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천왕반야바라밀경(勝天王般若波羅蜜經)
월파수나(月婆首那)역
승천왕반야바라밀경(勝天王般若波羅蜜經) 제1권
01. 통달품(通達品)
02. 현상품(顯相品)
승천왕반야바라밀경(勝天王般若波羅蜜經) 제2권
03. 법계품(法界品)
04. 염처품(念處品)
승천왕반야바라밀경(勝天王般若波羅蜜經) 제3권
05. 법성품(法性品)
승천왕반야바라밀경(勝天王般若波羅蜜經) 제4권
06. 평등품(平等品)
07. 현상품(現相品)
승천왕반야바라밀경(勝天王般若波羅蜜經) 제5권
08. 무소득품(無所得品)
09. 증권품(證勸品)
승천왕반야바라밀경(勝天王般若波羅蜜經) 제6권
10. 술덕품(述德品)
11. 현화품(現化品)
12. 다라니품(陀羅尼品)
승천왕반야바라밀경(勝天王般若波羅蜜經) 제7권
13. 권계품(勸誡品)
14. 이행품(二行品)
15. 찬탄품(讚歎品)
16. 부촉품(付囑品)
승천왕반야바라밀경(勝天王般若波羅蜜經) 제1권
01. 통달품(通達品)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바가바(婆伽婆)께서 왕사대성(王舍大城) 기사굴산(耆闍堀山)에서 큰 비구대중 4만 2천 명과 함께 계셨다. 이들은 다 아라한으로서 모든 번뇌가 끊어졌고 할 일을 다 마쳤으며, 모든 무거운 짐을 벗었고 자기를 이롭게 할 만한 경지를 증득한 이들이었다. 모든 번뇌로 생사윤회하는 마음[有結心]을 끊어 해탈하였으며 자재롭게 행동할 수 있어서 마치 큰 용과 같았으나 오직 아난만은 배우는 자리[學地]에서 수다원과(須陀洹果)에 머물러 있었다. 그들의 이름은 정명아야교진여(淨命阿若憍陳如)·마하가섭(摩訶迦葉)·교범파제(憍梵波提)·박구라(薄拘羅)·이파다(離波多)·필릉가바차(畢陵伽婆蹉)·대지사리불(大智舍利弗)·마하목건련(摩訶目乾連)·수보리(須菩提)·부루나미다라니자(富樓那彌多羅尼子)·아니루타(阿尼樓陀)·마하가전연(摩訶迦栴延)·우파리(優波離)·라후라(羅睺羅) 등 이와 같은 대중 4만 2천 명과 함께 계셨다.
보살마하살 7만 2천 명과 함께 계셨는데, 이들은 모두 매우 깊은 법성(法性)을 이미 통달하였고, 잘 길들여졌고 쉽게 교화할 수 있으며, 평등을 잘 행하여 모든 중생의 참된 선지식(善知識)이며, 무애다라니(無碍陀羅尼)를 얻어 물러남이 없는 법륜(法輪)을 굴릴 수 있고, 한량없는 모든 부처님을 공양 한 적이 있으며, 다른 불국토로부터 법을 배우기 위하여 와서 모인 일생보처(一生補處)들로서 법장(法藏)을 보호하고 유지하여 삼보의 종자가 끊이지 않게 하려는 법왕(法王)의 참된 아들이며, 부처님을 받들고 법륜을 굴리며 여래의 매우 깊은 경계를 통달하여 비록 세간에 나타났어도 세상법에 물들지 않았다. 그 이름을 말하면 보상보살(寶相菩薩)·보장(寶掌)보살·보인(寶印)보살·보관(寶冠)보살·보계(寶髻)보살·보적(寶積)보살·보해(寶海)보살·보염(寶焰)보살·보당(寶幢)보살·금강장(金剛藏)보살·금장(金藏)보살·보장(寶藏)보살·덕장(德藏)보살·정장(淨藏)보살·여래장(如來藏)보살·지장(智藏)보살·일장(日藏)보살·정장(定藏)보살·연화장(蓮華藏)보살·해탈월(解脫月)보살·보현(普賢)보살·관세음(觀世音)보살·관월(觀月)보살·보음(普音)보살·보안(普眼)보살·연화안(蓮華眼)보살·광안(廣眼)보살·보행(普行)보살·보계(普戒)보살·지의(智意)보살·연화의(蓮花意)보살·승의(勝意)보살·상의(上意)보살·금강의(金剛意)보살·사자유희(師子遊戱)보살·사자후(師子吼)보살·대음왕(大音王)보살·묘음(妙音)보살·무염(無染)보살·월광(月光)보살·일광(日光)보살·지광(智光)보살·지덕(智德)보살·현덕(賢德)보살·화덕(華德)보살·문수사리(文殊師利)보살 등이다.
또 십육 현사(十六賢士)에는 발타바라(跋陀婆羅)보살이 우두머리가 되었고, 현재 겁의 보살 가운데에는 미륵(彌勒)보살이 으뜸이 되었으며, 사천왕천에는 네 왕이 으뜸이 되었고, 삼십삼천에서는 제석(帝釋)이 으뜸이 되었다. 야마(夜摩)의 모든 하늘에서는 수야마왕(須夜摩王)이 으뜸이 되었고, 도솔타천에서는 산도솔타왕(兜率陀王)이 으뜸이 되었으며, 화락천(化樂天)에서는 선화왕(善化王)이 으뜸이 되었고,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에는 자재왕이 으뜸이 되었다. 모든 범천(梵天)에서는 대범왕이 으뜸이 되었고 수타바사천(首陀婆娑天)에서는 마혜수라(摩醯首羅)가 으뜸이 되었다.
다시 여러 아수라왕이 있었는데, 사리아수라왕(娑利阿修羅王)과 라후(羅睺)아수라왕, 이와 같이 한량없는 백천의 모든 큰 아수라왕들이었다. 또한 모든 용왕(龍王)이 있었는데, 아뇩대지(阿耨大池)용왕·마나사(摩那斯)용왕·사가라(娑伽羅)용왕·바수길(婆修吉)용왕·덕차가(德叉迦)용왕이 각각 한량없는 백천(百千)의 권속을 데리고 있어 기사굴산의 길이와 너비 40유순(由旬)의 땅과 허공에 틈이 없었으며, 하늘·용·야차·건달바·아수라·가루라·긴나라·마후라가·사람과 사람 아닌 것들이 일심으로 합장하며 여래를 공경하였다.
이러한 백천의 대중이 세존을 앞뒤로 에워싸고 공양하고 공경하며 찬탄하자 여래의 면문(面門)에서 큰 광명이 뻗어 나와 두루 시방의 한량없는 세계를 비추고는 부처님 계신 곳으로 돌아와 오른쪽으로 세 번 돌고 면문으로 다시 들어갔다.
여기서부터 동쪽으로 10항하사의 부처님 세계를 지나 불국토가 있으니, 명호가 장엄(莊嚴)이고, 그곳 부처님의 이름은 보광(普光)여래·응공(應供)·정변지(正遍知)·명행족(明行足)·선서(善逝)·세간해(世間解)·무상사(無上士)·조어장부(調御장夫)·천인사(天人師)·불(佛)·세존(世尊)이셨다. 이제 현재세에 모든 보살마하살을 위하여 일승(一乘)의 바른 법을 설하시니, 그 불국토에서는 성문(聲聞)과 벽지불(僻支佛)이란 이름마저 없는데, 더구나 다시 그 법을 닦는 자가 있겠는가. 모든 보살대중은 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서 물러서지 않았으며, 그 땅의 중생은 음식을 먹지 않고 다만 선정을 양식으로 삼았다. 해와 달과 별의 빛은 다 나타나지 않았고 오직 부처님의 광명만이 그 나라를 비추었으며, 산과 구릉이 없이 땅이 평평하여 마치 손바닥과 같았다.
이장(離障)이라고 하는 한 보살이 있어, 백천(百千)의 보살과 더불어 부처님 처소에 이르러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대고 합장하며 부처님을 향한 채 머리를 조아려 예를 드리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어떠한 인연으로 이런 광명이 이 국토를 비추는 것입니까?”
그러자 보광여래께서 이장보살마하살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여기에서 서쪽으로 10항하사 세계를 지나 불국토가 있는데, 이름이 사바(娑婆)이고 그 국토의 부처님 명호는 석가모니여래·응공·정변지·명행족·선서·세간해·무상사·조어장부·천인사·불·세존이다. 지금 그 부처님께서 모든 보살마하살을 위하여 마하반야바라밀을 설하려고 하시니, 이런 인연으로 이 광명이 비치는 것이니라.”
이장보살이 보광여래께 아뢰었다.
“그렇다면 저도 지금 곧 사바세계로 가서 석가여래께 예로써 공경하여 공 양하고 바른 법을 받고자 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지금이 바로 알맞은 때이니라.”
이장보살은 부처님께서 이렇게 허락하시자 곧 한량없는 보살 권속과 함께 사바세계로 와서 기사굴산 꼭대기에 이르러 부처님 발에 예배하고 오른쪽으로 세 번 돌고 물러나 한쪽에 앉았다.
