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동자경(善思童子經) 01. 상권

선사동자경(善思童子經)

수(隋) 천축(天竺) 사나굴다(闍那崛多) 한역 홍승균 번역

선사동자경(善思童子經) 01. 상권

선사동자경(善思童子經) 02. 하권


선사동자경(善思童子經) 01. 상권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婆伽婆]께서 비야리성(毘耶離城)의 암바라바리(菴婆羅波梨) 동산 안에 계셨다. 그때 여러 성문과 8천 명의 비구 및 만 명의 보살들과 함께 계셨는데, 이들 대중들은 다 한결같이 자신의 모습을 변화하여 제천(諸天)의 몸을 하고 있었다.

그때 세존께서는 새벽에 일어나셔서 옷을 갖추시고 발우를 드신 다음, 이들 변화한 대중[化衆]들을 전후좌우에 거느리고 비야리의 큰 성 안으로 들어가셔서 집집마다 걸식을 하셨다. 그리하여 여러 집을 거쳐서 드디어 비마라힐(毘滅詰:維摩詰) 이차(離車:刹帝利 종족)의 집에 이르셨다. 그때 비마라힐 이차의 집에는 동자가 한 명 있었는데, 이름을 선사(善思)라고 했다. 그런데 선사는 자기 집의 2층 방에서 유모에게 안겨서 손에 한 송이 연꽃을 들고 놀고 있었다. 이 동자는 본래 전생에 온갖 선근을 심어서 그 훈습(熏習)을 받은 데다가, 또 부처님의 신통력에 의해 홀연히 그 유모에게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게 되었다.

갖가지 음악 소리에 가려서 
지금 미묘한 소리가 들리는구나.


유모여, 나를 데리고 
저 다락 위로 가주오.



이처럼 광명을 비추니 
필연코 대장부(大丈夫)이리라.


오른발을 문지방에 걸치고 
이 성문을 들어오려고 하시는구나.



미묘한 소리가 마음에 기뻐라.


온갖 새들이 조잘거리네.


이처럼 조잘거리는 새소리를 
나는 오늘에야 처음 듣네.



분명코 이는 조어장부(調御丈夫)께서 
이 세상을 이롭게 하시려고 
오른발을 문지방에 걸치고 
이 성문을 들어오려고 함이어라.



영락으로 꾸민 옷을 입어서 
온몸에서 소리가 나는구나.


그 쟁그랑거리는 소리에 
듣는 사람이 다들 기뻐하네.



필연코 이는 천륜의 발[千輪足]이겠지.


몸과 마음이 장엄하구나.


오른발을 문지방에 걸치고 
이 성문으로 들어오신다네.



대지가 저처럼 진동하니 
마치 동종(銅鍾)을 울리는 것 같아라.


이처럼 우렁찬 소리를 
듣지 못할 자는 없으리.


필연코 저 사람의 태양[人日]은 
대성인(大聖人)의 몸의 광채일 것이니 
이 성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 중생들의 두려움을 없애 주시리.



마치 온갖 숲들이 
갖가지 꽃들로 화려하듯이 
온갖 미묘한 소리 
듣는 중생들이 즐거워하네.



결정코 잘 안주[善安住]하되 
용왕에게 발원(發願)하라.


오른발로 문지방을 넘어 
지금 이 성문으로 들어오시네.



마치 허공에 빛살이 퍼지듯 
넓은 대지가 골고루 밝구나.


햇빛이 정작 빛나지 않는 것은 
세존의 황금빛 때문이리라.



결정코 이를 관찰하기를 좋아하며 
위엄의 광염(光焰)을 내뿜으며 
오른발로 문지방을 넘어 
이 성문으로 막 들어오시네.



유모여, 이것을 보시오.


천인들이 허공에 보이지요? 
옷자락 펄럭이며 
기뻐서 노래하고 있다오.


가장 뛰어난 중생들을 위해 
분명코 세상을 이익되게 하시려고 
오른발로 문지방을 넘어 
성문으로 들어오시네.



지금 이 큰 성 안에는 
서로 향해서 자비심을 일으키니 
각자가 서로 기뻐함이 
마치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듯하구나.



필연코 저 대복취(大福聚)께서는 
온갖 덕으로 몸을 장엄하고 
오른발로 문지방을 넘어 
지금 막 성문을 넘고 계시리.



그리고 또 남녀 부부가 
갖가지 향화(香花)를 들고 
4면의 표주박에 가득 뜨니 
마음에 큰 기쁨이 일어라.



필연코 대자재(大自在)한 분이 
복덕의 꽃으로 장엄하고 
오른발로 문지방을 넘어 
지금 막 성문을 넘고 계시리.



천인(天人)이 하늘 꽃을 뿌리니 
허공에 온통 가득하구나.


