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무구칭경(說無垢稱經) 제2권
3.성문품(聲聞品)
그때 무구칭은 이런 생각을 했다.
‘내가 이런 병을 앓아 침상에 누워 있는데 세존께서 대비(大悲)하시니 어찌 불쌍해 하지 않으시겠는가? 그런데도 사람을 보내 내 병세에 대해 묻지 않으시는구나.’
그러자 세존께서는 무구칭의 생각을 아시고 그를 불쌍히 여겨 사리자(舍利子: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무구칭에게 가서 문병하여라.”
사리자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저는 무구칭을 뵙고 문병하는 일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언젠가 저는 큰 숲 속 나무 아래서 좌선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무구칭이 제가 좌선하는 곳에 와서 제 발에 절을 하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리자여, 앉아 있는 것만이 꼭 좌선은 아닙니다. 무릇 좌선이란 삼계 어디에도 몸과 마음을 나타내지 않는 것을 좌선이라고 합니다. 멸진정[滅定]에서 나오지 않으면서도 모든 위의를 나타내는 것을 좌선이라고 합니다. 일체의 증득한 상(相)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일체 이생(異生)의 온갖 법을 나타낼 수 있는 것을 좌선이라고 합니다. 마음이 안에도 머무르지 않고 밖으로도 행하지 않는 것을 좌선이라고 합니다. 37보리분법(菩提分法)에 머무르면 서도 일체의 소견들을 벗어나지 않는 것을 좌선이라고 합니다. 생사를 버리지 않는데도 번뇌가 없고, 열반을 증득했더라도 그 열반에 머물지 않는 것을 좌선이라고 합니다. 만약 이렇게 좌선할 수 있다면 부처님께서 인가(印可)하실 것입니다.’
당시 저는 무구칭의 말을 듣고서도 아무 대꾸도 못한 채 묵묵히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저는 무구칭을 뵙고 문병하는 일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러자 세존깨서는 대목련(大目連:대목건련)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무구칭을 찾아가서 문병하여라.”
대목련이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도 무구칭을 뵙고 문병하는 일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예전에 저는 광엄성에 들어가 거리에서 거사들을 위해 법의 요체[法要]를 설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무구칭이 그 장소에 와서 제 발에 절을 하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대목련이여, 재가의 거사[白衣居士]를 위해 법을 설할 때는 존자(尊者)처럼 설해서는 안 됩니다. 무릇 법을 설할 때는 반드시 법대로 설해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무구칭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법대로 설하는 것입니까?’
무구칭은 즉시 이렇게 답했습니다.
‘법에는 나[我]가 없으니 나라는 티끌[我垢]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며, 법에는 정이 없으니 정(情)의 티끌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며, 법에는 수명이 없으니 생사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며, 법에는 보특가라(補特伽羅:有情)가 없으니 먼저와 나중이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법은 늘 고요하니 모든 모습을 멸했기 때문이며, 법은 탐욕과 집착을 벗어났으니 반연(攀緣)하는 바가 없기 때문이며, 법에는 문자가 없으니 언어가 끊어졌기 때문이며, 법은 표현할 길이 없으니 일체 사념의 물결을 멀리 벗어났기 때문이며, 법은 일체 모든 것에 두루 현현하니 허공과 같기 때문이며, 법은 드러낼 것도 없고[無顯], 형상도 없고[無形], 모습도 없는[無相] 것이니 일체의 행하고 움직이는 일을 멀리 벗어났기 때문이며, 법에는 내 것[我所]이 없으니 내 것이라는 관념을벗어났기 때문이며, 법은 요달하고 구별함이 없으니 마음과 의식[心識]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며, 법에는 비교함이 없으니 상대가 없기 때문이며, 법은 인(因)에 속하지 않으니 연(緣)에 연루되지 않기 때문이며, 법은 법계(法界)와 동일하니 일체의 참법계[眞法界]에 평등하게 들어가기 때문이며, 법은 진여[如]를 따르니 따르는 대상이 없기 때문이며, 법은 실제의 경계[實際]에 머무니 궁극적으로는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며, 법에는 흔들림이 없으니 여섯 경계[六境]에 의존하지 않기 때문이며, 법에는 가고 옴[去來]이 없으니 머무는 바가 없기 때문이며, 법은 공(空)에 순응하고 무상(無相)을 따르고 무원(無願)에 응하니일체의 늘어나고 줄어드는 사념에서 멀리 벗어났기 때문이며, 법에는 취하고 버림이 없으니 생멸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며, 법에는 갈무리하는 근본 의식도 없으니 일체의 눈ㆍ귀ㆍ코ㆍ혀ㆍ몸ㆍ뜻의 범주를 초월했기 때문이며, 법에는 높고 낮음이 없으니 늘 부동(不動)에 머무르기 때문이며, 법은 분별에서 나온 어떤 행실도 벗어났으니 모든 쓸데없는 논쟁을 절대적으로 끊었기 때문입니다.
자, 대목련이여, 법상(法相)이 이러하니 어떻게 설할 수 있겠습니까? 법을 설한다는 것은 일체가 모두 늘어나고 줄어드는 것이며, 그 법을 듣는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모두 늘어나고 줄어드는 것입니다. 만약 이곳[是處]이라면 늘어남도 없고 줄어듦도 없으며, 이곳에 즉(卽)한다면 도무지 설할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고 요달하고 구별하는 것도 없습니다. 존자 목련이여, 비유하자면 요술쟁이[幻士]가 요술로 만들어진 자[幻化者]에게 모든 법을 설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마음에 입각해야 비로소 법을 설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반드시 일체 중생의 근기의 성향이 다르다는 걸 잘 알아야 합니다. 오묘한 지혜의 눈으로 걸림 없이 살펴서 대자비를 나타내고, 대승을 찬탄하여 설해서 부처님의 은혜를 갚을 걸 생각하며, 의요(意樂)가 청정하여 법의 표현들을 능숙히 함으로써 삼보의 종성이 영원토록 끊이지 않게 해야 비로소 법을 설하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저 대거사 무구칭이 이렇게 법을 설하자 그곳에 모인 사람들 중 8백의 거사가 모두 무상정등각의 마음을 일으켰습니다. 당시 저는 뭐라고 변명할 수가 없어 잠자코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저는 그를 찾아가서 문병하는 일을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자 세존께서는 가섭파(迦葉波:대가섭)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무구칭을 찾아가 문병하여라.”
대가섭파가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는 무구칭을 찾아가 문병하는 일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예전에 저는 광엄성 내의 가난한 마을을 돌면서 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무구칭이 제가 있는 곳에 와서 제 발에 절을 하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대가섭이여, 자비심이 있으면서도 평등하게 행하지를 못하시는군요. 부잣집을 피해 가난한 집만 걸식하다니요? 존자 가섭이여, 일체가 모두 평등하다는 법에 입각해서 마땅히 차례대로 걸식을 행해야 합니다. 궁극적으로는 먹지 않기[不食] 위해 걸식해야 하며, 사람들의 먹는 데 대한 집착을 없애고 싶기 때문에 걸식해야 하며, 남이 베푸는 음식을 받고자 하기 때문에 걸식해야 합니다. 마을에 들어갈 때는 마을이 텅 비어 있다는 생각으로 들어가고 그러면서도 남자와 여자, 어른과 아이를 성숙시키기 위해 모든 성읍(城邑)을 들어가야 하고, 또 부처님의 집을 방문하는 것처럼 들어가야 합니다. 걸식하는 집에 가서는 받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그 음식을 마땅히 받아야 하고, 보이는 빛깔은 장님이 보는 것처럼 보아야 하고, 들리는 소리는 메아리처럼 들어야 하고, 맡는 냄새는 바람을 냄새 맡듯 해야 하고, 음식의 맛은 분별하지 않아야 하고, 감촉을 지각하는 것은 지혜로 증득한 듯해야 합니다. 모든 법은 환상과 같아서 자체의 고유한 성품[自性]도 없고 그렇다고 다른 별개의 성품[他性]도 없으며, 치열하게 불타는 것도 없고 적멸한 것도 없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존자 가섭이여, 여덟 가지 삿됨[邪]을 버리지 않고 여덟 가지 해탈에 들어갈 수만 있다면, 그 여덟 가지 삿됨의 평등성을 갖고 올바른 평등성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또 한 그릇 음식을 모든 중생에게 베풀면서 모든 부처님과 성현들에게도 공양할 수 있다면, 그때 비로소 나 자신도 먹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먹는 자는 번뇌에 물들지 않으면서도 번뇌를 벗어나지 않으며, 선정에 들지 않으면서도 선정에서 나오지 않고, 생사에 머물지 않으면서도 열반에 머물지 않으니 이래야만 먹을 수 있는 것입니다.
