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법요해(禪法要解) 01. 상권

선법요해(禪法要解)

요진(姚秦) 구마라집(鳩摩羅什) 등 한역 김철수 번역

선법요해(禪法要解) 01. 상권

선법요해(禪法要解) 02. 하권


선법요해(禪法要解) 01. 상권

수행자가 처음 와서 법을 받으려 할 때에는 다섯 가지 계[五衆戒]를 청정하게 지킬 것인지 스승이 묻고 나서, 만약 음욕(婬欲)이 많은 사람이면 마땅히 부정(不淨)을 관(觀)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부정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깨끗하지 않은 것을 싫어하는 것이고, 둘째는 깨끗하지 않은 것을 싫어하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중생에게는 여섯 가지의 탐욕이 있기 때문이니, 첫째는 색(色)에 대한 집착이고, 둘째는 생긴 모양[形容]에 대한 집착이며, 셋째는 위의(威儀)에 대한 집착이고, 넷째는 말소리[言聲]에 대한 집착이며, 다섯째는 매끄러움[細滑]에 대한 집착이고, 여섯째는 사람이라는 상(相)에 대한 집착이다.

앞의 다섯 가지 탐욕에 집착하는 사람에게는 깨끗하지 않은 것을 관하여 그것을 싫어하게 하며, 그리고 사람이라는 상에 대해 집착하는 사람에게는 백골(白骨) 상태의 사람 모습을 관하게 하고, 또 썩어 흩어졌든 아직 썩어 흩어지지 않았든 죽은 시체를 관하게 한다.

아직 썩어 흩어지지 않은 시체를 관하면 두 가지 탐욕을 끊을 수 있으니, 즉 위의와 말소리에 대한 탐착이다.

이미 썩어 흩어진 시체를 관하면 여섯 가지 탐착을 모두 끊을 수 있다.

부정관(不淨觀)을 익히는 것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죽은 시체에서 냄새가 나고 썩어 문드러져 깨끗하지 않음을 관하는 것이니, 나의 몸도 깨끗하지 않아서 죽은 시체와 동일하여 차이가 없다고 이와 같이 자기 자신을 관하면 싫어하는 마음이 생긴다.

이런 상(相)을 취한 다음에는 한적한 처소나 나무 아래나 비어 있는 집에 가서 취한 상을 스스로 관하여 깨끗하지 않다고 여긴다. 몸의 구석구석을 두루 관하여 마음을 몸에 매어 두고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하되, 만약 마음이 밖으로 치달려 흩어지면 다시 그 인연 안으로 거두어들인다.

둘째는 비록 눈으로는 보지 않았더라도 스승으로부터 법을 받아 기억하고 생각하여 분별하는 것이다.

스스로 몸 안에 서른여섯 가지 깨끗하지 못한 것들이 가득 차 있음을 관하면, 머리카락·털․손톱․치아․눈물․침․땀․때․지방․피부․살․힘줄․핏줄․척수․뇌․심장․간․비장․신장․허파․위․장․밥통․아기집․담․생식기 등은 고름이나 피․똥․오줌 및 여러 가지 기생충을 만들어 담고 있다. 이와 같이 갖가지 깨끗하지 못한 것들이 모여 덩어리를 이루고 있는 것을 임시로 이름 붙여 몸[身]이라고 하니, 스스로 이와 같이 관(觀)하며, 바깥 몸[外身]에 집착한 경우에도 또한 이와 같이 관한다.

만약 마음이 음욕을 싫어하면 마음이 편안한 상태에 이르게 되며, 만약 마음이 편안한 상태에 이르지 않았으면 마땅히 열심히 정진해서 그 마음을 꾸짖어 이와 같이 생각해야 한다.

‘늙고 병들고 죽는 괴로움이 지극히 가까워졌으니 수명은 마치 번개가 치고 떠나는 것 같구나. 사람의 몸을 받기도 어렵고 훌륭한 스승을 만나기도 어려운데, 불법이 사라지려고 하니 마치 새벽의 등불과 같구나.

선정법(禪定法)이 무너질 때는 걱정거리가 더욱 많아지니, 안으로는 온갖 번뇌가 일어나고 밖으로는 마군(魔軍)의 사람들이 있으며 국토엔 기근이 들고 황폐해진다. 안팎으로 늙음과 병듦과 죽음의 적들이 그 힘이 아주 강해 선정(禪定)을 익힌 것을 무너뜨리니 나의 몸이 두려워할 만하다.

여러 번뇌의 적들을 아직 조금도 손상시키지 못하고 선정법을 아직 얻지 못한 상태에서는 비록 법의(法衣)를 입었더라도 그 내실이 없어 공허하고속인과 차이가 없으며, 온갖 악취문(惡趣門)이 모두 열려 여러 선법(善法) 속에서도 아직 올바른 선정[正定]에 들어가지 못하고, 여러 악법들에 대해서도 아직은 반드시 악을 하지 않게 되지도 않는다.

그러나 내가 이제 어찌 이 똥자루에 집착하여 게으른 마음을 내서 능히 정근하지 않고 그 마음을 조복시키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이 다 떨어진 몸은 현성(賢聖)들이 꾸짖는 바이니, 깨끗하지 못한 더러운 것들이 아홉 구멍으로부터 흘러나오며, 이 몸을 탐착하는 것은 축생과 같으니, 죽어서는 함께 어둠 속에 뛰어들어도 매우 마땅하지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이 마음을 채찍질하여 스스로의 책임을 사유하고 다시 본래의 처소를 회복해야 한다.

또한 마땅히 마음을 기쁘게 하려면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부처님께서는 일체지(一切智)의 사람이시니, 곧 도의 가르침을 말씀하시어 이해하기 쉽고 행하기 쉽게 해주신다. 이 분은 나의 큰 스승이시니, 이와 같이 믿으면 근심과 두려움이 마땅히 없어져서, 마치 대왕(大王)을 의지하면 공포나 두려움이 없는 것과 같다.

모든 아라한들은 해야 할 일을 다 마친 이들로서 나의 동반자이며, 이미 마음을 조복하였으므로 마치 주인이 노비를 다루는 것과 같다.

마음이 조복되고 나면 여러 가지 과(果)를 갖추어 6신통이 자재하게 되나니, 나도 또한 스스로 마음을 조복하여 이러한 일을 구하여 얻어야겠다.

오직 이 길만 있을 뿐, 다시 다른 길은 없다.’

이와 같이 사유하고 나서 다시 깨끗하지 못한 것을 관하면, 다시 스스로 마음이 흔쾌하고 즐거워져서 이렇게 생각하여 말한다.

“처음 도를 익힐 때는 모든 번뇌의 바람이 불어 나의 마음을 무너뜨린다.

그러나 내가 도를 얻고자 하니, 그 뛰어나고 오묘한 5욕(欲)도 오히려 그것을 무너뜨릴 수 없는데 어찌 하물며 폐악(弊惡)한 것이겠는가?
마치 장로(長老)인 마하목건련이 아라한도를 얻었는데 그 본부인[本婦]이 춤과 음악으로 분위기를 무르익게 하고 자신을 아름답게 꾸미고서 목련을 무너뜨리려 했던 것과 같으니, 목련이 그때 게송으로 말하였다.

그대의 몸은 뼈를 근간으로 세워졌고 
가죽과 살이 서로 얽혀 있으며 
깨끗하지 못한 것들이 안에 가득 차 있어 
어느 하나 좋은 것이 없네.



가죽자루 속에는 똥과 오줌이 가득하고 
아홉 구멍에서는 항상 더러운 것들이 흘러나오니 
귀신도 감당하지 않으려 하는데 
어찌 스스로 만족하여 귀하다고 하는가? 

그대의 몸은 걸어 다니는 뒷간과 같아 
얇은 가죽으로 스스로를 덮고 있어 
지혜로운 이라면 멀리 버리니 
마치 사람들이 뒷간을 멀리하는 것과 같네.



만약 사람들이 그대의 몸을 안다면 
마치 내가 싫어하고 미워하는 것처럼 
모두가 다 멀리 떠날 것이니 
마치 사람들이 똥구덩이를 피하는 것과 같네.


그대는 몸을 스스로 장엄하여 
꽃과 향과 영락으로 꾸미니 
범부는 탐내고 애착하지만 
지혜로운 이는 미혹되지 않네.



그대는 깨끗하지 못한 것의 덩어리로 
온갖 더럽고 불결한 것들을 모아 가지고 있어 
마치 뒷간을 장엄해 놓은 것과 같은데 
어리석은 이는 그것을 좋아하네.



그대의 옆구리와 갈비는 척추에 붙어 있어 
마치 서까래가 기둥을 의지하는 것과 같으며 
5장(藏)이 배 안에 있어 
깨끗하지 못한 것이 마치 똥을 담고 있는 상자와 같네.



그대의 몸은 변소와 같은데 
어리석은 범부는 보호하고 좋아하며 
구슬과 영락으로 장식하니 
겉모습은 마치 화병(畫甁)처럼 좋아 보이네.



만약 어떤 사람이 허공을 물들이려 해도 
끝내 물들이지 못하는 것처럼 
그대가 나의 마음을 흔들려 하는 것은 
마치 나방이 스스로 불에 몸을 던지는 것과 같네.



일체 모든 욕망의 독(毒)을 
내가 지금 이미 멸하여 없앴으니 
5욕(欲)도 이미 멀리 여의었고 
악마의 그물도 이미 찢어버렸네.


나의 마음은 허공과 같아 
일체에 집착하는 바가 없으니 
만약 천상의 욕락이 내려온다 해도 
나의 마음을 물들이지 못하리라.

수행자는 이와 같이 사유하여 결정코 견고하게 마음의 본연(本緣)에 머물러 뭇 욕망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

만약 날카로운 근기[利根]를 지닌 이가 한마음으로 부지런히 정진하면 늦어도 7일쯤 지나면 마음이 선정[定]을 얻어 머물 수 있으며, 중간 정도의 근기[中根]를 지닌 이라면 삼칠일에 이르러서 선정을 얻을 수 있으며, 둔한 근기[鈍根]를 지닌 이라도 오랫동안 정진하면 선정을 얻을 수 있으니, 비유하면 낙(酪)을 저으면 소(酥)가 되는 것처럼 반드시 얻을 수 있다.

