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설해의보살소문정인법문경(佛說海意菩薩所問淨印法門經) 제07권

불설해의보살소문정인법문경(佛說海意菩薩所問淨印法門經) 제07권

부처님께서 다시 사리자에게 말씀하셨다.

“마치 기바(耆婆)란 의왕(醫王)이 온 땅의 모든 초목을 약 아닌 것이 없다고 보는 것처럼,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하는 보살도 그와 같이 모든 법을 보리 아닌 것이 없다고 보아야 한다. 또 사리자여, 마치 아수라왕(阿修羅王)이 비록 세력이 있다 하여도 저 해와 달의 운행하는 길을 장애할 수 없는 것처럼, 일체의 마군들도 그와 같이 제아무리 세력을 지니었다 하여도 부지런히 수행 정진하는 보살의 그 보리 닦는 길을 장애할 수 없느니라.

또 사리자여, 마치 물질의 세계[色界]의 모든 천자(天子)들이 소유한 그 궁전이 허공에 의지하여 머무는 것처럼, 매우 깊이 수행하는 보살도 그러하여 모든 법을 수행함이 저 허공의 평등하고 걸림 없음과 같으므로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과를 얻노라.

또 사리자여, 마치 세간의 모든 그릇이 이미 완성된 뒤에는 그 크고 적음에 따라 그릇 속의 공간의 한계가 나타나지만, 저 허공은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는 것처럼, 보살도 그와 같이 모든 착한 힘을 닦아 성취한 뒤에는 그 깊고 얕음에 따라 불법을 받아들이지만, 불법은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는다.

사리자여, 또 마치 역사(力士)가 온갖 힘을 다해 화살(箭)을 당겨 허공을 쏘아도 마침내 허공의 그 끝에 이를 수 없는 것처럼, 보살도 그와 같이 불법에 대해 그 믿음과 이해를 다하여도 불법의 끝을 얻을 수 없다. 사리자여, 또 마치 세간의 질그릇[陶器]이 아직 완성되기 전에는 그 그릇의 명칭을 정할수 없는 것처럼, 보살도 그와 같이 보리의 선근이 아직 성숙하기 전에는 그 바라밀의 명칭을 정할 수 없느니라.

다시 사리자여, 또 마치 어떤 사람이 전륜성왕을 보고 난 뒤에는 다시 다른 나라의 작은 왕들을 보고 싶지 않은 것처럼, 보살도 그와 같이 큰 법왕을 보고난 뒤에는 다시 저 성문·연각을 보고 싶지 않기 마련이다. 또 마치 소 발자국의 물 속에서 일체의 값진 보배를 찾아낼 수 없는 것처럼, 성문의 계율 속에서 불·법·승의 보배를 낼 수 없음도 그러하다. 또 마치 큰 바다에서라야 모든 미묘한 보배를 낼 수 있는 것처럼, 보살도 그와 같이 부처님 바다 속의 계율을 듣고 나서야 불·법·승의 보배를 낼 수 있느니라.

다시 사리자여, 또 마치 갓난 태자(太子)를 국왕이라고 일컬을 수 없지만 국왕이 될 수 없는 것은 아닌 것처럼, 처음 발심하는 보살도 그와 같이 부처라고 일컬을 수 없지마는 부처가 될 수 없는 것은 아니며, 또 마치 세간의 마니(摩尼) 보배가 아직 광명이 비칠 정도로 다루어지기 전에는 사람들이 사랑하거나 좋아하지 않는 것처럼 처음 발심하는 보살로서는 제 아무리 설법하여도 아직 두려움을 벗어나지 못함도 그러하다. 또 마니 보배가 광명이 비칠 정도로 다루어질 때에 사람들이 그 청정하고 밝음을 좋아하는 것처럼, 뛰어나게 수행을 구족한 보살이라야만 두려움 없이 설법함과 동시에 설법을 듣는 일체의 중생이 다 기뻐함도 그러하니라.