존자의 걸식에 음식을 베푸는 사람들은 작은 과보도 없고 큰 과보도 없으며, 이익됨도 없고 손해됨도 없으니, 이는 바로 부처의 길[佛趣]로 들어가는 것이며 성문의 길로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존자 가섭이여, 만약 이렇게 음식을 먹을 수만 있다면 남이 베푸는 음식을 헛되이 받아먹는 것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당시 저는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라서 그 즉시 모든 보살들에 대해 깊이 공경하는 마음을 일으켰습니다. 정말 뛰어났습니다. 세존이시여, 세속 선비의 변재와 지혜가 이와 같았습니다. 지혜 있는 사람이 그의 설법을 듣는다면 누구인들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일으키지 않겠습니까? 저도 그때부터 중생에게 성문승의 길이나 독각승의 길 따위를 권하지 않고 오직 마음을 일으켜 무상정등보리를 구하기를 가르쳤습니다. 이 때문에 저는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일을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세존께서는 다시 대선현(大善現: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무구칭을 찾아보고 문병하여라.”
대선현이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는 무구칭을 찾아가 문병하는 일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예전에 저는 광엄성 안에 들어가 걸식을 행하다가 그의 집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무구칭은 저에게 예의를 표하고 제 밥그릇에다 맛있는 음식을 가득 채워 주면서 말했습니다.
‘존자 선현이여, 이 음식에 대한 평등성으로 일체 만법의 평등성에 들어갈 수 있다면, 또 일체 만법의 평등성으로 모든 부처님의 평등성에 들어갈 수 있다면 이 음식을 먹어도 좋습니다.
존자 선현이여, 탐냄ㆍ성냄ㆍ어리석음을 끊지 않으면서도 그런 것들과 함께 하지 않을 수 있다면, 살가야견(薩迦耶見)을 무너뜨리지 않고서도 단 하나의 평등한 길[一趣道]에 들어갈 수 있다면, 무명(無明)과 아울러 삶에 대한 갈망을 멸하지 않고서도 슬기의 광명을 일으켜 해탈을 이룰 수 있다면, 5무간업(無間業)의 평등한 법성(法性)으로 해탈의 평등한 법성으로 들어가서 해탈도 없고 속박도 없다면, 4제(諦)를 보지는 않았으나 진리를 보지 않은 것도 아니라면, 과보를 성취하지 않았으나 과위를 성취하지 않은 것도 아니라면, 범인[異生]이 아니지만 범인의 법을 여읜 것도 아니라면, 성인이 아니지만 성인 아님도 아니라면, 일체의 법을 성취하면서도 모든 법상(法想)에서 벗어나 있다면 이 음식을 먹어도 좋습니다.
존자 선현이여, 그대가 부처님을 보지도 않고 법을 듣지도 않으며 승가를 섬기지도 않으면서, 동시에 저 외도(外道)의 여섯 스승인 만가섭파(滿迦葉波:프라나 카샤파)ㆍ말살갈리구사리자(末薩羯璃瞿舍離子:마칼리 고살라)ㆍ상폐다자(想吠多子:산자야 벨라티풋타)ㆍ무승발(無勝髮:파쿠다 카짜야나)ㆍ알봉가연나(褐犎迦衍那:아자타 케사캄발리)ㆍ이계친자(離繫親子:니간타 나마풋타) 등을 그대의 스승으로 삼아 그들을 의지해 출가해서 그 여섯 스승이 떨어진 곳에 존자 역시 떨어질 수 있다면, 이 음식을 먹어도 좋습니다.
존자 선현이여, 모든 온갖 잘못된 소견의 길에 빠져 있으면서도 양극단이나 중도의 길을 발견하지 않는다면, 8난처[無暇]에 묶여 있으면서도 유리한 조건[有暇]을 구하지 않는다면, 온갖 오염된 욕망과 어울리면서도 청정함을 성취하지 않는다면, 모든 중생이 얻는 번뇌가 일어나지 않게 하는 지혜[無諍:아라나]를 존자 역시 얻지만 그것을 청정한 복전이라 이름붙이지 않는다면, 그대에게 음식을 보시한 사람들이 여전히 3악도(惡道)에 떨어진다면, 존자를 온갖 마군과 함께 손잡고 모든 번뇌를 반려로 삼는다고 여긴다면, 일체 번뇌의 자성이 곧 존자의 자성이라면, 모든 중생에 대해 원망하고 해치는 감정을 갖는다면, 모든 부처님을 경멸한다면,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을 비방한다면, 승가에 의존하지 않는다면, 마지막으로 궁극의 열반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이 음식을 먹어도 좋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때 저는 무구칭의 말을 듣고서 무엇을 어찌해야 좋을지 앞이 캄캄해 방향감각을 잃었습니다.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했고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도 몰랐습니다. 밥그릇을 버려둔 채 그 집을 나오려고 하자 무구칭이 제게 말했습니다.
‘존자 선현이여, 밥그릇을 가져가시고 내 말을 두려워 마십시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만약 그대에게 이런 말을 한 분이 여래가 만든 사람[化人]이었다면 두려워하겠습니까?’
제가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자 무구칭이 다시 말했습니다.
‘일체 만법의 성품과 모양은 다 허깨비 같은 것입니다. 일체 유정과 모든 언설의 성품과 모양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모든 지혜 있는 사람이 문자에 대해 집착하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는 이유입니다. 왜냐하면 일체의 언설이 모두 성품과 모양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이 문자 아닌 것이 바로 해탈입니다. 이 해탈의 모습이 바로 일체 만법입니다.’
세존이시여, 저 대거사인 무구칭이 이 법을 설하자 2만 명의 천자(天子)가 번뇌의 어둠과 욕망의 오염에서 벗어나 일체 만법에 대한 법안(法眼)의 청정함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500명의 천자는 순법인(順法忍)을 터득했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묵묵히 할 말을 잃어버려 대답하질 못했습니다. 이 때문에 저는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일을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세존께서 다시 만자자(滿慈子:부루나)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무구칭을 찾아가 문병하여라.”