만약 선정을 닦아 익히지 않으면 이 사람은 비록 다시 오랫동안 갖가지 다른 방법을 익히더라도 헛되어서 얻을 수 없으니, 비유하면 아무리 물을 저어도 끝내 소(酥)가 되지 않는 것과 같다.

[문] 어떤 일이 정도(正道)에 맞지 않는 것인가?

[답] 금계(禁戒)를 범해 놓고도 참회하지 않거나,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으면서 버리지 않거나, 선근(善根)을 끊고 3복장(覆障)에 가려 이른바 두텁고 날랜 번뇌에 매여 있거나, 5무간죄(無間罪)를 지어 3악도(惡道)의 과보를 받는 등, 이와 같은 죄를 짓고도 닦아 익히지 않는 경우이다.

또한 마하연(摩訶衍) 가운데서는 보살이 훌륭한 근기를 지녀 실다운 지혜와 복덕의 인연을 갖추면 그 일과는 같지 않으며, 만약 닦아 익히지 않더라도 경전을 외우고 복을 닦으며 탑을 세워 공양하면 법을 설하여 교화할 수 있고 10선도(善道)를 행할 수 있다.

[문] 어떻게 일심상(一心相)을 얻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가?

[답] 마음이 일심상에 머물면 몸이 부드럽고 경쾌하고 즐거워지며, 성냄과 근심 걱정 등 온갖 번뇌의 심법(心法)이 모두 이미 그쳐서 마음이 쾌락을 얻어 일찍이 없었던 바를 얻으니, 5욕락(欲樂)보다 뛰어나다.

마음이 깨끗하여 탁하지 않기 때문에 몸에서 광명이 나니, 마치 청정한 거울의 빛이 밖으로 드러나는 것과 같고, 깨끗한 물 속에서 밝은 구슬의 빛이 밝게 드러나는 것과 같다.

수행자는 이런 모습을 보고 나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기쁨이 일어난다.

비유하자면 목마른 사람이 땅을 파서 물을 구하려 할 때 축축한 진흙이 보이면 오래지 않아 물을 얻는 것과 같으니, 수행자도 이와 같아서 처음 닦아 행할 때에는 마치 마른 흙을 파는 것 같다가, 오랫동안 멈추지 않으면 축축한 모습을 보게 되는 것처럼 스스로 오래지 않아 선정(禪定)을 얻게 되리라는 것을 안다.

일심으로 믿고 좋아하여 부지런히 정진하고 마음을 거두어들이면 점차적으로 깊은 선정에 들어갈 수 있으니, 이런 생각을 하고 나면 5욕을 무너뜨릴 수 있다.

탐욕을 구하는 이를 보면 매우 나쁘다고 할 수 있으니, 마치 사람이 개를 보건대, 개는 좋은 음식은 먹지 않고 냄새나는 똥을 먹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갖가지 인연 때문에 욕심이 지나친 것을 꾸짖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낸다.

5욕을 받아들이는 이는 본래 자신의 마음속에 즐거움이 있으나 구할 줄 모르고 오히려 다시 밖에서 청정하지 못한 죄와 즐거움을 구한다.

수행자는 항상 밤낮으로 정진하여 온갖 선법(善法)을 모아 선정을 이루는 데 이바지해야 하며, 선정을 장애하는 온갖 법은 마음에서 멀리 여의어야 한다.

모든 선법을 모으는 이는 욕계의 무상(無常)․고(苦)․공(空)․무아(無我)를 관하고, 마치 질병․부스럼․종기 등과 같고 심장에 화살이 박힌 것과 같다고 여긴다.

3독심(毒心)이 활활 타오르면 온갖 투쟁하는 마음과 질투심이 연기처럼 피어올라 매우 혐오스러우니, 이와 같이 관하는 것을 처음으로 선법(禪法)을 익힌다고 한다.

만약 선법(禪法)을 익히는 중간에 다섯 가지 덮힌 마음[蓋覆心]이 일어나는 경우에는 곧 마땅히 제거해 없애야 하니, 비유하자면 검은 구름이 태양을 가렸을 때 바람의 힘이 구름을 흩뜨리는 것과 같다.

만약 음욕에 덮힌 마음[婬欲蓋]이 일어나면 마음속으로 5욕에 대해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나는 지금 도를 수행하고 있으므로 스스로 5욕을 버려야 하는데, 어찌 다시 그것을 생각하겠는가? 마치 사람이 토한 음식을 다시 먹으면 이는 세간의 죄법(罪法)이 되는 것과 같다. 나는 지금 도를 배우려고 수염과 머리를 깎고 법의(法衣)를 입었으니, 몸과 목숨이 다하도록 5욕에 마음을 두고 바라는 것을 영원히 여의고 영원히 끊어야 하는데, 어찌 다시 집착하는 마음을 내겠는가? 이는 매우 합당하지 못하므로 제거해 없애야 하니, 도적이나 독사가 집 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과 같아서, 그 화(禍)가 매우 깊고 무겁기 때문이다.’

또한 5욕법은 온갖 악이 머무는 곳이어서 다시 돌이킬 수 없으니, 처음에 인정해 받아들이면 오랜 후에는 기만당하여 온갖 극심한 고통을 받게 되고 질투와 성냄 등 온갖 악을 짓지 않는 바가 없게 된다. 마치 주머니에 여러 자루의 칼이 있으면 손으로 잡을 때 좌우에 접촉하여 다치게 되는 것과 같다.

또한 설령 5욕을 얻더라도 오히려 만족할 줄 모르니, 만약 만족할 줄 모른다면 즐거움이 없어서, 마치 갈증이 나서 음료수를 마시고도 아직 갈증이 해소되지 않아 즐거움을 얻지 못하는 것과 같고, 옴[疥]이 난 곳을 긁어대도 그 질환에 차도가 없어 즐거울 수 없는 것과 같다.

또한 5욕이 그 마음을 물들이면 좋은 것과 추한 것을 분별할 줄 모르고, 금세나 후세의 죄업에 따른 과보에 대해서도 무서워할 줄 모르게 되니, 이렇기 때문에 음욕을 제거해 없애야 한다.

음욕을 제거해 버리면 혹시 성냄의 번뇌가 생기더라도 성냄의 번뇌가 생기는 즉시 제거할 수 있다.

중생들은 태(胎)에 처한 이래로 고통스럽지 않은 때가 없었다고 생각할 수 있으니, 온갖 괴로움이 갖추어져 있는데, 어찌 다시 번뇌를 더하겠는가? 마치 사형 집행이 다다른 사람과 같으니, 어찌 선량한 사람이 그 고통을 더욱 무겁게 늘리겠는가?
또한 도를 수행하는 사람은 마땅히 자기 자신에 대한 애착이나 교만 등의 번뇌를 버려야 하니, 비록 천상에서 태어나는 것을 장애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도를 수행하는 사람은 오히려 그런 생각을 내지 말아야 하거늘, 어찌 하물며 성냄으로써 즐거움의 근본을 뽑아버리겠는가?
또한 비유하건대 물이 용솟음쳐 움직이면 얼굴을 들여다볼 수 없는 것처럼 성내는 마음이 생기면 존귀한 사람과 비천한 사람을 구별할 줄 모르고 부모나 스승도 몰라보며 나아가 부처님의 가르침도 받아들이지 않으니, 성냄이야말로 큰 병통이며, 그 잔인한 해로움과 무도(無道)함이 마치 나찰(羅刹)과 같다. 마땅히 사유하여 자비로운 마음으로 성내는 마음을 소멸시키면 탐욕과 성냄이 멈춘다.

만약 선정을 얻으면 마음이 흔쾌하고 즐거워지지만, 만약 선정의 즐거움을 얻지 못하면 정(情)이 흩어지고 근심으로 심란해져 마음이 점차 침울해지며, 눈이 흐려져 분명하지 못하니, 수면(睡眠)이 마음을 해치는 적임을 알 수 있다.

수면은 세간의 이익도 파괴하는데, 어찌 하물며 도(道)에 관한 것이겠는가? 수면법(睡眠法)은 죽음과 다름이 없으나 숨을 쉰다는 점이 다를 뿐이니, 마치 물에 이끼가 덮이면 얼굴을 들여다볼 수 없듯이, 수면이 마음을 덮으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모든 법의 실체 또한 이와 같으니, 즉시 제거하고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온갖 번뇌의 도적들이 모두 위험한 재해를 끼치려 하는데, 어찌 편안히 잠잘 수 있겠는가? 마치 창이나 칼을 세우고 적진과 마주 대하는 동안에는 수면에 빠질 수 없는 것과 같다.

늙고 병들고 죽는 근심을 아직 여의지 못했으면 3악도(惡道)의 괴로움을벗어나지 못한 것이며, 도법(道法) 가운데 난법(暖法)도 아직 얻는 바가 없는 것이니, 마땅히 잠들지 말아야 한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서도 만약 졸음이 그치지 않으면, 곧 일어나 걷거나 찬물로 세수하고 사방을 쳐다보며 별자리를 바라보고 세 가지 일을 생각하면서 잠을 없애어 그것이 마음을 덮지 않도록 한다.

첫째는 두려워함[怖畏]이니, 마땅히 스스로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죽음의 왕이 큰 힘으로 항상 위해를 가하려고 하니,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면 그것은 지극히 가까이 있어 마치 도적이 아주 빨리 오면 믿고 의지할 데가 없는 것과 같다.

또 칼을 뽑아 목에 대고 있는 것처럼, 잠이 오면 즉시 목을 베어 버리리라.’

둘째는 흔쾌하고 안위(安慰)함이니, 마땅히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부처님께서는 큰 스승이시며, 그 분이 가지고 계신 오묘한 법은 일찍이 없었던 것이다. 내가 그것을 배워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은 아주 행복한 일이며 경사스러운 일이지만, 잠자려는 마음[睡心]을 내면 이 모든 것이 사라진다.’