다시 여기에서 남쪽으로 10항하사 세계를 지나 또 다른 불국토가 있는데, 이름이 청정화(淸淨華)이며 그 국토에 계시는 부처님의 명호는 일광(日光)으로서 부처님의 열 가지 명호를 구족하셨고 보살의 이름은 일장(日藏)이었다.
또한 여기에서 서방으로 10항하사 세계를 지나면 또 한 불국토가 있는데, 나라 이름은 보화(寶華)이고 부처님의 명호는 공덕광명(功德光明)으로 열 가지 명호를 구족하였고 보살의 이름은 공덕장(功德藏)이었다.
또 여기에서 북쪽으로 10항하사 세계를 지나 또 한 불국토가 있는데, 나라 이름은 청정(淸淨)이고 부처님의 명호는 자재왕(自在王)이며 보살의 이름은 광문(廣聞)이었다.
또한 여기에서 동남방으로 10항하사 세계를 지나 또 한 불국토가 있는데, 나라 이름은 화염(火焰)이고 부처님의 명호는 감로왕(甘露王)이며 보살의 이름은 불퇴전(不退轉)이었다.
또 여기에서 서남방으로 10항하사 세계를 지나 또 한 불국토가 있는데, 나라 이름은 공덕청정(功德淸淨)이고 부처님의 명호는 지거(智炬)이며 보살의 이름은 대혜(大慧)였다.
여기서 서북방으로 10항하사 세계를 지나 또 한 불국토가 있는데, 나라 이름은 열의(悅意)며 부처님의 명호는 묘음왕(妙音王)이고 보살의 이름은 공덕취(功德聚)였다.
여기에서 동북방으로 10항하사 세계를 지나 또 한 불국토가 있는데, 나라 이름은 혜장엄(慧莊嚴)이고 부처님의 명호는 지상(智上)이며 보살의 이름은 상희(常喜)였다.
여기서 위로 10항하사 세계를 지나 또 한 불국토가 있는데, 나라 이름은 부동(不動)이고 부처님의 명호는 금강상(金剛相)이며 보살의 이름은 보당(寶幢)이었다.
여기에서 아래로 10항하사 세계를 지나 또 한 불국토가 있는데, 나라 이름은 월광명(月光明)이고 부처님의 명호는 금강보장엄왕(金剛寶莊嚴王)이며 보살의 이름은 보신(寶信)으로서 모두 또한 이와 같았다.
그때 대중 가운데 발파라(鉢婆羅)라고 하는 한 천왕이 곧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대고 합장하고, 부처님을 향하여 머리를 조아려 발에 예를 올리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제가 지금 여쭐 말씀이 있는데 만약 부처님께서 허락하신다면 감히 의혹을 여쭈겠습니다.”
그때 부처님께서 승천왕(勝天王)에게 말씀하셨다.
“대왕이여, 여래·응공·정변지는 의심이 나서 묻는 것이라면 마땅히 설명하여 알도록 할 것이다.”
그때 승천왕이 뛸 듯이 기뻐하며 일찍이 없었던 일을 얻어 곧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무엇을 보살마하살이 한 가지 법[一法]을 수학(修學)하여 일체법을 통달한다고 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승천왕에게 말씀하셨다.
“대왕이여, 훌륭하고 훌륭하구나. 진리에 대하여 매우 시원스런 질문[快問]을 하였으니,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하여라. 왕이 질문한 것과 같이 마땅히 분별하여 해석할 것이니라.” “훌륭하십니다, 세존이시여. 간절히 듣기를 원합니다.”
부처님께서 승천왕께 말씀하셨다.
“대왕이여, 보살마하살이 한 가지 법을 수학하여 일체법을 통달한다는 것이란 말하자면 반야바라밀이니,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닦으면 단나(檀那 : 布施)바라밀·시라(尸羅 : 持戒)바라밀·찬제(羼提 : 忍辱)바라밀·비리야(毘梨耶 : 精進)바라밀·선나(禪那 : 禪定)바라밀·반야(般若)바라밀·선교방편[優波憍舍羅]바라밀·원(願 : 尼坻)바라밀·역(力 : 婆羅)바라밀·지(智 : 闍那)바라밀을 통달할 수 있다. 대왕이여, 무엇을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배워서 단(檀)바라밀을 행한다고 하는가?
보살마하살은 청정한 마음으로서 희망하는 것이 없고, 남을 위하여 설법하되 자신의 이름이나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 다만 괴로움[苦]을 멸하게 할 뿐, 자신이 설한다고 보지 않고, 듣는 자를 보지 않으니, 둘도 없고 다른 것도 없어서 자성(自性)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배워서 법 보시[法檀]바라밀을 행한다라고 하는 것이니라.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배워서 두려움을 없애주는 보시[無畏檀]바라밀을 행한다는 것은 모든 중생을 부모·형제·친척과 같이 보고, 또한 모든 중생을 다 가깝고 친근하게 여겨야 할 것이니, 무슨 까닭인가? 헤아릴 수 없이 오랜 옛날부터 세상에 와서 6도(道 : 여섯 가지 세계)를 유전하였으므로 모두가 일가친척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니, 만약 어떤 중생이 두려움과 어려움에 처한다면 보살마하살은 오히려 신명(身命)으로 그를 구할 것인데 하물며 괴롭힐 것인가. 그러나 또한 자신이 두려움을 없애주는 보시를 베푼다고 보지 않고 받는 자도 보지 않으니, 둘도 없고 다른 것도 없어서 자성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배워서 생활에 필요한 도구[資生]를 보시하는 바라밀을 행한다는 것은 모든 중생들이 살아가는 데 따른 갖가지 물건[資養之物]을 보시함으로써 10선(善)을 받아들이게 한다. 그러나 자신이 선을 베푼다거나 다른 이가 보시를 받았다라고 보지 않으니, 둘도 없고 다른 것도 없어서 자성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배워서 갚기를 바라지 않는 보시바라밀을 행한다는 것은, 일찍이 보시를 행할 때는 과보(果報)를 바라지 않으니 보살법이 그러하여 마땅히 보시를 행하되, 자신이 행한다고 보지 않고 보시의 과보도 보지 않으니, 둘도 없고 다른 것도 없어서 자성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배워서 대비(大悲)의 보시바라밀을 행한다는 것은 모든 중생이 빈궁하고 늙고 병들었어도 구제할 자가 없는 것을 보고 대비심을 일으키며 내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어서 모든 중생의 귀의처가 되리라는 서원을 세우는 것이다. 적은 선근이라도 보리에 회향하는 것은 중생 때문이니, 또한 자신이 구제하였다는 분별도 없고 구제를 받았다는 구별 도 없으니, 둘도 없고 다른 것도 없어서 자성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배워서 공경하는 보시바라밀을 행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필요로 함에 따라서 보살마하살 스스로가 물건을 가지고 그들을 싫증나게 하지 않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베풀어 주되, 자신이 공경할 수 있다고 보지 않고 그가 공경을 받는다고 보지도 않으니, 둘도 없고 다른 것도 없어서 자성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배워서 존중함을 행하는 보시바라밀을 행한다는 것은 모든 중생이 다 스승[師僧]이고 부모라는 생각을 일으키어 존중하는 마음으로 합장하여 공경하는 것이며, 만약 재물이 없으면 착한 말로써 은혜를 베풀되, 자신이 남을 존중할 수 있다거나 다른 사람이 존중 받을 만하다고 보지 않으니, 둘도 없고 다른 것도 없어서 자성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배워서 공양을 행하는 보시바라밀을 행한다는 것은 만약 절의 탑을 보면 곧 마땅히 향·꽃·기름등잔과 도량을 쓸고 닦음으로써 공양하며, 만약 부처님의 형상[像]을 허물거나 정법을 결손(缺損)함을 보면 마땅히 고치고 수선할 것이요, 만약 여러 스님을 보고 네 가지 공양[음식·의복·침구·탕약]을 드리되, 자신이 공양할 수 있고 그가 공양을 받을 만하다고 보지 않으니, 둘도 없고 다른 것도 없어서 자성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배워서 의지함이 없는 보시바라밀을 행한다는 것은 ‘이 보시로써 하늘에 태어나기를 원하거나 천왕(天王)이 되기를 바라거나 사람으로 태어나기를 원하거나 혹은 인간 세상의 왕이 되기를 바랍니다’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다. 나아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또한 바라거나 집착하지 않는 것이니, 얻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배워서 보시바라밀을 통달하였다고 하느니라.