만자자가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는 무구칭을 찾아가 문병하는 일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예전에 저는 큰 숲 속에서 처음 배우는 비구들을 위해 법을 설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무구칭이 그곳에 와서 제 발에 절을 하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자자여, 먼저 선정에 들어 비구들의 마음을 관찰하고 난 다음에 그들을 위해 법을 설하십시오. 더러운 음식을 보배 그릇에 담지 마십시오. 반드시 비구들의 마음이 어딜 지향하고 있는지 먼저 확실히 알아야 할 것이니, 값으로 따질 수도 없는 폐유리 보배[吠琉璃寶:사파이어 보석]를 깨지기 쉬운 유리구슬[水精珠]과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존자 만자자여, 모든 중생들 근기의 차별성을 살피지 않고, 아무에게나 보잘것없는 근기가 수용하는 법을 주어선 안 됩니다. 저들 스스로는 상처가 없으니 그대가 상처를 주지 마십시오. 대도(大道)를 행하고자 한다면 작은 길을 제시하지 마십시오. 햇빛을 저 반딧불과 비교하지 마십시오. 큰 바다를 소 발자국 안에 넣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수미산을 겨자씨 안에 넣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큰 사자후를 들짐승들의 울음소리와 함께 취급하지 마십시오.
존자 만자자여, 이 비구들은 전에는 대승의 마음을 내었는데 최근에 와서 보리를 기원하다가 그 마음을 잊었을 뿐입니다. 그러니 어찌 성문승의 법을 보여 주겠습니까? 내가 성문들의 지혜를 살펴보니 미천하기가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장님 이상으로 캄캄해서 대승이 없습니다. 그들은 중생의 근기와 지혜는 관찰해도 그들 근기의 날카롭고 무딤을 분별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무구칭은 이 같은 뛰어난 삼매에 들어가서 모든 비구들이 한량없는 숙세(宿世:전생)의 차별을 기억해 낼 수 있도록 했습니다. 즉, 그들은 과거 500명의 부처님의 처소에서 모든 선근을 심고 한량없이 뛰어난 공덕을 쌓아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의 마음으로 회향했습니다. 비구들이 숙세의 일을 모두 기억하자 보리를 구하는 마음이 다시 현재에 드러났습니다. 그들은 즉시 그 대사의 발에 머리 숙여 절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무구칭은 법을 설하는 것을 인연으로 그들이 무상정등보리의 마음에서 다시는 물러나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세존이시여, 당시 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성문승들은 남들의 생각과 근기의 성향을 알지 못하니, 여래께 말씀드리지 않고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결코 법을 설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 생각한 이유는 성문승들은 중생의 근기의 높고 낮음을 잘 알아내지도 못하고, 부처님이신 세존처럼 늘 선정 상태에 있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저는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일을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세존께서 마하가다연나(摩訶迦多衍那:마하가전연)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무구칭을 찾아가 문병하여라.”
가다연나가 말씀드렸다.
“저는 무구칭을 찾아가 문병하는 일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예전에 부처님께서는 비구들을 위해 법을 설하신 뒤 선정에 들었습니다. 저는 세존께서 선정에 든 바로 직후 세존께서 가르친 내용을 분별하고 결택(決擇)해서 이건 무상(無常)의 뜻이고, 이건 고(苦)의 뜻이고, 이건 공(空)의 뜻이고, 이건 무아(無我)의 뜻이고, 이건 적멸(寂滅)의 뜻이라고 비구들에게 일러줬습니다. 그때 무구칭이 그 장소에 와서 제 발에 절을 하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대존자 가다연나여, 생멸하고 분별하는 마음으로 실상법(實相法)을 설하지 마십시오. 왜 그렇겠습니까? 모든 법은 궁극적으로는 과거에 생긴 것[已生]도 아니며, 현재 생기고 있는 것[今生]도 아니며, 미래에 생길 것[當生]도 아니며, 또 과거에 멸한 것[已滅]도 아니며, 현재 멸하고 있는 것[今滅]도 아니며, 미래에 멸할 것[當滅]도 아니기 때문이니, 이것이 바로 무상의 뜻입니다. 5온(蘊)의 본성이 궁극적으로는 공(空)하다는 사실을 통달하면 결국 말미암아 일어나지[由起] 않기 때문이니, 이것이 바로 고의 뜻입니다. 일체 만법이 궁극적으로는 고정적 실체[所有]가 없기 때문이니, 이것이 바로 공의 뜻입니다. 나[我]와 나 없음[無我]이 둘 아님을 알기 때문이니, 이것이 바로 무아의 뜻입니다. 그 자체의 고유한 성품[自性]도 없고, 그 밖의 다른 종류의 성품[他性]도 없는 것은 불타지도 않으며, 불타지 않는 것은 꺼질 수도 없으니 적정(寂靜)해질 것도 없습니다. 이처럼 꺼질 수도 없는 그것이 절대적인 적정이며 궁극적인 적정이니, 이것이 바로 적정의 진정한 뜻입니다.’
무구칭이 이러한 법을 설하자 그 비구들은 모두 번뇌[漏]가 소멸되면서마음이 해탈하였습니다. 세존이시여, 당시 저는 묵묵히 있으면서 대답하질 못했습니다. 이 때문에 저는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일을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세존께서는 대무멸(大無滅:아나율)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무구칭을 찾아가 문병하여라.”
대무멸이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는 무구칭을 찾아가 문병하는 일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예전에 저는 큰 숲 속의 한곳에서 경행(經行)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엄정(嚴淨)이라는 이름을 가진 범천왕이 1만 명의 범천들과 함께 대광명을 뿌리면서 제가 있는 곳을 찾아와 절을 하면서 물었습니다.
‘존자 대무멸이여, 그대가 터득한 천안(天眼)은 얼마나 볼 수 있습니까?’
저는 그 범천왕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대선(大仙)은 알아야 하오. 나는 이 석가모니부처님의 삼천대천세계를 마치 손바닥 안의 아마락(阿摩洛) 열매처럼 봅니다.’
그때 무구칭이 그곳에 와서 제 발에 절을 하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존자 대무멸이여, 그대가 터득한 천안은 행하는 모습[行相]이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행하는 모습이 없는 것입니까? 만약 행하는 모습이 있다면 외도의 5신통과 같은 것이며, 행하는 모습이 없다면 그것은 무위(無爲)이니 본다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존자께서 터득한 천안이 볼 수 있다는 건 무엇을 말한 것입니까?’
세존이시여, 당시 저는 묵묵히 있으면서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범천들은 무구칭의 설법을 듣고 경이감에 차서 즉시 무구칭에게 예의를 표하며 물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누가 참다운 천안을 얻었습니까?’
무구칭이 말했습니다.
‘부처님이신 세존께서 참다운 천안을 얻으셨습니다. 적정(寂定)을 버리지 않고서도 모든 불국토를 보시는데, 두 가지 상(相)이나 갖가지 상을 짓지 않으십니다.’
이 말을 듣자 그 범천왕과 5백의 권속들은 모두 무상정등각의 마음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무구칭에게 예의를 표하고 홀연히 사라졌습니다. 이 때문에 저는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일을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세존께서 우파리(優波離)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무구칭을 찾아가 문병을 하여라.”
우파리가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는 무구칭을 찾아가 문병하는 일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예전에 계율을 범한 두 비구가 있었는데, 그들은 너무나 부끄러워서 감히 부처님을 찾아가지는 못하고 저를 찾아와 제 발에 절을 하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파리여, 지금 우리 두 사람은 계율을 범했는데 정말 너무나 부끄러워 감히 부처님을 찾아가지 못했습니다. 바라건대 이 불안과 걱정을 없애서 허물을 벗어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저는 즉시 두 비구가 불안과 걱정을 없애고 잘못을 씻도록 바른 법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바른 법으로 권유하고 이끌어서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해 주었습니다. 그때 무구칭이 그곳에 와서 제 발에 절을 하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바리여, 이 두 비구의 죄를 악화시키지 마십시오. 곧바로 그들의 가책하는 마음을 없애버려야지 범한 행위를 갖고 그들의 마음을 흔들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저 죄의 성품은 안에도 머물지 않고 밖으로도 나가지 않으며 둘 사이에도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마음이 오염됐기에 중생이 오염되고, 마음이 청정하기에 중생이 청정한 것입니다. 이처럼 마음이란 것 역시 안에도 머물지 않고 밖으로도 나가지 않고 그 둘 사이에 있지도 않습니다. 마음이 그렇다면 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죄가 또한 그렇다면 모든 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진여[如]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우바리여, 그대 마음은 본래부터 청정해서 해탈되어 있습니다. 이 본래부터 청정한 마음이 오염된 적이 있습니까?’