다시 사리자여, 또 마치 강물 속에서 나오는 조그마한 보배라도 가볍게 볼 수 없는 까닭은 그 보배가 작기는 하지만 방안이나 어두움 속에 두면 광명을 두루 비출 수 있는 것처럼, 처음 발심하는 보살도 그와 같이 가볍게 볼 수 없는 까닭은 이 보살이 보리를 얻는다면 일체의 불찰에 광명을 놓아 널리 비출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마치 값진 큰 마니 보배가 가장 수승하고도 미묘하여 온갖 더러움을 여읜 것처럼, 퇴전하지 않는 보살이 모든 교만을 여읨도 그러하다. 또 마치 세간의 벼 곡식이 성숙해지면 그 열매의 이삭이 숙여지는 것처럼, 보살이 선법(善法)을 닦아 원만해지면 모든 중생에게 구애 없이 겸손함도 그러하느니라.

다시 사리자여, 또 마치 세간에 겁화(劫火)가 일어나면 이 온 땅 모든 초목이 남김 없이 타버리는 것처럼 보살도 그와 같이 지혜의 불을 켠다면 모든 번뇌의 종자와 습기(習氣)를 남김 없이 다 태워버릴 수 있고 그 번뇌가 다 사라진 뒤에라야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과를 증득할 수 있다. 또 마치 불이 삼천대천세계를 많이 태우던 작게 태우던 간에 허공의 자체는 그대로 있는 것처럼 보살로서 등정각(等正覺)을 성취한 이가 있거나 등정각을 성취한 이가 없거나 간에 일체 법의 자성이 그대로 있음도 그러하니라.

사리자여, 여래가 이러한 모든 비유를 끌어 설함은 보살 대중을 다 받아들여 포섭하기 때문이니, 만약 보살이 이 연설을 듣고 나서 수승한 이해를 낸다면 저 비유로부터 모든 것을 다 성취하게 되리라.”

부처님께서 이 끝없는 법을 말씀하실 때에 그 모임에 있던 2만 4천 사람들이 다 보리심을 내었다.

그 때 세존께서는 거듭 게송을 읊어 말씀하셨다.

최상의 부처님 보리를 얻기 어려운 까닭은 
깊고 미묘하고 더러움 없고 소유한 바가 없기 때문이니 
누구나 이를 원만히 성취하려면 
그 중에 조금도 의혹을 내지 말아야 하리.



청정 미묘한 지혜의 헛됨과 거짓 없는 
그 진실의 광명으로 널리 비추어 
더러움 없는 묘한 인(印)에 편히 머물러야만 
이 부처님 보리를 볼 수 있노라.



청정하고 밝은 마음의 자성은 
그 과거·미래가 다 그러하므로 
번뇌의 더러움이 뜻을 침범할 때엔 
응당 깊고 굳은 뜻을 여의지 말아야 하리니.



모든 법은 조작 없고 받는 이도 없고 
자재하여 주재하는 이도 없고 
나와 남이 없으므로 무아를 말하고 
허공 같고 꿈 같아 마침내 자성도 없노라.



그러므로 이 법은 몸의 업이 아니고 
입과 마음의 업으로 분별할 것도 아니고 
함이 없는 진실한 성품이어서 다른 생각이 없고 
비유로 설명할 수 없음을 관찰해야 하며 

또 그 자성이 허공처럼 평등하고 청정하며 
물질이 아니므로 볼 수 없고 
눈·귀·코·몸·뜻의 
그러한 의식으로 알 것도 아니고 

그 모습의 있고 없음을 초월해 의지하는 곳 없어 
저 맑고 고요한 달과 같기도 하고 
뜻의 소행도 마음의 소행도 아니어서 
알음알이와 생각으로 알 수 없음을 관찰해야 하네.



이같이 지혜의 업으로도 알 수 없는 것을 
어떻게 알음알이하는 마음으로 깨달았다고 말하리.


부처님의 더 없는 대비심을 말미암아 
문자를 빌려 법을 설한 뿐이라.



