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유식보생론(成唯識寶生論) 제1권

성유식보생론(成唯識寶生論)

  • 일명(一名)유식이십순석론(唯識二十順釋論) –

대당(大唐) 삼장법사(三藏法師) 의정(義淨) 한역 현성주 번역

성유식보생론(成唯識寶生論) 제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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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유식보생론(成唯識寶生論) 제5권


성유식보생론(成唯識寶生論) 제1권

중생들이 끊임없이 괴로움에 쫓기면서 
활활 타는 모진 불이 마음속을 태우는데 
보살께서 건지려고 자비심을 일으킴은 
저들의 아픈 마음 자신으로 여김일세.



지혜로 부처 이룰 보살님께 경례하오니 
많고 많은 온갖 번뇌 남김없이 없애시고 
의지할 곳 없는 이의 귀의처가 되시면서 
두려움에 떠는 이를 포근하게 안으셨네.



미소를 지으면서 마의 무리 항복시켜 
밝은 지혜 깨달아 온갖 욕심 벗어나고 
크게 건질 이 대승에 훌륭하게 머무시어 
애욕 번뇌 그 뿌리가 마음임을 아셨구려.

논(論)1)에서 말하기를 대승에 의지해서 말한다면, 삼계(三界)의 성립은오직 식(識)뿐이다2)라고 하였다.

해석해서 말하리라.

또 무슨 뜻에서, 대뜸 대승이라 하였는가.

본래 보살께서 온갖 생명을 건지려는 큰마음을 품고, 금지한 계법[禁戒]을 굳게 지키면서, 온갖 종류의 생명에게 고루 미치어 유정(有情:중생)들을 건진다. 그들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매우 훌륭하고 흠이 없는 행을 이루었다. 지극히 미묘한 길상(吉祥)은, 모든 부처님[善逝]께서 가신 길이며, 또 따라가야 할 한없이 큰길이다. 아울러 이룩한 결과도 지극히 높고 원만하니, 부처님 외에 알 수 없는 경지다. 이 뜻을 근거로 대승이라고 이름하였다. 경에서 말한 대로 대승은 보리살타(菩提薩)가 가야 할 길이며, 부처님의 훌륭한 과위(果位)이기도 하다.

이 대승을 이루기 위하여 유식관(唯識觀)3) 을 닦는 것이다. 유식관은 흠잡을 데 없는 방편의 바른 길이다. 이 모든 것을 위하여, 저 방편을 밝혔으니, 모든 경에는 가지가지 행상(行相)4)으로 널리 설한 내용이 들어 있다. 마치 흙·물·불·바람과 그에 딸린 물건들과 같다. 그 물건의 종류는 알 수 없이 많고, 방위와 장소도 한없이 넓다. 이로 인하여 마음에서 모양이 나타남을 살펴 알고, 드디어 모든 곳에서 바깥 모양을 버리고, 기쁨과 슬픔 따위를 멀리 여읜다. 또 넓은 존재의 바다[有海]에는 시끄러움과 고요함의 차별이 없음을 관찰하고, 저 작은 길을 버린다.

대승의 길을 포기하였거나, 온갖 존재를 즐겨 집착한 무리라면, 대승의 길을 마치 높고 험한 벼랑을 보듯 깊이 두려움을 일으키리라.

올바르게 중도(中道)로 나아가서, 만일 단지 이것이 자기 마음에서 이뤄진다는 사실을 안다면, 한량없는 양식[無邊資糧]을 쉽게 쌓아 모으게 된다. 많은 시간을 들이지 않으니, 마치 작은 노력으로 큰일을 이룰 수 있는 것과 같고, 부처님이 밟아간 길도 오히려 손바닥을 보는 것과 같으리라. 이러한 이치에서 마음속의 소원은 마땅히 뚜렷하게 채워질 수 있어서, 마음을 따라 진행되어 간다.

비록 인정한 바와 같이 바깥 일이 있더라도, 마음속의 의욕이 진실하고 소중한 큰 서원의 힘이기 때문에, 무변한 6바라밀[六度]의 피안(彼岸)에 도달할 수 있다.

만일 이와 다르다면 베풀 수 있는 물건을 다 가지고 보시를 행할지라도, 베풀어야 할 온갖 생명에게 어찌 고루 미치어 그들을 기쁘게 하며, 구하는 마음을 따라 맞출 수 있겠는가. 이것은 문득 끝없는 경계를 지으리니, 베푸는 일은 끝날 기약이 없으리라.

또다시 널리 중생을 이롭게 하는 계율 등을 가지고, 지장이 없이 지킬 수 있는 중생들에게, 저들의 욕구를 따라 다 뜻에 부합하도록 저들의 희망하는 것을 들어 바르게 보시 등을 행한다면, 빠르게 곧 바른 깨달음의 양식을 거둬 모으리라. 이에 따르면 단지 자신의 마음뿐이니, 또 어찌 바깥 경계에서 찾으랴.

만일 바깥 일을 인정한다면, 역시 바른 이치와 뜻이 서로 어긋난다. 그러므로 분명히 알라. 경계는 이 훌륭하고 미묘함을 성립시키지 못한다. 만일 자기 마음을 의지하여, 허망하게 분별을 낸다면, 색 등의 견해를 지어 몸이 나라는 생각[身見] 등을 일으킨다.

실제로는 자기 이외의 모든 유정(有情)을 상대로, 인식의 대상(所緣)을 짓지 않음이 없어야만, 오염(汚染)에서 벗어나는 근거가 생기리라.

그러나 보시 등에서 각기 그 일을 따라서 결과를 얻을 수 있으니, 참으로 식(識) 이외에 경계의 일을 빌리지 않는다.

만일 식 외에 다른 경계가 있다고 한다면, 결국 경계에 의지하여 온갖 번뇌를 일으킨다. 이미 꽉 붙들려 얽매였으니 따라 구르면서 머물게 된다.

