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무구칭경(說無垢稱經) 제4권

설무구칭경(說無垢稱經) 제4권

7. 관유정품(觀有情品)

그때 묘길상(妙吉祥)이 무구칭에게 물었다.

“보살은 중생을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무구칭이 말했다.

“비유하자면 요술쟁이가 자신의 요술로 이루어진 일을 보듯이 해야 합니다.

이처럼 보살은 일체의 중생을 올바로 관찰해야 합니다.

묘길상이여, 가령 지혜로운 사람은 물속의 달을 보듯 하고, 거울에 비친 모습[像]을 보듯 하고, 신기루를 보듯 하고, 소리에 따르는 메아리를 보듯 하고, 허공 속의 뭉게구름 보듯 하고, 물방울이 처음 생겨나는 순간을 보듯 하고, 물거품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것처럼 보고, 파초가 단단한 알맹이를 가진 듯이 보고, 다섯 번째 대[五大]를 보듯 하고, 여섯 번째 온[六蘊]를 보듯 하고, 일곱 번째 근[七根]을 보듯 하고, 열세 번째 처[十三處]를 보듯 하고, 열아홉 번째 계[十九界]를 보듯 하고, 무색계(無色界)에서 온갖 색깔의 영상을 보듯 하고, 썩은 종자에서 싹을 틔우는 듯이 보고, 거북 털로 옷을 만든 것처럼 보고, 요절한 사람이 온갖 욕망의 쾌락을 누리는 것처럼 보고, 예류과(預流果)가 나[我]와 내 것[我所]이라는 분별을 일으키는 것처럼 보고, 일래과(一來果)가 세 번째 생(生)을 받는 듯이 보고, 불환과(不還果)가 어머니 태속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보고, 아라한의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을 보는 듯이 하고, 인욕을 성취한 보살이 계율을 범하고 성내는 마음을 가진 것처럼 보고, 모든 여래의 번뇌의 습기가 이어지는 것처럼 보고, 선천성 장님이 온갖 색깔을 보는 것처럼 보고, 멸진정(滅盡定)에 머무는 데로 들어오고 나가는 숨이 있는 것처럼 보고, 허공 속에 새가 날아간 자취가 있는 듯이 보고, 내시가 남근을 일으키는 것처럼 보고, 석녀(石女)가 아이를 낳는 것처럼 보고, 부처의 화현(化現)은 결코 번뇌를 낳지 않는데도 온갖 번뇌를 일으키는 것처럼 보고, 꿈에서 깬 뒤 꿈속 일을 보듯 하고, 불을 일으키지 않았는데 불타고 있는 것처럼 보고, 아라한이 내생(來生)으로 윤회하고 있는 듯이 봅니다. 이처럼 보살은 일체의 중생을 올바로 관찰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법은 본질적으로 비어 있고[空], 진실로 나[我]가 없고, 중생이 없기 때문입니다.”

묘길상이 말했다.

“보살들이 일체 중생을 이런 식으로 관찰한다면 어떻게 그가 중생을 향해 크나큰 사랑[大慈]을 닦습니까?”

무구칭이 말했다.

“보살이 이런 식으로 중생을 관찰하고 나면 ‘나는 꼭 중생들에게 이 법을 설해 그들이 완전히 이해하도록 하리라’라고 이렇게 생각하면 바로 이를 가리켜 ‘진실로 크나큰 사랑을 닦아서 모든 중생에게 궁극적인 안락을 준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보살은 적멸의 사랑을 닦으니 어떤 집착도 없기 때문이며, 열뇌(熱惱)가 없는 사랑을 닦으니 번뇌를 벗어났기 때문이며, 실상(實相) 그대로의 사랑을 닦으니 삼세에 평등하기 때문이며, 갈등이 없는 사랑을 닦으니 번뇌가 침투하지 않기 때문이며 둘이 없는[無二] 사랑을 닦으니 내적으로도 외적으로도 연루되지 않기 때문이며, 흔들림이 없는 사랑을 닦으니 궁극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며, 견고한 사랑을 닦으니 높은 의요(意樂)가 금강과 같기 때문이며, 청정한 사랑을 닦으니 본성이 청정하기 때문이며, 평등한 사랑을 닦으니 허공과 같기 때문이며, 아라한의 사랑을 닦으니 영원히 번뇌의 도적을 무찌르기 때문이며 독각의 사랑을 닦으니 스승에 의존하지 않기 때문이며, 보살의 사랑을 닦으니 쉬지 않고 중생을 성숙시키기 때문이며,여래의 사랑을 닦으니 모든 법의 진여성(眞如性)을 사무치기 때문이며, 부처의 사랑을 닦으니 모든 중생을 잠과 꿈에서 깨우기 때문이며, 타고난 자연의 사랑을 닦으니 모든 법의 성품을 자연스럽고 평등하게 깨닫기 때문이며, 보리의 사랑을 닦으니 한맛[一味]으로 똑같기 때문이며, 치우침이 없는 사랑을 닦으니 애증을 끊었기 때문이며, 크나큰 연민[大悲]의 사랑을 닦으니 대승의 빛을 드러내기 때문이며, 다툼이 없는 사랑을 닦으니 나 없음[無我]을 보기 때문이며, 싫증남이 없는 사랑을 닦으니 본성이 비어 있음을 보기 때문이며, 법 보시의 사랑을 닦으니 많이 거머쥐는 데서 벗어났기 때문이며, 청정한 계율의 사랑을 닦으니 계율을 범한 중생을 성숙시키기 때문이며, 인욕의 사랑을 닦으니 자기와 남을 보호하여 손해를 입히지 않기 때문이며, 정진의 사랑을 닦으니 중생에게 이롭고 즐거운 일을 짊어지기 때문이며, 선정의 사랑을 닦으니 애착하는 맛이 없기 때문이며, 반야(般若)의 사랑을 닦으니 어느 때나 지혜의 법을 나타내기 때문이며, 방편의 사랑을 닦으니 어느 곳에서나 길을 제시하기 때문이며, 미묘한 염원[妙願]의 사랑을 닦으니 한량없는 큰 염원에 의해 야기되기 때문이며, 위대한 능력[大力]의 사랑을 닦으니 모든 일체의 크나큰 일들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며, 지혜의 사랑을 닦으니 모든 법의 성품과 모양을 완전히 알기 때문이며, 신통의 사랑을 닦으니 모든 법의 성품과 모양을 파괴시키지 않기 때문이며, 중생을 이끄는 방편의 사랑을 닦으니 방편을 통해 중생을 이익되게 하기 때문이며, 집착이 없는 사랑을 닦으니 장애와 오염이 없기 때문이며, 기만이 없는 사랑을 닦으니 마음가짐이 청정하기 때문이며, 아첨이 없는 사랑을 닦으니 그 노력이 청정하기 때문이며, 교활함이 없는 사랑을 닦으니 거짓 꾸미지 않기 때문이며, 깊은 마음의 사랑을 닦으니 허물과 더러움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며, 안락(安樂)의 사랑을 닦으니 모든 부처님의 안락으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묘길상이여, 이러한 것을 ‘보살이 크나큰 사랑을 닦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묘길상이 말했다.

“보살이 ‘크나큰 연민[大悲]을 닦는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무구칭이 말했다.

“여태껏 이룩하고 쌓아온 선근(善根)을 전부 포기하여 그것을 중생에게베풀어 주는데 전혀 인색함이 없는 것, 이것을 ‘보살이 크나큰 연민을 닦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묘길상이 말했다.

“보살이 ‘크나큰 기쁨[大喜]을 닦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무구칭이 말했다.

