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무구칭경(說無垢稱經) 제3권
5.문질품(問疾品)
부처님께서 묘길상(妙吉祥)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무구칭을 찾아가 문병하여라.”
묘길상이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 대사는 마주 대하기가 어렵습니다. 법문에 깊이 들어가 있고 설법에 능하며, 대항할 수 없는 묘한 말재주가 있고 깨달음의 지혜는 막히는 데가 없습니다. 일체 보살들의 모든 사업을 이미 남김없이 이루었으며, 대보살들과 여래들의 비밀스러운 곳도 다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온갖 마군을 잘 다스려서 그 능숙한 방편은 걸림이 없습니다. 더 이상 이원성이나 잡염(雜染)이 없는 법계 영역의 궁극적인 피안에 도달했습니다. 하나의 모습[一相]의 장엄한 법계에 관해 끝없이 다양한 모습으로 법문을 설할 수 있습니다. 모든 중생의 근기에 따른 수행을 완전히 통달하고 있으며, 지고의 신통력으로 훌륭히 유희(遊戱)하며, 크나큰 지혜와 교묘한 방편을 성취했으며, 이미 모든 질문에 대한 해답을 얻어 어떤 두려움도 없이 자유롭습니다. 그래서 수준이 낮은 자들의 언변으로는 대항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아 그를 찾아가 문병하겠습니다. 그를 찾아가면 제 힘으로 그와 담론하겠습니다.”
그때 그곳에 있던 보살들과 대제자들과 제석천ㆍ범천ㆍ호세와 뭇 천자들은 모두 이렇게 생각했다.
‘지금 이 두 보살은 깊고 광대하며 뛰어난 이해력을 갖추고 있다. 서로 논쟁하게 되면 분명 미묘한 법문을 설할 것이다. 우리들은 지금 법을 들으러 온 것이니 그를 따라가서 무구칭을 찾아뵈어야겠다.’
그리하여 보살 8천 명, 성문 500명, 한량없는 수십만의 제석천ㆍ범천ㆍ호세, 그리고 천자들이 모두 법을 듣기 위해 따라갈 것을 청하였다. 이윽고 묘길상과 모든 보살들과 대제자들과 뭇 제석천ㆍ범천ㆍ호세 및 천자들은 세존께 공경스럽게 절하고 암라숲 동산을 나와 광엄성으로 들어가 무구칭 처소에 이르러 문병을 하고자 했다. 그때 무구칭은 이런 생각을 했다.
‘지금 묘길상과 모든 대중들이 함께 문병을 하러 오고 있다. 내 이제 신통력으로 방 안을 비우고 모든 좌석과 가구, 시중들과 문지기들을 치워야겠다. 오직 침상 하나만을 놓고 병을 앓으면서 누워 있으리라.’
이렇게 생각한 무구칭은 곧 대신통력으로 방 안을 비워 모든 세간살이를 없애고 오직 침상 하나만을 놓고 병을 앓으면서 누웠다.
묘길상과 대중들은 무구칭의 집에 들어와 세간살이와 시중들, 문지기조차 없앤 비어 있는 방에서 무구칭 혼자 한 개의 침상 위에 누워 있는 광경을 보았다. 무구칭이 묘길상을 보고 큰 소리로 말했다.
“잘 오셨습니다. 오시는 바 없이 오시고, 보는 바 없이 보시고, 듣는 바 없이 들으십니다.”
묘길상이 말했다.
“그렇습니다. 거사여, 이미 와버린 자는 다시 올 수 없습니다. 이미 가버린 자는 다시 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와버린 자는 온다는 걸 상정할 수 없고 이미 가버린 자는 간다는 걸 상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미 본 자는 다시 본다고 할 수 없고, 이미 들은 자는 다시 듣는다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는 이 정도로 하겠습니다.
거사여, 고통은 견딜 만합니까? 생활은 지낼 만합니까? 4계(界:4大)는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까? 병은 치료할 수 있습니까? 병이 더 심해지지 않으십니까? 세존께서 은근히 안부를 물으셨습니다.
거사여, 이 병이 조금이라도 나아지셨습니까? 행동거지와 기력이 점차 편안해지십니까? 지금 그 병의 원인은 어디서 생겼나요? 생긴 지 오래됐다면 어떻게 없애야 합니까?”
무구칭이 말했다.
“모든 중생의 무명(無明)과 삶에 대한 갈애[有愛]가 생긴 지 오래됐듯이 나의 이 병도 생긴 지 오래되었습니다. 아득히 먼 과거부터 생사를 거치면서 중생이 병들었기에 나도 따라서 병이 든 것입니다. 그러니 중생이 치유된다면 나도 따라서 치유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보살은 중생들의 오랜 생사유전(生死流轉)에 의지하는데, 그 생사유전에 의지하는 데서부터 병이 있게 됩니다. 만약 중생이 병과 고통을 벗어난다면 모든 보살들도 다시는 병이 없게 됩니다.
비유하자면 오직 자식 하나뿐인 세간의 장자(長者) 거사가 있습니다. 지극정성으로 그 자식을 사랑하는데 아이를 보는 기쁨으로 잠시도 떼놓질 않습니다. 자식이 병들면 부모도 병들고 자식의 병이 나으면 부모도 낫습니다. 보살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중생을 마치 외아들처럼 사랑합니다. 중생이 병들면 보살도 병들고, 유정 중생의 병이 나으면 보살도 낫습니다.
또 병이 무슨 원인으로 생겼냐고 물으셨는데, 보살의 병은 대비심(大悲心)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묘길상이 물었다.
“거사여, 이 방은 어째서 텅 비어 시중들이 하나도 없습니까?”
무구칭이 말했다.
“일체의 불국토 또한 모두 자체가 비어[空] 있습니다.” “무슨 까닭에 비어 있습니까?” “공(空)하기 때문에 비어 있습니다.”
묘길상이 또 물었다.