이 잘못을 보아야만 벗어날 마음이 생겨서, 깊이 싫어하며 버릴 생각을 품으리라. 큰 깨달음을 바라지 않는다면, 이미 유정세간(有情世間)을 버린 것이니, 어찌 큰 이로움을 베풀려고 하겠는가. 모든 중생을 거둬 주지 않기 때문에 작은 마음으로 자기만을 건질 뿐이요, 큰 행을 이루기는 어려우리라. 그러니 모든 보살[覺情]들은 이를 의지하여 변해야만, 비로소 보리(菩提)의 양식을 길러낼 수 있다. 객진(客塵)5)의 조작된 일[有爲之事]을, 마음속에 싫어하여 등지기 때문에, 조작됨이 없는 법[無爲法]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조작됨이 없는 법 자체가 더 이상 자라나지 않기 때문에, 그 외 다른 소승의 적멸[小寂]을 구한 결과, 치우쳐 한쪽만을 깨닫게 되고. 위없는 깨달음의 산은 무너지고 만다. 만일 바깥 경계를 벗어난다면, 좋아하고 싫어함이 모두 없어져서, 바른 깨달음은 쉽게 이뤄지리라..

크게 가엾게 여김[大悲]을 항상 마음속에 품었다면, 어찌 보리살타의 최고 과위(果位)가 비로소 성취되지 않으랴. 유식(唯識)이란 말도 곧 어긋나며 해롭다고 하리라. 크게 가엾게 여김이란, 반드시 다른 사람을 의탁해서 인연을 맺는 성질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미 바깥 경계를 없애 버리고, 단지 자신의 식(識)만을 인연할 뿐이라면, 이야말로 곧 자신만을 가엾게 여김이 성립하기 때문이다. 남을 이롭게 하려는 뜻을 품어야만, 큰 행이 비로소 세워지는데도, 오직 자기 몸만을 돌아볼 뿐이라면, 중생을 널리 제도하는 이치에 어긋나리라.

비록 바른 책임[雅責]을 진술하더라도, 이로 인해서 허물이 없어지리라. 밖의 상속(相續)을 빌려서, 더욱 불어나는 연[增上緣]이 되면, 자기의 식(識) 가운데에서 중생의 모습이 나타난다. 이를 연(緣)으로 경계를 삼고, 중생의 경계에 크게 가엾게 여기는 마음을 일으켜서 널리 이롭게 한다면, 이는 어긋나지 않는다. 결정해서 이와 같이 마땅히 믿는 마음을 일으켜야 하리라. 가령저 물질의 모양이나 소리 등의 경계에서 낱낱이 추구해 보아도, 거기에는 ‘나’가 없다. 냄새·맛·촉각·법을 다 모아 찾아보아도 역시 ‘나’는 없다. 그렇지만 ‘나’를 찾는 본래의 성품은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미 똑같이 인정한 무아(無我)로 종(宗)을 삼았다면, 앞으로 어디에다 가엾게 여기는 마음을 일으키겠는가.

세상에서 공동으로 인정하는 그 감각의 허망한 집착[情妄執]을 인식 대상의 모양[所緣相]으로 삼고, 그것을 중생[有情]으로 여긴 것이다. 그러니 또한 감각으로 허망하게 집착한 일을, 곧 바깥 경계라고 당당하게 말하지 못하리라. 이를 근거로 마땅히 알아야 하리니, 가령 속으로는 좋아하지 않을지라도, 이치로는 반드시 그렇다고 인정해야 하리라. 단지 자기의 식(識)에서만 유정의 형상[有情相]이 나타날 뿐이며, 이 일을 의지하여 색의 모양[色相]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그 바깥 경계가 없음을 알아야만 한다. 만일 이 식(識)을 떠난다면 결코 얻을 수 없으니, 이는 뒤바뀌었기 때문이다.

뒤바뀜이란 무엇인가.

원래 바깥 경계가 없으나, 보고는 실제의 사물로 여겼으니, 허망하게 집착하지 않음으로써 끝내는 위없이 높은 경지를 이룰 수 있다고 해야, 이치에 맞다, 유식(唯識)의 견해는 진실하기 때문에 위없이 높은 경지[彼]를 얻기 위한 방편으로서, 깊이 도리에 부합하게 된다.

어떻게 해야 이것이 진실한 견해임을 알 수 있겠는가
삼계(三界)가 오직 마음뿐이라는 것을 경전에 밝혀 설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다투는 일이 있어서, 결정을 내리려면, 반드시 두 문(門)을 의지해야 한다. 첫째는 아급마(阿笈摩)6)를 따라야 하고, 둘째는 바른 이치에 부합해야 한다. 성인(聖人)께서 진실[無倒]하게 베푼 말씀이 간직된 전교(傳敎)를 상대에게 믿을 수 있도록 증명하려면, 아급마를 이끈다. 만일 이를 믿지 않는 그 밖의 사람을 위한다면, 마땅히 바른 이치를 펼쳐야 한다. 때로는 두 종류의 사람을 위해서 아급마와 바른 이치 두 가지를 함께 피력하기도 한다. 믿을 수 있는 방법이라야 편안하게 자리를 잡아 머물기 때문에, 그 바른 이치를 펼치는 것이다. 또 그 논설의 바른 이치를 밝히는 데 의지할 곳이 있으면, 아급마를 설한다. 그 바른 이치를 전래된 교리에 의지하지 않음에 따라 아직 참다움을 보지 못한 자는, 그의 온갖 언설이 잘못되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를 일러 ‘억지 생각으로 끼어 맞춤[强思搆]’이라 한다. 그러므로 마땅히 아급마란 곧 바른 이치를 성립시키는 데 의탁해야 할 곳임을 알아야 한다. 혹은 자기가 소속된 부파(部派)에 힘을 쓰기 때문에, 이를 위해 먼저 아급마의 가르침을 편 이래로 뜻을 의지하게 되었다고도 한다
대승(大乘)에 의하여 설했다는 것은, 곧 제7성(第七聲)7)으로서, 그 해야 할 일을 지목한 것이다. 말하자면 저 대승의 이치를 깨닫게 하려고, 유식관(唯識觀)을 설한다는 뜻이다. 유식관이 진실함으로 헛된 성질이 아님은, 아급마에 잘 성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 만일 오직 언설(言說)로서의 대승(大乘)만을 의지한다면, 마치 뜻에서 임시로 탄다[乘]라고 이름한 것과 같이 제7성의 설한 소리[第七聲所說聲]를 따른 것이다. 말하자면 대승의 말과 가르침이 모여 있는 곳의 진실한 구절과 내용[眞實句義]에 의탁하여, 이를 성립시킨 것이다. 단지 오직 이 식 뿐(唯識)이라고 함은, 그 세운 바 종(宗)의 뜻(義)을 대승교(大乘敎)에서 밝히려고 하였으며, 한 모퉁이만을 이끌어서, 세운 바 종(宗)이 자신의 교에 위배되는 일이 없음을 나타낸 것이다.

