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유식보생론(成唯識寶生論) 제2권
논(論)에서 또 말하기를 장소와 시간의 결정이 꿈과 같다고 하였다.1)
모든 감각에는 비록 그 경계가 없을지라도, 존재[有]의 결정을 공동으로 인정함과 같다는 말이다. 만일 시간이 결정(決定)되고 장소가 있다면, 마을과 동산 등을 볼 경우, 일정한 시간이 바로 앞에 나타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저기에 있지 않다. 이 말은 비록 시간과 장소를 결정하는 감각은 있을지라도 경계가 없음을 밝혀내기 위함이다. 저것[時]이 거기[處: 村園等]에서 성립[定]시키는데, 인(因)의 작용이 없기 때문이다.
곧 저 인(因)이 모두 경계가 없다고 말한다면.
곧 시간과 장소도 결정되지 않기 때문이며, 이 도리는 이미 결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알라. 말한 바 저것의 결정은 존재를 밝히는 말이 아니다. 저 경계가 존재하지 않음이 없음을 성립시키려 함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이것이 곧 전혀 없다고 해도 종(宗)의 잘못이다. 또 성립될 때에는 충분히 공능(功能)이 있어야 한다. 공능이 있어서 말하기를 이미 세울 대상이 없으니, 세울 주체가 있지 않으며, 고루 미칠 주체가 없으므로 또한 고루 미칠 대상도 없다고 해야만, 비로소 저로 더불어 종(宗)의 허물을 벗어날 수있다. 마치 저울에 중량(重量)이 없기 때문에 따로 있는 몫[有分]이 없는 것과 같다. 이것은 이미 모두가 인정하니, 중량이 없다고 설하기 때문에, 다른 물건을 버린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저기와 반대로 시간과 장소의 결정이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능히 성립시킬 수 있어서 경계를 존재시키려 하지만, 따라 이뤄짐이 없기 때문이다. 마치 이식(耳識)의 듣는 성질이, 소리를 언제나[常] 들을 수 있도록 성립시킬 수 없는 것과 같다. 비록 듣지 못하는 성질이 없다 할지라도, 그러나 무상(無常)을 부정하지 못한다. 그들이 바깥 경계가 존재한다고 성립시켰으니, 이제 그 결정하지 못하는 원인[不定因]을 밝히려고 한다. 비록 바깥 일이 아닐지라도 감각에서는 역시 그 시간과 장소에 결정되는 뜻이 있음을 본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마음이 미혹하고 혼란한 데서 결국 이에 문득 시간과 장소를 결정하는 견해가 생긴다. 그러나 꿈속에서는, 실제의 경계로 결정할 수 없다. 때문에 세상이 모두 인정하는데, 어떻게 이것을 가지고 그 외 다른 결정의 일과 비교하기에, 잘못을 범한다고 하는가라고 하였다.
만일 이 꿈속의 상상[想]을 감각과 똑같게 하려고 한다면, 이치로는 마땅히 꿈속의 마음이니, 곧 잘못된 견해이다. 이것은 단지 스스로 응하는 데 따라 판단하면서 씹어 삼킬 뿐이다. 실지로 다른 이의 본뜻을 알 수 없음은 다른 이가 인정한 일임에도 여기에 다시 차별을 두어서 다른 이에게 바른 이치가 성립되도록 따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미 앞에서 잘 통하도록 마무리하였다. 이를 근거로 소유한 시간과 장소를 결정하는 마음에는 바깥 경계가 존재하지 않으니, 마땅히 따져서는 안 된다. 마음이 모양[相]을 가지고 일어남을, 어찌 이치에 부합되지 않는다 하랴. 앞에서 말한 바도 마땅히 미혹과 혼란을 결정의 견해로 삼아야 한다고 말한다면. 식을 떠난 외에 결정된 시간과 장소가 없으니, 당초에 거짓 아님이 없음을 인정하리라. 드디어 저것이 가려지도록 하였으니, 어찌 달리 그 외 다른 일을 견주어 이것이 이치에 맞는다고 말하겠는가. 그러니 이러한 색의 종류는 다 바깥 경계가 아님을 인정하리라.
어찌 옳지 못한 곳2)에 달라질 수 있음을 두어, 그 잘못을 벗어나게 하는가.
그렇다면 저 꿈속에는 실제로 또한 그 장소와 시간의 결정이 없고. 모양의 상태는 마음에 있으니, 무엇을 근거로 알 수 있겠는가.
게송(偈頌)에서는 다음과 같이 읊었다.
만일 밤중에 잠이 들어
북쪽에서 해 오름을 본다면
어긋난 꿈의 때와 곳에
어찌 결정하는 마음을 두랴.
이것은 단지 앞뒤의 서술한 내용을 알지 못하고, 붕당(朋黨)의 취지(趣旨)로, 공연히 교묘한 말만을 즐길 뿐이다. 시간과 장소에서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단지 오직 이곳3)만을 말하였을 뿐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따지지 않아야 한다. 장소와 시간의 결정은 저들이 인정한 바와 서로 맞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앞에서 이미 서술한 바와 같다.
또 어떤 이가 주장하여 말하기를 꿈속의 마음에 경계가 있음은, 바로 마음에 새겨 둔 생각[念]이기 때문에, 장소 등을 견주어 알고 결정을 내린 것이다. 이것은 곧 과거에 겪은 경계를 인연하여 일어났으므로, 그 꿈속에서 보는 것이 많다. 가령 공중에서 흐르는 물을 본다거나, 혹은 넓은 바다에서 온통 큰불이 타오르기도 하니, 이 또한 과거에 이미 겪어 본 일이다. 물이든 허공이든 불꽃이든 바다든 각기 다른 곳에서 사물을 관찰하여 결단한다. 마음에 새겨 둔 생각을 꿈속에서 일으키고, 한곳이라는 견해로 여겨서, 허공 또는 강물이라고 집착하는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마땅히 선천적 소경이 푸른 색깔 등을 기억한다고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만일 이것을 인정하지 않고, 꿈속에서 바로 기억[憶念]4)해 낸다면, 선천적으로 눈먼 사람이 마땅히 푸른 꼭두서니를 기억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억념이란, 과거에 이미 받아들인 것 이기 때문에, 선천적 소경들은 푸른 색깔을 상상할 수 없어야만 마땅히 도리가 성립되리라.