“이 공은 어떠한 공입니까?” “이 공은 분별이 없는 공[無分別空]입니다.” “공의 성품[空性]은 분별할 수 있습니까?” “이것을 분별하는 것 또한 공입니다. 왜냐하면 공의 성품은 분별할 수 없어 공이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 공성은 어디에서 찾아야 합니까?” “이 공성은 62견(見) 속에서 찾아야 합니다.” “62견은 어디에서 찾아야 합니까?” “모든 부처님의 해탈 속에서 찾아야 합니다.” “모든 부처님의 해탈은 어디에서 찾습니까?” “모든 중생들의 마음 작용[心行] 속에서 찾아야 합니다.
또 묘길상께서는 왜 시중들이 없느냐고 물으셨습니다만, 일체 악마들과 모든 외도들이 다 나의 시중들입니다. 왜냐하면 일체의 악마는 생사의 삶을 옹호하고, 모든 외도는 온갖 소견을 즐겨하는데, 보살은 그 속에 있으면서 생사와 소견을 회피하거나 저버리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모든 외도들이 다 나의 시중들인 것입니다.”
묘길상이 말했다.
“거사의 병은 어떤 종류의 병입니까?” “내 병은 전혀 형상[色相]이 없어 볼 수가 없습니다.” “그 병은 육신[身相]과 관련된 병입니까, 마음[心相]과 관련된 병입니까?” “내 병은 육신과 관련된 것이 아니니 육신의 상(相)을 여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육신과 관련된 듯한 것은 마치 거울의 영상 같은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또 마음과 관련된 것도 아니니 마음의 상을 여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마음과 관련된 듯한 것은 마치 환화(幻化)와 같기 때문입니다.” “땅[地]ㆍ물[水]ㆍ불[火]ㆍ바람[風]의 4계(界) 중에 어느 계에서 나온 병입니까?” “모든 중생의 몸은 다 4대에서 나옵니다. 그러한 중생에겐 병이 있고, 그 때문에 나도 병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이 병은 4계에서 나온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계의 성품을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묘길상이 다시 무구칭에게 물었다.
“보살은 병든 보살을 어떻게 위로해서 환희심을 내도록 합니까?”
무구칭이 말했다.
“몸의 덧없음은 보여 주어도 몸을 싫어해 버리라고 권하지는 말 것이며,몸이 고통이라는 건 보여 주어도 열반 속에서 즐기라고 권하지는 말 것이며, 몸이 무아(無我)라는 걸 보여 주어도 중생을 성숙시키라고 권하지는 말 것이며, 몸이 고요히 비어있음[空寂]은 보여 주어도 궁극적으로 적멸(寂滅)만을 닦으라고 권하지는 말 것이며, 전에 지은 죄를 참회하는 건 보여 주어도 죄가 이전(移轉)된다는 건 설하지 말 것이며, 자신의 병을 통해 중생을 가엾이 여겨 그들의 병을 없앨 것을 권하며, 이전에 받은 온갖 고통을 생각해 중생을 이롭게 할 것을 권하며, 한량없는 선의 근본을 닦은 것을 기억해 청정한 삶을 실천할 것을 권하며,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부지런히 노력하여 굳세고 용감할 것을 권하며, 대의왕(大醫王)이 되어 중생을 치료하고 몸과 마음의 모든 병을 영원히 없애겠다는 서원을 일으킬 것을 권해야 합니다. 보살은 마땅히 이렇게 병든 보살을 위로해서 기뻐하는 마음을 내게 해야 합니다.”
묘길상이 말했다.
“병든 보살은 어떻게 자신의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까?”
무구칭이 말했다.
“병든 보살은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지금 나의 이 병은 모두 전생의 허망한 전도(顚倒)와 분별하는 번뇌가 일으킨 업보(業報)이다. 몸속에는 도무지 단 한 법의 진실함도 존재하질 않으니 도대체 누가 이 병을 받는다고 하겠는가?’
왜 그렇겠습니까? 4대가 합쳐져서 임시로 몸[身]이라고 부르는데, 4대 속에는 주재자[主]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나[我]가 없는 몸에 병이 생긴다면 다 나를 집착하는 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4대 속에서 함부로 나에 대한 집착을 일으키지 말아야 하며, 이 집착이 병의 근본임을 분명히 파악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중생이나 나라는 생각[我想]을 모두 없애고 법이라는 생각[法想]에 안주해서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온갖 법이 화합하여 이 몸을 이루고서는 생겼다 사라졌다 하면서 유전(流轉)한다. 생겨도 오직 법이 생기는 것이며, 사라져도 오직 법이 사라질 뿐이니, 이렇게 모든 법이 전전상속(展轉相續)하면서도 서로 알지도 못하고 끝내는 사념도 없다. 법은 생겨날 때에도 내가 생겨난다 말하지 않고 사라질때에도 내가 사라진다고 말하지 않는다.’
