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대승론(攝大乘論) 01. 상권

섭대승론(攝大乘論)

무착(無着) 지음 진제(眞諦) 한역 변상섭 번역

섭대승론(攝大乘論) 01. 상권

01. 의지승상(依止勝相)

01) 중명품(衆名品)
02) 상품(相品)
03) 인증품(引證品)
04) 차별품(差別品)

02. 응지승상(應知勝相) ①

02. 응지승상(應知勝相) ②

섭대승론(攝大乘論) 02. 중권

03. 응지입승상(應知入勝相)

04. 입인과승상(入因果勝相)

섭대승론(攝大乘論) 03. 하권

05. 입인과수차별승상(入因果修差別勝相)

06. 의계학승상(依戒學勝相)

07. 의심학승상(依心學勝相)

08. 의혜학승상(依慧學勝相)

09. 학과적멸승상(學果寂滅勝相)

10. 지차별승상(智差別勝相)


섭대승론(攝大乘論) 01. 상권

01. 의지승상(依止勝相)

01) 중명품(衆名品)

섭대승론은 아비달마의 가르침[阿毘達磨敎]이며, 대승의 수다라(修多羅)이다. 불세존 앞에서 바르게 대승구의 정의에 들어간 보살마하살은 대승에 수승한 공덕이 있음을 대승의 교설에 의거하여 드러내고자 하며, 이와 같이 모든 불세존께서는 열 가지 수승한 모습이 있다고 말씀하시니, 설하신 것이 비길 데가 없어서 그 밖의 다른 가르침을 뛰어넘는다. 열 가지 수승한 모습이란 첫째는 응지(應知 : 인식)의 의지(依止)가 수승한 모습이며, 둘째는 응지가 수승한 모습이며, 셋째는 응지에 들어감의 수승한 모습이며, 넷째는 들어감의 원인과 결과의 수승한 모습이며, 다섯째는 들어감의 원인과 결과를 닦는 것의 차별의 수승한 모습이다. 여섯째는 닦음의 차별에 있어서 의지해야 하는 계학(戒學)의 수승한 모습이며, 일곱째는 이 가운데 의지해야 하는 심학(心學)의 수승한 모습이며, 여덟째는 이 가운데 의지해야 하는 혜학(慧學)의 수승한 모습이며, 아홉째는 학의 결과인 적멸의 수승한 모습이며, 열째는 지혜의 차별의 수승한 모습이다. 이 열 가지 정의의 수승한 상으로 말미암아서 여래께서 설하신 바가 그 밖의 다른 가르침보다 우월하다. 대승에서 나타나는 수다라의 문구를 이와 같이 해석하는 것이 진실로 불설(佛說)이다. 또한 어찌하여 이 가운데 간략하게 설명하여 대승이 그 밖의 다른 교설(敎說)보다 수승함을 드러낼 수 있다고 하는가? 이 간략한 해석[略釋]으로 이러한 열 가지 정의를 드러내는 것은 오직 대승에만 있으며, 소승에는 없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아리야식을 설하여 응지의 의지의 모습이라고 하며, 첫째는 의타성(依他性)이며, 둘째는 분별성(分別性)이며, 셋째는 진실성(眞實性)인 세 가지 자성을 설하여 응지의 상이라고 하며, 유식의 가르침을 설하여 응지에 들어가는 모습이라고 하며, 6바라밀을 설하여 들어감의 원인과 결과의 모습이라고 한다. 보살의 10지를 설하여 들어감의 원인과 결과를 닦는 것의 차별의 모습이라고 하며, 보살이 받아 지니며 수호하는 금계(禁戒)를 설하여 닦음의 차별에 있어서의 계학(戒學)의 모습이라 하고, 수능가마(首楞伽摩)와 허공기(虛空器) 등의 정(定)을 설하여 심학(心學)의 모습이라고 하며, 무분별지를 설하여 혜학(慧學)의 모습이라고 하며, 무주처열반을 설하여 학의 결과인 적멸의 모습이라고 한다. 세 가지 불신(佛身), 즉 자성신(自性身)과 응신(應身) 그리고 화신(化身), 이 셋을 설하여 무분별지의 결과의 모습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열 가지 처(處)는 오직 대승에만 있어서 소승과는 다르기 때문에 제일(第一)이라고 한다. 불세존께서는 오직 보살을 위하여 이 열 가지 정의를 설하셨다. 따라서 대승에 의거하여 모든 불세존께서는 열 가지 수승한 모습을 가지고 있으며 설하신 것이 비길 데가 없어서 그 밖의 다른 가르침을 넘어선다. 또한 다시 어찌하여 이 열 가지 수승한 모습을 설한 것이 비길 데가 없으며, 대승을 드러낼 수 있는가? 이 여래의 바른 교설은 소승이 결코 대승이 아니라고 가로막는다. 소승 가운데에서는 이 열 가지 정의를 일찍이 보지 못했다. 하나의 정의를 따라 해석하더라도 단지 대승 가운데의 해석을 볼 따름이다. 또한 다시 이 열 가지 정의는 위없는 보리를 이끌어낼 수 있어서, 성취함이 순차적으로 뒤따라 서로 어긋나지 않으니, 모든 중생이 일체지지(一切智智)를 얻게 하기 위해서이다. 게송으로 말한다.

응지의 의지와 상(相)과 
들어감·원인과 결과·닦음의 차이와 
세 가지 학(學)과 결과인 멸(滅)과 
지혜가 위없는 승(乘)에 포섭된다.



열 가지 정의는 다른 곳에는 없으며, 
이것이 보리(菩提)의 원인이라는 것을 본다.


따라서 대승은 부처님 말씀이며, 
열 가지 정의를 설하심으로 말미암아서 수승하다.

어찌하여 열 가지 정의는 이와 같은 순서로 설하여지는가? 보살은 처음으로 배움에 있어서 마땅히 먼저 모든 법의 여실한 인연(因緣)을 관하여야 한다. 이 관으로 말미암아 12연생(緣生)에서 총명한 지혜를 생하게 된다. 이후에 연생하는 법에서 그것의 체상(體相)을 요별하여야 한다. 지혜로 말미암아 증익(增益)과 손감(損減)의 두 극단[二邊]의 과실을 끊을 수 있다. 이와 같이 바르게 수행하여 마땅히 연하여지는 여실한 모든 상[諸相]을 통달하여야 한다. 차후에 모든 장애로부터 해탈하게 되며, 다음에는 마음이 이미 응지(應知)의 실상을 통달한다. 먼저 행하여졌던 6바라밀을 다시 성취하여 청정케 하고 다시 물러나 상실함이 없게 하여야 할 것이니, 의식 속의 청정함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다시 의식 속의 청정함에 섭지되는 모든 바라밀을 10지의 차별에 의거하여 하나를 좇아서 3아승기겁(阿僧祇劫)을 마땅히 수행하여야 한다. 다음으로 보살의 세 가지 학(學)을 원만하게 하여야 한다. 이미 원만하여진 것은 학의 결과인 열반과 위없는 보리를 차후에도 닦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열 가지 정의의 순서는 이와 같다. 이 순서를 설하는 가운데 모든 대승이 원만하여짐을 얻는다.

처음으로 설하는 이 응지의 의지를 세워 아리야식이라고 한다. 세존께서는 어느 곳에서 이 식을 설하셨으며, 이 식을 설하여 아리야식이라고 하셨느냐? 불세존께서는 아비달마략본(阿毘達磨略本)의 게송에서 설하셨다.

이 계(界)는 시작함이 없는 때부터 
모든 법의 의지이다.


만약 있다면 모든 도(道)가 있으며, 
열반을 증득함이 있다.

아비달마 가운데 다시 게송을 읊어 말씀하셨다.

모든 법이 의지하고, 간직되고, 머무는 
일체종자식이다.


따라서 아리야(阿梨耶)라고 한다.


나는 수승한 사람을 위하여 설한다.

