 삼만 보살마하살이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었으며, 팔만사천의 하늘과 사람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하고, 한량없는 백천억의 건달바(乾闥婆)와 긴나라(緊那羅)가 모두 다 합장하고 여래를 찬탄하며 기사굴산을 돌고, 한량없는 백천억의 야차(夜叉) 무리가 모든 연꽃을 기사굴산에 뿌리니, 시방의 한량없는 항하사(恒河沙) 세계 보살이 모여와서 여래 세존께서 모든 보살을 위하여 상쾌하게 매우 깊은 반야바라밀을 설하심을 찬탄하였다.
“세존이시여, 이 반야바라밀로 인하여 사람과 하늘이 수다원향(須陀洹向)·수다원과(須陀洹果)에서부터 아라한향(阿羅漢向)·아라한과(阿羅漢果)에 이르기까지를 얻으며 벽지불도(僻支佛道)·보살 10지(地)·10바라밀·여래 10력(力)·4무소외(無所畏)·18불공법(不共法)·일체종지(一切種智)가 모두 반야바라밀 가운데서 나옵니다.
세존이시여, 비유하면 세간의 일체 중생은 다 허공에 의지하나 허공은 의지할 곳이 없는 것과 같이, 반야바라밀도 이와 같아 일체법의 근본이되 스스로는 의지함이 없습니다. 원컨대 우리들로 하여금 미래세에 지금 부처님께서 설하심과 같이 모든 보살마하살을 위하여 반야바라밀다를 설하게 하여 주시고 또 우리들이 가지가지 향과 꽃을 여래께 흩게 하여 주소서.”
그때 기사굴산의 천신(天神)과 모인 다른 이들이 공중에서 칭찬하여 말하였다.
“우리들은 과거세에 한량없는 모든 부처님께서 이 기사굴산 중에서 이 반야바라밀의 법을 오늘과 같이 설하심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때 승천왕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허공 중의 모든 하늘은 어떻게 여래의 경계가 오랜 세월이고 부처님께서 이 반야바라밀을 설하신 일을 아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대왕이여, 이 모든 하늘들은 다 불가사의(不可思議) 해탈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으로 먼 과거의 일을 아는 것이니라.
대왕이여, 내가 옛날 보살이었을 때 또한 저 천신의 세계[道]에 태어나 지나면서 한량없는 부처님께서 도를 이루어 설법하시고 나아가 열반에 이르시는 것을 보고 항상 찬탄하며 합장 예배하였다. 무슨 까닭인가? 천신의 세계에는 수명이 길기 때문이니라.”
그때 대중 가운데 광덕(光德)이라는 한 천자가 있었다. 그는 곧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대고 합장하고 부처님을 향하여 머리로 발에 예배하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모든 부처님과 보살은 마땅히 정토에 다니시는데 사바세계가 이렇게 청정하지 않다면 어떻게 세존께서 이 땅에 출현하십니까?”
그러자 부처님께서 광덕천자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부처님 여래께서 계시는 곳은 더러운 땅[穢土]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존께서 곧 신통력으로 이 삼천대천세계에 나타나시면 땅이 평평하여 손바닥과 같고 유리로 이루어지며 모든 산과 언덕과 흙무더기와 가시가 없고, 곳곳에 보배가 모여 있으며, 향과 꽃·부드러운 풀·흐르는 샘·목욕하는 연못·팔공덕수(八功德水)·칠보의 계단·나무·열매가 다 보살의 물러나지 않는 법의 수레를 말할 것이니라. 범부는 없고 다만 시방의 모든 보살만 보일 뿐이고, 다른 소리는 듣지 못하며 오직 반야바라밀의 소리만이 들릴 뿐이니라. 곳곳에 푸른 색·다홍색·붉은 색·백색의 크기가 수레바퀴 같은 연꽃에 하나하나의 꽃마다 가운데에는 가부좌를 하고 앉은 보살이 있어, 곧 여래가 대중 가운데에서 모든 보살을 위하여 매우 깊은 법을 설하시고, 한량없는 백천의 제석·범천·사천왕이 둥그렇게 둘러싸고 공양하고 존중하고 찬탄하는 것이 보이는 것이니라.” “희유합니다, 세존이시여. 희유합니다, 세존이시여. 설하신 바는 헛됨이 없고 진실하여 둘이 아니며, 세존께서 설하심과 같이 모든 부처님께서 머무시는 곳은 진실로 더러운 땅[穢土]이 없으나 중생이 박복하여 부정하게 보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반야바라밀의 이름만 들어도 매우 희유한데, 하물며 다시 쓰고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고 남을 위하여 연설함이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 선여인이 한량없는 백천 겁에 걸림없는 마음으로 남에게 재물을 보시하기보다 다시 어떤 사람이 청정한 신심으로 이 경을 써서 남에게 전해주는 공덕은 그보다 더 많다. 무슨 까닭인가? 재물의 보시는 끝이 있으나 법의 보시는 끝이 없기 때문이니라. 즉, 재물의 보시는 다만 세간의 과보를 얻을 뿐이므로 사람이나 하늘의 과보를 옛날에 이미 얻었으나 얻고 나서는 떨어졌다가 지금 다시 얻어야 한다. 만약 법의 보시는 옛날부터 아직 얻지 못한 것을 지금 비로소 얻으니, 곧 열반인 것이니라. 만약 삼천대천세계의 일체 중생을 어떤 사람이 교화하여 모두 10선도(善道)에 안주하게 하는 것과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청정한 신심으로 반야바라밀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워서 남을 위하여 설법한다면 이 공덕이 그보다 으뜸이니, 무슨 까닭인가? 일체 선법은 다 반야바라밀에서 생기는 까닭이니라.
만약 삼천대천세계의 일체 중생을 어떤 사람이 교화하여 다 수다원·사다함·아나함·아라한과 벽지불도를 얻게 하거나 혹은 어떤 사람이 신심으로 반야바라밀을 받아 지녀서 읽고 외우고 쓴다면, 이 공덕은 그보다 더 뛰어나나니, 무슨 까닭인가? 성문과 벽지불의 법은 다 반야바라밀 가운데서 생기고, 일체 보살마하살의 법도 다 반야바라밀 가운데서 생기며, 이 반야바라밀로 인하여 부처님께서 세간에 나오셨으니, 반야바라밀이 있는 곳은 곧 이 보리도량의 법륜을 굴리는 곳이므로 이곳이 나의 큰 스승[大師]임을 생각해야 한다. 여래·응공·정변지께서 이 가운데 계시나니, 무슨 까닭인가? 일체 모든 부처님은 다 반야바라밀에서 생기는 까닭이다. 만약 사람이 여래의 형상에 공양한다면 반야바라밀에 공양함만 못하다. 무슨 까닭인가? 삼세 모든 부처님은 다 반야바라밀을 인연하여 나기 때문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