셋째는 근심 걱정[愁憂]이니, 마땅히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후세에 계속해서 몸을 받아 돌아다녀 그 고통과 독해(毒害)가 끝없고 한량없으리니, 이와 같이 여러 가지 인연으로 수면에 떨어지는 것을 꾸짖어 나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사유하면 수면이 곧 그친다.

만약 들뜸과 회한의 번뇌[掉悔蓋]가 일어나면 마땅히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세간 사람들은 근심을 없애려고 기쁨을 구하기 때문에 들떠 희롱하는[掉戱] 마음을 낸다. 지금 나는 고행하면서 좌선하여 도를 구하고 있으니, 어찌 스스로 방자한 마음을 내 들떠 희롱하겠는가? 이는 매우 합당하지 못한 일이다. 불법이 소중하게 여기는 바는 마음을 거두는 것으로 근본을 삼으니, 경박하게 방종한 마음을 내지 말아야 한다.’

마치 물결이 일어나면 얼굴을 들여다볼 수 없듯이, 들떠 희롱함은 마음을
움직여 좋고 나쁜 것을 보지 못한다.

뉘우침[悔]에 대해서는 선도(禪度)중에서 말한 바와 같다.

[문] 탐욕․성냄[瞋恚]․의심[疑]은 각기 개별적으로 덮음[蓋]이 되는데 무엇 때문에 수면(睡眠)과 들떠 후회함[掉悔]은 두 가지가 합해져야 덮음이 되는가?

[답] 졸음[睡]은 번뇌의 세력이 아직 미약하고 엷어서 잠듦[眠]이 돕지 않으면 마음을 덮지 못하며, 들떠 희롱함은 후회함[悔]이 없으면 덮음을 이룰 수 없으니, 이렇기 때문에 두 가지가 합하여 덮음이 되는 것이다.

비유하면 노끈으로 물건을 묶을 때 한 가닥으로 묶으면 힘이 없으나 두 가닥을 합하여 매면 제대로 동여맬 수가 있는 것과 같다.

또한 수면이라는 심법(心法)은 졸음[睡]으로 인하여 마음이 무거워지고, 마음이 무거워지기 때문에 몸도 역시 함께 무거워진다. 졸음으로 인하여 미약하게 덮이지만 잠듦[眠]이 덮어 점차적으로 증가하면 도법(道法)을 막아 파괴하게 된다. 이런 까닭에 두 가지가 합해져 덮음[蓋]이 되니, 잠이 들었다가 깨어난 다음에도 마음은 전일(專一)하지가 못하다.

생각이 5욕(欲)으로 치달려 온갖 번뇌를 행하는 것을 들뜸[掉]이라고 한다. 비유하면 원숭이가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제멋대로 나무 숲 속을 팔짝거리며 뛰어다니는 것과 같으니, 들뜸[掉]도 역시 이와 같다.

5욕을 생각하고 나서 온갖 번뇌를 행하여 몸과 입과 생각을 잃어버리고 근심과 후회를 일으켜 생각하기를, ‘짓지 말아야 할 것을 짓고 지어야 할 것은 짓지 않았구나’라고 한다.

그러므로 들뜸과 후회가 서로 인(因)이 되어 두 가지가 합해져야 덮음이 된다.

[문] 악을 짓고 뉘우치면[悔] 덮음[蓋]이 되지 않는가?

[답] 만일 계(戒)를 범하고 스스로 뉘우쳐 그 후로 다시 짓지 않는다면 이럴 경우에는 덮음이 아니다. 그러나 만약 마음으로 죄를 짓고 항상 끊임없이 생각한다면 근심과 번뇌가 마음을 어지럽히기 때문에 덮음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갖가지 인연으로 들뜸과 뉘우침의 덮음[掉悔蓋]을 꾸짖어 나무라는 것이다.

마음을 얽어매는 연(緣) 가운데 만약 마음이 의심을 낳으면 곧 마땅히 사라지게 해야 한다. 왜 그런가 하면, 의심이라는 법은 애착이나 교만함과는 같지 않아서, 금세에는 즐거운 마음을 내지 않으며 후세에는 지옥에 떨어지기 때문이니, 의심이 있으면 모든 선법(善法)을 막는다.

마치 갈림길에서 망설이면서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를 몰라 문득 스스로 멈추는 것과 같이, 수행하는 이도 이와 같아서 본래 닦아 익히는 법에 대해 의심을 하면 다시 나아갈 수 없으니, 의심이란 병통은 정도(正道)를 막고 덮는다는 것을 알아서 마땅히 신속하게 제거해 없애야 한다.

또한 이런 생각을 해야 한다.

‘부처님께서는 일체지(一切智)의 사람이시라 온갖 법을 분별하시니, 이것은 세간법이고 이것은 출세간법이며, 이것은 선법(善法)이고 이것은 불선법(不善法)이며, 이것은 이로운 법이고 이것은 해로운 법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헤아려 아신다. 지금 다만 받아들여 행해서 의심을 내지 않아야 하며, 마땅히 교법(敎法)을 따라서 그것을 부정하거나 위배하지 말아야 한다.

또한 불법의 오묘함은 선정과 지혜를 닦아 여실하게 그 법을 알 수 있는데, 나는 이런 지혜가 없으니 어떻게 스스로 마음으로 온갖 법들을 헤아릴 수 있겠는가?
마치 어떤 사람이 날카로운 무기를 손에 지니고 있으면 적과 싸워도 막을 수 있지만, 만약 아무 것도 지니고 있지 않다면 강한 적에게 대항하여 오히려 해를 당하는 것과 같이, 나는 지금 아직 선정과 지혜를 제대로 닦지 않았는데, 어떻게 온갖 법의 실상(實相)을 헤아릴 수 있겠는가? 이는 도리에 맞지 않다.

또한 외도는 부처님의 제자가 아니기 때문에 의심을 낼 수 있지만, 나는 부처님의 제자인데 어떻게 부처님에 대해 다시 의심을 낼 수 있겠는가?
부처님께서는 항상 의심의 병통을 꾸짖으셨으니, 이것은 덮음[覆蓋]이고 막음[遮]이며 장애함[礙]이고 스스로를 속이는 법이다.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이미 자객이 올 것을 알았다면 마땅히 피해야 하는것처럼, 의심도 또한 이와 마찬가지이다.’

미혹되어 행하는 이는 지혜와 함께하려고 해도 여실하게 아는 지혜[實智]를 장애한다.

비유컨대 몸에 옴병[疥病]이 나서 그 부위를 긁으면 점차 널리 퍼져 몸이 훼손되고 가려움이 더욱 극렬해지나 훌륭한 의원이 약을 주면 옴이 저절로 낫는 것처럼, 수행하는 이도 이와 같아서 갖가지 법에 대해 의심하는 생각을 내면 일을 따라 이해하려 해도 의심이 점차 늘어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곧장 의심을 끊으면 의심이 생겨났다가 곧 사라지게 된다.

이와 같이 갖가지로 의심을 나무라니, 마땅히 신속하게 제거해야 한다.

수행하는 이는 이와 같이 사유하여 5개(蓋)를 제거하고 모든 선법(善法)을 모아 깊이 일심(一心)에 들어가 욕계의 번뇌를 끊고 초선정(初禪定)을 얻는다.

부처님께서 경전에서 말씀하시기를, “수행자가 탐욕의 악법과 불선법(不善法)을 떠나 각(覺)이 있고 관(觀)이 있으면,기쁘고 즐거워하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을 떠나 초선(初禪)에 들어간다”고 하셨다.

[문] 초선을 얻은 모습[相]은 어떠한가?

[답] 먼저 올바른 생각[正念]으로 5욕을 꾸짖어 그치게 하면 아직 초선의 경지에 이르지 않았더라도 몸과 마음이 즐겁고 온화하며 경쾌하고 부드러우며 몸에 광명이 있게 된다.

초선의 모습을 얻으면 계속해서 점차 더 뛰어나게 향상되어 색계(色界)의 4대(大)가 몸에 두루 가득해지기 때문에 온화하고 경쾌하며 부드럽고, 탐욕 등 악법(惡法)이나 불선법(不善法)을 떠나 일심의 선정 상태에 들기 때문에몸과 마음을 즐겁게 한다.

색계에서 색(色)을 만들어 광명의 모습이 있으니, 그러므로 수행자는 오묘한 광명이 몸의 안팎을 비추는 것을 볼 수 있다.

수행자가 이와 같이 마음[心意]이 점차 달라져 성낼 곳에서 성내지 않고 기뻐할 곳에서 기뻐하지 않으면 세간의 여덟 가지 법[八法]에 흔들리지 않고, 믿음․공경․부끄러워함이 점차 더 많이 증가하여 몇 배에 이른다. 의복이나 음식 등에 대해 탐착하지 않고, 단지 온갖 선한 공덕만을 귀하게 여기고 나머지는 천하게 여긴다.

천상의 5욕에 대해서도 오히려 마음이 얽매이지 않는데, 어찌 하물며 인간 세상의 깨끗하지 않은 5욕이겠는가?
초선(初禪)을 얻은 사람에게는 이와 같은 모습이 있다.

또한 초선을 얻었을 때는 크게 놀랄 정도로 마음이 기뻐지는데, 비유하면 가난한 이가 졸지에 보배 창고를 얻은 것과 같다.

마음으로 크게 기뻐하며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이른 밤이나 한밤중이나 늦은 밤에도 열심히 정진하여 고행하면서 초선의 도를 닦아 익혔는데 지금 과보를 얻었으니, 진실하여 헛되지 않구나.

그 오묘한 즐거움이 이와 같은데, 모든 중생들은 미혹되고 미련하며 어리석어서 5욕에 빠져 부정(不淨)하며 즐겁지 않으니 매우 불쌍하구나.’

초선의 즐거움이 몸의 안과 밖에 두루하니, 마치 물이 마른 땅을 적셔 안과 밖이 축축이 젖는 것과 같다.