또다시 꿈속에서 스스로 목 베이는 일을 보기도 하는데, 이 역시 마음에 새겨 둔 생각이니, 그 외 다른 일과 합하여 공능(功能)이 있음은 앞에서 말한 것과 다르지 않다.
혹은 중유(中有)5)의 자리에서, 자기의 몸이 남에게 베이고 잘림을 직접 보았다가, 저 전생의 몸을 관찰하고는 저절로 마음이 과거에 이미 받았다가 버렸음을 알게 되어, 지금에야 오히려 기억한다. 이것은 참으로 틀림이 없으니, 어찌 이전에 경험했던 사물을 억념(憶念)이라고 이름하는 것과 다르겠는가. 저가 문득 꿈속에서 다른 견해를 일으켜서, 예전에 보았던 사물과 똑같지 않음도 결정되지 않음이 없기 때문이다. 오직 한결같이 예전에 받아들인 일만이 억념을 일으킨다고 하지 않으랴. 다시 말하면 일찍이 여러 해에 걸쳐 배우며, 써 놓았던 글들을 뒤에 기억을 되살릴 때에는, 혹은 순서가 뒤바뀌기도 하고, 때로는 말이 불어나기도 하며, 혹은 그 글에서 잊어버리기도 하는 것과 같으리라고 하였다.
만일 그렇다면, 이 억념은 문득 있지 않게 된다. 억념도 드디어 텅 비어 없어져 버린다. 그 외 다른 실제하는 사물을 다른 일에 서로 예속시킬 수도 없으니, 그 결정에 있어서는 실제의 일을 상상(想像)하는 마음으로 시설하게 된다. 마치 말의 머리에서 일찍이 뿔을 본 일이 없지만, 그러나 기억할 때에는 그 경계의 일을 보는 것과 같다. 과거에 받아들인 것이나 다름없이 자신이 아는 모양으로 삼아, 그 마음에 새겨둔 생각의 경계에서 그 다른 견해를 일으킬 뿐, 바깥 경계를 인연하지 않는다. 그러나 꿈속에서 소의 뿔과 같은 말의 뿔을 본다면, 이를 견주어 마땅히 깬 상태에서 보는 일도 알아야 한다. 결국 꿈속에서 뒤바뀐 생각을 일으키고 허공과 강물을 성립시켰으니, 그 억념을 되살려냄도 또한 이와 같다. 비록 뒤바뀌지 않는 견해가 있을지라도, 그 꿈속에 연달아 이어진 식[相續識] 가운데서 그 집착이 생겼으니, 보이는 모양은 참으로 식을 떠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꿈속의 억념에 진실한 경계가 있다는 것은, 도리가 성립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또 꿈을 꾸는 이가 보는 일은, 바로 눈앞에서 강과 산 등을 보는 것과 같다. 하지만 꿈이 깨었을 때 억념은 꿈속처럼 분명하고 뚜렷하게 나타날 수 없다. 그리고 이미 달라진 모양도 없다. 꿈속은 잠의 어지러운 마음으로 생긴 억념임에도 경계를 직접 보듯 분명함과 똑같지 않음은 무슨 뜻인가.
그러나 꿈에서 깨어난 뒤 정상적[平善心]인 마음 가운데서는 이렇게 분명하게 볼 수 없음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꿈속에서는 분명하고 뚜렷하게 나타나서 저것과 이것을 결단함은, 깨었을 때 보는 경계의 명백함과 같다. 저 꿈속의 마음에 보인 사물은 잊지 않고 새겨둔 생각과는 상관이 없다. 꿈보다 먼저 과거에 본 어떤 사물이, 다음 시기에 꿈속에서 앞서 말한 꿈의 일을 기억한다. 그러나 이 꿈의 기억은 마치 저 꿈에서 깨어난 사람이 비록 그 경계를 마음에 되살려 생각할지라도 상태가 가리고 떨어진 듯하여, 경계가 멀어질 때 그 색 등을 밝고 뚜렷하게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또 말한 바와 같이 선천적 소경의 무리는 꿈속에서도 보이지 않으니, 비록 교묘한 말이 있을지라도 이치가 마땅히 성립되지 않지만, 이 역시 자기종자의 공능을 따라서, 성취되는 자리에 이른다면, 결국 마음으로 꿈에 푸른 색 등을 보기도 하리라. 그러나 아직 과거에 헤아려 생각해 본적이 없으니, 다른 무리들처럼 비록 꿈속에서 푸른 색 등을 보았다고 할지라도 말로 설명하여 드러나게 할 근거가 없다. 또 꿈에 보이는 대상은 흔히 금생(今生)이나 일찍이 경험한 일이 아니면서 뚜렷이 앞에 나타난다. 그러므로 꿈속의 마음은 억념과 상관이 없다. 비록 이 마음에 새겨 둔 생각이 과거의 경계를 인연하기 때문일지라도, 이것은 마음에 새겨 둔 생각의 경계가 텅 비어 없음을 성립시킨다. 과거와 미래는 현재가 아니므로, 존재하지 않으면서 실제의 일을 의지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 속의 뜻을 말하리라. 경계를 인연하는 감각의 주체는, 경계가 비록 존재하지 않더라도 시간과 장소를 결정할 수 있다. 그러므로 알라. 인정한 바 경계가 먼저 있어야만 비로소 볼 수 있다고 하는 자라면, 아직은 나에게 이익이 없는 일을 한다고 할 수 없으리라.
다른 사람이 또 말하기를 꿈으로 가려진 마음에 힘의 작용이 있으므로, 그 특별한 일에서 잠시 생겼을지라도, 식의 자체가 깨끗하여 걸림없이 앞에 나타난다. 마치 선정(禪定)에 든 이가 삼마지(三摩地)6)의 힘으로, 청정광명(淸淨光明)을 걸림없이 보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작은 방에 있으면서도 꿈속에 코끼리의 무리를 본다거나, 또 온갖 다른 크고 넓은 사물을 보는 것과 같다. 또 꿈속에서는 자신이 다른 세상 등에 있으면서, 그곳에 태어남을 보기도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저 다른 몸을, 현재의 몸[執受身]7)이 아닌 나의 몸이라고 말할 수 없으리라. 꿈을 꾸지 않았을 때의 수용(受用)한 몸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세상의 몸을 버리지 않고, 다시 그밖에 다른 경계를 집착한다면, 이런 이치는 있을 수 없다. 또 이 때에 삶과 죽음이 있지 않았으니, 문득 시체가 있음을 보는 잘못이 성립되리라.
