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신의 꿈에 나타난 관세음보살

조신의 꿈에 나타난 관세음보살

신라 때의 일이다.

세규사(世逵寺)라는 절에서는 강원도 지방에 농장을 관리하는 장사(莊舍)를 두고 있었다.

세규사에서는 그 장사의 관리책임자인 지장(知莊)으로 조신(調信)이라는 스님을 보내었다.

지장으로 부임한 조신은 어느 날 우연한 기회에 그 고을 해수 김흔공(金昕公)의 딸을 보게 되었다.

태수의 딸을 한번 본 후로 조신은 그 아름다운 처녀를 잊을 수가 없었다.

결국. 그는 그 아가씨를 짝사랑하기까지에 이르렀다.

자신의 처지로는 도저히 이룰 수가 없는 사람이었으므로 그는 낙산사(洛山寺)의 관세음보살님을 찾아갔다.

그 처녀와의 사랑이 이루어지기를 남몰래 기원하였다.

그러기를 여러 해, 영험이 많다는 낙산사관세음보살님께 극진히 빌었지만 끝내 그 처녀는 다른 곳으로 시집을 가버리고 말았다.

그토록 기원하며 바랐던 일이 너무 어처구니없이 허물어지고 말았으므로, 젊은 스님조신은 앞이 캄캄하였다.

그 절망감을 견딜 수가 없어서 그는 다시 낙산사로 갔다.

낙산사가 그리 가까운 거리도 아니었는데, 그는 단숨에 달려갔다.

법당으로 들어간 그는 관세음보살을 원망하는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자신의 쓰린 마음은 아랑곳 없이 대비상(大悲像)은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애절한 소원을 성취시켜 주지 않은 관세음보살이 못내 원망스러웠다.

결국 그는 그 앞에 힘없이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는 마치 홀어머니로부터 버림받아 길거리에 내팽개쳐진 천애고아처럼 서럽게 울었다.

자꾸만 흐르는 눈물을 훔치며 그는 해가 저물도록 울었다.

그러다가 그는 자신도 모르는 새 꾸벅꾸벅 졸았다.

짝사랑을 영원히 잃어버린 절망감과 쓰라림이 그 허전한 마음에 피곤함이 더 겹쳐서 웅크린 채 그는 깊은 잠에 들었다.

그리고는 꿈나라로 빠져들었다.

방문을 조용히 열고 들어서는 인기척이 있었다.

그 쪽으로 시선을 돌리던 조신은 스스로의 눈물을 의심하리만치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살며시 문을 열고 방안으로 들어온 여인은 바로 태수의 딸 김씨 처녀였기 때문이다.

하얀 이를 드러내고 배시시 웃으면서 여인은 말하였다.

「제가 일찍이 스님을 먼 발치에서 뵈옵고, 마음으로 사랑하여 잠시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하오나, 부모님의 엄하신 말씀을 어길 수가 없어서 마지못해 억지로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 한평생 고락을 함께 누리기를 원하고 이렇게 왔습니다. 」

참으로 고운 목소리요,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조신의 기쁨은 이루 형언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소원이 이루어진 기쁨으로 그는 여인을 와락 끌어안고 방안을 빙빙 춤추듯 맴돌았다.

그들은 그렇게 해서 부부가 되었다.

조신은 승려의 신분을 팽개쳐 버리고 아내와 함께 그의 고향 마을로 돌아갔다.

거기에서 삶의 터전을 잡고 40여년을 살았다.

그동안에 아이를 다섯이나 두었으나 살림은 가난하여 네 쪽의 벽만 앙상하게 남은 집 한 채 뿐이었다. 하루 세끼 나물 죽 쑤어먹기 조차 힘이 들어서 결국 쪽박을 들고 사방으로 걸식하러 다니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어른들과 아이 다섯의 일곱 식구가 정처 없이 이곳저곳으로 서로 이끌고 걸식을 하며 떠돌아다니는 동안, 누덕누덕 기워 입은 옷은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들의 발걸음이 명주 해현령(溟州 蟹縣嶺)고개를 넘을 매, 마침 열다섯 살 딴 큰 아이가 굶주림에 지쳐 죽고 말았다.

늙은 부부는 통곡하면서 죽은 아이를 길가에 묻었다.

그들은 나머지 네 아이를 이끌고 우곡현(羽曲縣)에 이르러 길가에 초막을 짓고 우선 몸붙일 처소로 삼았다. 엎친데 덮치기로 열살난 딸 아이가 걸식하러 나갔다가 동네 개에게 물려 아픔을 참지 못하고 울부짖으니, 부모로서 차마 볼 수가 없어 그저 눈물만 줄줄 흘릴 뿐이었다.

울고 있던 늙은 아내가 눈물을 닦으며 갑자기 남편을 향해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다.

