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대승론(攝大乘論) 03. 하권

섭대승론(攝大乘論) 03. 하권

05. 입인과수차별승상(入因果修差別勝相)

이와 같이 이미 인과에 들어가는 수승한 모습을 설하였다. 어떻게 인과에 들어가는 닦음의 차별을 알아야 하는가? 열 가지 보살지(菩薩地)로 말미암아 알 수 있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첫째는 환희지(歡喜地)이며, 둘째는 무구지(無垢地)이며, 셋째는 명염지(明焰地)이며, 넷째는 소연지(燒然地)이며, 다섯째는 난승지(難勝地)이며, 여섯째는 현전지(現前地)이며, 일곱째는 원행지(遠行地)이며, 여덟째는 부동지(不動地)이며, 아홉째는 선혜지(善慧地)이며, 열째는 법운지(法雲地)이다. 이러한 정의로 모든 지를 성립시켜 열 가지가 되는 것을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10지의 장애인 열 가지 무명을 대하여 다스리기 위함이다. 열 가지 모습에 나타나는 법계에 열 가지 무명이 있어서 오히려 장애가 된다. 무엇으로 법계의 열 가지 상(相)을 드러내는가? 초지(初地)에서는 모든 것에 두루 가득하다는 의미로 말미암아서 법계를 알아야 한다. 2지(地)에서는 가장 수승하다는 의미로 말미암는다. 3지(地)에서는 수승한 흐름의 의미로 말미암는다. 4지(地)에서는 섭지함이 없다는 의미로 말미암는다. 5지(地)에서는 서로 이어져 다르지 않다는 의미로 말미암는다. 6지(地)에서는 더러움과 깨끗함이 없다는 의미로 말미암는다. 7지(地)에서는 여러 가지 법이 다름이 없다는 의미로 말미암는다. 8지(地)에서는 늘어나고 줄어듦이 없다는 의미로 말미암는다. 9지(地)에서는 선정의 자 재를 근거로 한다는 의미로 말미암으며, 토자재(土自在)를 근거로 한다는 의미로 말미암으며, 지자재(智自在)를 근거로 한다는 의미로 말미암는다. 10지(地)에서는 업자재(業自在)를 근거로 한다는 의미로 말미암고, 다라니문과 삼마제문의 자재를 근거로 한다는 의미로 말미암아 법계를 알아야 한다. 이 가운데 게송으로 읊는다.

두루 가득하고 가장 수승하다는 정의와 
수승한 흐름과 섭지하지 않는다는 것, 
다름이 없다는 것과 더럽고 깨끗함이 없다는 것, 
여러 가지 법과 다르지 않음, 

늘지도 줄지도 않는다는 것, 
네 가지 자재의 근거라는 정의, 
업자재의 근거, 
삼마제를 총지(摠持)한다.

이 두 게송과 같이 『중변분별론』에 의거하여 깨달아 알아야 한다. 또한 다시 이 무명은 이승(二乘)에서는 더러움에 물듦이 아니지만 보살에서는 더러움에 물듦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어찌하여 초지를 환희(歡喜)라고 하는가? 처음으로 자신과 남에게 이익되는 공능(功能)을 얻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2지를 무구(無垢)라고 일컫는가? 이 지는 보살의 계율을 범하는 더러움[垢]을 멀리 떠나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3지를 명염(明焰)이라고 하는가? 삼마제와 삼마발제의 의지로부터 물러남이 없기 때문이며, 큰 법광명(法光明)의 의지이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4지를 소연(燒然)이라고 하는가? 보리의 법을 도와서 모든 장애를 태워 없애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5지를 난승(難勝)이라고 하는가? 다시 서로 어긋나는 진제와 속제의 두 지혜를 합하며, 어려운 것을 합하여 서로 상응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6지를 현전(現前)이라고 하는가? 12연행의 지혜의 근거가 되기 때문이며, 반야바라밀이 현전하여 머물 수 있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7지를 원행(遠行)이라고 하는가? 공용이 행하는 마지막 끝에 도달하여 있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8지를 부동(不動)이라고 하는가? 모든 상과 뜻을 일으키는 공용이 움직일 수 없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9지를 선혜(善慧)라고 하는가? 가장 수승한 무애해가 지혜의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10지를 법운(法雲)이라고 하는가? 경계를 연하여 꿰뚫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법을 안다. 모든 다라니문과 삼마제문이 장(藏)이 되기 때문에 구름에 비유한다. 허공과 같이 거친 장애를 덮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며, 법신을 원만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지(地)를 얻은 모습을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네 가지 상으로 말미암으니, 첫째는 이미 신락(信樂)의 상을 얻음으로 말미암아 하나하나의 지에서 신락을 결정코 생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이미 얻은 행의 상으로 말미암아 지와 더불어 상응하는 열 가지 법의 바른 행을 얻기 때문이다. 셋째는 이미 얻은 통달의 상으로 말미암아 먼저 초지에서 진여인 법계를 통달했을 때 모든 지를 통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넷째는 이미 얻어진 성취의 상으로 말미암아 이 10지는 모두 궁극의 수행에 이미 이르렀기 때문이다.

모든 지를 닦는 모습은 어떠하다고 알아야 하는가? 모든 보살은 각각의 진 가운데서 사마타비바사나를 닦아 익힌다. 각각에는 닦아 익혀서 이룰 수 있는 다섯 가지 상이 있다. 무엇이 다섯 가지인가? 첫째는 집총수(集摠修)이며, 둘째는 무상수(無相修)이며, 셋째는 무공용수(無功用修)이며, 넷째는 치성수(熾盛修)이며, 다섯째는 부지족수(不知足修)이다. 마땅히 모든 지에 있어서 이러한 다섯 가지 닦음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다섯 가지 닦음이 생하는 다섯 가지 인식현상이 과보가 된다. 무엇이 다섯인가? 첫째는 찰나찰나 법에 의거하는 모든 추중(麤重)을 무너뜨릴 수 있음이며, 둘째는 갖가지 어지러운 상념으로부터 벗어난 법락을 얻을 수 있음이며, 셋째는 모든곳에서 헤아릴 수 없고 분별이 없는 상인 선법(善法)의 광명을 볼 수 있음이다. 넷째는 분별된 것과 똑같은 법상이 바뀌어 청정분(淸淨分)을 얻어 항상 서로 이어져 생하는 원만함을 이루고 법신을 성취함이다. 다섯째는 상품 가운데서 점차 늘어나서 최상상품(最上上品)의 인연이 모이게 됨이다. 10지에서는 10바라밀을 닦아 차례대로 이루어지고 앞의 6지에서는 6바라밀이 있다는 것은 차례로 설명한 것과 같다.

뒤의 4지(地)에는 네 가지 바라밀이 있다. 첫째는 구화구사라(漚和拘舍羅)바라밀이니, 6바라밀에 의해 생장되는 선근 공덕이며, 모든 중생에게 베풀어 모두 평등하게 하고 모든 중생을 위없는 보리에 회향하게 한다. 둘째는 바니타나(波尼他那)바라밀이니, 이 바라밀은 미래세에 6바라밀을 생하는 연을 감응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착한 원을 이끌어 섭지한다. 셋째는 바라(婆羅)바라밀이니, 사유하여 간택하는 힘과 닦아 익히는 힘으로 말미암아 모든 바라밀을 굴복시켜 다스릴 수 있기 때문에 6바라밀을 이끌어 서로 이어 생할 수 있어서 빈틈이 없다. 넷째는 야나(若那)바라밀이니, 이 바라밀은 앞의 6바라밀의 지혜를 성립시킬 수 있으며, 보살로 하여금 큰 집회에서 법락을 받을 수 있게 하고 중생을 성숙시킬 수 있게 한다.

뒤의 네 가지 바라밀은 무분별후지(無分別後智)를 섭지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모든 바라밀이 모든 지 가운데서 서로 다른 시기에 닦아 익힌다. 바라밀장(波羅蜜藏)의 장경으로부터 이 법문이 모든 의미를 자세히 드러낸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얼마만한 시간 동안에 10지를 수행하여 바른 행이 원만함을 얻는가? 다섯 종류의 사람이 있으니, 혹은 3아승기겁을 수행하여 원만하여지고 혹은 7아승기겁을 혹은 33아승기겁을 수행하여야 한다. 다섯 종류의 사람이란 무엇인가? 원행지를 행하는 사람은 1아승기겁에 채워지고, 청정의행(淸淨意行)을 행하는 사람과 유상행(有相行)을 행하는 사람 그리고 무상행을 행하는 사람은 6지 내지 7지에서 두 번째의 아승기겁에 채워지며, 이 뒤로부터 무공용을 행하는 사람 내지 10지는 세 번째의 아승기겁에 채워진다.

