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법요해(禪法要解) 02. 하권

선법요해(禪法要解) 02. 하권

만약 수행자가 허공정(虛空定)을 구하려고 한다면 마땅히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색(色)은 갖가지 온갖 괴로움의 도구[苦具]이니, 마치 채찍과 몽둥이나 가르고 잘라서 살해하는 것이나 배고픔․추위․늙음․병듦의 괴로움 등이 모두 색으로 말미암기 때문인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사유하면 색을 버리고 떠나 허공처(虛空處)를 얻을 수 있다.

[문] 수행자는 지금 색을 몸으로 삼고 있는데, 어떻게 곧바로 버리고 떠날 수 있는가?

[답] 모든 번뇌는 색을 인연으로 하고 또한 색과 연관되어 있으니, 이 번뇌들을 멸하였기 때문에 색을 떠난다고 하는 것이다. 또한 닦아 익혀서 색을 파괴하고 법을 허공처럼 관하면 색을 떠날 수 있다.

또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비구는 제4선의 5음(陰)을 마치 병과 같고 종기와 같고 부스럼과 같고 가시와 같다고 여겨야 하며, 무상(無常)․고(苦)․공(空)․무아(無我)라고 관찰해야 한다”라고 하셨으니, 이와 같은 것 등을 관하면 제4선의 5음을 떠날 수 있다. 그 밖의 나머지 음(陰)들도 색을 따르기 때문에 다만 색을 떠난다고 말하는 것이니, 왜 그런가 하면, 색이 결국에는 다하여 없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수행자가 색을 관하여 조각조각 부수고 찢으면 색이 존재하지 않으니, 마치 몸을 나누면 머리․발․어깨․팔 등 각각 다른 부분으로 나누어져곧 몸이 없는 것과 같다. 또 예를 들면 머리[頭]는 눈․귀․코․혀․입․수염․머리털․뼈․살 등 여러 다른 부분으로 나누어져 곧 머리가 없는 것과 같으며, 눈[眼]은 4대(大)와 4진(塵)․신근(身根)․안근(眼根) 등 열 가지 것[十事]이 백색과 흑색 등의 살덩어리로 합쳐져 이것을 눈이라고 하지만 각각 나누어 구별하면 곧 눈이 없는 것과 같다.

땅[地] 등의 여러 부분도 각각 또한 이와 마찬가지이다.

[문] 안근은 4대로 만들어진 것이어서 색이라고 할 수 없는데, 어떻게 분별할 수 있는가?

[답] 4대 및 4대로 만들어진 정색(淨色)이 화합되어 이루어졌기 때문에 눈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니, 만약 이 색이 제거되면 눈은 없는 것이다.

또 이 정색은 비록 볼 수는 없으나 유대(有對)이기 때문에 나누어질 수 있고, 나누어질 수 있기 때문에 눈이 없는 것이다.

또한 능히 색을 볼 수 있는 것을 눈[眼]이라고 하니, 만약 4대와 4대로 만들어진 색을 제거하면 눈은 없다. 만약 눈이 없는데 색을 볼 수 있다면 귀[耳]도 또한 마땅히 눈이 될 것이다.

만약 눈이 색법(色法)이라면 일체의 색법에는 처소가 있고 부분[分]이 있기 때문에 마땅히 분별할 수 있으니, 만약 분별할 수 있다면 눈[眼]이 많게 될 것이다.

만약 4대로 지어진 뭇 미진(微塵)이 눈이라면 하나의 눈이 될 수 없으며, 만약 모두가 다 눈이 아니라면 역시 하나의 눈도 없다.

만약 미진이 눈이라면 이 또한 옳지 않으니, 왜냐하면 만약 미진에 색이 존재하면 곧 시방(十方)이 있게 되므로 미진이라 이름할 수 없으며, 만약 색이 아니라면 눈이라 이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미진의 체(體)에는 결정적으로 네 가지 분(分), 즉 색(色)․향(香)․미(味)․촉(觸)이 존재한다. 그런데 눈은 결코 이 네 가지 것[四事]이 아니다. 왜냐하면 눈은 내입(內入)에 속하고, 그 네 가지는 외입(外入)에 속하기 때문이다.

이렇기 때문에 모든 미진이 눈이 될 수 없으니, 부처님께서 설하시기를, “여러 가지 것들[衆事]이 화합하여 색을 보는 것을 가명(假名)으로 눈이라 하는 것이니, 정해진 실체는 없다”라고 하신 것과 같다.

귀․코․혀․피부․살․뼈 등도 또한 이와 같이 논파(論破)될 수 있으니, 이것은 내신상(內身相)을 깨뜨린 것이다.

외색(外色)인 궁전․재물․처자 등도 또한 모두 이와 같이 분별하여 논파할 수 있다.

부처님께서 나타(羅陀)에게 말씀하시기를 “오늘부터 마땅히 색을 깨뜨려 흩어지게 하고 색을 무너뜨려 찢어서 색이 존재하지 않게 하라”고 하셨으니, 이와 같이 분별하는 것을 색을 떠난다고 한다.

또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에 따르면, “만약 비구가 색을 떠나려고 한다면 일체의 색상(色相)을 넘어서고[度] 일체의 대상(對相)을 멸하고 일체의 다른 상[異相]을 생각하지 않아서 한량없는 허공처(虛空處)에 들어가야 한다”고 하셨으니, 일체의 색상을 넘어선다고 하는 경우에 색상이란 눈으로 볼 수 있는 색을 말하며, 일체의 대상을 멸한다고 하는 경우에 대상이란 유대(有對)이면서 눈으로 볼 수 없는 색(色)을 말하며, 일체의 다른 상(相)을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는 경우에 다른 상이란 눈으로 볼 수도 없고 무대(無對)인 색을 말한다.

또한 일체의 색상을 넘어선다고 하는 경우에 색상이란 청색․황색․적색․백색․홍색․자색 등 여러 가지 색상을 말하며, 유대(有對)를 멸한다고 하는 경우에 유대란 성(聲)․향(香)․미(味)․촉(觸) 등을 말하며, 일체의 다른 상을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는 경우에 다른 상이란 크고 작고 길고 짧고네모나고 둥글고 멀고 가까운 것 등을 말한다.

이와 같이 일체 색상을 떠나면 허공처에 들어갈 수 있다.

또한 수행자는 몸의 내부가 허공과 같다는 마음을 두어야 하니, 이른바 입․코․목구멍․눈․귀․가슴․배 등이 허공과 같다는 것이다.

색은 온갖 번뇌가 되고, 공(空)은 걱정거리가 없다는 것을 이미 아는 까닭에 마음이 즐거워 허공과 같게 된다.

만약 마음이 색에 속하는 상태에서 공(空)이 되게 하면, 마음이 점차 유연해지고 몸 가운데서 허공이 점점 광대해져 스스로 색신(色身)을 연뿌리의 구멍처럼 보며, 그것을 익혀 계속해서 이로움을 얻으면 몸이 다하여 공해져서 다시는 색이 존재하지 않음을 본다. 외색(外色)도 또한 그러하여, 내색(內色)과 외색(外色)이 허공과 같아 똑같이 하나의 공이 된다.

이때 마음은 허공을 반연하여 한량없고 가없어 문득 색에 대한 생각[想]을 떠나 편안하고 즐거워지니, 마치 병 속에 들어 있는 새가 병이 깨지면 그 속에서 나와 허공으로 날아올라도 저촉되거나 장애됨이 없는 것과 같다. 이를 초무색정(初無色定)이라 이름한다.

수행자가 허공 가운데서 수(受)․상(想)․행(行)․식(識)을 마치 병과 같고 종기와 같고 부스럼과 같고 가시와 같다고 여기고, 무상(無常)․고(苦)․공(空)․무아(無我)임을 알아, 다시 오묘한 정(定)을 구하면 곧 공(空)의 연(緣)을 떠나니, 왜 그런가 하면 이 마음이 생각하는 허공이 속임이고 허망함이기 때문이다.