「제가 처음 당신을 만났을 때에는 나이도 젊고 얼굴도 예뻤습니다.

먹는 것 입는 것을 궁색한 줄 모르고 서로 의지하며 한평생을 살아봤습니다. 천생 연분이라고 할 만큼 우리는 서로를 아끼고 위해 주며 정도 깊고 사랑도 두터웠습니다.

요즘 와서 늙은 몸에 병은 날로 더 심하고, 추위와 굶주림도 날이 갈수록 더해 가며, 이제는 방 한 칸, 장한 뚝배기도 남이 빌려주지 않습니다.

부끄러움도 무릅쓰고 다니기가 태산보다 더 무겁고, 아이들은 추위에 떨며 굶주림에 울고 있으나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습니다.

이 지경에 이르러 부부의 사랑이 무슨 소용이며, 아리따운 용모와 정겨운 웃음이 모두다 풀잎의 이슬과 같을 뿐입니다. 지금에 있어서 당신은 내가 있어서 더 짐이 되고, 나에게는 당신이 있어서 걱정이 더 큽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지난날의 즐거움이 오늘의 불행을 자초한 것 같습니다.

당신이나 내가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요. 우리가 어린 것들 데리고 고생하는 것보다 차라리 헤어지는 것이 낫겠습니다. 」

조신이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을 듯했다. 그래서 선선히 승락을 하고 각각 두 아이씩 나누어 맡았다.

「나는 친정이 있는 고향으로 갈까 합니다. 당신은 남쪽으로 가도록 하세요.」

늙고 병든 거지의 신세가 된 조신은 틀림없이 마지막이 될 아내의 말에 따르기로 하였다.

눈물마저 메마른 아내의 뼈만 앙상한 손을 놓고, 그는 등을 돌려 남쪽을 향해 정처 없이 발걸음을 떼어 옮겼다.

그 순간, 조신은 눈을 번쩍 떴다. 꿈에서 깨어난 것이었다.

꿈속의 아리고 쓰리던 그 여운이 그대로 남아서 그의 마음은 여전히 괴롭고 무거웠다.

누가 켜 놓았는지 조는 듯한 등판불이 안개처럼 뿌연 빛을 발하고, 그 너머로 여전히 미소 짓는 관세음보살의 자비 넘친 얼굴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순간 용수철 튕기듯 몸을 일으켰다.

꿈에서 겪은 괴로움의 여운이 얼음 녹듯 말끔히 사라져 버렸다 그는 이미 인생의 한평생을 꿈속에서 다 경험한 것만 같았다.

그처럼 무상하고 허망한 인생인 것을 모르고, 아리땁게 보이는 한 처녀와의 사랑을 맺게 해주지 않았다고 관세음보살님을 원망하며 울었던 조금 전의 자신이 한없이 어리석게 느껴졌다.

그래서 차마 얼굴을 들고 관세음보살님을 우러러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는 스스로를 부끄러워하며 관세음보살을 향해 참회하는 절을 올렸다.

조신에게는 이제 세속적인 탐욕의 마음이 하나도 없었다.

아름다운 여인과의 사랑을 이루지 못한 회한이나 원망도 남아 있지 많았다.

결국 그는 꿈을 통하여 관세음보살님의 설법을 들은 셈이었다.

출가 사문의 몸으로 잠시 여성에게 넋을 잃고 스스로의 본분을 잊어버린 조신을 불쌍히 여기신 관세음보살님께서, 꿈이라는 스크린을 통해 인생의 모습을 비쳐 보이셨던 것이다.

그리하여, 조신으로 하여금 출가사문의 본자리로 돌아오게 하였던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이튿날 아침, 물에 비친 그의 모습은 수염과 머리가 온통 새하얗게 되어 있었다.

하룻밤 사이에 백발 노인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그는 그 길로 해현(蟹峴)으로 가서 꿈속의 아이를 묻은 곳을 파 보았다.

거기에서 돌미륵(石彌勒)이 나왔다. 그 미륵상을 깨끗이 씻어서 가까운 절에 모셨다.

조신은 그 길로 서울 본사로 돌아가 장사의 직장을 사임하였다.

그리고는 사재를 털어서 정토사(淨土寺)를 세웠다.

그곳에서 세상을 마칠 때까지 정토업(淨土業, 즉 白業)을 부지런히 닦았다.

출가 사문, 곧 수행승의 본분을 지켜 진실하게 정진하였던 조신스님의 최후를 아는 사람을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아마 그는 진실한 수행의 힘에 의하여 관세음보살과 아미타부처님이 계시는 극락세계에 바로 직행하여 갔을 것으로 볼 수가 있을 것이다.

<三國遺事 卷3, 洛山二聖條의 調信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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