이 아함의 두 게송은 식의 체와 이름을 입증한다. 어찌하여 부처님께서는 이 식을 설하여 아리야라고 하셨는가? 모든 유(有)가 생하는 부정품법(不淨品法)이 이 가운데 숨어 간직되어 과(果)가 되기 때문이며, 이 식이 모든 법 가운데 숨고 간직되어 인(因)이 된다. 또한 다시 모든 중생은 아상(我相)을 취함으로 말미암아 이 식 가운데 간직되기 때문에 아리야식이라고 한다. 아함에 해절경(解節經 : 解深密經)에 설하여진 것과 같은 게송을 읊고 있다.

집지식(執持識)은 심오하고 미세하며, 
법의 종자가 항상 흐른다.


범부에게 나는 설하지 않는다.


그들은 물질[物]을 집착하여 자아[我]로 삼는다.

어찌하여 이 식을 혹은 설하여 아타나식(阿陀那識)이라고 하는가? 모든 색이 있는 제근[有色諸根]을 잡아 유지[執持]할 수 있어서 모든 생을 받는 취(取)의 의지이기 때문이다. 왜냐 하면 색이 있는 모든 근은 이 식에 의해 잡아 유지되어 무너지지 않고 상실되지 않으며, 내지는 뒤의 시기에도 서로 이어져서 생을 받는 때에 취음(取陰)을 생하기 때문이다. 6도(道)의 신(身)은 모두 이와 같은 취이며, 이 취는 식에 의해 잡아 유지되는 것을 사용하기 때문에 아타나라고 이름한다. 혹은 설하여 심(心)이라고 한다. 불세존께서 심·의(意)·식(識)을 말씀하신 것과 같다. 의(意)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그것과 더불어 차제연(次第緣)의 의지를 생할 수 있기 때문에 먼저 멸한 식이 되며, 또한 식이 생하는 의지를 의(意)라고 한다. 둘째는 더러움에 물드는 의가 있으며, 네 가지 번뇌와 더불어 항상 서로 응한다. 첫 번째는 신견(身見)이고, 두 번째는 아만(我慢)이며, 세 번째는 아애(我愛)이고, 네 번째는 무명(無名)이다. 이 식은 그 밖의 다른 번뇌(煩惱)인 식(識)의 의지이다. 이 번뇌인 식은 첫째의 의지로 말미암아 생하고, 둘째의 의지로 말미암아 더러움에 물든다. 진(塵)과 차제를 연함으로 말미암아 분별할 수 있기 때문에 이 둘을 의라고 한다. 어찌하여 더러움에 물든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가? 만약 이 마음이 없다면 독행무명(獨行無明)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 5식과 더불어 비슷한 이 법(法)은 당연히 없다. 왜냐 하면 이 5식은 공통적으로 일시에 스스로의 의지가 있으니, 안(眼) 등은 안근(眼根)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또한 의명(意名)은 당연히 의(義)가 없어야 한다.

또한 무상정(無想定)과 멸심정(滅心定)은 다름이 없어야 한다. 왜냐 하면 무상정(無想定)은 더러움에 물든 마음에 의해 드러내어지는 것이 있고, 멸심정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이렇지 않다면 이 두 가지 정(定)은 다르지 않아야 한다.

또한 더러움에 물듦이 없기 때문에 무상천(無想天)에서는 한 시기에 흐름도 없고 상실함도 없음을 이루어야 한다. 그 가운데 아견과 아만 등이 없다면 그럴 수 있으리라. 또한 모든 시간 가운데 아집을 일으켜서 선과 악과 무기(無記) 가운데 두루하여야 한다. 만약 이러하지 않다면 단지 악심만이 아집 등과 더불어 상응해서만 아(我)와 아소(我所)인 이것이 있으면 행할 수 있고, 선과 무기 가운데서는 곧 행할 수 없다. 만약 두 마음을 동시에 생한다고 정립한다면 이 과실이 없거나, 만약 여섯 번째의 식과 서로 응한다고 정립한다면 이 과실이 있다.

독행무명(獨行無明)과 
이와 유사한 5식이 없고, 
두 정(定)에 차별이 없으며, 
의명(意名)은 의(義)가 없다.


무상천은 아집이 없다면 
한 시기에 생하여 흐름이 없고, 
선과 악과 무기 가운데 
아집은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



염오심을 떠나, 있지 않다고 한다면 
둘과 더불어 셋이 서로 어긋난다.


이것이 모든 곳에 없다면 
아집은 생할 수 없다.



진실한 의(義)를 깨달아 보아버리면 
혹장(或障)이 일어나지 않게 한다.


항상 모든 곳에 행하므로 
독행무명이라고 한다.

이 마음이 더러움에 물들기 때문에 무기성에 포섭되며, 항상 4혹(惑)과 함께 서로 응한다. 색계와 무색계의 혹과 같이 유부무기(有覆無記)이다. 이 두 계의 번뇌는 사마타(奢摩他)에 소장(所藏)되기 때문에, 이 마음이 항상 생하여 없어지지[廢] 않는다. 아리야식을 떠나서는 세 번째의 체를 얻을 수 없다. 따라서 아리야식을 성취하여 의(意)라 해야 한다. 이것에 의지함으로써 종자를 삼아 그 밖의 다른 식이 생할 수 있다. 어찌하여 이 의를 다시 설하여 심(心)이라고 하는가? 많은 종류의 훈습종자가 모인 것이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성문승은 이 마음의 상(相)을 설하지 않으면서 아리야와 아타나라는 이름은 설하는가? 미세한 경계에 섭지되기 때문이다. 왜냐 하면 성문인은 일체지지를 얻게 되는 수승한 위계(位階)가 없다. 따라서 성문인에 있어서는 이러한 교설을 떠나서도 지혜를 성취함으로 해서 본래의 원을 원만하게 하기 때문에 위하여 설하지 않는다. 모든 보살에게는 일체지지를 얻게 되는 수승한 위계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위하여 설하신다. 왜냐 하면 이 지 혜를 떠난다면 위없는 보리를 얻는 이러한 곳은 없다. 또한 성문승에 있어서는 이 식을 다른 이름으로 여래께서 일찍이 드러내셨다. 『증일아함경』에 말씀하신 것처럼 세간에서는 아리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아리야를 갈애(渴愛)하고, 아리야를 익히며, 아리야를 집착한다. 아리야를 멸하기 위하여 여래께서 설하시는 바른 법을 세간은 기꺼이 듣고자 귀를 기울인다. 뜻을 지어 알고자 하여 정근(正勤)을 생하여 일으켜서 이제 아리야를 멸하여 다하는 것을 얻으며, 내지는 여래의 바른 법과 유사한 법을 받아들여 행한다. 여래께서 세상에 나오심으로 해서 이 첫 번째로 희유한 불가사의한 법이 세간에 드러나니 본식과 같다. 이 『여래출세사종공덕경(如來出世四種功德經)』이 다른 정의로 말미암아 성문승에게 이 식을 이미 드러내었다.

또한 마하승기부(摩訶僧祇部)의 아함 가운데서는 근본식(根本識)이라는 다른 이름으로써 이 식을 드러내어 마치 나무가 뿌리에 의지하는 것과 같다고 했고, 미사색부(彌沙塞部)도 역시 다른 이름으로 이 식을 설하여 궁생사음(窮生死陰)이라 일컫는다. 왜냐 하면 색과 심이 어느 때에는 서로 이어짐이 단절되는 것을 볼 수 있지만 이 마음 가운데 그 종자는 단절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응지의 의지인 아타나, 아리야, 질다(質多), 근본식, 궁생사음 등의 소승 가운데의 이 이름으로 말미암아 이 아리야식이 이미 왕로(王路)를 이룬다.

