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대승론(攝大乘論) 02. 중권

섭대승론(攝大乘論) 02. 중권

02. 응지승상(應知勝相) ②

유식(唯識)인데도 불구하고 진과 같이 나타나는 의지를 설하여 의타성(依他性)이라고 한다. 어찌하여 의타가 이루어지며, 무슨 인연을 설하여 의타라고 하는가? 스스로 훈습한 종자로부터 생하기 때문에, 인연에 매여 딸린 것이지 스스로 존재할 수 없다. 생한다 하더라도 한 순간이 지나도록 자재할 수 있는 공능이 없기 때문에 의타라고 이름한다. 만약 분별성이 의타에 의해 실제로 있지 않으면서 차별적 대상[塵]과 같이 나타난다면 어찌하여 분별을 이룬다고 하는가? 어떠한 인연으로 설하여 분별이라고 하는가? 헤아릴 수 없는 상모(相貌)이다. 의식이 분별하여 전도가 생하는 인이기 때문에 분별을 이룬다. 자상이 없이 오직 분별을 보기 때문에 설하여 분별이라고 이름한다. 진실성은 분별성이 영원히 있지 않는 것이 상(相)이 된다고 한다면, 어떻게 진실을 이룬다고 하는가? 어떤 인연을 설하여 진실이라고 이르는가? 없는 것 같으나 그렇지 않기 때문에 진실을 이룬다. 청정한 경계를 성취함으로 해서 모든 선법 가운데 가장 뛰어나기 때문에, 승의(勝義)를 성취하기 때문에 설하여 진실이라고 한다.

또한 만약 분별과 소분별(所分別)이 있다면 분별성이 이루어진다. 이 가운데 무슨 법이 분별이고, 무슨 인식현상[法]이 소분별인가? 무슨 인식현상을 분별성이라고 하는가? 의식이 분별이다. 세 가지 분별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왜냐 하면 이 식은 스스로 언설로 훈습하여 종자가 되며, 또한 모든 식이 언설로 훈습하여 종자가 되므로 따라서 이것이 생한다. 끝없는 분별이 모든 처를 분별함으로 말미암아 단지 분별한다고 이름하므로 설하여 분별이라고 한다.

이 의타는 단지 분별되는 것[所分別]이다. 이 인이 의타성을 이룰 수 있어서 분별되는 것이다. 이 가운데서 분별성이라고 이름한다. 어찌하여 분별로 이 의타성이 만물상과 같다는 것을 헤아려 알 수 있는가? 어떤 경계를 연하는가? 무슨 상모를 집착하는가? 무엇을 관하여 보는가? 어찌하여 연기한다고 하는가? 어떻게 언설한다고 하는가? 어떻게 증익(增益)하는가? 이름 등의 경계로 말미암아, 의타성 가운데서 상을 집착함으로 말미암아서, 결정하고 판단하여 견해를 일으킴으로 말미암아서, 언설을 각관(覺觀)하여 연기함으로 말미암아서, 견 등의 네 가지 언설로 말미암아, 실제로 있지 않는 차별적 대상[塵]이 실제로 있는 것처럼 헤아리는 것을 증익이라고 한다. 이러한 인(因)으로 말미암아 분별할 수 있다.

이 세 가지의 자성은 어떠한가? 다른 것과 다른 것인가, 다르지 않은 것인가? 다르지도 않고 다르지 않지도 않다. 마땅히 이와 같이 설하여야 할 것이다.

의타성을 의타라고 이름하는 다른 정의가 있다. 이것이 분별을 이루는 다른 정의가 있으며, 이것이 진실을 이루는 다른 정의가 있다.

어떤 다른 정의가 있어서 이것을 의타라고 설하는가? 훈습종자로부터 생하여 다른 것에 매여 묶이기 때문이다.

다시 무슨 의미가 있어서 이것이 분별을 이루며, 이 의타성이 분별의 인이 되는가? 분별되는 것이기 때문에 분별을 이룬다.

다시 무슨 의미가 있어서 이것이 진실을 이루며, 이 의타성이 혹은 진실을 이루는가? 분별되는 것과 같이 실제로 이와 같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무슨 의미가 있어서 이 하나의 식으로 말미암아서 모든 여러 가지 식의 상모가 이루어지는가? 본식의 식은 나머지 생기식(生起識)의 갖가지 상모이기 때문이며, 다시 이 상모를 원인으로 하여 생하기 때문이다.

의타성은 몇 가지가 있는가? 간략하게 설하면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훈습종자에 매여 딸린 것이고, 둘째는 정품이나 부정품에 매여 딸리는 것이 성취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이 두 가지 매여 딸림으로 말미암아 설하여 의타성이라고 한다.

분별성에도 역시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자성을 분별함으로 말미암는 것이고, 둘째는 차별을 분별함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진실성도 역시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자성을 성취함이고, 둘째는 청정을 성취함이다. 다시 분별에는 네 가지를 이룸이 있으니, 첫째는 자성을 분별함이고, 둘째는 차별을 분별함이고, 셋째는 지각이 있음이고, 넷째는 지각이 없음이다. 지각이 있음이란 명언(名言)을 요별할 수 있는 중생의 분별이고, 지각이 없음이란 명언을 요별할 수 없는 중생의 분별이다.

또한 다시 분별에 다섯 가지가 있다. 첫째는 이름에 의거해 실체적 대상[義]의 자성을 분별하는 것이다. 비유하건대 이 이름이 이 물(物)을 일컫는 것과 같다. 둘째는 실체적 대상에 의해 이름의 자성을 분별한다. 마치 이 실체적 대상은 이 이름에 속하는 것과 같다. 셋째는 이름에 의해 이름의 자성을 분별함이다. 마치 실체적 대상의 이름을 분별하여 인식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넷째는 실체적 대상에 의해 실체적 대상의 자성을 분별함이다. 마치 명의(名義)를 분별하여 인식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다섯째는 두 가지에 의해 두 가지의 자성을 분별함이다. 마치 이 이름과 이 실체적 대상은 무엇의 실체적 대상이며, 무엇의 이름인가 하는 것과 같다.

모든 분별을 포섭한다면 다시 열 가지가 있다. 첫째는 근본분별이며, 본식을 일컫는다. 둘째는 상의 분별이니, 색 등의 식을 일컫는다. 셋째는 의지와 드러내 보이는 분별이니, 의지가 있는 안 등의 식식을 일컫는다. 넷째는 상이 변이하는 분별이니, 즉 늙음 등의 변이, 괴로움과 즐거움 등을 받아들임, 욕 등의 혹, 원죄와 시절 등의 변이와 지옥 등 그리고 욕계 등의 변이이다. 다섯째는 의지와 드러내 보임이 변이하는 분별이니, 즉 앞에 설하여진 변이와 같이 변이를 일으켜서 분별한다. 여섯째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끌어오는 분별이니, 즉 바르지 않는 법(法 : 교법)의 종류를 듣고, 바른 교법의 종류를 듣는 분별이다. 일곱째는 이치에 맞지 않는 분별이니, 즉 바른 법 밖의 사람이 바르지 않는 법의 종류를 분별하는 것이다. 여덟째는 이치에 맞는 분별이니, 바른 법 속의 사람이 바른 법의 부류를 듣는 분별이다. 아홉째는 결정하여 판단하고 집착하는 분별이니, 이치에 맞지 않는 사유의 종류를 말한다. 신견이 근본이 되어 62견(見)과 더불어 상응하여 분별한다. 열째는 산동(牀)의 분별이니, 보살의 열 가지 분별을 일컫는다. 상이 없는 산동·상이 있는 산동·증익의 산동·손감의 산동·하나라고 집착하는 산동·다르다고 집착하는 산동·공통된다는 산동·다르다는 산동·이름과 같이 실체적 대상을 일으키는 산동·실체적 대상과 같이 이름을 일으키는 산동·이러한 열 가지 산동분별을 대하여 다스리기 위하여 모든 반야바라밀의 가르침 가운데서 불세존께서는 이 열 가지 산동분별을 대하여 다스릴 수 있는 무분별지(無分別智)를 설하셨다.

『반야바라밀경』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반야바라밀경』의 정의를 갖추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어찌하여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한다고 하는가? 사리불이여, 이 보살은 실제로 있으나 보살은 보살이 있다는 것을 보지 않는다. 보살의 명을 보지 않으며, 반야바라밀을 보지 않는다. 행을 보지 않으며, 행하지 않음도 보지 않는다. 색을 보지 않으며, 수(受)·상(想)·행(行)·식(識)도 보지 않는다. 왜냐 하면 색은 자성으로 말미암아서 공하지, 공을 말미암아서 공한 것이 아니다. 이 색은 공하여 색이 아니며, 색이 공과 다르지 않기 때문에 색은 곧 공이며, 공은 곧 색이다. 왜냐 하면 사리불이여, 이것은 단지 이름만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색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은 자성이 생함이 없고 멸함도 없으며, 더러움이 없고 깨끗함도 없다. 거짓으로 세운 이름을 대하여 모든 인식현상을 분별한다. 거짓으로 세운 객(客)인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식현상을 좇아 언설한다. 여여(如如)하게 좇아 언설하며, 이와 같이 집착한다. 이 모든 이름과 같이 보살은 보지 않으니, 만약 보지 않는다면 집착도 생하지 않는다. 색에서부터 식까지를 관함과 같이, 이와 같이 관(觀)을 짓는다. 이 『반야바라밀경』의 문구로 말미암아서 열 가지 분별의 논리를 좇아 따라서 사유하여야 한다.