곳곳에 내리는 온갖 향기 
그 미묘함이 정말 기뻐라.



필시 세상의 선서(善逝)께서 
큰 복과 지혜로 성을 들어오셨으리라.


중생을 이익되게 하시려고 
이제 여기에 오셨다네.

그때 선사를 안고 있던 유모는 동자가 이처럼 스스로 게송을 설하는 것을 듣고 두려운 마음이 생겨서 몸의 털들이 모두 곤두서고 온몸이 떨려서 가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 어린 아이를 다락 위에 고이 갖다 놓고 나서 곧 이런 생각을 했다.

‘이 아이는 대체 누구일까, 천(天)일까, 용(龍)일까, 야차(夜叉)일까, 나찰(羅刹)일까, 구반다(鳩槃茶)일까, 비사차(毘舍遮:食血肉鬼)일까, 긴타라(緊陀羅:歌神)일까, 아니면 마후라가(摩睺羅伽:蛇神)일까? 이와 같은 말은 결코 이 세상의 어린아이가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그러자 유모는 몸이 굳어져서 움직일 수 없게 되었으며, 또한 일어나 걷거나 말을 크게 할 수조차 없어서 간신히 숨을 헐떡이며 머리를 떨어뜨리고는 잠잠히 듣고만 있었다.

그때 세존께서는 차츰 이차(離車)인 선사 동자의 집 가까이까지 오시다가 마을에 들어와서 그의 집 문 앞에 이르러 걸음을 멈추셨다. 이차 선사 동자는 세존께서 자기 집 문 앞에 서 계신 것을 보고 그 높은 다락 위에서 곧장 부처님을 향해 몸을 던졌다. 그러나 선사 동자는 부처님의 신통력으로 해서 허공에서 지상으로 우뚝 내려섰다. 그리고 곧장 게송으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지혜 가운데 계시는 세존이시여, 
여기 계시는 가장 훌륭한 분이시여, 
모든 중생들을 이롭게 하시는 분이시여, 
원컨대 저의 이 연꽃을 받아 주소서.

그때 세존께서는 역시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이차 선사 동자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머문 곳은 진실의 경계[實際]이니 
중생들의 경계가 아니라네.


그 경계엔 있는 것이 없지만 
이 경계는 바로 실상(實相)이어라.

세존께서 이처럼 말씀을 마치시자, 이차 동자가 다시 게송으로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께서는 왜 
이 진실의 경계에 머문다고 하십니까? 
이 경계는 이미 없는 것이니 
있지 않은데 어디에 머무십니까? 

이차 선사 동자가 이 같은 말을 마치자, 부처님께서 다시 게송으로 대답하셨다.

그 경계가 만약 진실의 경계라면 
그 경계는 곧 여래(如來)라네.


그와 같은 진실한 경계에 머문다면 
내가 거기에 머묾도 마찬가지리라.



만일 모든 부처들이 실제와 같이 
그 체(體)가 하나로 다르지 않다면 
마치 그 진실한 경계처럼 
나도 또한 그렇게 머무네.

세존께서 이처럼 말씀을 마치시자, 선사 동자는 다시 거듭 게송으로 부처님께 여쭈었다.

실제의 실제가 아니면서 실제가 아닌 것, 
이러한 실제는 어떤 모습이 있으며 
어떠한 방편이기에 
실상(實相)이라는 이름을 얻었습니까? 

이차 선사 동자가 이처럼 말을 마치자, 부처님께서 다시 게송으로 대답하셨다.

실제의 실제[際際]는 잡을 수가 없기에 
그래서 이것을 실제라고 한다네.


그 실제는 허공과 같으니 
허공 또한 모양[相]이 없네.

세존께서 이처럼 말씀을 마치시자, 선사 동자가 다시 게송으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진실이 있는 곳에 머문다는 것은 드문 일인데 
머물되 가장 높은 곳에 머무네.


원컨대 중생들이여, 여기에 머무소서.


마치 부처님들께서 머무시는 것처럼.

이차 선사 동자는 이와 같이 게송을 마치고 마음을 가다듬어 합장한 다음 부처님께 여쭈었다.

“바라건대 세존이시여, 저를 가엾이 여기셔서 이 연꽃을 받아 주십시오.”

그때 세존께서는 이 이차 선사 동자를 가엾이 여겨 그가 올리는 연꽃을 받으셨다. 부처님께서 연꽃을 받으시자, 이차 선사 동자는 뛸 듯이 기뻐하면서 다음과 같이 발원(發願)하였다.