또한 어떤 다른 스승은 심(心)·의(意)·식(識), 이 셋이 단지 이름만이 다르고 그 정의는 동일하다고 집착하는데, 이러한 정의는 옳지 않다. 의와 식이 그 정의가 다르다는 것은 이미 보았으니, 마땅히 심의 정의도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한 어떤 다른 스승은 여래께서 세간에서 아리야를 희락한다고 설하신 것을 집착하여, 앞에서 설한 것과 같이 이 가운데 있는 5취음(取陰)을 설하여 아리야라고 한다. 또한 어떤 스승은 즐거움을 받음[樂受]이 탐욕과 서로 응한다는 것을 설하여 아리야라고 집착한다. 또한 어떤 다른 스승은 신견(身見)을 설하여 아리야라고 집착한다. 이와 같은 모든 스승들은 아함과 닦아 얻음으로 말미암아 아리야에 미욱하여, 이와 같은 집착을 일으킨다. 소승의 가르침과 행을 따름으로 해서 이 스승이 세운 정의는 도리에 맞지 않는다. 만약 어떤 사람이 아리야식에 미욱하지 않다면 소승의 이름에 있어서 이 식을 세우면 그 정의가 가장 수승하다. 어찌하여 가장 수승한가? 만약 취음(取陰)을 잡아서 아리야라고 한다면 악취(惡趣)에서 하나의 도(道 : 趣)를 따라 한결같이 고통을 받는 곳, 거기에서 생을 받는다. 이 취음은 가장 싫어하고 거슬릴 수 있어서, 이 취음 가운데서 한결같이 애착할 수 없으니, 중생이 기뻐하고 즐거워한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왜냐 하면 그 가운데서 중생은 취음이 단절되어 생하지 않기를 항상 원한다. 만약 이 즐거움을 받음이 탐욕과 서로 응한다면 네 번째의 정[第四定]으로부터 그 위의 계(界)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 받아들임이 없다. 만약 사람이 이미 이 받아들임을 얻는다면 상계(上界)를 얻고자 구함으로 해서 곧 싫어함을 생한다. 따라서 중생이 이 가운데서 기뻐하고 즐거워한다는 것은 도리에 부합하지 않는다. 만약 신견(身見)이라면 정법 속의 사람은 무아(無我)를 즐거이 믿으니 신견은 애착할 것이 아니므로, 그 가운데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을 생하지 않는다. 이 아리야식인 중생심을 스스로의 내면에 있는 자아[自內我]로 삼아 집착한다. 만약 도(道 : 途) 가운데서 한결같이 고통을 받음[苦受]을 생한다면 그는 고음(苦陰)이 영원히 멸하여 다시 생하지 않기를 바란다. 아리야식은 아애(我愛)에 의해 얽매여지기 때문에 일찍이 자아를 멸하여 없애기를 기꺼이 바라지 않는다. 네 번째의 정(定) 이상에서 생을 받는 중생은 비록 다시 즐거워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아리야식 가운데서 즐거움 받기를 욕구함이 있으니, 스스로 아애를 좇아 따라서 떠나지 않는다. 또한 정법 안의 사람은 비록 다시 무아를 기꺼이 원해 신견을 피하여 거역하더라도 아리야식 가운데에 역시 스스로 아애가 있다. 아리야라는 이름으로써 이 식을 안립하니 곧 가장 수승하게 된다. 이 이름은 아리야의 다른 이름을 성립시킨다.

02) 상품(相品)

또한 이 식의 상을 세우니, 어떻게 볼 수 있는가? 이 상은 간략하게 설하여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자상을 세우는 것이고, 둘째는 인(因)의 상(相)을 세우는 것이고, 셋째는 과(果)의 상(相)을 세우는 것이다. 자상을 세운다는 것은 모든 부정품법의 습기(習氣)에 의하여 그것이 생할 수 있게 되며, 종자를 섭지하여 그릇[器]을 만드는 것을 자상이라고 한다. 인(因)의 상을 세운다는것은, 이 일체종자식이 부정품법을 생하기 위하여 항상 일어나서 인이 된다. 이것을 인(因)의 상이라고 한다. 과(果)의 상을 세운다는 것은 이 식이 갖가지 부정품법의 시작함이 없는 습기로 인하여 마침내 생할 수 있다는 것이 과(果)의 상이라고 한다.

무슨 법을 습기라고 하는가? 이 습기라는 이름은 무슨 정의를 드러내고자 하는가? 이 법은 그것과 서로 응하여 함께 생하고 함께 멸하며, 나중에 변하여 그것이 생하는 인(因)이 된다. 이것은 드러내어지는 것의 정의이다. 비유하건대 마(麻)가 꽃으로 훈습하는 것과 같이, 마는 꽃과 동시에 생하고 멸한다. 그것이 거듭거듭 생하여 마의 향(香)이 생하는 인이 된다. 만약 사람에게 탐욕 등의 행이 있다면 탐욕 등의 습기가 있다. 이 마음은 탐욕 등과 더불어 같이 생하고 같이 멸한다. 그것이 거듭거듭 생하여 마음의 변이를 생하는 인이 된다. 만약 문혜(聞慧)가 많은 사람[多聞人]에게 많은 습기가 있다면 거듭 들은 것을 사유하여 마음과 함께 생하고 멸한다. 그것이 거듭거듭 생하여 마음을 명료하게 생하는 인이 된다. 이러한 훈습으로 말미암아 견고하게 머무는 것을 얻기 때문에 이 사람은 법(法)을 지닐 수 있게 된다고 말한다. 아리야식에서 이와 같은 도리를 알아야 한다.

이 더러움에 물든 종자는 아리야식과 같은가, 다른가? 다른 물체로 말미암기 때문에 다른 것이 아니고, 이와 같이 화합하여 비록 분별하기 어렵지만 다르지 않지 않다. 아리야식은 이와 같이 생한다. 훈습이 생할 때에는 승묘하고 경이로운 공능이 있으니 설하여 일체종자라고 한다.

어찌하여 아리야식은 오염된 법과 더불어 일시에 번갈아 서로 간에 인(因)이 되는가? 비유하건대 등불이 심지와 함께 생하고 태우는 것과 같이 일시에 번갈아 서로 인이 된다. 또한 갈대 묶음이 일시에 서로 의지하며 도우므로 서 있을 수 있는 것과 같이, 본식은 훈습의 주체와 더불어 번갈아 서로 인이 된다는 그 정의도 이러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식은 오염된 법의 인이 되고, 오염된 법은 식의 인이 된다. 왜냐 하면 이 두 법을 떠나서 다른 인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훈습은 다르지도 않고 여러 종류도 아니면서, 다름이 있고 여러 종류인 모든 법을 지어 생하는 인이 되는가? 비유하건대 많은 실로 묶은 옷이 여러 가지 색이 없었는데, 염색하는 그릇에 넣은 후에는 옷 위에 갖가지 모양이 마침내 나타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아리야식은 여러 가지의 모든 법에 의해 훈습된다. 훈습할 때는 한 가지 성품으로 여러 종류가 없으나, 만약 과(果)를 생하고 물들이는 그릇이 나타나면 헤아릴 수 없는 상모(相貌)가 아리야식에 현현한다.

대승에 있어서 이 연생(緣生)은 가장 미세하고 깊고 깊다. 간략히 설한다면 두 가지 연생이 있다. 첫째는 분별의 자성인 연생이고, 둘째는 애(愛)와 비애(非愛)를 분별하는 것이다. 아리야식에 의지하여 모든 법(法)이 생하여 일어나는 것을 자성을 분별하는 연생이라 한다. 여러 가지 법의 인과 연의 자성을 분별함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다시 12연생이 있으니 애와 비애를 분별한다고 일컫는다. 선도와 악도에서 애와 비애를 분별하여 여러 가지의 다른 인을 생하기 때문이다. 만약 사람이 아리야식에서 첫 번째의 연생에 미혹하다면 혹은 자성이 생사의 인이라고 집착하고, 혹은 숙작(宿作)을 집착하며, 혹은 자재하는 변화를 집착하고, 혹은 여덟 가지의 자재아(自在我)를 집착하며, 혹은 인이 없음을 집착한다. 만약 두 번째의 연생에 미혹하다면 아(我)를 짓는 것[作者]이 받는 것[受者]이라고 집착한다. 마치 여러 타고난 맹인이 일찍이 코끼리를 본 적이 없는 것과 같아서 어떤 사람이 그것을 내보이고 그들에게 만져보고서 깨닫게 하면, 이 맹인들은 혹은 그 코를 만지고, 혹은 그 치아를 만지고, 혹은 그 귀를 만지고, 혹은 그 다리를 만지고, 혹은 그 꼬리를 만지며, 혹은 그 등을 만질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코끼리의 모습이 어떠한가를 물으면 맹인은 답하여 코끼리는 마치 쟁기자루 같다고 할 것이며, 혹은 절구공이 같다고 설명할 것이고, 혹은 키 같다고 설명할 것이고, 혹은 절구통 같다고 할 것이고, 혹은 빗자루 같다고 할 것이고, 혹은 바위덩이 같다고 설명할 것이다. 만약 두 가지의 연생과 무명을 요달하지 못하면 무명으로 타고난 맹인은 자성을 인이라고 말하고, 혹은 숙작(宿作)이라고 말하고, 혹은 자재변화라고 말하고, 혹은 8자재아(自在我)라고 말하고, 혹은 인이 없다고 말하고, 혹은 짓는 것이 받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아리야식의 체상(體相)과 인과상(因果相)을 요달하지 못한다면 마치 저 눈먼 사람이 코끼리의 체상을 알지 못하고 갖가지 다른 설명을 하는 것과 같다. 간략하게 아리야식의 체상을 설하면 과보식이며, 일체종자식이다. 이 식이 모든 삼계의 신(身)과 모든 6도(道)의 4생(生)을 포섭하여 모두 다한다. 이러한 뜻을 드러내기 위해서 게송으로 읊어 말씀하셨다.