“중생에게 이익이 되는 일을 늘 기쁘게 하면서 전혀 후회가 없는 것, 이것을 ‘보살이 크나큰 기쁨을 닦는다’고 말합니다.”

묘길상이 말했다.

“보살이 ‘크나큰 버림[大捨]을 닦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무구칭이 답했다.

“평등하게 이익을 주면서도 과보(果報)를 바라지 않는 것, 이것을 ‘보살이 크나큰 버림을 닦는다’고 말합니다.”

묘길상이 말했다.

“만약 보살들이 생사에 대한 두려움이 생기면 어디에 의지해야 합니까?”

무구칭이 답했다.

“만약 보살이 생사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면, 늘 모든 부처님의 대아(大我)에 의지해서 안주해야 합니다.” “보살이 대아에 안주하고 싶을 때는 어디에 안주해야 합니까?” “대아에 안주하고 싶을 때는 일체 중생의 평등한 해탈속에 안주해야 합니다.” “일체 중생을 해탈시키고 싶을 때는 무엇을 없애야 합니까?” “일체 중생을 해탈시키고 싶다면 그들의 번뇌를 없애야 합니다.” “일체 중생의 번뇌를 없애고 싶을 때는 무엇을 닦아야 합니까?” “일체 중생의 번뇌를 없애고 싶다면 이치대로[如理] 관찰하고 마음을 써야 합니다.” “이치대로 관찰하고 마음을 쓰고 싶을 때는 무엇을 닦아야 합니까?” “이치대로 관찰하고 마음을 쓰고자 할 때는 모든 법의 불생불멸(不生不滅)을 닦아야 합니다.” “어떤 법이 불생이고, 어떤 법이 불멸입니까?”

“착하지 않은 법은 불생이고 착한 법은 불멸입니다.” “착한 법과 착하지 않은 법의 근본은 무엇입니까?” “몸이 근본입니다.” “몸의 근본은 무엇입니까?” “탐욕이 근본입니다.” “탐욕의 근본은 무엇입니까?” “헛되고 거짓된 분별이 근본입니다.” “헛되고 거짓된 분별의 근본은 무엇입니까?” “뒤바뀐 생각[倒想]이 근본입니다.” “뒤바뀐 생각의 근본은 무엇입니까?” “머무름 없음[無住]이 근본입니다.”

묘길상이 말했다.

“이 같은 머무름 없음은 무엇을 그 근본으로 삼습니까?”

무구칭이 말했다.

“그 질문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머무름 없음은 바로 그 근본이 없는 것이며, 또 머무를 곳도 없는 것[無所住]이기 때문입니다. 그 근본도 없고 머무를 곳도 없기 때문에 일체의 모든 법을 건립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때 무구칭의 방 안에는 천녀(天女)가 있었는데, 그녀는 여러 보살마하살들이 법을 설하는 것을 듣다가 일찍이 겪어보지 못했던 체험을 하였다. 그래서 뛸듯이 기뻐하다가 문득 자신의 몸을 나타내서 천상의 꽃을 여러 보살들과 대성문들에게 뿌렸다. 천상의 꽃이 보살의 몸에 닿았을 때는 이내 떨어져 내렸으나, 대성문의 몸에 닿았을 때는 붙어서 떨어지질 않았다. 그러자 대성문들은 그 꽃을 털어 내려고 온갖 신통력을 다 써봤으나 털어낼 수가 없었다. 그러자 천녀는 존자 사리자에게 물었다.

“무엇 때문에 꽃을 털어 내려 합니까?”

사리자가 말했다.

“이 꽃이 법답지 못해서 내가 털어 내려 하는 것입니다.”

천녀가 말했다.

“그만두십시오. 이 꽃을 법답지 못하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이 꽃은 법다운 것인데, 오직 존자들만이 스스로 법답지 못하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꽃 자체는 분별이 없고 이분별(異分別)도 없는데, 존자들만이 스스로 분별을 하고 이분별을 두기 때문입니다. 올바르게 설해진 법의 비나야(毗奈耶)를 닦는 출가한 사람이 분별이나 이분별이 있다면 법답지 못한 것이고, 분별이나 이분별이 없다면 법다운 것입니다.

사리자여, 보살들에게 꽃이 붙지 않은 것을 보십시오. 그들 모두는 일체의 분별이나 이분별을 영원히 끊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성문들에게 꽃이 붙어 있는 것을 보십시오. 그들 모두는 일체의 분별이나 이분별을 아직 끊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리자여, 가령 사람이 두려워할 때는 사람 아닌 자[非人]들이 그 틈을 탑니다. 그러나 두려움이 없다면 어떤 비인도 그 틈을 타지 못합니다. 생사의 업을 짓는 번뇌를 두려워하는 자는 빛깔ㆍ소리ㆍ냄새ㆍ맛ㆍ감촉 등이 그 틈을 타지만, 생사의 업을 짓는 번뇌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세간의 빛깔ㆍ소리ㆍ냄새ㆍ맛ㆍ감촉 등이 그 틈을 타지 못합니다.

사리자여, 번뇌의 습기를 아직 끊지 못한 자에겐 꽃이 그 몸에 붙을 것이고, 번뇌의 습기를 영원히 끊은 자에겐 꽃이 그 몸에 붙지 않을 것입니다.”

사리자가 말했다.

“천녀께선 이 방에 있은 지 얼마나 되었습니까?”

천녀가 대답했다.

“저는 사리자께서 해탈에 머문 때부터 이 방에 있었습니다.”

사리자가 말했다.

“천녀가 이 방에 있은 지가 그렇게 오래됩니까?”

천녀가 다시 물었다.

“해탈에 머문 지가 얼마나 오래되었습니까?”

그러자 사리자는 잠자코 있으면서 대답하질 못했다. 천녀가 말했다.

“존자께선 대성문으로서 크나큰 지혜와 변재를 갖추셨는데도 이런 사소한 질문에도 침묵만 지키고 대답하질 못하십니까?”

사리자가 말했다.

“무릇 해탈이란 모든 낱말이나 언어를 벗어난 것입니다. 나는 지금 해탈에 관해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천녀가 말했다.

“언어 문자로 설하는 것이 다 해탈의 모습[解脫相]입니다. 왜냐하면 이 해탈이란 내적인 것도 아니며 외적인 것도 아니며 이 둘을 벗어난 중간에서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듯이, 문자도 마찬가지로 내적인 것도 아니고 외적인 것도 아니며 이 둘을 벗어난 중간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문자를 벗어나서 해탈을 설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해탈과 일체의 법은 그 본성이 평등하기 때문입니다.”

사리자가 말했다.

“탐냄ㆍ성냄ㆍ어리석음을 벗어나는 것이 해탈을 이루는 것 아닙니까?”

천녀가 말했다.

“부처님께서 자만하는 사람들을 위해 ‘일체의 탐냄ㆍ성냄ㆍ어리석음을 벗어나는 것이 해탈’이라고 설한 것입니다. 자만을 완전히 벗어난 자들에게는 ‘일체의 탐냄ㆍ성냄ㆍ어리석음의 본성이 그대로 해탈’이라고 설합니다.”

사리자가 말했다.

“훌륭합니다. 천녀여, 그대는 무엇을 얻고 무엇을 성취했기에 지혜와 변재가 이러합니까?”

천녀가 말했다.

“나는 지금 얻은 것도 없고 성취한 것도 없기에 지혜와 변재가 이와 같은 것입니다. 만약 내가 지금 얻은 것이 있고 성취한 것이 있다고 말한다면, 이는 올바르게 설해진 법의 비나야에서 자만[增上慢]하는 것이 됩니다.”