만약 이러한 다른 의미로 말미암아서 의타성(依他性)이 세 가지 자성이 있음을 이룬다면 이 세 가지 자성은 어떠한가? 이 자성에 세 가지 다름이 있으면서 서로 섞임을 이루지 않으니, 서로 섞인다는 논리가 없다. 이 도리로 말미암아서 이 자성은 의타를 이룬다. 이것으로 말미암아서 분별과 진실을 이루지 않는다. 이 도리로 말미암아서 이 자성이 분별을 이룬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의타와 진실을 이루지 않는다. 이 도리로 말미암아서 이 자성이 진실을 이룬다. 이것을 말미암아서 의타와 분별을 이루지 않는다.

이 의타성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분별성(分別性)으로 말미암아 인식현상[法]과 같이 나타나지만 분별성과 같은 체(體)가 아니다. 이름을 얻기 전에는 실체적 대상[義]에서는 앎[智]을 얻지 못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인식현상의 체는 이름과 하나이며, 곧 이 실체적 대상과는 서로 다르다. 이름이 많기 때문에 만약 이름이 실체적 대상과 하나라고 한다면 이름이 이미 많으니, 실체적 대상도 많아야만 할 것이다. 이러한 의미로 체가 서로 다르다. 이름이 정하여지지 않음으로 해서 체가 서로 섞인다는 이런 정의는 서로 어긋난다. 이 가운데 게송으로 읊는다.

이름에 앞서는 지각[智]이 없으므로, 
이름이 많고 이름이 정하여지지 않음으로 해서 
같은 체, 많은 체, 섞여 있는 체가 서로 어긋남으로 말미암아 
같은 체가 아니라는 정의가 성립한다.



인식현상[法]이 유(有)와 같이 나타남이 없다면 
더러움이 없고 깨끗함이 있다.


따라서 마술에 비유하고 
역시 허공에 비유함으로써 설명한다.

어찌하여 이와 같이 나타나는데 실제로는 있지 않다고 하는가? 의타성의 모든 종류가 없지는 않다. 만약 의타성이 없다면 진실성(眞實性)도 역시 없다. 모든 것이 없다는 것은 성립되지 않는다. 만약 의타성과 진실성이 없다면 곧 염오품(染汚品)과 청정품(淸淨品)이 없다는 과실이 된다. 이 두 가지 성품은 없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으니, 따라서 모든 것이 없지 않다. 이 가운데서 게송으로 읊는다.

만약 의타성이 없다면 
진실성도 역시 없으며, 
곧 항상 염오와 청정이라는 
두 가지 성품이 없다.

모든 불세존께서 대승 가운데 『비불략경(鞞佛略經)』을 설하셨다. 이 경 가운데 “어떻게 분별성을 알아야 하는가? 있지 않는 성품의 종류라고 설명함으로써 이 자성을 마땅히 안다. 어떻게 의타성을 알아야 하는가? 마술, 신기루, 꿈의 영상, 그림자, 메아리, 물 속의 달, 변화를 설함으로 말미암아 그 자성이 이 비유들과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어찌하여 마땅히 진실성을 안다고 하는가? 네 가지 청정한 법을 설명함으로 말미암아 이 자성을 알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네 가지 청정이란 첫째는 이 인식현상이 본래 자성이 청정하므로 여여·공·실제·무상·진실·법계라고 일컫는다. 둘째는 때가 없는 청정이다. 이 인식현상은 모든 객진(客塵)의 장애인 때를 벗어나 떠났다고 말한다. 셋째는 지극하게 얻은 도의 청정이다. 모든 도를 돕는 교법과 모든 바라밀 등이다. 넷째는 도가 생하는 경계의 청정이다. 바르게 설명하여 대승법을 일컫는다. 왜냐 하면 이러한 설명은 청정한 인(因)이기 때문이다. 청정한 법계의 흐름이기 때문에 분별이 아니고 이 네 가지 청정한 인식현상으로 말미암아 의타가 아니다. 모든 청정한 법을 섭지하여 모두 다한다. 이 가운데 게송으로 읊는다.

마술 등은 의타를 드러내고, 
없다고 말한 것은 분별을 드러낸다.


만약 네 가지 청정을 설한다면 
이 설명은 진실에 속한다.



청정은 본성, 
때가 없음, 도(道), 인연으로 말미암는다.


모든 청정한 법은 
네 가지가 모두 섭지하는 품류이다.

무슨 인(因)과 무슨 연(緣)이 의타성인가? 경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다른 허망한 의혹을 제거하기 위하여 의타성에 대해서 마술 등의 비유로 드러내는 바이다. 다른 무엇이 의타성에 대해서 허망한 의심을 생한다고 하는가? 의타성에 대한 모든 설명 가운데 이와 같은 허망한 의심이 있다.

만약 실제로 사물이 없다면 어찌하여 경계를 이룬다고 하는가? 이러한 의문을 해결하기 위하여 마술의 비유를 설한다.

만약 경계가 없다면 심(心)과 심법(心法)은 어떻게 생할 수 있다고 하는가? 이 의문을 해결하기 위하여 신기루의 비유를 설한다.

만약 실제로 대상이 없다면 애착과 애착하지 않음의 수용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하는가? 이러한 의문을 해결하기 위하여 꿈의 영상의 비유를 설한다.

만약 실제로 인식현상이 없다면 선과 악의 두 가지 업과 애착과 애착하지 않음의 과보는 어찌하여 생할 수 있다고 하는가? 이러한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서 거울 그림자[影]의 비유를 설한다.

실제로 인식현상[法]이 없다면 어떻게 여러 가지의 앎(지각)이 생한다고 하는가? 이러한 의문을 해결하기 위하여 그림자의 비유를 설한다.

실제의 인식현상이 없다면 어찌하여 여러 가지 언설이 일어난다고 하는가? 이러한 의문을 해결하기 위하여 메아리의 비유를 설명한다.

만약 실제로 인식현상[法]이 없다면 어떻게 진실한 인식현상을 연하여 정심(定心)의 경계를 이룬다고 하는가? 이러한 의문을 해결하기 위하여 물 속의 달의 비유를 설명한다.

만약 실제로 인식현상이 없다면 어떻게 모든 보살이 마음을 일으켜서 전도된 마음 없이 남을 위하여 이익된 일을 지어 6도(道)에서 생을 받는다고 하는가? 이러한 의문을 해결하기 위하여 변화의 비유를 설한다.

『바라문문경(婆羅門問經)』 가운데서 “세존께서는 무슨 의미로 이와 같이말씀하셨는가? 여래는 생사를 보지 않고 열반도 보지 않는다. 차별이 없다는 의미에서 의타성 가운데서 분별성에 의해 그리고 진실성에 의해 생사가 되고 열반이 된다. 왜냐 하면 이 의타성은 분별의 부분으로 말미암아 생사를 이루고, 진실의 부분으로 말미암아 열반을 이룬다”라고 말씀하셨다.

아비달마수다라(阿毘達磨修多羅) 가운데서 불세존께서 법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 말씀하셨다. 첫째는 염오의 부분이고, 둘째는 청정의 부분이고, 셋째는 염오와 청정의 부분이다. 무슨 의미에서 이 세 부분을 말씀하셨는가? 의타성 가운데서 분별성은 염오의 부분이 되고, 진실성은 청정의 부분이 된다. 의타성은 염오와 청정의 부분이 된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세 부분을 말씀하셨다.

이러한 의미에 대해서 무엇으로 비유하는가? 금이 흙에 감추어져 있다는 것으로 비유한다. 비유하건대 금이 흙에 감추어져 있다는 것 가운데서 세 가지 인식현상이 있음을 보는 것과 같다. 첫째는 지계(地界)이며, 둘째는 금이고, 셋째는 흙이다. 지계 가운데 흙은 있지 않으나 나타난다. 금은 실제로 존재하나 나타나지 않는다. 이 흙을 만약 불로 태워 정련하면 흙은 곧 보이지 않고 금의 모습이 스스로 드러난다. 이 지계는 흙이 나타날 때에는 허망한 상으로 말미암아 나타나고, 금이 나타날 때에는 진실한 상으로 나타난다. 이렇기 때문에 지계에는 두 부분이 있다.