외종자[外]와 내종자[內]는 
두 가지에 있어서 밝게 요달하지 못한다.


단지 가명(仮名)과 진실(眞實)일 따름이니, 
일체 종자에는 여섯 종류가 있다.



생각생각에 멸하는 것, 모두 갖추어 있음[俱有], 
다스릴 때까지 좇아 따르는 것, 
결정(決定)하는 것, 인연을 관함, 
스스로의 과를 이끌어 드러내는 것이다.


견고하고 무기(無記)이며 훈습할 수 있어서 
훈습의 주체와 더불어 상응한다.


만약 이와 다르다면 훈습할 수 없다.


이것이 훈습의 체상을 설명하는 것이다.



6식(識)과는 상응하지 않으니, 
세 가지 차별로 서로 어긋난다.


두 생각[二念]은 함께 있지 않으니, 
그 밖에 생하는 경우[生起識]에도 이러하여야 한다.



이 외종자와 내종자는 
생하는 인과 이끄는 인이 될 수 있다.


메말라 죽어도 여전히 상속(相續)하여 
차후에 바야흐로 멸하여 다한다.

비유하건대 외종자와 같이 내종자는 그러하지 않다. 이 의미를 두 구의 게 송으로 드러낸다.

외종자에는 훈습이 없으나, 
내종자는 그렇지 않다.


문(聞) 등의 훈습 없이 
과를 생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이미 지음과 짓지 않음, 
실(失)과 득(得)이 모두 서로 어긋난다.


내(內)와 외(外)가 성립할 수 있으므로, 
내종자는 훈습이 있다.

나머지 식은 아리야식과 달라서 생기식이라고 일컬으며, 일체의 생하는 처(處)와 도는 수용식이라고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중변론(中邊論)』의 게송이 설하는 것과 같다.

첫째는 설하여 연식(緣識)이라 하고, 
둘째는 설하여 수식(受識)이라 한다.


요별하여 받아들이므로 분별이라 하고 
행을 일으키는 것 등의 심법(心法)이다.

이 두 가지 식은 번갈아서 인이 된다. 대승아비달마의 게송에서 설하였다.

모든 법은 식에 숨어 간직되고 
식은 법(法)에서 역시 그러하다.


이 둘은 서로 인이 되고 
역시 항상 사로 과가 된다.

만약 첫 번째의 연생 가운데에서 모든 법이 식과 더불어 번갈아 인연이 된다면, 두 번째의 연생 가운데에서 제법은 무슨 연(緣)인가? 증상연(增上緣)이다. 다시 몇 가지 연이 6식을 생할 수 있는가? 세 가지 연이 있으니, 즉 증상연(增上緣)·연연(緣緣)·차제연(次第緣)이다. 이와 같이 세 가지 연생, 즉 첫째의 궁생사연생(窮生死緣生)과 둘째의 애증도연생(愛憎道緣生) 그리고 셋째의 수용연생(受用緣生)은 네 가지 연을 빠짐없이 갖춘다.

03) 인증품(引證品)

이 아리야식을 이미 여러 가지 이름과 체상으로 말미암아 성립시켰다. 어떻게 이와 같은 여러 이름과 체상으로써 아리야식을 알 수 있는가? 여래께서 체상을 설하신 것도 역시 이러하며, 생기식을 설하지 않으셨다. 만약 이 이름과 상에 의해 세워진 아리야식을 떠난다면 부정품과 정품 등이 모두 성취되지 않으며, 번뇌의 부정품·업의 부정품·생의 부정품·세간의 정품·출세간의 정품 등이 모두 성취되지 않는다.

어찌하여 번뇌의 부정품이 성취되지 않는가? 근본번뇌와 작은 부분의 번뇌에 의해 만들어지는 훈습종자는 6식에서는 성취되지 않는다. 왜냐 하면 안식은 탐욕 등의 크고 작은 두 가지 혹과 함께 일어나고 함께 멸한다. 이 안식은 혹에 의해 훈습되어서 종자를 성립시킨다. 그 밖의 다른 식은 그러하지 않다. 안식이 이미 멸하고 혹은 그 밖의 다른 식이 사이에 일어나면 훈습과 훈습의 의지는 모두 얻을 수 없다. 안식이 앞에서 이미 끊어져 현재 체가 없으며, 혹은 그 밖의 다른 식이 사이에 끼여들어서 이미 멸하여 없는 법으로부터 탐욕이 함께 생함이 있다는 것은 성취될 수 없다. 비유하건대 과거에 사라져 없어져버린 업으로부터 과보가 생할 수 없음과 같다.

또한 안식이 탐욕 등과 함께 동시에 생한다고 하더라도 훈습은 성립하지 않는다. 왜냐 하면 이 종자는 탐욕 가운데서는 머무를 수 없으니, 탐욕은 식을 의지하기 때문이며, 탐욕은 서로 이어져서 견고하게 머무를 수 없기 때문이다. 이 탐욕은 그 밖의 다른 식에서는 역시 훈습이 없다. 의지가 다르기 때문이며, 나머지 모든 식이 같이 생하고 같이 멸하지 않기 때문이다. 같은 종류는 같은 종류와 더불어 서로 훈습하지 못한다. 일시에 같이 생하고 멸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안식은 탐욕 등의 크고 작은 모든 혹(或)에 의해 훈습되지 않으며, 역시 같은 종류의 식에 의해 훈습되지도 않는다. 이와 같이 안식을 사량(思量)한다면 나머지 모든 식도 역시 이와 같이 사량하여야 할 것이다. 또한 만약 중생이 무상천(無想天) 이상으로부터 물러나 타락하여 하계(下界)의 생을 받는다면 크고 작은 혹에 오염된 최초의 식, 이 식이 생할 때에는 종자가 없어야 할 것이다. 왜냐 하면 이 혹의 훈습은 의지와 더불어 함께 이미 지나가서 멸하여 남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혹을 대하여 다스리는 식[對治識]이 이미 생하여 나머지 세간의 모든 식이 모두 사라져 다하였다. 만약 아리야식이 없다면 이 대치식은 크고 작은 혹의 종자와 함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정의는 성립되지 않는다. 왜냐 하면 자성해탈이기 때문이며, 무류심은 혹과 더불어 함께 생하고 멸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나중에 관(觀)에서 나와 세간심을 일으킬 때 모든 혹의 훈습이 오래 전에 이미 끊어져 없어졌으니, 유류(有流)의 의식은 종자가 없이 생하는 것을 이룰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연유로 아리야식을 떠나 번뇌의 오염은 이루어질 수 없다.

또한 어찌하여 업의 염오가 성립될 수 없는가? 행을 연하여 식이 생한다는 부분이 논리를 이룰 수 없다. 만약 이러한 논리가 없다면 취(取)를 연하여 유(有)가 있다는 것도 역시 논리를 성립시키지 못하기 때문에, 업의 염오는 성립하지 않는다.