또다시 비록 그 삶과 죽음이 있음을 인정하더라도, 거듭 태어난다면 그 달라진 손실[違害]이 있어야 한다. 뒤에 꿈에서 깨어서 보면, 이전의 몸은 전과 같이 털끝만큼도 훼손된 자리가 없다. 또 잠자리에 들었을 때 옆 사람의 몸에서도 달라짐이 조금도 보이지 않으리라.
그렇지만 이 몸은 점차적 혹은 한꺼번에 다른 몸을 받아 태어날 때에는, 서로 달라지는 손실이 있다. 이를 근거로 마땅히 단지 오직 이 식뿐임을 알아야 한다. 저 훈습(薰習)8)에서 공능(功能)이 나타날 때에, 곧바로 가지가지 모양이 분명히 마음에 있음을 관찰하여 본다면, 이것은 이치에 맞게 되리라.
또다시 비록 평평한 밭의 넓은 반석 위에, 칡이 허공에 매달려 얽힌 가운데, 누워 자다가 꿈속에 큰 경계를 보았을지라도 이 또한 색(色: 物質)이 아니며, 막히고 걸리는 성질[質碍]도 아니므로, 오히려 감각작용인 수(受: 領納, 感受) 등과 같다고 하리라.
또 이 인정한 바가 흙이나 물 등에 대해서라면 곧 색(色)의 성질이니, 그자체는 마땅히 막히고 걸려야 한다. 만일 인정하지 않는다면 막히고 걸리는 것끼리 따로 마주 대하여 걸리는 성질[對碍性]9)을 잃게 된다. 또 겉으로 나타내지 못하는 색법[無表色]10)도 아니니, 결정하지 못하는 허물[不定過]이 있으리라. 이를 근거하면 저 도리와 똑같기 때문이다.
이 꿈속 마음에 무슨 기이함이 있어서인가. 큰 공업(功業)을 경영하더라도, 밖의 형상을 빌리지 않고. 충분히 교묘하고 부드럽게, 이 웅장하고 화려함을 짜 맞춰 나간다. 혹은 9인(仞: 1仞은 8尺)의 높다란 담장, 10장(丈: 1丈은 10尺)의 날 듯한 용마루, 부드러운 모양새의 푸른 가지들, 아름다운 빛깔의 붉은 꽃들을 보기도 하는데, 장인들이 온 생각을 다 기울여도, 새겨내지 못하리라.
만일 거기에서 이것과 똑같이 따져서 말했다면, 저것은 이 잘못이 없다. 바깥 물질[外色]을 빌리지 않고 공력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단지 종자(種子)가 성숙(成熟)됨에 따라서 식에 기대어 연(緣)이 되자, 이 때 의식(意識)이 곧바로 나타났을 뿐이다. 또 일찍이 경론(經論)에서 저 꿈속에 특별한 물질[別色]이 생긴다라고 설한 것을 아직 본 적이 없다. 그러므로 반드시 알아야 한다. 논란을 두렵게 여기는 교묘한 말은 자기가 소속된 종에 대해 그 빈틈을 가리어 덮는 짓이다. 비록 방편을 만들어낼지라도, 끝내 역시 꿈속에서 특별한 색이 일어나게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장소와 시간의 일정함이 꿈과 같다고 함은, 이치가 훌륭하게 성립된다.11)
똑같이 고름이 가득 차서 흘러내리는 것으로 본다. 오직 한 몸만이 보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이곳에서는, 조금도 피고름이 있을 수 있다고 인정하지 못하리니, 어찌 언덕이 넘치도록 흐를 수 있음을 용납하겠는가.
비록 실제의 경계는 없을지라도, 결정하여 하나에 예속시키면, 이치는 결코 성립하지 않는다. 이것은 바로 마땅히 알아야 하리니, 색 등을 관찰하는 마음은 비록 바깥 경계가 없을지라도 결정하지 못하는 성질이다. 몸에 있지 않다고 해서 경계가 없다고 부정해 버리면, 곧 저 경계를 두는 원인이 성립한다. 그러니 결정하지 못하는 허물이 있으리라.
경계가 없는 곳에서도 또한 많은 몸이 있어서, 함께 보는 것이 결정이 아니라면, 어째서 실제로 고름이 흐르는 일이 없는데도, 모든 아귀(餓鬼)는 따로 관찰하지 못하는가.
그 똑같은 업(業)으로 인하여, 다 이 자리에서 함께 고름의 흐름으로 본다. 탐내고 아끼는 업이 성숙되어, 똑같이 이 괴로움을 겪는다. 옛날의 똑같은 업이 각각 자체(自體)를 훈습(薰習)함에 따라서, 이 때 이숙식(異熟識)13)이 다 모두 앞에 나타난다. 저 많은 유정(有情)은 똑같이 이런 일을 보고, 실제로 바깥 경계가 없는데도, 은혜로운 이익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 도리를 따른다면 그대 또한 여기에서 공동의 조작(造作)으로 소유한 훈습(薰習)이 성숙할 때, 바로 별도의 상(相)이 없으나, 색 등의 상분(相分)14)이 식으로부터 생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알아야 한다. 바깥 경계를 따라야만 식이 비로소 생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찌 이것을 동일한 세상에 태어남이라고 인정하지 않는가.