또한 다시 어찌하여 7아승기겁을 말하는가? 지 이전에 셋이 있고 지 가운데 넷이 있다. 지 이전의 셋이란 하나는 부정(不定)아승기이고, 둘은 정(定)아승기며, 셋은 수기(授記)아승기이다. 지 가운데 있는 넷이란 첫째는 실제(實諦)에 의거하는 아승기이고, 둘째는 사(捨)에 의거하는 아승기이며, 셋째는 적정(寂靜)에 의거하는 아승기이며, 넷째는 지혜에 의거하는 아승기이다.

또한 어찌하여 다시 30아승기를 말하는가? 방편 가운데 3아승기가 있으니, 첫째는 신행(信行)의 아승기이고, 둘째는 정진행(精進行)의 아승기이며, 셋째는 취향행(趣向行)의 아승기이다. 10지 가운데의 각 지지에 3아승기가 있으니 들어감과 머무름과 나옴이라고 일컫는다. 이와 같은 아승기를 수행하여 10지의 정행이 원만하다.

선근력과 선원력이 있어서 
마음이 견고하게 나아가 증상하며, 
세 가지 아승기를 지나 
바른 행이 성취된다고 설한다.

06. 의계학승상(依戒學勝相)

이와 같이 인과에 들어가는 닦음의 차별을 이미 설명하였다. 계학에 의한 차별은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마땅히 보살지에서 바르게 받는 보살계품 가운데서 설하는 것과 같이 알아야 할 것이다. 간략하게 설명한다면 네 가지 차별로 말미암아 보살계에 차별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네 가지란 무엇인가? 첫째는 품류의 차별이며, 둘째는 함께하고 함께하지 않는 배우는 곳의 차별이며, 셋째는 넓고 큼의 차별이며, 넷째는 매우 깊음의 차별이다.

품류의 차별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바르게 지켜야 하는 것을 섭지하는 계율이며, 둘째는 선법을 섭지하는 계율이며, 셋째는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것을 섭지하는 계율이다. 이 가운데 바르게 지켜야 하는 것을 섭지하는 계율이 나머지 두 가지 계율의 근거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선법을 섭지하는 계율은 불법을 생하여 일으킬 수 있는 의지이며,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것을 섭지하는 계율은 중생을 성숙시키는 근거이다.

함께 배우는 곳의 계율이란 보살이 성죄(性罪)를 멀리 여의는 것을 말한다. 함께 배우지 않는 곳의 계율이란 보살이 계율로 세워진 제죄(制罪)를 멀리 떠나는 것이다. 이 계율 가운데 성문은 이곳이 죄가 되지만 보살은 죄가 되지 않기도 하고, 혹은 보살은 이 곳이 죄가 되지만 성문은 죄가 되지 않는다. 보살은 몸과 입과 뜻의 세 가지 품류를 다스림을 계율로 삼고, 성문은 단지 몸과 입만을 다스리는 것을 계율로 삼는다. 따라서 보살은 심지(心地)가 죄를 범하는 것이 있지만 성문은 곧 이러한 일이 없다. 간략하게 설명한다면 가지고 있는 신·구·의업의 일이 중생에게 이익을 생하면 잘못이 없다. 보살은 이 업을 모두 받아 배우고 수행하여야 한다. 이와 같이 함께하고 함께하지 않는 계율의 차별을 알아야 할 것이다.

넓고 큼의 차별이란 네 가지 큼으로 말미암아 네 종류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첫째는 여러 가지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배우는 곳의 넓고 큼이다. 둘째는 헤아릴 수 없는 복덕을 섭지할 수 있는 넓고 큼이다. 셋째는 모든 중생을 포섭하여 이익되고 안락하게 하려는 의지의 넓고 큼이다. 넷째는 위없는 보리의 근거가 넓고 큼이다.

매우 깊은 차별이란 만약 보살의 이러한 방편이 수승한 지혜로 말미암아 살생 등의 열 가지 일을 행하더라도 더럽혀지는 과실이 없고, 헤아릴 수 없는 복덕을 생하여 위없는 보리의 수승한 과보를 빠르게 얻는 것을 말한다. 또한 다시 변화(變化)에 의해 만들어지는 신업(身業)과 구업(口業)이 있으니, 이것이 보살의 매우 깊은 계율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계율로 말미암아 보살은 어느 때는 대왕의 위에 바로 머물러서 혹은 여러 가지로 중생을 협박하고 괴롭히는 것을 드러내어 중생을 계율 가운데 안립하게 한다. 혹은 여러 가지의 본생(本生)을 드러내어 남을 핍박하고 괴롭히며 상대를 핍박하고 괴롭히며 원망함으로 말미암아 남으로 하여금 서로 사랑하고 이익되며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다른 사람에게 믿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 우선이 되고, 뒤에 삼승의 성스러운 도 가운데서 그들의 선근이 성숙되게 한다. 이것을 보살의 매우 깊은 계율의 차별이라고 일컫는다. 이러한 네 가지 차별로 말미암아 보살이 받아 지니는 계율의 차별을 간략하게 설명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한 다시 이러한 네 가지 차별로 말미암아 다시 차별이 있어서 헤아릴 수 없다. 보살계의 차별은 『비나야구사비불략경(毘那耶瞿沙毘佛略經)』 가운 데 설한 것과 같다.

07. 의심학승상(依心學勝相)

이와 같이 이미 계학에 의한 차별을 설명하였다. 심학에 의한 차별은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간략하게 설하여 여섯 가지 차별로 말미암아 알아야 한다. 무엇이 여섯 가지인가? 첫째는 경계의 차별이고, 둘째는 많은 품류의 차별이고, 셋째는 대하여 다스림의 차별이고, 넷째는 좇아 씀의 차별이며, 다섯째는 좇아 이끄는 차별이고, 여섯째는 사(事)로 말미암은 차별이다.

경계의 차별이란 대승법을 연하여 경계가 되어 일어나기 때문이다. 많은 품류의 차별이란 대승광삼마제(大乘光三摩提), 복덕(福德)을 모으는 왕(王)삼마제, 현호(賢護)삼마제, 수능가마(首楞伽摩)삼마제, 갖가지 삼마제의 품류를 포섭하기 때문이다. 대하여 다스림의 차별이란 모든 인식현상을 연하여 통경(通境)의 지혜가 되기 때문이다. 쐐기로써 쐐기를 빼내는 방편과 같기 때문이며, 본식 가운데서 모든 추중의 장애를 뽑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좇아서 사용하는 차별이란 현세에 삼마제의 즐거움에 오래 안주하며 뜻대로 수승한 곳에서 생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좇아 끌어당기는 차별이란 모든 세계에 장애가 없는 신통(神通)을 이끌어올 수 있음이다. 사의 차별로 말미암는다는 것은 움직이게 하며, 빛을 비추며, 두루 가득하며, 드러내 보이며, 움직여 변하며, 갔다가 돌아오며, 먼 것을 재촉하여 가깝게 만들며, 거친 것을 바꾸어 미세한 것으로 만들며, 미세한 것을 바꾸어 거친 것으로 만든다. 모든 색(色)을 몸 속에 들어가게 하며, 그들과 비슷한 같은 무리로 큰 집회에 들어가며, 혹은 드러내고 혹은 감추며, 여덟 가지 자재를 갖춘다. 다른 신통력을 굴복시키고 가로막으며, 혹은 그들에게 말 잘하는 재주를 주기도 하고 생각함을 주기도 하며, 기뻐하고 즐거워하기도 한다. 혹은 광명을 비추고 상을 갖춘 큰 신통을 끌어당길 수 있으며, 모든 행하기 어려운 것을 이끌어 바르게 행할 수 있으니, 열 가지 어려운 수행을 섭지하여 바르게 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첫째는 스스로 받는 어려운 수행이니, 보리(菩提)의 좋은 서원을 스스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돌이킬 수 없는 수행이니,생사의 많은 고통으로 말미암아 물러나 바뀔 수 없기 때문이다. 셋째는 등지지 않는 어려운 수행이니, 중생이 악을 짓더라도 한결같이 그를 대하기 때문이다. 넷째는 눈앞에 드러난 어려운 수행이니, 중생을 원망할 일이 있어 눈앞에 드러나도 모든 이익되는 일을 행하게 되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더러움이 없는 어려운 수행이니, 보살은 세간에서 살더라도 세속의 법에 물들여지지 않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신락(信樂)의 어려운 수행이니, 도달함이 없는 대승을 행하여 넓고 크며 매우 깊은 의미를 신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곱째는 통달의 어려운 수행이니, 인식 주관과 인식현상의 두 가지 자성이 없음을 통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덟째는 수각(隨覺)의 어려운 수행이니, 모든 부처님과 보살의 깊고 깊은 불료의경(不了義經)을 이치에 맞게 판별하기 때문이다. 아홉째는 떠나지 않고 더렵혀지지도 않는 수행이니, 생사를 끊지 않으며 생사에 오염되지도 않기 때문이다. 열째는 가행의 어려운 수행이니, 모든 부처님과 여래께서는 모든 장애를 해탈한 가운데 머물러서 공용을 짓지 아니하고도 모든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일을 행할 수 있으며, 이에 궁생사후제(窮生死後際)에 이르며, 이와 같은 가행을 즐거이 닦기 때문이다.