“지금의 이러한 선근으로 인하여 제가 만일 내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한다면 지금의 세존처럼 모든 중생들을 위하여 법을 설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 법 가운데 범부의 법이나 아라한의 법과 성인의 법은 모두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때 장로 사리불(舍利弗)이 함께 이 회합에 참여하여 이 말을 들었다. 그래서 대중들 속에서 이차 선사 동자에게 이렇게 물었다.

“이차 동자여, 잘 생각해서 그와 같이 말해야 한다. 네가 말한 것에 대해 내가 증명해 주겠다. 그런데 그와 같은 법이 모든 중생들을 위해 설한 것이라면 어떻게 말하며, 그 법은 어떤 것인가?”

그러자 이차 선사 동자는 즉시 게송으로 사리불에게 대답하였다.

그 법에는 부처님도 없고 
성문(聲聞)도 없다네.


내 이 법을 증득하여 
중생들을 위해 설하리라.



그 법은 처소(處所)도 없고 
또한 오고 가는 것도 없다네.


지혜로운 자는 이것이 
법의 본래의 체성(體性)임을 안다네.



과거의 모든 부처님과 
현재의 무상존(無上尊)이 
하나같이 이렇게 알아서 
무여적멸(無餘寂滅)에 들어갔다네.



거기에는 법계(法界)도 없고 
또한 중생계(衆生界)도 없다네.


이러한 구극(究極)의 경지에 
세간에서는 들어가는 자가 없어라.



법계란 다만 이름일 뿐이라네.


이름이란 분별에서 생기는 것이니 
없는 분별을 분별한다면 
그 끝은 얻을 수가 없어라.

그때 장로 부루나미다라니자(富婁那彌多羅尼子)가 대중 속에서 다시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선사 동자에게 물었다.

너는 어떤 어린아이기에 
능히 이런 법을 배워서 아는가? 
이 법은 너무 깊어서 비유할 수가 없으니 
모든 지혜로운 자가 미혹을 일으키네.



너는 아직 걸음마도 못하는데 
벌써 이런 말을 하여 
최고의 답변을 하니 
지혜로운 대성문(大聲聞)이로구나.



너의 몸은 진금(眞金)과 같아서 
모든 것을 잘도 이해하는구나.


이 성 안에서 그 빛이 찬란하니 
마치 하늘의 달과 같아라.

그러자 이차 선사 동자는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장로 부루나미다라니자에게 대답하였다.

존자(尊者)는 지금 삶[生]을 말하지만 
이 삶이란 있는 곳이 없다네.


모든 법에 삶이란 없는데 
삶을 말하니 이것이 무엇인가? 

모든 법에 이미 삶이 없는데 
무엇을 두고 진체(眞體)라 하는가? 
그래서 내가 본성을 말하면서 
일체의 법이란 없다고 했다네.



법이든 그 법의 본성이든 
둘은 모두 얻을 수 없는 것, 
이 둘은 이미 얻을 수 없으니 
모든 부처님께서는 이런 법을 설하신다네.



이것의 이름은 최상륜(最上輪)으로 
녹원(鹿苑)에서 처음 하신 설법이라네.


허공에 불끈 주먹을 쥐시니 
많은 제자들이 깨닫게 되었다네.



법을 설하는 소리만 울리니 
중생들이 광혹(誑惑)함이 많아라.


방편과 지혜를 통해 
반드시 진실대로 말하리라.



삶과 죽음을 말하는 자들을 
범부의 경계라고 부른다네.


이것은 뒤바뀐 소견이니 
부루나여, 미진(未盡)하도다.



나고 죽음과 이것과 저것은 
세속 사람들의 말이라네.


말 없는 법 가운데 
말을 빌어서 말하도다.

장로 부루나미다라니자는 이 게송을 듣고 나서 기뻐서 칭찬하였다. 그리고는 부처님께 다음과 같이 여쭈었다.

“드문 일입니다. 바가바시여, 매우 드문 일입니다. 수가타(修伽陀)시여, 이 선사 동자가 이처럼 가히 헤아릴 수조차 없는 더없이 깊은 지혜를 가지고 있다니요.”

그러자 부처님께서 부루나에게 말씀하셨다.

“과연 그렇다. 부루나여, 과연 네가 말한 것과 같구나.”

그런 다음 세존께서는 이차 선사 동자에게 이렇게 물으셨다.

“선사 동자여, 너는 지금 누구를 위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를 증득하려고 하느냐?”

이에 이차 선사 동자는 곧 게송으로 부처님께 대답하였다.

부처님, 가장 뛰어나신 세존이시여, 
아시면서도 일부러 저에게 물으십니다.


누구를 위해 갑옷을 입었느냐고 
그 진실을 지금 밝히라고 하십니다.



저에게는 위하는 사람이 없으니 
입을 갑옷도 역시 없습니다.


깊고 깊은 상법(上法) 중에는 
교화할 중생도 없습니다.