그러나 저 유정의 똑같은 업은 결정된 것이 아니다. 현재에 좋은 가문과 천한 집안, 부자와 가난 등의 다름이 있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그 색 등을 보는 일도, 마땅히 차별이 있다는 것이 성립하니, 똑같이 저 다른 무리가 보는 것도 고르지 않음이 성립한다. 그러므로 알라. 이 무리는 저 무리로 더불어 똑같지 않다. 저 무리 또한 바깥 경계의 힘을 의지하기 때문에 색 등의 경계가 생기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모든 아귀는 비록 동일한 세상일지라도, 보는 점 또한 차별이 있으니, 업의 다른 상분(相分)으로 인하여, 보여진 점도 또한 그렇다. 저들이 혹은 매우 뜨거운 쇠 덩어리가 녹아 내리면서 삶아내고, 내어 뿜으면서 구워짐을 보기도 하고, 혹 때로는 똥, 오줌이 아무렇게나 흘러 넘침을 보기도 하는데, 보는 점이 서로 같지 않기 때문이다. 비록 똑같은 인간의 세상일지라도, 박복한 사람은 황금 띠가 나타났을 때, 쇠사슬이 뜨겁게 달구어져 접근하기 어렵다고 여기기도 하며, 또는 뱀이 독의 불을 토한다고 보기도 한다. 분명히 알라. 비록 인간 세상에 있을지라도, 또한 보는 점이 똑같지 않다. 만일 이와 같은 무리가 달리 보는 성질이 없다면, 그로 인하여 모두 다 같은 종류의 업(業)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면 저 무리에게 같은 성분의 업[同分業]이 있기 때문에, 같은 성분의 세상[同分趣]에 태어난다. 또 다른 성분의 업[別業]이 있으면, 각기 다르게 본다. 이 두 공능(功能)이 그 힘을 따르기 때문에, 저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같이 봄과 달리 봄을 있게 하였다. 저들은 이 내용을 가지고도, 다른 말로 답변한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다른 세상의 유정[別趣有情]인 귀신과 축생(畜生) 등은 마땅히 한곳에서 다르게 보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다른 업을 지어 다르게 성숙된 성질[異熟性]이기 때문이다. 이 성질이 비록 세상을 이루어 업(業)에 차별이 있을지라도, 똑같이 보는 업은 되려 달라지지 않는다. 곧 모든 유정이 스스로 상속(相續)하는 가운데에, 별도로 달라진 업의 종자를 따르기 때문이다. 저들은 그 인연에 맡겨져서, 각기 생겨 일어 날 수 있다라고 한다.
어떤 다른 사람이 또 말하기를 모든 아귀 등이 똑같이 사물을 볼 때에, 바깥 경계가 없지 않다. 이 기세간(器世間)15)의 모든 유정은 공동의 더욱 불어난 업[共增上業]16)으로 생기기 때문에, 반드시 현재 있는 맑게 흐르는 강물을 빌려야만, 비로소 이곳에서 고름의 흐름 등을 본다. 그 복이 얇아 심히 아끼며 탐하는 번뇌[垢]에 근거하기 때문에, 결국 이처럼 좋아할 수 없는 일을 보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만일 저 무리가 물을 못 보았다면, 곧 모든 유정은 똑같이 더욱 불어난 힘으로 공동의 과보[共果]를 받아들인 것[感得]이니, 이치가 곧 잘못이다. 이 무리에게는 그 실제의 경계가 있음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피고름 등의 식(識)은 반드시 그 일을 빌려야만, 이것이 비로소 있기 때문이다. 마치 상속(相續)하는 몸이 허망하게 뒤바뀐 집착을 또 집착하여 ‘나’라는 견해로 여겼기 때문에, 다른 일이 없음에도 똑같이 고름 등으로 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결정이 한 몸에 예속되어 생기지 않는다고 한 것은, 인식의 대상[所緣]을 잘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이런 견해를 두었다. 반드시 심왕(心王)과 심소(心所)를 기다려서 분명하게 앞 경계의 모양을 알아야 하기 때문에, 인식의 대상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아귀에게는 흐르는 물로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어떻게 보이지도 않았는데, 인식의 대상[所緣]으로 여길 수 있겠는가.
만일 다른 모양을 가지고, 곧 물의 경계를 고름의 흐름으로 보았다고 한다면, 어디에 이와 같이 결정적 판단을 내려 그 본래의 물을 보았다고 하겠는가. 그러니 물의 모양에 대해서는 일찍이 조금도 관찰의 대상으로 인정한 적이 없었고, 단지 그 다른 모양만을 보며 경계로 삼았을 뿐이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모양과 유사한 상태의 식이므로, 이것을 인정하여 경계라고 이름하였으니, 피고름으로 여기는 식에 저 모양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마땅히 물 등을 인연하여 경계로 여기지 않았음을 알아야 한다. 마치 꿈에서 깨어남과 같이 역시 원인도 되지 않으니, 인식 대상의 성질[所緣性]을 성립시킴은 큰 과실이 있다고 앞에서 이미 말하였다.
그러나 이 바깥 경계는, 인식 대상의 마음에 일찍이 은혜로운 이익이 없지만, 만일 단지 원인이 될 뿐이라고 한다면.
역시 큰 과실임은 앞에서 이미 말했기 때문이다.
또 말한 바와 같이 공상업(共相業)17)에서 받아들여진 것이므로, 반드시 본다고 한다면.이 또한 그렇지 않다. 태어나기 전에 눈을 잃었다거나, 멀리 떨어진 곳은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무색계(無色界: 色相을 벗어난 世界)에 태어난다면.
또한 마땅히 볼 수 있어야 하리라.
만일 저 업력(業力)이 생기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다음 세상으로 전향(轉向)하여 태어나는 일도, 역시 마땅히 보지 못해야 하리라.
만일 다음 시기를 기다릴 일이라고 말한다면.
나 또한 똑같이 그렇다. 무색계가 다음 세상에 태어날 때와 같이 이익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귀에게도 이치가 역시 똑같이 그렇다. 또 나를 인연하여 생긴 그릇된 소견은 곧 차례로 앞에서 이끈 도리와 같이 색 등의 조작된 일[有爲事]을 인연하지 않는다. 저 모양을 인연하지 않기 때문에 조작됨이 없는 깨달음[無爲覺]과 같다. 그러므로 반드시 알아야 한다. 자신이 환하게 알지 못하면, 반드시 남을 이해시켜 깨닫게 할 수 없다. 모든 논문(論文)이 지극히 분명하기 때문이다.
게송에서는 다음과 같이 읊었다.
비록 강물을 귀신들은 본 일이 없을지라도
가령 보여짐이 다른 모양으로 변했다면
분명히 알라 저들은 모두 옛 업을 따랐으니
가린 업이 무거운 자 밝은 동자 무너지리.
경계는 비록 존재하지 않더라도, 업(業)의 과실이기 때문에 눈으로 보게 하였으나, 체(體)는 현재 있으면서도 볼 수가 없다. 이것은 곧 스스로 인정한다. 때문에 보여진 물건에 곧바로 다른 형상이 있는 것이다. 이를 근거로 마땅히 알라. 실제로 피고름이 없는 데서 곧 허망한 견해를 둔 것이다.
다른 사람이 또 말하기를 그러나 아귀들은 좋지 않은 나쁜 업의 힘이기 때문에 드디어 그 눈에 이런 모양을 보게 하였지만, 비록 동일한 시간일지라도 그 외 다른 아귀가 복을 가진 무리라면, 보여질 물건이 아니다. 이것은 결국 자세히 살핀다면 싫어할 경계이다. 이를 근거로 분명히 알아야 하리니, 모든 아귀의 마음은, 그 실제의 경계를 인연한다고 하였다.