이와 같이 본식이 무분별지인 불로 태워 정련되지 않았을 때에는 이 식은 허망한 분별성으로 말미암아 나타나지만 진실성으로 말미암아 나타나지 않는다. 무분별지인 불로써 태워 정련된다면 이 식은 진실성을 성취함으로써 나타나지, 허망한 분별성으로 말미암아 나타나지 않는다. 이 때문에 허망한 분별인 식, 곧 의타성은 두 가지 구분이 있다. 비유하건대 금이 흙에 감추어진 가운데 있는 지계와 같다. 또한 어느 곳에서는 모든 인식현상[法]이 항상 머문다고 말씀하셨고, 어느 곳에서는 모든 인식현상이 항상하지 않다고 말씀하셨다. 어느 곳에서는 항상하지 않으면서 항상하지 않지도 않다고 설명하셨다. 무슨 의미에 의거해서 항상하다고 말씀하셨는가? 이 의타성은 진실성의 부분으로 말미암아 항상 머무르고, 분별성의 부분으로 말미암아 항상하지 않다. 이 두 가지 자성의 부분으로 말미암아 항상하지 않고 항상하지 않지도않다. 마치 이와 같은 의미로써 항상함과 항상하지 않음이 둘이 아니라고 설명한다. 이와 같이 고통과 즐거움이 둘이 아니고, 선과 악이 둘이 아니며, 공과 공하지 않음이 둘이 아니고, 자아가 있고 자아가 없음이 둘이 아니며, 깨끗함과 깨끗하지 않음이 둘이 아니며, 자성이 있고 자성이 없음이 둘이 아니며, 생함이 있고 생함이 없음이 둘이 아니며, 멸함이 있고 멸함이 없음이 둘이 아니며, 본래 고요하고 맑음과 고요하고 맑지 않음이 둘이 아니며, 본래 열반인 것과 열반이 아닌 것이 둘이 아니며, 생사와 열반이 둘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이것들과 같은 차별로 말미암아서, 모든 부처님과 여래께서는 의미가 비밀한 말씀으로 이 세 가지 자성으로 말미암아 항상함과 항상하지 않음 등을 좇아 분명하게 깨달아서 바르게 설명하셨다. 앞에서와 같이 해석하여 이 가운데 게송으로 읊는다.

법이 실제로 있지 않는 것과 같이, 
그러면서도 그것이 여러 가지로 현현하는 것같이, 
이 인식현상이 아니기 때문에 
둘이 아니라는 의미를 설명한다.



한 부분에 의거하여 설명하므로 
혹은 있다고 하고 혹은 있지 않다고 말하며, 
두 부분에 의거하여 설명하므로 
있지 않으며 있지 않지도 않다고 말한다.



나타남과 같이 있지 않기 때문에 
영구히 없다고 말하며, 
나타남과 같이 실제로 있기 때문에 
없지 않다고 말한다.



스스로의 체가 있지 않음으로 해서 
스스로의 체가 머물지 않기 때문에, 
취함과 같이 있지 않기 때문에 
세 가지 성품은 자성이 없음을 이룬다.



무성(無性)으로 말미암아 
앞의 것이 뒤의 것의 의지가 됨을 이룬다.


생함과 멸함이 없어 본래 깨끗하며, 
스스로의 성품이 열반이다.

또한 다시 네 가지 뜻[四意]과 네 가지 의지[四依]가 있어서 모든 불세존의 가르침을 마땅히 좇아 결정코 요달하여야 할 것이다. 첫째는 평등하다는 뜻이다. 마치 어떤 설명에서와 같이 옛날 그 때에 나는 비바시(毘婆尸)라고 이름하였으며, 오래 전에 이미 성불하였다.

둘째는 다른 때의 의미이다. 비유하자면 다음의 설명과 같다. 만약 사람이 많은 보배로운 부처님의 명호를 염송하여 지니면 결정코 위없는 깨달음에서 다시 물러나 타락하지 않는다. 다시 어떤 가르침에서는 오직 발원함으로 해서 편안하고 즐거운 부처님의 땅에 가서 생을 받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셋째는 다른 정의의 뜻이다. 비유하건대 어떤 설명에서와 같이 항하에 있는 모래알의 수만큼 모든 부처님을 섬김으로써 대승의 가르침의 정의에 있어서 깨달아 마침을 생할 수 있다.

넷째는 중생이 기꺼이 바라는 뜻이다. 비유하건대 여래께서 먼저 한 사람을 위하여 보시를 찬탄했다가 뒤에 돌이켜 비방하는 것과 같다. 보시의 계율과 나머지 수행도 이와 같아서 네 가지 뜻이라고 이름한다.

네 가지 의지란 첫째는 들어가게 하는 의지이다. 비유하건대 대승과 소승 가운데서 불세존께서는 인식 주관과 인식현상의 두 가지와 공통된 상과 개별적인 상인 두 가지 상에 의해 세속제(世俗諦)를 섭지한다고 말씀하셨다. 둘째는 상(相)의 의지이다. 말씀하신 대로 인식현상의 모습 가운데는 반드시 세 가지 모습이 있다. 셋째는 대하여 다스림의 의지이다. 이 가운데 8만 4천의 중생의 번뇌가 행함을 다스리는 것을 드러낸다. 넷째는 뒤집는 의지이다. 이 가운데서 다른 정의를 설명하므로 언어와 문자로써 다른 정의를 드러낸다. 마치 게송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아사리(阿娑離) 사라마다야(娑羅摩多耶) 
비발야사자(毘跋耶斯者) 수치다(修絺多) 
리시야자(離施那者) 승가리다(僧柯履多) 
라반디보디물다마(羅槃底菩提物多摩) 

만약 사람이 대승의 인식현상을 자세히 해석하고자 한다면 세 가지 상으로 간략히 설명하니, 마땅히 이와 같이 해석하여야 한다. 첫째는 연하여 생하는 체의 모습을 널리 이해하여야 한다. 둘째는 인연에 의하여 이미 생기한 모든 현상의 참다운 모습을 자세히 이해하여야 한다. 셋째는 설명하여진 모든 정의가 성립한다는 것을 자세히 이해하여야 한다. 연하여 생하는 체의 모습을 자세히 이해한다는 것은 게송에서 설하여 말씀하신 것과 같다. 훈습(熏習)하여 생하여지는 모든 인식현상, 이것은 저것으로부터 생한다. 이와 같이 과보식과 생기식은 다시 상호간에 원인이 됨으로써 생한다. 인연에 의해 이미 생하여진 모든 인식현상[法]의 실상을 자세히 해석한다. 모든 인식현상이란 생기식이 상이 되어 상이 있으며, 견식(見識)이 자성이 되는 것이다. 다시 모든 인식현상을 의지하여 상이 되며, 분별이 상이 되고, 법이(法爾)가 상이 된다. 이러한 언설로 말미암아 세 가지 자성 가운데서 모든 현상의 체상이 나타날 것이다. 게송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상이 있고 견이 있다는 것으로부터 
마땅히 인식현상의 세 가지 모습을 알아야 할 것이다.

어떻게 이 인식현상의 모습을 해설할 수 있다고 하는가? 분별성은 의타성 가운데 실제로 있는 것이 없고 진실성은 이 가운데 실제로 있다. 이 둘이 있지 않으며 있기 때문에, 얻을 수 없으면서 얻고 보지 못하면서 이미 본다. 진여가 동시에 자연히 이루어진다. 의타성 가운데서 분별성이 없기 때문에 진실성이 있음으로 해서 만약 그것을 보면 이것을 보지 못하고, 만약 그것을 보지 않으면 이것을 본다. 게송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의타 가운데 분별이 없고 
단지 진실이 있기 때문에 
얻지 못하며 얻는다.


이 가운데 둘이 평등하다.

설하여진 모든 정의가 성립함을 자세히 해석한다는 것은 마치 처음에 설하여진 문구와 같이 나머지 구절로 말미암아서도 분별을 드러내 보이니, 혹은 공덕이라는 근거[依止]로 말미암으며, 혹은 사(事)로 인한 실체적 대상[義]이라는 근거로 말미암는다.

공덕의 근거라는 것은 불세존의 공덕인 가장 청정한 지혜를 자세히 설명한다.