사리자가 말했다.

“그대는 3승(乘) 중 어디에 속합니까?”

천녀가 답했다.

“나는 3승 모두에 속합니다.”

사리자가 말했다.

“그대는 어떤 비밀스런 뜻이 있기에 그런 말씀을 하는 것입니까?”

천녀가 말했다.

“나는 늘 대승을 설해 남들에게 들려주기 때문에 내가 성문이 되며, 나 스스로 법의 참된 본성을 깨우치기 때문에 내가 독각이 되며, 항상 대자비심을 저버리지 않기 때문에 내가 대승이 됩니다.

또 사리자여, 나는 성문승을 구하는 중생들을 교화 제도하기 때문에 내가 성문이 되고, 독각승을 구하는 중생들을 교화 제도하기 때문에 내가 독각이 되고, 무상승(無上乘)을 구하는 중생들을 교화 제도하기 때문에 내가 대승이 됩니다.

사리자여, 비유하자면 어떤 사람이 첨박가(瞻博迦)숲에 들어가면 오직 첨박가 향기만 맡을 뿐 풀이나 나무 등 다른 냄새는 전혀 즐길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이 방에서 지낸 자라면 오직 대승의 공덕 향기만 즐기지 성문ㆍ독각의 공덕 향기는 전혀 즐기질 않습니다. 이 방 안에선 모든 불법 공덕의 오묘한 향기가 늘 퍼져 있기 때문입니다.

또 사리자여, 제석천[釋]ㆍ범천[梵]ㆍ사대천왕(四大天王)ㆍ나가(那伽:용)ㆍ야차[藥叉]ㆍ아수라[妸素洛]에서부터 사람인 듯 사람 아닌 자[人非人] 등에 이르기까지 이 방에 들어온 자들은 모두 이 무구칭 대사를 우러러보고 공경히 예배하며 공양하고 위대한 법을 듣습니다. 그리하여 누구나 다 대보리심을 일으키고, 누구나 다 일체 불법 공덕의 오묘한 향기를 냅니다.

또 사리자여, 내가 이 방에서 12년 동안 지냈지만 성문이나 독각에 어울리는 말씀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오로지 대승 보살들이 행하는 대자대비와 모든 부처님의 불가사의하고 오묘한 법에 어울리는 말씀만을 들었을 뿐입니다.

또 사리자여, 이 방은 늘 여덟 가지 놀랍고 뛰어난 법[未曾有殊勝之法]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여덟 가지는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사리자여, 이 방에는 늘 금색 광명이 온통 주변을 비추고 있어 밤낮의 차이가 없습니다. 그리하여 저 해와 달의 빛으로 비출 필요가 없으니, 이것이 첫 번째 놀랍고 뛰어난 법입니다.

또 사리자여, 이 방에는 늘 일체 세간의 사람인 듯 사람 아닌 자들이 있는데, 그들이 이 방에 들어오면 전혀 번뇌의 해침을 받지 않습니다. 이것이 두 번째 놀랍고 뛰어난 법입니다.

또 사리자여, 이 방에서는 제석천ㆍ범천ㆍ사천왕들과 다른 세계에서 온 보살들의 집회가 늘 끊이질 않습니다. 이것이 세 번째 놀랍고 뛰어난 법입니다.

또 사리자여, 이 방에서는 보살의 여섯 가지 바라밀과 물러남이 없는 법륜(法輪)에 어울리는 말씀을 늘 들을 수 있으니, 이것이 네 번째 놀랍고 뛰어난 법입니다.

또 사리자여, 이 방에서는 늘 하늘 사람들의 기악이 연주됩니다. 그 모든 음악 속에서 한량없는 백천 법음(法音)이 흘러나오니, 이것이 다섯 번째 놀랍고 뛰어난 법입니다.

또 사리자여, 이 방에는 네 개의 큰 보물 창고가 있는데, 온갖 보배가 가득 차서 고갈되질 않습니다. 이 보물은 모든 가난하고 헐벗고 외롭고 의탁할 데 없는 걸인들에게 나누어 주지만, 그러면서도 여지껏 고갈된 적이 없습니다. 이것이 여섯 번째 놀랍고 뛰어난 법입니다.

또 사리자여, 이 방에는 석가모니(釋迦牟尼)여래ㆍ무량수(無量壽)여래ㆍ난승(難勝)여래ㆍ부동(不動)여래ㆍ보승(寶勝)여래ㆍ보염(寶焰)여래ㆍ보월(寶月)여래ㆍ보엄(寶嚴)여래ㆍ보음성(寶音聲)여래ㆍ사자후(獅子吼)여래ㆍ일체의성(一切義成)여래 등 시방의 한량없는 여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대사가 마음을 일으켜 청하면 즉시 와서 일체 여래 비요(秘要)의 법문을 폭넓고 자세하게 설한 뒤 돌아갑니다. 이것이 일곱 번째 놀랍고 뛰어난 법입니다.

또 사리자여, 이 방에는 늘 공덕으로 장엄된 모든 불국토와 온갖 미묘함으로 장식된 하늘의 궁전들이 나타나니, 이것이 여덟 번째 놀랍고 뛰어난 법입니다.

사리자여, 이 방에는 이처럼 여덟 가지 놀랍고 뛰어난 법이 늘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런 불가사의한 일을 보고 나서 도대체 어느 누가 성문이나 독각의 법을 찾겠다고 말하겠습니까?”

그러자 사리자가 천녀에게 말했다.

“그대는 왜 이러한 여자의 몸을 바꾸지 않습니까?”

천녀가 말했다.

“내가 이 방에 있던 12년 동안 여인의 성품을 구했으나 끝내 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바꾼단 말입니까? 사리자여, 비유하자면 요술쟁이가 요술로써 여자 몸으로 화현했는데, 어떤 사람이 ‘당신은 왜 이러한 여자 몸을 바꾸지 않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올바른 질문이라고 하겠습니까?”

사리자가 말했다.

“아닙니다. 천녀여, 허깨비[幻]는 실재하는 것이 아닌데, 어떻게 바뀔 수 있겠습니까?”

천녀가 말했다.

“이처럼 모든 법의 성품[性]과 모양[相]은 다 진실이 아닌 허깨비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 여자의 몸을 바꾸지 않느냐는 질문을 어떻게 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즉시 천녀는 신통력을 써서 사리자를 천녀로 변화시키고, 자기 스스로는 사리자로 변화하고서 다시 물었다.

“존자께선 어째서 여자의 몸을 바꾸지 않습니까?”

사리자가 천녀의 모습으로 대답했다.

“나는 지금 어떻게 남자 몸을 잃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여자 몸으로 바뀌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천녀가 다시 말했다.

“존자께서 이 여자 몸을 바꿀 수 있다면 모든 여자 몸도 바뀔 수 있습니다. 마치 사리자가 실제 여자가 아니면서도 여자 몸을 나타냈듯이 일체의 여자 몸도 비록 여자 몸을 나타내고 있지만 실제로는 여자가 아닙니다. 세존께선 이 비밀스런 뜻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체의 모든 법은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다.'”

천녀가 이 말을 마치고 신통력을 거두자 제각기 본래 모습으로 돌아갔다. 천녀가 사리자에게 물었다.

“존자여, 여자 몸이 지금은 어디에 있습니까?”

사리자가 말했다.

“나는 나의 여자 몸을 만들지도 않았고 변화시키지도 않았습니다.”

천녀가 말했다.

“존자여, 훌륭합니다. 일체의 모든 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체의 법은 만들어진 것도 아니며 변화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 이것이 진정 부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자 사리자가 천녀에게 말했다.