이제 마땅히 저에게 묻노라. 눈의 감각기능[眼根]이 그 허망한 견해를 일으켰기 때문에, 비록 앞 경계가 없더라도 좋지 못한 일을 보았는가. 앞 경계에 실제로 이 일이 있어서 눈의 식[眼識]이 이를 의지하여 분명하게 아는 분별이 생겼는가.
첫 번째는 우선 이치에 맞지 않다. 좋지 못한 경계가 없으나, 허망한 마음이 성립시켰음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만일 이 견해가 상상(想像: 想)의 차별 때문이라고 말한다면, 참으로 앞 경계가 텅 비어 없다는 것과 서로 어긋나지 않으니, 이것은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 두 번째의 헤아림은, 어떻게 저 경계가 이 형상을 나타낼 수 있으랴.
만일 그 나쁜 업 때문에 생겼다고 말한다면, 어떻게 한 곳에서 수많은 똑같은 무리가 함께 살아갈 수 있겠는가.
걸리는 물건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 외 다른 동일한 곳에서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돌과 기와가 똑같이 있음을 인정함과 같다. 분명히 알라. 고름과 물은 다른 방면이지만, 똑같은 경계에서 보게 하였으니. 이것은 이치에 맞는다. 막히고 걸리는 성질이기 때문에 오히려 즐거움 등이 막히고 걸리지 않는 성질을 성립시키는 것과 같다.
만일 고름 등이 이 막히고 걸리는 성질이라고 말한다면.
마땅히 한 곳을 볼 수 있음이 돌과 같지 않아야 한다. 이를 근거로 분명히 알라. 한 곳을 본다면 이치와 서로 어긋난다.
만일 물건의 모임에는 흔히 사이에 틈이 있어서, 그 빈 곳에 함께 서로 끼어들어 많은 것이 그 외 다른 것을 되 비춘다고 말한다면.
가령 서로 유사할지라도 따로 가려볼 수 없다. 마치 물과 젖처럼, 두루 섞여 다 합해졌기 때문이다. 또 더 없이 견고하고 딱딱한 금강석(金剛石) 등이 불 속에 들어가면, 서로 어기기 때문이다. 또다시 선정(禪定)에서 생긴 업의힘[業力]과 안약(眼藥)에서 발생한 눈의 감각기능[眼根]은 앞 경계의 일을 결정해서, 멀고 가깝고 굵고 미세함을 관찰할 수 있다. 뜻에 맞든지, 뜻에 맞지 않든지를 막론하고, 그 힘의 작용에 따라서 이것들을 다 잘 볼 수 있으니, 마땅히 진실한 설명이 있어야 하리라. 이 때문에 다음과 같이 저 빈틈 가운데에 번갈아 서로 끼어든다고 말할 수 없다.
비록 한 경계에 있을지라도, 물이라고 생각할 만한 것을 없애고 좋지 못한 고름을 본다고 한다면.
곧 바깥 경계에 실제의 일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본 바로는 일찍이 인연하여 걸린다거나, 그 물을 보고 마땅히 그 외 다른 형상으로 본 적이 없어야 한다. 귀신도 또한 똑같이 그렇다.
함께 물을 보는 데서, 만일 향기로운 기름을 끓인다면.
모두 다 함께 냄새를 맡으리라.
만일 비록 저들이 다른 인연이 없을지라도, 단지 그 업(業)만을 근거로 경계에서 물과 고름을 함께 볼 수 없을 뿐이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참으로 잠시 공동의 인정을 어기고, 이치에 맞지 않게 고름을 좋아한 것이다. 그렇지만 자기 식의 한 종류인 똑같은 업을 의지하여, 자체 종자[自種]가 성숙해졌을 때, 인연을 따라 앞에 나타나서 온갖 모양새를 일으킨다. 이 묘한 이치를 어째서 믿지 않는가.
또다시 모든 방호자(防護者)18)가 있다고 한다면, 두렵게 여겨지는 얼굴 모양은 간담을 서늘케 하고 심장을 내려앉게 한다. 날카로운 칼을 빼어들고, 사로잡는 끈을 손에 잡고 있다. 쳐다보기만 해도 곧바로 쫓아내어, 접근할 수 없게 한다. 비록 이 때에 커다란 어려움을 당할지라도, 또한 강하게 당한 일을 밝힐 수도 없다. 이 생명의 무리를 말한다면 저 나쁜 업이 보다 뛰어난 인연이 되었기 때문에, 비록 이 전에는 없었을지라도 홀연히 있게 되었으리라.
이것이야말로 곧 유식(唯識)을 거들어 도와서, 함께 참다운 종(宗)이 세워지게 하리라. 이 도리에 따르면 식이 나타낸 모양은, 참으로 어긋난 잘못이없다. 이와 같이 마땅히 알아야 한다. 결정하는 일이 몸에 예속되지 않는다. 비록 바깥 경계가 없을지라도, 식에서는 성립되는 것이다.19)
꿈에 정액이 손실되는 작용이 있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비록 바깥 경계는 없을지라도, 이치로는 또한 성립할 수 있다. 꿈속에서 남녀가 둘이 교접(交接)하여, 각기 자기의 성기[根]를 가지고 서로 번갈아 문지르기 때문에, 비록 바깥 경계의 접촉이 없더라도, 작용이 성립되어 당장 부정한 정액이 흘러내린다. 단지 식의 모양[識相]만이 스스로 합하고 어울려서, 그 동작이 되었을 뿐이다. 이것이 이미 이렇다면 그 외 다른 데에서도 역시 그래야 하리라. 나쁜 독이나, 칼과 무기, 서리·우박으로 상하는 해로움도, 비록 바깥 경계가 없을지라도, 단지 식만을 의지해서 독이나 칼 등이 있어야 한다. 이 작용의 일이 성립되지 않음은 무슨 이치인가.
이미 바깥 경계가 없다는 공동의 인정이 성립되었으므로, 어찌 종의 잘못이 있을 수 있음을 용납하겠는가.
저것들은 결코 작용이 성립될 수 없다고 한다면.
이 역시 그 서로 떠난 경계에 대한 차별의 접촉[觸]으로, 식의 자리[識分上]에서 이 모양의 상태가 나타났으니, 곧 자기의 종(宗)에 결정하지 못하는 잘못이 있으리라. 그러니 오직 식에서만 정액이 흐르는 일이 성립되었을 뿐이다.