욕계의 신분(身分)으로 받는 즐거움은 널리 두루할 수가 없으니, 욕계의 음욕과 성냄 등 온갖 불길이 몸을 태우기 때문이다.

초선의 연못에 들어가면 청량한 즐거움이 제일이어서 온갖 뜨거운 번뇌를 제거할 수 있으니, 마치 열기가 아주 지극할 때 시원한 연못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

이미 초선을 얻었으면 본격적으로 도문(道門)을 닦아 익힐 생각을 해야한다.

혹 다른 인연이 있을 수 있으니, 이른바 염불삼매나 부정자심관(不淨慈心觀)을 생각하는 것 등이다.

왜 그런가 하면, 이것을 행하면 생각의 힘으로 선정을 얻을 수 있고 점차 깊이 들어갈 수 있으며 근본적으로 관찰하는 능력이 배로 증가하여 청정하고 분명하게 헤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수행자는 초선을 얻은 다음에는 2선(禪)을 구하러 계속 정진해야 한다.

만약 유루도(有漏道)라면 2선의 변지(邊地)에서 각관(覺觀)을 싫어하니, 마치 욕계의 5욕과 5개(蓋)가 마음을 산란하게 하듯이 초선의 각관이 선정의 마음을 괴롭고 어지럽게 하는 것도 이와 같다.

만약 무루도(無漏道)라면 초선의 욕락(欲樂)을 여의고 곧 무루(無漏)의 초선을 수용하여 각관을 꾸짖어 나무란다.

[문] 초선의 번뇌[結使]가 마음을 어지럽힐 수 있다면, 무엇 때문에 단지 각관만을 말하는가?

[답] 초선의 번뇌를 각관이라 하니, 왜냐하면 선(善)한 각관으로 인하여 애착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초선의 번뇌를 각관이라고 하는 것이다. 처음으로 초선을 얻었을 때는 아직 나머지에 대한 집착이 없다.

또한 본래 일찍이 없었던 각관을 얻으면 매우 기쁘니, 매우 기쁘기 때문에 선정의 마음을 무너뜨리며, 선정을 무너뜨리기 때문에 마땅히 먼저 제거해야 한다.

또한 아주 깊은 2선(禪)의 선정에 들어가려고 하기 때문에 각관을 제거하니, 큰 이익을 위하여 작은 이익은 버려야 하는 것이다. 마치 욕계의 작은 즐거움을 버리면 큰 즐거움을 얻는 것과 같다.

[문] 단지 각관을 멸해야 한다고만 말할 뿐, 초선의 번뇌에 대해서는 왜 말하지 않는가?

[답] 각관은 곧 초선의 선한 각관이니, 초선의 애착[愛] 등을 또한 각관이라고 이름한다. 악한 각관은 2선(禪)의 도를 장애하므로 마땅히 멸해야 하고, 선한 각관도 수행자로 하여금 그 마음이 즐거움에 머물러 나아가지 못하도록 하므로 모두 마땅히 멸해야 한다.

곧 다시 생각해 보면, 악한 각관은 진짜 적(賊)임을 알 수 있으며, 선한 각관도 비록 친하고 선량한 것 같아도 이 역시 적이니, 우리의 큰 이익을 빼앗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나아가 이 두 가지 각관을 멸해야 한다.

각관이 괴롭고 어지럽게 하는 것이, 마치 어떤 사람이 매우 피로하여 편안하게 잠을 자려 해도 온갖 소리가 그를 괴롭고 어지럽게 하는 것과 같으니, 그러므로 수행자는 이 각관을 멸한 다음 2선(禪)을 구해야 한다.

비유컨대 바람이 불어 흙먼지가 깨끗한 물을 흐리게 하면, 얼굴을 들여다볼 수 없는 것처럼, 욕계의 5욕에 의해 혼탁해진 마음은 마치 흙먼지가 물을 흐리게 하는 것과 같고, 각관이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 것은 마치 바람이 물을 흔드는 것과 같다.

각관을 멸해야 안으로 청정함을 얻을 수 있으니, 각(覺)도 없고 관(觀)도 없는 선정의 상태에서 기쁨과 즐거움이 생겨 2선으로 들어간다.

[문] 2선(禪)은 어떤 모습인가?

[답] 경(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선(善)이든 무기(無記)이든 모든 각관을 멸하면 각관의 움직임이 없기 때문에 내심(內心)이 청정해진다. 마치 물이 맑고 바람이 불지 않아 파도가 일지 않으면, 별과 달과 모든 산이 모두 다 수면에 비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내심이 청정하면 이런 상태를 성스러운 묵연(黙然)이라고 한다.

3선(禪)과 4선(禪)도 비록 모두 묵연이지만 2선에서 최초로 얻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하는 것이다.

각관이라는 언어의 인연은 그 인연이 이때 처음으로 멸하기 때문에 묵연이라 이름하며, 이 선정이 내는 기쁨과 즐거움은 초선 상태의 기쁨과 즐거움보다 오묘하고 뛰어나다.

초선 때의 기쁨과 즐거움은 5욕을 떠남으로써 생기며, 여기서의 기쁨과 즐거움은 초선의 선정으로부터 생긴다.

[문] 2선에서 또한 초선의 번뇌[結使]를 떠난다면 왜 ‘떠남이 생긴다[離生]’고 말하지 않는가?

[답] 비록 다시 번뇌를 떠났더라도 다만 선정의 힘[定力]에 의지함이 많기 때문에 선정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또한 5욕을 떠나는 것은 곧 욕계를 떠나는 것을 말하지만, 초선을 떠나는 것은 아직 색계를 떠난 것이 아니니, 그러므로 ‘떠남이 생긴다’고 하지 않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들이 2선(禪)의 모습[相]이다.

수행자가 이미 2선을 얻었다면 다시 더 깊은 선정을 구해야 한다.

2선의 선정에서도 번뇌가 마음을 덮으니, 이른바 애(愛)․교만[慢]․사견(邪見)․의심[疑] 등이다. 이것들은 선정의 마음을 파괴하므로 2선의 적이며 3선문(禪門)을 막는다. 그러므로 마땅히 이러한 병통을 끊어 없애고 3선을 구해야 한다.

[문] 만약 그렇다면 부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기쁨[喜]을 떠나 그것을 버리면 3선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셨는가?

[답] 2선을 얻으면 크게 즐거워져 기뻐하는 마음[喜心]이 지나쳐 마음이 집착하게 된다. 그 기뻐함이 온갖 번뇌를 생기게 하기 때문에 기쁨이 번뇌의 근본이 된다.

또한 온갖 번뇌는 어떤 이익도 없으므로 마땅히 집착하지 말아야 하는데, 기쁨[喜]은 기쁘고 즐거우므로 매우 이익이 되는 것 같아서 그것에 머물러 집착하면 버리기가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기쁨을 버리면 3선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신 것이다.

[문] 5욕부정죄(欲不淨罪)의 기쁨은 마땅히 버려야겠지만, 이 기쁨은 깨끗하고 오묘하여 중생이 즐거워하는 바인데 무엇 때문에 버려야 한다고 말하는가?

[답] 앞서 대답했듯이 집착하는 인연을 낳으면 이는 죄문(罪門)이다.

또한 만약 기쁨[喜]을 버리지 않으면 더 훌륭하고 오묘한 공덕을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작은 것을 버리고 큰 것을 얻는 것이니, 어찌 허물이 있겠는가?
수행자가 3선을 구해 나아가려면 기쁨이 근심과 괴로움의 인연임을 알아서, 기쁘고 즐거워할 만한 것은 무상(無常)하여 일이 변하면 곧 근심과 괴로움을 생기게 함을 관해야 한다.

또한 2선의 기쁨은 거친 즐거움[麤樂]이니, 이제 거친 즐거움을 버리고 미세한 즐거움[細樂]을 구하려고 하기 때문에 2선의 기쁨을 떠나 더욱 깊은 선정에 들어가 그와는 다른 선정의 즐거움[定樂]을 구해야 한다.

어떻게 3선의 모습에서 기쁨을 멸할 수 있는가?
이 오묘한 기쁨을 버리고도 마음에 후회하지 않고 그 희열이 해롭다는 것을 알아야 하니, 비유컨대 어떤 사람이 자신의 아내가 나찰(羅刹)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곧 그 아내를 버리고도 후회하는 마음을 내지 않는 것과 같다.

기쁨은 미혹된 것이고 거친 법[麤法]이며 오묘하지 않다.

제3선에서 몸이 느끼는 즐거움[身樂]은 세간에서는 최상의 즐거움으로 이를 넘어서는 것이 없다. 성현들이 거쳐 간 바이며, 기쁨이 없는 즐거움[樂]을 받아들일 수도 있고 버릴 수도 있어서, 교묘한 지혜를 생각함으로써 몸이 곧 두루 3선을 받아들여 들어간다.

[문] 이는 일심(一心)으로 지혜[慧]를 생각함을 말한 것인데, 초선과 2선에서는 왜 말하지 않았는가?

[답] 제3선은 몸으로는 두루 즐거움을 받아들이고 마음으로는 법(法)을 버려서 마음으로 하여금 좋고 나쁨을 분별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일심으로 지혜를 생각한다고 말한 것이다.

또한 3선 가운데는 세 가지 허물이 있으니, 첫째는 마음이 점차 미약하게 사라지는 것이고, 둘째는 마음이 크게 움직이는 것이며, 셋째는 마음이 미혹되어 답답하게 되는 것이다.

수행자는 항상 일심으로 이 세 가지 허물을 생각해야 하니, 만약 마음이 사라질 때에는 정진의 지혜력으로 다시 마음을 불러일으켜야 하며, 만약 마음이 크게 움직이기 시작하면 곧 거두어들여 그치게 해야 하며, 만약 마음이 미혹되어 답답하게 되었을 때에는 마땅히 부처님의 오묘한 법을 생각하여 다시 마음이 즐겁도록 해야 한다.