또한 어찌하여 생의 염오라는 이 논리가 성립하지 않는가? 결생(結生)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사람이 부정지(不靜地)로 물러나 타락하여 마음이 중음(中陰) 가운데에 있어서 염오의 식을 일으키므로, 마침내 생을 받을 수 있다. 이 염오가 있는 식은 중음 가운데에서 멸한다. 이 식은 모태 가운데서 가라라(柯羅邏)에 의탁하여 변이하고 화합하여 생을 받는다. 만약 단지 의식이 변이하여 가라라 등을 이룬다면 이 의식을 의지하여 모태 가운데서 다른 의식의 일어남이 있다고 하는 이러한 정의는 없다. 모태 가운데서 일시에 두 가지 의식이 함께 일어난다는 이러한 정의는 없기 때문이다. 이미 변이한 의식은 의식으로 성립될 수 없다. 의지가 청정하지 않기 때문이며, 오랜 시간 경계를 연하기 때문이며, 연하여지는 경계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이 의식이 이미 변이하였다면 이 때의 의식은 가라라를 이루어서 이 식이 되니 일체법의 종자이며, 이 식을 의지하여 그 밖의 다른 식을 생하게 되니 일체법의 종자가 된다. 네가 만약 이미 변이한 식을 이름하여 일체종자식이라고 집착한다면 이는 곧 아리야식이다. 너는 스스로 다른 이름을 세워 일컬음으로써 의식이라고 말한다. 만약 네가 의지의 주체인 식[能依止識]이 일체종자식이라고 집착한다면 이런 연유로 이 식은 의지함으로 말미암아서 다른 것의 인을 이룬다. 이 의지처인 식이 일체종자식이 아니라면, 의지의 주체인 식을 일체종자식이라고 하는 정의는 옳지 않다. 따라서 이 식은 의탁하여 생하며 변이하여 가라라를 이루니, 의식이 아니다. 단지 과보이며 역시 일체종자라는 정의가 이루어질 수 있다. 또한 만약 중생이 이미 의탁하여 생하며, 나머지 색근(色根)을 잡아 유지할 수 있다면 과보식을 떠나서는 얻을 수 없다. 왜냐 하면 나머지 모든 식이 결정코 다른 의지가 있으며, 오래 견고하게 머무는 것이 아니다. 만약 이 색근에 잡아 지니는 식[執持識]이 없다면 역시 색근은 성립될 수 없으며, 또한 마치 갈대 묶음이 서로 의지하여 함께 일어서듯이 이 식과 명색(名色)은 번갈아 서로 의지하므로 이 식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또한 과보식을 떠나서는 일체의 생하려고 하거나 이미 생한 중생의 식식을 이룰 수 없다. 왜냐 하면 만약 과보식을 떠나 안식 등 가운데의 어느 하나의 식을 따른다면 삼계 가운데서 생을 받은 중생은 식사(食事)를 짓게 되는 공능이 있다는 것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사람이 이 생으로부터 명(命)을 버리고 상정지(上靜地)에 태어난다면 산동(牀)의 염오의식으로 말미암아 그것에서 생을 받는다. 이 염오의 산동식은 정지(靜地) 가운데서 과보식을 떠나서 그 밖의 다른 종자가 있다고 하는 정의는 성립하지 않는다. 또한 만약 중생이 무색계에 태어나서 일체종자인 과보식을 떠나 염오심(染汚心)과 선심(善心)을 생한다면 곧 종자와 의지가 없으므로 염오와 선, 두 가지 식이 모두 이루어질 수 없다. 무색계에서 만약 무류심을 일으키면 나머지 세간심이 이미 멸하여 다하니, 문득 이 도(道 : 趣)를 버려야 한다. 만약 중생이 비상비비상(非想非非想) 가운데 생하여 불용처심(不用處心)과 무류심을 일으킨다면, 곧 두 처(處)를 버린다. 왜냐 하면 무류심은 출세심이기 때문에 비상비비상도(非想非非想道)는 그것의 의지가 아니며, 불용처도(不用處道)도 그것의 의지가 아니다. 곧바로 향하는 열반도 의지가 아니다. 또한 사람이 이미 선업을 짓거나 또는 악업으로써 수명(壽命)을 바르게 버린다면 아리야식을 떠나서는, 혹은 상향으로 혹은 하향으로 순차적인 의지의 냉촉(冷觸)이 이루어질 수 없어야 한다. 이런 연유로 생의 염오는 일체종자인 과보식을 떠나서는 세울 수 없다.

어찌하여 세간의 정품이 성립하지 않는가? 중생이 만약 욕계(欲界)의 욕을 떠나지 못하면 색계의 마음을 얻지 못한다. 먼저 욕계의 선심을 일으켜서 욕계의 욕을 떠나기를 구하여 마음을 관하는 것을 닦아 행한다. 이 욕계의 가행심은 색계심과 함께 일어나고 함께 멸하지 않기 때문에 훈습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욕계의 선심은 색계의 선심의 종자가 아니다. 과거의 색계심이 헤아릴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 밖의 다른 생과 다른 마음에 의해 사이가 가로막혀서, 나중에 정식(淨識)의 종자를 세울 수 없게 된다. 이미 있지 않기 때문이니, 이런 연유로 이 논리가 성립될 수 있다. 즉 색계정심(色界靜心)의 일체종자가 과보식에 차례로 전래하여 인연을 세우게 되며, 이 가행의 선심이 증상연(增上緣)을 세우게 된다. 이와 같이 일체의 이욕지(離欲地) 가운데서 이와 같은 세간청정품이라는 정의를 일체종자인 과보식을 떠나서는 세울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어찌하여 출세간의 정품을 아리야식을 떠나서는 세울 수 없다고 하는가? 불세존께서 “타음(他音)을 들음과 스스로의 정사유(正思惟), 이 두 가지 원인으로 말미암아서 정견이 생함을 얻는다”고 설하셨다. 이 타음을 들음과 정사유는 이식(耳識)과 의식, 혹은 이(耳)·의(意) 두 가지 식을 훈습하지 못한다. 왜냐 하면 만약 사람이 듣는 대로 해석하고 정사유하면 이 때 이식(耳識)이 생할 수 없으며, 의식도 역시 생할 수 없다. 그 밖의 다른 산동분별식(牀分別識)이 사이에 끼여들기 때문이다. 만약 정사유와 더불어 상응하여 생한다면 이 의식은 오래 전에 이미 끊어져 멸하였으며, 문혜에 의해 훈습된 것은 훈습과 함께 이미 없다. 어찌하여 나중에 앞의 식이 종자가 되어 뒤의 식을 생할 수 있겠는가? 또한 세간심은 정사유와 상응하고, 출세정심(出世淨心)은 정견과 더불어 상응하여 어느 때건 함께 생하고 함께 멸한다. 따라서 이 세간심은 정심(淨心)에 의해 훈습되는 것과 관계가 없다. 이미 훈습이 없으니, 출세간의 종자를 이룰 수 없어야 한다. 따라서 만약 일체종자인 과보식을 떠난다면 출세간의 정심은 역시 이루어질 수 없다. 왜냐 하면 이 가운데의 문혜와 사혜의 훈습에는 출세간의 훈습종자를 섭지할 수 있다는 논리가 없다.