또 어떤 이는 설하기를 기억이 이와 같은 자리[位]라면, 생명이 있는 모든 무리가, 어느 때나 있음을 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라고 한다.
그렇지만 이 진술은 성립될 수 있는 근거[因]가 없으니, 결정하지 못하는 잘못이 있으리라. 감각의 정[覺情]이 일에서 작용함도 역시 성립하리니, 정액이 흘러내린 원인은 식에서 굴러 변했기 때문이다.
또 저것들이 결코 작용의 원인이 성립되지 않음은, 마땅히 단지 전체적 양상[摠相]의 식만을 의지할 뿐이라는 것인가. 성립시킬 수 없음이 식의 차별이란 말인가이 첫 번째의 견해는, 곧 똑같은 비유가 없다. 여기서 말한 식은 작용할 수 있기 때문에, 그 더욱 불어나는 식도 또한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두 번째의 헤아림이라면, 그 식이 할 수 있도록 소유한 작용이 곧바로 성립시킬 수 없는 일의 원인과 함께 결정하지 못하는 잘못이 있으리라.
만일 그렇다면 어디에 이와 같이 결정된 일이 있을 수 있다고, 똑같이 경계가 없다고 하는 것이며, 어떤 때는 인연이 있어서 일의 작용이 될 수도 있기에, 일체가 아니라는 것인가.
공능(功能)이 다르기 때문이다. 저 모든 인연의 공능이 각각 달라지기 때문에, 그 공능을 따라서 작용하게 된다. 또다시 그대와 함께 바깥 경계에 집착하는 스승도 그 이치가 서로 유사하다. 경계를 이미 똑같이 두었으니, 어째서 온갖 일이 모든 때에 성립되지 않으랴. 그러므로 마땅히 인정해야 하리라. 다르고 달라지는 일마다 각각 공능이 있어서, 작용할 때에 그 달라진 모양을 드러내 보인다고 하면, 이것은 곧 유식자(唯識者)의 견해와 똑같으리라.
다른 사람이 또 말하기를, 이치로는 실제로 여자의 형체와 접촉하지 않아도, 부정한 정액이 나올 수 있다. 깨었을 때도 그러리라고 하였다.
그러나 지극히 치성한 음욕에 흠뻑 젖은 흥분[極重染愛]이 바로 앞에 닥친다면, 결국 당장 이와 같이 정액이 넘쳐흐르는 상태에 다다르기 때문이다. 꿈에서는 등무간연(等無間緣)20)의 차별된 힘이 있기 때문에, 결국 곧 이치에 맞지 않는 충동적 감정[作意]을 끌어내고, 이것이 원인이 되어 문득 정액이 흘러내림을 보는 것이다. 마치 꿈에는 비록 실제의 경계는 없을지라도, 부정한 액이 흘러내리 것과 같다. 독을 마셨다거나 지나치게 먹었다거나 여자의 몸 등을 접촉하거나 하면, 몸이 괴롭고 아프며 성기[根]의 힘이 충실하다면, 남자아이나 여자아이가 생기는 등 그 꿈속에서는 일이 마땅히 존재함이 성립한다. 그러므로 반드시 알아야 한다. 꿈속에서 정액의 흐름과 같이, 경계는 없어도 작용이 있으니, 깬 상태에서도 이와 같이 비록 작용하더라도 경계가 없다면, 이치에 맞지 않다.
비록 그 경계가 없을지라도, 식의 작용이 성립한다면.
만일 깨었을 때에 비록 경계가 없을지라도, 이 유식(唯識)의 작용이 성립될 수 있다고 인정한다면, 이거야말로 어찌 훌륭하게 ‘오직 식일 뿐, 경계가 없다고 논하는 자’와 부합하지 않으며, 또 어찌 좋아하지 않으랴.
만일 별도로 다음과 같은 취지가 있어서, 여러 가지 접촉[觸] 등이, 다 바깥 일을 의지해야만비로소 작용이 성립된다고 말한다면.
단지 오직 식만이 있을 뿐이란 이치는 성립될 수 없으리라. 마치 전단나무를 갈고 짓이겨, 향 연고를 만든 다음 몸을 바르는 데 쓰면, 더위의 답답함을 없애고 서늘하여 시원해짐과 같다. 그렇지만 이 정액의 흐름은 단지 식에서만 생길 뿐이니, 이것은 되려 이치가 정확하게 들어맞지 않는다. 접촉 등의 경계를 의지하여 작용이 있음은, 인정한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외부의 접촉 자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면, 저에게 이 접촉하는 일을 의지해서 작용을 일으키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하여 마땅히 저와 더불어 작용하지 못한다면, 곧 접촉이 있지 않는 잘못을 범하리라. 그러므로 오직 이 식이 있을 뿐임을 성립시킨다면, 단지 이 사물이 소유한 작용의 차별은, 모두 식의 경계에서 생길 뿐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도 잠시 다음과 같이 이미 바깥 경계가 없다면, 어떻게 식을 떠나서 작용할 수 있기에, 일을 성립시키겠는가라는 논란이 일어날 수 있으리라. 이미 이 질문[徵]이 있었고, 곧 바른 비유를 들어 말하였다. 꿈속에서 정액이 손실되는 일이 성립됨과 같기 때문이다. 이것은 오직 식에서만 작용이 있을 뿐이란 점도, 모두 이미 앞에서 매우 자세히 설명한 것과 같다.
만일 그렇다면, 꿈속에서 독(毒) 등을 마셔도, 마땅히 몸의 병이 이뤄지리라. 이 역시 그 유식(唯識)에 작용이 있기 때문이라면 오히려 경계에 결정이 예속되어 있는 것과 같다 하리라.
되려 나중에 할 답을 가지고, 먼저 의심을 막는 데 쓰리라.
어떤 이는 또 때로는 그 독 등을 보면, 비록 실제의 경계가 없을지라도, 작용하는 경우도 있다. 실제로 뱀에게 물리지 않았으나, 보고 독으로 의심해도, 기절하여 땀을 흘리며, 마음이 혼미해질 수 있다. 가령 실지로 뱀에게 물렸을지라도, 또한 꿈속에서 하늘에 주문(呪文) 외우는 등 더욱 불어난 힘 때문에, 드디어 배불리 먹고, 기력이 충실하여 강해지기도 한다. 또 들어 본 적이 있는가. 자식을 얻으려고, 은밀히 상인(牀人)21)을 섬겼는데, 꿈에 어떤 사람과 함께 사귀어 사이좋게 즐기는 것을 보고 나서, 곧바로 그 자식을 얻었다고 한다. 저 꿈속에서 당한 독 등의 상해(傷害)가 실지로 있지 않음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꿈에서 깨고 나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이 논할 대상도 되려 저 종류와 똑같다. 현재의 감각으로 느낄 때는, 오히려 실제의 일로 삼고, 독약 등을 보면. 집착해서 틀림이 없다고 여긴다. 참된 지혜로 깨쳤을 때는, 곧바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저 꿈 가운데서, 자체가 진실이 아닌 것과 똑같다.