병든 보살은 이러한 법상(法想)을 정확히 이해해야 합니다. 즉 나는 이 법상이 그대로 뒤바뀐[顚倒] 것이며, 이 뒤바뀜이 그대로 큰 병이니 나라는 것을 반드시 없애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중생에게서도 이 같은 큰 병을 없애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이 같은 큰 병을 없앨 수 있을까요? 나[我]와 내 것[我所]이라는 집착을 없애야 한다고 말하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나와 내 것이라는 집착을 없앨 수 있을까요? 두 가지를 벗어나야 합니다. 무엇이 두 가지를 벗어나는 것일까요? 일체의 내적 외적 활동을 결코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무엇이 내적 외적 활동을 행하지 않는 것일까요? 완전한 평등ㆍ움직이지 않는 것[不動]ㆍ동요함이 없는 것[非動搖]ㆍ평정(平靜)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완전한 평등인가요? 나와 열반이 둘 아닌 평등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의 본성이나 열반의 본성이나 모두 비어 있기 때문입니다. 기왕에 둘이 아니라면 비어 있음은 또 무엇입니까? 단지 임시로 이름[名字]을 빌려서 비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나와 열반을 실답지 않은 평등한 것으로 보면, 이미 다른 병은 없고 오직 비어 있는 병[空病]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이 비어 있는 병 역시 비어 있다고 관찰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비어 있는 병 역시 절대적으로 비어 있기 때문입니다. 병든 보살은 어떤 것도 지각[受]하는 바 없이 모든 지각을 지각해야 합니다. 불법의 성취가 아직 원만하지 못하다 해도 열반을 증득하고자 모든 지각을 소멸시켜선 안 됩니다. 하지만 그는 지각의 주체나 지각의 대상이라는 모든 법을 없애야 합니다. 만약 고통이 몸을 괴롭히면 반드시 악도(惡道)에 떨어진 모든 중생을 가엾이 여기고, 대비심을 일으켜 그들의 많은 고통을 없애 주어야 합니다. 병든 보살은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이미 자기 병을 없앴다면 반드시 중생의 병을 없애 주어야 한다고. 이렇게 자기와 남의 병을 없앨 때, 없애야 할 병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지 않을 것입니다. 병이 일어난 인연을 올바로 관찰해서 재빨리 없앨 수 있도록 정법을 설해야 합니다. 무엇이 병의 인연일까요? 반연된 사념[緣慮]이 있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모든 반연된 사념은 병의 원인입니다. 반연된 사념이 있는 한 병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념은 어디에서 반연될까요? 삼계에서 반연된다고 하겠습니다. 어떻게 해야 이 반연된 사념을 알 수 있을까요? 이 반연된 사념이 결코 얻을 바가 없다[無所得]는 걸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니, 얻을 바가 없다면 반연된 사념도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반연된 사념을 끊는 것일까요? 두 가지 견해에 반연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두 가지 견해는 내적 주체[內見]라는 견해와 외적 대상[外見]이라는 견해를 말합니다. 만약 이 두 가지 견해가 없다면 얻을 바도 없습니다. 더 이상 얻을 바가 없으니 반연된 사념도 모두 끊어지고, 반연된 사념이 끊어지니 병도 없어집니다. 만약 스스로 병이 없다면 중생의 병도 끊어 없앨 수 있습니다.
또 묘길상이여, 병든 보살은 반드시 이렇게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다. 오직 보살의 보리(菩提)만이 일체의 늙고 병들고 죽는 고통을 끊을 수 있습니다. 만약 이렇게 하지 못한다면 부지런히 닦은 것을 헛되이 저버리게 됩니다. 비유하자면 원수를 무찌를 수 있는 사람을 영웅이라 부르듯이 일체의 늙고 병들고 죽는 고통을 영원히 끊을 수만 있다면 이를 보살이라고 부릅니다.
또 묘길상이여, 병든 보살은 반드시 나의 이 병은 참된 것도 아니며 존재하는 것도 아니라고 스스로 관찰해야 합니다. 또 모든 중생이 갖고 있는 온갖 병도 참되지도 않고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관찰해야 합니다. 이렇게 관찰할 때, 모든 중생에 대해 애착하는 생각이나 얽혀 있는 마음으로 대비심을 일으켜서는 안 됩니다. 오로지 중생의 객진번뇌(客塵煩惱)를 끊기 위해 대비심을 일으켜야 합니다. 왜냐하면 보살이 중생에 대해 애착하는 생각이나 얽혀 있는 마음으로 대비심을 일으키면 생사유전(生死流轉)을 싫어하게 되고, 중생의 객진번뇌를 끊기 위해 대비심을 일으키면 생사유전을 싫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보살이 이렇게 중생을 위한다면 생사유전에 처해 있더라도 싫어함이 없을 것이고, 애착하는 생각으로 그 마음을 얽어매지도 않을 것입니다. 애착으로 마음을 얽어매지 않기 때문에 생사에 처해서도 속박되지 않고, 생사에 속박되지 않기 때문에 그대로 해탈을 얻으며, 생사에서 해탈을 얻기 때문에 그 즉시 능력을 갖춰 오묘한 법을 설해 중생들이 영원히 속박을 벗어나 해탈을 성취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세존께서는 여기에 숨겨진 뜻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기가 속박돼 있으면서 남의 속박을 풀 수 있다는 건 있을 수 없다. 자기속박을 풀고 나서 남의 속박을 풀 수 있다면 그것은 옳다.’
이 때문에 보살은 해탈을 구해야 하며,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또 묘길상이여, 무엇을 보살의 속박이라 하고 무엇을 보살의 해탈이라 고 합니까? 만약 보살이 자기가 닦은 정려(靜慮)ㆍ해탈ㆍ등지(等持:삼매)ㆍ등지(等至)의 맛에 집착한다면 이를 보살의 속박[繫縛]이라 하고, 보살들이 교묘한 방편으로 온갖 삶의 세계에 들어가서도 집착하는 바가 없다면 이를 보살의 해탈이라고 합니다. 교묘한 방편으로 훌륭히 다스리는 오묘한 지혜가 없다면 속박이라 할 것이며, 교묘한 방편으로 훌륭히 다스리는 오묘한 지혜가 있다면 해탈이라고 합니다. 보살에게 교묘한 방편으로 훌륭히 다스리는 오묘한 지혜가 없는 것을 속박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요? 보살이 공(空)ㆍ무상(無相)ㆍ무원(無願)의 법으로 스스로를 다스리면서도 상호로써 자기 몸을 꾸미지도 않고, 불토를 장엄하지도 않고, 중생을 성숙시키지도 않는 것을, 보살에게 방편으로 훌륭히 다스리는 오묘한 지혜가 없다고 하는 것이니, 이름하여 속박입니다. 보살에게 교묘한 방편으로 훌륭히 다스리는 오묘한 지혜가 있는 것을 해탈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요? 보살이 공ㆍ무상ㆍ무원의 법으로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한편 모든 법의 모습이 있음[有相]과 모습이 없음[無相]을 관찰하고 수행을 통해 깨달으면서도, 동시에 상호로써 자기 몸을 꾸미고 불국토를 장엄하고 중생을 성숙시키는 것을 보살에게 교묘한 방편으로 훌륭히 다스리는 오묘한 지혜가 있다고 하는 것이니, 이름하여 해탈이라고 부릅니다. 또 보살에게 교묘한 방편으로 훌륭히 다스리는 오묘한 지혜가 없는 것을 속박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요? 보살이 온갖 견해와 번뇌ㆍ습기ㆍ애착ㆍ수면에 빠져 있으면서 자신이 닦고 있는 선근을 바르고 평등한 보리[正等菩提]로 회향하지 못하고 깊이 집착을 일으킬 때, 이를 보살에게 교묘한 방편으로 훌륭히 다스리는 오묘한 지혜가 없다고 하는 것이니, 이름하여 속박이라고 부릅니다. 보살에게 교묘한 방편으로 훌륭히 다스리는 오묘한 슬기가 있는 것을 해탈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요? 보살이 온갖 견해와 번뇌ㆍ습기ㆍ애착ㆍ수면을 멀리 벗어나서 자신이 닦고 있는 선근을 바르고 평등한 보리로 회향할 수 있어서 집착을 일으키지 않을 때, 이를 보살에게 교묘한 방편으로 훌륭히 다스리는 오묘한 지혜가 있다고 하는 것이니, 이름하여 해탈이라고 부릅니다.