제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하니, 무구칭이 다시 말했습니다.
‘일체 중생의 마음도 본래 청정해서 일찍이 오염된 적이 없는 것이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우파리여, 만약 사량 분별이 있고 다른 분별도 있다면 번뇌가 있는 것이며, 사량 분별이 없고 다른 분별도 없다면 마음의 본성이 청정한 것입니다. 만약 전도됨이 있다면 번뇌가 있는 것이며, 전도됨이 없다면 마음의 본성이 청정한 것입니다. 만약 자아를 취함이 있다면 번뇌에 물듦이 있는 것이며, 자아를 취함이 없다면 마음의 본성이 청정한 것입니다. 우파리여, 모든 법의 성품은 생멸하면서 머무르지 않는 것이 허깨비 같고 환화(幻化)와 같고 번개와 같고 구름과 같습니다. 일체 만법의 성품은 서로 기다리질 않으며, 나아가 단 일념(一念)이라도 잠시도 머물지 않습니다. 모든 법의 성품은 다 허망하게 보이는 것이 꿈과 같고 불꽃과 같고 건달바성(健達婆城)과 같습니다. 모든 법의 성품은 다 분별심이니, 분별심이 일으킨 영상(影像)은 마치 물속에 달이 비친 것과 같고 거울 속의 영상 같습니다. 이 같은 사실을 잘 아는 것을 계율을 잘 가진다고 하는 것이며, 이 계율을 잘 지켜나가는 것을 조복(調伏)을 잘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때 두 비구는 무구칭의 설법을 듣고 경이에 차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기합니다. 거사여, 이처럼 뛰어난 지혜의 변론은 우파리도 미칠 수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우파리를 계율을 가장 잘 지키는 사람이라고 하셨어도 우파리가 설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즉시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그대들은 그를 단순히 거사라고 생각지 말라. 왜냐하면 여래를 제외하고는 성문이나 그 밖의 보살이라 할지라도 이 대사(大士)의 지혜로운 변론을 당해내질 못하기 때문이다. 대사의 지혜로운 변론은 분명하기가 이 정도로 뛰어나다.’
그러자 두 비구는 즉시 양심의 가책이 없어지면서 모두 무상정등각의 마음을 일으켰습니다. 그들은 무구칭에게 예의를 표하고 다음과 같은 서원을 세웠습니다.
‘모든 중생이 반드시 이 같은 뛰어난 지혜의 변론을 성취하기를 바랍니다.’
당시 저는 묵묵히 있으면서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습니다. 이 때문에 저는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일을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세존께서는 라호라(羅怙羅:라훌라)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무구칭을 찾아가 문병하여라.”
라호라가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는 무구칭을 찾아가 문병하는 일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예전에 이첨비 종족의 여러 청년들이 제가 있는 곳을 찾아와 머리 숙여 절을 하고 제게 물었습니다.
‘라호라여, 그대는 부처님의 아들로서 전륜왕의 지위를 포기하고 출가하여 도를 닦습니다. 출가를 하면 어떤 공덕과 뛰어난 이익이 있습니까?’
저는 법대로 출가의 공덕과 뛰어난 이익에 대해 설했습니다. 그때 무구칭이 그곳에 와서 제 발에 절을 하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라호라여, 출가의 공덕과 뛰어난 이익을 그렇게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출가 자체는 공덕이 없고 뛰어난 이익이 없기 때문입니다. 라호라여, 유위법 안에서는 공덕과 뛰어난 이익이 있다고 설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출가라는 것은 무위법이니, 무위법 안에서는 공덕과 뛰어난 이익이 있다고 설할 수 없습니다. 라호라여, 무릇 출가라는 것은 피(彼)도 없고 차(此)도 없고 중간도 없으니 온갖 잘못된 견해를 멀리 벗어나 있습니다. 출가는 색(色)도 아니고 색 아님도 아니니, 이것이 열반의 길입니다. 지혜로운 자가 칭송하는 것이며, 성인이 수용하는 것이며, 온갖 마군을 항복시키는 것으로서 5취(趣)에서 해방되고, 5안(眼)을 깨끗이 맑히고, 5근(根)을 확고히 세우고, 5력(力)을 기르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더 이상 번뇌함이 없이 모든 악법을 벗어나고, 뭇 외도를 꺾어서 가명(假名)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욕망의 늪에서 벗어나 집착이 없고 섭수함이 없으며, 나와 내 것을 떠나 모든 취(取)함이 없으며, 취하는 것이 전혀 없으니 취함이 이미 끊어졌고, 동요함이 전혀 없으니 동요가 이미 끊어졌고, 자기 마음을 잘 다스리니 남의 마음[他心]도 잘 보호하고, 침묵의 고요함[寂止]을 따르면서도 뛰어난 관찰[勝觀]을 부지런히 닦고, 모든 악을 떠나서 모든 선을 닦습니다. 만약 이렇게 할 수만 있다면 이를 참다운 출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무구칭은 여러 청년들에게 말했습니다.
‘그대들은 이제 이 훌륭히 설한 법의 비나야(毗奈耶:律] 속에서 함께 출가해야 한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선 세상에 나오기 어렵고, 사람 몸 받기 어렵고, 불행을 벗어나기 어렵고, 행운의 복덕을 갖추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자 여러 청년들이 말했습니다.
‘대거사여, 부처님께서는 부모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출가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무구칭이 말했습니다.
‘그대들 청년들이여, 다만 무상정등각의 마음을 일으켜 올바른 행을 부지런히 닦는 것이 바로 출가이며, 구족계를 받아 비구가 되는 것이다.’
그러자 서른두 명의 이첨비 종족 청년들이 무상정등각의 마음을 일으켜 올바른 수행을 닦기를 맹세했습니다. 당시 저는 묵묵히 있으면서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습니다. 이 때문에 저는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일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세존께서 아난다(阿難陀)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무구칭을 찾아가 문병하여라.”
아난다가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는 무구칭을 찾아가 문병하는 일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예전에 세존께서 가벼운 병이 났을 때 우유를 드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새벽에 평상복을 입고 밥그릇을 들고 나와 광엄성 안의 바라문 집을 찾아가서 그 집 문 앞에 서서 우유를 구걸하였습니다.
그때 무구칭이 그곳에 와서 제 발에 절하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난다여, 어찌하여 새벽부터 밥그릇을 들고 이곳에 서 있습니까?’
제가 말했습니다.
‘거사여, 세존께서 가벼운 병이 나셨는데 우유를 드셔야 하기 때문에 이곳까지 왔습니다.’
그러자 무구칭은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 말씀 하지 마십시오. 존자여, 함부로 그런 말을 해서 세존을 비방해서는 안 됩니다. 쓸데없는 말을 해서 여래를 비방해서는 안 됩니다. 여래의 몸은 금강으로 이루어져서 일체의 악법과 나쁜 습관을 영원히 끊었고, 일체의 선법(善法)을 원만히 성취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무슨 병이 있고, 무슨 번뇌가 있겠습니까?