무엇 때문에 아급마(阿笈摩: 傳敎)라고 이름하였으며, 갑자기 인증(引證)을 시작으로 이 말들을 늘어놓았는가.

말하자면 이치에 맞는 교(敎)를 능숙하게 설하는 이로부터, 저 상속을 빌려서 더욱 불어나는 연[增上緣]이 되어야만, 이 교법(敎法)은 비로소 받아들이는 이로부터 생긴다. 식(識)의 차별은, 자체에 공능(功能)이 있어서, 뚜렷하게 앞에 머문다. 어떤 이는 몸소 듣기도 하고, 어떤 이는 전하여 설하기도 한다. 말로 밝히는 일에서, 그 느낌의 모양과 상태가 차례로 발생함은, 마치 붓이 획을 그어 가는 대로 문장과 글귀가 그 생김새와 단락이 밝고 환하게 나타나는 것과 같다. 그로부터 나왔기 때문에[從他來故] 아급마라고 이름한다.

만일 또 어떤 때는 저절로 마음속의 기억이 되살아나, 본래의 모습을 따라서 식(識)이 비로소 발생한다면, 바로 거기에서 나왔으므로[從彼生故], 아급마의 이름을 얻으리니, 오히려 자기의 말을 부처님의 말씀이라고 이름함과 같으리라. 듣는 이의 뜻 모양이 지혜의 원인이기 때문에, 지혜의 양식[智資糧]이라고 이름하니, 어찌 일체가 단지 오직 식뿐이라고 하지 않으리요. 이것이 인정한 바와 틀리기 때문에, 자신의 말 자체에 서로 어긋남이 있다 하리라.

이치가 결코 그렇지 않다. 색(色)에 별도의 다름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식(識)의 차별에 의하여 색이 건립되었으니, 마치 무색계(無色界)가 소유한 차별과 같다. 무색계는 실로 색(色)이 없으니, 단지 식(識)만을 의지하고 네 종류로 나뉘어, 공무변처(空無邊處) 등을 세운 것과 같다. 나머지 세계8)도 마찬가지다. 가령 또 셋이라고 말한들, 식(識)에 무슨 방해가 있으랴. 오히려 유정(有情)은 비록 차이가 없을지라도, 그러나 욕계(欲界), 색계(色界)의 다름을 확실하게 건립함과 같다. 그 묶인 바를 따라서 색이 차별되었기 때문에, 색(色)이 비록 달라짐이 없을지라도, 별도로 건립함은 잘못이 없다.9)
어째서 경교(經敎)에서 밝힌 오직 마음 뿐[唯心]이라 하지 않고, 이제 종을 세우면서 오직 식뿐[唯識]이라고 하는가.10)
본교(本敎)와 어긋나게 설하니, 참으로 허공을 잡는 듯 하다.

뜻이 돌아갈 자리가 있으니, 참으로 아무런 잘못이 없다. 이미 먼저 심(心)·의(意)·식(識)·요(了)는 이름의 차별(差別)이다라고 인정했기 때문이다. 동일한 체[同體]의 일이므로, 이름을 다 갖추어 진술하지 않았다. 때문에 달라진 이름으로 그 뜻을 선양한 것이다. 곧 오직 알 뿐[唯了]이란 말은, 일반 대중이 공동으로 인정하여 쓰는 말이 아니다. 뜻을 이해시키려고 할진댄, 공동으로 아는 소리를 가지고, 다시 그 외 다른 이름을 펼쳐나가면서, 또다시 경과 서로 틀리지 않음을 밝혀야 한다. 의(意)와 식(識)의 두 소리를 겹쳐 설해서, 저 두[心·了] 뜻에 견주어 보면, 체(體)도 다르지 않고, 그 과(果)도 그대로임을 알 것이다. 만일 반드시 경과 틀리지 않은 점을 밝히기 바란다면, 심(心)과 요(了)의 두 소리는 똑같이 하나의 뜻이다.

경교(經敎)와 틀리지 않음을 밝히면서, 이미 두루 막힌 곳을 풀었으니, 어찌 의(意)와 식(識)을 다시 설해 주기를 바라리요. 그러나 만일 요(了)라는 소리가 심(心)의 달라진 이름이라고 한다면, 심(心)이 심소(心所)를 마주 대할 때, 여기에 별도로 체(體)가 있으리라. 이것은 마치 어떤 경계에서 같이 태어난 무리들이 예전에 잠잤던 일 등을 생각하면, 문득 없어짐과 같다. 이것은 앞과 뒤의 이치가 서로 어긋난다.

참으로 여기에는 잘못이 없다. 근거할 바가 있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심(心)이란 말은, 서로 응함이 있음을 인정함이요. 이 요(了)란 말은 겸해서 그것들을 포섭한 것이다.

만일 이와 같다면, 식(識) 외의 경계를 심의(心意)라고 밝힌 것이므로, 그 심(心)의 자리에는 유(唯) 소리를 두었고, 의(意)에는 취함과 버림을 두어서 이로써 과(果)를 삼았으니, 만일 경계가 없다면 결국 그것은 소용이 없게 되리라.

오직[唯]이란 소리는 부정하지 못하리니, 마땅히 다음과 같이 질책하리라. 당장에 인식 대상의 경계[所緣境]마저 버린다면, 무엇을 가지고 소용없다고 말하랴.

만일 이렇게 이해한다면, 동일하게 생기는 법[同生法]과 인식 대상의 경계가 함께 이 마음을 떠나서 따로 그 자체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한 쪽은 부정해서 버리고, 한쪽은 남겨 둠을 보리라. 어찌 일에 유래[由]의 단서도 없이, 쓸데없는 말로 혼자 즐길 수 있겠는가.