만약 염탁(染濁)을 대하여 다스리는 출세간의 정심의 인을 지을 수 있다면 어찌하여 일체종자인 과보식이 부정품을 이루는가? 이 출세심은 예로부터 일찍이 습(習)을 생한 적이 없기 때문에 결코 훈습이 없다. 만약 훈습이 없다면 이 출세심은 무슨 인(因)으로부터 생하는가? 너는 이제 답하여야 한다. 가장 청정한 법계(法界)의 흐름[所流]인 바른 문훈습(聞熏習)이 종자가 되기 때문에 출세심이 생할 수 있다. 이 문혜의 훈습은 아리야식과 같은 성질인가? 다른 성질인가? 만약 아리야식의 성질이라면 어찌하여 이 식을 대하여 다스리는 종자를 이룰 수 있으며, 만약 같은 성질이 아니라면 이 문혜의 종자는 무슨 법으로써 의지를 삼는가? 모든 부처님의 위없는 보리(菩提)의 위계에 이르러서는 이 문혜가 훈습을 생하여 하나의 의지처를 따라 존재한다. 이 가운데서 과보식과 더불어 함께 생한다. 비유하건대 물과 우유와 같아서, 이 문훈습이 곧 본식은 아니지만 이미 이 식을 대하여 다스리는 종자를 이루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하품의 훈습에 의지하여, 중품의 훈습을 생하고 중품의 훈습을 의지하여 상품의 훈습을 생한다. 왜냐 하면 거듭거듭 문(聞)과 사(思)와 수(修)를 가행하기 때문이다. 이 문훈습이 하품과 중품과 상품이라 하더라도 법신의 종자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리야식을 대하여 다스림으로 말미암아 생한다. 따라서 아리야식의 성질에 들어가 포섭되지 않는다. 출세간의 가장 청정한 법계가 흘러나오기 때문에, 비록 다시 세간법이지만 출세심을 이룬다. 왜냐 하면 이 종자는 출세간의 정심이 일어나지 않았을 때에도 일체의 상심(上心)의 혹을 대하여 다스리고, 일체의 악도에 생하는 것을 대하여 다스리며, 일체의 악행(惡行)을 썩혀서 무너뜨려 대치하며, 이끌어 상속하여 이 처(處)에 생하게 할 수 있어서, 모든 불보살을 좇아 따르며 받들어 섬기게 한다. 문훈습이 비록 세간법이지만 처음으로 관(觀)을 닦는 보살이 얻은 것이라도 이 법은 법신이 섭지하는 것에 속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만약 성문과 연각(緣覺)에 의해 얻어진 것이, 해탈신이 섭지함에 속한다면 이 문훈습은 아리야식이 아니고 법신과 해탈신이 섭지함에 속하여 이와 같이 하품으로부터 중품, 상품으로 차례로 점차 증상하고, 이와 같이 과보식은 차례로 점차 감소하여 의지가 곧 바뀐다. 만약 의지가 한결같이 바뀐다면 이 종자가 있는 과보식은 곧 종자가 없어져서 일체가 모두 멸하여 없어진다. 만약마치 물과 우유가 화합하는 것과 같이 본식이 본식이 아닌 것과 함께 생하고 함께 멸한다고 한다면 어찌하여 본식은 멸하고 본식이 아닌 것은 멸하지 않는다고 하는가? 마치 물오리가 우유를 마시는 것과 같다. 마치 세간에서 탐욕을 떠날 때에 부정지(不靜地)의 훈습은 멸하고 정지의 훈습이 증가하여 세간의 전의(轉依)라는 논리가 이루어지듯이 출세간의 전의도 역시 이와 같다.

만약 사람이 멸심정(滅心定)에 들어간다고 하더라도 식이 신을 떠나지 않는다고 설하였으니, 과보식은 정(定) 가운데서도 신을 떠나지 않음을 이루어야 한다. 왜냐 하면 멸심정은 이 식을 대하여 다스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떻게 아는가? 만약 이 정(定)으로부터 나온다면 식은 다시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 왜냐 하면 이 과보식은 서로 이어짐이 이미 끊어졌으니, 의탁하여 생함을 떠났을 때에는 다시 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사람이 멸심정에 마음이 있다고 설한다면 이 사람이 설하는 것은 곧 마음을 이루지 못한다. 왜냐 하면 정(定)이라는 정의가 성립하지 못하기 때문이며, 상(相)과 경계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며, 선근과 더불어 서로 응한다는 허물 때문이며, 악 및 무기와 더불어 서로 응하지 않기 때문이며, 상(想)과 수(受)가 생하여 일어난다는 허물 때문이며, 세 가지가 화합함에 있어서 반드시 촉(觸)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다른 정에도 공능이 있기 때문이며, 단지 상(想)을 멸할 따름이라는 허물 때문이며, 신(信) 등의 선근을 작의(作意)하여 생하여 일어난다는 허물 때문이며, 의지의 주체를 뽑아 제거하는 것은 의지처를 떠나서는 얻을 수 없기 때문이며, 비유가 있기 때문이다.

일체행이 아닌 것처럼 일체행은 이와 같지 않기 때문에, 만약 어떤 사람이 색심(色心)이 차례로 생하는 것은 모든 법의 종자라고 집착한다면 이 집착은 옳지 않다. 왜냐 하면 이미 앞의 과오가 있으면서 다시 다른 허물이 있기 때문이다. 다른 허물이란, 만약 사람이 무상천으로부터 퇴타하거나 멸심정에서 나온다면 이 가운데서 집착하는 것이 성립하지 않으며, 아라한의 최후심도 역시 성립할 수 없다. 만약 차제연(次第緣)을 떠난다면 이 집착은 성립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만약 일체종자인 과보식을 떠나서는 정·부정품은 모두성립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마음이 있다는 정의가 성취되므로 앞에 설하여진 상을 믿어 알아야 한다. 이제 다시 게송을 짓는다.

보살은 선식(善識)에서 
그 밖의 다른 5식(識)을 떠나 
다른 마음이 없다면 
전의(轉依)는 무슨 방편으로 지을 수 있는가? 

만약 대치(對治)가 전의라고 한다면 
멸함이 아니므로 성립하지 않는다.


과와 인이 멸(滅)에 있어서 
차별이 없다는 것은 곧 허물이다.



종자도 없고 법도 없음이, 
전의가 된다고 편든다면 
무(無)에 있어서 두 가지가 없기 때문에 
전의라는 정의는 성립하지 않는다.
04) 차별품(差別品)

이 아리야식의 차별은 무엇인가? 간략하게 설하여 혹은 세 가지 혹은 네 가지 차별이다. 세 가지란, 세 가지 훈습으로 말미암아 다르기 때문에 언설과 아견과 유분의 훈습의 차별이라고 한다. 아견의 훈습의 차별로 말미암으며, 유분의 훈습의 차별로 말미암는다.

네 가지란 이끌어 생함[引生]·과보·연하는 상[緣相]·상모의 차별이다. 이끌어 생함의 차별이란 훈습이 새로 생함이다. 만약 이것이 없다면 행을 연하여 식이 생하고, 취(取)를 연하여 유(有)가 생한다는 이러한 정의가 성립하지 않는다. 과보의 차별이란, 6도(道) 가운데서 행(行)에 의해 이 법이 성숙한다. 만약 이것이 없으면 나중에 생을 받을 때 갖고 있는 모든 법이 생기한다는 이런 정의는 성립하지 않는다. 연하는 상의 차별이란 이 마음 가운데상이 있어서 아집을 일으킬 수 있다. 만약 이것이 없다면 그 밖의 다른 마음 가운데서 아상을 집착하는 경계라고 하는 정의는 성립하지 않는다. 상모의 차별이란, 이 식은 공상(共相)이 있고 불공상(不共相)이 있으니, 생을 받음이 없는 종자의 상[無受生種子相]이고, 생을 받음이 있는 종자의 상[有受生種子相]이다. 공상이란 기세계(器世界)의 종자이다. 불공상이란 각기 다른 내입처(內入處)의 종자이다. 또한 공상이란 생을 받음이 없는 종자이고, 불공상은 생을 받음이 있는 종자이다. 만약 대하여 다스림이 일어날 때 불공종자는 대하여 다스려져서 멸하고, 공종자식(共種子識)에 있어서는 다른 사람의 분별에 의해서도 유지되는 정견(正見)의 청정이다. 마치 관을 닦는 수행인이 한 종류의 사물에 대해서 여러 가지의 원락과 여러 가지의 관찰을 마음에 따라 성립하는 것과 같다. 이 가운데 게송으로 읊는다.

멸하기 어렵고 풀기 어려워, 
설하여 이름하니 공결(共結)이라 한다.


관을 행하는 사람의 마음이 외(外)와 다르니, 
상이 광대하므로 바깥을 이룬다.



청정한 사람은 멸하지 않았다고 해도 
이 가운데서 청정을 보아 
청정한 불국토를 성취하니, 
부처님의 지견[佛見]이 청정하기 때문이다.

다시 다른 게송이 있다.

여러 가지의 원(願)과 견(見)을 
관을 행하는 사람은 이룰 수 있다.


한 종류의 물(物) 가운데서 
그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갖가지의 봄을 이루기 때문에 
소취(所取)는 오직 식만이 있을 뿐이다.