만약 전생에 수승한 업을 행한 중생이 
저 선지식들에게 포섭됨과 동시 
이러한 상 가운데 법을 듣는다면 
견줄 데 없는 기쁨 얻어 애착을 벗어날 것이며 

모든 마군도 침해할 기회를 노리지 못해 
그 마음과 경계를 알 수 없고 
어떠한 일과 어떠한 행에 있어서도 
저 마군의 업으로선 이길 수 없으리니 

그러므로 보살이 네 마군의 업을 벗어나 
진리와 교계 그대로의 복과 지혜를 닦아서 
모든 부처님 경계 속에 편히 머묾을 
그 수승한 보리 수행하는 이라 이름하네.



중생은 그의 소행을 알지 못하지만 
보리 닦는 자는 소행이 수승하므로 
중생 위해 갖가지 수행의 문을 시설하여 
항상 그들의 모습에 따라 설법하며 

이러한 세간의 갖가지 행이 
서로 인연을 거듭해 화합되므로 
큰 지혜로 이 모든 행을 요달하며 
간단없이 곳에 따라 선설하며 

다시 그 탐욕에 더럽힌 중생과 
진심이 많은 중생을 다 요달하여 
번뇌로 말미암아 허덕임을 볼 때엔 
그 어리석은 성품에 따라 설법하며 

이러한 세간의 갖가지 행이 
서로 모습을 더해 인연을 이루므로 
보살은 그 모든 경계 속에 들어가 
그들의 모습에 따라 언어로 선설해야 하리라.


마치 주위에 얽힌 노끈 그물을 
큰 지혜 있는 자만이 벗어날 길을 잘 알아 
그 그물을 고루 벗어버린 뒤에 
마음대로 장애 없이 나오는 것처럼 

보살의 용감한 지혜도 그와 같이 
세간 사람의 마음 경계에 널리 들어가 
그들의 번뇌를 남김 없이 제거하므로 
두루 행하는 바에 아무런 장애가 없나니 

마치 태양의 광명이 원조 없이 밝고 
독사가 제 힘으로 독기를 피우고 
사자가 홀로 부르짖는 것처럼 
보살도 원조하는 벗 없이 수행하되 

보살도 둘이 아닌 단독으로 
최상의 모든 불법을 쌓아 
그 정진의 세력을 원만케 함으로써 
세간의 모든 번뇌를 부수어 없애노라.



마치 불이 마른 땔나무를 얻어 
곳곳마다 그 세력을 더하는 것 같이 
보살이 지혜의 광명을 증장함에 따라 
모든 번뇌를 다 비추어 깨뜨리노라.

그 때 세존께서 다시 해의보살마하살에게 말씀하셨다.

“보살이 만약 정진을 발기한다면, 항상 견고한 마음으로 부지런히 수행하고 즐겁게 하고자 하여 발기한 정진을 쉬지 않음으로써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기에 어렵지 않으리니, 왜냐 하면 해의여, 정진함을 말미암아 보리를 얻을 수 있을 뿐 저 게으른 자로서 부처님 보리를 얻는다는 것은 너무나 요원 한 일이기 때문이다.

게으르지 않은 자라야만 보시를 행할 수 있고 계율을 지닐 수도 있고 정진을 발기할 수도 있고 선정을 닦을 수도 있고 지혜를 모을 수도 있으며, 또 게으르지 않은 자라야만 자신의 이익을 얻을 수 있고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할 수도 있나니, 이런 까닭에 너는 이제 알아 두라. 보살이 만약 정진을 발기한다면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기에 어렵지 않느니라.