중생이든 또는 중생이 아니든 
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런 곳에는 미혹함이 없으니 
이를 일러 세존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은 삶의 이해의 법은 
실제(實際)가 항상한 것처럼 
같은 것 아니니, 다르지 않음도 없는 
이것이 깊고 깊은 최상법입니다.



저는 마땅히 중생을 깨우치게 해주어야 하지만 
중생이란 것도 역시 없습니다.


중생에게 그 체(體)가 본래 없는데 
거기에 어찌 지혜가 있겠습니까? 

지혜와 중생에는 
구경의 체성[性]은 없습니다.


만일 이와 같이 이해할 수 있다면 
그를 일러 세상의 지혜 있는 사람이라 합니다.

이차 선사 동자는 이 게송을 설하고 나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위대한 성인이신 세존이시여, 제가 만약 앞으로 이러한 법을 스스로 깨달아서 알기만 한다면 모든 중생들을 위하여 이와 같이 설하겠습니다.”

그때 장로 아난(阿難) 비구가 대중들 속에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참으로 드문 일입니다. 바가바시여, 희유한 일입니다. 수가타시여, 이 어린 이차 선사 동자가 능히 이처럼 깊고 미묘한 법구(法句)와 염착(染着)이 없는 말과 의착(倚着)이 없는 말을 설하니, 이와 같은 깊은 법에 대하여 천인과 세간의 두려움과 미혹이 사라졌습니다. 이와 같은 실성(實性)의 깊고 깊은 법을 누군들 행하고 싶지 않겠습니까마는, 옛날에 이 깊고 깊은 법에 대하여 인연이 있는 자만이 능히 그러한 신심(信心)이 생길 뿐입니다.”

이때 아난은 이러한 뜻을 거듭 펴고자 하여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말하였다.

마치 진금(眞金)이 모여 있는 듯 
그 묘함이 드러나서 빛을 내는 
이 선사 동자는 
지금 대중 속에 함께 있다네.



마치 저 수미산(須彌山)처럼 
대해(大海) 안에 안주하는구나.


이처럼 훌륭히 법을 설하니 
이 세간을 온통 가득 덮으리라.



있지[有]도 않고 없는 것[無]도 아님을 
선사 동자가 설하였다네.


저 실제(實際)도 이와 같이 
그 실제 또한 공하고 없는 것이라네.



네가 지금 이것을 설할 때에 
두려움이 인 적이 없어라.


선사여, 그대는 이와 같은 법을 
어떻게 알았는가? 

그러자 이차 선사 동자가 이 말을 듣고 나서 즉시 게송으로 아난에게 대답하였다.

내 이미 몸을 버릴 맹세를 했기에 
이 무위(無爲)의 갑옷을 입은 것이며 
바람[望]이 없기에 도를 구하고 
많이 들었기에[多聞] 이렇게 안 것이라네.



5욕(欲)으로부터 미혹을 당해서 
두려움의 지옥에 떨어진다네.


그런데 지금 무상존(無上尊)을 뵈었으니 
내 어찌 기쁘지 않으랴.



세존은 크게 자비하시어 
모든 중생을 교화해 제도한다네.


내 몸이 지옥에 떨어져도 상하지 않고 
지금 여기 부처님 앞에 있네.



허공과 나의 체(體)는 
둘 다 없는 것이라네.


몸도 허공도 없는 것이라면 
몸이 부서진들 무엇을 걱정하랴.



불신(佛身)과 저 허공의 체는 
본래 진실하여 나눌 수가 없다네.


이와 같은 인심(忍心)만 갖는다면 
공중에서 떨어져도 두렵지 않으리.



저 허공과 대지는 
진여(眞如) 속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네.


지금 내가 그 진실을 알고 있으니 
이 때문에 두려움이 없다네.



저 드넓은 허공이나 대지는 
구경(究竟)에는 얻을 수가 없는 것.


진실도 생사도 거기에 없으니 
진실로 놀라움과 두려움이 없어라.



허공에는 꼭대기가 없으니 
밑바닥도 역시 없어라.


이와 같은 법을 안다면 
놀랄 것은 아무 곳에도 없다네.

이처럼 이차 선사 동자가 게송을 마치자, 부처님께서 물으셨다.

“선사 동자야, 너는 두렵지 않느냐?”

그러자 선사 동자가 부처님께 대답하였다.

“거룩하신 세존이시여, 저는 조금도 두렵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 다시 선사 동자에게 물으셨다.

“너는 겁나지 않느냐?” “거룩하신 세존이시여, 저는 조금도 겁나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 다시 물으셨다.

“선사 동자야, 너는 무섭지 않느냐?” “거룩하신 세존이시여, 저는 조금도 무섭지 않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선사를 찬탄하며 말씀하셨다.