수각의 어려운 수행에서 모든 부처님과 여래께서 설하신 불료의경이라고 하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가? 보살은 이치를 좇아 깨우치고 살펴야 한다. 경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어찌하여 보살은 한 물건도 훼손하지 않고, 한 사람에게도 베풀지 않는가? 보살이 올바르게 수없이 그리고 헤아릴 수 없이 보시할 수 있으려면 그러하여야 한다. 따라서 시방세계에서 보시행을 닦아 서로 이어져 생하여 일어난다. 어찌하여 보살은 참다운 보시를 행하는 것을 즐거워하는가? 보살이 모든 보시를 행하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는다면 그러하다. 어찌하여 보살은 보시에 대해 믿는 마음[信施心]으로 행하는가? 보살이 모든 부처님과 여래를 믿는 마음으로 행하지 않는다면 그러하다. 어떻게 보살은 보시를 일으켜 행하는가? 보살은 보시 가운데 자신을 채찍질하지 않으면서도 그렇게 한다. 보살은 어찌하여 항상 보시를 즐기는가[遊戱]? 보살이 보시할 때가 없다고 하더라도 그러하다. 보살은 어떻게 보시를 크게 행할 수 있는가? 만약 보살이 바라(婆羅)의 상념을 떠난다면 그러하다. 어떻게 보살은 보시에 있어서 청정하다고 하는가? 만약 보살이 탐욕과 인색함을 울파제(鬱波提)한다면 그러하다. 보살은 어떻게 보시에 머물 수 있는가? 보살이 구경후제(究竟後際)에 머물지 않는다면 그러하다. 어떻게 보살이 보시에 있어서 자재하는가? 만약 보살이 보시에 있어서 자재함을 얻지 못한다면 그러하다. 어떻게 보시에 있어서 다함이 없는가? 보살은 다함이 없음 가운데에 머물지 않는다면 그러하다. 지금까지 보시에서와 같이 지계 내지는 반야에 대해서도 이치에 맞게 알아야 한다.

다시 경전에서 말씀하신 것이 있다. 어째서 보살은 살생을 하는가? 만약 보살이 명(命)이 있는 중생이 서로 이어지는 것을 끊는다면 그럴 수도 있다. 어찌하여 보살은 남이 주지 않은 것을 빼앗는가? 만약 보살이 남이 주지 않은 중생을 스스로 빼앗는다면 그러할 수도 있다. 어찌하여 보살이 삿된 음란함을 행하는가? 만약 보살이 욕망의 대상[欲塵]에 대하여 삿된 의(意) 등을 일으킨다면 그러하다. 어찌하여 보살이 허망한 말[妄語]을 할 수 있는가? 만약 보살이 허망한 것을 말할 수 있어서 거짓이 된다면 그러하다. 어찌하여 보살은 두 가지 말[兩舌]을 행하는가? 만약 보살이 항상 가장 궁극적인 공적한 곳에 머문다면 그러하다. 어찌하여 보살이 파류사(波留師)에 머물 수 있는가? 만약 보살이 알려진 피안(彼岸)에 머문다면 그러하다. 어찌하여 보살은 서로 응하지 않는 말을 할 수 있는가? 만약 보살이 모든 법을 나누어 깨뜨려서 종류에 따라 해석할 수 있다면 그러하다. 어찌하여 보살은 아비지가루(阿毘持訶婁)를 행하는가? 만약 보살이 거듭거듭 스스로 위없는 모든 선정을 얻게 한다면 그러하다. 어찌하여 보살은 미워하고 해치려는 마음을 일으키는가? 만약 보살이 자신과 남의 심지(心地)에서 모든 혹을 해칠 수 있다면 그러하다. 어찌하여 보살은 삿된 견해를 일으키는가? 만약 보살이 모든 곳에서 두루 행하는 삿된 성질을 이치에 맞게 관찰한다면 그러하다. 또한 어떤 경에서 말씀하시기를, “불법은 매우 깊다”라고 하셨다. 무엇이 매우 깊음인가? 이 논서 가운데서 스스로 모든 불법을 자세히 분별한다.

법신이 항상 머물기 때문에, 일체 불법이 항상 머문다는 것은 성품이 된다. 모든 부처님의 법은 모든 것을 끊음으로써 성품을 삼는다. 모든 장애가 끊어져 다하기 때문이다. 모든 부처님의 법은 생하여 일어나는 것이 성품이 된다. 화신이 항상 생하여 일어나기 때문이다. 모든 불법은 얻을 수 있음이 성품이된다. 중생의 8만 4천 번뇌를 모두 대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불법은 탐욕이 있는 것으로써 성품을 삼는다. 탐욕이 있는 중생을 사랑하고 포섭하여 스스로의 체를 이루게 하기 때문이다. 모든 불법은 성냄이 있는 것을 성품으로 삼으며, 모든 불법은 어리석음이 있는 것으로써 성품을 삼는다. 모든 불법은 범부의 인식현상으로써 성품을 삼는다. 모든 불법은 더러운 집착이 없음으로써 성품을 삼는다. 진여를 성취하여 모든 장애가 더럽힐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불법은 물들고 집착할 수 없어서 모든 부처님께서 세상에 출현하더라도 세간의 법에 물들지 않는다. 따라서 부처님의 법이 매우 깊다고 말한다. 바라밀을 수행하고, 중생을 성숙시키며, 불토를 청정하게 하기 위해서 그리고 모든 부처님의 법을 이끌어 섭지하기 위하여 보살삼마제의 업의 차별을 알아야 한다.

08. 의혜학승상(依慧學勝相)

이와 같이 이미 의정학차별(依定學差別)을 설하였다. 의혜학차별(依慧學差別)은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무분별지의 자성·의지·연기·경계·상모·입구난(立救難)·섭지·반류(伴類)·과보·등류(等流)·출리(出離)·구경(究竟)·행선(行善)·가행·무분별지 뒤에 얻는 지혜의 공덕·무차별의 가행·무분별지와 후득지의 비유·위덕·공용 없는 짓는 사(事)의 매우 깊은 의미로 말미암아 마땅히 의지하는 혜학의 차별을 알아야 하며, 의지하는 혜학의 차별로 말미암아 무분별지의 차별을 알아야 한다.

무분별지의 자성은 다섯 가지의 상을 떠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다섯 가지 상이란 첫째는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는 상을 떠나기 때문이며, 둘째는 각관지(覺觀地)가 아니라는 상을 떠나기 때문이며, 셋째는 멸상수정(滅想受定)의 적정이라는 상을 떠나기 때문이며, 넷째는 색(色)의 자성이라는 상을 떠나기 때문이며, 다섯째는 진실한 실체적 대상[眞實義]에서의 다른 분별이라는 상을 떠나기 때문이다. 이러한 다섯 가지 상을 떠난 지혜 가운데서, 무분별지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가운데 설하여진 무분별지의 자성 가운데서 게송으로 읊어 말한다.

모든 보살의 자성인 
다섯 가지의 상을 떠난 
무분별지의 자성은 
진실한 실체적 대상에서 분별이 없다.



모든 보살의 의지(依止)는 
마음도 아니고 마음이 아닌 것도 아니다.


이 무분별지는 
사유가 빠른 종류가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보살의 인연은 
언어가 있는 문훈습(聞熏習)으로 
무분별지이며, 
이치에 맞게 바르게 사유함이다.



모든 보살의 경계는 
있다 없다고 말할 수 없는 법성이다.


이 무분별지는 
두 가지의 자성이 없는 진여이다.



모든 보살의 상모는 
진여의 경계 가운데이다.


이 무분별지는 
상이 없고 차별이 없다.



상응하는 자성인 실체적 대상이 
분별의 대상이며, 다른 것은 없다.


문자들이 서로 이어지기 때문에 
실체적 대상과 상응함이 성립하므로 
언설을 떠나서는 
지혜가 인식된 것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언어에 있어서 같지 않기 때문에 
모든 것은 언설할 수 없다.



모든 보살이 섭지하는 것은 
이 무분별지다.


이후로 얻는 행을 지켜서 
궁극에까지 생장하게 된다.



모든 보살의 반려[伴]가 되는 것들은 
설하여 두 가지 도이며, 
이 무분별지는 
다섯 가지 바라밀의 품류이다.



모든 보살의 과보는 
부처님의 두 가지 원만한 모임[圓聚]에 있어서 
이 무분별지를 
가행함으로 말미암아 이르러 얻는다.



보살의 등류과(等流果)는 
뒤에 생하는 가운데서 
이 무분별지가 
점차 수승하게 바뀌는 것으로 말미암는다.