“그대는 이 세상을 떠나면 어느 곳에 태어납니까?”

천녀가 대답했다.

“여래가 화하여 태어나는 곳에 나도 태어날 것입니다.”

사리자가 말했다.

“여래가 화한 몸은 죽음도 없고 태어남도 없습니다. 그러니 어찌 태어나는 곳이란 말씀을 할 수 있겠습니까?”

천녀가 말했다.

“존자여, 모든 법과 중생도 마찬가지로 태어남도 없고 죽음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왜 내게 어디서 태어났냐고 묻는 것입니까?”

사리자가 천녀에게 물었다.

“그대는 무상정등보리(無上正等菩提)를 얻은 지 오래되었습니까?”

천녀가 말했다.

“사리자여, 그대가 이생(異生:범부)의 법을 갖춰 다시 한 번 이생으로 태어날 때, 나도 무상정등보리를 증득할 것입니다.”

사리자가 말했다.

“천녀여, 내가 이생의 모든 특성을 갖춰 이생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천녀가 말했다.

“존자여, 나 역시 무상정등보리를 증득했다는 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무상보리는 머무는 곳[住處]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까닭에 보리를 증득한 자도 없습니다.”

사리자가 말했다.

“그렇다면 어째서 부처님께선 ‘항하의 모래 수처럼 많은 부처님이 현재 무상정등보리를 증득하고 있고, 과거에 증득한 부처님이나 미래에 증득할 부처님도 그처럼 많다’고 말씀하신 것입니까?”

천녀가 말했다.

“존자여, 이 모든 것은 세속에서 관용적으로 헤아리는 숫자나 낱말입니다. ‘삼세의 모든 부처님께서 증득했다’고 한 말은 보리에 과거ㆍ현재ㆍ미래가 있음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무상보리는 삼세를 초월했기 때문입니다. 또 사리자여, 그대는 이미 아라한을 증득했습니까?”

사리자가 말했다.

“증득할 어떤 것도 없기 때문에 증득했습니다.”

천녀가 말했다.

“존자여, 보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증득할 어떤 것도 없기 때문에 증득한 것입니다.”

그때 무구칭이 사리자 존자에게 말했다.

“이 천녀는 이미 92백천 구지 나유타 부처님을 가까이서 모시면서 공양하였습니다. 이미 신통과 지혜에서 노닐 수 있으며, 원하는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원하는 대로 만족하게 얻었으며, 더 이상 무상정등보리의 염원에서 물러나질 않습니다. 자신의 본원력(本願力)을 통해 자신이 바라는 대로 적절한 곳이면 어디든지 나타나서 중생을 성숙시킵니다.”

8. 보리분품(菩提分品)

그때 묘길상이 무구칭에게 물었다.

“보살이 어떻게 할 때 모든 불법(佛法)의 궁극적인 길[究竟趣]에 도달한 것입니까?”

무구칭이 말했다.

“보살이 길 아닌 길[非趣]을 행할 때 불법의 궁극적인 길에 도달한 것입니다.”

묘길상이 말했다.

“보살이 어떻게 하는 것이 길 아닌 길을 행하는 것입니까?”

무구칭이 말했다.

“보살들이 비록 5무간취(無間趣)에 다시 가더라도 그에게는 원한이나 증오, 성내는 마음이 없으며, 나락가(那洛迦:지옥)로 다시 들어가더라도 모든 번뇌의 오염을 벗어나며, 축생의 길을 다시 들어가더라도 일체의 어둠과 무명(無明)을 벗어나며, 아수라의 길에 다시 들어가더라도 일체의 오만과 교만과 자만을 벗어나며, 염마왕(琰魔王)의 세계에 다시 들어가더라도 광대한 복과 슬기의 양식을 모으고, 다시 색계(色界)와 무색계(無色界)의 길에 들어가더라도 그 속에 빠져들지 않으며, 갈망의 길을 다시 들어가도 욕망의 쾌락에 대한 온갖 집착을 벗어나며, 성냄의 길을 다시 들어가더라도 일체 중생에 대해 어떤 분노도 느끼지 않으며, 어리석음의 길을 다시 들어가도 모든 법에서 어둠과 무명을 멀리 벗어나니 지혜를 밝혀 스스로를 다스리기 때문입니다. 탐욕의 길을 다시 들어가도 자신의 몸이나 목숨을 돌보지 않고 안팎의 일들을 버릴 수 있으며, 계율을 범하는 행동을 다시 하더라도 일체의 계율[尸羅]과 두타행[杜多]의 공덕을 안립할 수 있으며, 작은 욕심으로 만족함을 알아서 지극히 사소한 허물조차 크게 두려워하며 자신의 엄격한 수행과 위의를 유지하고, 증오와 성냄의 길을 다시 들어가도 궁극적으로 선행과 자비에 굳건히 안주하여 마음에 번뇌가 없고, 나태의 길로 다시 들어가도 쉼 없이 정진에 몰두하여 일체의 선근(善根)을 기르는 데 노력하고, 감각기관이 혼란되는 길에 다시 들어가도 늘 묵묵히 선정에 편안히 머물고, 나쁜 지혜의 길로 다시 들어가더라도 궁극의 지혜바라밀을 성취해서 모든 세간(世間)과 출세간(出世間)의 믿음에 잘 통달하고, 기만하고 아첨하는 길로 다시 들어가더라도 능숙한 방편으로 판단할 수 있고, 은밀한 말의 방편이나 자만의 길로 다시 들어가더라도 구원[濟度]의 다리를 세우고, 세간의 모든 번뇌의 길을 다시 들어가더라도 성품이 청정하여 끝내 오염이 없고, 온갖 마군의 길로 다시 들어가면서도 모든 불법과 깨달음의 지혜[覺慧]를 스스로 증득해 알 뿐 다른 인연에는 의존하지 않고, 성문의 길로 다시 들어가더라도 중생을 위해 ‘이제껏 듣지 못한 법’을 설하고, 독각의 길로 다시 들어가더라도 대자대비를 이루어서 중생을 성숙시키고, 온갖 빈궁한 길에 다시 처하더라도 진기한 보배가 무진장인 보배 손[寶手]을 얻고, 온갖 장애자의 길[缺根趣]에 다시 처하더라도 상호를 갖춰 오묘한 빛깔로 몸을 장엄하고, 비천한 계층에 다시 처하더라도 불가(佛家)의 존귀한 종성(種姓)에 태어나서, 뛰어난 복과 지혜의 자량을 쌓고, 나약하고 못나고 천박한 자들의 길에 다시 처하더라도 미묘하고 뛰어난 나라연(那羅延)의 몸을 얻어 모든 중생이 늘 즐겨 보는 바이고, 온갖 늙음과 병의 길에 다시 처하더라도 끝내는 늙고 병듦의 뿌리를 없애서 죽음의 공포를 초월하고, 부자의 길에 다시 처하더라도 무상하다는 생각을 부지런히 닦아서 온갖 바라고 구하는 것을 종식시키고, 궁녀들과 온갖 유희를 즐기는 길에 처하더라도 궁극적으로 영원히 벗어나는 수행을 닦아서 온갖 욕망의 늪을 건너고, 말 못하거나 앞뒤가 맞지 않는 상황에 다시 처하더라도 갖가지 재주와 말솜씨를 갖춰서 염혜(念慧)를 상실하지 않는 다라니를 얻으며, 온갖 악한 길에 다시 처하더라도 정도(正道)로써 세간을 제도하고, 다시 모든 태어나는 길[生趣]에 처하더라도 실제로는 일체의 길에서 태어나는 것을 영원히 끊어 버리고, 열반의 길에 다시 처하더라도 늘 생사의 상속을 버리지 않고, 오묘한 보리를 성취해 대법륜을 굴려 열반에 들어가더라도 온갖 보살행을 부지런히 닦아 끊임없이 이어갑니다.