“훌륭하고도 훌륭하구나. 선사 이차여, 참으로 훌륭하구나. 네가 지금 이처럼 두려워하지도 않고 겁내지도 않고 무서워하지도 않다니.”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이 일에 대하여 선사를 위해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유(有)가 있다고 해서 공포가 생긴 것이지 
그 유란 얻을 수가 없는 것이라네.


능히 이 인(忍)을 결정할 수 있다면 
그는 곧 보리(菩提)에 가까우리.



모양을 취해서 중생이라 하지만 
중생이란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네.


능히 이처럼 환히 깨닫는다면 
그는 곧 진승(眞乘)에 머무르리라.



보리를 얻는 사람은 없고 
득(得)과 부득(不得)도 얻을 수 없다네.


이러한 득과 부득을 떠난다면 
두려운 마음이 사라지리라.



만일 능히 이러한 것을 안다면 
유에도 무에도 머물지 않으리.


선사여, 너는 알아야 하리라.


이 길이 보리로 가는 길임을.

세존께서는 이처럼 게송으로 말씀하시고 나서 다시 선사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선사 동자야, 그렇기 때문에 보살마하살로서 서둘러 안락하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어서 성취하려고 한다면 마땅히 상상(常相)ㆍ낙상(樂相)ㆍ아상(我相)ㆍ정상(淨相)과 중생상(衆生相) 및 수명(壽命)ㆍ양육(養育)ㆍ복가라상(福伽羅相:補特伽羅相)을 생각해야 한다. 이런 상들은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로 가는 진정한 바른 길이다. 선사 동자야, 내가 전에 발심하여 보살행을 닦을 때에도 항상 이 길에 대하여 생각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곧장 이 길을 따라서 보리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이 길은 무와 유가 같다고 하는 그러한 법만을 따라가야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이것이 곧 나의 무상보리(無上菩提)이다.”

이때 세존께서는 이러한 뜻을 거듭 펴시고자 하여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내 비록 상상(常相)을 설하지만 
그 상(常)이란 있는 것이 아니라네.


상이 없다는 걸 이미 안다면 
다투고 싸울 일들이 없어라.



낙상(樂相)에 집착할지라도 
그 낙이란 것도 실제로는 없다네.


이는 곧 뒤바뀐 견해이니 
바로 복가라(福伽羅)를 분별함이라.



모든 법이 진실임을 안다면 
어느 곳에도 모이는 곳은 없으리니 
그들은 수명상과 복가라상의 
모양을 만들지 않으리라.



길[路]이 보리가 아니라면 
길 아닌 것[非路]도 또한 다시 그러하다네.


내 이러한 본성과 모든 법에는 
처소가 없음을 말하노라.



본성과 온갖 사물에 대해 
지혜로운 자는 분별하지 않는다네.


선사여, 너는 알아야 하리니 
이 길이 보리로 가는 길임을.



만약 이런 길에 집착한다면 
부처님은 그런 길을 가지 않는다네.


만약 유상(有相)에 집착한다면 
그는 모든 법을 모르는 자이어라.



역시 탈 것을 탈 수 없다면 
부처님들이 불쌍히 여기신다.


사람이 능히 무유(無有)를 행한다면 
이것이 적정(寂靜)의 깊고 깊은 곳이리.



어느 곳에도 개체[物]라고 할 것은 없으니 
그것[物]도 개체라고 할 수 없다네.


이미 개체라고 할 만한 것이 없기에 
그러한 낙상(樂相)이 생길 곳도 없어라.



모든 즐거움이나 고통이 있는 
그 길은 허공과 같은 것.


능히 이러한 것을 깨닫는다면 
그 마음에 해탈을 얻으리.



내 비록 아상(我相)을 설하더라도 
이 법 역시 있는 것이 아니라네.


내 것이라는 것이 이미 없다면 
지혜 또한 있을 곳이 없어라.



지혜[智]와 앎[知]이란 없는 것이니 
이것이 곧 지혜의 경계라네.


수명(壽命)이 있다고 분별하지만 
결국 그것도 필경에는 공하다네.



있지 않음[無有]을 앎이라고 하니 
작은 지혜는 곧 미혹된다네.


나라는 것[我相]과 수명이라는 것[壽命相]의 
본성은 있는 것이 아니라네.



본성과 모든 사물이 있다고 하는 것 
이것이 어리석은 경계라네.


이들은 부사의한 불승(佛乘)에 
가까이 갈 수 없다네.



깊고 깊은 경전 말씀을 들을 수도 없고 
또 이를 읽거나 외울 수도 없다는 것, 
있고 없음의 모든 법상(法相)을 
이 경전에서는 말하지 않았네.