모든 보살의 벗어나 떠나는 것이 
얻음과 성취함과 상응하기 때문에 
이 무분별지가 
10지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모든 보살의 구경(究竟)은 
청정한 세 가지 신(身)을 얻음으로 말미암아 
이 무분별지가 
지극히 수승하고 자재(自在)하기 때문이다.



허공과 같이 더럽혀지지 않는 
이 무분별지는 
갖가지 무거운 악업에 물들지 않는다.


오직 믿고 즐거워하기 때문이다.



허공과 같이 청정한 
이 무분별지는 
모든 장애를 해탈한다.


얻음과 성취함으로 말미암음이다.



허공과 같이 물들지 않는 
이 무분별지는 
만약 세간에 출현한다고 하더라도 
세간의 법에 물들지 않는다.



벙어리가 진(塵 : 차별적 대상)을 받아들이고자 구하는 것과 같고, 
벙어리가 대상을 바르게 받아들이는 것과 같다.


벙어리가 아닌 사람이 대상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이 
세 가지 지혜를 이와 같이 비유한다.



어리석은 사람이 대상을 받아들이고자 구하는 것과 같고, 
어리석은 사람이 바르게 대상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다.


어리석지 않은 사람이 대상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이 
세 가지 지혜를 이와 같이 비유한다.


다섯 가지 식이 대상을 받아들이기를 구하는 것과 같고, 
다섯 가지 식이 대상을 바르게 받아들이는 것과 같다.


다섯이 아닌 것이 대상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이 
세 가지 지혜를 이와 같이 비유한다.



식별하지 못하면서 이해하기를 구하는 것과 같고, 
읽어서 바르게 법(法 : 인식현상)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으며, 
받아들인 법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과 같다.


차례로 세 가지 지혜를 비유한다.



사람이 눈을 꼭 감고 있는 것처럼 
무분별도 역시 이러하다.


사람이 눈을 바르게 뜨고 있는 것처럼 
후득지(後得智)도 역시 이러하다.



무분별은 허공과 같아서 
물듦·장애·변이·변제(邊際)가 없다.


허공 가운데 차별적 대상성[色]이 드러나듯이 
후득지도 역시 이러하다.



비유하건대 마니(摩尼)와 하늘의 북[天鼓]이 
사유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일을 이루듯이 
이와 같이 분별하지 아니하고 
갖가지 불사(佛事)를 이룬다.



이것이 아니며 이것이 아님도 아니다.


지혜가 아니며 지혜가 아님도 아니다.


경계와 더불어 차별이 없으니, 
이 지혜를 무분별이라고 일컫는다.


부처님께서는 모든 법(法 : 인식현상)의 자성이 
무분별하다고 설하셨다.


분별의 대상[所分別]이 없기 때문에 
그것이 없으면 분별도 없다.

이 가운데의 무분별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가행의 무분별지이고, 둘째는 무분별지이며, 셋째는 무분별후지이다. 가행이 무분별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인연(因緣)과 인통(引通)과 수습(數習)의 힘이 차별을 생하여 일으키기 때문이다. 무분별지에도 역시 세 가지가 있으니, 지족(知足)과 무전도(無顚倒)와 무희론(無戱論)의 무분별의 차별 때문이다.

무분별후지에는 다섯 가지가 있으니 통달(通達), 억지(憶持), 성립(成立), 상잡(相雜), 여의(如意)의 드러내 보임의 차별 때문이다. 무분별지를 이루어 세우기 위하여 다시 다른 게송을 읊는다.

아귀·축생·인간과 
모든 하늘[天] 등이 응하는 것과 같이 
경계는 하나이나 마음이 다르기 때문에 
그 경계들을 성립하는 것을 허용한다.



과거와 미래에 
꿈과 두 그림자 가운데 
지혜는 있지 않는 경계를 연한다.


이것은 변하지 아니하고 경계가 된다.



만약 차별적 대상이 성립하여 경계가 된다면 
무분별지는 없다.


만약 이것이 없다면 불과(佛果)가 
마땅히 얻어지는 이러한 처(處)는 없다.


자재를 얻은 보살은 
원락(願樂)의 힘으로 말미암아 
여의지(如意地) 등을 이룬다.


선정을 얻은 사람도 역시 이러하다.



간택(簡擇)을 성취한 사람은 
지혜가 있고 선정을 얻은 사람이다.


내면에서 모든 인식현상을 사유하여 
실체적 대상[義]과 같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무분별을 닦을 때에 
모든 실체적 대상은 드러나지 않으니 
차별적 대상이 없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러하기 때문에 식(識)도 없다.

이 무분별지는 곧 반야바라밀이다. 이름이 다를 뿐 실체는 같다. 경전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만약 보살이 반야바라밀에 머문다면 처에 머물지 않는 수행으로 말미암아 나머지 바라밀을 원만하게 수행할 수 있다.

무엇이 처에 머물지 않는 수행이며, 나머지 바라밀을 원만하게 수행하게 하는가? 다섯 가지 처를 떠나는 것을 말한다. 첫째는 외도의 아집처(我執處)를 떠나는 것이며, 둘째는 진여를 보지 못한 보살의 분별처를 떠남이며, 셋째는 생사와 열반의 두 가지 극단의 처[二邊處]를 떠남이며, 넷째는 오직 혹장(惑障)만을 없애고 만족함을 아는 행의 처[知足行處]를 떠남이며, 다섯째는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일을 관하지 않고 무여열반처(無餘涅槃處)에 머무는 것을 떠남이다.

성문승의 지혜와 보살의 지혜의 차별은 어떠한가? 마땅히 알아야 한다. 무분별의 차별로 말미암아 음(陰) 등의 모든 법문을 분별하지 않기 때문이며, 한 부분이 아닌 차별로 말미암아 두 가지 공(空)의 진여를 통달하여 모든 인식되는 상[所知相]에 들어가기 때문이며, 모든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일을 의지하기 때문이며, 머묾이 없는 차별로 말미암아 무주처열반에 머물기 때문이며, 항상하다는 차별로 말미암아 무여열반에서 끊어지고 다하는 변제(邊際)에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며, 위없는 차별로 말미암아 실제로 이보다 수승한 다른 승(乘)은 없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게송으로 읊는다.

지혜의 다섯 가지 수승한 차이로 말미암아 
대비(大悲)에 의거하여 복을 닦는다.


세간과 출세간의 부유함과 즐거움, 
이것이 멀지 않다는 것을 말한다.

만약 보살이 세간에 실제로 있다면 역시 다시 알 수 있다. 만약 보살이 이와 같이 계학과 정학과 혜학의 공덕의 모임[聚]에 의거하여 상응한다면 열 가지 자재에 도달하여 모든 남을 이익되게 하는 일에 있어서 비길 데 없는 수승한 능력을 얻는다.

어찌하여 세간 가운데서 중생이 무거운 고통과 어려움을 당함이 있는가? 보살은 그 중생들에게 업(業)이 있어서 수승하고 즐거운 과(果)를 장애하고 고통스러운 보(報)를 감수(感受)할 수 있다는 것을 보기 때문이며, 보살은 이와 같이 비록 그들에게 즐거움을 모두 베풀더라도 곧 그들이 선을 일으키는 것을 장애한다는 것을 보기 때문이며, 보살은 그들이 즐거움을 갖추지 않아도 생사를 싫어하고 미워함을 눈앞에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을 보기 때문이며, 보살은 그들에게 즐거움을 모두 베푼다고 하더라도 모든 악법을 생하여 키우는 인연이라는 것을 보기 때문이며, 만약 그들에게 즐거움을 모두 베푼다면 곧 나머지 헤아릴 수 없는 중생을 핍박하고 해치는 인연이 된다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살은 이와 같이 수승한 능력이 없지 않다. 세간에서도 역시 이러한 중생이 나타남이 있다. 이 가운데 게송으로 읊는다.

업(業)이 선을 장애함, 
싫어함을 나타냄, 악법이 늘어남, 
남을 해치는 것을 보기 때문에 
그 중생은 보살의 보시를 감수(感受)할 수 없다.