또 묘길상이여, 병든 보살은 몸과 마음과 병과 같은 법들은 다 무상(無常)하고 고통[苦]이고 비어 있고[空] 무아(無我)라고 관찰해야 하니, 이를 지혜[慧]라고 부릅니다. 비록 몸에 병이 있고 항상 생사에 처해 있을지라도 중생을 이롭게 하는 일을 게을리 한 적이 없으니, 이를 방편이라고 부릅니다. 또 몸과 마음, 그리고 모든 병이 서로 의지하면서 시작도 끝도 없이 유전하는데, 그 생겼다 사라지는 사이의 간격도 없고 새로운 것도 아니며 오래된 옛 것도 아니라고 관찰해야 하니, 이를 지혜라고 부릅니다. 몸과 마음, 그리고 모든 병의 궁극적인 적멸을 구하지 않으니, 이를 방편이라고 합니다.
또 묘길상이여, 병든 보살은 이렇게 그 마음을 조복해야 합니다. 조복된 마음이든 조복되지 않은 마음이든 안주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조복되지 않은 마음에 안주하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의 법이며 조복된 마음에 안주하는 것은 성문법(聲聞法)이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보살은 이 두 마음에 모두 안주하지 않으니, 이를 보살행이라고 합니다. 이 보살이 처하는 곳은 범인의 영역도 아니며 성인의 영역도 아니니, 이를 보살행이라고 합니다. 생사의 작용을 관찰하는 입장에 있으면서도 전혀 번뇌에 끄달리지 않으니, 이를 보살행이라고 합니다. 열반의 길을 관찰하는 입장에 있으면서도 끝내 적멸에 들지는 않으니, 이를 보살행이라고 합니다. 네 가지 마[四魔]가 나타나는 길에 처해 있으면서도 모든 마군의 일을 초월하고 있으니, 이를 보살행이라고 합니다. 일체지지(一切智智)의 길을 구하면서도 시기가 맞지 않으면 지혜를 증득하지 않으니, 이를 보살행이라고 합니다. 4성제[諦]의 오묘한 지혜의 길을 구하면서도 시기가 맞지 않으면 4성제를 성취하지 않으니, 이를 보살행이라고 합니다. 내적 깨달음의 길을 바르게 관찰하면서도 일부러 생사의 길을 수용하니, 이를 보살행이라고 합니다. 일체 연기(緣起)의 길을 행하면서도 온갖 잘못된 견해를 멀리 벗어나니, 이를 보살행이라고 합니다. 일체 중생의 모든 법상(法相)의 영역을 여의면서도 번뇌의 수면에 떨어지지 않으니, 이를 보살행이라고 합니다. 무생(無生)의 길을 바르게 관찰하면서도 성문의 길에는 떨어지지 않으니, 이를 보살행이라고 합니다. 일체 중생의길을 수용하면서도 번뇌의 잠에는 떨어지질 않으니, 이를 보살행이라고 합니다. 영원히 벗어나는 길을 바르게 즐기면서도 몸과 마음의 완전 소멸을 구하지 않으니, 이를 보살행이라고 합니다. 삼계를 관찰하기를 즐기면서도 법계를 무너뜨리거나 혼란스럽게 하지 않으니, 이를 보살행이라고 합니다. 공성(空性)을 관찰하기를 즐기면서도 온갖 공덕을 구하니, 이를 보살행이라고 합니다. 무상(無相)의 영역을 관찰하기를 즐기면서도 중생을 제도하고 해탈시키는 영역을 구하니, 이를 보살행이라고 합니다. 무원(無願)의 영역을 관찰하길 즐기면서도 세간의 삶을 자발적으로 나타낼 수 있으니, 이를 보살행이라고 합니다. 무작(無作)의 영역에 노닐기를 즐기면서도 늘 모든 선근이 끊이지 않는 영역을 지어가니, 이를 보살행이라고 합니다. 6바라밀의 영역에 노닐기를 즐기면서도 모든 중생의 마음의 활동과 오묘한 지혜의 피안(彼岸)을 향해가지 않으니, 이를 보살행이라고 합니다. 자(慈)ㆍ비(悲)ㆍ희(喜)ㆍ사(捨)의 한량없는 영역을 관찰하기를 즐기면서도 범천의 세간에 태어나길 구하지 않으니, 이를 보살행이라고 합니다. 6신통의 영역에 노닐기를 즐기면서도 누진(漏盡)의 영역을 증득하는 데로 나아가지 않으니, 이를 보살행이라고 합니다. 모든 법의 영역을 건립하길 즐기면서도 삿된 도의 영역에는 반연하지 않으니, 이를 보살행이라고 합니다. 여섯 가지 염처[六念]의 영역을 관찰하길 즐기면서도 온갖 번뇌[漏]를 낳는 영역을 따르지 않으니, 이를 보살행이라고 합니다. 장애 없는 영역을 관찰하길 즐기면서도 욕망에 오염되기를 바라지 않으니, 이를 보살행이라고 합니다. 정려ㆍ해탈ㆍ등지(等持)ㆍ등지(等至)의 온갖 선정의 영역을 관찰하길 즐기면서도 선정의 힘에 의해 생(生)을 받는 것을 따르지 않을 수 있으니, 이를 보살행이라고 합니다. 4념주(念住)의 영역에서 노니는 걸 즐기면서도 몸[身]ㆍ지각[受]ㆍ마음[心]ㆍ법(法)에서 자유로워지는 영역 구하길 즐기지 않으니, 이를 보살행이라고 합니다. 4정단(正斷)의 영역에서 노니는 걸 즐기면서도 착한 법과 착하지 않은 법 사이에 어떤 차별도 두지 않으니, 이를 보살행이라고 합니다. 4신족(神足)의 영역에 노니는 걸 즐기면서도 쉽사리 자유자재로 변화하는 신족통을 행하니, 이를 보살행이라고 합니다. 5근(根)의 영역에 노니는 걸 즐기면서도 그 미묘한 지혜는 중생 근기의 우열을 분별하지 않으니, 이를
보살행이라고 합니다. 5력(力)의 영역에서 안정되길 즐기면서도 여래 10력(力)의 영역을 구하니, 이를 보살행이라고 합니다. 7각지(覺支)의 원만한 영역에서 안정되길 즐기면서도 불법의 특성과 오묘한 지혜와 교묘한 방편의 영역을 구하지 않으니, 이를 보살행이라고 합니다. 8성도(聖道)의 원만한 영역에서 안정되길 즐기면서도 삿된 도의 영역을 싫다고 배척하지 않으니, 이를 보살행이라고 합니다. 지(止)ㆍ관(觀)의 자량이 되는 영역을 구하면서도 궁극적으로는 적멸의 영역에 떨어지지 않으니, 이를 보살행이라고 합니다. 온갖 법은 생멸상(生滅相)이 없다는 걸 관찰하길 즐기면서도 상호로써 그 몸을 장엄하고 갖가지 불사(佛事)를 성취하니, 이를 보살행이라고 합니다. 성문과 독각의 위의를 나타내길 즐기면서도 모든 불법의 특질에서 벗어나지 않으니, 이를 보살행이라고 합니다. 모든 법의 궁극적인 청정함과 그 본성의 영원한 적멸과 위의의 영역을 따르면서도 모든 중생이 즐기는 갖가지 열망의 영역을 따르지 않는 것도 아니니, 이를 보살행이라고 합니다. 모든 불국토가 그 본성이 공적(空寂)하여 생성도 파괴도 없는 허공 같다는 걸 관찰하길 즐기면서도 갖가지 공덕으로 장엄한 불국토로 모든 중생을 이롭게 하는 실천을 하지 않는 것도 아니니, 이를 보살행이라고 합니다. 모든 불법(佛法)이 법륜으로 굴려져 대열반으로 들어가는 불사(佛事)를 나타내길 즐기면서도 보살행의 차별적인 길을 수행하지 않는 것도 아니니, 이를 보살행이라고 합니다.”