만일 다른 뜻이 없다면, 참으로 힐난한 바와 같으리라. 그러나 경계에 마음이 모여서 공동으로 인연하는 결단(決斷) 등의 일이, ‘똑같은 종류의 성질’임을 근거로, 심소(心所)의 경계에서 심(心)이라는 소리를 임시로 말하고, 또 인정해선 안 될 일을 부정하기 위한 것이므로, 다시 오직[唯]이란 소리를 둔 것이다. 비록 말할 일이 있더라도, 이는 되려 이치에 맞지 않음이 성립한다. 또한 심(心)이라는 말을 취하지 않으면, 한 곳에서 참과 거짓[眞假]의 두 일을 밝히지 못한다. 함께 분명하게 밝히는 데 힘이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牛] 등의 소리처럼 심소(心所)의 자리에 이 심이라는 말을 두어, 심이라는 소리로 말할 때에는, 참된 사실은 곧 버려지게 된다. 마치 시골에서 임시로 소라고 말할 때, 소의 턱이 처져 늘어진 것[垂胡] 등의 일이, 이치로서는 반드시 마땅히 버려야만 하는 것과 같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본(本: 실제의 일)과 의(意:사물의 내용)를 함께 말함도, 또한 마땅히 다시 한 종류의 다른 소리를 만드니, 이를 사용하여 이 뜻을 나타낸다. 혹은 포섭한 소리[攝聲]로 줄여서 나타낼 수도 있다. 세속의 논법(論法)에 의지하여, 마치 하고 싶은 소리로 변론하고 해석하는 것과 같다. 오직 자기의 뜻으로 교묘하게 해석할 수 있을 뿐 아니니, 순서의 실마리[緖系]를 바탕으로, 결정하는 일이 생기는 것인가라고 한다.

역시 또 염(染) 등이 있는 말에 근거하지 않는다. 소달라(蘇呾)11) 가운데 오염(汚染) 등의 설(說)이 있다. 그 부정해서 버리는 데, 그만한 힘의 작용이 없으니, 저기[彼: 곧 緖系]에 또한 있다면, 경계가 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경계 또한 버리지 못하면, 앞서 말한 오직[唯]이란 소리는, 문득 쓸모가 없어진다.

만일 바깥 경계가 이치에 맞지 않아서 반드시 부정해야 된다고 말한다면, 아급마(阿笈摩)에 마달라(滅)12)의 소리가 없으니, 두 곳이 똑같기 때문에, 따라서 어느 한 일을 부정하려면, 결정할 인(因)이 없다. 그러므로 반드시 다른 종(宗)의 견해를 의지해야 하리라.

심왕(心王: 心)과 심소(心所)는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 단지 위치에 다름이 있을 뿐이다. 곧 이 오직[唯]이란 소리는 바깥 일을 부정할 수 있으니, 동일하게 생기는 법은 부정되지 않음이 없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전체적 양상의 소리를 가지고 밝힌 이름은, 그 자체의 일에서 반드시 차별이 없어야 한다. 결정되어 모두 앞에 나타나지 않으니, 부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치로는 곧 전체적으로 포섭한다. 이러한 도리를 서술해서 깨우치려고 하였기 때문에, 마음이란 말을 설하여 서로 응함이 있다고 인정하였다. 만일 심소를 떠난다면, 심왕만이 홀로 남아 있지 않는다. 때문에 마땅히 힐난하지 않아야 하고, 또한 부정할 적에도 똑같이 부정해야 한다. 이 석(釋)을 지을 때, 오직 바깥 경계만을 부정하는 일에 참으로 공능(功能)이 있으니, 서술한 뜻이 이미 성립하였다. 때문에 오직[唯]이란 말을 하였으니, 이치에 따라 그 외 다른 것도 참고하기 바란다.

단지 경계의 일만을 부정한다는 것은, 어찌 이끌어 증명한 바가 아니랴. 이 가운데 할 말이 있다. 그 외 다른 데에서 제외된 심소가 있음을 분명히 아는데, 또 이것이 있음을 용납하니, 마치 여섯 식의 모임[六識身]을 식의 모임[識聚]이라고 이름함과 같으리라.

만일 여기서 식의 모임[識蘊]을 말할 때에, 겸하여 심소를 포섭한다면, 이치가 반드시 그렇지 않다. 상(想),13) 수(受)14)와 그리고 사(思)15)의 모든 심소법(心所法)은 그 외 다른 모임[餘蘊]에는 없기 때문이다.

만일 오히려 색의 모임[色蘊]과 같다고 말한다면, 그 비야나(仳那)16)의 몫을 취하여, 색의 모임이라고 주장함과 같기 때문에, 상(想) 등도 똑같이 그러니 서로 유사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취함을 인정하여 색의 차별에 근거한다고 말한다면., 곧바로 식의 소리[識聲]를 가지고 식의 모임을 설해야 한다. 색 등이 아닌 법은, 이 마음자리[心位]의 차별이니, 오히려 상(想)에서도 마찬가지다.

만일 자리를 가지고 차별한다면, 가려서 차등을 둘 때, 그 색의 종류를 따라서 가리고 나면, 색 등의 소리를 가지고 식에서 건립해야 하니, 이 또한 이치에 맞지 않다. 이것은 이에 곧 식의 모임을 부정하는 격이다. 저로 인해서 색(色)·수(受) 등의 소리가 그 몫이 잘려졌으므로, 위치의 차별 외에 별도로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비야나의 위치 차별을 떠난 외에, 따로 색의 자리가 있으니, 마치 즐거움 등을 나타낸 모양의 상태가, 근심과 고뇌인 것과 같다. 이 모양의 경계에다 식의 소리[識聲]를 안치하였으니, 소가 송아지를 따르는 이치다.

만일 이와 같다면, 식(識)과 여섯 식의 모임[六識身]은, 모두 식의 모임(識蘊)이 되니, 뜻이 서로 어긋난다. 안(眼) 등의 모든 식이 색 등의 형상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서 모두 이 색의 모임이 거둬들인 격이니, 또다시 그 외 다른 뒤섞이고 어지러운 잘못이 있다. 만일 푸른 색깔 등의 모양이 나타날 때, 어기기도 하고, 따르기도 한다면 색(色)과 행(行)의 두 모임[二蘊]은, 곧 어지럽게 뒤섞여진다. 이와 같이 또 즐거움등의 자리에서도 수(受) 등이 서로 뒤섞이게 된다. 이 도리에 준하여 또한 총체와 개별의 뜻을 파(破)하리라.