함께하지 않는[不共] 본식차별은 깨우쳐 생을 받음이 있는 종자이다. 만약 이것이 없다면 중생세계를 생하는 연(緣)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함께하는[共] 아리야식은 생을 받음이 없는 종자이며, 이것이 없다면 기세계를 생하는 연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또한 거칠고 무거운 상식(相識)과 미세하고 가벼운 상식이 있다. 거칠고 무거운 상식이란 크고 작은 두 가지 혹의 종자를 말하며, 미세하고 가벼운 상식이란 모든 유루(有漏)의 선법종자를 말한다. 만약 이 식이 없다면 앞의 업으로 말미암은 과는 수승한 공덕이 있는 의지와 수승한 공능이 없는 의지의 차별을 성립할 수 없다.

또한 받음이 있는 상(相)과 받음이 없는 상, 두 가지의 본식이 있다. 받음이 있는 상이란 과보를 이미 숙성시킨 선악의 종자식이며, 받음이 없는 상이란 명언(名言)이 훈습한 종자이다. 헤아릴 수 없는 때의 희론이 종자를 생하여 일으키기 때문이다. 만약 이 식이 없다면 선과 악의 두 가지 업을 짓든지 짓지 않든지 간에 과보와 함께 함으로 말미암아서 수용(受用)하여 다한다는 정의는 성립하지 않는다. 처음 생한 명언의 훈습이 생하여 일어난다는 것도 역시 성립할 수 없다.

또한 비유의 상(相)인 식이 있다. 마술, 아지랑이, 꿈의 영상, 눈병 등과 같이 비유하는 첫 번째의 식은 이러한 일과 유사하다. 만약 이 허망한 분별의 종자가 없다고 하면 이 식은 전도된 인연을 성립하지 못한다.

또한 갖춘 상[具相]과 갖추지 않는 상[非具相]이 있으니, 만약 중생을 갖추어 얽맨다면 갖춘 상이 있고, 만약 세간의 탐욕을 떠남을 얻는다면 손해상(損害相)이 있다. 만약 배움이 있는 성문과 모든 보살이라면 한 부분을 멸하여 떠난 상이 있고, 만약 아라한과 연각과 여래라면 모든 부분에서 멸하여 떠난 상이 있다. 왜냐 하면 아라한과 독각은 혹장(惑障) 하나만을 멸하고, 여래께서는 혹장(惑障)과 지장(智障), 둘 다를 멸한다. 만약 이러한 번뇌가 없다면 순차적으로 멸하여 다한다는 것이 성립될 수 없다.

어찌하여 인연은 선과 악의 두 가지 인식현상인데 과보는 오직 무부무기(無覆無記)인가? 이 무기성은 선과 악, 두 인식현상과 더불어 함께 일어나 서로 떨어지지 않는다. 선과 악의 두 가지 법은 스스로 번갈아서 서로 어긋난다. 만약 과보가 선과 악의 성질을 이룬다면 번뇌를 해탈함을 얻는 방편이 없다. 또한 선과 번뇌를 일으킬 수 있는 방편이 없다. 따라서 해탈과 얽매임이 없다. 이러한 두 가지 정의가 없기 때문에 과보식은 결정코 무부무기성이다.

02. 응지승상(應知勝相) ①

이와 같이 응지(應知 : 인식)의 의지의 수승한 모습을 이미 설하였는데, 인식의 수승한 모습은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이 응지의 수승한 모습은 간략히 설해서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의타성의 상이고, 둘째는 분별성의 상이고, 셋째는 진실성(眞實性)의 상이다.

의타성의 상이란, 본식이 종자가 되며 허망분별에 의해 섭지되는 모든 식의 차별이다. 무엇이 차별이 되는가? 즉 신식(身識)·신자식(身者識)·수자식(受者識)·응수식(應受識)·정수식(正受識)·세식(世識)·수식(數識)·처식(處識)·언설식(言說識)·자타차별식(自他差別識)·선악양도생사식(善惡兩道生死識)이다. 신식·신자식·수자식·응수식·정수식·세식·수식·처식·언설식 등의 이와 같은 식들은 언설로 훈습된 종자로 인하여 생하고 자타차별식은 아견이 훈습한 종자로 인하여 생하며, 선악양도생사식은 유분(有分)의 훈습종자로 말미암아 생한다. 이와 같은 여러 식들로 말미암아 일체의 계(界)와 도(道 : 途)는 번뇌에 의해 섭지된다. 의타성이 상이 되어 허망한 분별이 곧 현현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식들은 허망한 분별에 의해 섭지되지만, 유식(唯識)이 체가 된다. 있지 않는 허망한 진(塵)이 현현하는 의지가 이름하여 의타성의 상(相)이다. 분별성상이란 실제로 진이 없으나, 오직 식만이 있는 체(體)가 현현하여 진이 되는 것을 분별성의 상(相)이라고 한다. 진실성상이란 의타성이다. 이 진(塵)의 상이 영원히 있는 것이 없으나, 이것이 실제로 없지 않음으로 해서 진실성의 상(相)이라고 한다.

신식과 신자식과 수자식으로 말미암아서 안(眼) 등의 6내계(內界)를 섭지한다는 것을 알아야 하며, 응수식으로써 색 등 6외계(外界)를 섭지한다는 것을 알아야 하며, 정수식으로써 안 등 6식계(識界)를 섭지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식들이 근본이 되고, 그 외의 다른 식은 이 식의 차별이다.

이와 같이 많은 식들은 유식(唯識)이다. 진(塵) 등이 없기 때문이다. 꿈 속의 꿈들과 같다. 모든 바깥의 진을 떠나 한결같이 유식이다. 여러 가지의 색·소리·향기·맛·느낌과 집·숲·땅·산 등의 모든 진이 여실하게 현현하지만 이 가운데 하나의 진도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은 비유로 말미암아 일체처는 오직 식만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말들로 말미암아서 마술·아지랑이·눈병 등의 비유를 알아야 한다. 그래서 깨달은 사람이 보게 되는 진(塵)은 일체처에 오직 식이다. 꿈 속의 진과 같아서 꿈에서 깨어난 사람이 꿈 속의 진은 오직 식이라는 것을 요별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깨어 있을 때 어째서 이와 같지 않는가? 이러한 의미가 없지 않다. 그러나 만약 사람이 이미 진여지각(眞如智覺)을 얻었으면 이러한 깨어 있음이 없지 않다. 마치 사람이 바로 꿈 속에 있어서 깨어나지 않으면 이 깨달음은 생하지 않는 것과 같다. 만약 사람이 이미 깨어나면 마침내 이 깨우침이 있다. 이와 같이 사람이 진여지각을 얻지 못하면 이러한 깨우침은 역시 없다. 만약 사람이 진여지각을 이미 얻게 되면 이러한 깨달음은 반드시 있다. 만약 사람이 진여지각을 얻지 못하면 오직 식만이 있는 가운데서 어찌하여 추론적인 지식을 일으킬 수 있다고 하는가? 성스러운 가르침과 진리로 말미암아서 가히 추리하여 헤아릴 수 있다. 성스러운 가르침이란 『십지경』 가운데 불세존께서 “불자여, 삼계란 오직 식만이 있다”고 설하신 것과 같다.

또한 『해절경』에서 설하신 것과 같다. “이 때 미륵보살마하살은 불세존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이 색상(色相)이 정심(定心)이 연한 바의 경계라면 마음과 다른 것입니까? 마음과 다르지 않은 것입니까?’ 불세존께서 말씀하셨다. ‘미륵이여, 심과 다르지 않다. 왜냐 하면 나는 오직 식만이 있다고 설하였으니, 이 색상의 경계는 식에 의해 현현하여지는 것이다.’ 미륵보살이 이르기를 ‘세존이시여, 정경계(定境界)의 색상이 다르지 않다면 어찌하여 이 식이 이 식을 취하여 경계를 삼는다고 하십니까?’ 불세존께서 말씀하셨다. ‘미륵이여, 그 밖의 다른 법을 취할 수 있는 법은 있지 않다. 비록 이 식을 취할 수없다고 하더라도 이와 같이 변하여 생하여서 진(塵)과 같이 현현한다.’ 마치 면(面)에 의해서 면을 보면서 나는 그림자를 본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 그림자는 또 다른[異] 면과 같이 현현한다. 정심도 역시 이러하니, 진과 같이 현현하는 것은 정심과 다르다고 말한다.'”이러한 아함과 성립된 도리로 말미암아 유식의 정의가 드러난다. 어찌하여 이와 같은가?
이 때 관(觀)을 행하는 사람의 마음의 관 가운데 있으면서, 만약 청색과 황색 등 널리 들어오는 색상을 본다면 곧 자신의 마음을 보는 것이지, 파란 것과 노란 것 등의 색(色)인 그 밖의 다른 경계를 보는 것이 아니다. 이 도리로 말미암아서 일체의 식 가운데서 보살은 유식을 이와 같이 추론하여 아는 것을 일으켜야 한다. 푸른 색과 노란 색에 대한 식은 보는 경계가 눈앞에 나타나 있기 때문에 억지식이 아니다. 문혜와 사혜의 두 위계에서는 기억하는 의식(意識)인 이 식은 과거의 경계를 연하여 과거의 경계와 같이 일어난다. 따라서 유식의 정의가 성립할 수 있다. 이 추론적인 지식으로 말미암아서 보살이 진여지각을 얻지 못한다 하더라도 유식의 정의에 대해 추론하여 앎[比智]를 생할 수 있다.