해의여, 내가 기억하건대 과거세의 큰 아승기겁 이전에 그 때 세간에 출현하신 부처님으로서 용맹정진(勇猛精進) 여래·응공·등정각·명행족·선서·세간해·무상사·조어장부·천인사·불세존이 계셨으니, 그 세계의 명칭은 선견(善見)이었고 겁(劫)의 명칭은 화적(花積)이었다. 무엇 때문에 그 겁의 명칭이 화적이냐 하면, 해의야, 그 때 삼천대천세계에 큰물이 충만하고 물 속에서 다시 8만4천의 광대한 연꽃이 발생하는데, 그 꽃마다 무수한 백천의 잎이 수승 미묘하게 피어 사랑스러우므로 이것을 보는 이가 다 기뻐하였으며, 그 때 정거천(淨居天)의 대중들이 이 꽃을 보고는 즐겁고 기쁜 뜻에 넘쳐 함께 발언하기를, ‘이같이 광대한 연꽃이 나타남은 결정코 어떤 등정각께서 이 겁에 출현하심이니, 이 겁이 끝나기 전에는 부처님이 세간에 출현하심으로써 언제나 꽃이 쌓여 있는[花積]것 같으리라’고 하였기 때문에 이 겁의 명칭을 화적이라 하였노라.

또 무엇 때문에 그 세계의 명칭이 선견이냐 하면, 그 세계가 가장 수승 청정함으로써 시방 일체 불찰의 한량없고 셈할 수 없는 보살들이 모두 그 세계에 모여와서 함께 우러러보며, 우러러 볼 때마다 다 희상(喜相)삼매를 얻어 일체의 묘락을 구족함과 동시에 그 세계로부터 보는 것이 다 선묘(善妙)하기 때문에 선견이라 하였노라.

해의여, 그 선견세계는 일곱 가지 보배로 이루어진 것이어서 뭇 보배 나무와 보배 누각의 그 보배 광명이 널리 비추고, 그 세계에는 또 여자가 없으므로 모태에 태어나지 않고 자연히 연꽃 속에 화생(化生)하여 가부좌하고 있으며, 또 그 세계에는 다른 승(乘)이 없이 모든 수행하는 이가 다만 대승에 머물게 되고, 그 국토 인민들의 생활은 마치 도솔천(兜率天)과 같아서 음식을 필요로 하는 자는 다 뜻대로 얻는가 하면, 다시 신통의 유희를 얻어 허공을 밟고 다닐 수 있었다.

저 용맹정진여래의 법을 받은 26억의 출가 보살이 보살도를 갖추어 보살 대중에 들어간 이가 있고, 또 대승을 수행한 한량없는 재가 보살이 있었는데, 그 때 저 부처님께서 그 보살들을 위해 부지런히 정진하는 법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너희들 대사는 부지런히 정진하되 항상 그 견고한 마음으로 부지런히 노력하고 즐겁게 하고자 하며 휴식하지 말라.’

그 부처님의 모인 가운데 견고개(堅固鎧)라는 보살이 있어 곧 자리에 일어나 그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이른바 보살이 정진을 발기함이란 어떤 것이며, 또 어떠한 법으로 여래께서 보살들을 가르치시나이까?’

이 때에 용맹정진여래께서 견고개보살에게 대답하셨다.

‘선남자여, 이른바 일체의 선한 법을 널리 포섭하는 네 가지 종류의 정진이 있으니, 그 네 가지란 첫째 발기, 둘째 근작(勤作), 셋째 사찰(伺察), 넷째 수행이 그것이라. 이러한 네 가지가 일체의 선한 법을 널리 포섭하느니라.

다시 그 발기란 무엇이며, 근작이란 무엇이며, 사찰이란 무엇이며, 수행이란 어떤 것이냐 하면, 선남자여, 발기란 큰 보리심을 발기함이요, 근작이란 일체의 선근을 광대히 쌓음이요, 사찰이란 모든 중생에게 이익 되는 일을 일으킴이요, 수행이란 어떠한 법에서라도 다 인욕에 머무는 것이다.