대왕이여,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배워서 시라(尸羅)바라밀을 행함에는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부처님께서 아함(阿含)의 가르침과 비니(毘尼 : 戒律) 가운데 바라제목차(波羅提木叉 : 계율의 조문)를 설하셨지만, 보살마하살은 배우되 계의 모양[戒相]을 보지 않고, 자신이 지니되 계에도 집착하지 말아야 하며, 보는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나에게도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배움에는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아뇩다라삼 먁삼보리는 단지 계를 지킴으로써 얻는 것이 아니므로 마땅히 보살의 계행을 두루 배워야 할 것이다. 계의 성품은 맑고 시원하고 고요하며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자성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배움에는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어떻게 계를 지켜야 번뇌를 끊을 수 있는가? 번뇌에 세 가지가 있으니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다. 이 각각에는 상·중·하 세 가지 단계가 있으니, 이에 대한 대치(對治)를 알아야 한다. 탐욕이 큰 자는 부정관(不淨觀)을 닦되 몸의 서른여섯 가지 물질을 자세히 관찰[觀]할 것이며, 성냄이 많은 자는 자비관(慈悲觀)을 닦을 것이고, 어리석음이 많은 자는 인연관(因緣觀)을 닦아야 하나, 관찰하는 주관과 보여지는 대상을 보지 않는다.’ 이는 둘이 없고 다른 것도 없어서 자성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배우면서 다시 이런 생각을 해야 한다. ‘어떻게 보살마하살은 바르지 않은 생각을 여읠 수 있는가?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나는 고요한 행ㆍ여의는 행ㆍ공한 행을 하는데 다른 사문이나 바라문은 떠들썩하고 어지러운 가운데에서 공한 행[空行]을 즐기지 않는다.’ 이는 둘이 다르지 않음을 보아 자성을 여의었음을 아는 것이니 곧 삿된 생각이 소멸하게 된다.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배워서 비록 모든 법을 여의었음을 알지라도 죄업을 깊이 두려워하여 부처님께서 설하신 대로 마땅히 청정한 계행을 지니고, 공덕과 나아가서 반야바라밀에 이르기까지를 닦고 익히어 조그마한 불선법(不善法)도 저지르지 않을 것이다. 세존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비유하면 독약은 많든 적든 다 해로운 것같이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배우면 항상 두려운 마음이 생겨나 믿고 행함이 서로 상응할 것이다. 보살마하살은 텅 비고 넓은 곳에서 홀로 수행하여야 한다. 어떤 사문과 바라문들이 금·은·유리·진주·마노(瑪瑙)·호박(虎珀)·산호(珊瑚)·자거(車)·백옥(白玉) 등을 보살에게 맡기어도 탐착심을 일으키지 않고 갖고 싶다는 마음을 내지 말 것이며,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 차라리 자신의 몸의 살을 베어 먹을지라도 남의 재물에 대해 주지 않았으면 가지려 하지 말라’고 생각해야 하느니라.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배워서 계를 견고히 지킬 것이며, 만약 마군[魔]과 마군의 권속이 아름다운 모습과 형상[妙色形]으로 가까이하여 보살을 시험하여도 마음이 동요되지 않고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 모든 법은 꿈과 허깨비와 같다’라고 생각할 것이니, 둘도 없고 다른 것도 없어서 자성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배워서 비록 정성으로 계를 지켜서 사람으로 태어나 왕이 되더라도 바라지 않고 하늘에 태어나 천왕이 되더라도 바라지 않으며, 몸으로 짓는 세 가지 과실[失]을 여의고, 입으로 짓는 네 가지의 허물을 짓지 않으며, 뜻으로 짓는 세 가지의 허물을 벗어난다. 이와 같이 계를 지켜도 자신이 지킨다고 보지 않고 계의 모양을 보지 않으니, 둘도 없고 다른 것도 없어서 자성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배워서 지계바라밀을 통달한다고 하느니라.
대왕이여,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배워서 찬제(羼提)바라밀을 행한다는 것은 보살마하살이 속마음으로 항상 인욕하는 마음을 내어 근심과 슬픔과 고뇌에 매달리지 않고, 또한 밖으로도 인욕을 배워서 만약 다른 사람이 때리고 욕하여도 끝내 성내지 않으며, 또한 법인(法忍)을 배워서 세존께서 ‘매우 깊은 진실한 성품은 나도 없고 법도 없어서 생겨나지도 않고 고요하니 이것이 곧 열반이다’라고 말씀하시면 이와 같은 설법을 듣고 마음에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이와 같이 생각한다. ‘이 법을 배우지 않는다면 어떻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인가. 깊이 3독(毒)을 관찰하건대 이와 같은 탐욕과 성냄은 어느 곳에서 일어나고 어떤 인연으로 생기며 어떤 인연으로 말하는가?’ 이렇게 관찰하여 생김과 생기게 하는 법을 보지 않고, 멸하고 멸하여지는 법을 보지 않는다. 이와 같이 참는 마음이 상속하여 끊어지지 않고 밤낮[六時]으로 끊어지지 않아서 경계도 택하지 않는다. 부모나 국왕에게 나는 오로지 인욕을 닦겠으니, 그 밖의 할 수 있는 위협으로써 악을 가하여도 좋소라고 한다.
보살이 인욕을 행하는 것은 은혜를 갚기 위함만이 아니요 명리와 인의(仁義)나 부끄러움이나 두려움 때문만이 아니다. 보살마하살이란 마땅히 인욕을 행하는 것이다. 만약 다른 사람이 해를 주며 치고 때리고 욕하여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
보살마하살이 만약 국왕이나 혹은 왕과 비슷한 지위가 되어서 빈천한 사람들이 치욕스럽게 욕하고 비난한다 해도 위엄과 형벌을 보여서 나는 이 왕의 법으로 마땅히 베어서 다스리리라[治剪]라고 하지 말고 곧 이렇게 생각하라. ‘나는 지난 날 여러 부처님 앞에서 큰 서원을 세우기를, 모든 중생을 내가 다 제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게 하리라고 하였는데 지금 만약 성을 내면 이는 본래의 서원을 어기는 것이다. 비유하면 훌륭한 의사가 세상의 눈먼 이를 내가 다 고치리라고 맹세하는 것과 같다. 만약 자기가 실명하면 어찌 남의 병을 고칠 것인가. 이와 같이 보살은 중생의 무명(無明)의 어둠을 없애야 하는데 스스로 성을 내면 어찌 능히 그들을 구하리오.’ 자신이 참는다고 보지 않고 참을 만한 것도 보지 않으니, 둘도 없고 다른 것도 없어서 자성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배워서 찬제바라밀을 통달한다고 하느니라.
대왕이여,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배워서 비리야(毘梨耶)바라밀을 행한다는 것은 아직 멸하지 않은 것을 멸하게 하고, 아직 제도하지 못한 것을 제도하며, 아직 해탈하지 못한 것을 해탈하게 하고, 아직 편안하지 못한 것을 편안하게 하고, 아직 배우지 못한 것을 배우게 하는 것이다. 보살이 이와 같이 정진을 행할 때 모든 악마들이 곤경에 빠지게 하기 위하여 보살에게 이렇게 말한다. ‘선남자여, 이 법을 닦지 마십시오. 헛되이 고통[勤苦]만 받을 뿐입니다. 왜냐 하면 내가 지난 날 이 법을 닦아 아직 멸하지 않은 것을 멸하게 하고, 아직 제도하지 않은 것을 제도하게 하고, 아직 해탈하지 못한 것을 해탈하게 하고, 아직 편안하지 못한 것을 편안하게 하고, 아직 배우지 못한 것을 배우게 하였으나 헛되이 고통만 받았을 뿐 전혀 실리가 없었으며, 또한 나는 이제껏 살아오면서 많은 보살들이 이 수행을 배워 닦았으나 모두 다 물러나는 것을 보아왔으니 그대는 마음을 돌려 성문승과 벽지불승을 취하여 스스로 입멸하시오.’ 보살마하살이 즉시 깨달아 알고 대답하기를 ‘악마여, 네가 다시 도를 버리라고 말하나 나의 마음은 금강과 같으니, 네가 무너뜨리지 못할 것이다. 네가 만약 장애를 만든다면 스스로 무명의 긴 밤과 같은 고통을 얻으리라’ 하니 악마가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
만약 다섯 가지 바라밀을 닦아도 아직 반야바라밀을 얻지 못한 다른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정진하면, 설령 백천 겁이라도 능히 초과하는데 하물며 성문과 벽지불승이겠는가.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불법을 성취하며 온갖 악을 다 여의면 비록 정진을 행하여도 급하지도 않고 더디지도 아니하며 큰 서원을 발한다. ‘내가 몸을 얻을 때 세존과 같이 미간백호상과 정수리 위의 육계(肉髻)를 얻게 하고, 부처님께서 법륜을 굴리시니 나도 또한 이와 같도록 하여지이다.’
비유하건대 순금과 온갖 보물로 빛나게 꾸미면 국토가 장엄하고 청정[嚴淨]하여지는 것과 같이 보살의 정진도 이와 같아 번뇌의 때[垢]를 멀리 여의는 것이다. 말하자면 게으름과 나태함과 지극히 괴로움과 스스로 깨달아 알지 못함과 바르지 못한 사유와 같은 번뇌의 때를 여의면 청정함을 얻어 지혜의 공덕을 함께 장엄하여 몸이 피로하지 않고 마음에 거리끼거나 태만함이 없으며 도(道)를 막는 악법과 모든 불선함이 다 없어진다. 또한 열반으로 나아가도록 도와주는 법을 더욱 자라나게 하면 소소한 나쁜 마음도 일어나지 않을 것인데, 어찌 하물며 커다란 악행을 저지르겠는가.