둘이 없는 행이며, 상이 없는 인식현상은 수승하게 의행(意行)에 의거하는 것이며, 부처님의 위계[佛住]에 머무르며, 모든 부처님과 평등함을 이르러 얻으며, 장애가 없는 행위를 행하며, 가르침[法]을 깨뜨리거나 대신하여 바꿀 수 없으며, 경계를 다르게 변화시킬 수 없으며, 성립된 가르침을 사유할 수 없으며, 삼세의 평등에 이르며, 모든 세계에서 몸을 나투며, 모든 인식현상에 있어서 지혜는 장애가 없으며, 모든 행은 지혜와 더불어 상응하며, 가르침의 지혜를 의심하지 않으며, 신(身)을 분별할 수 없으며, 모든 보살이 받게 되는 지혜이며, 둘이 없는 불주(佛住)의 바라밀에 이르며, 무차별한 여래의 해탈지(解脫智)의 궁극에 이르며, 이미 끝없는 불지(佛地)의 평등을 얻으며, 법계(法界)가 뛰어남이며, 허공계가 뒤의 변제(邊際)가 되니, 가장 청정한 지혜이다. 이와 같이 첫 구절은 나머지 구절을 근거로 하여 차례로 분별하고 해석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바르게 설명한다면 가르침의 정의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가장 청정한 지혜란 모든 부처님과 여래의 지혜이니, 모든 인식현상에서 청정하며 요별하지 않음이 없다. 이와 같은 본래의 정의는 스물한 가지 부처님의 공덕에 포섭된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지각되는 것[所知 : 인식]에서 모든 장애가 없는 행이 일어나는 공덕, 유와 무에 있어서 두 가지 상이 없는 진여의 가장 청정함에 들어가게 하는 공 덕, 공용을 말미암지 않으면서 여래의 일을 버리지 않는 부처님의 위계의 공덕, 법신에 있어서 의지와 뜻과 작용[事]이 차별 없는 공덕, 모든 장애에 대하여 다스림을 닦아 익힌 공덕, 모든 외도를 항복시키는 공덕, 세간에서 생하지만 세간의 인식현상에 의해 오염되지 않는 공덕, 바른 가르침을 세우는 공덕, 다른 사람의 질문에 답하는 네 가지 선교(善巧)의 공덕, 모든 세계에서 응신과 화신을 나타내는 공덕, 다른 사람의 의문을 풀어줄 수 있는 공덕, 여러 가지 행으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들어갈 수 있게 하는 공덕, 미래의 가르침에서도 지혜를 일으키는 공덕, 중생을 따라 기꺼이 나타내는 공덕, 헤아릴 수 없는 보살의 의지인 중생을 바르게 교화하는 일을 행할 수 있는 공덕, 평등한 법신의 바라밀을 성취하는 공덕, 중생의 뜻(의지)을 좇아서 순수하고 깨끗한 불토(佛土)를 나타내는 공덕, 떠날 수 없고 다른 처(處)가 없는 세 가지 불신(佛身)의 공덕, 생사가 끊어진 시기에 모든 중생을 이익되고 안락하게 하는 공덕, 그리고 다함이 없는 공덕이다.

사(事)로 인한 실체적 대상[義]을 의지한다는 것은, 경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만약 보살이 서른두 가지 인식현상과 상응한다면 설하여 보살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모든 중생에 있어서 이익되고 안락하게 하는 의지와 더불어 상응한다.

1) 일체지지(一切智智)에 들어가게 하는 뜻[意志]이며, 2) 내가 지금 어떠한 견처[處] 가운데 맞닿더라도 이와 같은 지혜와 상응하며, 3) 고만심(高慢心)을 버리며, 4) 올바른 의지가 견고하며, 5) 연민하는 의지를 거짓되게 짓지 않는다. ① 은혜에 보답하는 것을 탐내지 않으며, ② 친하고 친하지 않음에 있어서 평등한 뜻이며, ③ 착하고 우애로운 의지를 영원히 지어서, 이에 무여열반에 이른다. 6) 헤아려서 이야기하고 기뻐 웃으며 먼저 말하며, 7) 모든 중생에 대하여 자비로움[慈悲]에 다름이 없으며, 8) 짓는 일에 있어서 물러서는 약한 마음이 없으며, 9) 물리어 싫증이 나는 마음이 없으며, 10) 정의(바른 교의)를 들음에 만족함이 없다. 11) 스스로 죄를 지음에 대해서는 그 과오를 드러낼 수 있으며, 남이 죄를 지음에 대해서 의심하여 꾸짖어 책망하지 않으며, 12) 모든 위의(威儀) 가운데서 항상 보리심을 지니며, 13) 과보를 구하지 않고 보시를 행하며, 모든 두려움과 6도에 생함에 얽매이지 않으며, 금하는 계율을 받아 지니고, 모든 중생에 있어 인욕(忍辱)함에 장애됨이 없으며, 정진에 있어서 모든 선법의 행을 이끌어 섭지하게 된다.

그리고 방편과 더불어 상응하는 지혜와 4섭(攝)에 상응하는 방편을 더불어서, 삼마디(三摩提 : 삼매)를 닦아 무색정을 멸하여 떠난다. 14) 계율을 지키고 지키지 않음에 있어서 선우(善友 : 善知識)는 둘이 없으니, ① 선지식을 받들어 모시며, ② 공경하는 마음으로 가르침을 들으며, ③ 공경하는 마음으로 기꺼이 아란야처(阿蘭若處)에 머물며, ④ 세간에 드물게 있는 것에 대하여 편안하게 즐기는 마음이 생하지 않으며, ⑤ 하품의 승[小乘]에 대해서는 희락심을 내지 않고 대승의 가르침에 대해서 실다운 공덕을 관하며, ⑥ 악한 친구를 멀리 여의고 선우(善友)를 공경하여 섬긴다. 15) 네 가지 범주(梵住)를 항상 다스리니, ① 무량심을 청정하게 닦으며, ② 항상 5신통의 지혜를 유희하며, ③ 항상 지혜에 의지하여 행한다. 16) 바른 행에 머무는 중생에 대해서든지, 바른 행에 머물지 않는 중생에 대해서든지 버리고 떠나는 마음이 없으니, ① 대중을 이끌어 섭지하며, ② 한결같이 결정하여 언설하며, ③ 사실을 공경하며, ④먼저 공경하여 보살심을 행한다.

이러한 여러 법과 더불어 상응하는 것을 설하여 보살이라고 이름한다. 이와 같은 문구로 말미암아 앞에 설한 첫 구절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첫 구절을 해설함이란 모든 중생에게 이익되고 안락하게 하는 의지를 일컫는다. 이 이익되고 안락하게 하는 의지의 문구에는 달리 열여섯 문구가 있어서, 드러내어진 업을 해설하고 있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열여섯 가지 업을 해설한다는 것은 첫 번째는 전전행업(傳傳行業)이며, 두 번째는 무도업(無倒業)이며, 세 번째는 남의 섬김[事]을 말미암지 않고 스스로 행하는 업[不由他事自行業]이며, 네 번째는 무너뜨릴 수 없는 업[不可壞業]이다. 다섯 번째는 욕구하지 않는 업[無求欲業]이니, 세 가지 해석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첫째는 보은을 탐내지 않으며, 둘째는 은덕이 있거나 없거나 간에 중생에게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생하지 않으며, 셋째는 계속하여 따라 행하여 이에 여러 가지 다른 생함에 이르는 것을 말한다. 여섯 번째는 처를 따라 언설과 상응하는 업[隨處相應言說業]이라고 한다. 두 구절의 해석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일곱 번째는 고통이 있거나 즐거움이 있거나 간에 둘이 없는 중생의 평등한 업[有苦有樂無二衆生平等業]이라고 한다. 여덟 번째는 하열함이 없는 업[無下劣業]이라고 한다. 아홉 번째는 물러나 바꾸게 할 수 없는 업[不可令退轉業]이라고 한다. 열 번째는 방편을 섭지하는 업[攝方便業]이라고 한다. 열한 번째는 싫증내고 미워함에 대하여 다스려지는 업[厭惡所對治業]이라고 하며, 두 구절의 해석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열두 번째는 틈이 없이 사량하는 업[無間思量業]이라고 한다. 열세 번째는 뛰어난 위계(位階)를 행하여 나아가는 업[行進勝位業]이라고 하며, 일곱 구절의 해석이 있다. 6바라밀을 바르게 닦아 가행하며, 사섭을 공경하여 행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열네 번째는 방편을 성취하는 업[成就方便業]이라고 하며, 여섯 구절의 해석이 있으니, 선지식을 섬기고, 바른 가르침을 자세히 들으며, 아란야처에 머무르며, 삿된 각관을 멀리 여의며, 정사유(正思惟)의 공덕에 두 구절이 있으며, 선우를 받들어 모시는 공덕에 두 구절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열다섯 번째는 드러내어 성취하는 업[顯成就業]이며, 세 구절의 해석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헤아릴 수 없는 마음을 청정하게 닦아서, 위덕(威德)을 얻으며, 공덕을 증득한다. 열여섯 번째는 남을 안립하는 업[安立他業]이며, 네 구절의 해석이 있으니, 대중을 이끌어 포섭하며, 의심 없이 바르게 가르치고 배우는 곳[處]을 세우며, 가르침과 재물을 모두 섭지하며, 염오의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문구들과 같이 처음에 설한 문구를 해설한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가운데 게송으로 설한다.

앞에 설명한 것과 같이 구절을 취하니, 
덕(德)을 따라 구절에 차별이 있고, 
앞에 설명함과 같이 구절을 취하니, 
정의가 다르므로 구절이 다르다.

03. 응지입승상(應知入勝相)

위와 같이 이미 응지승상(應知勝相)을 설하였다. 어떻게 응지입승상(應知入勝相)을 알아야 하는가? 다문(多聞)에 훈습된 의지는 아리야식에 섭지되지 않으면서 아리야식과 같이 종자를 이루며, 정사유(正思惟)에 의해 섭지되며, 가르침[法]과 실체적 대상[義]과 같이 드러나는 상에 의해 생하여지며, 취하여진 것[所取]과 같은 종류이며, 견이 있으며, 의언분별(意言分別)이다.