아난다여, 전륜성왕은 약간의 선근(善根)을 쌓았는데도 병이 없었습니다. 하물며 한량없는 선근을 쌓고 원만한 복덕과 지혜를 성취한 여래는 어떠하겠습니까? 병이 붙으려야 붙을 곳이 없습니다. 아난다여, 잠자코 빨리 돌아가십시오. 그리하여 우리가 더 이상 이런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도록 하십시오. 만약 외도와 바라문들이 그대의 어설픈 말을 들으면 반드시 어찌 스승이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자기 자신의 병도 고칠 수 없으면서 어떻게 남들의 병을 고칠 수 있다고 하는가 하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니 빨리 돌아가 사람들이 듣지 않도록 하십시오.
또 아난다여, 여래의 몸이란 바로 법신(法身)이지 더러움이 섞여 있는 육신이 아닙니다. 세간을 벗어난 초월적인 몸이라 세간법에 물들지 않고, 무루신(無漏身)이라서 더 이상 번뇌의 누출이 없으며, 무위신(無爲身)이라서 모든 유형의 활동[有爲]을 벗어났으며, 모든 수(數)가 영원히 적멸해서 온갖 수를 초월했습니다. 이 같은 부처님의 몸에 병이 있다고 믿는 것은 어리석고 당치 않은 일입니다.’
세존이시여, 당시 저는 무구칭의 말을 듣고 정말 부끄러웠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을 가까이 모시면서 잘못 듣거나 이해한 일이 없었는가 생각했는데, 그때 공중에서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그대 아난다여, 거사의 말이 옳다. 세존의 참다운 몸[眞身]에는 정말로 병이 없다. 다만 여래가 5탁악세(濁惡世)에 출현하신 것은 곤궁하고 고뇌하며 악행을 저지르는 중생들을 교화 인도하기 위하여 그런 일을 보이신 것이다. 가거라. 아난다여, 우유를 얻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마라.’
세존이시여, 당시 저는 무구칭 대사(大士)의 변설을 듣고 어떻게 말해야 할지를 몰라 묵묵히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저는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일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세존께서는 성문의 대제자 500명에게 “그대가 가서 무구칭을 찾아가 문병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성문 제자들은 모두 제각기 겪었던 일[本綠]을 부처님께 고백하고 무구칭 대사를 칭송하면서 이렇게 말씀드렸다.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일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4.보살품(菩薩品)
세존께서는 다시 자씨보살마하살(慈氏菩薩摩訶薩:미륵보살)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무구칭을 찾아가 문병하여라.”
자씨보살이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는 무구칭을 찾아가 문병하는 일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예전에 저는 도사다천왕(覩史多天王:도솔천왕)과 그의 권속들에게 모든 보살마하살들의 불퇴전(不退轉) 경지에 관한 법의 요체를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무구칭이 그곳에 와서 제 발에 절을 하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존자 자씨여, 부처님이신 세존께서 당신에게 수기(授記)하시기를, 한 번만 더 생(生)을 거치면 무상정등보리(無上正等菩提)를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생에 수기를 얻은 것입니까? 과거입니까, 미래입니까, 현재입니까? 만약 과거의 생이라면 과거의 생은 이미 사라졌습니다. 미래의 생이라면 미래의 생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현재의 생이라면 현재의 생은 멈춰 있질 않습니다. 세존께서 (그대 비구들이여, 찰나마다 나고 늙고 죽음이 들어 있어서 즉각 소멸하고 태어난다)고 설한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무생(無生)으로 수기를 받은 것입니까? 그러나 무생은 바로 올바른 본성[正性]에 들어가는 것이니, 이 무생의 본성 속에서는 수기가 있지 않으며 정등보리를 증득함도 없습니다. 그러니 자씨보살께서 어떻게 수기를 얻을 수있겠습니까? 진여[如]의 생기[生]에 의거해서 수기를 얻었다고 하겠습니까? 진여의 소멸에 의거해서 수기를 얻었다 하겠습니까? 만약 진여의 생기에 의거해 수기를 얻었다 해도 진여에는 생성이란 것이 없고, 진여의 소멸에 의거해 수기를 얻었다 해도 진여에는 소멸이란 것이 있지 않습니다. 생성도 없고 소멸도 없는 진여의 이법[理] 속에는 수기가 없습니다. 일체 중생이 다 진여이고, 일체의 법도 진여이며, 일체의 성현도 진여입니다. 그리고 자씨보살까지도 진여입니다. 만약 존자 자씨께서 이렇게 수기를 얻었다면 일체의 중생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수기를 얻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여는 상대적으로는 드러나질 않고 갖가지 다른 성품으로도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존자 자씨께서 무상정등보리를 증득한 그 순간에 일체 중생도 무상정등보리를 증득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보리는 일체 모든 중생들도 평등하게 따르는 깨달음이기 때문입니다. 존자 자씨께서 열반에 이르는 그 순간 일체 중생들도 그렇게 열반에 이른 것입니다. 왜냐하면 열반 상태에 있지 않은 중생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진여가 반열반(般涅槃)이 된다고 설하셨습니다. 부처님의 눈으로 살펴보니 일체 모든 중생은 그 본성이 적정한 것이 그대로 열반의 상태라서 진여가 반열반이라고 설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씨여, 그대의 법으로 천자(天子)들을 유혹하지 말 것이며, 그대의 법으로 천자들을 막지 마십시오. 저 보리라는 것은 나아가 구할 것[趣求]도 없으며, 퇴보하여 전락할 것도 없습니다. 존자 자씨여, 이 천자들로 하여금 보리를 분별하는 생각들을 버리도록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보리는 몸으로 증득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마음으로 증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적멸이 보리이니 모든 중생과 일체 만법의 상[法相])이 적멸하기 때문입니다. 증익(增益)하지 않는 것이 보리이니, 일체 반연하는 바가 증익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행하지 않음[不行]이 보리이니, 모든 어리석은 논쟁이나 의도[作意]도 보리 안에서는 행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단절이 보리이니, 모든 잘못된 소견이 다 끊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버리고 떠나는[捨離] 것이 보리이니, 모든 집착을 다 버리고 떠나 있기 때문입니다. 속박을 벗어나는 것이 보리이니, 모든 혼란의 법을 영원히 벗어나 있기 때문입니다. 적정(寂靜)이 보리이니, 모든 분별이 영원히 적멸해 있기 때문입니다. 광대함이 보리이니, 일체의 크나큰 염원[弘願]을 헤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투지 않음이 보리이니, 모든 집착과 모든 논쟁을 멀리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평안히 안정되어 있는 것이 보리이니, 법의 세계[法界]에 머무는 까닭입니다. 따르면서 힘쓰는 것이 보리이니 진여에 따르기 때문입니다. 둘이 아님[不二]이 보리이니 차별법의 특성을 멀리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건립(建立)이 보리이니 실상의 경계 위에 건립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평등이 보리이니 눈과 눈이 보는 빛깔에서부터 뜻과 뜻이 헤아리는 법(法)에 이르기까지 모두 평등한 것이 허공과 같기 때문입니다. 무위가 보리이니 나고 머물고 변하고 소멸하는[生住異滅] 것을 절대적으로 벗어나 있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앎[遍知]이 보리이니 일체 중생의 마음과 행위를 깊이 알기 때문입니다. 틈새가 없는 것[無間]이 보리이니 내부의 6처(處)에 섞여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얽혀들지 않는 것이 보리이니 모든 번뇌와 윤회전생으로 상속되는 습기(習氣)에서 영원히 벗어나 있기 때문입니다. 특별한 처소가 없는 것이 보리이니 진여 속에서는 모든 방향과 처소를 멀리 벗어나 있기 때문입니다. 머물지 않음이 보리이니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이름뿐인 것이 보리이니 이 보리라는 이름은 작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물결 없는 것이 보리이니 모든 취사선택에서 영원히 벗어나 있기 때문입니다. 혼란 없는 것이 보리이니 늘 제 스스로 고요하기 때문입니다. 참된 고요함이 보리이니 본성이 청정하기 때문입니다. 명료히 드러나는 것이 보리이니 자기 본성에 섞여서 물드는 법[雜染]이 없기 때문입니다. 취하지 않는 것이 보리이니 반연(攀緣)을 벗어나 있기 때문입니다. 차별성이 없는 것이 보리이니 모든 법의 평등한 성품을 따르면서 깨닫기 때문입니다. 비유할 수 없는 것이 보리이니 모든 비유를 영원히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미묘함이 보리이니 이해하기가 지극히 어렵기 때문입니다. 두루 행함[遍行]이 보리이니 자성이 두루한 것이 허공과 같기 때문입니다. 지극히 높은 절정[至頂]이 보리이니 모든 법의 으뜸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오염이 없는 것이 보리이니 일체의 세간법으로는 오염시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보리는 몸으로 증득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마음으로 증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저 무구칭 대거사가 이러한 법을 설하자 200명의 천자들이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었습니다. 당시 저는 묵묵히 있었을 뿐 대답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저는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일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세존께서 광엄(光嚴) 동자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무구칭을 찾아가 문병하여라.”