내가 모든 법을 성취한 적 없으니 
설할 곳 또한 없어라.


내 예전에 도량에 앉았을 때 
증득한 지혜 또한 있지 않네.



나의 지혜가 그러하니 
보리란 것도 얻을 수가 없어라.


보리와 도량의 
두 가지는 모두 증득할 수 없다네.



범부의 무리는 
부처님이 모든 법을 설하셨다고 분별하네.


그것은 이름을 빌려 설하신 
부처님들의 깊은 뜻이 있는 곳이네.


깊은 법과 부처님의 말씀에 집착하면 
이것이 곧 마군의 경계라네.


경전의 말씀과 
부처님의 말씀을 들을 수가 없다네.



그들은 모든 법의 맛[味]과 
이익되는 곳을 알 수 없게 된다네.


보살이 고행을 하건만 
그 수행의 의미를 알지 못하네.



부처님과 보리라고 하지만 
이 둘은 볼 수가 없어라.


이들을 분별로 사유하고는 
부처님의 말씀이라고 함부로 말하네.



모든 경계가 있다고 하면서 
여기에 기대니 집착이 생겨라.


이미 염오(染汚)와 집착이 있기에 
그들이 나[我]를 보지 못하네.



만일 모든 중생들이 
깊고 깊은 지혜를 성취한다면 
그들은 불법의 불가사의함을 
크게 떨치고 노래하리.



그러니 선사 동자여, 
깊고 깊은 법을 알고 싶으면 
열심히 정진하고 마음을 써야 하네.


그러면 법의 진실을 곧 알게 되리라.


참으로 그 법은 걸림이 없으니 
그러므로 깊고 깊은 법[甚深]이라고 이름한다네.


이것을 이와 같이 말할 때 
얻을 수 없는 것[不可得]이라고 이름한다네.



중생들의 뒤바뀐 견해로는 
그러한 경계를 얻지 못하네.


그러므로 선정(禪定)을 구하지 않고는 
진실한 뜻을 알 수가 없어라.



삼매 아닌 삼매는 
허공에서는 얻을 수 없다네.


이것은 지혜의 경계가 아니니 
지혜가 없다는 것도 역시 그러하다네.



그러한 경계를 깨닫게 한다 해도 
이것 역시 지혜의 경계는 아니어라.


이러한 법은 인연을 따라 있으며 
깊고 깊으며 들어갈 수 있어라.



만약에 적정(寂靜)을 즐긴다면 
이것이니 저것이니 할 것도 없다네.


마음속으로 믿고 즐긴다면 
이 경의 내용을 설하라.



그것은 한 부처님만 가까이 한 것이 아니고 
여러 부처님이 계신 곳에서 
옛날에 모든 선근(善根)을 심은 것이라 
이것을 받아 가질 수가 있었다네.

세존께서는 이 게송을 말씀하신 다음, 다시 이차 선사 동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선사 동자여, 그렇기 때문에 모든 대보살마하살들은 마땅히 모두 이와 같은 갑옷을 입어야 한다. 이 세상에 있는 두렵고 무서운 곳에 있다 하더라도 무섭고 두려운 마음이 생기지 않는 것은 이 마음이 이와 같은 갑옷을 입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자 선사가 곧 부처님께 여쭈었다.

“위대하신 성인 세존이시여, 저는 그것을 믿습니다만 세상에서는 이것을 믿지 않기도 합니다.”