가령 시방 항하사 세계에 가득 찬 큰 불이 마치 아비지옥과 같은데, 이 세계 밖에 한 중생이라도 생사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야 할 자가 있다면 보살마하살은 그 가운데를 지나갈 것인데 하물며 많은 중생이겠는가. 그러므로 이와 같이 생각해야 한다. ‘위없는 보리는 결코 쉽게 얻을 수가 없다. 보살의 수행은 머리에 붙은 불을 끄는 듯이 하여 백천만 겁을 지내야 한다.’ 이러한 지기 어려운 무거운 짐을 지더라도 또한 이렇게 사유해야 한다. ‘과거와 현재의 모든 부처님께서 다 이런 수행을 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셨으니, 나도 이와 같이 바로 닦고 익혀서 백천 겁 동안 지옥 속에 있을지라도 중생을 제도할 것이며, 끝내 그들을 버리고 속히 나 혼자만 열반에 들지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이 정진하여 마음에 스스로를 높이거나 남을 낮게 여기지 않으며, 자신이 수행한다고 보거나 수행할 법을 보지 않으니, 둘도 없고 다른 것도 없어서 자성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배워서 정진바라밀을 통달한다고 하는 것이니라.
대왕이여,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배워서 선(禪)바라밀을 행하여 깊 은 선근을 심어 대승 가운데서 세세생생 미묘한 행을 많이 익히고 선지식을 가까이 하면, 빈천하게 태어나지 않고 항상 바라문이나 찰리(刹利)의 명문 집안에 있으면서 바르게 삼보를 믿어 선한 법을 증장하며, 지난 세상의 선근으로 이와 같은 생각을 할 것이다.
‘중생이 무명의 긴 밤 동안 6도(道)에 유전하며 고통의 수레바퀴가 쉬지 않음은 다 탐애로 말미암은 것이다.’
보살마하살은 싫어하며 여의는 마음을 일으켜 중생이 허망한 데서 분별하여 있다고 생각하는 것임을 안다. 경[修多羅] 가운데 가지가지 방편으로 욕심이 지나쳐 근심이 됨을 설하였으니, 창과 같고 작은 창과 같고 칼과 같고 뱀과 같고 물거품과 같으며, 냄새나고 더러워 깨끗하지 않고, 항상함이 없는데 어떻게 지혜로운 사람이 이 법을 탐착할 것인가. 그리하여 곧 머리와 수염을 깎고 출가하여 도를 닦아서 아직 보지 못한 것을 보고, 아직 얻지 못한 것을 얻으며, 아직 증득하지 못한 것을 증득한다. 만약 세상의 진리[世諦]나 제일의 참된 진리[第一義諦]를 설하심을 듣고 받아 지녀서 여실하게 수행하고 법에 알맞게 관찰할 것이니, 말하자면 바르게 보고[正見], 바르게 분별하고[正分別], 바르게 정진하고[正精進], 바르게 말하고[正語], 바르게 행동하고[正業 : 身業淸淨], 바르게 생활하며[正命 : 三業淸淨], 바르게 생각하고[正念], 바른 선정에 들어가서[正定], 시끄럽고 잡된 것을 멀리 여의고, 이름이 널리 알려지기를 구하지 않고, 공양하고 공경하며 몸과 마음으로 정진하여 항상 휴식함이 없어야 할 것이다.
이 마음이 많이 다녀서[行] 어떤 경계에 있는가? 선이나 혹은 악이나 무기(無記)의 경계에 있는가를 사유하여 만약 선의 경계라면 부지런히 정진하여 선근을 더욱 기르고, 37조도품(助道品)으로 모든 착하지 못한 악법을 다스려라. 악하고 착하지 않은 것이란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음이다. 탐욕에는 세 등급이 있으니, 상품·중품·하품이다. 상품이란 탐욕이라는 이름을 듣고 온몸이 떨리고 마음이 뛸 듯이 기뻐서 욕심의 허물을 보지도 못하고, 싫어하여 여의는 마음이 생기지 않으며 자기 마음에 부끄러움도 없고[無慙], 세상에서 악을 지으면서도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無愧]. 무엇을 부끄러움이 없다고 하는가? 홀로 놀며, 항상 욕심의 경계를 생각하여 마음과 마음이 상속하고, 오직 아름답고 좋은 것만 보고 허물됨이나 근심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만약 부모나 여러 어른께서 그의 욕심을 꾸짖어도 그 어른 앞에서 다툼[諍]이 일어난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움이 없다고 하는 것이니, 이 사람은 목숨을 마치면 마땅히 악도[惡趣]에 태어날 것이다.
중품의 탐욕이란 만약 경계를 떠나면 항상 마음이 생겨나지 않는 것이며, 하품의 탐욕이란 다만 같이 말하고 웃고 나면 욕정이 곧 없어지는 것이다.
성냄에도 또한 세 등급이 있으니, 상품(上品)의 성냄이란 분노가 일어날 때 마음이 흐려지고 눈이 어지러워지며 혹은 5역죄를 짓고, 혹은 정법을 비방하나 큰 중죄 5역(逆)의 악에는 백분의 일에도 미치지 않는 것이다. 중품의 성냄이란 성을 냄으로 해서 모든 악을 짓고 곧 후회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하품의 성냄이란 마음에 싫어하고 한(恨)함이 없고, 다만 입으로 헐뜯고는 곧바로 허물을 뉘우치는 것이니 어리석음도 또한 이와 같다.
비록 이렇게 보아도[觀] 일체법이 허수아비요 꿈이요 메아리요 건달바성과 같이 허망하여 진실한 것이 아니라 전도(顚倒)된 것임을 아는 까닭에, 밖의 경계를 멸하고 속마음이 고요하여 자신이 행하는 것과 행할 법도 보지 않으니, 둘도 아니고 다른 것도 없어서 자성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배워서 선(禪)바라밀을 통달한다고 하는 것이니라.
대왕이여,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배워서 반야바라밀을 행하면 바른 지혜[正智]로 색·수·상·행·식을 관하되, 색이 생겨난다고 보지 않고 색의 쌓임도 보지 않고 색의 멸함도 보지 않나니, 수·상·행·식도 이와 같다.
무슨 까닭인가? 자성이 다 공하여 진실한 것이 없으나 다만 허망한 이름자만으로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모든 중생을 교화하되, 끝내 업의 과보가 없다고 설하지 않으며, 모든 법은 꿈과 같고 허깨비와 같아 나도 없고 남도 없고 중생도 없고 수명도 없고 양육하는 것도 없되, 업의 과보가 있다고 설하는 것이다.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을 수행하면 악마도 제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 무슨 까닭인가? 선지식을 가까이 하며 보리를 도와서 세간법을 여의고 모든 여래의 매우 깊은 정법을 환희하여 찬탄하고, 부처님의 바른 지혜를 제외하고는 하늘이나 마귀[魔]나 사문과 바라문은 보살에 미칠 자가 없으니, 자신이 행하는 것과 행할 법을 보지 않고, 둘이 없고 다른 것도 없어서 자성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배워서 반야바라밀을 통달한다고 하는 것이니라.
대왕이여,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배워서 방편[優波憍舍羅 : 善巧方便]바라밀을 행함에는 보살마하살은 선교(善巧) 방편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하니, 만약 꽃과 과일을 보면 밤낮으로 여러 부처님과 보살대중에게 공양한다. 이런 선근으로 보리에 회향하니, 꽃나무와 과일나무도 또한 이와 같다.
만약 여래의 경 가운데에서 매우 깊은 뜻을 설함을 듣고는 믿고 즐겁게 받아가지고 중생을 위하여 설한다면 이런 선근으로 보리에 회향한다. 만약 여래의 탑이나 형상을 보고 향이나 꽃을 공양하면 모든 중생이 파계(破戒)의 향을 여의고 여래의 청정한 계의 향을 얻게 하며, 더러운 땅에 물을 뿌리고 먼지를 쓸어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위의를 단정하게 하며, 꽃으로 장식한 일산[華蓋]으로 가리워서 모든 중생이 다 뜨거운 고뇌를 여의게 하며, 승가람(僧伽藍)에 들어가서 모든 중생이 다 열반에 들어가기 원한다. 또한 만약 가람에서 나올 때는 모든 중생이 마귀의 경계에서 벗어나기를 원한다. 가람의 문을 열 때는 ‘출세간의 지혜로써 모든 중생을 위하여 아직 열리지 않은 문이 열리어지이다’라고 원한다. 만약 빗장이 걸리어 문이 닫혀 있음을 보면 원컨대 악도[惡趣]와 3계[有]의 빗장이 걸려 문이 닫힌 중생을 위하여 앉을 때마다 생각하여 말하기를 ‘원컨대 모든 중생이 보리좌에 앉기 원하며, 만약 오른쪽 옆구리를 대고 누울 때는 모든 중생이 다 열반을 얻기 원합니다’라고 한다. 또한 일어날 때마다 생각하여 말하기를, ‘모든 중생이 모든 의혹을 여의고 일어나기 원하며, 만약 다리와 발을 씻을 때는 모든 중생이 번뇌를 멀리 여의기를 원하며, 부처님께 예를 드리고 탑을 돌 때는 모든 중생이 천인사(天人師 : 佛)가 되기 원합니다’라고 한다.