무구칭은 이렇게 모든 보살들이 행하는 보기 드문 일들을 설하였다. 그러자 묘길상이 데리고 온 무리 중 8억 명의 천자가 무구칭의 설법을 듣고 모두 무상정등보리의 마음을 일으켰다.
6.부사의품(不思議品)
그때 사리자는 방 안에 앉을 자리가 없는 것을 보고 남몰래 이렇게 생각했다.
‘이 보살들과 대성문들은 어디에 앉아야 할까?’
그러자 무구칭은 사리자의 생각을 알고 이렇게 말했다.
“사리자여, 그대는 법을 위해서 왔습니까? 아니면 자리를 찾으려고 왔습니까?”
사리자가 답했다.
“나는 법을 위해 왔지 자리를 찾으러 온 것은 아닙니다.”
무구칭이 말했다.
“사리자여, 법을 구하는 자들은 목숨도 돌보지 않는데 하물며 자리를 돌아보겠습니까? 사리자여, 법을 구하는 자들은 색온(色蘊)ㆍ수온(受蘊)ㆍ상온(想蘊)ㆍ행온(行蘊)ㆍ식온(識蘊)의 5온을 구하지 않으며, 법을 구하는 자들은 안계(眼界)에서부터 의식계(意識界)까지의 18계(界)를 구하지 않으며, 법을 구하는 자들은 욕계(欲界)ㆍ색계(色界)ㆍ무색계(無色界)의 3계를 구하지 않습니다.
또 사리자여, 법을 구하는 자들은 불(佛)ㆍ법(法)ㆍ승(僧)에 집착하지 않으며, 법을 구하는 자들은 고통[苦]을 알기를 구하지 않고, 그 고통의 원인[集]을 끊기를 구하지 않고, 고통의 소멸[滅]을 성취하길 구하지 않고, 고통을 소멸하는 길[道]을 닦는 것을 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법에는 쓸데없는 논쟁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내가 고통을 알고, 그 고통의 원인을 끊고, 고통의 소멸을 성취하고, 고통을 소멸하는 길을 닦는다고 말한다면, 이는 희론이지 법을 구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또 사리자여, 법을 구하는 자들은 생(生)에서 구하지도 않고 멸(滅)에서 구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법은 적정(寂靜)이고 적정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만약 생멸을 행한다면 이는 생멸을 구하는 것이지 법을 구한다고는 할 수 없고, 영원히 벗어나는 걸 구하는 것도 아닙니다. 법을 구하는 자들은 탐욕의 더러움을 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법에는 탐욕의 더러움이 없으며, 그런 것들을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만약 모든 법에서부터 열반에 이르기까지 조금이라도 탐욕의 더러움이 있다면, 이는 탐욕의 더러움을 구하는 것이지 법을 구한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또 사리자여, 법을 구하는 자들은 경계(境界)를 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법은 경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 모든 경계의 영역을 헤아린다면 이는 경계를 구하는 것이지 법을 구한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또 사리자여, 법을 구하는 자들은 취하고 버림을 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법에는 취하고 버림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법에 취하고 버림이 있다면 이는 취하고 버림을 구하는 것이지 법을 구한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또 사리자여, 법을 구하는 자들은 섭장(攝藏:阿賴耶)를 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법에는 섭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섭장을 즐긴다면, 이는 섭장을 구하는 것이지 법을 구한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또 사리자여, 법을 구하는 자들은 법상(法相)을 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법은 무상(無相)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상(相)에 따라가는 식(識)이라면, 이는 상을 구하는 것이지 법을 구한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또 사리자여, 법을 구하는 자들은 법에 안주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법에는 안주할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법에 안주하는 것을 바란다면 이는 안주하기를 구하는 것이지 법을 구한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또 사리자여, 법을 구하는 자들은 보고 듣고 깨우치고 아는 것[見聞覺知]을 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법은 볼 수도 들을 수도 깨우칠 수도 알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보고 듣고 깨우치고 아는 것을 행한다면, 이는 보고 듣고 깨우치고 아는 것을 구하는 것이지 법을 구한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또 사리자여, 법을 구하는 자들은 유위(有爲)를 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법은 무위(無爲)라 말해지는 것으로 유위의 성품을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만약 유위를 행한다면 이는 유위를 구하는 것이지 법을 구한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사리자여, 만약 법을 구하고 싶다면 어떤 법도 구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법을 설하자 500명의 천자가 티끌과 때를 멀리 여의면서 일체 법에 대한 법안(法眼)의 청정함을 얻었다.