그러나 꿈속에서, 실제의 물질[實色]이라고 인정한다면.
저 또한 좋지 못한 일을 당한다. 독 등의 효과적 작용도, 곧 실제로 있음이 성립한다.
만일 없다는 것을 말한다면.
단지 독의 모양[毒相]만 있을 뿐이요. 독 등의 작용은 없다. 이것을 독의 상태[毒狀]라고 말하면, 곧 어긋난 해로움이 성립한다. 독의 모양 등을 인정함도 실로 이익이 없다. 그 식(識)에는 약의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실제로 바깥 경계가 없음을 알아야 한다. 단지 감각의 마음에서만, 그 작용이 생길 뿐이다. 꿈에서와 같이, 깨었을 때도 또한 그렇다. 이것은 이에 참으로 도리에 부합함이 성립한다.22)
지금까지는 우선 말한 사실을 따라서 유별난 꿈의 비유와 특별한 귀신 등을 가지고, 저들이 진술한 네 가지 논란을 각각 비유로 설명하여 끝냈다.23)
이제 다시 또 나락가(捺洛迦: 곧 地獄世上)의 비유를 들어, 저들의 모든 논란을 답한다면, 그 사실이 훌륭하게 성립하리라. 극악한 유정(有情)과 극악한 옥졸(獄卒) 등에 결정된 장소와 시간이 있으나, 모두가 결정이 아니라고 보기 때문에 다 식을 떠나지 아니하고 유별난 형상이 있는 것이다. 아울러 개·까마귀 등에서 생긴 참혹한 해침과 모질게 도려내는 괴로움이, 때리고 고문하는 일을 따라서 죄값을 다 받아야만 끝난다. 이 비유를 가지고 말을 따라서 따질 만하다. 평범하게 풀어나가는 모든 답은 위와 같이 생각해야 하리라.24)
또 이치로는 실로 극악한 옥졸 등은 있지 않으리라. 말한 사실대로라면, 결정과 불결정(不決定)이 있으니, 무엇을 원인으로 생길 수 있는가.
그러나 또한 저기에서도 작용하는 마음이 일어난다. 이것이 생기는 원인이 당시에 작용이 있어서 태어남을 얻기 때문이다. 곧 이들의 보는 대상은, 대다수가 서로 다르다. 공능(功能)을 빌려서, 아울러 내부의 마음의 상속이 업력의 차별을 따라 구르면서 직접적인 원인[正因]이 되기 때문이다. 또다시 취(取)25) 등의 순연(順緣)26)을 빌려서 함께 서로 돕기 때문에, 일을 따라 일어난다. 이에 보는 것 등이 구르면서 이뤄지니, 이숙(異熟) 등의 결과가 모두 다 뚜렷하게 나타난 것이다. 이에 따르면 실제로 존재한 옥졸이 없을지라도, 그러나 저 가운데서 반드시 서로 유사한 자신이 지은 악업(惡業)의 더욱 불어난 힘을 빌려야 하기 때문이다. 함께 이 가운데서 장소의 결정 등을 보고, 역시 또 거기에서 작용하는 마음을 일으킨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들은 저 색(色) 등에서 실제의 존재를 떠나 있지 않지만, 식으로부터 생겼음을 밝혔으며, 이 뜻을 명확히 하려고 이를 지어 성립시킨 것이다. 그리고 식이 떠난 경계를 기다리지 않 고루 미치는 주체이기 때문에, 서로 어기는 잘못을 벗어난다.
만일 접촉 등의 경계를 색 자체의 성질이라고 한다면, 곧 세워야 할 대상이요, 만일 단지 실제의 일을 결정으로 고집하여 세운 것이 이미 성립되었음을 설명할 뿐이라고 말한다면, 저 과실(過失)을 벗어나는 말을 가지고 구실[方便]을 삼기 때문이다.
마땅히 이미 자기 종이 성립시킨 상(相)에 대해 밝혔음을 알아야 한다. 그 가운데 세워야 할 대상은 ‘따라 순응하는 원인’이니, 꿈 등의 식을 가지고 그 비유를 삼았기 때문이다.
곧 이것을 집착하여 말하기를 이와 같은 뜻을 밝혀서 장소와 시간의 소유한 일의 체를 결정한다면, 그 감각이 온갖 모양을 나타낸 것으로서 마치 꿈속에서, 그 마음이 온통 어두워짐과 같다. 이미 꿈에서 깨어난 뒤에 분명한 생각으로 색 등을 볼 때에도, 참으로 또한 식이 아닌 색을 인연하지 않는다. 반드시 꼭 색 등의 경계가 나타나기를 바랄 필요도 없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똑같은 업[同業]의 이숙(異熟)이 받아들였으므로, 함께 수용(受用)할 때, 자체의 상속(相續)에서, 결정이 하나에 예속되어 생겨나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주리고 목마른 모든 아귀의 무리가 똑같은 나쁜 업이 있어서 고름의 강등을 보는 것과 같고, 혹은 또 지극히 험악한 곳에서 모두가 사나운 옥졸을 보는 것과 같다. 여기에 적당하게 알맞은 둘을 다 성립시킴은 현재 보는 경계에 그 작용이 있는 것과 같이, 분명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꿈에서처럼 단지 오직 식의 모양[唯識相]만으로, 여자와 더불어 성교 맺는 일을 보기도 하고, 옥졸 등과 같이 모두 함께 그 괴롭히며 해치는 일을 보기도 하니, 아울러 이를 서술하였다.