만약 외도의 삿된 견해를 교화하기 어려우면 곧 스스로 생각하여 말하기를, ‘내가 먼저 그들의 스승이 된다면 반드시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한다. 그리하여 같이 배우는 도반이나 혹은 제자가 되어 그들 대중과 함께 지내면서도 계행과 들음이 많아 다른 외도들보다 으뜸이 된다면, 그로 인하 여 항복하고 존중하므로 그런 후에 스승이 되어 말하면 반드시 믿고 받들 것이니, 이때 그의 삿된 법을 허물고 열반법을 설하여 바른 가르침에 들어오게 하여 정성스럽게 범행(梵行 : 청정행)을 닦아 선정과 삼매로 모든 신통을 얻게 한다. 또한 욕심이 많은 자를 보면 용모가 가장 단정한 여인으로 변화하여 그로 하여금 애착하게 하다가 문득 무상함을 나타내 보여서 육신[色]이 변하고 배가 퉁퉁 부어오르고 문드러지고 허물어져 냄새나는 것 등을 보고는 그로 하여금 미워하고 싫어하여 여읠 마음이 일어나게 한다. 그리고 나서 다시본래 보살의 형상으로 나타나 설법하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하여 위없는 결과를 이루게 한다. 대승의 사람이 선지식을 여의고 이승(二乘)의 도를 배우나 그 과(果)를 얻지 못하고 어처구니없이 대승을 잃는 것을 보면 그 근성(根性)을 보아 곧 설법하여 무상도에 들어가게 하며, 아직 발심하지 않은 자는 교화하여 발심하게 하고, 이미 발심한 이는 가르쳐서 견고하게 한다. 계를 가진 이가 가벼운 죄를 범하고서도 참회하여 죄로부터 벗어나려 하지 않고 게을리 물러나 걱정만 하며, 다시 도를 닦지 않는 것을 보면 곧 설법하여 참회하고 없애어 번뇌를 끊고 도에 이르기 위해 훌륭하게 정진[勝進]하게 하니, 보살마하살은 욕심을 적게 하여 만족할 줄 알고 오직 법의 이로움을 구하여 중생을 위하여 여래께 공양하기를 설한다.
6바라밀을 성취하여 설법하고 공양하니 이것이 단(檀)바라밀이며 행동과 말이 어긋나지 않으면 이것이 시(尸)바라밀이다. 만약 하늘이나 혹은 마귀가 능히 허물어 어지럽게 하지 못한다면 이것이 찬제바라밀이다. 마음과 마음이 이어져서 피곤하거나 싫증내지 않으면 이것이 비리야(毘梨耶)바라밀이요, 마음을 오직 하나로 하여 다른 경계와 인연하지 않으면 이것이 선바라밀이다. 설법하고 공양함에 나와 내 것을 보지 않으면 이것이 반야바라밀이다.
자신이 행하는 것과 행할 법을 보지 않으니, 둘이 없고 다른 것도 없어서 자성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배워서 방편바라밀에 통달한다고 하는 것이니라.
대왕이여,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배워서 원(願 : 尼坻)바라밀을 행하니 보살의 발원은 진실로 삼계를 벗어나 이승의 도를 구하는 즐거움을 가지기[有] 위함이 아니다. 보살은 큰 서원을 세워서 말하기를, ‘모든 중생을 거두 어들여 중생을 다 열반에 들게 하고, 그런 후에야 이 몸이 정각을 이룰 것이다’라고 한다. 또한 보살은 아직 발심하지 않은 자는 곧 발심하게 하고, 이미 발심한 이는 수행하게 하며, 이미 수행하는 이는 보리를 얻게 하고, 보리를 얻은 이에게는 법륜을 굴리기를 청하며, 이렇게 점점 나아가 몸에서 나온[分身] 사리로는 탑을 일으켜 공양하게 한다.
다시 서원을 세워서 말하기를, ‘만약 세계에 계시는 모든 부처님께서 도를 이루셔서 모든 하늘의 마(魔)가 없어지고, 원컨대 자기 몸 밖의 인연에 의하지 않고 스스로의 지혜로써 위없는 마음을 발하게 하소서’라고 한다.
또 원하되 ‘나의 몸이 항상 세간에 있으면서 모든 중생이 원하는 것을 모두 다 성취하게 하여, 새로이 뜻을 발하는 모든 보살들이 만약 여래의 매우 깊은 법을 설하심을 듣더라도 마음에 놀라거나 두려움이 없게 하여지이다. 또한 원하옵건대, 끝없는 부처님의 도와 끝없는 부처님의 경계와 끝없는 대비를 모든 중생이 다 통달하게 하여 주십시오. 그리고 나의 몸은 항상 사바세계[穢國]에 태어나고 정토에는 태어나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하니, 왜냐 하면 비유하건대 병든 사람은 오직 의약에 의지하다가 병이 없어지면 그에 의지하지 않는 것과 같이, 자신이 행하는 것과 행할 법을 보지 않으니 둘도 없고 다른 것도 없어서 자성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배워서 원바라밀을 통달한다고 하느니라.
대왕이여,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배워서 역(力 : 婆羅)바라밀을 행함에 보살마하살은 능히 하늘의 마귀를 항복받고 모든 외도를 꺾으며, 공덕과 지혜력을 구족하였으므로 모든 부처님의 법을 수행하지 않음이 없고 증득하여 보지 못하는 것이 없다. 또한 신통력으로써 한 개의 모발을 가지고도 능히 염부제(閻浮提)와 나아가 사천하[四大洲]와 삼천대천세계에서부터 무량 백천세계에 이르기까지 들어 올리며, 능히 공중에서 갖가지 보배를 취하여서 모든 중생에게 베풀며 시방 무량무변세계의 모든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지니지 않음이 없으나, 자신이 행하는 것과 행할 법을 보지 않으니, 둘도 없고 다른 것도 없어서 자성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배워서 역(力)바라밀을 통달한다고 하느니라.
대왕이여,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배워서 지(智 : 闍那)바라밀을 행하면서 보살마하살이 5음(陰)을 관함에, 생겨나도 실제로 생겨남을 본 것이 아니고 소멸하여도 실제로 소멸한 것이 아니니 이렇게 사유하라. 즉, 이 5음은 공하여 나도 없고 남도 없으며 중생도 없고 수명도 없고 양육함도 없는데, 범부 중생이 허망하게 나[我]라고 집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5음은 내가 아니요, 음(陰) 가운데 내가 없고 나는 5음이 아니다. 내[我] 속에는 음이 없으나 범부가 어리석게 미혹하여 여실하게 알지 못하고 생사에 유전하는 것이 마치 불바퀴[火輪]가 도는 것과 같다.
모든 법은 자성이 본래 공하여 생겨남도 없고 멸함도 없으나 인연이 모인 것을 생겨남이라 하고 인연이 흩어진 것을 멸이라 한다. 자성은 없는 것이 아니므로 생겨남도 없고, 자성은 있는 것도 아니므로 멸함도 없다. 보살마하살은 모든 경계에 한 법도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수행함을 지(智)바라밀이라 하느니라.
이승이나 외도는 능히 가리어 숨기지 못하며, 지혜로 관철하면 초발심에서 열반에 들어가기까지 다 밝게 알아서 능히 한 법을 가지고 모든 경계를 알며, 모든 경계가 곧이 한 법임을 알게 된다. 무슨 까닭인가? 여여하게 하나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닦는 것과 닦는 법을 보지 않으니, 둘이 없고 다른 것도 없어서 자성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지(智)바라밀을 통달하였다고 하느니라.”
02. 현상품(顯相品)
그때 승천왕이 곧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대고 부처님을 향하여 합장하고 머리와 얼굴을 땅에 대며 예를 올리고는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이 반야바라밀은 매우 깊은데 어떤 것이 이 반야바라밀의 모습[相]입니까?”
부처님께서 승천왕에게 말씀하셨다.
“땅·물·불·바람의 모습[相]과 같이 반야바라밀의 모습도 그와 같다.” “세존이시여, 무엇을 땅의 모습[地相]이라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두루 넓고 광대하여 헤아리기 어려우니, 이것을 땅의 모습이라 한다. 반야바라밀의 모습도 그와 같다. 무슨 까닭인가? 여여하게 두루 넓고 광대하여 생각으로 헤아리기 어렵기 때문이니라.
대왕이여, 모든 약초가 다 땅에 의지하여 살듯이 모든 선한 법은 다 반야바라밀에 의하여 생겨나는 것이다. 또한 땅이 늘어도 기뻐하지 않고 줄어도 성내지 않는 것처럼, 나와 내 것이라는 생각을 여의어 서로 다른 모습[二相]이 없기 때문이니라. 반야바라밀도 역시 이와 같아 찬탄하여도 늘어나지 않고 헐뜯어도 줄어들지 않느니, 나와 내 것이라는 생각을 여의어 서로 다른 모습이 없기 때문이다. 세간에서 가고 오고 발을 들고 내림이 다 땅에 의지하듯 만약 선도(善道)를 구하여 열반으로 나아가려면 마땅히 이 반야바라밀에 의지하여야 하느니라.
또한 대지에서 갖가지 보배가 나오듯 반야바라밀도 이와 같아 출세간의 가지가지 공덕이 생겨난다. 또한 대지에 벌레·개미·모기·등에가 갖가지로 고통을 주어도 능히 기울어 흔들리지 않듯 반야바라밀도 역시 이와 같이 나와 내 것이라는 생각을 여의어 기울어지거나 움직이지 않느니라.
