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로가 대비관음의 구원으로 살아나다
신라 말 경애왕(景哀王, 924~927) 때의 일이다.
신라의 서울 성안에 정보(正甫)벼슬의 최은함(崔殷誠)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늙음을 눈앞에 둔 그들 부부는 멀지 않은 중생사(衆生寺)로 가서 관세음보살님의 소상(塑像) 앞에서 정성스럽게 기원하였다.
「대가 끊이지 않도록 아들 하나를 점지해주십시오. 」
하고 극진하게 빌었다.
이 관세음보살님은 영험이 많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중생사의 관세음보살상에는 그 조성에 얽힌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옛날 중국의 한 천자(天子)에게 아름답기가 비길 데 없는 총희(寵姬)가 하나 있었다.
동서고금에 이렇게 예쁜 미인은 없을 것이라고 여긴 황제는, 그림 잘 그리는 사람을 시켜서 그 미인을 그리게 하였다.
황제의 명을 받은 화공은’그림을 완성시키기는 하였으나 잘못해서 그만 붓을 그림 위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붉은 물감이 묻혀 있던 그 붓이 하필이면 그림의 배꼽 밑에 떨어졌기 때문에 찍혀지게 되었다.
시간도 없고 해서 화공은 그대로 황제에게 바쳤다.
그림을 본 황제는 그 그림이 썩 잘되기는 하였으나 몸에 있는 사마귀까지 그린 것을 보고는 크게 노하였다.
자신과 본인 외에는 볼 수 없는 여인의 몸속을 직접 화공이 보지 않고 어떻게 점을 찍었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화공은 황제의 노여움을 사서 옥에 갇히고 극형을 당하기에까지 이르렀다.
그 때 승상(丞相)이 화공의 마음이 정직한 것을 들어서 용서해 줄 것을 간청하니, 황제가 말하였다. 「그가 마음이 어질고 정직하다면 내가 간밤에 꾼 꿈을 그려 바치게 하라. 내 꿈과 틀림이 없다면 곧 용서해주겠다. 」
황제의 간밤 꿈을 화공이 어떻게 알겠는가.
그러나 화공은 마음이 이끄는 대로 붓을 맡겨 십일면관세음보살음보살상을 그려서 바쳤다.
그것을 본 황제는 그를 놓아 주었다.
그야말로 관세음보살의 힘(念彼觀音力)이 그를 살려낸 것 이었다.
자유의 몸이 된 화공은 박사(博士) 분절(分節)과 함께 신라에 건너왔다.
신라가 불법을 공경 신봉하는 부처님의 나라라는 소문을 듣고 건너온 화공은 신라 사람들을 널리 이익 되게 하였다.
이 중생사의 관세음보살상은 그가 조성하였는데, 신라에서는 그를 신장(神匠,참으로 신비로운 소유자라는 뜻)이라고 불렀다.
그 신장이 유명한 백율사(栢栗寺)의 관세음보살상도 조성하였다고 전해진다.
최은함이 그러한 중생사의 관음상 앞에 정성스럽게 기원하고 과연 아들을 얻었다.
그 집안의 기쁨과 경사스러움은 이루 다 표현 할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아들을 낳은 지 석 달도 못되어 큰 변이 일어났다.
후백제의 왕 견훤(甄萱)이 갑자기 쳐들어와서 신라의 서울 안을 발칵 뒤집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 때가 경애왕 4년(927) 11월의 일로서, 그 날도 신라 임금은 비빈(妃嬪)과 종친 대신들을 거느리고 포석정(鮑石亭)으로 놀이를 가서 잔치를 즐기고 있었다.
왕이 없는 신라의 대궐을 먼저 점령한 후백제 군사들은 견훤왕의 진두지휘를 따라 포석정에 들이닥쳐 놀이에 정신을 잃고 있는 임금이하 모든 신라 관원들을 덮쳐 버렸다.
몸을 숨겼던 경애왕은 침입군에게 끌려나와 견훤의 핍박을 받아 자결하였고, 왕비와 빈청들은 그 자리에서 능욕을 당하였다.