이때 세존께서 다시 선사 동자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보살마하살 등은 깊고 깊은 법에 이와 같은 상(相)이 있으며, 이와 같은 좋은 조짐[瑞]이 있으며, 이와 같은 형상이 있는 것을 행하는데, 그들 모든 훌륭한 장부(丈夫)들은 이 세상에 그 우열을 가릴 수 있는 어떤 법도 없다는 것을 안다. 이미 모든 법이 평등하여 우열이 없다는 것을 알고 나면 그 앎으로 말미암아 두렵거나 무섭거나 놀라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일체의 법은 소멸된다는 것을 알아도 놀라지 않으며, 일체의 법이 소멸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도 무서워하지 않는다. 일체의 법이 있다는 것을 알아도 놀라지 않으며, 일체의 법이 없다는 것을 알아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일체의 법이 모여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아도 놀라지 않으며, 일체의 법이 흩어진다는 것을 알아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일체의 법이 화합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도 놀라지 않으며, 일체의 법이 화합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일체의 법이 나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도 놀라지 않으며, 일체의 법이 나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일체의 법이 사념(思念)이라는 것을 알아도 놀라지 않으며, 일체의 법이 사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일체의 법이 만들어졌다[造作]는 것을 알아도 놀라지 않으며, 일체의 법이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일체의 법이 경계라는 것을 알아도 놀라지 않으며, 일체의 법이 경계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일체의 법이 환희라는 것을 알아도 놀라지 않으며, 일체의 법이 환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일체의 법이 세제(世諦)라는 것을 알아도 놀라지 않으며, 일체의 법이 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일체의 법이 적정(寂靜)이라는 것을 알아도 놀라지 않으며, 일체의 법이 적정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일체의 법이 해(解)라는 것을 알아도 놀라지 않으며, 일체의 법이 해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일체의 법이 지계(持戒)라는 것을 알아도 놀라지 않으며, 일체의 법이 파계(破戒)라는 것을 알아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일체의 법이 명(明)이라는 것을 알아도 놀라지 않으며, 일체의 법이 무명(無明)이라는 것을 알아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일체의 법에 이름이 있다는 것을 알아도 놀라지 않으며, 일체의 법에 이름이 없다는 것을 알아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일체의 법이 나옴이 이와 같다는 것을 알아도 놀라지 않으며, 일체의 법이 나오지 않음이 이와 같다는 것을 알아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일체의 법에 대한 공포가 이와 같다는 것을 알아도 놀라지 않으며, 일체의 법이 무섭지 않다는 것을 알아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일체의 법이 생긴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도 놀라지 않으며, 일체의 법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일체의 법은 죽는다는 것을 알아도 놀라지 않으며, 일체의 법이 죽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일체의 법이 보리라는 것을 알아도 놀라지 않으며, 일체의 법이 보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일체의 법이 열반이라는 것을 알아도 놀라지 않으며, 일체의 법이 열반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법에 대해 능히 이렇게 말할 수 있을 때, 이를 보살이 두려워하지 않고 놀라지 않고 겁내지 않고 무서워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신 뒤, 선사에게 이러한 뜻을 거듭 펴시고자 하여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모든 법이란 있는 것이 아니지만 
진여(眞如)는 미혹(迷惑)이 아니어라.


모든 법이란 없는 것이기에 
그 모습이 곧 적멸이라네.



모든 법에는 우열이 없으니 
이것이든 저것이든 모두가 없다네.


모든 법은 없는 것이기에 
진실(眞實) 또한 없다네.



모든 법에 우열이 있다 해도 
이것도 저것도 모두 없다네.


모든 법이 다 공(空)하니 
다툼도 싸움도 없어라.



모든 법이 이미 없으니 
본성이 어디에 있으랴.


그 성품이 있지 않은데 
무엇이 무너지고 없어진다는 말인가.



모든 법이 단멸(斷滅)이 있을까? 
지혜로운 자는 그런 생각 안하네.


설사 단멸이란 말이 있다 해도 
아무리 찾아봐도 있는 곳이 없어라.



모든 법을 단멸하고 싶어서 
자세히 찾아봐도 있는 곳이 없다네.


그것이 아주 작거나 크거나 간에 
모든 법이란 있는 것이 아니라네.



모든 법이 없다고 말한다면 
이것 또한 말하는 것이 되네.


거기에는 이런 것들은 없고 
다만 드러나 보일 뿐이네.



모든 법에 형상이 없지만 
다만 모양이 드러나 보일 뿐이네.


있다는 말이나 없다는 말이나 
모든 것은 거짓된 이름[假名]이어라.



모든 법은 합(合)함이 있는 것도 있고 
합함이 없는 것도 나타내지만 
진여(眞如)는 합함이 없기 때문에 
결국에는 아무것도 있지 않다네.



모든 법은 합함이 없으니 
짓는 것도 없고 멸함도 없다네.


이렇게 말하는 것 또한 얻을 수 없으니 
모든 법 하나하나가 없는 것이라네.



모든 법은 얻을 수가 없는 것이니 
앞의 경계에도 그것은 없고 
본제(本際)가 이미 없기에 
그 이름을 실제(實際)라고 한다네.



모든 법에 기쁨[歡喜]이 있다 해도 
기쁨 또한 얻을 수가 없다네.


모든 법은 있지 않다는 
그것 또한 말로는 할 수 없는 것.



모든 법에 기쁨이 없다 해도 
이런 말들도 없는 것이라네.


진여(眞如) 속에는 아무것도 없으니 
이것이 바로 깊고 깊은 모양이네.



모든 법은 의심이 없으니 
진여 속에 나[我]란 없어라.


진여는 있지 않으니 
그곳에 의심은 없다네.



열반에는 찬탄이 없으니 
그런 것은 얻을 수가 없어라.


모든 법은 있지 않아 
그래서 열반이라 한다네.



모든 법에 명(明)이란 없으니 
진여 가운데 보여 줌이라.


이것은 가짜로 지어낸 이름이니 
이런 까닭에 생각[思]이라 한다네.