또 대지가 사자·용·코끼리의 소리를 들어도 끝내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않듯 반야바라밀도 역시 이와 같아 하늘의 마와 외도의 설에도 능히 두려워하지 않느니라. 왜냐 하면 사람이 있다고 보지 않고 법이 있다고 보지 않으니 자성이 공하기 때문이니라.
또한 물[水大]이 높은 데서 낮은 곳으로 흘러 내려오듯 모든 선한 법은 다 반야바라밀을 향하여 나아간다. 또한 물이 초목을 적시어 꽃과 과실을 생겨나게 하듯 반야바라밀도 이와 같아 모든 삼매를 윤택하게 하여 도를 돕는 법[助道法]이 생겨나게 하여 온갖 지혜의 나무를 이루어 불법(佛法)의 과실을 얻어 중생을 이익 되게 하느니라.
또 물이 초목의 뿌리를 잠기게 하여 기울여 뽑아내어 물을 따라 흘러가게 하듯 반야바라밀도 이와 같아 모든 견해·번뇌·습기(習氣)의 근본을 소멸하게 하여 영원히 다시 생기지 않게 하느니라.
또한 물의 성품이 본래 청정하여 때가 없고 탁하지 않듯이 반야바라밀도 이와 같아 본체가 번뇌가 없는 까닭에 청정이라 하고, 모든 의혹을 여읜 까닭에 때가 없다[無垢]고 하며, 한 모양으로 다르지 않은 까닭에 혼탁하지 않다고 하는 것이니라.
사람이 여름더위에 물을 만나면 맑고 시원함을 느끼듯이 중생이 타는 듯한 번뇌[熱惱]에 시달리다가 이 반야바라밀을 들으면 즉시 맑고 시원해지며, 사람이 목말라 애가 탈 때 물을 얻으면 곧 목마름이 멈추듯이, 세간을 벗어나는 법을 구하고자 하여 반야바라밀을 얻으면 생각하던 서원이 또한 멈추는 것이니라.
또 샘물이 아주 깊으면 들어가기 어렵듯이 반야바라밀도 이와 같아 모든 부처님의 경계는 매우 깊어 들어가기 어려운 것이니라.
또 웅덩이에 고인 물은 다 평등하듯이 반야바라밀도 이와 같아 모든 성문과 벽지불 및 모든 범부에게 다 평등하다. 또 물이 땅을 씻어 깨끗하게 하듯이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통달하면 모든 번뇌를 여의고 곧 청정함을 얻게 되느니라. 무슨 까닭인가? 자성이 청정하여 모든 의혹을 여읜 까닭이니라.
또 불[火大]이 모든 나무와 약초를 태우고도 스스로 물질을 태웠다는 생각을 하지 않듯이 반야바라밀도 이와 같아 모든 번뇌의 습기를 소멸하고도 스스로 멸하여 없앴다는 생각을 하지 않느니라.
또한 비유하면 불은 모든 물건을 익혀버리듯이 반야바라밀도 모든 부처님의 법을 성취하느니라.
또 비유하면 불이 모든 습한 물건을 말리듯이 반야바라밀도 모든 흘러나오는 번뇌를 말리어 영원히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며, 설령 맹렬한 불덩이가 설산(雪山)의 꼭대기에 있어 일 유순(由旬)에서 십 유순에 이르기까지 다 비추어도 스스로 멀리 비춘다는 생각이 없듯이 반야바라밀도 이와 같아 성문과 연각 및 보살을 다 비추어도 스스로 그들을 비춘다는 생각을 하지 않느니라.
또 금수가 밤에 불빛을 보고 두려워서 멀리 피하듯이 박복한 범부와 이승(二乘)이 만약 반야바라밀을 들으면 두려워 멀리 여읠 것이니라. 반야바라밀이라는 이름도 듣기 어려운데 하물며 다시 배우고 닦으리오. 밤에 먼 길을 가다가 길을 잃고 헤매게 되었을 때, 만약 불빛을 보면 마을이 있는 것을 알고 기뻐하며 빨리 이르려 하고, 도착하면 마음이 편안해져서 두려움이 없어지는 것과 같이, 생사의 광야에서 복덕이 있는 사람이 만약 반야바라밀을 들으면 큰 기쁨이 생겨 나아가려 하고, 받아 지녀 영원히 번뇌를 여의고 마음에 안락을 얻게 되는 것이니라.
세간의 불[火]은 귀하고 천함이 없는 것처럼 반야바라밀도 이와 같아 범부나 성인의 구별 없이 평등하게 있는 것이다. 또 바라문이나 찰리가 다 불을 공양하듯이 모든 부처님과 보살들은 다 반야바라밀을 공양하느니라. 또한 작은 불이 삼천대천세계를 태우듯이 반야바라밀도 이와 같아 만약 한 구절을 듣더라도 한량없는 번뇌를 태우느니라.
대왕이여, 반야바라밀은 번뇌를 여의어 집착함이 없고 끝없이 고요하며 끝없는 지혜로 평등하게 법성을 통달하니, 마치 허공과 같아 성품이 머무는 곳이 없고 모양과 경계를 여의며, 모든 감각과 감관을 넘어서 마음과 마음의 법[心數法]으로 분별할 수도 없으니, 생겨남도 없고 멸함도 없어서 자성을 여읜 까닭이니라.
대왕이여,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 세상에 드문 일이라서 중생을 이익 되게 하니, 마치 해와 달이 일체를 수용하는 것과 같다.
비유하면 달이 뜨거움의 고통을 없애는 것과 같이 반야바라밀도 모든 번뇌의 뜨거운 독을 없앤다. 또 비유하면 세간에서 달을 즐겁게 보는 것과 같이 반야바라밀도 모든 성인이 즐거이 보는 바이다. 또한 초승달이 날로 자라나는 것과 같이 보살마하살도 반야바라밀을 가까이하면 초발심에서부터 나아가 보리에 이르기까지 점점 자라나며, 검은 달[黑分 : 달이 줄어가는 下半月] 이후로는 달이 나날이 기울어져 마침내 없어지듯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수행하면 번뇌의 얽매임이 차례로 다 없어진다.
세간의 달을 바라문과 찰리(刹利) 종족이 다 찬탄하는 것과 같이 만약 선남자와 선여인이 반야바라밀을 가까이 하면 모든 세간·하늘·사람·아수라가 다 칭찬한다.
달이 두루 사천하를 유행하듯이 반야바라밀도 색(色 : 물질)과 마음에 두루 하지 않은 곳이 없다. 세간의 달이 항상 스스로 장엄하듯이 반야바라밀도 성품을 스스로 장엄한다. 왜냐 하면 생기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고, 성품이본래 청정하여 일체법에 두루 하여 자성을 여읜 까닭이다.
세간의 태양이 모든 어둠을 깨뜨리면서도 스스로 어둠을 깨뜨렸다고 생각하지 않듯이, 반야바라밀도 이와 같아 비롯함이 없는 모든 번뇌를 깨뜨리되 스스로 번뇌를 깨뜨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또 비유하면 태양이 연꽃을 피게 하되 스스로 연꽃을 피웠다고 생각하지 않듯이, 반야바라밀도 이와 같아 보살심을 열게 하고도 그런 생각도 없다.
또 비유하면 태양이 시방을 두루 비추어도 스스로 두루 비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과 같이, 반야바라밀도 이와 같아 끝없이 비추면서 비춘다는 상(相)이 없다.
또 동쪽이 붉은 것을 보고 해가 오래지 않아 뜰 것임을 알듯이, 만약 반야바라밀을 들으면 마땅히 부처님이 머지않아 오실 줄을 알게 된다. 염부제(閻浮提)의 사람이 만약 해가 뜨는 것을 보면 크게 기뻐하듯이, 만약 세간에 반야바라밀의 이름이 있으면 모든 성인들이 다 크게 기뻐한다. 또 해가 뜨면 달과 별이 제 빛을 드러내지 못하는 것과 같이,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 이승(二乘)이나 외도의 덕(德)은 또한 나타나지 못한다. 또 해가 뜨면 비로소 구덩이의 깊고 얕은 곳이 보이는 것처럼,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 세간의 그릇되고 바른 도리를 안다. 왜냐 하면 반야바라밀의 자기 모습은 평등하여 생기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니 자성을 여읜 까닭이니라.
대왕이여,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공행(空行)을 많이 닦았기에 머물러 집착하는 것이 없고, 도를 닦아 장애를 여의었고, 악지식을 멀리하고 모든 부처님을 가까이 한다. 또한 마음과 마음이 이어져서 부처님을 생각하는 마음이 끊어지지 않고 평등함을 통달하여 법계에 수순하며, 시방의 국토를 신통으로 노닐면서도 본래 있던 곳에서 전혀 동요하지 않느니라.
모든 부처님의 법을 보면 앞에 나타난 것이 여기고, 비록 세간에 있더라도 세간법에 물들지 않아 마치 연꽃이 진흙 속에서 피어나는 것과 같이 보살마하살은 생사에 처해 있어도 반야바라밀의 방편의 힘으로 물들거나 집착하지 않는다. 왜냐 하면 반야바라밀은 생겨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자기 모습이 평등하고 보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느니, 자성을 여읜 까닭이니라.