항상 마땅히 지키고 보호하여 이 세 가지 마음을 다스려야 하니, 이것을일심으로 즐거움을 행하는 이가 제3선에 들어간다고 한다.

[문] 경전에 따르면 제3선 가운데에서 두 번[二時] 즐거움[樂]에 관해 말하였는데, 두 가지 즐거움이란 무엇인가?

[답] 앞에서는 즐거움을 향수함[受樂]을 말하였고, 뒤에서는 쾌락을 말하였다.

[문] 세 가지 즐거움이 있으니, 즐거움을 향수함[受樂]과 쾌락(快樂)과 괴로움이 없는 즐거움[無惱樂]인데, 어떤 즐거움이 있기에 3선을 제일가는 즐거움이라고 하는가?

[답] 세 가지 즐거움은 모두 아래 단계의 경지보다 오묘하고 뛰어나다. 다만 즐거움을 향수하는 것이 제일이니, 이것을 낙지(樂地)라고 이름하는 것은 결국에는 그것이 다하여 없어지기 때문이다. 나머지 두 가지 즐거움은 윗단계[上地]에서도 존재하기 때문에 이 가운데에서는 명칭으로 삼지 않은 것이다.

[문] 희락(喜樂)과 무희락(無喜樂)에는 어떤 차별이 있는가?

[답] 즐거움을 향수함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희근(喜根)이고, 둘째는 낙근(樂根)이다. 희근(喜根)과 희락(喜樂)은 초선과 2선에 속하고, 낙근(樂根)과 무희락(無喜樂)은 3선에 속한다.

또한 욕계의 초선에서 즐거움을 향수하는 경우에 거친 것을 낙근(樂根)이라 하고, 세밀한 것을 희근(喜根)이라 한다.

2선과 3선에서 즐거움을 향수하는 경우에는 거친 것을 희근이라 하고, 세밀한 것을 낙근이라 한다.

비유컨대 무더위가 지독할 때 깨끗하고 차가운 물로 손과 얼굴을 씻으면 이를 희(喜)라 하고, 아주 시원한 연못에 들어가 온몸을 목욕하면 이를 즐거움을 향수한다고 하는 것과 같다.

수행하는 이도 이와 같아서, 초선에서는 각관(覺觀) 때문에 즐거움이 몸에 두루하지 못하고, 2선에서는 크게 기뻐 놀라기 때문에 몸에 두루하지 못하나 3선에서는 장애가 없기 때문에 즐거움이 그 몸에 두루하니, 이를 일러 차이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또한 즐거움을 향수함에는 네 가지가 있다. 욕계에서 6식(識)이 상응하는즐거움을 희근이라 하고, 또한 낙근이라고도 한다. 초선에서 4식(識)이 상응하는 즐거움을 낙근이라 하고, 또한 희근이라고도 한다. 2선에서 의식(意識)이 상응하는 즐거움을 향수하는 것을 희근이라고 한다. 3선에서는 희(喜)를 떠나기 때문에 의식이 상응하여 즐거움을 향수하니, 이것을 낙근이라고 한다.

수행자가 이미 3선을 얻으면 앞의 세 가지 즐거움을 알게 되어, 일심으로 지키고 보호해서 항상 잊어버릴까 두려워하므로 이것이 곧 번뇌가 된다. 그러므로 즐거움이 다시 근심이 되기 때문에 마땅히 즐거움에서 떠나기를 구해야 한다.

비유컨대 사람이 부귀의 즐거움을 구하나 구할 때 이미 괴롭고, 얻었을 때 만족함이 없으면 다시 괴로움이 되며, 얻고 나서 그것을 지키는 것도 다시 괴로움이 되는 것과 같다.

어떤 사람은 즐거움을 구하는 것이 괴로움이 되므로 버리며, 혹은 즐거움을 얻음을 싫어하지 않지만 괴로운 것임을 깨닫고서 버리며, 혹은 이미 얻었으나 지키고 보호하는 것이 괴로움이 되기 때문에 버린다.

수행자가 즐거움을 염려하는 것도 이와 같아서, 초선의 즐거움을 구할 때는 각관이 마음을 산란하게 하므로 버리고, 2선에서는 크게 기뻐함[大喜]이 발동하기 때문에 버리며, 3선에서는 즐거움이 무상(無常)하여 지키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버리니, 그러므로 마땅히 이러한 즐거움을 버리고 4선(禪)의 안온(安隱)한 경지를 구한다.

[문] 수행자는 선정의 즐거움에 의지하여 욕락(欲樂)을 버리는데, 이제 무엇을 의지하여 선정의 즐거움을 버리는 것인가? 만약 선정의 즐거움을 버리면 어떤 이익을 얻는가?

[답] 수행자는 열반의 즐거움에 의지하여 선정의 즐거움을 버릴 수 있으니, 세 가지 이익을 얻기 때문이다. 이른바 아라한도와 벽지불도와 불도이니, 그러므로 선정의 즐거움을 버리고 4선의 안온한 쾌락을 행하며, 삼승도(三乘道)로써 마음을 따라 열반에 든다.

[문] 어떻게 제4선의 모습을 알 수 있는가?

[답] 부처님께서 4선의 모습을 말씀하신 것과 같으니, “만약 비구가 즐거움
도 끊고 괴로움도 끊으려면 먼저 근심과 기쁨을 멸해야 하며,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마음으로 청정함을 호념(護念)하면 제4선에 들어간다”고 하셨다.

[문] 3선의 즐거움을 끊음이 마땅히 그러하고, 욕락을 떠날 때 이미 괴로움을 끊었는데, 지금 무엇 때문에 다시 괴로움을 끊는다고 말하는 것인가?

[답]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끊음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별상(別相)을 끊음이요, 둘째는 총상(總相)을 끊음이다. 예컨대 수다원(須陀洹)이라면 도비지(道比智)로 일체 견해의 진리와 번뇌를 총체적으로 끊는다”고 하였으니, 이 일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괴로움도 끊고 즐거움도 끊으려면 먼저 근심과 기쁨을 멸해야 한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만약 욕계의 괴로움이라면 마땅히 먼저 괴로움을 끊어야 한다고 설하지, 근심과 기쁨을 먼저 끊어야 한다고 설하지는 않을 것이니, 그러므로 욕계의 괴로움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3선의 즐거움은 무상(無常)한 모습이기 때문에 괴로움을 낳으니, 그러므로 괴로움을 끊으라고 설한 것이다. 또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즐거움을 향수할 때에는 마땅히 이것이 괴로움[苦]임을 관해야 한다. 3선에서 즐거움이 생길 때 그것이 머물 동안은 즐겁지만 멸할 때는 괴롭다”라고 하신 것과 같다.

이렇기 때문에 즐거움도 끊고 괴로움도 끊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으니, 먼저 멸해야 하는 근심과 기쁨이란 욕계 중의 근심과 초선과 2선 중의 기쁨이다.

[문] 욕계 중에는 괴로움도 있고 근심도 있어서 욕계를 떠날 때 멸한다. 그런데 어째서 근심은 끊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괴로움을 끊어야 한다고는 말하지 않는가?

[답] 욕계를 떠날 때 비록 두 가지 일을 다 끊어서 근심의 뿌리[憂根]는 다시 이루어지지 않지만 괴로움의 뿌리[苦根]는 다시 이루어지니, 다시 이루어지기 때문에 멸한다고 말할 수 없다.

[문] 만약 3선 가운데 즐거움이 생겨서 그것이 머무를 때는 즐겁고 멸할때에는 괴롭다고 한다면, 지금 초선과 2선 중의 기쁨[喜]은 어찌 유독 그렇지 않다고 하는 것인가?

[답] 불경(佛經)에 따르면 3선을 떠날 때는 즐거움도 끊고 괴로움도 끊지만 근심과 기쁨을 멸하는 일은 없다고 말씀하셨으며, 초선과 2선에서는 이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문] 부처님께서는 무슨 인연으로 이런 말씀을 하시지 않았는가?

[답] 3선 가운데 즐거움은 삼계에서 향수하는 즐거움 가운데 가장 오묘하여 마음이 집착하는 바이니, 그 집착 때문에 그것의 무상함이 괴로움을 생기게 한다. 기쁨[喜]은 거칠기 때문에 몸에 두루하지 못하나 비록 다시 잃더라도 크게 근심을 생기게 하지 않으니, 이렇기 때문에 불경에서 설하지 않으신 것이다.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다[不苦不樂]는 것은 제4선 가운데서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것을 향수하는 것을 말한다. 버린다는 것은 3선의 즐거움을 버리고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것을 행하여 향수하더라도 기억하거나 후회하지 않는 것이다.

청정함을 생각한다는 것은 근심․기쁨․괴로움․즐거움 등 네 가지를 멸하기 때문에 청정함을 생각하는 것이다.

[문] 앞의 세 선(禪)에서는 청정함을 말하지 않았는데, 왜 제4선 가운데서만 유독 청정함을 말하는가?

[답] 초선에서는 각관이 마음을 어지럽히기 때문에 청정함을 생각할 수 없으니, 비유컨대 드러난 곳에서는 바람 속에서 등불을 켜면 비록 기름심지가 있더라도 바람이 불기 때문에 밝게 비출 수 없는 것과 같다.

2선 가운데서는 비록 일식(一識)이 거두더라도 기쁨[喜]이 크게 발동하기 때문에 선정의 마음이 산란해지니, 그러므로 청정함을 생각한다고 이름할 수 없다.

3선 가운데서는 즐거움[樂]에 집착하여 마음이 이 선정을 많이 어지럽게 하기 때문에 청정함을 생각한다고 말할 수 없다.

4선 가운데서는 이러한 일이 모두 없기 때문에 청정함을 생각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또한 아래 단계[下地]에서는 비록 선정의 마음이 있더라도 숨을 내쉬고 들이쉬고 하기 때문에 마음을 거두기가 어렵지만, 이 4선 가운데서는 숨을 내쉬거나 들이쉬는 일이 없기 때문에 마음이 쉽게 거두어지니, 쉽게 거두어지기 때문에 청정함을 생각하는 것이다.