이 여러 가지 식을 앞에서 이미 설하였는데, 예를 들어 마술과 꿈 등과 같은 것들 가운데서 안식 등의 식이 유식의 정의를 이룰 수 있는가? 안식과 색식 등의 식에는 색이 있는데, 어찌하여 유식의 정의를 볼 수 있다고 하는가? 이 식들은 아함과 도리로 말미암아 앞에서와 같이 알아야 한다. 만약 색이 식이라면 어찌하여 색과 같이 현현하는가? 어찌하여 서로 이어져 굳게 머무르며, 앞의 것과 뒤의 것이 서로 같은가? 전도(顚倒) 등의 번뇌의 의지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만약 이렇지 않다면 의(義)가 없는 곳에서 의를 일으키는 전도가 성립할 수 없다. 만약 의(義)의 전도가 없다면 혹장 및 지장, 이 두 가지 번뇌가 곧 성립할 수 없다. 만약 두 가지 장애가 없다면 청정품도 역시 성립하지 않는다. 따라서 모든 식은 이와 같이 생하여 일어난다는 것이 옳다고 믿을 수 있다. 이 가운데 게송으로 읊는다.

어지러운 인(因)과 어지러운 체(體), 
색식과 색이 없는 식, 
만약 앞의 식이 없다면 
뒤의 식도 생할 수 없다.

어찌하여 산식·신자식·수자식·응수식·정수식은 모든 생하는 곳에서 다시 서로 긴밀하게 화합하여 생한다고 하는가? 생을 받아 드러나는 바를 충분히 갖추었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세식(世識) 등은 앞에서 설하는 것처럼 여러 가지 차별이 생하는가? 시작함이 없는 때로부터 생사가 서로 이어져 단절되지 않기 때문이며, 섭지되는 중생계가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며, 섭지하여지는 기세계가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며, 섭지된 것을 헤아릴 수 없이 작사(作事)하여 다시 서로 드러내 보이기 때문이며, 섭지된 차별을 헤아릴 수 없이 섭지하고 받아들여 쓰기 때문이며, 섭지하여진 애착과 미움의 업과 과보를 헤아릴 수 없이 받아 쓰기 때문이며, 섭지된 차별을 헤아릴 수 없는 생과 사가 증득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와 같은 식들을 바르게 판별하여야, 유식의 정의를 성립시키는가? 간략하게 설한다면 세 가지 모습이 있으니, 모든 식은 곧 유식을 이룬다.

오직 식량(識量)만이 있음이니, 바깥의 진(塵)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오직 둘이 있음이니, 즉 상식(相識)과 견식(見識)에 의해 섭지되기 때문이다. 종종(種種)은 섭지된 것을 서로 생하기 때문이다. 이 정의는 어떠한가? 이 모든 식은 진이 없기 때문에 유식을 이루지만, 상이 있고 견이 있어서 안 등의 모든 식이 색 등으로써 상이 되기 때문이며, 안 등의 모든 식이 모든 식으로써 견이 되기 때문이다. 의식은 모든 안식에서부터 법식까지로써 상이 되기 때문이며, 의식(意識)은 의식으로써 견이 되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이와 같이 말하는가? 의식이 분별할 수 있기 때문이며, 모든 식과 같은 진분(塵分)을 생하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게송으로 읊는다.

유량(唯量)과 유이(唯二) 그리고 종종(種種)에 들어감을 
관을 행하는 사람은 설한다.


유식에 통달했을 때와 
식을 굴복시켜 떠난 위계에서.

모든 스승은 이 의식이 여러 가지의 의지로부터 생하여 일어나므로 종종이란 이름을 얻는다고 설명한다. 비유하건대 의업을 지음과 같이 신업과 구업 등의 업의 이름을 얻는다. 이 식이 모든 의지에서 생하는 여러 가지 상모는 두 가지 인식현상[法]과 유사하게 나타난다. 첫째는 진(塵)과 같이 나타나고, 둘째는 분별과 같이 나타난다. 모든 처(處)는 촉(觸)과 같이 나타난다. 만약 유색계에 있다면 의식은 신에 의지하기 때문에 생한다. 비유하건대 색이 있는 모든 근은 신을 의지하여 생하는 것과 같다. 이 가운데 게송으로 읊는다.

멀리 행함과 홀로 행함은 
신 없이 빈 굴 속에 머무르니, 
길들여 굴복시키기 어려운 것을 길들여 굴복시키므로 
곧 마귀의 속박에서 해탈한다.

경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이 안 등의 5근에 연하여지는 경계, 하나하나의 경계를 의식이 취하여 분별할 수 있어서 의식은 그것을 생하는 인이 된다. 다시 다른 설명이 있으니, 12입(入)을 분별하여 설한 것 가운데 이 6식의 모임을 설하여 의입(意入)이라고 한다. 이 처가 본식을 안립하여 의식(義識)이 된다. 이 가운데의 모든 식을 설하여 상식(相識)이라고 한다. 의식(意識)과 의지식(依止識)은 견식(見識)이라고 이름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냐 하면 이 상식은 견이 생하는 인이며, 진과 같이 나타나기 때문에 견(見)을 생하는 의지의 작용을 일으킨다.

이와 같이 모든 식은 유식(唯識)을 이룬다. 어찌하여 모든 진이 눈앞에 나타나는데, 이것이 있지 않음을 아는가? 불세존께서 설하신 것처럼 만약 보살이 네 가지 가르침과 더불어 상응한다면 모든 식에 차별적 대상[塵]이 없음을 찾을 수 있고 들어갈 수 있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서로 다른 인식의 상을 아는 것이다. 마치 아귀·축생·사람·하늘과 같이, 같은 경계에서 견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둘째는 경계가 없는 인식을 보기 때문이다. 마치 과거·미래·꿈·그림자의 대상에 있어서와 같다. 셋째는 공용을 떠나서는 전도가 이루어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앎으로 해서, 마치 실제로 있는 진 가운데서 진을 연하여 식을 일으키는 것과 같이 공용을 말미암지 않고서는 전도를 이루지 않는다는 것을 여실하게 알기 때문이다. 넷째는 3혜(慧)를 좇아서 의(義)를 알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이와 같은가? 첫째는 모든 성인은 관에 들어 마음의 자재함을 얻으니, 원락자재로 말미암아 원하고 즐거워하는 대로 대상이 여러 가지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둘째는 관을 행하는 사람이 이미 사마타를 얻었다면 인식현상[法]을 관하는 가행을 닦으니, 오직 사유를 따라 실체적 대상[義]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셋째는 만약 사람이 무분별지를 얻어서 무분별관에서 나오지 않는다면 모든 진은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경계 등의 실체적 대상[義]이 3혜를 따름으로 해서, 그리고 앞에서 유식의 논리가 성취된다는 것을 끌어와 입증함으로 말미암아서, 오직 식만이 있고 진이 없음을 안다. 이 가운데 여섯 구의 게송이 있어, 앞의 논리를 거듭 드러낸다. 이 게송, 즉 아귀·축생·인·천 등과 같은 게송은 뒤에 의혜학승상장(依慧學勝相章)에서 자세히 분별하여 설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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