또 연꽃에 물방울이 맺혀 있지 않듯이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함에는 하나의 착하지 않은 법이라도 잠시도 머물지 않느니라.
또 연꽃이 있는 곳은 다 향기가 있듯이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며, 만약 성읍이나 취락에 있으면 인간세상과 천상이 다 계(戒)의 향을 갖추게 되느니라.
또 연꽃의 체성이 청정함을 바라문·찰리·장자·거사가 모두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듯이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 하늘·용·야차·건달바·아수라·가루라·긴나라·마후라가·사람과 사람 아닌 이들과 보살과 모든 부처님들이 다 사랑하고 공경하느니라.
또 연꽃이 처음 피어나려고 할 때 많은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듯이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함에 항상 웃는 얼굴로 찡그림이 없어서 중생을 기쁘게 하느니라.
또 세상 사람이 꿈에 연꽃을 보면 이것을 좋은 징조로 여기는 것처럼 모든 사람과 하늘이 꿈속에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함을 보거나 들어도 이것을 길상(吉相)으로 여기는데 하물며 실제로 보는 것이겠느냐.
또 연꽃이 처음 피어날 때 사람이나 사람 아닌 이가 다 애호하는 것과 같이, 보살마하살이 처음 반야바라밀을 배우면 모든 부처님과 보살·제석천·범천과 모든 하늘들이 보호하느니라.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 이와 같은 마음을 일으켜 이치대로 모든 바라밀을 통달하고, 부처님 법을 만족히 하며 중생을 교화하느니라. 보리수 아래에 앉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성취하여서 바른 법륜을 굴리니, 세간의 사문·바라문과 하늘·악마·제석·범천도 굴리지 못하는 바이다. 시방의 끝없는 세계의 모든 중생을 교화하고 제도하여 평등하게 하며, 생사의 바다에서 건져내어 다 반야바라밀 가운데 안치하고, 돌아갈 곳 없고 의지할 곳 없으며 구호해줄 이 없는 자를 모두 구호한다. 부처님을 뵙고자 하는 자에게는 곧 사자후를 지어서 보여주며 신통에 자재[遊戱]하여 부처님의 공덕을 찬탄하며 중생이 우러러 사모하게 한다. 마음은 청정하여 바뀌지[轉移] 않고, 뜻은 아첨하거나 왜곡됨이 없으며 삿된 생각을 멀리 여의니, 이른바 성문과 벽지불의 법을 생각하지 않고 모든 더러움이 없어져서 다시는 번뇌가 없으며몸은 거짓스런 행이 없고 삿된 위의(威儀)를 여의며, 입으로는 교묘한 말을 하지 않고 진실하게 말한다. 받은 은혜는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가벼운 은혜라도 두텁게 갚으며, 마음속에 한을 품지 않고 입으로는 항상 부드럽게 말하며, 이와 같이 청정한 마음을 닦고 익혀서 더러움을 보지 않고 물드는 것을 보지 않으니, 둘이 없고 다름도 없어서 자성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대왕이여,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함에 여래의 세 가지 청정함을 믿고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수다라(修多羅)에서 여래의 법신(法身)·고요한 몸[寂靜身]·같음이 없는 몸[無等等身]·한량없는 몸[無量身]·같이하지 않는 몸[不共身]·금강과 같은 몸[金剛身]을 말씀하셨다.’ 여기에 대해 마음에 미혹됨이 없이 결정하면 이것을 여래의 몸이 청정함을 믿는다고 하느니라. 또한 생각하기를, ‘수다라에서 여래의 입[口]은 청정하여 범부를 위하여 부처님께서 수기를 주듯이 또한 보살을 위하여 성불의 수기를 주셨으니, 이와 같은 말씀이 서로 어긋나지 않음을 믿는다. 무슨 까닭인가? 여래는 영원히 모든 과실을 여의어 아무런 번뇌가 없고 번뇌의 더러움이 없어 고요하고 청정하다. 하늘이나 마귀나 사문이나 바라문, 혹은 범천[梵]이 만약 여래께 구업(口業)이 있다고 한다면 이런 이치는 없으니, 이것을 여래의 입이 청정함을 믿는다고 하느니라.
또 수다라에서 여래의 뜻이 청정함을 설하셨으니, 모든 부처님·세존께서 마음으로 생각하시는 것은 성문이나 벽지불·보살·하늘·사람이 알 수 없느니라. 무슨 까닭인가? 여래의 마음은 매우 깊어서 들어가기 어려우며, 모든 감각과 감관으로도 알 수 없으며, 생각하여 헤아리는 경계를 여의어서 끝을 헤아릴 수 없으니 허공계(虛空界)와 같으니라. 이와 같이 알고 믿어서 마음에 의혹됨이 없는 것을 능히 여래의 뜻이 청정함을 믿는다고 하느니라.
또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함에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과 같이 보살마하살은 모든 중생을 위하여 두려워하지도 않고 피로해 하지도 않으며 무거운 짐을 지고도 그 마음이 견고하여 일찍이 물러남이 없느니라. 모든 바라밀을 차례로 닦고 익히어 부처님의 법을 성취하니, 장애가 없고 끝이 없으며 같음이 없고 함께할 수 없는 법이다. 말한 것을 결정함에 그 성질이 용맹하여 여래의 미래의 광대한 일을 성취하느니라.’
이러한 보살마하살은 그 일 가운데서 의심하지 않고 의혹을 일으키지 않으며 깊은 마음으로 받아서 믿느니라.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되 이와 같이 생각해야 하느니라.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며 도량에 있을 때는 막힘 없는 청정한 천안(天眼)·천이(天耳)·타심지(他心智)·숙명지(宿命智)·누진지(漏盡智)를 얻어서 한 생각 가운데서 삼세가 평등한 지혜를 통달하여 여실하게 모든 세간을 관찰한다. 그리하여 중생이 악행을 저지르고 입으로 악행을 짓고 뜻으로도 악행을 하며, 성인을 비방하여 헐뜯고 그릇된 견해로 삿된 업을 짓는다면, 마침내 몸이 무너져 목숨을 마칠 때는 반드시 악도에 떨어지게 되며, 중생이 몸으로 선행을 하며 입으로 선행을 하고 뜻으로도 선행을 하며 성인을 비방하지 않고 바르게 보고 바르게 행동한다면, 마침내 몸이 무너져 목숨을 마칠 때는 반드시 선도(善道)에 들게 되리라.’
여실하게 중생계를 관찰하고 나서 이와 같이 생각한다. ‘내가 옛날에 보살도를 행하기를 발원하기를 스스로 깨닫고 남도 깨닫게 하리라 하였는데, 이 원을 응당 원만하게 하리라.’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함에는 이와 같은 일을 의심하지 않고 의혹하지 않아 여실하게 받아 믿느니라.
대왕이여, 보살이 성불하는 곳을 학처(學處)라고 하고, 스스로 깨치는 것을 정각(正覺)이라 하며, 중생을 성취하게 하는 것을 정변각(正遍覺)이라 하느니라.
대왕이여, 이와 같이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 여래가 나오시어 세상을 일으키는[出興] 것을 알고 믿느니라.
대왕이여,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함에 일승의 설법을 들으면 곧 받아 믿느니라. 무슨 까닭인가? 모든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은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지가지 다른 승(乘)은 다 불승(佛乘)에서 나온 것이니 염부제의 가지가지 성읍과 취락의 이름은 다르나 다 이 주(洲)에 속하여 있는 것과 같이, 모든 승의 여러 가지 이름을 설하였으나 다 불승에 속한 것이니라.
또한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여래 세존께서는 훌륭한 방편[善巧]으로 갖가지 설법을 하시나 다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다. 무슨 까닭인가? 세존의 설 법은 중생의 근기[根性]에 따른 것이므로 분별하여 삼승(三乘)을 설하셨으나 그 실상은 한 길[一道]이기 때문이다.’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 다시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여래의 설법은 음성이 깊고 멀리 들리며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다. 무슨 까닭인가? 제석천과 범천(梵天) 등의 적은 공덕도 오히려 음성이 깊고 멀리 들린다고 하는데, 하물며 여래께서 한량없는 억겁 동안 익히고 쌓은 공덕이겠는가.’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 이와 같이 생각할 것이다. ‘여래의 설법은 중생의 근기를 어긋나지 않느니, 상·중·하의 근기(根機)를 다 성취하게 하되 중생은 각각 오직 나를 위하여 설법하신다고 하지만 모든 부처님은 본래 설함도 없고 보인 것도 없느니라.’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은 일에 의심하지 않고 믿고 이해하느니라.
대왕이여,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 마음이 미세하여져서 이렇게 생각한다. ‘세간은 맹렬한 큰 불덩이가 모여 있으니 말하자면 탐욕의 불과 성냄의 연기와 어리석음의 어둠이다. 이 불구덩이 속에서 어떻게 마땅히 모든 중생을 다 벗어나게 할까? 만약 모든 법이 평등함을 통달하면 벗어난다 한다.’ 여실하게 법이 환상(幻相)과 같음을 알고 인연을 잘 관찰하여 분별하지 않느니라.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이렇게 생각한다. ‘모든 법은 본래가 없으나 업보는 있다. 무릇 모든 부처님과 보살이 말씀하신 뜻을 나는 안다. 이에 뜻을 알고 나서 그 뜻을 헤아려 생각하고, 뜻을 헤아려 생각하고 나서는 곧 진실함을 보고, 진실함을 보고 나서 중생을 제도하리라.’