그때 무구칭이 묘길상에게 물었다.
“어진 이여, 그대는 이미 시방세계의 측량할 수도 없고 셀 수도 없는 백천 구지의 불국토에서 노닌 적이 있는데, 어떤 불국토에 가장 뛰어나고 오묘하고 공덕이 갖춰진 대사자좌(大師子座)가 있습니까?”
묘길상이 대답했다.
“동쪽으로 36긍가사(殑伽沙:항하사) 등의 온갖 불국토들을 지나면 부처님의 세계가 있는데, 그 이름을 산당(山幢)이라고 합니다. 그 불국토 여래의 명호는 산등왕(山燈王)이라고 부르는데, 현재도 그곳에 안온히 머물고 계십니다. 그 부처님의 키는 84억 유선나(踰膳那)이고, 사자좌의 높이는 68억 유선나입니다. 여래를 둘러싸고 있는 보살의 키는 42억 유선나이고, 사자좌의 높이는 34억 유선나입니다.
거사께서는 그 국토의 여래의 사자좌가 가장 뛰어나고 오묘하며 뭇 공덕을 갖췄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자 무구칭이 생각을 거두고 선정에 들어가 그대로 자재한 신통력을 일으키자, 그 즉시 동쪽 산당세계의 산등왕부처님께서 32억의 대사자좌를 보냈다. 그 사자좌는 아주 높고 넓으며 청정하게 장엄된 것이 너무나 훌륭하였는데, 허공을 타고 무구칭의 방으로 들어왔다. 그곳에 있는 보살들과 대성문ㆍ제석천ㆍ범천ㆍ호세 및 천자들은 그러한 광경을 예전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무구칭의 방은 드넓고 청정한 탓에 32억 사자좌를 다 수용하면서도 서로 방해하질 않았다. 광엄성과 섬부주(贍部洲)를 포함한 4대주(大洲)들, 모든 세계 안에 있는 도시와 마을ㆍ국토ㆍ왕궁ㆍ수도 그리고 천룡ㆍ야차ㆍ아수라 등이 머무는 궁전도 방해를 받지 않아 모두 본래의 모습과 다를 바 없이 보였다.
그때 무구칭이 묘길상에게 말했다.
“보살 및 대성문들과 함께 사자좌로 가시지요. 마련된 자리에 가서 모두 함께 앉으시되 반드시 이 사자좌들의 크기에 맞게 스스로 몸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신통을 얻은 대보살들은 각자 스스로 42억 유선나에 맞게 몸을 변화시켜 사자좌에 올라가 단정하게 앉았다. 그러나 처음 배우는 보살들은 사자좌에 오를 수가 없었다. 그러자 무구칭이 법의 요체[法要]를 설해 그들로 하여금 다섯 가지의 신통을 얻게 하니, 그들은 그 신통력으로 각자 42억 유선나에 맞게 몸을 변화시켜 사자좌에 올라가 단정히 앉았다. 그곳에 온 무리들 중에 대성문들이 있었는데, 모두 사자좌에 오를 수가 없었다. 무구칭이 사리자에게 말했다.
“어진 이여, 어째서 이 자리에 오르지 못합니까?”
사리자가 말했다.
“이 사자좌는 너무나 높고 넓어서 저는 오를 수가 없습니다.”
무구칭이 말했다.
“사리자여, 산등왕부처님께 공경히 예배하고 신통력을 증가시켜 달라고 부탁해야 합니다. 그러면 비로소 사자좌에 앉을 수 있을 것입니다.”
대성문들은 모두 산등왕부처님께 공경히 예배하고 나서 신통력을 증가시켜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리하여 그들도 사자좌에 올라가 단정히 앉을 수 있었다. 사리자가 말했다.
“너무나 신기합니다. 거사여, 이토록 작은 방이 백천 개의 높고 넓고 청정한 사자좌를 수용하면서도 간섭받지 않을 수 있고, 광엄성과 섬부주를 포함한 4대주들, 모든 세계 안에 있는 도시ㆍ마을ㆍ국토ㆍ왕궁ㆍ수도 그리고 천룡ㆍ야차ㆍ아수라[阿素洛] 등이 소유한 궁전들도 전혀 방해받지 않고 모두 본래 모습과 차이가 없으니 말입니다.”
무구칭이 말했다.