또 발기란 부지런히 많이 들음을 구함이요, 근작이란 그 들은 대로 연설함이요, 사찰이란 그 뜻을 견고히 함이요, 수행이란 올바른 소견을 일으키는 것이다. 또 발기란 그 간탐하는 마음을 거둬들여서 그침이요, 근작이란 모든 소유를 버림이요, 사찰이란 모든 선하고 이익 되는 일을 중생들과 같이 하여 보리에 회향함이요, 수행이란 과보(果報)를 구하지 않는 것이다.

또 발기란 크게 버리는[捨]명성을 떨침이요, 근작이란 와서 요구하는 이들에게 선지식의 생각을 일으키게 함이요, 사찰이란 모든 수용(受用)에 있어서 무상(無常)을 관함이요, 수행이란 보시하고 나서 후회하지 않는 것이다. 또 발기란 모든 수용을 법에 의지하여 구함이요, 근작이란 깨끗한 생명을 스스로가 유지함이요, 사찰이란 진실한 보시를 행함이요, 수행이란 보시할 때에 다른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

또 발기란 파계한 더러움을 씻어 없앰이요, 근작이란 금지한 계율에 결함이 없음이요, 사찰이란 파계한 중생일지라도 거두어 보호함이요, 수행이란 비록 계율의 덕을 갖추었다 해도 다른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 또 발기란 몸의 업이 청정함이요, 근작이란 입의 업이 청정함이요, 사찰이란 마음의 업이 청정함이요, 수행이란 모든 법이 청정한 것이다.

또 발기란 모든 성내는 마음이 일어남을 용납하지 않음이요, 근작이란 인욕의 힘을 발휘함이요, 사찰이란 자신이나 다른 이를 위해 모든 것을 옹호함이요, 수행이란 비록 인욕에 머물렀다 해도 다른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 또 발기란 모든 성내는 마음을 즐겁고도 청정케 함이요, 근작이란 모든 성내고 기뻐하는 마음을 화합케 함이요, 사찰이란 마음속이 청량하여 뜨거운 번뇌를 없앰이요, 수행이란 자타가 다 얻은 바가 없는 것이다.

또 발기란 게으름을 제거함이요, 근작이란 정진하는 힘을 잘 결정 선택함이요, 사찰이란 게으른 중생을 구호함이요, 수행이란 어떠한 법에서도 다 인욕에 머무는 것이다. 또 발기란 선법을 쌓아 모음이요, 근작이란 선법을 성취함이요, 사찰이란 다른 승(乘)을 좋아하지 않음이요, 수행이란 모든 업을 파괴하지 않는 것이다.

또 발기란 기억하는 것이요, 근작이란 행하는 것이요, 사찰이란 슬기로운 것이요, 수행이란 머무는 것이다. 또 발기란 이치요, 근작이란 가르침이요, 사찰이란 들어가는 문이요, 수행이란 벗어나는 길이다.

또 발기란 문자(文字)를 쌓아 모음이요, 근작이란 문자와 그 이치를 다 받들어 지님이요, 사찰이란 음성과 문자에 다 집착하지 않음이요, 수행이란 말할 수 없는 모든 법을 다 깨닫는 것이다. 또 발기란 착한 벗에 친근함이요, 근작이란 나쁜 벗을 멀리 여읨이요, 사찰이란 착한 벗이나 나쁜 벗에 다 평등한 마음을 일으킴이요, 수행이란 설법들은 그대로를 다 기억해 지니는 것이다.

또 발기란 출가할 마음을 일으킴이요, 근작이란 온갖 애착이나 애착 아닌 것을 다 평등하게 관찰함이요, 사찰이란 착한 일이라면 다 즐거이 희구(希求)함이요, 수행이란 현량(現量)의 지혜를 닦는 것이다. 또 발기란 넓은 벌 판에 거처하기를 좋아함이요, 근작이란 시끄러움을 멀리함이요, 사찰이란 고요한 곳에 있기를 좋아함이요, 수행이란 적정(寂靜)을 닦아 행하는 것이다.