또한 제4선을 진선(眞禪)이라고 이름하며, 나머지 세 선(禪)은 방편인 사다리이다. 이 제4선은 비유하면 산꼭대기와 같고, 나머지 세 선정은 마치 산에 난 길과 같다.

그러므로 제4선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움직이지 않는 곳[不動處]”이라고 하셨으니, 선정의 움직임이 없는 곳이기 때문에 안온하고 순조로운 곳[安隱調順之處]이라고 한다.

이것이 제4선의 모습이니, 비유컨대 말[馬]을 잘 길들이면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것과 같다.

수행자가 이 제4선을 얻어 4무량심(無量心)을 행하고자 하면 생각하는 대로 쉽게 얻을 수 있고, 4념처(念處)를 닦고자 하면 쉽게 닦을 수 있으며, 4제(諦)를 얻고자 하면 어렵지 않게 빨리 얻을 수 있고, 4무색정(無色定)에 들어가고자 하면 쉽게 들어갈 수 있으며, 6신통[通]을 얻고자 하면 그것을 쉽게 구할 수 있으니, 왜냐하면 제4선 가운데서는 괴롭지도 않고즐겁지도 않으며, 생각을 버려 청정하고, 순조롭고 부드럽게 마음을 따르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비유하여 말씀하시길, “금을 다루는 기술자는 금을 녹여 법에 맞게 잘 제련하여 마음대로 그릇을 만들되 이루지 못하는 것이 없다”라고 하신 것과 같다.

[문] 수행자는 어떻게 자심(慈心)이 한량없음을 얻을 수 있는가?

[답] 수행자는 4선을 의지하고 나서 생각하되 한 성(城)의 중생들이 즐거움을 얻도록 소원하며, 이와 같이 하나의 국토, 하나의 염부제(閻浮提)․사천하(四天下)․소천국토(小千國土)․이천국토(二千國土)․삼천대천국토(三千大千國土) 및 시방의 항하의 모래 수처럼 많은 한량없고 가없는 중생들에게 자비심을 두루 덮어 모두 즐거움을 얻기를 원한다.

비유컨대 수겁(水劫)이 이를 때는 물을 사라지게 한 불구슬[火珠]이 소멸되어 다시 나타나지 않으며, 대해(大海) 용왕의 마음이 크게 움직여서 그 생각으로부터 물이 생겨 바다로 흘러나와 가득 차 넘치고, 하늘에서 단비가 내려 두루 천하를 가득 채우면, 이때 천지가 가득 차 넘쳐, 차서 넘치지 않는 곳이 없는 것과 같이, 수행자도 또한 그러해서 대자(大慈)의 물로 성냄을 멸하고 자심(慈心)을 사라지게 한 불구슬을 소멸시키며, 자심의 물이 넘쳐흘러서 점점 광대해져 한량없고 가없는 중생들에게 두루 이르러 모두가 그 윤택한 은혜를 입되 항상 그 자심의 물이 흘러나와 끊이지 않으니, 혹 설법하는 것을 들으면 자심이 더 늘어난다.

비유컨대 큰비가 두루 널리 미치지 않음이 없듯이, 수행자는 자심으로 중생들을 생각하여 중생들로 하여금 세간의 청정한 즐거움을 얻게 하며, 또한 얻은 선정의 쾌락을 중생들에게 제공하고, 또한 열반으로 괴로움이 다한 즐거움과 나아가 모든 부처님의 제일가는 진실한 즐거움을 중생들에게 주기를 원한다. 그리고 자심의 힘이 있기 때문에 시방의 육도중생(六道衆生)이 즐거움을 받지 않음이 없다는 것을 모두 안다.

[문] 아비담(阿毘曇)에서 말하기를, “자삼매(慈三昧)가 무엇인가 하면, 일체 중생을 관하여 즐거움을 향수하는 것을 모두 보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또 경에서 설하기를, “자심삼매(慈心三昧)란 두루 시방에 가득한 중생들이모두 즐거움을 향수하는 것을 아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어떻게 단지 중생들로 하여금 즐거움을 얻도록 하기를 원한다고만 말하는가?

[답] 자심을 처음 닦아 익힐 때는 즐거움을 얻도록 원하는 정도이지만 자심삼매에 깊이 들어가고 나면 중생들이 즐거움을 향수하지 않음이 없다는 것을 모두 알게 된다.

비유하면 나무를 비벼 불이 나올 때 처음에는 가늘고 부드러운 건초를 태우지만 불기운이 점차 커지면 젖은 나무와 산림을 일시에 함께 태우는 것처럼, 자심도 이와 같아서 처음 들어가 관할 때는 괴로움에 처해 있는 사람들이 즐거움을 향수하도록 바라지만 자심의 힘이 점차 성숙하면 중생들이 즐거움을 얻는 것을 모두 알 수 있다.

[문] 중생은 진실로 얻을 것이 없으니, 중생들이 즐거움을 얻는 것을 모두 알 수 있다는 것이 어찌 뒤바뀐 생각이 아니겠는가?

[답] 선정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제법(諸法)의 실상(實相)을 관하는 것이요, 둘째는 법을 관하여 이용하는 것이다.

비유컨대 진주(眞珠)를 다루는 기술자는 첫째로 진주의 모양이 귀한지 흔한지 그리고 좋은지 나쁜지를 잘 알며, 둘째로 잘 가공하여 이용하는데 어떤 이는 그 모양은 잘 알지만 가공해 이용할 줄 모르고, 혹 어떤 이는 가공해 이용할 줄은 알지만 그 모양을 잘 모르며, 혹 어떤 이는 모양도 잘 알고 가공해 이용할 줄도 잘 아는 것처럼, 수행자도 이와 같아서 현성(賢聖)으로서 욕심을 떠나지 못한 이는 법상(法相)과 4진제(眞諦) 등을 관할 수는 있으나 그것들을 이용하지는 못하니, 4무량(無量)을 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범부가 욕심을 떠나 여러 공덕을 행한다면 그것들을 이용할 수 있으니, 4무량심(無量心)을 생각할 수는 있으나 제법의 실상을 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모두 갖추어 해탈한 아라한 등은 제법의 실상을 관할 수도 있고, 선정을 갖추었기 때문에 4무량심을 생각할 수도 있다.

4무량이란 해탈을 얻는 법이니, 그것을 이용하기 때문에 뒤바뀐 것이 아니다.

또한 불법에는 진실로 어떤 중생도 존재하지 않는데, 어찌하여 괴로움은진실하고 즐거움은 뒤바뀐 것이라고 관하는가?
이른바 뒤바뀌었다는 것은 중생이 존재하지 않는데 아상(我相)에 집착하여 항상하거나 무상(無常)하다거나 끝[邊]이 있다거나 끝이 없다고 여기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뒤바뀐 것이다.

자심(慈心)을 행하는 사람은 중생이 가명임을 아니, 마치 바퀴 등이 합해져서 그것을 수레라고 이름하는 것과 같다. 이런 까닭에 수행자는 자심이 청정하면 뒤바뀌지 않는다.

또한 만약 중생이 존재하지 않는데 실재한다고 여기면, 중생이 즐거움을 향수한다는 이것도 마땅히 뒤바뀐 것이다. 중생이 존재한다거나 중생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기는 것은 모두 치우친 견해[邊見]이니, 단지 중생이 존재한다고 여기는 것만이 뒤바뀜인 것은 아니다.

또한 자심삼매의 힘 때문에 수행자는 중생들이 즐거움을 얻지 않음이 없음을 모두 아니, 마치 일체 모든 중생들의 마음속에 들어가 살펴보는 것과 같다. 선정의 힘 때문에 반연하는 경계에서 청색을 변화시켜 적색으로 만들 수도 있는데, 하물며 중생들에게 모두 즐거워하는 모습[樂相]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겠는가?
예컨대 귀하거나 천하거나 가난하거나 부유한 사람이거나 날거나 기어다니는 짐승에 속한 것들이거나 각자 즐거움이 있고 서로 불쌍히 여기니, 귀한 사람에게 있는 근심은 가난한 이에게는 없고 가난한 사람에게 있는 근심은 귀한 이에게는 없다.

[문] 다른 세계[道]는 그럴 수 있어도 지옥은 어찌 그럴 수 있는가?

[답] 지옥의 중생에게도 또한 즐거운 면[樂分]이 존재한다. 멀리서 칼산이나 재[灰]가 흐르는 강을 보고는 나무나 물이라고 여겨 즐거운 생각을 내며, 나무 위에 있는 여인의 모습을 보면 또한 즐거운 생각을 낸다. 또 자기의 마음이 뒤바뀌었기 때문에 자신의 몸을 사랑하고 즐거워하니, 만약 옥졸이 죽이려 할 때는 도망치며 슬피 울면서 놓아 달라고 간청하다가, 만약 그대를 사면해 주겠노라고 말하면 이런 고통을 벗어날 수 있어서 마음이 또한 즐거워진다. 이와 같은 것 등이 모두 즐거운 면이다.

또한 신통력이 있기 때문에 자비의 마음을 행해서 갖가지로 교화하여 중생들로 하여금 즐거움을 얻게 하고, 혹은 소유하고 있는 것을 그들에게 맞게 제공해 주며, 몸과 입으로 자비행을 베풀어 그들이 이롭게 돕는다.

마치 모든 불보살이 깊은 마음으로 중생들을 애념(愛念)하여 모든 악취(惡趣)를 무너뜨려 진실로 중생들로 하여금 여러 가지 즐거움을 얻게 하는 것과 같으니, 이렇기 때문에 단지 원하는 것을 제공해 줄 뿐만 아니라, 또한 진실로 중생들로 하여금 즐거움을 얻게 한다.

[문] 자심(慈心)을 행하는 이는 어떤 공덕을 얻는가?

[답] 자심을 행하는 이에게는 온갖 악들이 힘을 발휘하지 못하니, 마치 굳건히 지키고 잘 방비하면 외적이 해치지 못하는 것과 같다. 만약 자심을 행하는 이를 괴롭히거나 해치려고 하면 오히려 자신이 환난을 당하게 되니, 마치 어떤 사람이 손바닥으로 창을 막으면 손바닥만 손상될 뿐 창은 전혀 손상되지 않는 것과 같다.