어떤 이는 말하기를 식은 고르게 미칠 수 있으므로, 총체양상(總體樣相)의 소리이니, 오히려 처음의 양상과 마찬가지다. 이의 개별양상(個別樣相)은 색 등이라고 말하리라. 저것은 이에 현재의 양상[現相]에서, 위치를 차별하는 데 근거가 되는 성질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이 역시 앞의 수(受) 등과 마찬가지로 곧바로 뒤섞이고 어지러운 잘못이 있다. 그러므로 그 심소의 성질을 제외한다는 말은 오히려 소유한 색의 모임을 성립시킨 것과 다르지 않으리라. 유심(唯心)의 소리는 유식(唯識)을 나타냈을 뿐이다.

이 역시 그 심소에서 인식의 대상[所緣]을 가지고 의심을 없앨 수 없으니, 오직이란 글자[唯字]는 무엇을 부정하려는 말인가. 비록 심소가 심왕을 떠나지 않는다고 말할지라도, 이것은 허망한 말이 되고 만다. 그 모양과 상태로 인하여 자체가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말한 바 식이란 것은, 오직 현재의 경계와 뒤섞인 염오[雜染] 등의 성질로서, 단지 애착한다고 관찰하였을 뿐이다.

자체는 밝게 살피지 않았으니, 어떻게 볼 수 있겠는가. 이것이 곧 저것에 대해 자체가 특별히 다르니, 번갈아 엇갈리게 된다.

위에서 서술한 도리(道理)가 이미 많았으나, 그럼에도 본종(本宗)에 대해서는 아직 알맞은 도리를 밝히지 못하였다. 이제 곁가지 논란[傍論]은 그만두고, 마땅히 올바른 종지(宗旨)를 말하리라. 심왕(心王)과 심소(心所)가 가령 체는 다르다고 할지라도, 그 심자(心字)를 가지고 서로 거둬들일 수 있다. 마땅히 이 뜻이 함께 이뤄진 지 이미 오래 되었음을 알아야 한다.

만일 그곳의 온갖 심소법(心所法)이 자기 이름을 가지고 밝혀 말하지 못한다면, 마땅히 이 가운데 총목(摠目)이 소유한 마음의 모임[心聚]은, 마치 조심(調心) 등과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단지 그 마음만을 말하여 이것이 함께 이뤄졌음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오직이란 소리[唯聲]는 단지 그 경계만을 부정할 뿐임을 알아야 한다.17)
만일 경계가 없다면, 어떻게 푸른 색깔, 단맛 등을 분명하게 가려서 알겠는가.18)
이치로는 현재 보이는 것을 부정할 길이 없기 때문에, 누가 감히 현재 보이는 경계를 부정한다고 말하겠는가.

단지 자기의 식(識)에서 경계의 모습이 생겼을 뿐이다. 자기 식의 모양이 받아들일 때, 드디어 곧 보이는 푸른 색깔 등을 헤아리고 집착하여, 바깥 경계처럼 여기면서 머물기 때문이다. 단지 거짓되고 허망한 견해일 뿐이니, 마치 눈어질병자가 머리털·파리 등을 보는 것과 같다. 이것은 이에 단지 이 식(識)의 모양이 달라졌을 뿐이다.

그 파리 등의 모습이 나타남은, 곧바로 허망한 집착으로 파리가 있게 되었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밖에서는 일찍이 파리 등의 자체 성질이 있을 수 없는데도, 어떻게 경계로 여겨서 식을 따로 생겨나게 하는가. 이것이 만약 경계가 없다면, 어떻게 이것을 얻고, 식이 저 모양의 상태와 유사(類似)하게 생기는가. 반드시 본 모습이 있어야만 저 모습과 유사하게 생겨나리라. 마땅히 이럴 때에만 저것과 유사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일은 세상이 모두 함께 인정한다. 마치 아지랑이를 두고 물과 유사하다고 말함과 같다. 그 경계가 없지 아니하며, 실제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살타(薩: 有情)에서 깨달아 아는 상(相)이 생겨남과 같다 하리라.

그러나 색 등의 자체를 떠나서는 별다른 살타의 실제 일이 있을 수 없다. 또한 색 등은 전체적이든 개별적이든 그 자체의 성품에 변하고 무너지는 등의 성질을 지니고 있으나, 가려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마음의 실제 일에 대해서도 또한 그 본성(本性)을 버릴 능력이 없다.

어떤 이는 당연히 살타를 세속에 뒤덮인 존재라고 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도리로는 나도 똑같이 그렇다. 말하자면 색 등의 경계[處]에서, 식을 따라 차별의 성질을 일으킴은 세속에 뒤덮였기 때문이다. 마치 색의 경계를 의지하여 수레 등이라고 집착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단지 감각만이 헤아리며 집착하므로, 그 색 등에 참 성품[實性]이 덮이고 가려졌을 뿐이다. 여러 인연하는 경계에서 자기의 모양과 상태를 만들며, 이를 안치하여 밖에 있는 것처럼 여기고, 이 경계에서 수레 등을 보기 때문이다.

모르겠노라. 세속에 뒤덮임은 무엇을 뜻하는가.

덮여 가렸다는 뜻이다. 세속의 감각을 따르기 때문에, 저로 인해 수레를 타는 등의 경계에서 자기 성품이라고 헤아려 집착하니, 이를 ‘세속에 뒤덮인 존재’라고 한다. 그 참다운 자체[實體]를 덮고, 다른 집착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허망한 감각이 그 형상을 시설해 놓고, 우선적으로 이 일에 대해, 이것을 집착하여 취한다. 비록 실제의 모습이 없을지라도 허망하게 경계라는 생각을 일으킨 것이다. 또 항상하다고 여기는 것 등 감각이 나타낸 모양도 마찬가지니, 무슨 본래의 모양이 있다고 이것을 따라 좇겠는가. 그러므로 비록 식 외(識外)에 참다운 경계가 없을지라도, 식이 나타낸 모양은 그 이치가 잘 이뤄진다고 해야 하리라.

어떤 이는 이 가운데 유사한 모양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이에 바로 뒤바뀐 일을 따른다는 뜻이니, 마치 아지랑이의 경계를 반대로 물인 줄 알고, 당장 물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식 또한 그 색 등 모양의 경계에서 뒤바뀐 감각을 일으킨다. 그러므로 현상(現相)이라고 말한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그 뒤바뀐 경계도 역시 실제의 일을 의지해야만, 그제야 비로소 마음이 일어난다고 하였다.