묘길상이여, 보살이 이렇게 길 아닌 길을 행할 때 비로소 온갖 불법의 궁극적인 길에 도달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자 무구칭이 묘길상에게 물었다.

“어떤 것을 가리켜 여래의 종성(種性)이라고 합니까? 간략히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묘길상이 말했다.

“이른바 일체의 거짓된 몸[僞身]의 종성이 여래의 종성입니다. 즉 일체의 무명과 삶에 대한 애착이 여래의 종성이며, 탐냄ㆍ성냄ㆍ어리석음의 종성이 여래의 종성이며, 네 가지 허망한 뒤바뀜[顚倒]의 종성이 여래의 종성이며, 다섯 덮개[五蓋]의 종성, 여섯 가지 감각[六處]의 종성, 일곱 가지 의식의 거주처[七識住]의 종성, 여덟 가지 삿된 길[八邪]의 종성, 아홉 가지 번뇌스런 일[九惱事]의 종성, 열 가지 착하지 못한 행위의 종성이 여래의 종성입니다. 요약하면 62견(見) 등의 온갖 견해와 악하고 착하지 못한 법이 갖고 있는 종성이 여래의 종성입니다.”

무구칭이 물었다.

“어떤 비밀스런 뜻이 있기에 그렇게 말씀하시는 겁니까?”

묘길상이 말했다.

“무위(無爲)를 보아서 이미 정성이생위(正性離生位)에 들어간 자는 무상정등각의 마음을 일으킬 수 없습니다. 반대로 온갖 번뇌가 작용하는 유위(有爲)에 머무르면서 아직 진리[諦]를 보지 못한 자는 무상정등각의 마음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비유하자면 높은 고원의 육지에서는 올발라(殟癖)꽃이나 발특마(鉢特摩:홍련화)꽃ㆍ구모다(拘母陀)꽃ㆍ분다리(奔茶利)꽃이 나질 못하고 낮고 습한 진흙 속에서야 비로소 이 네 종류의 꽃이 피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성문이나 독각의 종성처럼 이미 무위를 보아서 정성이생위에 들어간 자는 끝내 모든 지혜로운 마음을 일으킬 수 없습니다. 오직 온갖 번뇌가 작용하고 낮고 습한 진흙 속에서라야 비로소 모든 지혜로운 마음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바로 그런 곳에서 불법(佛法)이 생장하기 때문입니다.

또 선남자여, 비유하자면 씨앗을 공중에다 심으면 결국 생장하지 못하고, 낮고 습한 거름을 준 땅에 심어야 비로소 생장할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성문이나 독각의 종성처럼 이미 무위를 보아서 정성이생위에 들어간 자는 일체의 불법을 생장시킬 수 없습니다. 설사 나[我]와 내 것[我所]이 있다는 생각[身見]을 묘고산(妙高山)처럼 일으킨다 해도 대보리의 서원을 일으킬 수 있으니, 그 속에서 온갖 불법이 생장하기 때문입니다.

또 선남자여, 비유하자면 사람이 큰 바다에 들어가지 않으면 결코 폐유리(吠琉璃) 같은 값을 따질 수 없는 보배는 얻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생사와 번뇌의 큰 바다로 들어가지 않으면 값을 따질 수 없는 보배인 모든 지혜로운 마음을 결코 일으킬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생사윤회를 일으키는 온갖 번뇌의 종성이 바로 여래의 종성임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이때 존자 대가섭파(大迦葉波)가 묘길상을 찬탄하면서 말했다.

“훌륭하고 훌륭하십니다. 너무나 잘 설명하셨습니다. 진실로 말 그대로라서 다른 말이 필요 없습니다. 생사를 일으키는 온갖 번뇌의 종성이 바로 여래의 종성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들 마음의 상속(相續) 속에는 생사의씨앗이 완전히 타 없어져서 정등각의 마음을 절대로 일으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5무간업(無間業)을 이룰지언정 우리처럼 완전히 해탈한 아라한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5무간업을 이룬 자는 여전히 이 무간업을 없애고 무상정등각의 마음을 일으킬 힘을 갖고 있어서 차근차근 일체의 불법을 성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처럼 번뇌를 완전히 없앤 아라한들은 영원히 그럴 수가 없으니, 마치 감각기관[根]이 망가진 사람이 다섯 가지 미묘한 쾌락에 대해 어찌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번뇌를 완전히 없앤 아라한들과 모든 속박을 영원히 끊은 자들은 불법에 대해 어찌할 수 없어서 다시는 모든 부처님의 오묘한 법을 구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이생(異生)은 부처님의 은혜를 갚을 수 있지만 성문이나 독각은 결코 갚을 수 없는 이유입니다. 까닭인즉 이생은 불(佛)ㆍ법(法)ㆍ승(僧)의 공덕을 듣고서 삼보의 종성이 영원히 끊이지 않도록 무상정등각의 마음을 일으켜 일체의 불법을 차근차근 성취할 수 있지만, 성문이나 독각은 여래의 10력(力)과 4무외(無畏) 등에서부터 부처님만이 갖고 있는 특성[不共法]과 일체 공덕에 대한 설법을 종신토록 듣는다 해도 끝내 정등각의 마음을 일으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때 무리 중에는 보현일체색신(普現一切色身)이라는 보살이 있었는데, 그 보살이 무구칭에게 물었다.

“거사여, 당신의 부모와 아내, 자식, 그리고 노비와 머슴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친구와 권속과 모든 시중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리고 코끼리와 말ㆍ수레ㆍ마부 등은 모두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자 무구칭은 미묘한 게송으로 대답하였다.

청정한 보살에겐 지혜바라밀이 어머니요 
훌륭한 방편이 아버지이니 
세간의 참된 길잡이[導師]들이 
모두 이 지혜와 방편에서 나오네.



미묘한 법의 기쁨은 아내가 되고 
대자비심은 딸이 되며 
진실한 법과 진리는 아들이고 
공(空)의 뛰어난 뜻을 생각함은 집이라네.



번뇌는 천박한 노예라서 
뜻에 따라 부려지며 굴러가네.


깨달음을 돕는 것들[覺分]은 친구라서 
그로부터 보리를 증득하네.



6바라밀은 권속이고 
4섭법(攝法)은 기녀이니 
결집된 바른 법의 말씀들 
미묘한 음악으로 여기노라.



총지(摠持:다라니)는 동산을 짓고 
큰 법은 숲을 이루니 
7각지(覺支)의 꽃으로 장엄하고 
해탈의 지혜로 열매를 맺네.



8해탈의 미묘한 연못에는 
선정의 물이 고요히 차 있으니 
7정(淨)의 연꽃들로 가득 덮어서 
온갖 더러움을 씻어내네.



신통은 코끼리와 말이며 
대승은 수레이니 
보리심으로 잘 다스려 
8도지로(道支路:8正道)에 노니노라.



미묘한 모습[相]으로 장엄 갖추고 
온갖 좋은 것[好]으로 치장을 하네.


자신과 남에게 부끄러워하는 것으로 의복을 삼고 
드높은 의요(意樂)로 화환을 삼는다네.



올바른 법의 진귀한 재보(財寶)를 갖추어 
방편을 통해 분명히 보여주며 
뒤바뀜 없는 행은 뛰어난 이익 
대보리로 회향을 하네.



네 가지 선정은 침상이며 
청정한 생활은 이부자리라네.