모든 법에 생각이란 없으니 
이런 법은 정한 곳이 없구나.


이 때문에 중생이란 없으니 
이것이 바로 모든 법의 체(體)라네.



모든 법은 허깨비와 같으니 
허깨비 또한 얻을 수 없네.


모든 법이 얻을 수가 없기에 
유위(有爲)의 제행(諸行)이라 말한다네.



모든 법에 행위가 없으니 
이것이 곧 진여의 체라네.


모든 법이 있는 곳이 없기에 
끝이 없다고 한다네.


설사 경계(境界)가 있다고 말한다 해도 
경계란 본래 없는 것이라네.


그래도 사람들은 경계를 말하기에 
경계라고 부른다네.



모든 경계는 허망한 것이기에 
경계가 없다고 말한다네.


경계가 없다고 하는 
이것이 경계의 참 모양[眞相]이라네.



모든 법의 체는 
셀 수 있는 것이 아니라네.


그런 것들이 이미 없으니 
그것이 적정(寂定)임을 그대들은 알라.



얻을 수 없는 것을 있다고 말하니 
있는 것으로 나타내 보인다네.


얻으려 해도 얻을 수 없는 곳을 
보여 주며 있다고 하는구나.



거기에는 본래 지계(持戒)도 없고 
파계(破戒) 또한 없다네.


행도 없고 계율도 없으니 
이러한 것이 모든 법의 모양이라네.



모든 법은 본래 없기에 
무명(無明)이라고 하니 
모든 법은 없다는 사실이 
바로 명(明)임을 알아야 하리.


모든 법이 이름을 가졌지만 
실로 이름이란 없는 것이라네.


법에 이미 이름이 없는 것 
이것이 열반임을 알아야 하리.



수(受)라는 이름을 말한다면 
받아들이기에 보여 주는 것, 
여기에는 본래 수란 없으니 
그래서 수를 보여 준다 말한다네.



없는 것을 있다고 하기에 
보여 주며 있다고 말하지만 
모든 법이 유(有)를 여의었으니 
언제나 없다고 말한다네.



허공에 보이는 신기루를 보고도 
어리석은 사람은 있다고 말한다네.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제대로 아는 
이런 지혜에는 미혹함이 없어라.



법과 법이 생기는 곳은 알 수 없는 것, 
이 둘은 얻을 수가 없다네.


어리석은 사람은 말하기를 
이것이 생겨나는 곳이라고 한다네.



모든 법이 생기는 것이라면 
반드시 죽는 것도 말해야 하리.


생기는 곳이든 죽는 곳이든 
이 둘은 얻을 수가 없다네.


모든 법이란 공허한 것이기에 
모든 법은 얻을 수가 없어라.


선사 동자여, 내가 말한 것이 
바로 이런 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보리는 만들어지지 않는 것이라서 본래 지을 수가 없으니 
이곳에는 만드는 사람 또한 없어라.


만일 보리를 얻는다면 
반드시 삼계를 보리라.



만약에 보리를 분별한다면 
그는 보리를 행함이 아니어라.


수행과 보리에는 
분별이 없다네.



모든 것이 진실이 있지만 
진실이란 본래 있지 않다네.


진실은 본래 얻을 수가 없으니 
이것이 바로 열반의 모습이네.



필경(畢竟)이란 나는 것[出]이 아니기에 
어디에도 얻을 곳이 없어라.


어떤 사물도 있는 것이 아니기에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도 사라지지 않는다네.



만일에 이런 이치를 안다면 
모든 법에 진실이라고 할 것도 없어라.


그들 속에는 생겨나는 것도 없으니 
서로 다투고 싸울 일도 없어라.



이러한 깊고 깊은 법을 설하되 
만일 어떤 두려움도 없다면 
이런 사람이야말로 보살이라는 것을 
그대는 알아야 하리.

세존께서 이와 같이 말씀을 마치시자, 선사 동자가 다시 게송으로 거듭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께서는 저희를 이롭게 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와 같은 법의 모양을 설하실 때에 
저는 아무런 의혹도 갖지 않습니다.



지금 모든 것이 구족되니 
부처님께서 부사의(不思議)를 내셨습니다.


온갖 그물에 묶여 있던 저는 
지금 그 그물로부터 벗어났습니다.



저는 이미 생사를 끊어버리고 
이미 도량 안에 머물러 있습니다.


여래께서 모든 모양[諸相]을 설하실 때에 
저는 모든 의심[疑結]을 끊어 없앴습니다.



저를 위해 말씀하실 때에 
모든 사견(邪見)이 없어졌습니다.


세간을 이롭게 함이 두렵지 않으니 
제 마음의 때[垢]가 말끔히 씻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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