이 역시 앞에서 모두 다 추궁하여 힐책한 것과 똑같다.

또 어떤 이는 바깥 법칙이 이 달라진 집착을 일으켜서, 색 등을 떠난 외에 별도로 ‘나’의 자체가 있으니, 이것은 또 무엇을 의지하여 뒤바뀜을 일으킨 것인가라고 하였다.

경에서 안에 의지한다고 하였으니, 이 또한 어긋남이 없다. 몸과 함께 자연히 생긴 번뇌[俱生]에서 일으킨 거짓 몸을 실제로 여기는 견해[身見]를 숨은 뜻[密意]으로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에 대해서 마음을 바르게 써야 한다. 장차 보게 되든지, 현재에 보고 있든지, 가깝게 지내야 할 나쁜 벗 등과 같은 사람들이라고 한 것은, 곧 나에 대해 일렀으니, 때문에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그런데도 저 범부와 소인은 허망하게 그 식(識)을 내고, 결국 뒤바뀜을 일으켜서, 바깥 경계의 모양으로 여긴다.

혹은 다른 것을 따라서 공동으로 일을 만들고 의견을 말할 수도 있으니, 마치 세상이 공동으로 인정하는 일을 가지고 경계를 삼는 것과 같다. 그러면 그 일에서 유식(唯識)이 생겨 일어난다. 그러므로 이 유사한 경계의 모양을 따르기 때문에, 색 등을 인연하는 식은 바깥 경계를 취하지 않는다. 마치 눈 어질 병자가 머리털·파리 등을 보는 것과 같다. 이 바깥 경계는 텅 비어 단지 오직 식뿐이란 것은, 바로 종(宗: 唯識宗)의 뜻이다.19)그러자 이 뜻을 근거로 따져 말하기를 이 비유는 성립되지 않는다. 광명(光明)의 몫(分)에서 허망하게 머리털이라는 생각이 일어남은, 눈의 감각기관[眼根] 자체에 힘이 기울어졌기 때문이다라고 한다.20)
어떤 이는 말하기를 특별한 대종[別大種]21)이 생겨서 볼 수 있게 되자, 결국 감각으로 하여금 집착케 해서, 머리털 따위로 여기게 하였다. 만일 이와 같이 유사한 경계의 모양이 나타남을 내세워서, 단지 오직 식뿐[唯識]이라고 한다면, 장소와 시간 등의 결정은 이치에 맞지 않게 되리라.

만일 그 소유(所有)한 색 등의 온갖 경계가 식을 떠나서 별도로 있다면, 당장 색 등에서 그 장소가 나타난 형체의 크기와 따로 나뉜 자리를 정해야 한다. 그 식이 저기에서 형체의 크기를 결단하고, 경계선[方隅]을 결정하여, 저와 유사한 모습이 생긴다면, 이것은 알맞은 이치를 성립하리라. 만일 인정한 바와 같이, 바깥 경계와 상관없이 단지 오직 내부의 식[內識]만으로, 허망한 집착을 일으켜서 색의 모양이 생긴다고 한다면, 그 외 다른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는 어째서 형체의 크기를 따라서 장소와 시간을 결정하는 식의 모양이 나타나지 않는가.

장소에 따라서 그 곳을 결정으로 보는 것은, 마치 곳을 따라 있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일체의 곳이 아니다. 경계에 이미 결정이 없으니, 그 외 다른 곳에서는 또한 마땅히 볼 수가 있거나, 혹은 볼 수가 없어야 한다. 그러나 저 세운 대상은 결코 바깥 경계에서 식이 생김을 취하지 않았다. 경계가 없이 생긴 감각에는 일찍이 결정된 장소와 시간이 있을 수 없다. 또 그 실제의 일도, 그 경계가 텅 비었다고 말했기 때문에, 결정된 시간과 장소가 나타난 모양은당장 존재하지 않음이 성립하리라.

그러나 이와 같지 않다. 여기에 이미 결정이 없으니, 색 등을 보는 마음은 저와 더불어 이에 서로 떠나지 않는 성질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경계가 텅 비어 없다고 집착하지도 않아야 한다. 이미 없는데도 거듭 집착하여 존재의 몫이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세운 종(宗: 唯識宗)의 자체에 서로 어긋난 잘못이 있음을 밝히는 격이다.

만일 그 비유는 성립할 이치가 있다고 말한다면, 몸은 결정에 속하지 않으니, 이치에 서로 어긋남이 있다. 상응하는 시간과 장소에서 한데 모여서 함께 본다면, 홀로 치우쳐 한쪽에 속하지 않고 이 경계를 보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땅히 이치에 맞지 않는다. 경계가 없음을 인정하였으므로 이것은 이미 경계가 없으니, 혹은 이류(異類: 別種)라고도 하리라. 이류라고 말함은, 유별난 모양을 볼 때에 그 무너진 감각기관[根: 眼根]으로 연(緣)을 삼았기 때문에, 마치 눈어질병에 걸린 사람과 같다. 그렇다고 정상적으로 보는 사람 모두를, 마땅히 다 눈어질병에 걸린 사람이라고 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시간과 장소에서 현재 상응한다면. 온갖 몸의 경계에 결정이 아니면서 생기고, 아울러 색 등에 대해 볼 수 있는 식이 생기는 것이다. 이를 비교하여 마땅히 알아야 한다. 바깥 경계가 없으므로, 인식해야 할 일에 불결정(不決定)의 몸에서 보이지 않는 일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것은 앞서 종(宗)의 허물을 따져서 물리친 일과 똑같다.

또 온갖 일의 작용도 역시 이치에 맞지 않는다. 모든 실제의 머리털 등은 눈앞에 보이며, 거울을 닦는 등 작용할 수 있는데. 어째서 이 식의 머리털 모양은 쓰지 못하는가.