09. 학과적멸승상(學果寂滅勝相)

이와 같이 혜학에 의한 차별을 이미 설명하였다. 적멸의 차별은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모든 보살의 혹이 멸하는 것이 곧 무주처열반이다. 이것의 모습은 어떠한가? 혹을 버리고 떠나면서 생사를 버리고 떠나지 않으며, 둘이 의지하는 것의 전의(轉依)가 상이 된다. 이 가운데 생사는 의타성의 부정품인 한 부분을 체로 삼으며, 열반은 의타성의 정품인 한 부분을 체로 삼는다. 본의(本依)란 정품과 부정품의 두 부분을 갖춘 의타성이다. 전의란 대치를 일으킬 때에 이 의타성은 부정품의 부분으로 말미암아 본성을 영원히 바꾸며 정품의 부분으로 말미암아 본성을 영원히 이룬다. 만약 이 전의를 간략하게 설한다면 여섯 가지의 전변이 있다. 첫째는 힘을 더하고 혹의 공능을 줄이는 전변이니, 신락위(信樂位)를 좇아서 문훈습의 힘에 머물기 때문이다. 번뇌가 있으니 부끄러워하고 행하여 부끄러워함으로 말미암아 약하게 행하거나 혹은 영원히 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는 통달의 전변이니, 이미 지(地)에 오른 모든 보살을 말한다. 진실과 허망이 드러나는 것이 가능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전변은 초지로부터 6지까지다. 셋째는 수습(修習)의 전변이니, 아직 장애를 떠나지 못한 사람으로 말미암으며 모든 상이 현현하지 않고 진실이 현현하는 의지이기 때문이다. 이 전변은 7지로부터 10지까지이다. 넷째는 과가 원만한 전변이니, 이미 장애를 떠난 사람으로 말미암으며 모든 상이 현현하지 않고 청정한 진여가 드러나서 모든 상의 자재에 도달하여 얻는 의지이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하열한 전변이니, 성문은 인식 주관이 자성이 없음[人無我]을 통달하였기 때문에 한결같이 생사를 배척하여 영원히 생사를 버리고 떠나게 되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넓고 큰 전변이니, 보살은 인식현상이 자성이 없음[法無我]을 통달하였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서 적정의 공덕을 관하기 때문이며, 버리고 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보살이 하열한 전변의 위계에 있다면 무슨 과실이 있는가?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일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보살의 법을 지나쳐 떠나며, 낮은 승(乘)의 사람들과 똑같은 해탈을 얻는다. 이것이 과실이 된다.

모든 보살이 넓고 큰 전변의 위계에 있다면 무슨 공덕이 있는가? 생사의 법 가운데서 스스로 전의하여 의지가 되기 때문에 모든 자재를 얻으며, 모든 도 가운데서 모든 신(身)을 드러낼 수 있으며, 세간의 부유함과 즐거움에서 그리고 삼승에서 여러 가지 교화의 방편인 승능(勝能)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바른 가르침에 안립할 수 있다. 이것이 넓고 큰 전변의 공덕이다. 이 가운데 게송으로 읊는다.

범부에 있어서 진실을 엎어버리고 
그들에게 허망을 드러낸다.


보살에 있어서 한결같이 
허망을 버리고 진실을 드러낸다.



허망과 진실을 
드러내지 않고, 드러낸다.


보살의 전의이며, 
뜻과 같이 해탈하기 때문이다.



생사와 열반에서 
지혜를 일으킨다면 평등하다.


생사가 곧 열반이니, 
이 둘에는 이것과 저것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사에서 
버리지 않고 버리지 않음도 없다.


열반에서도 이와 같으니, 
얻음이 없고 얻지 않음도 없다.

10. 지차별승상(智差別勝相)

이와 같이 이미 적멸의 차별을 설하였다. 지혜의 차별은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부처님의 세 가지 신(身)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차별을 알아야 한다. 첫째는 자성의 신이며, 둘째는 수용(受用)하는 신이며, 셋째는 변화하는 신이다.

이 가운데 자성신이란 모든 여래의 법신이다. 모든 인식현상에 있어서 자재하는 의지이기 때문이다.

수용신이란 모든 부처님의 여러 가지 토(土)와 대인집륜(大人集輪)에 의지하여 드러내어지며, 이것은 법신으로써 의지를 삼으며, 모든 불토의 청정한 대승의 인식현상이 즐거움을 받고 씀을 받는 인이기 때문이다.

변화신이란 법신으로써 의지를 삼는다. 도솔타천(兜率陀天)에 머무는 것으로부터 물러나 생을 받으며, 배움을 받고 탐욕의 대상을 받으며, 출가하여 외도(外道)에게 가서 닦게 된 고행과 위없는 보리를 얻어 법륜을 굴리고 큰 반열반(般涅槃) 등의 사(事)에 의해 드러내어지기 때문이다.

모든 부처님과 여래께서 갖는 법신은 어떤 모습인가? 만약 그 모습을 간략하게 설한다면 다섯 가지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가운데 울타나(鬱陀那)의 게송을 읊는다.

상(相)·증득(證得)·자재(自在)와 
의지(依止)·섭지(攝持)와 
차별(差別)·덕(德)·심심(甚深)과 
억념[念]·업(業) 등이 부처님의 몸을 밝힌다.

다섯 가지 상이란 첫째는 법신은 전의로써 상을 삼는다. 모든 장애와 부정품분의 의타성이 이미 멸하여 모든 장애를 해탈한다. 모든 법에 있어서 자재를 얻어 능(能)이 되며, 청정성인 부분의 의타성인 전의가 상이 되기 때문이 다.

둘째는 희고 맑은 법을 상으로 삼는다. 6바라밀이 원만함으로 말미암아 법신에게 열 가지 자재를 얻기에 이르러 승능(勝能)을 상으로 삼기 때문이다. 무엇이 열인가? 첫째는 명(命)의 자재이며, 둘째는 심(心)의 자재이며, 셋째는 재물의 자재이니, 이 셋은 보시바라밀이 원만함으로 말미암아 이룰 수 있다. 넷째는 업의 자재이며, 다섯째는 생의 자재이니, 이 둘은 지계바라밀이 원만함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수 있다. 여섯째는 욕락(欲樂)의 자재이니, 인욕바라밀이 원만함으로 말미암아 이룰 수 있다. 일곱째는 원(願)의 자재이니, 정진바라밀이 원만함으로 말미암아 이룰 수 있다. 통혜(通慧)의 자재이니, 이 5신통(神通)에 의하여 섭지되며, 선정바라밀이 원만함으로 말미암아 이룰 수 있다. 아홉째는 지혜의 자재이고, 열째는 법의 자재이니, 이 둘은 반야바라밀이 원만함으로 이룰 수 있다.

셋째는 둘이 없음을 상으로 삼는다. 두 가지 상이 없기 때문이다. 모든 인식현상이 있는 바가 없으며 공(空)한 상이 없지 않아서 상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다시 유위(有爲)와 무위(無爲)의 두 가지가 없음을 상으로 삼는다. 혹과 업의 모임에 의해 생하여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자재를 얻음으로 해서 유위의 상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또한 다시 같다, 다르다는 두 가지가 없음을 상으로 삼는다. 모든 부처님과 여래의 의지는 다르지 않기 때문이며, 헤아릴 수 없는 의지로 말미암아 이것을 입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게송으로 읊는다.

아집이 없기 때문에 
그 가운데 의지의 다름이 없다.


앞에서 많은 의지를 증명하였듯이 
거짓 이름으로 설하니 하나가 아니다.



성정(性情)과 가행(加行)이 다르지만 허망됨이 없고, 
원만하며, 시작이 없기 때문에 
같지 않으며, 다르지 않기 때문에 
많지도 않으며, 진여에 의지한다.

넷째는 항상 머무는 것을 상으로 삼는다. 진여의 청정한 상이기 때문이며, 예전의 원(願)을 끌어당기고 꿰뚫어서 가장 궁극이 되기 때문이며, 마땅히 바른 일을 행하여 끝마치지 않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사의(思議)할 수 없음을 상으로 삼는다. 이 진여의 청정은 스스로 증득한 지혜에 의하여 아는 것이기 때문이며, 비유(譬喩)할 수 없기 때문이며, 각관(覺觀)이 행하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다시 이 법신을 깨우쳐[證] 얻는[得] 것은 어떠한가? 처음부터 얻어진 것으로부터의 촉인가? 서로 섞인 대승법을 연하여 경계가 되는 무분별지와 무분별 뒤에 얻어지는 지혜는 5상수(相修)를 성숙(成熟)하게 닦고 익혀서 모든 지(地)에서 자량(資糧)을 잘 모으며, 미세하여 깨뜨리기 어려운 장애를 깨뜨릴 수 있기 때문에, 금강(金剛)을 삼마제에 비유한다. 다시 이 삼마제는 뒤에 모든 장애를 멸하여 떠나기 때문에 이 때에 의지가 전변함으로 말미암아 깨달아 얻음을 이룬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법신은 몇 가지의 자재(自在)가 있어서 그 가운데서 자재하는가? 간략하게 설한다면 다섯 가지 자재가 있으며, 그 가운데서 자재를 얻는다. 첫째는 정토(淨土), 자신을 드러내 보임, 상호(相好)나 변제(邊際)가 없는 음성, 볼 수 없는 정수리의 자재이니, 색음(色陰)의 의지가 전변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상실하지 않고 헤아릴 수 없이 큰 안락함에 머무는 자재이니, 수음(修陰)의 의지가 전변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모든 명자(名字)와 문구(文句)의 모임[聚]들 가운데 모두 갖추어서 바르게 설하는 자재이니, 상(相)의 차별을 집착하는 상음(想陰)의 의지가 전변하기 때문이다. 넷째는 변화시킴[變化]과 고쳐서 바꿈[改易]과 큰 모임을 이끌어 섭지함과 하얗고 깨끗한 품류를 끌어당김의 자재이니, 행음(行陰)의 의지를 전변하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현료지(顯了智)·평등지(平等智)·회관지(廻觀智)·작사지(作事智)의 자재이니, 식음(識陰)이 의지를 전하기 때문이다.