어떤 사람이 응지(應知 : 인식)의 상에 들어갈 수 있는가? 대승의 다문훈습(多聞熏習)이 서로 이어지고 헤아릴 수 없이 세상에 나오신 모든 부처님을 공경하여 높이 섬김을 이미 얻으며, 정위(正位)를 결정코 믿고 즐거워함[信樂]에 이미 들어가며, 선근을 잘 성숙시키고 닦아 익히고 늘리며 키움으로 해서 복덕과 지혜의 두 가지 자량을 올바르게 얻는다.

모든 보살은 어느 처(處)에서 유식관에 들어가는가? 가르침과 같이 실체적 대상과 같이 봄으로써 상을 드러내므로 의언분별하는 대승의 인식현상의 상이 생하여진다. 원락행지(願樂行地)에 들어간 사람은 들음[聞]을 따라 믿고 즐거워하기 때문이며, 견도(見道)는 이치와 같이 통달하는 것이기 때문이며, 수도(修道)는 모든 장애를 대하여 다스릴 수 있기 때문이며, 구경도(究竟道) 가운데라는 것은 장애와 더러움을 나와 떠나서 가장 청정하기 때문이다. 모든 인식현상[一切法]은 오직 식만이 있다. 설명하는 것과 같이 문혜를 따라서 믿고 즐거워하기 때문이며, 이치와 같이 통달하기 때문이며, 모든 장애를 대하여 다스릴 수 있기 때문이며, 장애와 더러움을 나와 떠나서 가장 청정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들어갈 수 있는가? 선근력을 지님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며, 세 가지 모양의 연마심(鍊磨心)이 있기 때문이며, 4처의 장애를 멸하여 없애기 때문이며, 가르침과 실체적 대상을 연하여 경계가 되고 틈이 없이 닦고 공경하여 사마타비바사나(奢摩他毘鉢舍那 : 定慧)를 닦아 멋대로 거리낌 없이 놀지 않기 때문이다. 시방세계를 세어 헤아릴 수 없기 때문에 세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인도(人道)에 있는 중생이 순간순간에 위없는 보리를 증득(證得)한다. 이것을 첫 번째의 연마심이라고 이름한다.

이러한 바른 의지(意志)로 말미암아 보시 등의 모든 바라밀을 반드시 생하여 자라게 함을 얻으니, 내가 믿고 즐거워하여 이미 견고하게 머무름을 얻은 것이다. 나는 이러한 바른 의지로 말미암아 보시 등의 바라밀을 닦아 익혀서 나아가 원만함을 얻으므로 곧 어렵지 않게 된다. 이것을 두 번째의 연마심이라고 이름한다.

만약 사람이 많은 선법과 더불어 상응한다면 뒤에 명(命)을 버렸을 때 모든 생을 받는 가운데에서 애착할 수 있는 부유함[富]과 즐거움[樂]이 자연히 이루어진다. 이 사람이 장애가 있는 선(善)을 얻는다는 이러한 정의가 오히려 이루어져야 할 것이나, 어찌하여 나는 원만한 선과 장애가 없는 선을 얻는다고 하며, 모든 뜻과 같이 애착할 만한 부유함과 즐거움을 마땅히 이루지 않는다고 하는가? 이것을 세 번째의 연마심이라고 이름한다. 이 가운데 게송으로 읊는다.

인도(人道) 가운데의 중생은 
생각생각에 보리를 증득한다.


처소(處所)가 세어 헤아림을 넘어서기 때문에 
하열한 마음이 없다.



착한 마음의 사람은 믿고 즐거워하여 
보시 등의 바라밀을 생할 수 있고 
뛰어난 사람은 이러한 뜻을 얻어 
보시 등을 닦을 수 있다.



만약 착한 사람이 죽을 때 
곧 뛰어난 부유함과 즐거움을 얻는다.


멸위(滅位)의 원만하고 깨끗한 선(善), 
이러한 정의는 어찌하여 없는가? 

네 번째의 처의 장애를 없애버렸기 때문에, 그리고 성문승(聲聞乘)과 독각승(獨覺乘)의 사유를 버려 떠났기 때문에 삿된 사유가 멸한다. 대승 가운데서 믿는 마음을 생하고 결정코 마음을 깨닫기 때문에 모든 삿된 뜻과 의혹을멸한다. 이러한 듣는 것[所聞]과 사유하는 것[所思]의 모든 인식현상[法] 가운데 아집(我執)과 아소집(我所執)의 삿된 집착을 버려 떠나기 때문에 법집(法執)을 멸하여 제거한다. 안립하여 눈앞에 나타나 머무는 모든 상과 사유를 모두 분별하지 않는다. 따라서 분별을 제거할 수 있다. 이 가운데 게송으로 읊는다.

드러나 머무르고 안립한 
모든 상과 사유를 
지혜로운 사람은 분별하지 않기 때문에 
위없는 깨달음을 얻는다.

가르침과 실체적 대상을 연하여 경계가 된다. 무슨 인과 무슨 방편으로 들어감을 얻는가? 문훈습(聞熏習)의 종류는 정사유에 섭지되며, 가르침과 실체와 같이 나타나며, 견이 있는 의언분별(意言分別)이기 때문이다. 네 가지 심사(尋思)로 말미암는다. 이름과 실체의 자성(自性)과 차별(差別)을 말하며, 거짓으로 심사를 세운다. 네 가지 여실지(如實智)로 말미암으니, 이름과 실체적 대상과 자성 그리고 차별이다. 여실지는 네 가지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보살이 이것들과 같이 실체적 대상에 이미 들어가 이해했다면 곧 가행(加行)을 닦아 유식관에 들어가게 된다. 이러한 관 가운데서 의언분별하여 문자와 언설[字言] 그리고 실체적 대상과 같이 나타난다. 이 가운데 이 문자와 언설의 상(相)은 단지 의언분별일 따름이다. 이와 같은 통달을 얻는다. 이 실체적 대상은 이름과 언설에 의지하는 단지 의언분별일 따름이다. 역시 이와 같이 통달한다. 이 이름과 실체적 대상의 자성과 차별은 단지 거짓으로 설한 것이며, 양(量)이 된다. 역시 이와 같이 통달한다. 다시 이러한 위계 가운데서 단지 의언분별만 증득(證得)한다. 이 관을 행하는 사람은 이름과 실체적 대상을 보지 않고, 자성과 차별의 가설도 보지 않는다. 실상(實相)으로 말미암아 자성과 차별의 정의가 있음을 얻을 수 없을 따름이다. 네 가지 심사와 네 가지 여실지로 말미암아 의언분별에 있어서 이름과 실체적 대상과 같 이 나타나므로 유식관에 들어감을 얻는다.

유식관 가운데서는 무슨 인식현상에 들어가며, 무슨 인식현상과 같이 들어갈 수 있는가? 단지 유량에 들어가며, 상(相)과 견(見)의 두 가지 인식현상이며, 여러 가지 상모이며, 명과 의, 자성과 차별의 가설, 자성과 차별의 대상, 이 여섯 가지의 상에는 실체[義]가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능취(能取)와 소취(所取)가 있지 않아 실체적 대상이 된다. 일시에 갖가지 상모와 같이 나타나고 생하기 때문에, 마치 어둠 속의 등나무가 뱀과 같이 나타나는 것과 같다. 마치 등나무 가운데 뱀이 곧 허망하여 실제로 있지 않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만약 사람이 이미 이러한 등나무의 의미를 요별한다면 먼저의 뱀이라는 산란한 지각[亂智]은 경계를 연하지 않고 일어났다가 곧 문득 사멸하여 단지 등나무라는 지각(知覺)만이 있다. 이러한 등나무의 지혜는 허망하여 실제의 경계가 없다고 미세하게 분석함으로 말미암는다. 왜냐 하면 단지 색(色)과 향(香)과 미(味)와 촉(觸)의 상이기 때문에 만약 마음이 이 경계를 연한다면 등나무의 지각은 역시 사라질 수 있어야 한다.

만약 이미 이와 같이 보아서 여섯 상이 이름과 같이 실체적 대상과 같이 의언분별로 나타나는 것을 굴복시켜 없앤다면 마치 뱀이라는 지각과 같은 차별적 대상[塵]의 지각이 생하지 않는다. 여섯 가지 상을 굴복시켜 멸한 실체적 대상 가운데에서 이 유식의 지각이 역시 등나무라는 지각과 같은 것을 굴복시켜 없앨 수 있어야 한다. 진여의 지각에 의하여 이와 같이 보살은 실체적 대상과 같이 나타나는 의언분별의 모습에 들어감으로 말미암아 분별성에 들어감을 얻고, 유식의 실체적 대상에 들어감으로 말미암아서 의타성에 들어감을 얻는다. 어찌하여 진실성에 들어감을 얻는가? 만약 유식의 상(想)을 버렸다면 이 때의 의언분별은 먼저 들은 것[所聞 : 문혜]의 인식현상이 훈습한 종류이다.