비록 진실한 일이 없을지라도 작용하여 굴러 생긴다면, 이 역시 이치에 맞지 않으니, 공능(功能)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식의 몫[識分]에 공능이 있다고 한다면, 눈어질병으로 보는 일인들 어찌하여 머리털로 쓰지 못하겠는가. 여기에는 똑같이 유사한 머리털의 모양이 있으므로, 이 역시 앞서 헤아려 살핀 경계와 똑같이 작용의 공능(功能)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종(宗)의 허물을 벗어나는 데, 세 가지 비유를 의지할 대상으로 삼는다. 세 가지 일은 똑같지 않다. 진실하지 않는 경계에서 세 가지 비유를 들어, 감각기관[根]과 바깥 경계[境]의 공능차별(功能差別)을 따르기 때문이다. 마땅히 알라. 감각기관에 두 종류가 있다. 첫째는 색의 감각기관[色根]이요, 둘째는 색이 아닌 감각기능[非色根]이다. 첫째는 감각기관의 손실로 어두워졌기 때문에 허망하게 그 일을 본다. 때문에 첫 비유로 삼았다. 다음 둘째의 색이 아닌 감각기능은, 저 꿈속에서 차별이 있는 경계를 보니, 둘째 비유로 서술하였다. 저 경계에 공력(功力)이 있으므로, 뒤바뀐 견해를 일으킬 수 있으니 셋째 비유로 이끌었다. 이것은 어느 한 학파[一家]의 다른 해석이다.

어떤 다른 사람이 또 말하기를 장소와 시간이 결정되었기 때문에, 색 등을 인연하는 마음은, 마음이 바로 의탁한다. 그러니 안에서 일을 나타내어 경계를 삼지 않는다. 마치 문장의 글귀를 인연하는 마음과 같다. 그러나 마음 속에서, 맨 처음에 일으킨 것을 의지하고 현재에 존재한 일을 따라서 집착하여 취했기 때문이다. 또 모든 감각은 결정된 시간을 용납할 수 있지만, 마음에서 어떻게 장소를 결정할 수 있으랴. 장소는 없지 않다. 사물에는 장소가 있으나 결정되기도 하고 결정되지 않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경계상에 소유한 법(法)을 의지하여 그 마음의 경계에서 가정으로 말하였으니, 이 또한 잘못이 없으리라. 이 경계가 현상(現相)의 일을 만들 수 있기 때문에 결정된 곳이라고 말하며, 보통 저 일로 마음이 생길 수 있다면 경계라 이름한다. 이것은 바깥 경계가 따로 있음을 성립시켜 공동의 인정을 취한 사실을 말한 것이다. 장차 비유를 들어 보리라. 그 서로 응하는 시간과 장소에 머무는 자는 다 함께 다르지 않는 모양이 생기기 때문에, 색 등을 인연하는 마음은 밖의 하나의 일로 그 원인이 되게 마련이다. 비유하면 같이 배우는 사람들이 가르치는 스승의 마음을 따라서, 더욱 불어난 식[增上識]에, ‘공동의 인정’이 생겨 일어남은, 그 자체의 모양을 따라서 작용이 생기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알라. 식을 떠나 따로 색 등이 있는 것이다라고 한다.

마땅히 존재하지 않는다. 또 마땅히 털 등의 작용이 없다는 것을 성립시킨다. 저 모양의 감각(感覺)은 꿈의 감각과 마찬가지로, 감각의 성질이기 때문이다. 위에서 진술해온 내용이 서로 도리에 어긋남이 많기 때문에, 그들의 불결정(不決定)의 잘못을 막으려고 생각하였다.

어느 다른 사람이 또 말하기를 곧 이 시간과 장소, 두 가지에 실의(實義)가 있다. 이 경계에 대해서 시간과 장소의 결정은, 마땅히 있지 않아야 한다. 그대가 이미 경계의 일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았고, 저에 따른 차별 또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찌 수고롭게 그들로 하여금 문득 잘못을 저지르게 하는가. 이것이 만일 있지 않아서 곧바로 서로 부합한다면, 마치 붙잡힌 도적이 종기의 아픔을 외치는 것과 다르지 않으리라. 억지로 앞의 종(宗)이라고 해도, 참으로 거칠고 얕아서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식에서 나타난 모양의 상태를 인정할 대상이라고 말한다면 도리에 맞지 않는다고 하였다.

비록 바른 생각을 드러내 보일지라도 앞의 해석과 다르지 않다. 또 시간과 장소의 차별이 소유한 일을 따라, 곧 이곳에서 그 시간과 장소를 보고 결정으로 인정한다. 비록 인정한 일에 실제의 바깥 경계가 있더라도, 영원히 색 등의 결정이라고 여긴다면, 또한 이치에 맞지 않다. 달라진 시간이나 달라진 장소를 어떤 때는 보기 때문이다. 가령 여기에 어느 때이고 있음을 보면서 그들이 인정하지 않을지라도, 어찌 그들에게 공동으로 인정하는 경계가 아니라고 하며, 이 분별의 능력[能別]으로 결정하는 도리를 어떻게 부정하랴. 때문에 단지 식에서 그 상(相)이 나타날 뿐이다.

또 어떤 이는 따로 상위인(相違因)22)의 논란을 일으켜 힐책하기를 오히려 경계가 텅 비어 없음을 성립시킴과 마찬가지로 나는 되려 시간과 장소의 결정을 성립시키리라. 존재하지 않도록 하기 때문이다. 만일 그 시간과 장소를 공동으로 인정한다면, 곧 공동의 인정을 성립시키면서 이를 부정하여 버리리라. 그로 인해서 어김이 없어야만 비로소 서로 어긴다고 말을 할 수 있다. 만일 대중이 공동으로 인정할 대상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전혀 그럴 리 없으니, 내가 좋아할 대상이 아니다. 이 이치 때문에 무력한 논란이 되리라고 한다.

또 어떤 이는 스스로 인정하기를 단지 경계가 없는 곳에서 부정하여 버릴 뿐이다. 공(空)을 인연하는 식은 결정된 시간과 장소가 없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저의 결정은 색 등의 경계에서 공동으로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바깥 경계가 실제로 있음을 성립시켰다. 이 또한 마땅히 알아야 한다. 저것을 떠난다 해도 따라서 이뤄지리라. 단지 부정하여 버릴 뿐이라면,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단지 이 하나만을 사용할 뿐이라면, 그들을 바르게 이해시켜 줄 수 없다. 이것은 앞서 종이 내세운 뜻과 같다. 저밀라(底蜜)23)의 손상(損傷)이기 때문에 눈동자의 막(膜)이 성글어짐은 마치 그물코가 얽혀서 밖으로 흰색을 보는 것과 같다. 그 틈 속에서 밝은 모양이 나타나자 문득 허망한 견해를 일으켜서, 오히려 털 등으로 여긴 것이다. 곧 이 비유는 그 세운 대상의 ‘따라서 이뤄지는 이치’가 잘못임을 말한다.