광엄 동자가 여쭈었다.
“저는 무구칭을 찾아가 문병하는 일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예전에 저는 광엄성을 나가고 있었는데, 그때 무구칭은 그 성을 막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저는 절을 하고 나서 물었습니다.
‘거사여, 어디서 오십니까?’
무구칭이 제게 대답했습니다.
‘오묘한 보리[妙菩提]로부터 옵니다.’
제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거사여, 오묘한 보리는 어느 곳입니까?’
무구칭이 즉시 대답했습니다.
‘순박하고 솔직한 의요(意樂)가 오묘한 보리이니, 그러한 의요에는 거짓이 없기 때문입니다. 가행(加行)을 일으키는 것이 오묘한 보리이니, 모든 시설한 것을 성취하기 때문입니다. 의요(意樂)가 더욱 높아지는 것이 오묘한 보리이니, 궁극적으로 뛰어난 법을 성취하기 때문입니다. 대보리심이 오묘한 보리이니, 어떤 법도 잊거나 잃어버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청정한 보시가 오묘한 보리이니, 세간의 이숙과(異熟果)를 바라지 않기 때문입니다. 청정한 계율을 굳게 지키는 것이 오묘한 보리이니, 모든 소원이 원만히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인욕과 유화함이 오묘한 보리이니, 모든 중생에 대해 성내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용맹스럽게 정진하는 것이 오묘한 보리이니, 맹렬하게 부지런히 닦아 게으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요한 선정[靜慮]이 오묘한 보리이니, 그 마음이 조화로워 견디어 내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뛰어난 반야가 오묘한 보리이니, 모든 법의 성품과 모양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자(慈)가 오묘한 보리이니, 모든 중생에 대해 마음이 평등하기 때문입니다. 비(悲)가 오묘한 보리이니, 온갖 고통을 참고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희(喜)가 오묘한 보리이니, 늘 법의 뜰[法苑]에서 즐거움을 누리기 때문입니다. 사(捨)가 오묘한 보리이니, 일체의 애착과 성냄 등을 영원히 끊기 때문입니다. 신통이 오묘한 보리이니, 6신통을 갖췄기 때문입니다. 해탈이 오묘한 보리이니, 분별의 활동을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방편이 오묘한 보리이니, 중생을 성숙시키기 때문입니다. 사(事)를 섭수하는 것이 오묘한 보리이니, 모든 중생을 섭수하기 때문입니다. 많이 듣는 것[多聞]이 오묘한 보리이니, 진실한 행(行)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조복하는 것이 오묘한 보리이니, 이치대로 관찰하기 때문입니다. 37종의 보리분법(菩提分法)이 오묘한 보리이니, 일체의 유위법을 버리기 때문입니다. 일체의 참된 진리가 오묘한 보리이니, 모든 중생을 기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12연기가 오묘한 보리이니, 무명(無明)이 다하지 않고 나아가 늙음과 죽음ㆍ근심ㆍ고통ㆍ번뇌 등도 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든 번뇌를 지식(止息)시키는 것이 오묘한 보리이니, 참된 법의 성품을 완벽히 밝혀내 증득하기 때문입니다. 일체 중생이 오묘한 보리이니, 모두 무아(無我)로써 자기의 성품을 삼기 때문입니다. 일체 모든 법이 오묘한 보리이니, 모든 것의 본성이 공(空)함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마군과 원수를 항복받는 것이 오묘한 보리이니, 어떤 마군이나 원수가 날뛰어도 흔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삼계를 여의지 않는 것이 오묘한 보리이니, 일체의 취(趣)를 발하는 일을 멀리 여의었기 때문입니다. 대사자후가 오묘한 보리이니, 두려움 없이 능히 잘 결택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의 10력(力)ㆍ4무외(無畏)ㆍ18불공법(不共法)이 오묘한 보리이니, 널리 일체에 흠잡거나 싫증냄이 없기 때문입니다. 3명(明)이 거울처럼 비치는 것이 오묘한 보리이니, 모든 번뇌를 벗어나 궁극적인 지혜[究竟無餘智]를 얻기 때문입니다. 한 찰나의 마음으로 모든 법의 궁극의 경지를 깨닫는 것이 오묘한 보리이니, 일체지지(一切智智)를 원만히 증득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선남자여, 만약 보살들이 진실한 발기[眞實發起]를 구족하게 상응했다면, 바라밀다를 구족해서 상응했다면, 중생을 성숙시키는 힘을 구족해서 상응했다면, 일체의 선근을 구족해서 상응했다면, 정법을 수용하는 것을 구족해서 상응했다면, 여래를 공양하는 것을 구족해서 상응했다면, 가고 오고 나가고 멈추고 발을 들었다 내리는 등의 모든 행동거지가 다 오묘한 보리
로부터 오는 것이고, 일체가 다 모든 부처님 법으로부터 오는 것이라서 이러한 보살들은 모든 부처님의 오묘한 법에 편안히 안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저 대거사가 이렇게 법을 설하자 천자 500명이 모두 무상정등각의 마음을 일으켰습니다. 당시 저는 묵묵히 있으면서 대꾸하질 못했습니다. 이 때문에 저는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일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세존께서 지세(持世)보살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무구칭을 찾아가 문병하여라.”
지세보살이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는 무구칭을 찾아가 문병하는 일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예전에 제가 집에 있을 때, 악마 파순이 1만 2천 명의 천녀들을 데리고 제석천왕의 모습으로 가장한 채 풍악을 울리고 노래를 하면서 제가 있는 곳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는 같이 온 권속들과 함께 제 발에 절을 하고, 모든 천상의 즐거움으로 저에게 공양한 뒤, 합장 공경하고서 한쪽에 서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진짜 제석천왕인 줄 알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서 오시오. 교시가(憍尸迦)여, 비록 복이 있더라도 마땅히 스스로 자만하지 말고 반드시 욕망의 쾌락은 모두 무상한 것이라고 부지런히 관찰해야 하며, 몸[身]과 목숨[命]과 재물[財] 속에서도 부지런히 닦아 익혀서 견실한 법을 밝혀야 합니다.’
그러자 파순이 제게 말했습니다.
‘대정사(大正士)여, 여기에 있는 1만 2천 명의 천녀들을 받아들여 곁에서 공양하고 시중들게 하십시오.’
제가 대답했습니다.
‘그만두시오. 교시가여, 그런 법답지 않은 일을 우리 사문인 불자에게 베풀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일은 내게는 온당치 않은 것이오.’