보살은 늘 지혜로 깨어 있으니 
그 마음 항상 선정에 있네.



이미 죽지 않는 법[不死法]을 먹었으면서도 
다시 해탈의 맛을 마시노라.


미묘하고 청정한 마음으로 목욕을 하고 
뛰어난 계율은 향과 고약이네.



번뇌의 도적 소멸시키니 
그 용감함 그 누가 당할쏜가? 
네 가지 마군과 원수를 굴복시키고 
오묘한 보리의 깃발을 세우노라.



비록 생겨나고 소멸함이 없을지라도 
일부러 생을 취할 것을 생각하셔서 
모두가 온갖 불국토에 나타나니 
마치 햇빛이 두루 비치는 것 같구나.



최상의 미묘한 공양을 다함없이 지녀서 
모든 여래께 봉헌하여도 
부처와 자신들 간에는 
어떤 분별도 두지 않네.



불국토와 온갖 중생 
텅 비었음[空]을 잘 알아도 
언제나 정토의 공덕을 닦아서 
중생에게 이익 주기를 쉬지 않네.



일체 중생의 
형상과 소리와 위의를 
두려움 없는[無畏力] 보살은 
찰나간에 남김없이 나타낼 수 있네.



비록 온갖 마군의 업을 깨달았어도 
그 업이 굴러가는 대로 보여 주시니 
보살이 그러한 업을 나타내는 건 
방편으로 궁극의 피안에 이르기 때문이네.



혹 자기 자신들은 늙고 병들고 
죽음이 있다는 것을 보이셔도 
이는 중생을 성숙시키기 위한 것이니 
마치 꼭두각시놀이와 같네.



어떤 때는 겁화(劫火)의 발생을 보이셔서 
천지가 모두 치열히 타오르는데 
이는 항상함에 집착하는 중생들을 비추어 
빨리 멸하도록 하려는 것이네.


천 구지(俱胝)의 중생들이 
한 나라에서 와서 청을 할 때면 
그들 모두의 집에서 동시에 공양 받아서 
누구나 보리로 나아가게 하네.



온갖 주술과 기술에 관한 것이든 
그리고 학문과 기예에 관한 것이든 
그 궁극에까지 통달하여서 
모든 중생에게 이익을 주네.



세간의 온갖 외도의 법들 
그 속에서도 출가한 사문이 되어 
방편에 따라 중생을 이롭게 하여 
온갖 나쁜 소견에 떨어지지 않게 하네.



혹은 해와 달과 하늘이 되고 
범왕(梵王)이나 세계의 주재자도 되고 
땅ㆍ물ㆍ불ㆍ바람이 되기도 하면서 
중생을 풍요롭게 하네.



질병이 만연하는 겁일 때는 
보살은 최고의 양약이 될 수 있으니 
모든 질병 없애 주어서 
중생들을 대보리로 나아가게 하네.



굶주림이 만연한 겁일 때는 
보살은 온갖 먹을 것과 마실 것이 될 수 있으니 
먼저 중생의 굶주림과 갈증을 없앤 뒤 
법을 설해 그들을 안락케 하네.


병란이 일어난 겁일 때는 
자비의 정려를 닦아서 
한량없는 중생들을 사랑으로 이끌어 
그들이 원한을 갖지 않게 하네.



큰 전쟁의 진중에 있을 때는 
어느 편에도 치우치지 않고 
양쪽을 오가면서 평화와 우호를 맺게 하여 
보리심을 일으키도록 권유하시네.



불국토가 한량없고 
지옥도 가없지만 
구석구석까지 다 찾아가셔서 
고통을 없애주고 안락케 하시네.



서로가 해치고 잡아먹는 
온갖 축생들 세계에도 나타나셔서 
모든 이익과 안락을 베푸시니 
그래서 세상을 인도하는 길잡이라 하네.



온갖 욕망의 쾌락 누리면서도 
늘 정려(靜慮)를 닦으셔서 
미혹과 혼란을 일으키는 모든 악마 
끼어들 틈을 찾지 못하게 하네.



불 속에서 연꽃이 피어나는 것 
매우 드문 일이라 설하듯이 
선정을 닦으면서 욕망을 행하는 것도 
진정 너무나 드문 일이라 하시네.


의도적으로 음녀(淫女)가 되어서 
온갖 호색하는 사람 이끄는 것은 
우선 욕망의 갈고리로 잡아들이고 나서 
나중에 부처의 지혜 닦게 하기 위함이네.



어떤 경우엔 성과 마을의 재상이 되고 
어떤 경우엔 상인이나 국사(國師)가 되고 
또 어떤 때는 신하나 벼슬아치가 되는 것은 
모든 중생에게 이익과 안락을 주기 위함이네.



가난하고 궁핍한 자들에겐 
보살은 결코 고갈되지 않는 곳간이 되니 
온갖 것 베풀어 가난의 고통 없애 주어 
그들을 대보리로 나아가도록 하네.



온갖 교만한 사람들에게 
보살은 대역사(大力士)가 되니 
그들의 교만함 모두 꺾어서 
보리에 머물도록 발원케 하네.



온갖 두려움에 떠는 자들은 
방편으로 잘 위로하니 
그들의 놀라움과 두려움 모두 없애서 
보리심을 발하게 하네.



5통선(通仙)이 되어서는 
청정하게 범행(梵行)을 닦아서 
모든 자를 편안히 안주케 하네.


계율과 인욕과 자비와 착함 속에서 
혹 중생들 속에서도 거리낌 없이 
섬길 만한 스승을 발견하면 
이내 시종과 하인이 되어서 
제자로서 그를 섬기네.



중생이 정법을 편안히 즐기도록 
가능한 한 모든 수단 사용하시니 
그러한 온갖 방편 속에서는 
누구나 잘 배우고 닦을 수 있네.



이처럼 보살의 수행 끝이 없고 
그 미치는 영역 또한 무한하니 
가없는 지혜를 완성하셔서 
셀 수 없는 중생을 해탈시키네.



가령 일체의 모든 부처님이 
백천 겁의 세월 동안 머무르면서 
보살의 그 공덕 찬탄하여도 
여전히 끝낼 수 없으리라.



어느 누가 이러한 법을 듣고 
대보리를 희구하지 않으랴? 
근기가 낮은 중생들과 
지혜가 전혀 없는 자를 빼놓고는.

9. 불이법문품(不二法門品)

그때 무구칭이 그곳에 모인 보살들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는 것이 보살이 둘이 아닌 법문[不二法門]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입니까? 모두들 자신의 변재로 내키는 대로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자 대중 속에 있던 보살들은 제각기 내키는 대로 차례로 말했다.

먼저 법자재(法自在)보살이 이렇게 말했다.

“생함[生]과 소멸[滅]을 둘이라고 합니다. 만약 보살이 모든 법은 본래 생함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면 또한 소멸도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증득하는 것, 이것이 바로 불이의 법문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입니다.”

또 승밀(勝密)보살이 이렇게 말했다.

“나[我]와 내 것[我所]을 분별하여 둘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나라는 생각을 짓기 때문에 문득 내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만약 나 없음[無我]을 분명히 알면 또한 내 것도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불이의 법문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입니다.”

또 무순(無瞬)보살이 이렇게 말했다.

“취(取)함이 있고 취함이 없는 것을 분별하여 둘이라고 합니다. 만약 보살이 취함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안다면 얻는 것도 없습니다. 얻는 것이 없기 때문에 늘거나 줄어드는 일도 없습니다. 일체의 법에서 짓는 것도 없고 없앨 것도 없어 집착함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불이의 법문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입니다.”