먼저 없다가 지금 있고 있다가는 다시 없어지니, 그 병통은 바로 이 허공이 식(識)을 좇아서 있는 것임을 알았다면, 이른바 식이 진실하다 할 것이니, 단지 식만 관하고 공연(空緣)은 버린다.

식을 관하는 것을 익힐 때는 점차 식상(識相)이 서로 이어져 생긴다는 것을 알 수 있으니, 이는 마치 흐르는 물이나 등불의 불꽃과 같다.

미래․현재․과거의 식은 그 식이 서로 이어져서 가없고 한량없다.

[문] 무엇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식처(識處)가 가없고 한량없다고 말씀하셨는가?

[답] 식은 능히 멀리 있는 것도 반연할 수 있기 때문에 가없고, 가없는 법을반연하기 때문에 가없다.

또한 먼저 허공이 가없음을 반연하니, 만약 가없는 허공을 깨뜨린다면 식도 마땅히 가없을 것이다.

수행자의 마음이 유연하기 때문에 능히 식을 크게 하여 마침내 가없음에 이르게 하니, 이를 가없는 식처(識處)라 이름한다.

[문] 이 식처는 4음(陰)을 갖추고 있는데, 왜 단지 식처만을 말하는가?

[답] 일체의 내법(內法)은 식이 그 주인이며, 모든 심수법(心數法)은 모두 식을 따라 속하니, 만약 식을 말한다면 곧 나머지 것들도 말하는 것이 된다.

또한 욕계 가운데서는 색음(色陰)이 주인이고, 색계 가운데서는 수음(受陰)이 주인이며, 허공처(虛空處)와 식처(識處)에서는 식음(識陰)이 주인이고, 무소유처(無所有處)에서는 상음(想陰)이 주인이며,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에서는 행음(行陰)이 주인이다.

또한 세 가지 법, 즉 신법(身法)․심법(心法)․심수법(心數法)은 욕계나 색계에서는 몸[身]이 주인이니, 마음이 몸을 따르기 때문이다. 만약 몸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면 마음의 힘[心力]만 홀로 작용한다.

마음[心法]에는 두 부분이 있는데, 첫째는 공(空)을 반연함이고, 둘째는 스스로를 반연함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2처(處)가 있으니, 공처(空處)와 식처(識處)이다. 다만 처음에 색을 깨뜨렸기 때문에 허공이란 이름을 얻은 것이며, 허공을 깨뜨렸기 때문에 오직 식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심수법에도 또한 두 부분이 있으니, 첫째는 상(想)이고, 둘째는 행(行)이다. 그러므로 또한 마땅히 2처가 있으니, 상무소유처(想無所有處)와 행비상비비상처(行非想非非想處)이다. 또한 식을 반연하기 때문에 허공처를 떠날 수 있으니, 이렇기 때문에 비록 다른 음(陰)이 있다고 하더라도 단지 식이라고만 이름하는 것이다.

수행자는 식처를 얻은 다음에는 다시 오묘한 정(定)을 구해 식이 병통이 됨을 관해야 하니, 이는 위에서 말한 것과 같다.

또한 식은 허깨비이고, 허망된 속임수이며, 온갖 인연에 속하므로 자재하지 못하다고 관하니, 인연이 있으면 생기고 인연이 없으면 멸하며, 식은 정(情)에도 머물지 않고 연(緣)에도 머물지 않으며 또한 중간에도 머물지 않는다. 그리고 머무는 처소가 있는 것도 아니고 머무는 처소가 없는 것도 아니다.

식상(識相)은 이와 같다.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 “식은 허깨비[幻]와 같다”고 하셨으니, 수행자가 이와 같이 사유하고 나면 식처를 떠날 수 있다.

또한 수행자는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5욕이 허망한 속임수이듯이 색도 또한 이와 같으며, 색이 허망한 속임수이듯이 허공 역시 그러하다. 허공이 허망한 속임수이듯이 식상도 역시 그러하다. 이 모든 것들이 허망한 속임수인데, 중생들이 미혹되어 집착해서 법들[諸法]이라 한다. 공하여 무소유(無所有)한 것이 마음이 편안한 처소[處]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서 곧 무소유처(無所有處)에 들어간다.

[문] 허공처와 무소유처는 어떤 차별이 있는가?

[답] 전자는 마음속 생각[心想]이 허공을 인연으로 삼는 것이고, 후자는 마음속 생각이 무소유를 인연으로 삼는 것이니, 이것이 차별이 된다.

수행자가 무소유처에 들어가면 예리한 근기[利根]를 지닌 사람은 이 가운데 수․상․행․식이 있는 것을 깨달아 그것을 싫어하게 되는데,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 그러나 둔한 근기[鈍根]를 가진 사람은 깨닫지 못한다.

또한 무소유처를 떠나는 인연에는 세 가지 견해가 있으니, 유견(有見)․무견(無見)․비유견비무견(非有見非無見)이다.

유견은 욕계로부터 식처에까지 이르며, 무견은 곧 무소유처이며, 비유견비무견은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이다.

무견은 마땅히 버리고 떠나야 하니, 왜냐하면 비상비비상처가 비록 미세하더라도 오히려 마땅히 버리고 떠나야만 하는데, 어찌 하물며 무소유처이겠는가?
이렇게 생각하고 나서 무소유처를 떠나야 한다.

[문] 예컨대 불법(佛法) 가운데 또한 공(空)과 무소유(無所有)라는 것이 있으니, 만약 이것이 실재한다면 어찌하여 사견(邪見)이므로 마땅히 버리고 여의어야 한다고 말하는가?

[답] 불법 가운데서는 집착을 파하기 위하여 실재가 아니라고 한 것이니, 무소유처가 실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견해로 애착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서 중생은 정해진 과보를 받은 다음에 업의 인연을 따라 다시 온갖 과보를 받게 되니, 이런 이유 때문에 마땅히 버려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명칭은 비록 비슷하지만 그 실제는 각기 다르다.

또한 수행자는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일체의 상지(想地)는 모두 거칠어서 근심스러우며, 병과 같고 종기와 같고 부스럼과 같고 화살과 같다. 무상지(無常地)는 곧 어리석은 곳[癡處]이다. 지금 적멸(寂滅)의 미묘한 제일처(第一處)는 이른바 비상비무상처(非想非無想處)이다.’

이와 같이 관하고 나면 무소유처의 상지를 떠나 곧 비유상비무상처(非有想非無想處)에 들어가게 된다.

[문] 이 가운데서는 유상(有想)인가, 무상(無想)인가?

[답] 이 가운데서는 유상이다.

[문] 만약 유상이라면, 어째서 단지 아래의 7지(地)를 상정(想定)이라고 이름하는가?

[답] 이 지(地) 가운데 상(想)은 미세하지만 날카롭지 못하여 상의 작용이 명료하지 않기 때문에 상이라고 이름하지 않는다.

수행자는 마음속으로 이 처(處)를 비유상비무상이라고 하니,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그 본래의 명칭을 따라 이를 비유상비무상처라고 이름하신 것이다.

둔한 근기를 가진 사람은 이 가운데 4음(陰)이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열반의 안온한 처소라고 하면서 증상만(增上慢)을 내니, 그 수명이 8만 겁이 지난 뒤에는 다시 여러 갈래[諸趣]에 떨어진다.

이 가운데 4음이 비록 미세하며 깊고 오묘하더라도 예리한 근기를 가진 사람은 능히 깨달아 알 수 있으니, 깨달아 안 다음에는 환난을 싫어하여 이렇게 생각한다.

‘이것 또한 화합하여 된 법이고 인연에 의해 생긴 법이어서 허망한 속임수이고 실재하지 않으니, 병과 같고 종기와 같고 부스럼과 같고 화살과 같으며, 무상(無常)․고(苦)․공(空)․무아(無我)이다. 또한 이것은 나중에 인연을 생하므로 마땅히 버리고 떠나야 한다. 그것은 환난이기 때문에 마땅히 4제(諦)를 배워야 한다.’