제가 말을 채 끝내지도 않았는데 무구칭이 와서 제 발에 절을 하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제석천왕이 아닙니다. 악마 파순으로 그대를 놀려 주려고 온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무구칭은 악마에게 말했습니다.
‘그대는 이 천녀들을 내게 보시해도 좋다. 나는 재가(在家)에 있는 속인[白衣]으로서 사문인 불자가 아니니 받아도 된다.’
악마 파순은 놀랍고 두려우며 무구칭이 자기를 괴롭히지 않을까 염려해서 모습을 숨겨 사라지려고 했지만 무구칭의 신통력이 그를 붙들자 숨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갖고 있는 신통력과 온갖 방편을 다 썼지만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공중에서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그대 악마 파순이여, 천녀들을 이 거사에게 보시해야 천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악마 파순은 두려운 나머지 고개를 끄덕이면서 천녀들을 무구칭에게 주었습니다. 그러자 무구칭이 천녀들에게 말했습니다.
‘악마 파순은 그대들을 내게 주었다. 이제 여러 자매들은 무상정등각의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 그리하면 그대들의 근기에 따라 차례대로 성숙해 나가는 오묘한 보리의 법을 하나하나 설해서 그대들을 올바르고 평등한 보리로 나아가게 하리라.’
그리고는 다시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매들은 이미 무상정등각의 마음을 일으켰다. 이젠 큰 법의 동산의 즐거움[大法苑樂]을 스스로 즐길 수 있으니, 다시는 5욕(欲)의 쾌락을 즐기지 말라.’
천녀들이 말했습니다.
‘대거사여, 큰 법의 동산의 즐거움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무구칭이 말했습니다.
‘큰 법의 동산의 즐거움이란 모든 부처님의 파괴되지 않는 청정한 즐거움을 말한다. 또 늘 정법(正法)을 듣는 즐거움이며, 화합 대중[僧伽]을 부지런히 공경하고 섬기는 즐거움이며, 삼계를 영원히 벗어나는 즐거움이며, 어떤 조건[緣]에도 의지하거나 머물지 않는 즐거움이며, 5온(蘊)의 무상함이 마치 원수와 같다고 관찰하는 즐거움이며, 18계(界)를 비어 있는 독사와 같다고 전도됨 없이 관찰하는 즐거움이며, 12처(處)를 비어 있는 마을처럼 명확히 관찰하는 즐거움이며, 보리심을 늘 굳게 수호하는 즐거움이며, 모든 중생을 이롭게 하는 즐거움이며, 어른들을 부지런히 모시는 즐거움이며, 보시를 하면서 탐욕을 떠나는 즐거움이며, 청정한 계율을 지켜서 오만하고 나태함이 없는 즐거움이며, 인욕하면서 순종과 화합하는 즐거움이며, 정진을 통해 선근을 기르는 즐거움이며, 선정 중에는 흔들림이 없음을 아는 즐거움이며, 반야를 통해 미혹을 벗어나 명철해지는 즐거움이며, 보리에서는 광대하고 묘한 즐거움이며, 뭇 마군을 꺾을 수 있는 즐거움이며, 모든 번뇌를 능히 두루 아는 즐거움이며, 모든 불국토를 두루 닦아서 다스리는 즐거움이며, 상서로운 상호로 장엄하기 위해 온갖 공덕을 쌓는 즐거움이며, 복과 지혜의 두 자량(資糧)을 올바로 닦아 익히는 즐거움이며, 오묘한 보리를 모두 장엄하는 즐거움이며, 깊고 심오한 법을 들을 때 놀라거나 두려움이 없는 즐거움이며, 3해탈문을 올바로 관찰하는 즐거움이며, 열반을 올바로 반연하는 즐거움이며, 시기가 맞지 않으면 관찰하지 않는 즐거움이며, 같은 부류[同類]끼리는 그 공덕을 생각해서 늘 가까이하는 즐거움이며, 다른 부류[異類]에 대해선 잘못을 보지 않고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않는 즐거움이며, 모든 착한 벗을 가까이하기를 즐기는 즐거움이며, 나쁜 벗은 잘 보호해 주고 싶은 즐거움이며, 교묘한 방편을 잘 받아들이는 즐거움이며, 모든 법을 기쁘게 믿는 즐거움이며, 태만하지 않고 일체의 보리분법을 닦아 익히는 것이 최상의 오묘한 즐거움이다. 자매들이여, 이런 것들을 보살의 큰 법의 동산의 즐거움이라고 한다. 모든 대보살들은 항상 그 가운데서 머문다. 그대들도 이런 것들을 즐겨야지 5욕의 쾌락을 즐겨서는 안 된다.’
그러자 악마 파순이 천녀들에게 말했습니다.
‘자, 이리 와서 함께 천궁으로 돌아가자.’
천녀들이 대답했습니다.
‘악마여, 당신은 떠나시오. 우리는 절대로 당신과 함께 돌아가지 않겠소. 왜냐하면 당신은 이미 우리들을 이 거사에게 드렸기 때문이오. 그러니 어떻게 다시 함께 돌아가자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우리도 이제는 법의 동산의 즐거움을 즐길 것이며 5욕의 쾌락을 즐기지는 않습니다. 당신 혼자 돌아가시오.’
그러자 악마 파순이 무구칭에게 말했습니다.
‘대거사여, 이 천녀들을 놓아 주십시오. 소유하는 마음에 집착하지 않고 은혜를 베푸는 분이 바로 보살마하살입니다.’
무구칭이 말했습니다.
‘내 이미 놓아 주었소. 그대는 데리고 가시오. 그대들은 모든 중생의 법에 대한 염원[法願]을 만족시키도록 하시오.’
그때 천녀들이 무구칭에게 예의를 표하면서 물었습니다.
‘우리 천녀들이 마군의 궁전으로 돌아가는데, 어떻게 수행(修行)하란 말씀을 하십니까?’
무구칭이 말했습니다.
‘여러 자매들은 반드시 알아야 하오. 그대들은 반드시 이 법문을 배워야 합니다.’
천녀들이 다시 물었습니다.
‘무엇을 꺼지지 않는 등불이라고 합니까?’ ‘자매들이여, 비유하자면 등불 하나로 수십만 등불을 붙일 수 있는 것과 같소. 그렇게 되면 어둠이 환하게 밝아져 영원토록 꺼지지 않고 쇠퇴하지도 않을 것이오. 이처럼 자매들이여, 보살 한 분이 백천 구지 나유타 대중에게 무상정등보리를 구하는 마음을 내도록 권유한다면, 이 보살의 보리심은 영원토록 고갈되지 않고 쇠퇴하지도 않을 것이며 오히려 더 발전하고 강화될 것이오. 이처럼 남을 위해 능숙한 방편으로 정법을 널리 설하면 오히려 모든 선법이 발전하고 강화되면서 영원히 고갈되지 않고 쇠퇴하지도 않을 것이오. 자매들이여, 꺼지지 않는 등불이라는 이 오묘한 법문을 반드시 알아야 하며 배워야 하오. 비록 마군의 궁전에 있을지라도 한량없는 천자와 천녀들이 보리심을 일으키도록 권해야 하오. 그래야만 여래의 은혜를 알아 진실하게 갚은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일체의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소.’
이 말을 듣고 천녀들은 무구칭의 발에 공경스럽게 절을 하였습니다. 무구칭이 앞서 악마 파순을 제지했던 신통력을 풀어주자, 파순과 그의 권속들은홀연히 사라져 본래 살던 궁전으로 돌아갔습니다. 세존이시여, 무구칭은 이처럼 자유자재한 신통력과 지혜와 변화무쌍한 언변으로 법을 설하기 때문에 저는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일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세존께서 장자의 아들 소달다(蘇達多)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무구칭을 찾아가 문병하여라.”