다섯 가지 삿된 말도 그 자심을 파괴할 수 없으니, 그 다섯 가지란 첫째는 거짓말[妄言]을 하는 과실이고, 둘째는 나쁜 말[惡口]을 하는 과실이며, 셋째는 때에 적절하지 않는 말을 하는 과실이고, 넷째는 악한 마음으로 말하는 과실이며. 다섯째는 이익되지 않는 말을 하는 과실이다.

비유하면 대지(大地)를 파괴할 수 없는 것처럼, 갖가지 성냄과 괴롭힘과 비방함 등으로도 자심을 행하는 이를 훼손할 수 없다.

비유하면 허공이 해를 입지 않듯이, 자심은 온화하고 부드럽기가 마치 하늘의 옷[天衣]과 같다.

또한 수행자가 자심에 들면 호랑이나 이리 등 악독한 짐승이나 뱀이나 도롱뇽류에 속하는 것들이 해치지 못하며, 감옥이나 성 안에 들어가도 상해를 입지 않는다.

자심을 행하는 이는 이와 같이 한량없는 공덕을 얻는다.

[문] 자심의 덕이 이와 같다면, 무엇을 자심의 법[慈法]이라고 하는가?

[답] 중생들을 애념하여 그들이 즐거움을 향수하는지를 모두 아는 이 마음이 상응하는 법은 행음(行陰)에 속하므로 자심의 법이라 이름한다. 이것은 색계에 매여 있기도 하고, 매여 있지 않기도 하며, 심수법(心數法)과 심법(心法)이 함께 생긴다.

심법을 따라 행하면 색법이 아니며 업이 아니다. 업이 상응하면 업이 함께 생겨서 업행(業行)을 따르니, 과보로 생긴 것이 아니다.

이것은 마땅히 닦아야 하니 닦을 수 있으며 닦아 행할 수 있고, 마땅히 증득해야 하니 몸으로 증득하고 지혜[慧]로 증득한다.

사유가 끊어지기도 하고 끊어지지 않기도 하며, 각(覺)과 관(觀)이 존재하기도 하고 각은 존재하지 않고 관만 존재하기도 하며 각이나 관이 모두 존재하지 않기도 하며, 기쁨[喜]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며, 숨을 내쉬고 들이쉬는 일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며, 현성이기도 하고 범부이기도 하며, 낙수(樂受)와 상응하기도 하고 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와 상응하기도 하니, 도품(道品)이 아니다.

먼저 모습[相]을 반연한 후에 법을 반연하니, 4선(禪)에서는 또한 그 밖의 다른 경지가 있으며 한량없는 중생을 반연하기 때문에 ‘무량’이라고 이름한다.

청정하기 때문이고, 자애로운 생각을 하기 때문이며, 중생을 가엾이 여기고 이익되게 하기 때문에 범행범승(梵行梵乘)이라고 이름한다.

능히 청정한 세간[梵世]에 이를 수 있으므로 청정한 도[梵道]라고 이름하니, 이는 과거의 모든 부처님께서 항상 행하신 도이다.

[문] 어떻게 자심(慈心)을 닦을 수 있는가?

[답] 수행자라면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내가 수염과 머리를 깎은 것은 호화롭게 꾸미고 사는 데 뜻을 두지 않고 교만한 모습을 없애기 위함이니, 이에 걸맞으려면 마땅히 자심(慈心)을 행해야 한다. 지금 물들인 법복을 입고 있으니 마땅히 자심을 행하여 마음이 물들지 않게 하며, 다른 사람이 제공하는 음식을 먹었으니 보시를 받은 공덕이 헛되지 않게 해야 한다. 경전에서는 설하기를, (만약 어떤 비구가 점차적으로 자심을 닦으면 곧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와 같이 다른 사람의 신심 있는 보시[信施]를 먹음이 헛되게 하지 않으리라.’

또한 만약 출가하였거나 집에서 수행하는 이라면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자심의 힘 때문에 악한 세간에서도 안온하고 근심이 없으며, 법을 파괴하는 무리 가운데서도 오직 법을 따라 행하여 번뇌의 열기로부터 마음이 청량할 수 있도록 하니, 마치 마을 가까이에 청량한 연못이 있는 것과 같다. 또한 자심을 행하는 힘 때문에 원수가 독으로 해치려 해도 해칠 수 없으니, 마치 가죽신을 신고 가시를 밟으면 다치지 않는 것과 같다.’

수행자가 욕계에 처해 있어도 그곳의 많은 성냄과 분노의 해침이나 다툼과 원망의 독(毒) 등 갖가지 모든 해로움이 자심(慈心)의 힘 때문에 그를 손상시켜 무너뜨릴 수 없으니, 비유컨대 역사(力士)가 금강 갑옷을 입고 날카로운 무기를 가지고 있으면 비록 큰 진영[陣]에 들어오더라도 그를 다치게 하거나 무너뜨릴 수 없는 것과 같다.

또한 이 자심은 이익되게 할 수 있으니, 세 종류의 사람을 이익되게 한다. 범부로서 자심을 행하면 온갖 성냄을 없애고 한량없는 복을 얻어 깨끗한 세계에 태어날 수 있으니, 세간의 복덕으로서 이를 넘어서는 것은 없다. 성문이나 벽지불을 구하는 이는 욕계의 많은 성냄을 자심의 힘으로 파괴할 수 있으며, 그 밖의 번뇌도 또한 그것을 따라 멸하니, 따라서 욕계를 떠날 수 있고 점차로 삼계를 벗어날 수 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자심이 모두 갖추어지면 7각(覺)을 닦는데 가까워지며 대승의 마음을 발하여 중생을 제도하는 데에도 자심이 그 근본이 된다”고 하신 것과 같이, 이와 같이 자심은 세 종류의 사람에게 한량없는 이익이 된다.

또한 자심을 익히는 초문(初門)에는 열여섯 가지 행(行)이 있어 신속하게 자심을 얻게 하고 또한 견고하게 하며, 또한 항상 수행하게 한다.

첫 번째는 계(戒)를 청정하게 간직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마음이 후회하지 않는 것이다. 세 번째는 선법(善法) 가운데서 기쁨을 내는 것이고, 네 번째는 마음이 흔쾌하고 즐거운 것이다. 다섯 번째는 5정(情)을 거두어 수호하는 것이고, 여섯 번째는 선교방편(善巧方便)의 지혜[慧]를 생각하는 것이다. 일곱 번째는 몸이 떠나고 마음이 떠나는 것이고, 여덟 번째는 함께 행하고 함께 머무는 것이다. 아홉 번째는 듣든 말하든 자법(慈法)을 따르는 것이고, 열 번째는 다른 사람을 괴롭고 어지럽게 하지 않는 것이다. 열한 번째는 음식을 먹을 때 스스로 절제할 줄 아는 것이고, 열두 번째는 잠을 적게 자는 것이다. 열세 번째는 말을 줄이는 것이고, 열네 번째는 몸의 네 가지 위의가 안온하여 마음에 맞는 것이다. 열다섯 번째는 필요한 사물이 뜻에 따라 부족함이 없는 것이고, 열여섯 번째는 모든 법행(法行)을 희롱하지 않는 것이니, 이 열여섯 가지 법은 자심삼매(慈心三昧)를 돕는다.

비심(悲心)이란 중생의 괴로움을 관하는 것이다. 예컨대 지옥․아귀․축생․세간의 죄수[刑徒]․기아․추위․질병의 괴로움 등에 대해 괴로움의 모습[相]을 취하기 때문에 비심이 더욱 증가하며, 나아가 즐거워하는 사람에게서도 모두 그 괴로움을 본다.

[문] 어떻게 즐거움을 괴로움으로 여기는가?

[답] 즐거움은 무상(無常)하고 즐거움은 만족할 수 없는 것이며, 인연을 쫓아 생기는 것으로 생각생각에 생겨났다 소멸한다. 머물 때가 없으니, 그렇기 때문에 괴롭다.

또한 욕계의 하늘에서는 즐거움을 향수하더라도 마치 미치고 취한 것처럼 따로 아는 것이 없어서 죽을 때가 되서야 깨달으며, 색계와 무색계의 중생은 깊은 선정에 대해 맛을 들이지만 마음속으로 집착하여 목숨이 다하면 지은 업의 인연에 따라 다시 과보를 받으니, 이와 같은 중생들에게 어떤 즐거움이 있겠는가?
지옥 등의 3악도(惡道)는 옛날에 머물던 처소이고, 천상과 인간 세계는 마치 손님이 머무는 것과 같이 잠깐 동안 머물러 쉬는 것이니, 이러한 인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단지 고제(苦諦)를 설하셨을 뿐 낙제(樂諦)는 설하지않으셨다.

그러므로 일체 중생에게는 괴로움 아닌 것이 없는데, 중생들은 가엾게도 진실로 괴로움을 알지 못하고 뒤바뀐 가운데 즐거운 생각을 내어 금세나 후세에 갖가지 근심과 번민을 받으면서도 싫증내는 마음이 없다.

비록 잠시 괴로움을 벗어났다가도 괴로움이 다시 반복되니, 즐거움을 구하는 것은 온갖 괴로운 일을 짓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사유하여 중생들이 모두 괴로움을 받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비심(悲心)이다.

그 밖의 비심의 의미는 󰡔마하연론(摩訶衍論)󰡕의 4무량 가운데서 설한 것과 같다.

희심(喜心)은 수행하는 사람이 모든 법의 실상을 알아 괴로운 중생들을 모두 즐거운 모습으로 관하고, 즐거운 중생들을 모두 괴로운 모습으로 관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제법은 정해진 모습이 없이 마음의 힘에 따라 바뀌니, 만약 모든 법이 정해진 모습이 없다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성취하는 일도 오히려 어렵지 않은데, 하물며 그 밖의 도(道)이겠는가?
뜻에 따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마음에 기쁨[歡喜]이 생긴다.

