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흥법사가 만난 비구니 관세음보살
신라의 문무왕(文武王)은 그 2년(681)에 세상을 떠났는데, 그 때 태자(神文王)에게 이렇게 분부하였다. 「경흥(憬興)법사를 국사(國師)로 삼도록 하라. 짐의 말을 잊지 말라.」
신문왕은 즉위하여 부왕의 그 당부를 잊지 않고 경흥법사를 국사로 삼고, 삼랑사(三郎寺)에 머물게 하였다.
국사가 되어 삼랑사에 거주하던 경흥법사는 어느 날 갑작스럽게 병을 얻어 한달이나 몸져 누워 있었다. 몸살 같으면서도 쉽게 풀리지 않아 약을 써도 효험이 없었다.
하루는 낮선 비구니(比丘尼)가 찾아 왔다.
문안을 드리고 나서 국사의 병을 묻고는 경전에 선우(善友)가 병을 낫게 한다는 말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지금 스님의 병환은 신경을 너무 쓰시고 피로하신 까닭으로 생겼기 때문에, 실컷 웃으시면 낫게 되십니다. 」
비구니는 그렇게 말하고는 국사 앞에서 춤을 추기 시작하였다.
열한가지의 얼굴 모양을 하면서 우스꽝스러운 춤을 추는데, 하고 기이하고 변화무쌍하여 이루 형용할 수가 없었다.
그 모양마다 어찌나 우스운지 턱이 빠질 지경이었다.
점잖은 국사님이 무릎을 치면서 눈물이 다나오도록 한껏 웃었다.
참으로 정신없이 웃었다.
그 춤 모습에 마음을 빼앗겨 정말 국사라는 체면도 잊어버리고 실컷 웃을 수가 있었다.
비구니 스님의 춤이 끝났을 때에는 경흥국사의 병도 씻은 듯이 말끔하게 나아 있었다.
비구니는 국사의 병이 나은 것을 보고는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그러나 국사는 낯선 그 비구니스님이 어느 절에 사는 누구인 줄을 알 수가 없었다.
곧 사람을 시켜 뒤따라가서 알아오게 하였다.
국사에게 하직인사를 하고 삼랑사 문밖으로 나간 비구니스님은 지팡이를 짚고 곧장 남항사(南港寺) 쪽으로 가고 있었다.
남항사는 삼랑사의 남쪽에 위치한 절이다.
뒤따르는 사람이 걸음을 빨리하여 남항사 앞에 이르렀을 때에는 비구니스님의 그림자가 이미 절 안으로 들어가고 없었다.
얼른 절 안으로 들어가 이리저리 살펴보았으나 그 비구니의 종적을 알 수가 없었다.
절에 있는 스님들에게 물어 보았으나 아무도 비구니스님을 본 일이 없고 또 이절에는 그러한 비구니가 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분명히 이 절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뒤따라왔는데, 그럴 수가 있는가. 잘못 보고 따라온 것이 아니므로 틀림없이 남항사안에 있을 것으로 확신하고 이리 기웃 저리 기웃하던 그 사람은 법당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그 법당 안에는 십일면 관세음보살(十一面觀世音菩薩)의 탱화가 모셔져 있었다.
그 관세음보살님 앞에 아까 비구니스님이 짚었던 대나무 지팡이가 놓여 있었다.
이는 두 말할 것도 없이 남항사의 십일면관세음보살이 비구니로 몸을 나투어서 경흥국사의 병을 고쳐 주었던 것이다.
경흥스님은 신라 통일 직후의 고승이며, 원효스님 다음으로 저술을 가장 많이 남긴 훌륭한 학문스님이었다.
그러한 스님이 저술하느라 또는 국사(國師)로서 임금님을 자문하느라 피로가 겹쳐서 병이 들었음을, 대비(大悲)의 원통(圖通) 관세음보살이 열한 가지의 얼굴 모습(十一面)을 지어서 실컷 웃게 함으로써 경흥스님의 병을 낫게 한 것이다.
<三國遺事 卷 5 惑通 7, 憬興遇聖條卷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