이 법신은 몇 가지 법을 의지로 삼는가? 간략하게 설한다면 오직 세 가지이니, 모든 부처님과 여래의 여러 가지 머무는 곳[住處]의 의지이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게송으로 읊는다.

모든 부처님과 여래께서는 다섯 가지 기쁨을 받는다.

모든 인(因)은 스스로의 계(界)를 얻기 때문에 
이승은 깨닫지[證] 못함으로 해서 기쁨이 없다.

기쁨을 구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불계(佛界)를 깨닫는 것이 필요하다.

공능이 무량함과 행하여야 하는 일을 세움으로 말미암아, 
법의 훌륭한 맛과 바라던 덕(德)을 이루는 것으로 말미암아, 
가장 수승한 기쁨을 얻어 잃지 않으며, 
모든 부처님께서는 네 가지가 다함이 없음을 항상 본다.

여러 가지 수용신(受用身)의 의지가 모든 보살의 선근을 성숙시키게 되기 때문이며, 여러 가지 화신의 의지는 성문과 독각의 선근을 많이 성숙시키게 되기 때문이다. 이 법신을 섭지하는 불법이 몇 가지가 있다고 알아야 하는가? 간략하게 설한다면 여섯 가지가 있다. 첫째는 청정한 부류의 법이니, 아리야식의 의지를 전변하기 때문이며, 법신을 증득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과보의 부류인 법[果報類法]이니, 색이 있는 근[有色根]의 의지를 전변하기 때문이며, 과보인 수승한 지혜를 증득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머무는 부류의 법[住類法]이니, 욕계의 대상[欲塵]을 받아들여 행하는[行] 의지를 전변하기 때문이며, 헤아릴 수 없는 지혜가 머물기 때문이다. 넷째는 자재하는 부류의 법[自在類法]이니, 여러 가지 업 등을 섭지하여 자재하는 의지를 전변하기 때문이며, 이것으로 말미암아 모든 시방세계에서 걸림이 없는 6신통의 지혜가 자재하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언설하는 부류의 법[言說類法]이니, 모든 언설을 견문각지(見聞覺知)하는 의지를 전변하기 때문이며, 이것으로 말미암아 모든 중생의 마음을 만족하게 채울 수 있는 바른 설법의 지혜가 자재하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뽑아내어 구제하는 부류의 법[拔濟類法]이니, 모든 재앙과 횡액과 과실을 뽑아내어 구제하려는 뜻의 의지를 전변하기 때문이며, 이 모든 중생의 재앙과 횡액과 과실을 뽑아내어 구제하는 지혜가 자재하기 때문이다.

모든 부처님과 여래의 법신이 이와 같은 여섯 가지 부류의 법에 포섭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모든 부처님의 법신은 차별이 있다고 말할 수 있기도 하고, 차별이 없다고 말할 수 있기도 하다. 의지와 뜻을 씀[意用] 그리고 업이 다르지 않기 때문에 차별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헤아릴 수 없는 정각(正覺) 등의 일로 말미암아 차별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법신과 같이 수용신도 역시 이러하다. 의지와 업이 다르지 않기 때문에 차별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의지 주체의 차별로 말미암아 차별이 없지 않으니, 헤아릴 수 없는 의지가 전의하기 때문이다. 변화신은 수용신과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법신은 몇 가지 공덕과 더불어 상응한다고 알아야 하는가? 가장 청정한 4무량(無量)과 더불어 상응하며 8해탈(解脫)·8제입(制入)·10일체입(一切入)·무쟁(無諍)삼마제·원지(願智)·4무해해(四無閡解)·6통혜(通慧)·32대인상(大人相)·80소상(小相)·네 가지 모든 상이 청정함[四種一切相淸淨]·10력(力)·4무외(無畏)·4무호(無護)·3념처(念處)·습기를 뽑아내어 없앰[拔除習氣]·잊고 상실함이 없는 법[無忘失法]·대비(大悲)·18불공법(不共法)·모든 상이 가장 수승한 지혜[一切相最勝智] 등의 모든 인식현상[法]과 더불어 상응한다. 이 가운데 게송으로 읊는다.

중생에 대하여 크게 연민하며[大悲], 
모든 결박(結縛)의 의(意)를 떠나지만 
중생의 의(意)를 떠나지 않으며, 
이익되고 즐거운 의를 얻으므로 엎드려 예경한다.



모든 장애를 해탈하고 
세간의 지혜를 항복시킨 사람으로 
인식되는 것[應知]에 지혜가 두루 가득하고 
마음을 해탈하였으므로 엎드려 절한다.



모든 중생에게서 남음이 없이 
모든 혹을 멸할 수 있으며, 
혹을 해치며, 더러움에 물듦이 있는 것(중생)을 
항상 연민하므로 엎드려 절한다.



공용(功用)이 없고 집착이 없으며, 
장애도 없어서 항상 적정(寂淨)하다.


모든 중생의 어려운 문제[難問]를 
풀어줄 수 있으므로 나는 엎드려 절한다.



대상[依 : 所依]과 인식 주관[能依]에 대해 
응하여 말과 지혜를 설한다.


설함에 있어서 장애가 없으므로 
설하는 사람에게 나는 엎드려 절한다.



모든 중생은 존귀한 사람을 보고서 
믿고 존경하여 수승한 인물이라고 말한다.


다른 사람이 봄으로 해서 맑은 마음을 생할 수 있으니, 
나는 엎드려 절한다.



따라서 그들의 품류와 음성을 따라 
감[往]과 돌이킴[還] 그리고 벗어나 떠남[出離]을 행하며, 
네 가지 모든 상의 청정을 깨달아 알아 
모든 중생을 바르게 가르치니 나는 엎드려 절한다.



수명(壽命)·머묾[住]·버림[捨]을 섭지하여 
변화하고 자성을 고쳐서[改性], 
정(定)과 지혜의 자재를 얻은 
세존께 나는 엎드려 절한다.



방편과 귀의(歸依)와 깨끗함 가운데서 
중생을 장애하며 
대승에서 벗어나 떠난 
마귀를 물리치므로 나는 엎드려 절한다.



지혜[智]·멸(滅)·벗어나 떠남[出離]과 
장사(障事)를 드러내어 설할 수 있으니, 
나와 남에게 이익되고 
삿됨을 항복시키므로 나는 엎드려 절한다.



제지함 없이도 과실이 없고 
더러움과 흐림이 없으니 머묾이 없으며, 
모든 법에 있어서 흔들림이 없고, 
희론(戱論)이 없으니 엎드려 절한다.



대중 가운데서 남을 굴복시키고자 설하실 때 
두 가지 혹을 멀리 떠나고, 
보호하지 않아도 잊고 상실하지 않으며, 
대중을 포섭하므로 나는 엎드려 절한다.



남을 이익되게 하는 일에 있어서 
존귀하신 분은 때를 기다려서 지나가지 않으며, 
짓는 것이 항상 허망하지 않고, 
미혹이 없으니 나는 엎드려 절한다.



모든 행하고 머무는 것에 있어서 
원만한 지혜는 사(事)가 아닌 것이 없으며, 
모든 세상을 두루 아는 
실체(實體)이니 나는 엎드려 절한다.


밤과 낮의 여섯 시간 가운데 
모든 중생계를 관하여 
크게 연민함과 더불어 상응하여 
이익되고 즐거운 의(意)에 나는 예경합니다.



행(行)으로 말미암거나 얻음[得]으로 말미암거나 
지혜로 말미암거나 사[事]로 말미암거나 
모든 것에서 이승에 대하여 
비길 수 없으니 나는 엎드려 절한다.



3신(身)으로 말미암아 존귀하신 분은 
3덕(德)의 상을 갖추고 위없는 깨달음을 얻기에 이른다.


모든 법(法 : 敎法)에 대한 다른 사람의 의심을 
능히 제거할 수 있으니 나는 엎드려 절한다.



계박(繫縛)이 없으니 과실이 없고, 
거침과 흐림이 없으니 머묾이 없으며, 
모든 법에서 흔들림이 없고, 
희론이 없으니 엎드려 절한다.

모든 부처님의 법신은 단지 이것들과 같은 공덕하고만 상응하는 것이 아니고, 다시 그 밖의 다른 공덕과 더불어 상응한다. 자성과 인(因)과 과(果)와 업과 상응하고 사[事]와 행(行)의 공덕과 상응한다. 따라서 모든 부처님의 법신은 위없는 공덕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가운데 게송으로 읊는다.