보살은 이미 차별적 대상[塵]의 상(想)을 요별하여 굴복하여 없앤다. 모든 실체적 대상과 같이 나타나는 것도 다시 생하는 연(緣)이 없기 때문에 생할 수 없다. 따라서 유식과 같은 의언분별도 역시 생할 수 없다. 이러한 의미로 말미암아 보살은 모든 실체적 대상[義]과 명(名) 가운데서 오직 무분별에 머문다.

무분별지로 말미암아 진여(眞如)인 법계(法界)를 증득할 수 있다. 이 때 보살은 평등하고 평등하다. 능연과 소연이 무분별지를 생한다. 이러한 의미로 말미암아 보살은 진실성에 들어감을 얻는다. 이 가운데 게송으로 읊는다.

인식현상과 인식 주관과 가르침[法]과 실체적 대상[義], 
자성[性]과 간략한 명(名)과 상세한 명, 
깨끗하지 않은 것과 깨끗한 것과 구경(究竟)의 것, 
열 가지 명은 차별적인 경계이다.

이와 같이 보살은 유식관(唯識觀)에 들어감으로 말미암아 응지승상(應知勝相)에 들어감을 얻는다. 이 상(相)에 들어감으로 해서 처음에 환희지(歡喜地)에 들어감을 얻어서 바르게 법계를 통달하며, 시방의 모든 부처와 여래의 집안에 생할 수 있으며, 모든 거듭 생하는 마음이 평등함을 얻어서 모든 보살의 마음의 평등함을 얻으며, 모든 부처와 여래의 마음의 평등을 얻는다. 이러한 관(觀)을 보살의 견도(見道)라고 이름한다.

또한 어떠한 이유로 보살은 유식관에 드는가? 궁극을 꿰뚫는 인식현상을 연하여 경계가 됨으로 말미암아 세간을 벗어난 사마타(奢摩他 : 定)와 비발사나(毘鉢舍那 : 慧)의 지혜이기 때문에, 무분별지로 말미암아 뒤에 얻어지는 갖가지 상식(相識)이 상(相)이 되는 지혜이기 때문에, 본래의 아리야식 가운데 모든 유(有)의 인(因)인 모든 인식현상의 종자를 함께 제거하여 멸하게 되며, 법신을 촉(觸)할 수 있는 모든 인식현상의 종자를 생하고 키우게 되며, 의지를 바꾸게[轉依] 되며, 모든 여래의 바른 가르침을 얻게 되며, 일체지지(一切智智)를 얻게 된다. 따라서 유식관에 들어간다.

무분별지의 뒤에 얻어진 지[無分別後所得智]란 본식과 생하여진 모든 식식(識識)과 상식(相識)의 상 가운데서 마술과 변화 등의 비유와 같이 관하므로 자성은 전도가 없다. 이러한 논리로 말미암아 보살은 마술사가 모든 마술에 있어서 스스로 요달하여 전도가 없는 것과 같다. 모든 상의 인연과 과 가운데서 만약 바르게 설할 때에는 치우침과 전도가 없다.

이 때 유식관의 위계 가운데 바르게 들어가는 것에는 네 가지의 삼마제(三摩提)가 있는데, 이것은 네 가지 통달분의 선근의 의지이다.

보살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네 가지 심사(尋思)로 말미암아 낮은 품류의 대상이 없는 관[無塵觀]인 인(忍)에 있어서 빛을 얻은 삼마제가 난(煖)의 행을 통달한 부분의 선근의 의지이다. 최상품의 차별적 대상이 없는 관인 인(忍)에 있어서 빛을 증장하는 삼마제가 정(頂)의 행을 통달하는 부분의 선근의 의지이다. 네 가지 여실지에서 보살은 이미 유식관에 들어 차별적 대상이 없음을 요별하기 때문에 진실한 실체적 대상, 이 한 부분에 바르게 들어간다. 삼마제를 두루 꿰뚫어 행하니, 이것은 비안립제(非安立諦)를 따르는 인(忍)의 의지이다. 이 삼마제의 맨 나중의 찰나(刹那)는 유식의 상(想)을 깨달아 굴복시키므로 틈이 없는 삼마제라고 바꾸어 이름한다. 세간 제일의 인식현상의 의지라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러한 네 가지 삼마제가 보살이 비안립제의 관(觀)에 들어가기에 앞선 방편이다. 만약 보살이 이와 같이 초지에 들어간다면 이미 견도(見道)를 얻어 유식에 들어감을 통달할 수 있다.

보살은 어떻게 관행(觀行)을 닦아 익혀서 수도(修道)에 들어가는가? 보살의 10지에 있어서 부처님께서 자세히 설하여 안립하신 인식현상의 상[法相]과 같이 모든 여래께서 설하신 대승 십이부 경전을 섭지함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눈앞에 드러날 수 있다. 설하여진 통(通)과 별(別)의 두 가지 경계를 다스림으로 말미암아, 궁극에 통달한 경계를 연하여 생기함으로 말미암아, 출세간의 무분별지와 무분별지의 뒤에 얻어지는 사마타비발사나의 지혜로 말미암아 헤아릴 수 없고 셀 수 없는 백천(百千)의 구지 대겁(俱胝大劫) 가운데 거듭거듭 닦아 익힘에 의거함으로 말미암아 예전과 지금 얻어진 전의(轉依)로 말미암아, 세 가지 불신(佛身)을 얻기 위해서는 다시 가행을 닦아야 한다.

성문의 견도라는 것과 보살의 견도라는 것의 차별은 무엇인가? 성문과 보살의 견도에는 열한 가지의 차별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무엇이 열한 가지인가? 첫 번째는 경계로 말미암은 차별이니, 대승의 가르침[法]을 연하여 경계가 됨을 말한다. 두 번째는 의지로 말미암은 차별이니, 큰 복덕과 지혜의 자량에 의하여 의지가 되는 것을 말한다. 세 번째는 통달로 말미암은 차별이니, 인식 주관이 자성이 없음[人無我]과 인식현상이 자성이 없음[法無我]을 통달하는 것을 말한다. 네 번째는 열반으로 말미암은 차별이니, 무주처열반을 섭지하여 머무는 곳[住處]으로 삼는 것을 말한다. 다섯 번째는 지(地)의 차별이니, 10지(地)에 의해 벗어나 떠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는 청정으로 말미암는 차별이니, 번뇌의 습기(習氣)를 없애는 것과 정토를 다스려서 청정이 되는 것을 말한다. 여덟 번째는 모든 중생에 대하여 얻는 평등심으로 말미암는 차별이니, 중생을 성숙하게 하여 가행한 공덕과 선근을 버리지 않게 하는 것을 말한다. 아홉 번째는 태어남을 받는 것으로 말미암은 차별이니, 여래의 집안에 태어나는 것이 태어남이 되기 때문이다. 열 번째는 드러나 나타남으로 말미암은 차별이니, 불자의 대집륜(大集輪) 가운데서 바른 교법(敎法)을 섭지하여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을 드러내 보일 수 있음을 말한다. 열한 번째는 과보(果報)로 말미암은 차별이니, 10력(力)과 4무외(無畏)와 어떤 것도 함께 할 수 없는 여래의 법, 그리고 무량한 공덕이 생겨나서 과(果)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가운데 두 구의 게송으로 읊는다.

이름[名]과 실체적 대상[義]은 서로간에 객(客)이 됨을 
보살은 심사(尋思)하여야 하며, 
두 가지가 오직 양(量)일 뿐이라는 것과 
그 두 가지의 가설을 관하여야 한다.



이것으로부터 참다운 지혜가 생겨나, 
차별적 대상의 분별인 세 가지를 떠난다.


만약 이것들이 존재하지 않음을 본다면 
3무성(無性)에 들어갈 수 있다.

또한 바른 가르침인 두 게송은 분별관론이 설하는 것과 같다.

보살은 적정위[靜位]에 있어서 
마음이 오직 환영일 따름이라는 것을 관한다.


바깥의 차별적 대상의 상을 버려 떠나고 
오직 스스로의 상념을 결정코 관(觀)한다.



보살은 안에 머무르며 
소취(所取)가 있지 않음에 들어가고 
다시 능취(能取)가 공(空)함을 관하여, 
뒤에 둘이 없음을 촉(觸)하여 얻는다.

또한 『대승장엄경론』에 설하여진 다섯 구의 게송이 이러한 도를 드러낸다.

보살은 복덕과 지혜를 낳아 키워서 
두 가지 자량(資粮)이 헤아릴 수 없을 때 
인식현상에 있어서 사유하는 마음이 끊어지기 때문에 
실체적 대상의 품류[義類]가 분별의 인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실체적 대상의 부류가 단지 분별에 지나지 않음을 알았으므로 
유식 가운데 사의(似義)에 머무를 수 있다.


따라서 관을 행하는 사람은 법계를 증득하여 
두 가지 상과 둘이 없음[無二]을 여읠 수 있다.



마음을 떠나서 그 밖의 것이 없음을 알면 
이러함으로 말미암아 곧 마음이 있지 않음을 본다.


지혜로운 사람은 이러한 두 가지가 있지 않음을 보아서 
둘이 없는 진실한 법계에 머무를 수 있다.