대왕이여,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선교방편으로 중생을 위하여 설법하니, 말하자면 모든 법은 다 ‘내가 없고 중생도 없고 양육함도 없고 남도 없고 짓는 자도 없고 깨닫는 자도 없고 생기는 것도 없고 견해도 없고 공하여 있는 것도 없고 자재한 성품도 아니며 허망하게 분별함이요, 인연이 화합하여 생긴 것이다.’
대왕이여, 만약 모든 법이 다 내가 없고 나아가 견해도 없다고 설함은 이치를 말하여 공하고 소유함이 없다고 설하는 것이며, 나아가 생기는 인연 또한 이와 같으니라.
대왕이여, 그 설법이란 법의 모양을 수순할 따름이니 이것을 이치를 말한다고 이름하고 법의 모양을 어기지 않고 법과 같이 상응하여 평등함에 들어가서 뜻과 이치를 나타냄을 교묘한 설법이라 하느니라.
대왕이여,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 걸림없는 변재를 얻으니, 말하자면 집착이 없는 변재·다함이 없는 변재·이어지는 변재·끊어지지 않는 변재·겁내고 약하지 않는 변재·놀라고 두려워하지 않는 변재·같이하지 못하는[不共] 변재·하늘과 사람이 소중히 하는 변재·끝이 없는[無限] 변재 등이다.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청정한 변재를 얻으니, 말하자면 목이 쉬지 않는 변재·정신이 헷갈리지 않는 변재·두려워하지 않는 변재·높고 거만하지 않는 변재·뜻이 구족한 변재·맛을 구족한 변재·서툴고 껄끄럽지[拙澁] 않은 변재·때에 맞는 변재 등이다.
대왕이여,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 대중의 위덕의 두려움을 여의는 까닭에 목이 쉬지 않으며, 굳게 머물러 겁내지 않는 지혜에 힘입어 정신이 헷갈리지 않고, 보살은 대중 속에 있어도 사자왕과 같은 까닭에 두려움이 없으며, 모든 번뇌를 여읜 까닭으로 높고 거만하지 않느니라. 뜻이 없는 것은 설하지 않고 법의 모양을 통달한 까닭에 뜻을 구족하며, 글과 논(論)과 문자와 세상의 지혜를 잘 아는 까닭에 맛을 구족하고 무량 겁 이래로 교묘하고 편안한 말을 익힌 까닭으로 서툴고 껄끄럽지 않느니라. 이와 같은 설법을 사계절 수순하여 봄에는 봄과 같은 설법을 하고, 가을과 겨울도 또한 그렇게 하는 것이니라. 마땅히 앞에 말할 것을 중간이나 끝에 말하지 않고, 마땅히 끝에 말할 것을 앞이나 중간에 말하지 않으며, 마땅히 중간에 말할 것을 앞이나 끝에 말하지 않으니, 때를 잘 아는 까닭이니라.
대왕이여,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얻은 변재로 중생을 기쁘게 하니, 말하자면 항상 웃는 얼굴로 고운 말을 하며 일찍이 찡그리지 않고, 뱉은 말에는 뜻이 있어 참되게 부합하며, 말한 것은 결정적이어서 남을 속이거나 업신여기지 않으며, 갖가지 요설(樂說)로 부드럽게 말하며 중생을 기쁘게 하여 준다. 또한 안색이 너그럽고 온화하여 남으로 하여금 정이 들어 따르게 하며 뜻에 따라 말하면 듣는 자가 깨달아 알며 법의 모양을 일컬어 말하며 이익하게 하는 까닭이니라.
평등하게 설하여 마음에 편당(偏黨)이 없으며, 결정하여 말함에 허망한 말이 없으며, 가지가지 요설로 중생의 근성을 따라 설하여 기쁨을 얻게 하느니라.
대왕이여,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 큰 위덕을 이루게 된다. 무슨 까닭인가? 그릇[器]이 아니면 듣지 못하는 까닭이니라.”
그때 승천왕이 곧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그 마음이 평등하다고 하셨는데, 어째서 그릇이 아닌 자를 위하여 설하지 않습니까?”
부처님께서 승천왕에게 말씀하셨다.
“대왕이여, 반야바라밀은 성품이 스스로 평등하여 그릇임을 보지 않고 그릇이 아님을 보지 않으며 설하는 자와 설하는 것도 보지 않으나, 중생은 허망하게 설하고 설하지 않음을 본다. 무슨 까닭인가? 반야바라밀은 생기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상(相)의 분별이 없어서 마치 허공과 같아 모든 것에 두루 차 있느니라. 중생도 그러하여 생기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성문·벽지불·보살 및 부처님도 이와 같아 이름[名字]이 없는 법이지만 임시로 이름을 빌려 세운 것[假立]을 중생이라 말하고 이것을 반야라고 말하며, 설하는 자가 있다고 말하고, 설하는 것이 있다고 말하며 듣는 자가 있다고 말하나 제일의(第一義)에는 같은 하나의 모양이다. 말하자면 모양이 없는 것이다.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은 매우 깊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 위덕이 중한 까닭에 그릇이 아니면 듣지 못하게 되느니라.
대왕이여, 반야바라밀은 그릇이 아닌 중생을 위하여 설하지 않고 외도를 위하여도 설하지 않으며, 존중하지 않는 자를 위하여도 설하지 않고 바르게 믿지 않는 자를 위하여도 설하지 않느니라. 법을 구하여 무역(貿易)하는 자를 위하여도 설하지 않고 이익[利養]을 탐하는 자를 위하여도 설하지 않으며, 질투하는 자를 위하여도 설하지 않고 눈이 어둡고 귀 먹고 말 못하는 자를 위하여도 설하지 않느니라. 무슨 까닭인가?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는 마음에 인색함이 없고 깊은 법을 숨기는 것도 아니며 중생에게 대해 대자비가 없음도 아니고 중생을 버리지도 않지만 중생은 지난 세상의 선근으로 여래를 뵙고 정법을 듣는 것이니라. 모든 부처님·여래께서는 본래 설하시는 마음에 이것과 저것이 없지만 번뇌[障]가 두터운 자가 비록 그 가까이 있으나 보고 듣지 못하는 것이니라.”
그때 승천왕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중생이 모든 부처님과 보살의 설법을 듣고 감당할 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승천왕에게 말씀하셨다.
“대왕이여, 바른 믿음을 갖추면 모든 부처님과 보살은 설법하니, 근성이 완전하게 익어야 법의 그릇이 될 수 있다. 과거 부처님께 일찍이 선근을 심어서 마음에 아첨하거나 비뚤어짐이 없고, 위의가 정돈[齊整]되어 명리를 구하지 않고 착한 벗을 가까이 하며, 근성이 날카로운 사람은 말과 글의 뜻을 알며 법을 위하여 정진하여 부처님의 뜻을 어기지 않느니라.
대왕이여, 모든 부처님과 보살은 이와 같은 중생을 위하여 설법하는 것이니라.
대왕이여,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법사가 되어 교묘하게 설법[善巧]한다. 무엇을 교묘히 설법한다고 하는가? 부처님의 법을 이익 되게 하기 위하여 말하나 부처님의 법을 끝내 볼 수 없고, 바라밀을 말하나 바라밀을 끝내 얻을 수 없으며, 보리를 말하나 말한 보리를 끝내 얻을 수 없고, 번뇌를 끊는 것을 말하나 말한 번뇌를 끝내 얻을 없으며, 열반을 위하여 말하나 말한 열반을 끝내 얻을 수 없고, 수다원향(須陀洹向)·수다원과(須陀洹果)에서부터 아라한향(阿羅漢向)·아라한과(阿羅漢果)를 위하여 말하나 4과(果)와 4향(向)를 끝내 얻을 수 없으며, 벽지불과(僻支佛果)를 위하여 말하나 벽지불과를 끝내 얻을 수 없고, ‘나’라는 견해를 끊어 없애기 위하여 말하나 ‘나’라는 견해를 끝내 얻을 수 없으며, 업보가 있다고 말하나 말한 업보를 끝내 얻을 없다. 무슨 까닭인가? 이름으로 얻는 것은 진실한 법이 아니니, 법은 이름이 아니고 말의 경계도 아니며, 법은 의논할 수 있는 것이 아고 마음으로 헤아릴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니라.
이름은 법이 아니고 법은 이름이 아니되 다만 세상의 진리로 허망하게 이름을 빌려서 설하는 것뿐이니라. 이름이 없는 법을 이름으로 설하나 이름은 바로 공한 것이다. 공한 것은 없는 것이고 없는 것은 제일의(第一義)가 아니고 제일의가 아닌 것은 곧 이 허망한 범부의 법인 것이니라.
대왕이여, 이것을 보살마하살의 교묘한[善巧] 설법이라고 하느니라.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방편의 힘으로 무애변재를 얻어 중생의 근성에 따라 이러한 매우 깊은 반야바라밀을 설하는 것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