[문] 그 밖의 다른 지(地)를 버릴 때는 왜 4제를 배워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가?

[답] 앞에서 병과 같고 종기와 같고 부스럼과 같고 화살과 같으며 무상․고․공․무아라고 말한 것은 4제를 간략히 설한 것이요, 다만 아직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또한 그 밖의 다른 지(地)에서는 막음[遮]도 없고 어려움[難]도 없으니, 범부의 유루도(有漏道)도 능히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세간의 정상(頂上)은 오직 성인만이 무루도(無漏道)를 배워서 마침내 넘어설 수 있다.

비유컨대 노끈으로 새의 다리를 묶어 놓으면 처음에는 비록 날아가려고 하지만 노끈이 다하는 곳에서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는 것처럼, 범부인(凡夫人)도 역시 이와 같아서 비록 그 밖의 다른 지를 넘어서더라도 마왕(魔王)이 놀라지 않지만, 만약 유정지(有頂地)를 넘어서면 마왕이 크게 놀라니, 마치 노끈이 끊어져 새가 날아가 버리는 것과 같다. 이렇기 때문에 그 밖의 다른 지를 떠날 때는 4제를 설하지 않은 것이다.

유정지는 삼계의 중요한 문이니, 이 중요한 문을 벗어나려면 마땅히 4제를 배워야 한다.

[문] 4제란 무엇인가?

[답] 고제(苦諦)․집제(集諦)․멸제(滅諦)․도제(道諦)이다.

고(苦)에는 두 가지 있으니, 첫째는 몸의 괴로움[身苦]이고, 둘째는 마음의 괴로움[心苦]이다.

집(集)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번뇌의 부림[使]이고, 둘째는 번뇌에 얽매임[惱纒]이다.

멸(滅)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유여열반(有餘涅槃)이고, 둘째는 무여열반(無餘涅槃)이다.

도(道)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정(定)이고, 둘째는 혜(慧)이다.

또한 고제에는 두 가지 있으니, 첫째는 고제이고, 둘째는 고성제(苦聖諦)이다. 고제란 번뇌의 모습[惱相]이기 때문에 이른바 5수음(受陰)을 고제라고 이름한다. 고성제란 지견(知見)이 있기 때문에 도를 닦는 것이니, 이를 고성제라고 한다.

집제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집제이고, 둘째는 집성제(集聖諦)이다. 집제란 생겨나는 모습[出生相]이니, 이른바 애(愛) 등의 온갖 번뇌를 집제라 이름한다. 집성제란 그 온갖 번뇌를 끊기 위하여 도를 닦는 것이니, 이를 집성제라 한다.

멸제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멸제이고, 둘째는 멸성제(滅聖諦)이다. 멸제란 적멸의 모습[寂滅相]이니, 이른바 4사문과(沙門果)를 멸제라 한다. 멸성제란 증득하기 위하여 도를 행하는 것이니, 이를 멸성제라 한다.

도제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도제이고, 둘째는 도성제(道聖諦)이다. 도제란 벗어나 이르는 모습[出到相]이니, 이른바 8정도(正道)를 도제라 한다. 도성제란 닦기 때문에 도를 행하는 것이니, 이를 도성제라고 한다.

또한 진리[諦]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총상(總相)과 별상(別相)이다.

총상의 고(苦)는 5수음(受陰)이고, 별상의 고(苦)는 색음(色陰) 및 수․상․행․식의 음을 구체적으로 분별하는 것이다.

총상의 집(集)이란 나중에 받을 몸을 능히 생겨나게 하는 것이고, 별상의 집이란 애(愛) 등의 온갖 번뇌와 유루업(有漏業) 및 5수음의 인연을 구체적으로 분별하는 것이다.

총상의 멸(滅)이란 나중에 받을 몸의 애(愛)가 다하는 것이고, 별상의 멸이란 89가지 번뇌가 다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분별하는 것이다.

총상의 도(道)란 8성도(聖道)를 말하며, 별상의 도란 고법인(苦法忍)에서부터 무학도(無學道)에 이르기까지를 구체적으로 분별하는 것이다.

만약 4제를 통달하지 못하면 5도(道)를 윤회하게 되니, 생사를 왕래하여 끊임이 없을 때 이 인연 때문에 수행자는 늙음․병듦․죽음 등의 모든 고뇌가 모두 몸이 있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비유컨대 모든 초목이 다 땅에서 나오는 것과 같다.

경에서 설하기를, “시방의 중생은 몸이 있는 까닭에 모두 괴로움을 받으며 또한 몸을 받아 태어난다”라고 하였으니, 비유컨대 독을 먹으면 잘생겼든 못생겼든 모두 사람을 죽이는 것과 같다.

만약 몸과 마음이 없다면 죽음과 괴로움이 의지할 바가 없으리니, 마치 사나운 바람이 큰 나무를 꺾어 부러뜨릴 수 있지만, 만약 나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부러뜨릴 수 없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몸과 마음이 괴로움을 받는 근본임을 간략하게 말하였다.

마치 허공이 바람의 근본[本]이고, 나무가 불의 근본이며, 땅이 물의 근본이듯이, 몸은 괴로움의 근본이다.

또한 땅[地]은 항상 견고하고[堅相], 물[水]은 항상 축축하며[濕相], 불[火]은 항상 뜨겁고[熱相], 바람[風]은 항상 움직이듯이[動相], 몸과 마음은 항상 괴로움[苦相]을 가지고 있으니, 그 까닭은 무엇인가?
몸이 존재하기 때문이니, 늙음․병듦․죽음․배고픔․목마름․추위․더위․바람․비 등의 괴로움이 항상 몸을 따르며, 또한 마음이 존재하기 때문에 걱정․두려움․성냄․질투 등의 괴로움이 항상 마음을 따른다.

만약 현재의 몸이 괴로움이라는 것을 안다면, 과거의 괴로움도 또한 그러하고, 현재와 과거의 몸이 괴로움이라면 미래 또한 그럴 것이니, 비유컨대 지금 현재의 곡식의 종자가 곡식을 생산하는 것을 보면, 과거나 미래에도 또한 모두 이와 같다는 것을 비교하여 알 수 있으며, 또한 현재 불이 뜨겁다면 과거나 미래의 불도 또한 뜨거움이 이와 같다는 것을 비교하여 알 수 있는 것과 같다.

만약 몸과 마음이 없다면, 이전에도 괴로움이 없었고 지금도 괴로움이 없으며 나중에도 괴로움이 없을 것이니, 삼세의 고통은 모두 몸과 마음으로부터 비롯되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그러므로 마땅히 고제(苦諦)를 관해서 이와 같이 마음으로 싫어하는 생각을 내야 한다.

이 괴로움의 인연은 오직 애(愛) 등의 모든 번뇌로부터 생기는 것이지 하늘[天]로부터 생기는 것도 아니고, 시간[時]으로부터 생기는 것도 아니며, 자연(自然)히 생기는 것도 아니고, 인연이 없이 생기는 것도 아니니, 만약 번뇌를 떠나면 괴로움은 생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마땅히 세간은 모두 애욕 등의 번뇌로부터 생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람들이 어떤 일을 짓는 것은 모두 욕심이 먼저 앞서기 때문이니, 온갖 번뇌가 괴로움의 인연이다.

또한 애욕의 물[愛水]로 말미암아 몸을 받으니, 만약 애욕의 물이 없으면 몸을 받지 않는다. 비유하면 마른 흙은 벽에 붙지 않지만 물이 그것과 잘 섞여 화합되면 벽에 붙는 것과 같다.

또한 온갖 번뇌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몸을 받는 것도 갖가지로 똑같지 않으니, 가령 탐욕이 많은 자는 탐욕이 많은 형태의 몸을 받고, 성냄이 많은 자는 성냄이 많은 형태의 몸을 받으며, 어리석음이 많은 자는 어리석음이 많은 형태의 몸을 받고, 번뇌가 엷은 자는 번뇌가 엷은 형태의 몸을 받는다.