분별이 없는 지혜로운 사람은 
모든 것에 두루 항상 평등하게 행하므로, 
빽빽하게 허물이 모여 있는 성질에 의거하는 더러움[染]을 
마치 약이 독을 없앨 수 있는 것처럼 떠나보내고 없앤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바른 법(法 : 교법)이 올바르게 세워져서 
편안한 마음은 법계에 뿌리를 두고 
억념(憶念)이 오직 분별에 지나지 않음을 이미 알아서 
지혜로운 사람은 공덕의 해안(海岸)에 이른다.

04. 입인과승상(入因果勝相)

이와 같이 입응지승상(入應知勝相)을 이미 설하였다. 입인과승상(入因果勝相)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6바라밀, 즉 다나(陀那 : 보시)·시라(尸羅 : 지계)·찬제(羼提 : 인욕)·비리야(毘梨耶 : 정진)·지가나(持訶那 : 선정)·반라야(般羅若 : 반야)바라밀로 말미암아 알 수 있다. 어찌하여 6바라밀로 말미암아서 유식에 들어갈 수 있고, 다시 어찌하여 6바라밀이 유식의 과에 들어감을 이루는가? 이러한 정법 내에 있는 보살은 부유하고 즐거운 마음에 대하여 집착하지 않고, 계율에 있어서 과실을 범하는 마음이 없고, 고통에 있어서 무너지는 마음이 없으며, 바른 수행에 있어서 게으른 마음이 없고, 이러한 산란한 인 가운데에서 머물러 살지 않기 때문에, 한마음으로 이치에 맞게 간택한 모든 교법을 항상 행하여 유식관에 들어갈 수 있다. 6바라밀에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보살은 이미 유식지에 들어가서, 다음에 청정한 신락의 뜻이 두루 섭지하는 6바라밀을 얻는다. 이렇기 때문에 이 사이에 설령 6바라밀의 가행공용(加行功用)을 떠난다 하더라도 바른 설법을 신락하여 소중히 사랑하며, 기쁘게 따르며, 얻기를 바라며, 사유함으로 해서, 항상 쉼 없이 행하기 때문에 6바라밀을 수행하여 궁극에는 원만하여진다. 이 가운데 게송으로 읊는다.

원만하고 새하얀 법을 닦고 익혀서 
예리하고 빠른 인(忍)을 얻을 수 있으니 
보살은 스스로의 승(乘)의 깊고 
넓은 큰 가르침에 있어서 
오직 분별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기 때문에 
얽매임이 없는 지혜를 얻으므로 
낙신(樂信)의 청정이며, 
청정의지(淸淨意地)라고 일컫는다.



보살은 인식현상[法]의 흐름에 있어서 
앞에서나 뒤에서나 모든 부처님을 본다.


이미 보리(菩提)가 가까이에 있음을 알아 
어려움이 없이 쉽게 얻기 때문이다.

어째서 바라밀은 여섯 개만이 있다고 안립하는가? 여섯 가지 혹장(惑障)을 다스릴 수 있기 때문이며, 모든 부처님의 교법이 생하여 일어나는 의지처가 되기 때문이며, 그리고 뒤좇아 따라서 모든 중생을 성숙케 하기 위해서이다.

수행할 마음을 내지 못하게 하는 원인을 다스리기 위하여 보시와 지계의 두 바라밀을 세운다. 수행할 마음을 내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란 재물과 가족을 거느림에 대한 욕심과 집착이다.

이미 수행할 마음을 일으켰다면 물러서려는 약한 마음의 원인을 다스려야 하기 때문에 인욕과 정진의 두 바라밀을 세운다. 물러나 약해지는 마음의 원인이란 생사중생(生死衆生)이 어기고 거스르는 고통스런 일을 말하며, 오랜 시간 바른 법을 도와주는 가행(加行)에서 오는 피곤함과 나태함을 말한다.

만약 이미 행하고 물러나 약해지지 않는 마음을 내어 일으켰다면 무너져 잃어버리는 마음의 원인을 다스리기 위하여 선정과 지혜의 두 바라밀을 세운다. 무너져 잃어버리는 마음의 원인이란 산란하고 삿된 지혜이다. 이렇기 때문에 여섯 가지 미혹한 장애를 다스리기 위해서 여섯 가지 바라밀을 세운다.

모든 부처님의 교법이 생겨나 일어나는 의지처가 되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은 앞의 네 바라밀은 산란하지 않는 원인이다. 다시 하나의 바라밀은 산란하지 않음의 체이다. 이러한 산란하지 않음을 의지하기 때문에 모든 법의 진리 를 실답게 깨우쳐 마칠 수 있어서 모든 여래의 바른 법이 모두 생하여 일어날 수 있다. 이렇기 때문에 모든 불법이 생하여 일어나는 의지처가 되므로 여섯 가지의 바라밀을 세우는 것이다.

뒤좇아 따라서 모든 중생을 성숙케 하는 의지가 된다고 하는 것은 보시바라밀로 말미암아 중생을 이익되게 하고, 지계바라밀로 말미암아 중생을 괴롭히지 않으며, 인욕바라밀로 말미암아 그로 하여금 헐뜯고 욕되게 하는 것을 편안히 받아들여 원수를 갚으려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게 하며, 정진바라밀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선근을 생하게 하고 그들의 악근(惡根)을 없앨 수 있으며 이러한 이익된 원인으로 말미암아 모든 중생을 다스려 굴복시킬 수 있다.

다시 그들의 마음이 아직 고요함을 얻지 못하였다면 고요하게 하고, 이미 고요함을 얻었다면 해탈하게 한다. 이런 이유로 선정과 지혜의 바라밀을 세운다. 이 여섯 바라밀로 말미암아 보살은 중생을 바르게 가르치므로 성숙시킬 수 있다. 이런 이유로 뒤좇아 따라서 모든 중생을 성숙케 하는 의지가 되므로 여섯 가지의 바라밀을 세운다. 이와 같은 이유로 여섯 가지의 바라밀을 세우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6바라밀의 상은 어떻게 볼 수 있는가? 여섯 가지의 가장 수승함으로 말미암아 6바라밀의 공통된 상이 여섯 가지 있다. 첫째는 의지로 말미암아 비길 데가 없음이니, 위없는 보리심을 의지하여 일어남을 일컫는다. 둘째는 품류로 말미암아 비길 데가 없음이니, 하나하나의 바라밀을 간단히 설명하면 모두 세 가지 품류가 있는데 보살은 모두 갖추어 수행한다. 셋째는 행하는 일이 비길 데 없음이니, 모든 중생을 안락하고 이익되게 하는 일을 말한다. 보살이 행하는 모든 바라밀은 다 이 두 가지 일을 이루게 되기 때문이다. 넷째는 방편으로 말미암아 견줄 수 없음이니, 무분별지를 일컫는다. 보살이 행하는 바라밀은 모두가 무분별지가 섭지하는 것이다. 다섯째는 회향(廻向)으로 말미암아 견줄 수 없음이니, 위없는 보리를 회향하는 것을 말한다. 보살에 의해 행하여지는 모든 바라밀은 결정코 일체지(一切智)인 과(果)로 바꾸어 향하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청정으로 말미암아 비길 데 없음이니, 혹장과 지장이 영원히 사라져 남음이 없음을 말한다. 보살이 행하는 모든 바라밀 부분부분이 혹장과 지장을 제거하여 마침내 모두 없어지기 때문이다.

보시가 바라밀인가? 바라밀이 보시인가? 보시이면서 바라밀이 아닌 것이 있고, 바라밀이면서 보시가 아닌 것이 있으며, 보시이면서 바라밀인 것이 있고, 보시도 아니면서 바라밀도 아닌 것이 있다. 보시 가운데의 네 구절과 같이 나머지 바라밀도 역시 네 구절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어찌하여 6바라밀을 이와 같은 차례로 설명하는가? 앞에 있는 바라밀이 차례대로 뒤에 있는 바라밀을 생하기 때문이며, 또한 다시 앞의 바라밀들이 뒤의 바라밀들로 말미암아 청정해지기 때문이다.

무슨 뜻으로 6바라밀의 의미를 세웠는가? 이 의미를 어떻게 볼 수 있는가? 모든 세간과 성문승과 독각승의 보시 등의 선근 가운데 가장 수승하여 비길 데가 없기 때문에, 그리고 피안(彼岸)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에 바라밀이라고 널리 불린다.

아까워하는 마음과 질투하는 마음 그리고 가난하고 신분이 낮은 고통을 깨뜨려 없앨 수 있기 때문에 타(陀)라고 하며, 다시 큰 재산의 주인이 될 수 있고 복과 덕의 자량을 끌어당길 수 있기 때문에 나(那)라고 한다. 삿된 계율과 악도(惡道)를 해탈하게[寂靜] 할 수 있기 때문에 시(尸)라고 하며, 다시 선도와 삼마제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라(羅)라고 한다.