또 승봉(勝峯)보살이 이렇게 말했다.

“더러움으로 오염된 것[雜染]과 청정(淸淨)한 것을 분별하여 둘이라고 합니다. 만약 보살이 오염된 것과 청정한 것이 둘 아님을 분명히 안다면 그에 대한 분별이 없습니다. 분별을 영원히 끊어 적멸의 길을 따르는 것, 그것이 바로 불이의 법문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입니다.”

또 묘성(妙星)보살이 이렇게 말했다.

“산만함[牀]과 사유(思惟)를 분별하여 둘이라고 합니다. 만약 보살이 산만할 것도 없고 사유할 것도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안다면 작위적인 생각이 없습니다. 이 산만함도 없고 사유할 것도 없고 작위적인 생각도 없는 데 머무는 것, 이것이 바로 불이의 법문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입니다.”

또 묘안(妙眼)보살이 이렇게 말했다.

“하나의 모양[一相]과 모양 없는 것[無相]을 분별하여 둘이라고 합니다. 만약 보살이 모든 법은 하나의 모양도 없고 다른 모양[異相]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안다면 모양 없음도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의 모양, 다른 모양, 모양 없는 것이 평등하다는 것을 아는 그것이 바로 불이의 법문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입니다.”

또 묘비(妙臂)보살이 이렇게 말했다.

“보살의 마음과 성문의 마음을 둘이라고 합니다. 만약 보살이 두 마음의 본성이 텅 비어 허깨비와 같다는 것을 분명히 안다면 보살의 마음도 없고 성문의 마음도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두 마음의 모습이 평등하여 모두 환화(幻化)와 같다는 것이 바로 불이의 법문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입니다.”

또 육양(育養)보살이 이렇게 말했다.

“선(善)과 불선(不善)을 분별하여 둘이라고 합니다. 만약 보살이 선의 본성과 불선의 본성을 분명히 안다면 선악을 단언할 아무 것도 없습니다. 모양과 모양 없음의 두 언구가 평등하니, 따라서 취하는 것도 없고 버리는 것도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불이의 법문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입니다.

또 사자(師子)보살이 이렇게 말했다.

“유죄(有罪)와 무죄(無罪)를 분별하여 둘이라고 합니다. 만약 보살이 유죄와 무죄가 모두 평등하다는 것을 분명히 안다면 금강의 지혜로써 모든 법이 속박도 없고 벗어남도 없다는 것을 통달합니다. 이것이 바로 불이의 법문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입니다.”

또 사자혜(師子慧)보살이 이렇게 말했다.

“유루(有漏)와 무루(無漏)를 분별하여 둘이라고 합니다. 만약 보살이 일체 법의 본성이 모두 평등하다는 것을 분명히 안다면 유루라거나 무루라는 두 가지 관념[想]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따라서 있다고 하는 관념[有想]에도 집착하지 않고 없다고 하는 관념[無想]에도 집착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불이의 법문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입니다.”

또 정승해(淨勝解)보살이 이렇게 말했다.

“유위(有爲)와 무위(無爲)를 분별하여 둘이라고 합니다. 만약 보살이 이두 법의 본성이 모두 평등하다는 것을 분명히 안다면 온갖 행위에서 벗어나 깨달음의 지혜[覺慧]가 허공 같을 것입니다. 지혜의 청정함과 집착할 것도 버릴 것도 없는 이것이 바로 불이의 법문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입니다.”

또 나라연(那羅延)보살이 이렇게 말했다.

“세간과 출세간을 분별하여 둘이라고 합니다. 만약 보살이 세간의 본성이 공적(空寂)해서 들어갈 것도 없고 나올 것도 없고 흐르지도 않고 흩어지지도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안다면 전혀 세간에 집착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불이의 법문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입니다.”

또 조순혜(調順慧)보살이 이렇게 말했다.

“생사(生死)와 열반(涅槃)을 분별하여 둘이라고 합니다. 만약 보살이 생사의 본성이 본질적으로 텅 비어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안다면 생사에 유전하는 일도 없고 적멸(寂滅)에 드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불이의 법문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입니다.”

또 현견(現見)보살이 이렇게 말했다.

“다함이 있는 것[有盡]과 다함이 없는 것[無盡]을 분별하여 둘이라고 합니다. 만약 보살이 다함이 있는 것도 없고 다함이 없는 것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안다면 이것이 바로 궁극적인 다함[究竟盡]이니, 이것을 다함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궁극적인 다함이라면 다시 다한다고 할 것이 없으니, 이를 다함이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또 다함이 있는 것은 단지 한 찰나 동안만 지속됩니다. 한 찰나 속에 다함이 있지 않다면 이는 다함이 없는 것입니다. 다함 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다함없는 것도 없습니다. 다함이 있는 것과 다함이 없는 것의 본성이 텅 비었음을 분명히 아는 그것이 바로 불이의 법문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입니다.”

또 보밀(普密)보살이 이렇게 말했다.

“유아(有我)와 무아(無我)를 분별하여 둘이라고 합니다. 만약 보살이 유아도 오히려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안다면 하물며 무아이겠습니까? 유아이든 무아이든 그 본성이 둘이 아니란 것을 보는 그것이 바로 불이의 법문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입니다.”

또 전천(電天)보살이 이렇게 말했다.

“명(明)과 무명(無明)을 분별하여 둘이라고 합니다. 만약 보살이 무명의 본성이 바로 명(明)이라는 것을 분명히 안다면 명과 무명 모두를 얻을 수 없습니다. 사량 분별도 할 수 없고 사량 분별의 길도 벗어났으니, 이 둘의 평등한 무이(無二)를 관하여 나타내는 것이 바로 불이의 법문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입니다.”

또 희견(憙見)보살이 이렇게 말했다.

“색(色)ㆍ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과 비어 있음[空]을 분별하여 둘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만약 이 집착하는 5온의 성품이 본래부터 비었다는 것을 안다면 이는 바로 색 그대로 빈 것이지 색을 없애서 빈 것이 아닙니다. 수ㆍ상ㆍ행ㆍ식도 마찬가지이니, 이것이 바로 불이의 법문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입니다.”

또 광당(光幢)보살이 이렇게 말했다.

“4계(界:지ㆍ수ㆍ화ㆍ풍)와 허공[空]을 분별해서 둘로 나눕니다. 만약 보살이 4계가 바로 허공성이고, 또 과거ㆍ현재ㆍ미래의 4계도 허공성인 줄 분명히 안다면, 그들은 아무런 뒤바뀜 없이 모든 계[諸界]에 깨달아 들어갑니다. 이것이 바로 불이의 법문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입니다.”

또 묘혜(妙慧)보살이 이렇게 말했다.

“눈과 빛깔, 귀와 소리, 코와 냄새, 혀와 맛, 몸과 감촉, 뜻과 법을 분별하여 둘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만약 보살이 이 모든 것들의 성품이 비었음을 분명히 안다면, 즉 눈의 자성(自性)을 보아 빛깔에 대해 탐내거나 성내거나 어리석지 않다면, 나아가 뜻의 자성을 보아 법에 대해 탐내거나 성내거나 어리석지 않다면, 그때 보살은 이 모든 것들을 비어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런 식으로 보았을 때 보살은 적정(寂靜)에 안주하게 되니, 이것이 바로 불이의 법문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입니다.”

또 무진혜(無盡慧)보살이 이렇게 말했다.