이제 저들에게 물으리라. 만일 광명의 모양이 털 등의 형상이라면, 이치에 맞겠는가. 이 광명의 모양을 어떤 이는 황색으로 보는가 하면, 혹은 적색으로 보는 이도 있다. 더욱이 털 등을 순수한 흑색으로 보거나, 혹은 온갖 채색이 마치 삭갈라궁(鑠羯羅弓)24) 등처럼 보기도 한다. 그러나 그 밝은 눈으로 모든 사물을 잘 보는 사람은 저 광명의 주변에서 색다른 모양을 보지 않고, 사실 그대로 이것을 보고, 다음과 같이 틈 빛의 경계에서 뒤바뀌어 털로 여겼다고 말하리라. 이는 곧바로 털 등을 보는 마음의 경계는 텅 비어 없는 성질임을 성립시킨다. 광명의 제 몫[支分]은 털 모양의 성질이 아님에도 이 털 등과 유사한 모양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단지 원인이 되어 능히 생길 뿐만 아니라고 한다면 결국 그 인식 대상의 성질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 색 등을 인연하는 모든 식(識)을 곧 눈 등을 인연하는 모든 감관[根]으로 성립시키지 말라. 원인의 뜻은 똑같기 때문이다.

혹은 또 다음과 같이 실제 일의 원인[實事因]을 의탁해야만 비로소 뒤바뀜이 생기고, 그 외 다른 것은 그렇지 않다는 다른 뜻이 있을 수도 있다. 이 말은 사실이다. 이 또한 곧 안에서 잘 깔린 종자(種子)를 의지하여 성취하면, 바깥 경계를 기다리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경계를 논하는 자는 반드시 자체의 상[自相]을 잘 깔아서 마음에 둔 뒤에야 비로소 인식 대상의 성질[所緣性]을 이룰 수 있다. 그 광명의 몫[光明分]이 일어날지라도, 마음에 상관하지 않으면 어찌 인식 대상의 성질을 일으킬 수 있으랴. 이 역시 발생하는 기쁨을 감당하지 못하리라.

다음 어떤 이는 헤아려 말하기를 그 눈병 걸린 사람이 눈 기관[眼根]의 대종(大種)25)이 정도를 잃고, 눈동자에서 생긴 가림과 어지러움으로, 눈의 기능[眼分]이 손실되었다. 저 손실된 힘 때문에 곧 다른 모양이 생겨났으며. 바깥 경계에서 유별난 대종[別大種]을 발생케 하였으니, 손상된 눈 기관의 식이 문득 저 모양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알아야 한다. 저밀리가(羝蜜梨迦: 眩瞖, 곧 눈어질병)가 소유한 감각의 슬기[覺慧]는 실제의 바깥 경계를 인연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헤아린다면 큰 과실이 있다. 보통 허망하게 뒤바뀐 일에서 일어난 감각의 마음은 다 앞으로 논란을 펴리라.

즐거움 등에서 뒤바뀜은 무엇을 의탁하여 인연하기에, 이 모양이 생겨서 그 경계로 여겼겠는가.

비록 바깥 경계가 없을지라도 허망한 견해를 둔 것이다. 이것은 뒤바뀜이니. 곧 존재하지 않음이 성립한다.

만일 세속이 공동으로 인정하지 않은 일이라고 말한다면 나는 곧 이것을 가지고 ‘허망한 뒤바뀜’으로 여기리니, 되려 큰 허물이 있다고 하리라. ‘괴롭다[苦]’·’텅 비었다'[空] 등의 견해[見]로, 살제(薩帝)26)를 인연할 때에는 바로 저기에 해당된 무리이기 때문에, 수고롭지 않는 노력으로 뒤바뀌지 않음을 볼 수 있으리라.

번뇌에 묶인 온갖 중생이 다 진리를 깨친다면, 여래께서 세상에 나오셔서,바른 법을 선양했다고 하나, 이것은 곧 결과의 이익이 전혀 없음이 성립하리라.

어디에 이렇게 결정이란 판단을 내릴 수 있겠는가. 치우쳐 눈어질 병자에게만 홀로 거짓과 미혹을 받게 하였다는 말인가. 또다시 저들에게도, 느낌에 모양과 상태가 있다. 그 유정(有情)이 날아다니며 가고 옴을 보면, 온갖 깨친 이에게 힘찬 약동[搖颺]을 관찰케 한다. 이 모든 살타(薩埵: 有情 혹은 衆生)에게 대종(大種: 四大)의 생김을 인정하셨으니, 어찌 생명으로 헤아리지 아니하랴. 가령 백천의 수많은 눈어질 병자들이 함께 모여, 어느 한 곳에서 각기 다른 형상을 보더라도, 이 때 어째서 마주 걸리는 물건이 있거나, 또 서로 함께 물리쳐 몰아내지 않는가. 만일 이것이 또한 눈어질병의 힘에서 나온다고 말할지라도, 저밀라(底蜜欏)가 배워 익히는 문에서 공력(功力)을 많이 들여 훌륭하게 환술(幻術)을 닦았다면, 모든 법의 자체 성질을 옮겨 바꿀 수 있다. 혹은 마땅히 보고 저것이 걸리지 않는다고 인정한다. 걸리지 않으므로, 욕(欲) 등이 없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면 색의 성질이 아니니 이에 어찌 유식론자(唯識論者)와 다르겠는가.

또다시 어찌 수고롭게 옳지 못한 곳27)에서 힘을 써 드러내 보이겠는가. 저들은 대종(大種)이 그 하나 하나에서는 푸른 색 등의 성질이 아니라고 인정한다. 단지 종(種: 地 등 四大種)이 합한 인연의 힘이기 때문이다. 눈 등의 모든 식은 저 모양을 인연하여 생길 뿐이다. 이것은 본 종(本宗: 唯識宗)의 뜻이다. 일반적으로 모여 합한 것은 실제의 물건[實物]이 존재하지 않는다. 곧 이 식은 실제의 물건이 아닌 것을 인연하니, 수고롭게 깊이 짜 맞추려고 하지 말라. 어긋나거나 다툴 일이 없기 때문이다. 어찌 수고롭고 번거롭게 성립시키려 하는가.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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