성내는 마음과 분하고 원통한 마음을 없앨 수 있기 때문에 찬(羼)이라고 하며, 다시 나와 남이 평화로운 일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제(提)라고 일컫는다. 나태함과 모든 나쁜 법을 제거하여 없애므로 비(毘)라고 하며, 다시 행하여 멋대로 지내버리지 않아서 헤아릴 수 없는 바른 법을 일으켜 늘리므로 이야(梨耶)라고 한다. 산란을 없애버릴 수 있기 때문에 지가(持訶)라고 하며, 다시 마음을 이끌어서 내면의 경계에 머무르게 할 수 있기 때문에 나(那)라고 일컫는다. 모든 견행(見行)을 없앨 수 있고 삿된 지혜를 제거할 수 있기 때문에 반라(般羅)라고 일컬으며, 참다운 상을 연할 수 있어서 그 품류를 따라 모든 인식현상을 알기 때문에 야(若)라고 일컫는다.

어떻게 모든 바라밀을 닦아 익히는 것을 알 수 있겠는가? 간략하게 설명하니, 닦아 익힘에 다섯 가지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첫째는 가행방법수(加行方法修)이며, 둘째는 신락수(信樂修)이며, 셋째는 사유수(思惟修)이며, 넷째는 방편승지수(方便勝智修)이며, 다섯째는 남에게 이익되는 일을 닦음[利益他事修]이다. 이 가운데 앞의 네 가지 닦음은 앞에서와 같이 알아야 한다. 이익타사수(利益他事修)란 부처님의 공용이 없는 마음을 말하며, 여래의 일을 버리지 않는다. 모든 바라밀을 닦아 익혀서 원만위(圓滿位) 가운데 이르러 다시 모든 바라밀을 닦는다.

또한 다시 사유수습(思惟修習)이란 애중(愛重)과 수희(隨喜)·원득(願得)의 사유이며 6의(意)가 닦은 것을 섭지하는 것이다. 6의란 첫째는 넓고 큰 뜻이고, 둘째는 긴 시간의 뜻이며, 셋째는 환희의 뜻이며, 넷째는 은덕이 있는 뜻이며, 다섯째는 큰 의지의 뜻이며, 여섯째는 착하고 우호적인 뜻이다. 넓고 큰 뜻이란 만약 보살이 약간의 아승기겁에서 위없는 보리를 얻을 수 있다면 이러한 시간이 한 찰나찰나가 되는데, 보살은 이 시간 가운데서 찰나찰나에 항상 신명(身命)을 버린다. 그리고 항하의 모래 수만큼의 세계에 가득한 일곱 가지 보물을 베풀어 처음 마음을 냈을 때부터 궁극의 청량한 보리에 들어가 머물 때까지 여래를 봉양한다. 그래도 보살의 베풀려는 의지는 오히려 만족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많은 시간의 찰나찰나가 삼천대천세계의 맹렬한 불로 가득하여도 보살은 그 가운데서 가고 머물고 앉고 눕는 4위의(威儀)를 행한다. 모든 생활의 도구가 없어도 지계·인욕·정진·삼마제·반야심을 보살은 항상 눈앞에 드러내 닦아서 궁극의 청량한 보리에 들어가 머물 때까지 보살의 지계와 인욕의 의지는 역시 만족하지 않는다. 이것이 싫어함도 만족함도 없는 마음이며, 보살의 넓고 큰 의지이다.

만약 보살이 처음 발심할 때부터 성불할 때까지 싫어함도 만족함도 없는 마음을 버리지 않으면 이것이 보살의 긴 시간의 뜻이다.

만약 보살이 6바라밀로 말미암아 남을 이익되게 했다면 항상 비길 데 없는 환희를 일으켜서 중생으로 하여금 그 마음에 어느 것도 이를 수 없는 환희를 더하게 한다. 이것이 보살의 환희하는 뜻이다.

만약 보살이 6바라밀을 행하여 이미 중생을 이익되게 했다면 중생이 그에게 커다란 은덕이 있음을 보지만 자신이 중생에게 은혜가 있음을 보지 않는다. 이것을 보살의 은덕이 있는 뜻이라고 한다.

만약 보살이 6바라밀로부터 생하여진 공덕선근을 모든 중생에게 베풀어 주었다면 집착이 없는 마음으로써 회향하여 그들로 하여금 사랑할 수 있고소중한 과보를 얻게 한다. 이것을 보살의 큰 의지의 뜻이라고 말한다.

만약 보살이 행한 6바라밀의 공덕선근을 모든 중생이 평등하게 얻게 하여 그들이 위없는 보리를 회향하게 된다면 이것은 보살의 착하고 우호적인 뜻이다.

이러한 여섯 가지 뜻으로 섭지하는 애중사유(愛重思惟)로 말미암아 보살은 닦아 익힌다. 보살의 수희(隨喜)가 헤아릴 수 없이 많다면 보살은 6의가 생하는 공덕과 선근을 닦아 가행한다. 이것이 보살의 6의가 섭지하는 수희사유라고 일컫는다. 만약 보살이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6의가 섭지하는 6바라밀을 수행하기를 원하고, 자신도 6의가 섭지하는 6바라밀을 수행하기를 원한다면 가행을 닦아 익혀서 이에 성불하기에 이른다. 이것이 보살의 6의가 섭지하는 원득(願得)사유이다. 만약 사람이 6의가 섭지하는 보살의 사유를 듣고 닦아 익힐 수 있다면 한 생각에 믿는 마음을 일으킨다. 이러한 사람은 곧 헤아릴 수 없고 끝없는 복덕의 덩어리를 얻어서 모든 악업의 장애를 남김없이 무너뜨려 없앨 것이다. 만약 사람이 듣기만 해도 오히려 헤아릴 수 없고 끝이 없는 복덕을 얻는데, 하물며 보살의 모든 수행함이겠는가.

어떻게 모든 바라밀의 차별을 알아야 하는가? 각기 세 가지 품성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그 차별을 안다. 보시의 세 가지 성품이란 첫째는 교법의 보시이고, 둘째는 재물의 보시이며, 셋째는 무외(無畏)의 보시이다.

지계의 세 가지 성품이란 첫째는 계율을 지키어 보호함이고, 둘째는 선법의 계율을 섭지함이며, 셋째는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계율을 섭지하는 것이다.

인욕의 세 가지 성품이란 첫째는 남이 헐뜯고 욕함을 참는 것이고, 둘째는 고통을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인욕이고, 셋째는 인식현상을 자세히 보아 살피는 인욕이다.

정진의 세 가지 성품이란 첫째는 용맹하게 애써 힘쓰는 정진이고, 둘째는 가행하는 정진이며, 셋째는 하락하지 않고 무너지기 어려우며 만족하지 않는 정진이다.

선정의 세 가지 품류란 첫째는 안락하게 머무는 선정이고, 둘째는 신통을 이끄는 선정이며, 셋째는 남을 이익되게 함을 좇는 선정이다.

반야의 세 가지 품류란 첫째는 분별이 없는 가행반야이고, 둘째는 분별이 없는 반야이며, 셋째는 분별이 없는 뒤에 얻는 반야이다.

어떻게 모든 바라밀이 포섭한다는 의미를 알 수 있는가? 모든 바른 교법은 6바라밀의 포섭함에 들어간다. 그것의 성품이 되기 때문이며, 그것들은 6바라밀에 의해 펼쳐지는 과보이기 때문이며, 모든 바른 법이 좇아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모든 바라밀에 의해 다스려지는 것이 모든 미혹을 포섭한다는 것을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그것의 성품이 되기 때문이며, 그것이 생하는 원인이 되기 때문이며, 그것에 의해 펼쳐지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어떻게 모든 바라밀의 공덕을 알아야 하는가? 만약 보살이 생사를 윤회하더라도 큰 부호의 위치에서 자재함에 포함되고, 크게 생함에 포함되며, 큰 권속과 무리 대중에 포함되며, 크게 생계를 꾸려가는 사업을 성취함에 포함되며, 질병과 고뇌가 없고 욕심이 작음 등에 포함되며, 모든 공예와 학문에 대한 총명한 지혜에 포함된다. 여의(如意)이며, 부유함과 즐거움을 잃지 않으며, 중생을 이익되게 함으로써 바른 일을 삼기 때문이며, 보살이 수행하는 6바라밀의 공덕 내지는 궁극에 들어가 머무는 청량한 보리는 항상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어떻게 모든 바라밀이 다시 서로를 드러낸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가? 세존께서는 혹은 보시라는 이름으로 모든 바라밀을 설하셨고, 혹은 지계라는 이름으로, 혹은 인욕이라는 이름으로, 혹은 정진이라는 이름으로, 혹은 선정이라는 이름으로, 혹은 반야라는 이름으로 모든 바라밀을 설하셨다.

여래께서는 무슨 뜻에서 이와 같이 설하셨는가? 모든 바라밀을 수행하는 방편 가운데 모든 나머지 바라밀이 모두 모여서 보조하여 이루기 때문이다. 이것이 곧 여래께서 설하신 의도이다. 이 가운데 우타나 게송을 읊는다.

위계[位]·수(數)·상(狀)·순서와 
이름·닦음·차별·포섭함과 
대하여 다스림·공덕과 
서로를 드러냄이 모든 바라밀의 정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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