“사리자여, 모든 부처님 여래ㆍ응공ㆍ정등각과 더 이상 물러남이 없는 보살[不退菩薩]에겐 해탈이 있으니, 그 이름을 불가사의(不可思議)라고 합니다. 이 불가사의 해탈에 머무는 보살이라면 아무리 높고 넓은 묘고산왕(妙高山王:수미산)이라도 신통력으로 겨자씨 안에 들여놓을 수 있으니, 그러면서도 겨자씨의 크기를 늘리지도 않고 묘고산의 크기를 줄이지도 않습니다. 비록 이러한 신통작용을 나타내더라도 저 묘고산에 거주하는 사대천왕이나 삼십삼천(三十三天)은 자기들이 어디로 가고 어디로 들어가는지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합니다. 오직 이 신통력에 의해 조복될 자만이 묘고산이 겨자씨에 들어가는 것을 볼 뿐입니다. 이처럼 불가사의 해탈에 머무는 보살은 교묘한 방편과 지혜의 힘으로 불가사의 해탈경계에 들어가니, 이는 모든 성문이나 독각이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 사리자여, 이 불가사의 해탈에 머무는 보살이라면 아무리 깊고 넓은 4대해(大海)의 물이라도 신통력으로 하나의 털구멍에 들여놓을 수 있으니, 그러면서도 털구멍의 용량을 늘이지도 않고 4대해의 물의 양을 줄이지도 않습니다. 비록 이러한 신통작용을 나타내더라도 저 용이나 야차ㆍ아수라들은 자기들이 어디로 가고 어디로 들어가는지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합니다. 또 고기ㆍ자라 및 그 밖의 수중생물과 용신 등 모든 중생을 놀라게 하거나 해치지 않습니다. 오직 이 신통력에 의해 조복될 자만이 이 4대해의 물이 털구멍으로 들어가는 것을 알 뿐입니다. 이처럼 불가사의 해탈에 머무는 보살은 교묘한 방편과 지혜의 힘으로 불가사의 해탈경계에 들어가니, 이는 모든 성문이나 독각이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 사리자여, 이 불가사의 해탈에 머무는 보살이라면 아무리 크고 넓은 삼천대천세계일지라도 신통력의 방편으로 끊어내 마치 도공의 물레바퀴처럼 빠르게 회전하는 모습 그대로 오른 손바닥 안에다 놓아둔 채 그 세계를 항하의 모래 수만큼이나 많은 다른 세계 밖으로 집어 던졌다가 다시 원래 있던 곳으로 돌려놓는다 해도 세계를 늘리거나 줄이지 않습니다. 비록 이러한 신통작용을 나타낸다 해도 그 세계에 사는 중생들이 자기들이 어디로 갔다 어디에서 돌아오는지 알지 못하게 하며, 왔다 간다는 생각도 전혀 일으키지 않게 하며, 괴롭히거나 해치는 일도 없게 합니다. 오직 이 신통력에 의해 조복될 자만이 세계가 갔다가 오는 것을 알 뿐입니다. 이처럼 불가사의 해탈에 머무는 보살은 교묘한 방편과 지혜의 힘으로 불가사의 해탈경계에 들어가니, 이는 모든 성문이나 독각이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 사리자여, 만약 이 불가사의 해탈에 머무는 보살이라면, 가령 오랜 기간 생사윤회를 계속하는 중생을 보더라도 신통력으로 그 중생에 맞게 조복할 수 있고, 또 짧은 기간 생사윤회를 계속하는 중생을 보더라도 신통력으로 그 중생에 맞게 조복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7일을 늘여 1겁으로 한 뒤 중생이 ‘1겁이 지났다’고 말하게 하거나, 또는 1겁을 줄여 7일로 한 뒤 중생이 ‘7일이 지났다’고 말하게 할 수 있으니, 이는 중생들 각각의 관점에 따라 조복시키는 것입니다. 보살이 비록 이 같은 신통작용을 나타내지만 그 교화된 중생들은 이처럼 시간을 늘리고 줄이는 것을 알아채지 못합니다. 오직 이 신통력에 의해 조복될 자만이 시간을 늘리고 줄이는 것을 알아챕니다. 이처럼 불가사의 해탈에 머무는 보살은 교묘한 방편과 지혜의 힘으로 불가사의 해탈경계에 들어가니, 이는 모든 성문이나 독각이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 사리자여, 이 불가사의 해탈에 머무는 보살이라면 신통력으로 모든 부처님의 공덕으로 장엄한 청정세계를 모아 하나의 불국토에 놓고 중생들에게 보여줄 수 있습니다. 또 신통력으로 한 불국토에 있는 모든 중생들을 오른 손바닥에다 놓고 그들에게 일체의 모든 불국토를 시방세계 전체에 이르도록 마음가는 대로 두루 보여줄 수 있습니다. 비록 시방의 모든 불국토에 이를지라도 보살은 한 불국토에 머무르고 있을 뿐 위치를 옮기지는 않습니다. 또 신통력으로 하나의 털구멍으로부터 온갖 최상의 공양물을 나타내 시방의 모든 세계를 편력하면서 모든 부처님과 보살과 성문들에게 공양할 수 있습니다. 또 신통력으로 하나의 털구멍에다 시방세계에 존재하는 해와 달과 별들의 모습[色像]을 두루 나타낼 수 있습니다. 또 신통력으로 시방세계의 모든 큰 바람[大風輪] 등을 입으로 삼켜버려도 몸을 다치지 않고, 모든 세계의 풀과 나무 등의 숲들이 이 바람을 만날지라도 결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또 신통력으로 시방세계의 불국토가 겁이 다하도록 탈 때 그 모든 불길을 뱃속에 집어넣을 수 있습니다. 이 불길이 치열하게 타올라 꺼지지 않더라도 보살의 몸에는 전혀 해가 없습니다. 또 신통력으로 밑을 향해 항하의 모래 수처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불국토를 지나서 맨 아래에 있는 한 불국토를 들어다가 위를 향해 항하의 모래 수처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불국토를 지나 맨 위쪽에 있는 한 불국토 속에다 던져 놓는 것이 마치 바늘 끝으로 조그만 대추 잎을 든 것 같으며, 이 불국토를 그 밖의 어느 방향에다 던져 놓아도 전혀 훼손됨이 없습니다. 이처럼 보살이 신통작용을 나타내어도 인연이 없는 자는 볼 수도 없고 알 수도 없습니다. 모든 중생에게 전혀 해로움이 없으며 오직 이 신통력에 의해 조복될 자만이 이 일을 봅니다. 이렇게 불가사의 해탈에 머무는 보살은 교묘한 방편과 지혜의 힘으로 불가사의 해탈경계에 들어가니, 이는 모든 성문이나 독각이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 사리자여, 이 불가사의 해탈에 머무는 보살이라면 신통력으로 부처님의 몸[佛身]의 갖가지 모습[色像]을 나타낼 수 있으며, 독각과 성문들의 갖가지 모습을 나타낼 수 있으며, 보살의 갖가지 모습을 나타낼 수 있으니, 이 모든 모습은 상호에 따라 장엄되어 있습니다. 또 범천왕이나 제석천이나 사대천왕이나 전륜성왕 등 모든 중생의 갖가지 모습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또 신통력으로 중생을 변화시켜 부처님의 몸이나 모든 보살ㆍ성문ㆍ독각ㆍ제석천ㆍ범천ㆍ호세ㆍ전륜왕 등의 갖가지 모습을 짓게 할 수 있습니다. 또 신통력으로 시방세계 모든 중생의 상품(上品)ㆍ중품(中品)ㆍ하품(下品)의 차별화된 음성을 변화시켜 가장 미묘한 부처님의 음성으로 만들고, 이 부처님의 음성으로부터 무상ㆍ고ㆍ공ㆍ무아ㆍ궁극적인 열반적정(涅槃寂靜)의 뜻을 말하는 다양한 언사(言辭)가 나오게 하며, 나아가 모든 부처님ㆍ보살ㆍ성문ㆍ독각의 설법하는 음성도 다 그 속에서 나오게 하며, 시방세계 모든 부처님의 설법에 나오는 모든 명구ㆍ음절ㆍ음성들이 다 이 부처님의 음성으로부터 나오게 하여 모든 중생들이 다 듣게 합니다. 그리하여 중생들에게 어울리는 승(乘)에 따라 모두 조복시킬 수 있습니다. 또 신통력으로 시방세계 중생들이 쓰는 서로 다른 언어를 채택해 거기에 맞게 갖가지 음성을 내서 오묘한 법을 설할 수 있습니다.