또 발기란 욕심을 적게 함이요, 근작이란 만족함을 아는 것이요, 사찰이란 미묘한 즐거움을 얻음이요, 수행이란 응함에 따라 재량할 것을 아는 것이다. 또 발기란 계율을 증상(增上)하는 배움[學]을 닦음이요, 근작이란 그 배움을 닦음이 잡되지 않음이요, 사찰이란 마음을 증상하는 배움을 닦음이요, 수행이란 지혜를 증상하는 배움을 닦는 것이다.

또 발기란 보시로써 거둬 줌이요, 근작이란 애어(愛語)로써 거둬 줌이요, 사찰이란 이행(利行)으로 거둬 줌이요, 수행이란 동사(同事)로써 거둬 주는 것이다. 또 발기란 대자(大慈)요, 근작이란 대비(大悲)요, 사찰이란 대희(大喜)요, 수행이란 대사(大捨)이다.

또 발기란 불찰의 국토를 청정케 함이요, 근작이란 상호(相好)를 원만케 함이요, 사찰이란 바른 법을 보호해 지님이요, 수행이란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다. 또 발기란 온(蘊)의 마장을 앎이요, 근작이란 번뇌의 마장을 초월함이요, 사찰이란 죽음의 마장을 멀리 여읨이요, 수행이란 자재천의 마장을 굴복시키는 것이다.

또 발기란 괴로움[苦]을 앎이요, 근작이란 괴로움의 원인[集]을 끊음이요, 사찰이란 도(道)를 닦음이요, 수행이란 멸(滅)을 증득하는 것이다. 또 발기란 신념처(身念處)를 닦음이요, 근작이란 수념처(受念處)를 닦음이요, 사찰이란 심념처(心念處)를 닦음이요, 수행이란 법념처(法念處)를 닦는 것이다.

또 발기란 믿음이요, 근작이란 정진이요 사찰이란 선정이요, 수행이란 지혜이며, 또 발기란 불선(不善)한 법을 끊음이요, 근작이란 일체의 선법을 원만히 일으킴이요, 사찰이란 몸과 마음을 편안하고 조화롭게 함이요, 수행이란 더 없는 신족통(神足通)을 얻는 것이다.

또 발기란 7각분(覺分)을 닦음이요, 근작이란 8정도(正道)를 행함이요, 사찰이란 지관(止觀)을 익혀 닦음이요, 수행이란 해탈을 증득하는 것이다. 또 발기란 모든 행을 발기함이요, 근작이란 그 결백한 행을 표시함이요, 사찰이란 마음이 경쾌하고도 편안함이요, 수행이란 모든 경계의 모습에 떨어지지 않는 지혜이니라.’

다시 해의여, 저 용맹정진여래께서는 또 견고개보살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정진함을 말미암아 몸과 마음이 경쾌하고 편안하게 되나니, 그러므로 이 정진은 인(因)과 견(見)을 모두 멀리 여의고, 또 이 정진은 이름과 물질을 알고, 또 이 정진은 나와 나의 것이란 견해를 없앤다. 또 이 정진은 어떤 취할 바의 얽매임을 벗어나고, 또 이 정진은 5개(蓋)와 현전에 일어나는 일체의 번뇌를 제거하고, 또 이 정진은 나쁜 조작과 그 밖의 의혹을 끊고, 또 이 정진은 모든 번뇌의 병을 치료한다. 또 이 정진은 부지런히 힘써서 모든 장애를 제거하고, 또 이 정진은 아만과 지나친 교만을 여의고, 또 이 정진은 일체의 의지하거나 집착함을 초월하고, 또 이 정진은 모든 기뻐함과 성냄을 여의고, 또 이 정진은 그 무명의 존재와 애착에 다 물들지 않는다.