지금의 과보가 다름을 보기 때문에 옛날의 인연이 각기 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내세에도 번뇌를 따라 몸을 받음이 이와 같이 각기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업을 따라 몸을 받으니, 만약 성내지 않았으면 독사의 모습을 받지 않으며, 일체의 나머지 모습들도 또한 이와 같다. 이러하기 때문에 애(愛) 등의 온갖 번뇌가 일체 괴로움의 인연이라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괴로움의 인연이 다하면 괴로움이 없어져 열반을 얻는다.

열반이란 욕심을 떠난 것을 말하니, 온갖 번뇌가 끊어져 항상하여 변하거나 달라지지 않는다. 이 가운데서는 태어남도 없고 늙음도 없고 병듦도 없고 죽음도 없으며,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괴로움도 없고, 원수와 만나는 괴로움도 없어, 항상 즐거워 물러나지 않는다.

수행자가 열반을 얻어 멸도(滅度)할 때에는 도무지 가는 곳이 없으니, 이를 적멸(寂滅)이라고 한다. 비유컨대 불을 밝힌 등불에 기름이 다하면 불이 사라져 그 불빛이 아무 곳에도 이르지 못하는 것과 같다. 이를 멸제(滅諦)라고 한다.

열반을 얻는 방편도(方便道)의 정분(定分)에 세 가지가 있고, 혜분(慧分)에 두 가지가 있으며, 계분(戒分)에 세 가지가 있으니, 이 계 가운데 머물러 정과 혜를 닦는다.

이른바 4제 가운데서 혜가 능히 결정적으로 헤아려 아는 것을 정견(正見)이라 하며, 정견을 따라 법을 깨달음이 일어나는데 이를 정사유(正思惟)라 하니, 이들을 혜분의 두 가지라고 한다.

정정(正定)․정념(正念)․정정진(正精進)을 정분의 세 가지라고 한다.

정어(正語)․정업(正業)․정명(正命)을 계분의 세 가지라고 한다.

청정한 계에 머물기 때문에 온갖 번뇌의 싹이 자라나지 못하고 그 세력이 쇠약해지니, 마치 때가 아닌 때에 종자를 심으면 싹이 자라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온갖 번뇌의 세력이 다가오더라도 정분(定分)으로 막아낼 수 있으니, 이는 마치 큰 산이 물을 막으면 물이 그것을 파괴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비유컨대 주술로써 독사를 제어하면 비록 독을 가지고 있더라도 사람을 해칠 수 없는 것처럼 정분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혜(慧)는 온갖 번뇌의 근본을 뽑아낼 수 있으니, 이는 마치 여름에 물이 갑자기 범람하면 물가 언덕 위에 있는 모든 나무를 휩쓸어 뽑아 버리지 않음이 없는 것과 같다.

이 3분(分) 8정도(正道)를 행하면 진정 바른 길[正路]로 곧장 나아갈 수 있어서 능히 괴로움의 바탕[因]을 멸하고, 마침내 편안하고 항상 즐거운 무위(無爲)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

만약 방편으로 처음에 그 수행문[門]을 익히려면 열 가지 일[十事]이 있다.

첫 번째는 마음이 전일하여 바른 것이니, 갖가지 외부의 일[外事]이 다가와 파괴하려 해도 마음을 바뀌게 할 수 없다. 이는 마치 네 방향에서 바람이 일어나도 산이 기울거나 움직이지 않는 것과 같다.

두 번째는 질박하고 올곧은 것이니, 스승이 설하는 법을 들으면 그 장단(長短)을 보지 않아서 마음이 늘어나거나 줄어듦이 없으며 가르침을 따라 의심하지 않는다. 비유컨대 빽빽한 삼림에 들어가서 곧은 나무를 베면 나오기 쉬우나 굽은 나무를 베면 나오기 어려운 것과 같으니, 이와 같이 삼계라는 빽빽한 삼림은 곧은 자는 벗어나기가 쉬우나 굽은 자는 벗어나기가 어렵다. 불법(佛法) 가운데서는 곧은 것만 사용하고 굽은 것은 버린다.

세 번째는 부끄러워함[慙媿]이니, 이것은 제일가는 최상의 의복이며 가장 오묘한 장엄이다. 부끄러워함은 온갖 악한 마음을 감아 제어하니, 부끄러움이 있으면 진실로 사람이라 할 수 있으나 만약 부끄러움이 없다면 축생과 다를 바가 없다.

네 번째는 방일하지 않음[不放逸]이니, 모든 선법(善法)의 근본이다. 이는 마치 세간에서 방일하면 온갖 이로운 일을 잃으며, 수행자가 방일하면 열반의 이로움을 잃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마땅히 방일함을 원수나 도적처럼 여겨야 하며, 마음이 항상 그것을 멀리 떠나야 한다. 반면에 방일하지 않음[不放逸]은 마치 군왕이나 부모, 스승처럼 여겨서 마땅히 준수하고 계승하여 버리지 말아야 한다.

다섯 번째는 멀리 떠남[遠離]이니, 이 멀리 떠남을 바탕으로 방일하지 않음을 성취할 수 있다. 만약 5욕을 가까이하면 온갖 정(情)이 개발되니, 먼저 몸이 취락(聚落)으로부터 떠나야 하고, 다음으로는 마음이 세간의 일을 멀리 떠나 그것을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여섯 번째는 욕심을 적게 내는 것[小欲]이다. 생활에 필요한 물품을 마음으로 많이 구하지 않아야 하니, 많이 구하기 때문에 많은 고뇌에 떨어진다.

일곱 번째는 만족할 줄 아는 것[知足]이니, 어떤 사람이 비록 욕심을 적게 내더라도 좋은 물건에 애착하면 도심(道心)을 그르치게 된다. 그러므로 지혜 있는 자는 만족하게 여길 뿐이다.

여덟 번째는 마음이 얽매여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제자든 단월(檀越)이든 선지식[知識]이든 친척이든 그들에게 안부를 묻거나 환영하거나 환송하는 등 많은 일을 치르게 되면, 이와 같은 등의 일이 도를 훼손하고 그르치기 때문에 그런 일에 매여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아홉 번째는 세간의 즐거움을 좋아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노래하고 춤추며 음악을 연주하는 등을 즐기기 위해 좋은 때나 좋은 날을 가려 길흉을 선택하는 따위의 일체 세간의 일에 대해 모두 기뻐하거나 즐거워하지 않아야 한다.

열 번째는 인욕(忍辱)이다. 수행자가 도를 구할 때에는 마땅히 열 가지 일을 참아야 한다. 첫째는 모기와 등에가 물거나 쏘는 것이고, 둘째는 뱀이나 도룡뇽 따위의 독을 가진 것들이 무는 것이다. 셋째는 악독한 짐승이고, 넷째는 욕하고 비방하는 것이다. 다섯째는 때리고 던져 해를 가하는 것이고, 여섯째는 질병의 고통이다. 일곱째는 배고픔이고, 여덟째는 갈증이다. 아홉째는 추위이고, 열째는 더위이다. 이와 같이 괴로운 일들을 수행자는 참아서 이런 일들이 자신을 이기지 못하도록 하고, 항상 이런 일들을 이겨내야 한다.

또한 사람들이 병의 모습을 알면 병의 인연을 알 수 있고, 병을 치료하는 약을 알 수 있으며, 간병인을 구해 병자의 뜻에 따라 필요한 것을 제공해 주면 머지않아 차도가 있는 것과 같이, 수행자도 이와 같아서 진실로 괴로움의 모습[苦相]을 알면 괴로움의 인연을 알 수 있고, 괴로움이 다하는 도(道)를 알 수 있으며, 훌륭한 스승과 동학(同學)을 얻음을 알 수 있으니, 이와 같으면 머지않아 안온한 적멸을 얻을 것이다.

[문]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를 얻어 깊은 선정에 들어가면 오직 상지(上地)만이 존재하여 번뇌[結使]가 미세하고 엷어 마음이 이미 부드러워져 갖가지 인연과 갖가지 비유가 상응하지 못하니, 4제(諦)를 관함이 마치 믿지 못하는 것과 같다.