어찌 반드시 극악한 옥졸 등이 존재하지 않음이 성립되고 나서야 비로소 이를 가지고 주체적으로 세울 일을 바라지 않겠는가. 이것이 이미 성립되지 않았으니 곧바로 존재하지 않음이 성립하고, 똑같은 비유의 허물도 참으로 이렇게 문득 성립하는 실수가 없다. 이러한 무리[物]이기 때문에, 역시 또 유정(有情)으로 여기려 하나, 오히려 설할 방법이 없는 것과 같다. 경계에 집착한 감각의 받아들임[執受]을 떠났으니, 감각으로 받아들이는 일[受事]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또한 경계에 집착한 감각으로 받아들인 일[執受事]이 아니니, 기와나 나무와 같고 또한 개미의 집과 같다. 그로 말미암아 유정(有情)의 수(數)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어떠한 뜻이 있기에, 옥졸(獄卒) 및 개, 까마귀 등을 유정의 수로 인정하지아니하는가. 이들은 똑같이 유정의 형세를 보이기도 하고, 움직임도 있으며, 또한 바깥 인연의 힘을 빌리지도 않기 때문에 그 외 다른 유정과 마찬가지다.
만일 그렇다면 이것은 이에 온갖 원인이 성립되지 않으니, 이 논란은 이치에 맞지 않다. 모든 나락가(那落迦)27)가 소유한 동작은 바깥 인연을 기다리지 않는다. 저 나락가(那落迦)는 이전에 지은 죄악의 업에 맡겨진 것이니, 마치 나무 그림자가 춤추는 것처럼 똑같은 중생의 모양이다. 또 저들이 결코 유정이 아니니, 다섯 세상[五趣]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오히려 나무나 돌과 다르지 않다. 이를 근거로 분명히 알라. 저들은 결코 마땅히 악한 업으로 태어난 무리와 똑같지 않아야 한다.
그 외 다른 악한 업의 중생과 마찬가지로 이곳에 태어났으니, 여기서 겪는 공동의 고통을 똑같이 받아야 하리라.
그러나 저들은 이 고통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저 지옥유정이 겪는 공동의 고통을 받지 않음으로, 마치 지만(指鬘)28) 등이 나락가(那落迦)가 아닌 것과 같다.
그러나 온갖 나쁜 업의 중생이 똑같이 이 고통을 받는다는 것은, 저 공동의 업으로 함께 이곳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만일 이와 다르다면 지옥에 태어나기도 어려울진대, 더욱이 해침을 당하겠는가.
비록 이런 이치가 있을지라도, 그 옥졸 등이 저 고통을 받지 않는 것이, 공동의 성립이 아니라면, 이것은 바른 설명이 아니니, 저 생명의 무리는 해치는 괴로움을 똑같이 받지 않기 때문이다. 해치는 입장이 아니라는데 근거한다면, 되려 저들은 중생을 해치며, 한가지로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똑같이 고통을 받으리라. 만일 또 좀더 깊이 생각해서 말한다면, 서로 번갈아 가며 함께 마주 해치고 괴롭히기 때문에, 저 생명의 무리는 어떤 때는 고통을 받는다고 인정하리라.
이 또한 이치에 맞지 않다. 그 상대를 번갈아 서로 해칠 때에는, 이것은나락가(那落迦: 地獄有情), 저것은 파라(波羅: 獄卒)라는 위치가 곧 없어져 버린다. 해치는 능력이 작용할 수 있기 때문에 옥졸이라고 말한다. 만일 하나가 이미 그러니, 그 외 나머지도 또한 마땅히 그래야 한다면, 이거야말로 둘 다 옥졸의 성질이 성립되고 만다. 그러면 나락가(那落迦)는 자체의 성질이 분리되지 않아서, 결국 어긋난 실수를 범한다. 이에 따르면, 옥졸의 성질이 아니기 때문에, 33천(天)과 같다. 뜻은 그 나락가(那落迦)를 설하여 피해자가 아님을 밝히려고 하였다.
만일 서로 번갈아 해치는 이치가 둘 다 같다고 인정한다면. 저들과 이들은 서로 능멸하리라. 자기에게 힘이 있음을 알고 형체의 크기나 장대함도 차이가 없으니, 번갈아 서로 속이면서 마땅히 두려운 마음을 내지 않으리라. 가령 저 아주 큰 몸의 모습을 본다 하더라도, 자기의 날랜 용기를 믿고 곧바로 그들보다 낫다는 생각이 생길 것이다. 이와 같이 자기를 인식한다면, 어찌 두려움을 용납하겠으며, 어찌 나락가(那落迦: 地獄有情)가 옥졸 등을 보는 것과 같다 하리요. 더욱이 형체의 크기와 기운의 능력도 다르지 않으니, 어찌 저들을 볼 때에 두려운 생각을 일으키겠는가.
또다시 함께 지옥의 담당자가 되어, 형체의 크기가 똑같고, 몸의 힘이 이미 차이가 없다면, 여기에는 강함과 약함이 없으리라. 이치로는 마땅히 별도로 형상의 크기가 고르지 않고, 건장함과 용맹함과 냉혹함이 있어서, 보기만 해도 곧 두려움이 생겨야 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 나락가(那落迦)의 무리가 당장 고통을 받는 중이라도, 저 옥졸이 오는 것을 보면, 곧바로 큰 두려움이 생기고, 근심의 불이 안으로 일어나서 온 가슴을 다 태우리라. 고통은 끊임없이 연달아 생기고, 형체와 뼈는 떨리면서 떨어져 나간다. 악한 업으로 태어난 무리는 이러한 고뇌를 받는다. 가령 뛰어난 기교와 밝은 지혜의 무리일지라도, 역시 또 그 일을 다 알 수 없다. 이 순서의 자리[階位]는 참으로 이치가 서로 틀리긴 하나, 세상에서도 또한 이런 일을 보기 때문이다. 어떤 이가 나쁜 생각을 일으켜서 상대를 죽일 독한 마음(鴆毒心)29)을 품었다면, 남 을 해치려고 겁을 주어 두려운 마음이 생기게 한다. 비록 지극히 엄중하고 두려움으로 가득 찬 곳에 있을지라도, 갑자기 묶임을 당할 때 겁을 내는 자가 그 두려움을 일으킴이 똑같지 않다. 그리고 저 무리가 품고 있는 단단하고 굳센 마음은 흔히 보는 일이기 때문이다. 저 나락가(那落迦)에서 고통을 받는 무리는 대부분 공포를 품고 있으며, 몸은 녹아 내린 쇳물과 같다. 때문에 이 나락가(那落迦)가 해치는 입장이 아니라고 함은, 마치 도살장의 기둥에 묶여 있는 짐승과 같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저 옥졸들은 두려움을 일으키는 원인이므로, 저들이 당하는 고통을 받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