또 이 정진은 탐하거나 성내는 법을 다 행하지 않고, 또 이 정진은 그 어리석은 법을 항상 사찰하고, 또 이 정진은 6근(根)과 여섯 대경[六境]의 법을 깨달아 알고, 또 이 정진은 5온(蘊)과 열여덟 경계[十八界]가 본래 생길 것이 없음을 분명히 안다. 또 이 정진은 마음이 고요한 경지에 머물러 열반에 들어가고, 또 이 정진은 모든 법에는 아무런 얻을 것이 없음을 깨닫는다. 또 이 정진은 모든 법에 두 가지 상(相)을 취하지 않고,. 또 이 정진은 그 법성이 본래 항상 머무는 것임을 분명히 알고, 또 이 정진은 모든 법이 오지도 가지도 않는 것임을 알고, 또 이 정진은 모든 법이 취할 것도 없고 버릴 것도 없는 것임을 안다.

또 이 정진은 모든 법이 시작도 중지도 없는 것임을 알고, 또 이 정진은 모든 법이 높음도 낮음도 없는 것임을 알고, 또 이 정진은 모든 법이 나가지도 들어오지도 않는 것임을 알고, 또 이 정진은 모든 법이 얽매임도 벗어남도 없는 것임을 안다. 또 이 정진은 모든 법이 부지런함도 게으름도 없는 것임을 알고, 또 이 정진은 모든 법이 방일함도 방일하지 않음도 없는 것임을 안다.

또 이 정진은 모든 법이 조작할 것도 조작을 받을 것도 없는 것임을 알고, 또 이 정진은 모든 법이 관할 것도 관하지 않을 것도 없는 것임을 알고, 또 이 정진은 모든 법이 쉼〔止息〕도 왕성함도 없는 것임을 알고, 또 이 정진은 모든 법이 옹호할 것도 옹호하지 않을 것도 없는 것임을 알고, 또 이 정진은 모든 법이 모임도 흩어짐도 없는 것임을 아느니라.’

해의여, 저 용맹정진여래께서 모든 보살들에게 이러한 정진을 부지런히 행하는 법을 말씀하실 적에, 그 모임에 있던 1만 사람들이 생사 없는 법의 지혜를 얻었으며, 견고개보살은 저 부처님으로부터 이러한 정진의 법을 듣고 나서 다시 정진을 발기하여 부지런히 선법을 구하였다. 이와 같이 쉬지 않고 항상 정진하기를 1억년이 경과한 뒤에 유순인(柔順忍)을 얻었으며, 계속 정진하여 선법을 구하던 나머지 그곳에서 멸도하였는데, 멸도하고는 도로 저 부처님 앞에 거듭 화생(化生)하여 그 큰 모임에서 선설하신 바른 법을 듣고 다시 정진하여 부지런히 선법을 구하였노라.

해의여, 견고개보살이 이 인연으로 그 때 8만 4천 부처님께 두루 친근하면서 저 화적(花積)의 겁 동안 정진을 발기하여 부지런히 선법을 구하였고, 그러한 때를 경과한 뒤에도 모든 것을 부지런히 수행하였느니라.

해의여, 너는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 그 때의 견고개보살이 어찌 다른 사람이었겠는가? 바로 나의 전신이었다. 내가 옛날 많은 보살의 지위를 지날 때에 생사를 저버려가면서 부지런히 보리를 구하였기 때문에 이제 와서 정각(正覺)을 성취하게 되었노라. 광대히 정진을 행하고 깊이 괴로움을 겪어 왔는데도 그러하거늘 하물며 세간의 게으른 중생이 정진을 하열하게 하면서 어찌 보리의 과(果)를 얻을 수 있으랴.

해의여, 그러므로 어떤 중생이라도 정진을 발기하는 자만이 나의 법에서 청정을 얻을 수 있고 게으른 자로선 성취할 수 없나니, 이 때문에 너는 이제 알아 두라. 방일하지 않고 정진하는 자는 곧 보리를 얻느니라.”

부처님께서 과거세에 정진 수행하던 법을 말씀하시자 그 때 모임 가운데의 5천 보살은 생사 없는 법의 지혜를 얻고, 7천의 하늘·사람들은 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내었다.

댓글 달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항목은 *(으)로 표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