[답] 비단 유정(有頂)의 지위에 있는 이를 위해 설할 뿐만 아니라, 모든 유정의 지위에 있는 이들을 위하여 설한 것이다. 다만 무색계의 4음(陰)을 무상(無常)․고(苦)․공(空)․무아(無我)라고 관하여 그것들을 병․부스럼․화살과 같다고 여긴 것이니, 마음속에 들어가면 무상․고․공 ·무아는 모두 인연으로 허망하게 속여 지은 법이다.

열반을 훌륭하고 오묘하며 편안하고 즐거운 것이며 인연으로 지은 법이 아니므로 진실하여 허망되지 않다고 관하여 3독(毒)과 3쇠(衰)를 멸하고, 몸과 마음의 괴로움을 멸하며, 항상 4음 및 그 인연을 꾸짖는 것을 고제(苦諦)와 집제(集諦)라고 한다. 또한 열반과 열반도를 찬탄하는 것을 진제(眞諦)와 도제(道諦)라고 한다.

수행자가 4선(禪)과 4무색정(無色定)을 얻으면 마음이 유연해진다.

만약 5신통을 구하려 한다면, 제4선에 의지하면 쉽게 얻을 수 있다. 만약 초선과 2선과 3선에 의지하면 비록 얻을 수는 있으나 구하기가 매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얻는다 해도 견고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초선에서는 각관(覺觀)이 선정을 어지럽히기 때문이고, 2선에서는 기쁨[喜]이 많기 때문이며, 3선에서는 즐거움[樂]이 많기 때문에 선정과 서로 위배된다.

4여의분(如意分)은 모두가 선정의 모습[定相]이니, 오직 제4선에서 괴로움도 없고 즐거움도 없으며 근심도 없고 기쁨도 없으며 숨을 내쉬거나 들이쉼도 없어서 모든 성현이 흔쾌하게 즐거움과 편안함에 머무는 바이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마땅히 제4선에 의지하여 4여의분을 닦아야 한다.

4여의분이란 이른바 욕정행법성취여의(欲定行法成就如意)․정진정(精進定)․심정(心定)․사유정행법성취여의(思惟定行法成就如意)이니, 이에 의지하여 머무르면 어떤 일도 얻지 못할 것이 없다.

[문] 욕정행법성취여의란 무엇인가?

[답] 욕(欲)이란 구하고자 하는 일이며, 정(定)이란 일심(一心)의 상태로서늘어나거나 줄어듦이 없는 것을 말하며. 행법(行法)이란 믿는 생각[信念], 교묘한 지혜[巧慧], 기쁨과 즐거움[喜樂] 등이 욕정(欲定)이 이루어지도록 돕는 것을 말한다. 욕(欲)을 주인으로 삼아 정(定)을 얻기 때문에 욕정이라 한다.

정진정․심정․사유정도 또한 이와 같다.

수행자는 욕(欲)을 관(觀)하여 증가하거나 감소함이 없도록 해야 하고, 안으로 많이 거두지 않도록 하고, 밖으로 많이 흩어지지 않도록 하여 유연하고 평등하고 조화롭게 이용할 수 있어야 하니, 이는 마치 거문고[琴]를 탈 때 그 완급을 조절하며 곡에 따라 연주하는 것과 같다.

정진(精進)․심(心)․사유(思惟)도 역시 그러하다.

만약 수행자가 나는 것을 배워 날고 싶어하면 이를 욕(欲)이라 하지만, 온갖 흩어진 마음을 거두어 모아 행법을 돕는다면 이것을 정진이라고 한다.

마음은 능히 몸을 들어올리거나 몸을 떠날 수도 있으며, 마음이 거칠고 무거우면 수면이나 도거(掉擧) 등의 번뇌에 매인다. 마음이 경쾌해지면 마음이 가볍기 때문에 그 몸을 들어올릴 수 있는데, 이를 심(心)이라 한다.

욕(欲)․정진(精進)․심(心)에 관해 그 다소를 헤아려 능히 몸을 들어올리되, 아직 안과 밖의 여러 색미(色味)를 파괴하지 않은 것을 사유라 한다.

4여의분에 의지하면 일체의 공덕을 갖출 수 있으니, 어찌 하물며 5신통이겠는가?

[문] 5신통에서는 무엇이 먼저 생기는가?

[답] 그에 따라 즐거움이 일어나는 것이 먼저이다.

[문] 만약 그러하다면 왜 변화신통이 처음에 존재하는가?

[답] 5신통은 대부분 중생들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하면, 마치 혜해탈아라한(慧解脫阿羅漢)이 이미 아라한을 얻고서 다음과 같이 생각하여 말한 것과 같다.

“중생들 가운데 둔한 근기를 가진 많은 이들은 도(道)에 관한 일을 믿지 않고 불법(佛法)을 경시한다. 내가 어려운 일인 누진신통(漏盡神通)을 얻었으니, 어찌 신통력을 일으켜 중생을 교화하지 않아서 죄에 떨어지도록 하겠는가? 또한 부처님께서는 대비로써 중생들을 이익되게 하시니, 나도 불제자 로서 마땅히 신통력으로 중생들을 이익되게 하는 일을 도우리라. 그러나 많은 중생들은 나타난 일로써 이익을 얻으므로 신통변화로 귀하든 천하든 모든 대중들을 감동시켜 조복하지 않음이 없게 하리라.”

그 밖의 신통력에는 이러한 일이 없으므로 변화신통이 처음에 있는 것이다.

[문] 하늘의 몸[天身]은 불의 요소[火大]가 많기 때문에 몸에 광명이 있고 또한 허공에 빨리 오를 수 있다. 귀신은 바람의 요소[風大]가 많기 때문에 몸이 가볍고 빠르며 걸림이 없다. 용의 몸[龍身]은 물의 요소[水大]가 많기 때문에 마음속 생각으로 물을 만들고 또한 변화하여 움직일 수 있다. 그런데 사람의 몸은 땅의 요소[地大]가 많기 때문에 가볍게 움직이는 모습이 적으니, 어떻게 날 수 있는가?

[답] 인간의 몸은 땅의 종류여서 가볍게 움직이는 모습이 적기 때문에 신통력을 구해 배워도 천상이나 귀신처럼 어떻게 통달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땅은 비록 무겁지만 물의 힘이 있기 때문에 땅이 움직일 수 있듯이, 이와 같이 마음의 힘이 있기 때문에 그 몸을 들어올릴 수 있다.

비유컨대 원숭이는 높은 곳으로부터 떨어져도 몸을 다치지 않으나 사람은 그 높이에서 떨어지면 다치게 되니, 원숭이는 마음의 힘이 가볍고 빠르고 강하기 때문에 손상됨이 없는 것이다. 마땅히 몸의 신통함이 이와 같다는 것을 알아야만 하니, 마음의 힘이 강하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이 뜰 수 있다면 비록 깊은 물에 있더라도 가라앉지 않으니, 마음의 방편력이 있기 때문에 그 몸을 지탱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사람의 몸이 비록 무겁더라도 마음의 힘이 강하기 때문에 몸이 허공을 날 수 있는 것이다.

[문] 이와 같다는 것을 믿는다면, 어떻게 배워야 하는가?

[답] 만약 수행자가 제4선에 머물러 4여의분(如意分)에 의지하여 일심으로 생각을 거두어서, 몸의 곳곳이 텅 비어 마치 연뿌리의 구멍과 같다고 관하면 몸이 가볍고 빠른 모습을 취할 수 있으니, 그것을 익혀서 그치지 않으면 몸과 마음이 합해진다. 이는 마치 철과 불이 화합하는 것과 같다.

몸의 거칠고 무거운 모습을 소멸하면 단지 가볍고 빠른 몸만 있게 되니, 이것과 욕․정진․사유 및 이를 돕는 행법이 화합하면 욕 등의 선행력(善行力) 때문에 몸이 곧 그것을 따른다. 마치 불과 철이 화합하면 가볍고 부드러워져 사용되는 것과 같다.