또한 수행자는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내가 조그만 지계와 정진 등을 바탕으로 하여 문득 욕심을 여의었으며, 모든 선정의 한량없는 공덕에 이르렀다.’

모든 선한 공덕을 생각하기 때문에 마음으로부터 환희가 생기니, 비유컨대 장사꾼이 소량의 물품을 간직하고 있다가 백천 배의 이익을 얻으면 마음속으로 크게 기뻐하는 것과 같다.

다시 이런 생각을 해야 한다.

‘이와 같은 법의 이로움은 모두 부처님의 은혜를 말미암는다. 부처님께서는 스스로 도를 얻으시어 사람들에게 베풀어 설해 주셨으니, 가르침을 따라 수행하면 이와 같은 이익을 얻는다.’

이때 마음으로 시방 모든 부처님의 몸은 금색이고 상호(相好)가 장엄되어 있으며, 10력(力) 등 한량없는 공덕의 법신이라는 것을 생각한다. 이렇게부처님을 생각함으로써 마음속에 환희가 생긴다.

또한 불법(佛法)은 96종류의 도(道) 가운데 가장 으뜸이며, 모든 괴로움을 멸할 수 있고, 항상하는 즐거움[常樂]으로 나아갈 수 있으므로 마음속에 환희가 생긴다.

또한 세 가지로 불법(佛法)을 분별하면, 첫째는 열반의 한량없고 항상한 모습이니 이것은 끝내 파괴되지 않는 법이며, 둘째는 열반의 방편과 여덟 가지 곧고 성스러운 도(道)이며, 셋째는 12부경(部經)으로 여덟 가지 도를 펼쳐 보이는 것이다. 이와 같이 법을 생각하면 마음속에 환희가 생긴다.

또한 이와 같은 실상을 잘 알면 정도(正道)를 행하고 온갖 잘못된 길을 떠날 수 있으니, 이것이 바로 바른 길을 가는 사람이다. 이른바 불제자의 무리는 일체의 무리들 가운데 가장 으뜸이다.

스스로 사유하여 말하기를, “나는 이미 이 무리들 가운데 있으니, 이들은 나의 진실한 도반이며 그들은 나를 이익되게 한다”라고 한다.

이러한 인연 때문에 마음속에 환희가 생기며, 중생들이 모두 환희하기를 원하며, 선정의 힘이 계속 이루어지기 때문에 중생들이 모두 이 기쁨을 얻는다는 것을 다 알 수 있다.

사심(捨心)이란 수행하는 사람이 만약 약간 느슨해지거나 치우쳤다면 마음을 잠시 그쳐 쉬는 것이니, 다만 중생을 한가지 모습[一相]으로 관하고 괴로움과 즐거움을 관하지 않는다.

기뻐하는 모습[喜相]이 마치 어린아이와 같아서, 만약 항상 사랑하고 아끼면 교만하고 방자해져서 그르치게 되고, 만약 항상 괴로움이 절박하면 두렵고 무서워 몸이 쇠약해지니, 그러므로 어떤 때는 놓아 버리고 애착하거나 증오하지 않는다.

수행하는 이도 이와 같아서, 만약 항상 자심(慈心)과 희심(喜心)을 행하면 방일하게 되니, 이는 기쁨과 즐거움이 많기 때문이며, 만약 항상 비심(悲心)을 행하면 걱정이 생기니, 괴로움에 대해 많이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심(捨心)을 행하여 괴로움이나 즐거움이 지나치지 않게 해야 한다.

또한 수행자가 도(道)에 들어가 선정의 맛을 얻으면 중생들을 분별하여 좋다느니 나쁘다느니, 선량하다느니 선량하지 못하다느니 하게 되어, 선량한 사람에 대해서는 공경하고 사랑하며 아끼고, 선량하지 못한 사람에 대해서는 가벼이 여겨 교만하게 군다.

마치 사람이 아주 진귀한 보배를 얻으면 가난한 사람을 가벼이 여겨 교만하게 굴고, 보배를 간직한 사람을 보면 공경하고 애념하는 것과 같으니, 이 두 가지 모습을 깨뜨리기 위하여 사심(捨心)을 행한다.

경에서 설하기를, “자심을 닦아 행하면 성냄을 파괴하여 없앨 수 있고, 비심을 닦아 행하면 중생의 번뇌를 없앨 수 있으며, 희심(喜心)을 닦아 행하면 근심걱정을 없앨 수 있고, 사심(捨心)을 닦아 행하면 증오와 애착을 없앨 수 있다”라고 하였으니, 다만 중생들을 관하여 해탈을 얻게 하기 위해 마음을 따라 짓는 것이다. 마치 사람이 숲을 관하고 나무를 관하지 않는 것과 같다.

또한 만약 세상 사람들이 추울 때는 따뜻함을 얻고 더울 때는 시원함을 얻어서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이것을 즐거움[樂]이라 하고, 벼슬자리를 얻었거나 보배가 감추어진 곳을 찾으면 노래 부르고 춤추며 희롱하고 웃고 노는 것을 기쁨[喜]이라 한다. 만약 이러한 일들을 잃어버렸다면 이를 근심과 괴로움[憂苦]이라 하고, 만약 이상의 세 가지가 없다면 이를 버림[捨]이라고 한다.

수행자도 또한 이와 같아서, 네 가지 마음[四心]을 갖추면 자신의 몸으로 즐거움을 향수하고 중생들도 그러하기를 원하며, 마음이 이미 부드러워져 모든 중생들이 모두 이 즐거움을 얻는 것을 안다.

또한 여러 천상 세간의 부귀함을 보고 즐거운 모습을 취하여 중생들에게까지 미치기를 원하며, 마음이 이미 부드러워져 일체 중생이 다 이 즐거움을 얻는 것을 안다.

자심을 닦아 행할 때는 마음에 큰 기쁨[喜]이 생기며, 이 큰 기쁨을 중생들에게도 주고자 한다.

혹은 선정으로부터 일어나 불(佛)․법(法)․성중(聖衆)에게 예를 올리고 찬탄 공양하여 또한 마음에 기쁨을 얻어서 중생들에게도 주고자 하며, 그리고 외부의 기쁨을 취하여 중생들에게 주기를 원한다.

어떤 때는 스스로 괴로움과 늙음․병듦․걱정․번민․배고픔․추위․곤경의 고통을 보아서 중생들로 하여금 이런 고뇌에서 벗어나게 한다.

자신이 분별하여 헤아려 보건대, 마음속으로 인내함이 고뇌스런 일인데, 어찌 하물며 중생들이 지혜도 없이 갖가지 고통을 참아낼 수 있으며, 어찌 괴롭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비심을 낸다.

또한 외부의 사람들이 형벌을 당하거나 채찍으로 매질을 당하는 것을 보거나, 또는 경전에서 설하는 악도의 고통을 들으면, 이런 괴로움의 모습을 취해 일체가 모두 괴로움을 관하여 비심을 낸다.

사심(捨心)이란 자기 스스로 증오하거나 애착하는 마음을 버리고 또한 중생들에게도 증오나 애착이 없다고 관하는 것이며, 외부의 중생들을 취하여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제4선(禪)으로부터 나아가 비유상비무상처(非有想非無想處)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욕계의 괴로움도 없고 즐거움도 없는 때에 미쳐서도 이런 모습을 취한 다음 일체 중생들도 또한 모두 이와 같이 괴로움도 없고 즐거움도 없음을 관한다.

또한 만약 귀인에게 오직 아들이 하나만 있다면 그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이 매우 중하여서 항상 자애롭게 보살피고 세간의 온갖 즐거움을 모두 얻게 하며, 스스로 얻을 수 있는 것도 모두 아들에게 줄 것이다. 그 아들이 혹시 여러 가지 근심걱정을 만나면 아버지는 매우 가엾다는 생각[悲念]을 내며, 만약 아들이 그런 상황으로부터 벗어나면 그 아버지는 크게 기뻐할 것이니, 마음속에 환희가 생긴 다음에는 곧바로 놓아 버리고 아들에게 맡겨 스스로 성장하도록 하고 아버지는 휴식을 취한다.

수행자도 이와 같아서, 4무량심 가운데서 중생들을 보기를 마치 자식처럼 생각하여,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즐거운 일을 따라 세간의 갖가지 즐거움을 취하여 중생들이 그것을 얻기를 원하며, 자심(慈心)과 선정의 힘 때문에 일체 모든 것이 즐거움이라는 것을 안다.

수행하는 사람은 자심으로부터 일어나, 만약 중생이 온갖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을 보면 이런 모습을 취하고 나서 비심을 낸다.

비심의 힘 때문에 중생들이 모두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을 알고, 고통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안 다음에는 중생들이 이런 고통을 벗어나기를 원한다.

비삼매(悲三昧)로부터 일어나, 만약 중생이 즐거움을 향수하고 도를 얻어열반에 들어가는 것을 알면 이런 모습을 취하고 나서 희심(喜心)을 낸다.

중생들이 얻도록 하기 위하여 자신이 그것을 얻어 심식(心識)이 유연해져 중생들이 모두 환희를 얻는 것을 안다.

이 선정으로부터 일어나 중생들이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으며, 근심하지도 않고 기뻐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알며, 이런 모습을 취하고 나서는 사심(捨心)을 내어 중생들이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으며, 근심하지도 않고 기뻐하지도 않기를 원한다.

사삼매[捨定]를 잘 닦은 힘 때문에 중생들이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으며, 근심하지도 않고 기뻐하지도 않으며, 번뇌의 열기에서 벗어난다는 것을 다 안다.

또한 만약 중생들에게 여러 허물이 있어도 놓아두고 책문(責問)하지 않으며, 만약 그를 공경하고 애착하여도 기쁨으로 여기지 않으니, 이것이 바로 사심(捨心)이다.

이와 같은 등의 4무량의 뜻은 마하연(摩訶衍:大乘) 가운데서 설하고 있는 것과 같다.

댓글 달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항목은 *(으)로 표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