후백제군은 벼슬아치들을 잡아가고 또 그들의 집을 불태웠다.
왕을 잃은 신라 서울 안은 그야말로 무법천지의 난장판이었다.
난군들에게 짓밟히지 않으려고 서울 성안의 백성들은 다투어 몸을 피했다.
그 다급한 피난민들의 발걸음 속에 물론 최은함과 그 가족들도 끼어 있었다.
이제 석 달도 채 안된 갓난아기를 안고 몸을 숨기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놀라서 악을 쓰며 우는 아기 울음소리를 듣고 적군이 달려오기라도 한다면 어른과 아이 모두 목숨을 보존하기 어려운 판국이었다.
숨을 죽이고 숨어있으려면 아기의 입을 막아야 하는데, 그러자면 아기의 숨이 막혀 소중하게 얻은 아들이 생명을 잃을 위험도 없지 않았다.
생각다 못한 최은함은 아기를 안고 중생사로 달려갔다.
법당으로 들어간 그는 대비관음상 앞에 엎드려 흐느껴 울면서 말하였다.
「관세음보살님, 난리가 다급해서 이 어린것을 온전하게 피신시키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보살님께옵서 진실로 이 아이를 점지하여 주셨다면. 원하옵건대 대자대비의 힘으로 보살펴 주십시오. 그리하여 다시금 아비와 자식이 만날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
그는 울면서 이 말을 세 번이나 되풀이하고 절하였다.
그리고는,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보살님의 자리(좌대탁자) 밑에 잘 넣어놓고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되돌아보며 그곳을 떠났다.
그 동안 견훤은 김부(金傳)라는 왕족을 새 임금으로 세워놓고(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 한 보름 지나서 신라의 왕성으로부터 물러갔다.
한 보름 동안 한시도 그의 마음은 아기 곁을 떠난 적이 없었다.
그저 살아 있기를 빌면서 관세음보살을 일친으로 칭념하면서 보낸 나날이었던 것은 물론이다.
한 걸음에 중생사로 달려온 그는 곧바로 법당 안의 탁자 밑을 들켰다.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참으로 놀랍고 기이한 사실이 그 좌대 탁자 밑에 펼쳐져 있었기 예문이다.
살아 있었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빌었던 것은 틀림 없는 사실이었으나, 정작 기적적인 현실 앞에서 그는 놀라움과 감격스러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석 달도 채 못 된 어린 핏덩어리가 동짓달 추운 겨울에 싸늘한 법당의 탁자 밑에 포대기가 싸인 채 보름이 지나도록 팽개쳐져 있었으니, 어찌 무사히 살아 있기를 바랄 수가 있었겠는가.
다만, 간절한 부모의 애정과 관세음보살을 믿는 지극한 신심으로 어린 생명이 살아 있기를 바랐고, 또 빌었던 것일 따름이다.
그 갓난아기가 그것도 아주 건강하게 살아 있었다.
살결은 이제 막 목욕을 시킨 것처럼 깨끗하였고, 몸도 튼튼하게 부쩍 자란 것 같이 보였다. 방긋방긋 웃고 있는 아들은 덥석 껴안으니 아직도 아기의 입가에는 젖내음이 남아 있었다.
대자 대비하신 관세음보살님의 크나큰 은혜 앞에 감읍하여 한없이 예배 공양하였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 아기는 잘 자랐고 또 총명과 지혜가 뛰어났다.
그가 바로 정광(正匡)의 벼슬에 올랐던 최승로(崔丞魯)였다.
그의 아버지 최은함이 경순왕을 따라(신라를 고려 태조에게 바칠 때)고려 왕조로 들어온 뒤부터 그 자손이 번성하여 대성(大姓)이 되었는데, 최승로가 낭중(郎中) 최숙(崔肅)을 낳았고, 최숙이 낭중 최제안(崔齋顔)을 낳아 자자손손이 끊이지 않고 부귀와 영화를 이어왔다는 것이다.
<三國遺事 卷3, 塔像4, 三所觀音 衆生寺條의 앞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