또한 색계의 4대(大)로 만들어진 색(色)은 이 몸 가운데서 몸과 화합하여 몸을 가볍게 하고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게 하니, 마치 사람이 약을 먹으면 마음이 명료해져 몸이 곧 가벼워지는 것과 같다. 비유컨대 색계의 4대로 만들어진 색이 밝고 깨끗해지면, 이 몸에 있기 때문에 눈이 밝고 깨끗해지는 것과 같다.

마치 사람이 도약하는 법을 배우고 익혀서 더욱 공교로워지면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나며, 새가 나는 방법을 배우면 점점 더 멀리 날 수 있는 것처럼, 신통도 이와 같아서 처음 얻었을 때에는 한 길[丈]이나 두 길에 불과하지만 점차 더 멀리 날 수 있다.

이 신통변화에는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몸이 마치 새가 날듯이 허공을 나는 것이고, 둘째는 먼 거리를 가깝게 하는 것이며, 셋째는 이곳에서 사라져 저곳에 나타나는 것이고, 넷째는 마음대로 빠르게 할 수 있는 것이니, 손가락을 튀기는 짧은 동안에 60념(念)이 있는데 한 생각 사이에 무량 아승기 항하의 모래 수처럼 많은 국토를 넘어설 수 있어서 생각에 따라 곧 이른다.

이 신통력을 사용하면 몸이 자재함을 얻어 한 몸이 많은 몸으로 되고 많은 몸이 한 몸으로 될 수 있으며, 큰 것이 작게 되고, 작은 것이 크게 될 수 있으며, 무겁기는 수미산과 같고 가볍기는 기러기 털과 같으니, 이와 같이 마음대로 행할 수 있다.

또한 보살이 이러한 몸의 신통력을 얻으면 한 생각 사이에 항하의 모래 수처럼 많은 국토를 건널 수 있다. 그러나 그곳의 중생들은 보살이 그곳에 이른 것을 볼 수 있지만 보살은 본래의 처소에서 움직이지 않았으며, 그곳에서 법을 설하여 교화하지만 이곳에서도 또한 중지하지 않았다.

또한 어떤 천인(天人)이 항상함[常]에 집착하여 뒤바뀐 경우에도 신통력으로 제도할 수 있다.

삼천대천국토가 타는 모습을 나타내면 중생들은 삼천대천국토가 불에 타 파괴되는 모습을 보지만 국토는 손상됨이 없다.

어떤 중생이 마음속으로 교만한 생각을 낼 때, 금강저(金剛杵)를 지어 나타내 손에 쥐고 금강저에서 불이 나오게 하면, 그 모습을 본 사람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귀의하고 예경한다.

또 어떤 사람이 전륜성왕의 몸을 즐겨 집착하면, 곧 전륜성왕의 모습을 나타내어 그를 위해 법을 설해 주며, 혹은 석제환인의 모습을 나타내기도 하고, 혹은 마왕의 모습을 나타내기도 하며, 혹은 성문․벽지불의 모습을 나타내기도 하고, 혹은 부처님의 몸을 나타내는 등 중생들이 좋아하는 바에 따라 몸을 나타내며 법을 설한다.

보살은 어떤 경우에는 허공에서 결가부좌한 채로 몸에서 사방으로 여러 가지 광명을 놓아서 법을 설하기도 하고, 혹 중생들이 현란한 색상으로 장엄한 것을 좋아할 때는 삼천대천국토를 7보로 장엄하고, 깃발[幢幡]과 화개(華蓋)와 온갖 종류의 기악(伎樂)이 있는 곳에서 법을 설하기도 한다.

혹은 삼천대천국토를 한 바다의 물로 만들어 청색 연꽃과 붉은 꽃으로 물 위를 덮어 그 위에서 법을 설하기도 하며, 혹은 수미산 꼭대기에 앉아 범음(梵音)으로 법을 설하여 널리 여러 나라에서 들을 수 있게 하고, 어떤 때는 중생들이 그의 모습은 보지 못하고 단지 법을 설하는 음성만 들을 수 있으며, 혹은 건달바의 몸을 지어 기악과 음성으로 그들의 마음을 기쁘게 한 뒤 법을 설하고, 혹은 용왕의 모습으로 나타나 번개와 천둥을 쳐 법을 설하는 등의 이와 같은 갖가지 인연 방편으로 신통변화를 나타내서 중생을 열어 인도한다.

[문] 신통으로 변화시킨 온갖 사물은 어찌하여 허망하지 않은가?

[답] 수행자는 먼저 모든 법이 허망하여 허깨비와 같고 지어낸 것과 같다는 것을 아니, 비유컨대 진흙을 주물러 마음대로 무엇을 만들어 내는 것과 같다.

만약 복덕이 있는 사람이라면 여름에도 눈이 내리게 하고 겨울에도 꽃이 피게 하며 강의 물을 흐르지 못하게 할 수도 있고, 또 선인(仙人)이 진노하면 호랑이․이리․사자 등을 돌[石身]로 변화시킬 수 있는데, 어찌 하물며 신통의 정력(定力)이 사물을 변화시키지 못하겠는가?
또한 일체의 사물 가운데는 각기 기분(氣分)이 있는데, 그 기분의 성질을취하여 신통력이 그것을 넓히면 그 밖의 다른 것은 숨어 사라진다.

경전에서 말한 바에 따르면, “어떤 비구가 신통력으로 마음의 자재함을 얻어서 큰 나무가 있는 것을 보고 땅으로 만들고자 하면, 곧 그 나무가 모두 땅이 된다”고 하였으니, 왜 그런가 하면 나무에는 땅의 성분[地分]이 있기 때문이다. 물과 불과 바람도 또한 이와 같다.

만약 금이나 은 등의 갖가지 보물을 만들려고 하면 마음대로 모두 만들 수 있으니, 왜냐하면 나무에는 깨끗한 성분[淨分]이 있기 때문이다.

[문] 사물의 변화가 이와 같다면 조화에 본말(本末)이 없는데, 그런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는가?

[답] 어떤 이는 말하기를, “허공 가운데서 4대가 미진을 만들어 내며, 마음의 힘[心力]이 있기 때문에 미진들을 화합하여 사람으로 만든다”고 하였다.

비유컨대 사람이 죽어서 혹은 천상에 태어나거나 혹은 지옥에 태어나는 일은 죄와 복의 인연 때문이듯이, 미진을 화합하여 변화시키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이것이 사물이 신통에 의해 변화되어 나타나는 모습이다.

만약 수행자가 천이(天耳)를 구하고자 하면, 또한 제4선(禪)을 근본으로 삼아 4여의분(如意分)을 닦아야 한다는 것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으니, 그 마음을 부드럽게 조절하고 이어서 대중들의 음성을 염두에 두고 갖가지 소리의 양상을 취하여 들은 소리에 대해 항상 상념(想念)한다. 만약 마음이 다른 것을 연(緣)하면 거두어 다시 돌아오게 하며, 항상 일심(一心)으로 생각을 닦으면 곧 귀 가운데서 색계의 4대로 된 청정한 색을 얻으리니, 이것을 천이(天耳)를 닦아 익힌다고 한다.

이 천이로 시방의 한량없는 국토의 음성을 들을 수 있으니, 이른바 천상의 소리, 인간의 소리, 용의 소리, 아수라(阿修羅)의 소리, 건달바(乾闥婆)의 소리, 전다라(旃陀羅)의 소리, 마후륵(摩睺勒)의 소리, 축생과 아귀의 소리, 지옥 고통의 거칠거나 미세하거나 크거나 작은 소리 등을 다 들을 수 있다.

보살은 선정[定]의 마음이 더욱 깊어져 마침내 시방의 모든 부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으며, 부처님으로부터 법을 듣되 상(相)을 취하지 않아서, 법으로 진실된 법[眞法]을 삼고 가장 높은 것으로 삼으며, 깊은 뜻에 의지하고 언어에는 의지하지 않는다.