존귀한 분은 진여를 성취하고 
모든 지(地)를 닦아 벗어나 떠나고, 
다른 사람과 비길 수 없는 위에 이르러서 

모든 중생을 해탈시킨다.


다함이 없음 등의 공덕과 
서로 응하여 세상에 나타나니, 
3륜(輪)에서는 쉽게 볼 수 있으나 
인간과 천상에서는 보기 힘들다.

또한 다시 여래 법신의 깊고 깊음이 가장 깊고 깊다. 이 깊고 깊음을 어떻게 볼 수 있는가? 이 가운데 게송으로 읊는다.

부처님께서는 생함이 없음으로써 생함을 삼고, 
머묾이 없음으로써 머묾을 삼으며, 
공용 없이 사(事)를 지으며, 
네 번째의 식(食)으로 식을 삼는다.



다름이 없고 역시 헤아릴 수 없으며, 
헤아려 셀 수 없지만 하나의 사(事)이다.


가장 견고하면서도 견고하지 않은 업이어서 
위가 없으며, 3신과 서로 응한다.



하나의 법도 깨달을 수 있음이 없으며, 
모든 것이 깨달음이 아닌 것이 없어서 
한 생각 한 생각이 헤아릴 수 없지만 
유(有)가 있지 않음이 드러내어진다.



탐욕이 없으니 탐욕을 떠남[離欲] 또한 없으며, 
탐욕에 의해 벗어나 떠남[出離]을 얻는다.


이미 탐욕과 무욕(無欲)을 알았기 때문에 
탐욕의 법여(法如)에 들어간다.



모든 부처님께서는 5음(陰)을 넘어서서 
5음 가운데 머무신다.


음(陰)과 더불어 하나도 아니고 다르지도 않으며, 
음을 버리지 않고 열반에 드신다.



모든 부처님의 일은 서로 섞여서 
마치 큰 바다의 물과 같다.


나는 남을 이익되게 하는 일을 이미 지었고, 현재 짓고 있으며, 
마땅히 지어야 한다는 이러한 생각이 없다.



과실로 말미암아 세존께서 현현하지 않는 것이 
마치 깨어진 그릇의 달과 같고, 
모든 세간에 두루 가득하니, 
법광(法光)으로 말미암아 해와 같다.



마치 불과 같이 혹은 정각을 얻는 것을 드러내고, 
혹은 열반을 얻는 것을 드러내지만 
이 두 가지가 실제로 있지 않으니, 
모든 부처님께서는 항상 머무시기 때문이다.



여래께서는 나쁜 사(事)에 있어서나 
인도(人道)와 악도(惡道)에 있어서나 
범행(梵行)이 아닌 인식현상에 있어서 
제일(第一)의 머묾과 자성[我]에 머무신다.



부처님께서 모든 처(處)에 행하시거나, 
역시 하나의 처에도 행하지 않으시거나, 
모든 생함에서 드러나는 것은 
6근(根)의 경계가 아니다.


모든 혹을 이미 멸하여 굴복시키니 
마치 독이 주술(呪術)로써 방해되는 것과 같다.


혹으로 말미암아 혹을 다함에 이르니, 
부처님께서는 일체지(一切智)를 증득하신다.



이치[諦]와 혹이 깨달음의 부분[覺分]을 이루고, 
생사가 열반이 되어 
큰 방편을 이룰 수 있다.


따라서 부처님께서는 사의(思議)하기 어렵다.

이러한 의미로 말미암아 열두 가지 깊고 깊음이 생부주업주심심(生不住業住甚深)·안립수업(安立數業)심심·정각(正覺)심심·이욕(離欲)심심·음멸(陰滅)심심·성숙(成熟)심심·현현(顯現)심심·보리열반현현(菩提涅槃顯現)심심·주(住)심심·현현자체(顯現自體)심심·멸혹(滅惑)심심·불가사의(不可思議)심심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모든 보살은 법신을 연하여 부처님을 억념(憶念)한다. 이 억념은 몇 가지 상을 연하는가? 간략하게 설한다면 모든 보살은 법신에 의하여 부처님에게 일곱 가지 상이 있음을 억념하는 것을 닦아 익힌다. 무엇이 일곱 가지인가? 첫째는 모든 부처님께서는 모든 인식현상에 있어서 비길 데 없는 자재에 도달하므로 이와 같이 부처님을 억념하는 것을 닦아 익힌다. 이 억념이 법신과 더불어 하나를 이루게 하기 때문에 닦아 익힌다고 말한다. 모든 세계에서 장애가 없고 변제가 없는 6신통의 지혜를 이르러 얻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게송으로 읊는다.

장애를 당하거나 원인을 갖추지 못한 
모든 중생계가 
두 가지 정(定) 가운데 머물면 
모든 부처님을 자재하지 못한다.

둘째는 여래의 신(身)이 항상 머무니, 진여로 말미암아 빈틈 없이 모든 더러움을 해탈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여래께서는 가장 과실이 없으니, 모든 혹장과 지장을 영원히 서로 떠났기 때문이다. 넷째는 모든 여래의 일은 공용이 없이 이루어지므로 공용을 말미암지 않고 항상 바른 일을 일으켜서 영원히 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여래의 큰 부유함과 즐거움의 위계[富樂位]이니, 모든 불토(佛土)의 가장 미묘하고 청정함이 부유함과 즐거움이 되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여래께서는 가장 더러움에 집착함[染著]이 없으시니, 티끌이 허공을 더럽힐 수 없는 것과 같이 세간에 나와 나타내지만 모든 세간의 법에 물들지 않기 때문이다. 일곱째는 여래께서는 세간에서 큰 일의 씀을 가지시니, 위없는 보리와 큰 열반에 드는 것을 나타내 이룸[現成]으로 말미암아 성숙하지 못한 중생을 성숙시키고, 이미 성숙한 중생은 해탈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게송으로 읊는다.

여래의 마음을 좇아 따르니, 
원만한 덕이 항상하고, 상실하지 않는다.


공용이 없이 
중생에게 큰 법의 즐거움을 베풀 수 있다.



두루 행하여 장애가 없고, 
많은 사람을 평등하고 이익되게 한다.


모든 것은 여러 부처님이라고 
지혜로운 사람은 이러한 억념을 연한다.

또한 다시 모든 부처님과 여래 정토의 청정, 그 상은 어떠하다고 알아야 하는가? 백천 가지 경전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보살장(菩薩藏)을 연기 가운데서 설한다. 불세존께서는 두루 미치는 광명의 7보로 장엄한 곳에 계시며, 큰 광명을 발할 수 있어서 헤아릴 수 없는 세계를 널리 비추니, 헤아릴 수 없는 신묘하게 장식한 계(界)와 처(處)가 각각 성립한다. 큰 성곽의 변제(邊際)는 길이를 재고 용적을 달 수 없으니, 삼계의 행하는 곳을 벗어나 넘어선다. 출출세간[出出世]의 바른 인식현상의 공능에 의해 생하여지므로 가장 청정하고 자재하는 유식으로써 상을 삼는다. 여래에 의해 진정(鎭定)되며, 보살이 안락하게 머무는 곳이다. 헤아릴 수 없는 천(天)·용(龍)·야차(夜叉)·아수라(阿修羅)·가루라(迦樓羅)·긴나라(緊那羅)·마후라가(摩睺羅伽)·사람과 사람이 아닌 이[人非人] 등에 의해 행하여지며, 큰 교법의 맛과 기쁨 그리고 즐거움을 지니게 된다
모든 중생의 모든 이익되는 일을 작용[用]으로 삼는다. 모든 번뇌와 재앙과 횡액으로부터 떠나게 되며, 모든 마귀가 행하는 곳이 아니며, 모든 장엄보다 수승한 여래의 장엄에 의지하는 곳이다. 큰 사념과 지혜 그리고 행을 벗어나 떠나서, 큰 사마타비바사나를 올라탄다. 크게 비었고 상이 없으며 원이 없는 해탈문이 들어가는 곳이다. 헤아릴 수 없는 공덕의 모임으로 장엄하여진 큰 연꽃의 왕으로 의지를 삼는다. 여래께서는 대보중각(大寶重閣)에서 머무신다. 이와 같은 정토의 청정은 색상(色相)의 원만하고 깨끗함·형모(刑貌)·양(量)·처(處)·인(因)·과(果)·주체[主]·도움[助]·권속(眷屬)·지님[持]·업(業)·이익·두려움이 없음·머무는 곳·길·탈 것[乘]·문(門)·의지(依止)의 원만하고 깨끗함을 드러낸다. 앞의 문구로 말미암아 이것들과 같이 원만하고 깨끗함이 모두 현현한다. 또한 다시 이와 같이 정토의 청정함을 받아들여 쓰므로 한결같이 깨끗하고, 한결같이 즐겁고, 한결같이 상실함이 없고, 한결같이 자재하다.