사리자여, 나는 지금 이 불가사의 해탈에 안주하는 보살이 교묘한 방편과 지혜의 힘으로 불가사의 해탈경계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 간략히 말했습니다. 만약 자세히 말하려 한다면 지금보다 더 뛰어난 지혜와 말솜씨로 한 겁 이상을 설한다 해도 다 설할 수 없습니다. 나의 지혜와 말솜씨로도 다 설하지 못한다면 마찬가지로 이 불가사의 해탈에 머무는 보살이 교묘한 방편과 지혜의 힘으로 불가사의 해탈경계에 들어가는 것도 끝이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해탈경계는 측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때 존자 대가섭파가 불가사의 해탈에 안주하는 보살의 불가사의한 해탈의 신통력에 대한 가르침을 듣고 경이감에 차서 사리자에게 말했다.
“비유하자면 어떤 사람이 타고난 장님에게 갖가지 빛깔을 보여준다 해도 그 장님은 전혀 볼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모든 성문과 독각은 모두 선천성 장님과 같아 뛰어난 눈이 없으니, 불가사의 해탈에 머무는 보살이 보여 주는 이해하기 어려운 해탈의 신통력 중 단 한 가지라도 확실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혜 있는 남녀가 이 불가사의 해탈의 신통력에 대한 가르침을 듣는다면 그 누구인들 무상정등각의 마음을 내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지금 이 대승에 대해 마치 썩은 종자처럼 영원히 그 뿌리가 끊기게 되었으니 어찌해야 회복될 수 있겠습니까? 우리들 모든 성문과 독각은 이 불가사의 해탈의 신통력에 대한 가르침을 들으면 반드시 삼천대천세계가 진동하도록 울어야 합니다. 모든 보살은 이 불가사의 해탈의 신통력에 대한 가르침을 들으면 마치 왕관을 물려받는 왕태자처럼 반드시 흔쾌히 받들면서 받아 지녀 굳센 믿음과 이해를 키워 나가야 합니다. 만약 어떤 보살이 이 불가사의 해탈의 신통력에 대한 가르침을 듣고 굳센 믿음과 이해를 일으킨다면 모든 마왕과 마군들도 이 보살을 어찌할 수 없을 것입니다.”
대가섭파가 이렇게 말하자 무리 중에서 3만 2천 천자가 다 무상정등각의 마음을 내었다.
그때 무구칭이 존자 대가섭파에게 말했다.
“시방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세계에서 마왕처럼 행동하는 자는 대부분 이 불가사의 해탈에 머무는 보살입니다. 그가 교묘한 방편으로 마왕처럼 행동하는 것은 모든 중생을 성숙시키기 위해서입니다.
대가섭파여, 시방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세계의 모든 보살들에게 어떤 자가 와서 손ㆍ발ㆍ귀ㆍ코ㆍ머리ㆍ눈ㆍ뇌ㆍ피ㆍ근육ㆍ뼈 등의 일체 기관과 아내ㆍ첩ㆍ남자 노비ㆍ여자 노비 등의 권속과 마을ㆍ성곽ㆍ국가ㆍ왕궁ㆍ수도ㆍ4대주(大洲)와 갖가지 왕위와 재보ㆍ곡식ㆍ진기한 보물ㆍ금ㆍ은ㆍ진주ㆍ산호ㆍ조개ㆍ유리 등의 온갖 장신구ㆍ방ㆍ집ㆍ좌석ㆍ의복ㆍ음식ㆍ탕약ㆍ자산ㆍ코끼리ㆍ말ㆍ수레 등의 크고 작은 집기와 군대를 구걸합니다. 이처럼 보살을 핍박하면서 구걸하는 자는 대부분 불가사의 해탈에 머무는 보살이니, 교묘한 방편으로 이러한 일들을 나타내서 보살을 시험하여 그들로 하여금 의요(意樂)의 견고함을 분명히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왜냐하면 이 뛰어나고 용맹한 대보살은 모든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해 이 같은 어려운 일을 나타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범부나 어리석은 자는 그 같은 힘이 없기 때문에 이처럼 보살을 핍박하기 위하여 구걸을 할 수 없습니다.
대가섭파여, 비유하자면 반딧불이 태양 빛을 가릴 만한 위력이 없는 것처럼, 범부나 어리석은 자는 힘이 없어 보살을 핍박하기 위하여 구걸을 할 수 없습니다. 대가섭파여, 비유하여 용과 코끼리가 서로 위력을 나타내 싸운다고 한다면 이는 나귀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오로지 다른 용이나코끼리만이 그 용이나 코끼리와 싸울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범부나 어리석은 자는 보살을 핍박할 만한 힘이 없습니다. 오직 보살과 보살끼리만이 서로 핍박할 수 있으니, 이를 불가사의 해탈에 머무는 보살이 교묘한 방편과 지혜의 힘으로 불가사의 해탈경계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부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