깊은 뜻이란 무엇인가?
이른바 모든 법이 공(空)하고 무상(無相)이며 무작(無作)이라는 것을 알아 삿된 견해를 내지 않으며, 뜻에 대해서도 또한 뜻을 얻음이 없는 것을 말한다. 얻을 수 없는 가운데 또한 얻는다는 관념[相]도 없으니, 이것은 깊은 뜻에 의지한 것이지 언어에 의지한 것이 아니다.

또한 수행자는 요의경(了義經)에 의지하고 요의경이 아닌 것에는 의지하지 않는다.

요의경이란, 만약 능히 뜻에 의지한다면 일체의 모든 경이 다 요의(了義)이다. 뜻[義]은 결국 공하여 그 모습[相]을 말할 수가 없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모든 경은 다 요의이다.

만약 뜻에 의지하지 않는다면, 이 사람은 모든 경에 대해 다 불요의(不了義)이니, 왜냐하면 깊은 지혜가 없어 음성을 따르기 때문이다. 이 음성의 실상도 또한 깊은 뜻에 들어가면 모두 말로 표현할 수 없으므로 이를 분별요의경(分別了義經)이라 하니, 요의경 아님이 없다.

또한 수행자는 지(智)에 의지하되 식(識)에는 의지하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수행자는 이 식상이 인연 화합에 의해 생기는 것이어서 자성이 존재하지 않고 색도 없고 무대(無對)이며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알 수도 없으며 인식할 수도 없어, 허망하기가 허깨비와 같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식상(識相)에 대해 이와 같이 알면, 식이 곧 지가 되니, 그러므로 지를 의지하되 식에는 의지하지 않아야 한다.

수행자는 비록 다시 식을 내더라도 식이든 지이든 집착하는 마음을 내지 않아야 하며, 식이 상(相)과 같다는 것을 알면 식이 곧 지상(智相)이 되니, 이 지상으로 중생을 위해 설한다.

또한 수행자는 법을 의지하되 사람은 의지하지 않아야 하니, 왜냐하면 만약 불법 가운데 실재로 사람이 존재한다면 청정하여 해탈을 얻는 일이 없을 것이다. 일체의 법은 무아(無我)이고 무인(無人)이지만, 단지 세속을 수순하기 때문에 사람이 있고 나[我]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수행자는 법에 의지하되 사람에 의지하지 않아야 한다.

이른바 법이라는 것은 모든 법의 성품을 말한다. 법성(法性)이란 무생성(無生性)이다. 이 무생성이라는 것은 결국 공하다는 것이며, 결국 공한 것은 이를 언설로 표현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언어로써 법을 설하지만 법 가운데는 언어가 없고, 언어 가운데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언어에는 곧 언어의 모습[語相]이 없으니, 일체의 언어는 언어의 모습이 없다. 이렇기 때문에 경에서 말하기를 “보여줄 것도 없고 설할 것도 없는 것을 불법(佛法)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수행자는 천이(天耳)로 모든 불법을 들을 수 있으며, 사람이든 법이든 집착된 견해를 내지 않는다. 만약 두 가지 상[二相]이라고 분별하면 불법(佛法)이 아니며, 만약 두 가지 상이 없다면 이것이 불법이다. 수행자는 천이의 능력에 의지하기 때문에 지극히 깊은 법을 들을 수 있고 이로써 중생을 교화하니, 이를 천이신통(天耳神通)이라고 한다.

만약 수행자가 타심지(他心智)를 얻고자 하면 먼저 스스로 마음을 관해야 한다. 마음의 생상(生相)․주상(住相)․멸상(滅相)을 취하고, 또한 마음의 더러운 상[垢相]․깨끗한 상[淨相]․안정된 상[定相]․어지러운 상(亂相) 등을 알며, 또한 마음이 반연하는 바의 더러움과 깨끗함, 가까움과 멂, 많고 적음 등을 관하여 스스로 안팎의 마음의 상[內外心相]을 취한다.

그런 다음에는 중생의 색을 관한다. 즉, 탐욕하는 모습의 마음, 분노하는 모습의 마음, 교만한 모습의 마음, 인색한 모습의 마음, 질투하는 모습의 마음, 걱정하는 모습의 마음, 두려워하는 모습의 마음, 언어와 음성이 갖가지로 짓는 모습의 마음 등을 취해 이렇게 생각한다.

‘부처님도 나의 마음과 같다. 생겨날 때, 머무를 때, 멸할 때 그도 또한 이와 같다. 스스로 마음이 반연하는 바를 알 수 있듯이, 그도 또한 이와 같다. 나의 마음에 이와 같은 색상(色相)과 언어가 짓는 상(相)이 있듯이, 그도 또한 이와 같다.’

항상 심상(心相)을 닦고 배워 이와 같이 익히고 나면, 타심통(他心通)을 얻는다. 이때는 단지 다른 사람의 마음[心]과 심수법(心數法)을 반연한다.

마치 눈이 밝은 사람이 깨끗한 물속에 있는 고기를 바라보면 크거나 작거나 잘 생겼거나 못생겼거나 모든 물고기들을 다 볼 수 있으니, 비록 물이 덮고 있더라도 물이 깨끗하기 때문에 보는 데 걸림이 없는 것처럼, 수행자도이와 같아서 다른 사람의 마음을 통하는 능력[他心通力]이 있기 때문에 중생들이 비록 몸으로 마음을 덮고 있더라도 그 마음을 능히 볼 수 있다.

이미 타심통을 얻었으므로 혹 대중들에게 법을 설할 때 먼저 그들의 마음을 알아 이 중생들이 얼마나 깊은 마음으로 어떤 법을 행하고, 어떤 인연이 있으며, 어떤 모습을 기뻐하고, 어떤 일을 하는지를 다 안다.

자기의 마음이 청정하기 때문에 중생의 마음도 또한 청정할 수 있음을 아니, 마치 깨끗한 거울에는 모든 색(色)이 길든 짧든 네모이든 둥글든 거칠든 미세하든 본래의 모습 그대로 나타나, 늘어나거나 줄어들지 않는 것과 같다. 왜 그런가 하면 거울이 깨끗하기 때문이니, 거울은 비록 분별하지는 않지만 그것들의 모습을 나타낸다.

수행자도 또한 이와 같으니, 자기의 마음이 청정하기 때문이요, 모든 법은 일정한 상(相)이 없으니, 항상 청정하기 때문이다.

중생의 심법과 심수법도 모두 다 알 수 있으니, 만약 중생들 가운데 음욕이 많은 자가 있으면 곧바로 그 마음을 알아서 음욕을 떠날 수 있는 법을 설해 준다.

성냄과 어리석음도 또한 이와 같으니, 왜냐하면 마음의 실상은 물듦도 없고 성냄도 없으며 어리석음도 없기 때문이다.

만약 대중들 가운데 성문승(聲聞乘)을 구하는 이가 있으면, 또한 그의 마음을 알아 법을 설해 주니, 비록 법을 설해 주더라도 법성이 작지 않음을 알며, 벽지불도(辟支佛道)를 구하는 이가 있으면 또한 그의 마음을 알아 법을 설해 주니, 비록 법을 설해 주더라도 법성이 중간 정도가 아님을 알며, 만약 대승을 구하는 이가 있으면 또한 그의 마음을 알아 법을 설해 주니, 비록 법을 설해 주더라도 법성이 크지 않다는 것을 안다.

수행자는 이와 같이 중생의 마음을 평등하게 따라서 법을 설해 주되 또한 심상(心相)을 분별하지 않으니, 비록 삼승(三乘)을 분별하여 법을 설하더라도 법성(法性)을 파괴하지 않는다. 법성을 파괴하지 않기 때문에 일체 중생들이 마음으로 행하는 바를 다 안다.