또한 다시 모든 부처님의 법계에는 다섯 가지 업이 있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 첫째는 재앙과 횡액으로부터 구제하는 것을 업으로 삼으니, 오직 나타남으로 말미암아 소경, 벙어리, 미친 것 등의 질병과 재앙 그리고 횡액을 멸하고 제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악도를 구제하는 것을 업으로 삼으니, 악처(惡處)로부터 끌어당겨 뽑아내어 선처에 안립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방편이 아닌 행을 구제하는 것을 업으로 삼으니, 모든 외도들의 방편이 아닌 가행을 항복시켜서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에 안립하기 때문이다.

넷째는 신견(身見)을 행하는 것을 구제하는 것을 업으로 삼으니, 삼계를 넘어 건너가게 되며, 성스러운 도의 방편으로 인도하는 것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승(乘)을 구제하는 것을 업으로 삼으니, 다른 승을 치우쳐 수행하고자 하는 모든 보살과 근(根)과 성(性)을 아직 정하지 못한 성문(聲聞), 그들이 대승을 수행하도록 안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다섯 가지 업에 있어서 모든 부처님·여래께서는 모두 이 업과 함께한다. 이 가운데 게송으로 읊는다.

인(因)·의지[依]·일[事]·의(義)·모든 행(行)이 
다르기 때문에 세간에서 허용되는 업이 다르다.


이러한 다섯 가지 차이는 부처님에게는 없다.


따라서 세상의 장수[世將]는 동일한 업이다.

만약 이러하다면 성문과 독각에 의해 함께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많은 덕(德)은 모든 부처님의 법신과 서로 응한다. 모든 부처님께서는 무슨 뜻으로써 그들에게 모두 일승으로 나아가서 불승(佛乘)과 더불어 같다고 설하시는가? 이 가운데 게송으로 읊는다.

성(性)을 정하지 못한 성문과 
모든 나머지 보살을 
대승으로 이끌어 포섭하여 
자성을 정하므로 일승이라 설한다.



인식현상[法]과 무아(無我) 그리고 해탈 
등 때문에 근성(根性)이 같지 않으므로 
두 가지 의미의 열반을 얻으므로 
궁극[究竟]에 일승을 설한다.

삼세의 모든 부처님께서 하나의 법신을 함께한다면 어찌하여 부처님에 있어서 세대[世]의 수가 같지 않는가? 이 가운데 게송으로 읊는다.

하나의 계 가운데 둘이 없기 때문에 
동시에 원인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헤아릴 수 없다.


차례로 성불한다는 것은 이치가 아니기 때문에 
한때에 많은 부처님께서 계신다는 의미가 성립한다.

모든 부처님의 법신은 한결같이 열반도 아니며, 한결같이 열반이 아님도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이 가운데 게송으로 읊는다.

모든 장애를 떠나고, 
마땅히 지어서 마치지 않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한결같이 열반이며, 
한결같이 열반이 아니다.

어찌하여 수용신은 자성신을 이루지 않는가? 여섯 가지 원인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첫째는 색신(色身)과 행신(行身)으로 말미암아 현현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헤아릴 수 없는 대집처(大集處)의 차별로 말미암아 현현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그들의 욕락(欲樂)을 따라서 보므로 현현하는 자성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넷째는 다르고 다른 견(見)의 자성이 변동하여 현현하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보살과 성문과 하늘 등의 갖가지 큰 집회에서 서로 섞여 화합할 때에 서로 섞여 현현하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아리야식과 생기식에서 전의를 본다는 것은 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용신은 자성신을 이룬다는 도리는 없다.

어찌하여 변화신은 자성신을 이루지 않는가? 여덟 가지 원인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첫째는 모든 보살은 오래 전부터 도솔타천도(兜率陀天道)와 인도(人道) 가운데 무퇴삼마제(無退三摩提)를 얻어서 생을 받으므로 도리에 부합하지 않는다.

둘째는 모든 보살이 오래 전부터 항상 기억하고 예전에 머물던 방서(方書), 계산, 수량, 인상(印相), 공예, 논서를 탐욕의 차별적 대상 가운데서 행하고, 탐욕의 차별적 대상 가운데서 받아들여 쓰는 것을 보살이 알지 못한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셋째는 모든 보살은 오래 전부터 이미 삿된 교법과 바른 교법을 식별하였으니, 외도들에 의해 받들어 모셔지는 그 사람에게 가서 스승을 삼는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넷째는 모든 보살은 오래 전부터 삼승의 성스러운 도의 바른 이치를 이미 통달하여 도를 구하게 되기 때문에 허망한 고행(苦行)을 닦는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다섯째는 모든 보살이 백 구지(拘胝)의 염부제(閻浮提)를 버리고 한 처(處)에서 위없는 보리와 법륜을 굴리는 것을 얻는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여섯째는 만약 위없는 보리의 방편을 드러냄을 떠나서 단지 화신으로써 다른 사람에게 마침내 불사(佛事)를 행한다면, 마땅히 도솔타천에서 정각(正覺)을 이루어야 한다.

일곱째는 만약 이러하지 않다면 어찌하여 부처님께서는 모든 염부제 가운데 평등하게 출현하시지 않는가? 만약 다른 곳에 출현하시지 않는다면 이러한 도리를 입증할 수 있는 아함과 도리는 없다.

여덟째는 만약 화신이 많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두 여래께서 하나의 세계에 함께 나타나신다는 것은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 네 가지 천(天) 아래에 하나의 세계를 포섭하므로 마치 전륜왕이 하나의 세계에서 하나의 주인 혹은 다른 주인과 함께 생한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모든 부처님도 역시 이러하다. 이 가운데 게송으로 읊는다.

부처님의 미세한 화신은 
평등하게 많은 태(胎)에 들어가니, 
상(相)을 갖춘 깨달음을 드러내기 위해 
세간에 내보이신다.

여섯 가지 원인이 있어서 모든 불세존께서는 화신 가운데 영원히 머무실 수 없다. 첫째는 바른 사(事)의 궁극이기 때문에, 이미 해탈하여 중생을 성숙시키기 때문이다. 둘째는 만약 이미 해탈을 얻어서 열반에 들기를 구한다면 그들로 하여금 열반에 들려는 의지를 버리게 하고, 항상 불신(佛身)에 머물기를 얻고자 구하게 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는 그들이 부처님에 대하여 갖는 경망하고 교만한 마음을 제거하기 위해,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깊고 깊은 진여인 법과 바르게 설한 교법을 통달하게 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넷째는 중생으로 하여금 불신(佛身)에 대하여 독실하게 믿는 마음을 일으키고, 거듭 보아서 만족해하는 것을 없애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바르게 설한 것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앎으로 해서 그들로 하여금 자신을 향하여 지극한 정진을 일으키게 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그들로 하여금 속히 성숙한 위계를 얻어 이르게 하여, 스스로를 향하여 짐을 버리지 않고 지극히 정진하게 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게송으로 읊는다.

궁극적인 바른 사(事)로 말미암아 
열반을 즐기는 것을 제거하게 되어 
부처님을 가벼이 교만하게 여기는 것을 버리게 하고 
돈독하게 믿는 마음을 일으켜 세우게 하며 

신(身)을 지향하여 정진하게 하고 
빠르게 성숙하게 하기 위해 
모든 부처님께서는 화신에 있어서 
한결같이 머물지 않기를 바라신다.

모든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발원하고 수행함으로 말미암아 위없는 보리를 찾아 구하지만, 한결같이 열반에 든다는 이러한 일은 도리에 맞지 않다. 본래의 원과 수행과 서로 어긋나는 과는 없기 때문이다.

또한 수용신과 변화신은 항상하지 않기 때문에, 어떻게 모든 부처님께서는 항상 머무는 법으로써 신을 삼는가? 응신과 화신은 항상 법신에 의지하기 때문이며, 응신으로 말미암아 버리고 떠나지 않기 때문이며, 화신으로 말미암아 거듭 일어나 드러나기 때문이다. 항상 즐거움을 받고 항상 음식을 베풀듯이 두 가지 신은 항상 머문다는 것을 이와 같이 알아야 할 것이다. 만약 법신이 시작함이 없는 때로부터 차별이 없고 세어 헤아릴 수 없다고 하더라도 법신을 얻기 위한 공용을 짓지 아니하여서는 안 된다. 이 가운데 게송으로 읊는다.

모든 부처님께서 증득하신 평등하고 헤아릴 수 없는 
이 원인을 중생이 힘써 닦지 않는다면 
증득은 항상 원인을 이루지 않으며, 
바른 원인을 끊어 제거하니, 도리에 맞지 않다.

『아비달마대승장경』 가운데 섭대승(攝大乘)이라고 한다. 이것은 궁극[究竟]을 바르게 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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