소달다가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는 무구칭을 찾아가 문병하는 일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예전에 저는 아버님의 집에서 7일 밤낮 동안 대보시회[大祠會]를 벌여서 모든 사문과 바라문과 외도, 빈궁하고 하천한 외로운 걸인들에게 공양하였습니다. 이 보시회는 7일간 계속되었습니다. 그때 무구칭이 그 모임에 들어와 저의 면전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장자의 아들이여, 무릇 보시회란 그대가 이곳에 벌인 것처럼 해서는 안 됩니다. 그대는 이제 법의 보시회를 마련해야 합니다. 어찌해서 이 같은 재물을 보시하는 모임을 여는 것입니까?’
제가 말했습니다.
‘거사여, 어떤 것을 법을 보시하는 모임이라고 합니까?’
무구칭이 제게 대답했습니다.
‘법 보시는 먼저도 없고 나중도 없이 일시에 모든 중생을 위해 공양하는 것이니, 이를 일러 원만한 법 보시회라고 합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말하는가 하면, 무상보리의 행상(行相)으로 대자(大慈)가 야기[引發]되는 것이며, 모든 중생의 해탈을 위한 행상으로 대비(大悲)가 야기되는 것이며, 모든 중생의 기쁨에 따르는 행상으로 대희(大喜)가 야기되는 것이며, 정법과 지혜를 이해하는 행상으로 대사(大捨)가 야기되는 것이며, 뛰어난 적정(寂靜)과 자기를 다스리는 행상으로 보시바라밀이 야기되는 것이며, 금기를 범하는 중생을 교화하는 행상으로 청정 계율의 바라밀이 야기되는 것이며, 일체법이 무아(無我)라는 행상으로 인욕바라밀이 야기되는 것이며, 몸과 마음을 멀리 벗어나는 행상으로 정진바라밀이 야기되는 것이며, 가장 뛰어난 각지(覺支)의 행상으로 선정바라밀이 야기되는 것이며, 일체지지(一切智智)를 배우는 행상으로 반야바라밀이 야기되는 것이며, 일체 중생을 교화하는 행상으로 공(空)의 수행이 야기되는 것이며, 모든 유위(有爲)를 다스리는 행상으로 무상(無相)을 닦는 것이 야기되는 것이며, 일부러 생(生)을 받는 행상으로 무원(無願)을 닦는 것이 야기되는 것이며, 정법(正法)을 잘 수용하는 행상으로 크나큰 힘[大力]이 야기되는 것이며, 4섭법[攝事]을 잘 닦아 익히는 행상을 통해 생명의 뿌리[命根]가 야기되는 것이며, 일체 중생을 노예나 시종이 공경하고 섬기듯이 하는 행상으로 자만함 없음이 야기되는 것이며, 견실하지 못한 것을 견실한 것으로 바꾸는 행상으로 견고한 몸과 목숨과 재물을 증득하는 것이 야기되는 것이며, 여섯 가지 염(念)을 따르는 행상으로 정념(正念)이 야기되는 것이며, 청정하고 오묘한 법을 닦는 행상으로 의요(意樂)가 야기되는 것이며, 부지런히 닦아 익혀서 올바르게 행하는 청정한 삶[淨命]이 야기되는 것이며, 청정한 기쁨과 친근함의 행상으로 성현을 가까이 받들어 섬기는 것이 야기되는 것이며, 범속한 자들을 싫어하지 않는 행상으로 조복된 마음[調伏心]이 야기되는 것이며, 청정한 출가의 수행을 잘 하는 행상으로 청정하고 드높은 의요(意樂)가 야기되는 것이며, 늘 중도(中道)를 닦아 익히는 행상으로 능숙한 방편과 배움이 야기되는 것이며, 다투지 않는 법[無諍法]들을 통달하는 행상으로 늘 아란야(阿練若)에서 사는 게 야기되는 것이며, 올바른 부처의 지혜를 구하는 행상으로 좌선[宴坐]이 야기되는 것이며, 일체 중생의 번뇌를 올바로 없애는 행상으로 유가사지(瑜伽師地)의 단계를 잘 닦는 것이 야기되며, 상호를 갖추고 중생을 성숙시키고 청정한 불국토를 장엄하는 행상으로 광대하고 미묘한 복의 자량이 야기되는 것이며, 모든 중생의 마음과 행실을 알아 그에 따라 법을 설하는 행상으로 광대하고 오묘한 지혜의 자량이 야기되는 것이며, 일체 만법에 대해 취하거나 버림 없이 하나의 ‘올바른 이치의 문[正理門]’으로 깨달아 들어가는 행상으로 광대하고 오묘한 슬기[慧]의 자량이 야기되는 것이며, 일체의 번뇌와 습기, 그리고 온갖 불선법(不善法)의 장애를 끊는 행상으로 일체의 선법을 증득함이 야기되는 것이며, 일체지지와 모든 선법의 자량을 깨달아 가는 행상으로 닦아온 모든 보리분법을 증명해 나가는 것이 야기되는 것입니다.
그대 선남자들이여, 이런 것들을 법보시라고 하는 것입니다. 만약 보살들이 이러한 법 보시회에 안주한다면 최고의 보시자[大施主]라고 할 것이니, 세간의 천신과 인간들로부터 널리 공양을 받을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저 대거사가 이 법을 설하자 200명의 바라문이 무상정등각의 마음을 일으켰습니다. 놀라움에 가득한 저 역시 청정한 기쁨이 일어나 대사의 발에 공경스럽게 절을 하면서 10만금의 가치가 있는 보석 목걸이를 풀어서 은근히 바쳤습니다. 그러나 대거사는 받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말했습니다.
‘대사여, 저를 가엾이 여겨 꼭 받아 주십시오. 만약 스스로 마음이 내키지 않으신다면 주고 싶은 사람 누구에게나 주십시오.’
그제야 무구칭은 목걸이를 받아서 둘로 나누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이 대보시의 모임 속에서 가장 보기 싫고 빈천한 거지에게 주었고, 또 하나는 저 난승(難勝)여래에게 바쳤습니다. 그리고는 신통력을 사용하여 대중들이 양염(陽焰)세계의 난승여래를 볼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또 난승여래에게 바친 목걸이의 구슬이 난승여래의 머리 위에서 오묘한 보대(寶臺)를 이루는 것을 보게 하였습니다. 그 보대는 사방을 네 대(臺)로 나누어 장식하고 온갖 장엄을 하여 너무나 사랑스러웠습니다. 무구칭은 이 같은 신통변화를 끝내면서 다시 말했습니다.
‘만약 보시를 베푸는 자가 평등한 마음으로 이 모임 속의 가장 하천한 거지라도 여래의 복전(福田)과 같다고 생각하면서 보시한다면, 또 아무런 차별 없이 공평하게 주고 대자대비한 마음으로 널리 보시하되 어떤 과보도 기대하는 마음이 없다면, 이를 원만한 법보시라 합니다.’
그 거지는 무구칭의 신통변화를 보고, 또 그의 설법을 듣고 나서 결코 물러남이 없는 드높은 의요(意樂)를 얻으면서 문득 무상정등각의 마음을 일으켰습니다.
세존이시여, 저 대거사는 이 같은 자유로운 신통변화와 막힘이 없는 언변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저는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일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이와 같이 세존께서는 대보살들 하나하나에게 “무구칭을 찾아가 문병하도록 하라”고 말씀하셨다. 보살들은 제각기 부처님께 자기가 겪었던 인연을 말씀드리면서 무구칭 대사를 찬탄하고 이렇게 말씀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