“보시와 일체지(一切智)의 성품으로 회향(廻向)하는 것을 분별하여 둘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지계[戒]ㆍ인욕[忍]ㆍ정진(精進)ㆍ정려(靜慮)ㆍ반야(般若)와 일체지의 성품으로 회향하는 것을 구별해서 둘이라고 합니다. 만약 보시가 곧 일체지의 성품으로 회향하는 것이고 이 일체지의 성품으로회향하는 것이 곧 보시인 줄 안다면, 나아가 반야의 자성이 곧 일체지의 성품으로 회향하는 것이고 이 일체지의 성품으로 회향하는 것이 곧 반야인 줄 안다면, 이 하나의 이치[一理]를 환히 아는 것이 바로 불이의 법문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입니다.”

또 심심각(甚深覺)보살이 이렇게 말했다.

“공(空)과 무상(無相)과 무원(無願)을 분별하여 둘이라고 합니다. 만약 보살이 공(空) 속에는 도무지 어떤 모양도 있지 않고, 이 무상 중에는 어떤 원(願)도 있지 않으며, 그 무원 속에는 마음도 없고 뜻도 없고 작용할 식(識)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안다면, 이는 하나의 해탈문 속에 일체의 3해탈문(解脫門)이 함께 포함된 것입니다. 이렇게 통달하는 것이 바로 불이의 법문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입니다.”

또 적정근(寂靜根)보살이 이렇게 말했다.

“불ㆍ법ㆍ승의 삼보를 분별하여 둘이라고 합니다. 만약 보살이 불성(佛性)이 곧 법성(法性)이고, 법성이 곧 승성(僧性)임을 분명히 안다면 이 삼보는 모두 무위의 모습[無爲相]으로 허공과 같습니다. 모든 법도 또한 그러합니다. 이것을 통달하는 것이 바로 불이의 법문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입니다.”

또 무애안(無碍眼)보살이 이렇게 말했다.

“이 살가야(薩迦耶)와 살가야의 소멸을 분별하여 둘이라고 합니다. 만일 보살이 살가야가 곧 살가야의 소멸인 줄 분명히 안다면 궁극적으로는 살가야의 소견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살가야와 살가야의 소멸에 대해 분별을 하지 않으며 어떤 다른 분별도 없습니다. 이 두 가지는 궁극적으로 멸성(滅性)임을 증득하여 어떤 의심도 놀람도 두려움도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불이의 법문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입니다.”

또 선조순(善調順)보살이 이렇게 말했다.

“이 몸[身]ㆍ말[語]ㆍ뜻[意] 세 가지에 관한 규율[律義]을 분별하여 둘이라고 합니다. 만약 보살이 이 세 가지 규율이 다 작위가 없는 모양[無作相]임을 분명히 안다면 그 모양은 나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 업의 길이 모두 작위 없는 모양이기 때문입니다. 몸의 작위 없는 모양이며, 말의 작위 없는 모양은 곧 뜻의 작위 없는 모양입니다. 뜻의 작위 없는 모양은 곧 일체 만법의 작위 없는 모양입니다. 만약 이 작위 없는 모양을 따라 들어갈 수 있다면 이것이 바로 불이의 법문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입니다.”

또 복전(福田)보살이 이렇게 말했다.

“죄행(罪行)과 복행(福行)과 부동행(不動行)을 분별하여 둘이라고 합니다. 만약 보살이 죄행ㆍ복행ㆍ부동행이 모두 작위 없는 모양인 것을 분명히 안다면 그 모양은 나눌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행ㆍ복행ㆍ부동행 이 셋의 성품과 모양은 모두 비어 있기 때문입니다. 비어 있기에 죄행ㆍ복행ㆍ부동행의 차별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통달하는 것이 바로 불이의 법문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입니다.”

또 화엄(華嚴)보살이 이렇게 말했다.

“일체의 두 법은 모두 나로부터 일어납니다. 만약 보살이 나의 참된 본성[實性]을 안다면 둘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둘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더 이상 분명히 깨닫고 구별함이 없습니다. 분명히 깨닫고 구별하지 않기 때문에 더 이상 분명히 깨닫고 구별할 것도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불이의 법문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입니다.”

또 승장(勝藏)보살이 이렇게 말했다.

“일체의 두 법은 얻을 바가 있는 데서 일어납니다. 만약 보살이 모든 법이 얻을 바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안다면 취하거나 버릴 것이 없습니다. 이미 취하거나 버릴 것이 없다면 그것이 바로 불이의 법문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입니다.”

또 월상(月上)보살이 이렇게 말했다.

“밝음과 어둠을 분별하여 둘이라고 합니다. 만약 보살이 실상(實相)에는 밝음도 없고 어둠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안다면 그 본성은 둘로 나눌 수 없는 것입니다. 마치 비구가 멸진정(滅盡定)에 들어가면 어둠도 없고 밝음도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일체 모든 법의 모양도 그러합니다. 이렇게 모든 법의 평등함에 오묘히 계합하는 그것이 바로 불이의 법문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입니다.”

또 보인수(寶印手)보살이 이렇게 말했다.

“열반을 좋아하고 생사를 싫어하여 둘이라고 합니다. 만약 보살이 열반과 생사를 분명히 알아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마음을 내지 않는다면 둘이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생사의 속박 때문이라면 해탈을 구하겠지만, 궁극적으로 생사의 속박이 없는 것이라면 열반과 해탈을 무엇 때문에 다시 구하겠습니까? 이처럼 속박도 해탈도 없다는 것을 통달해서 열반을 좋아하지도 않고 생사를 싫어하지도 않는 그것이 바로 불이의 법문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입니다.”

또 주계왕(珠髻王)보살이 이렇게 말했다.

“바른 길[正道]과 그릇된 길[邪道]을 분별하여 둘이라고 합니다. 만약 보살이 바른 길에 잘 안주할 수 있다면 결코 그릇된 길을 따르지 않습니다. 그릇된 길을 따르지 않기 때문에 바른 길과 그릇된 길의 두 가지 모양이 없습니다. 두 가지 모양이 없기 때문에 둘이라는 생각도 없습니다. 둘이라는 생각도 없는 그것이 바로 불이의 법문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입니다.”

또 제실(諦實)보살이 이렇게 말했다.

“거짓과 진실을 분별하여 둘이라고 합니다. 만약 보살이 진실의 본성[實性]을 본다면 오히려 그 진실도 보지 못하는데 하물며 거짓을 보겠습니까? 왜냐하면 이 성품은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고 혜안(慧眼)으로 보아야 비로소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모든 법을 보면 보는 것도 없고 보지 못하는 것도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불이의 법문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대중 속에 있는 보살들은 각자 아는 바에 따라서 제각기 말을 마쳤다.

그리고 동시에 묘길상에게 물었다.

“어떤 것을 보살이 불이의 법문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합니까?”

그러자 묘길상이 여러 보살들에게 물었다.

“그대들이 말한 내용은 비록 모두 훌륭하나 내가 생각하건대, 그대들의 설명에는 여전히 둘[二]이라는 낱말[名字]이 남아 있습니다. 만약 보살이 일체 모든 법에 대해 말하거나 설할 것도 없고 명시하거나 가르칠 것도 없다면, 온갖 어리석은 논쟁을 벗어나고 모든 분별도 끊어 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불이의 법문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묘길상은 다시 무구칭 거사에게 물었다.

“우리들은 각자 자기 뜻대로 말했습니다. 이젠 거사께서 말할 차례입니다. 어떤 것을 보살이 불이의 법문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합니까?”

무구칭은 잠자코 침묵하면서 말이 없었다. 묘길상이 말했다.

“정말 훌륭합니다. 보살은 이렇게 불이의 법문에 참되게 깨달아 들어가며 그 속에는 언어나 문자에 의한 분별이 전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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