비록 자기 스스로 마음을 수용하여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더라도 그 마음과 이 마음 사이에 거스름도 없고 따라감도 없으며, 또한 일체 중생의 마음과 마음이 서로 이어져 마치 물이 흐르는 것과 같다는 것을 안다.

만약 심성(心性)을 알면 법성도 또한 이와 같으니, 타심지로 중생의 마음을 알아 법을 설해 주면 해로움이 없다. 이를 타심지신통(他心智神通)이라 한다.

만약 수행자가 숙명(宿命)을 알고자 한다면, 먼저 스스로 지금 겪고 있는 일과 종전에 겪은 일을 깨달아 알고, 계속해서 어제 밤과 어제 낮 그리고 며칠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이와 같이 한 달, 그리고 올해로부터 거슬러 올라가 어린 시절에 이르기까지의 일을 깨달아 알아야 하니, 비유컨대 길을 갈 때 도착한 곳에 이르러 경유한 곳을 사유하여 기억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익히고 나면, 정력(定力)을 잘 닦았기 때문에 태어날 때와 태에 들어 있을 때를 기억할 수 있고, 어느 곳에서 죽어 이 태(胎)에 들어 태어났는지를 알 수 있으며, 1세(世), 2세, 3세, 나아가 백 세, 천만무량억 세를 알 수 있다.

숙명지(宿命智)로 자기 자신 및 다른 사람의 항하의 모래 수처럼 많은 겁 동안 겪어온 일을 알 수 있다. 모두 다 생각해 알 수 있으므로, 숙명의 일로 중생을 교화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어느 곳에서, 이와 같은 성자(姓字)를 지니고, 이와 같이 태어나서, 이와 같은 수명을 누리면서 괴로움과 즐거움을 겪었다.”

또한 그들이 겪은 일에 대해서도 말해 줄 수 있으니, 수행자는 숙명력(宿命力)이 있기 때문에 중생들이 과거 세(世)에 지은 죄와 복의 인연을 안다. 이른바 성문의 인연, 벽지불의 인연, 불(佛)의 인연을 심었는지를 알아서 그 인연에 따라 법을 설해 준다.

또한 수행자는 숙명지(宿命智)의 힘 때문에 스스로 모든 부처님께서 심으신 선근으로부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회향하지 않은 것까지 잘 알아 지금 마땅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회향한다.

수행자는 과거의 모든 법이 소멸할 때 떠나간 바가 없다는 것을 알고, 미래세에 모든 법이 생길 때 좇아 온 바가 없다는 것을 안다. 비록 과거세가 시작이 없다는 것을 알더라도 시작이 없다는 견해를 내지 않으며, 비록 미래세에 중생이 멸하여 열반에 드는 것을 관하더라도 치우친 견해[邊見]를 내지 않는다.

수행자는 숙명을 생각할 때 모든 선근을 늘리고 무량한 세(世) 동안 지은 죄의 인연을 멸하니, 왜냐하면 일체의 법에는 새로운 모습도 없고 옛날의 모습도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지혜를 얻은 다음에는 일체의 유위법(有爲法)과 겪어 온 생사고락(生死苦樂)을 관하되, 마치 꿈속에서 보는 것처럼 관한다. 이렇기 때문에 나고 죽는 가운데 마음에 싫어하는 생각을 내지 않고, 일체의 중생들에 대해 가엾이 여기는 마음[悲心]을 일으키며, 일체의 법이 다 지은 모습[作相]이라는 것을 알아,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천만억 무량 겁 동안 생사를 왕래한 것이 모두 허망하여 진실이 아니듯이, 일체 중생들이 생사를 왕래한 것도 모두 이와 마찬가지이다. 만약 4대(大)와 4음(陰)이 없다면 이것이 곧 진실한 것이니, 4대와 4음도 결국에는 생겨나지 않는다.’

또한 수행자는 숙명지로 다음과 같이 기억한다.

‘일찍이 전륜성왕이 누리던 즐거움도 무상(無常)하여 마멸되었고, 석제환인이 누리던 즐거움도 또한 무상하여 마멸되었다. 모든 국토의 청정한 장엄과 모든 불보살의 오묘한 색과 법륜을 굴리는 것도 다 무상한데, 하물며 그 밖의 다른 것이겠는가?’

이와 같이 생각하고 나서 마음속으로 싫어하는 생각을 내어 멀리 여읜다.

수행자는 숙명지에 의지하여 무상공(無常空)에 들어가 일체 모든 법이 다 공하여 무상(無常)하지만 중생들이 뒤바뀐 소견 때문에 집착함을 관하고, 이런 중생들을 위하여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낸다.

이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행하면 점차적으로 대비(大悲)를 성취할 수 있으며, 대비를 얻고 나면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 이 보살을 생각하시고 그 공덕을 찬탄하시니, 이를 숙명신통(宿命神通)이라 한다.

만약 수행자가 천안(天眼)을 구하고자 하면, 맨 처음에 밝은 빛의 상[明光相]을 취하니, 이른바 등불․밝은 구슬․해․달․별자리 등을 취하는 것이다.

이런 밝은 상(相)을 취한 다음에는, 만약 낮이면 눈을 감고 밤이면 생각을 다른 데 두지 않고 마치 눈으로 보는 것처럼 밝은 상에 둔다.

항상 밝음에 생각을 두고 닦아 익히면서 마음을 밝음에 매어 두고 다른 생각을 허용하지 않으며, 만약 마음이 달아나면 다시 거두어들여 마음을 한곳에 둔다.

이때 색계의 4대로 된 청정한 색이 이 눈 안에 있게 되니, 이를 천안이라고 한다. 이 천안은 4대로 되었기 때문에 천안이라고 하며, 또한 모든 현성의 청정한 눈이기 때문에 천안이라고 한다.

수행자가 이 천안을 얻고 나면 모든 산과 나무와 철위산(鐵圍山)과 수미산 및 모든 국토가 도무지 막고 가리지 못하니, 눈을 장애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능히 시방의 무량 아승기 부처님들과 장엄된 국토를 볼 수 있다.

그때 수행자는 일체의 부처님들이 한 부처님이라는 것을 알며, 또한 한 부처님을 일체의 부처님으로 보니, 법성이 파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모습을 보듯이 스스로 자신의 모습에 대해서도 그렇게 보니, 자신의 모습이 청정하기 때문이다. 일체법의 모습도 또한 이와 같다.

부처님을 청정하게 보듯이 제자들에 대해서도 그렇게 보니, 두 모습[二相]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방의 한량없는 국토에 있는 중생들이 지옥에 있든 축생이든 아귀이든 인간이든 천상이든 무색자(無色者)를 제외하고는 그들의 나고 죽음과 좋고 나쁨을 모두 다 볼 수 있다.

또한 시방 6도(道) 중생의 업의 인연과 그 과보를 모두 아니, 이 중생은 선한 업의 인연을 지었기 때문에 천상이나 인간 세계에 태어나고, 이 중생은 선하지 못한 업의 인연을 지었기 때문에 3악도(惡道) 가운데 태어남을 아는 것이다.

수행자는 천안 가운데서 지혜력(智慧力)을 얻었기 때문에 비록 중생을 보더라도 중생이라는 생각을 내지 않으니, 일체의 법에는 중생의 모습[相]이 없기 때문이다.

비록 업과 과보가 서로 이어지는 것을 보더라도 또한 일체법의 무업(無業)․무과보(無果報) 가운데 들어가며, 비록 천안으로 일체의 색을 보더라도 지혜력이 있기 때문에 또한 색상(色相)을 취하지 않으니, 이 색은 모두다 공하기 때문이다.

또한 막혀 있든 막혀 있지 않든, 가깝든 멀든, 위든 아래든, 못 보는 것 없이 다 볼 수 있으니, 수행자는 색계 제천(諸天)의 청정하고 은미한 형상을 볼 수 있으나 저들은 수행자를 보지 못하며, 나아가 대천(大天)에 이르러도 또한 볼 수 없다.

이와 같은 갖가지 신통의 뜻은 마하연에서 신통의 뜻을 설하는 가운데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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