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설아사세왕경(佛說阿闍世王經) 03. 하권-1
그러자 2만 2천 보살들은 즉시 똑같이 소리를 내어 말했다.
“저희들은 문수사리보살과 함께 가고 싶습니다.”
즉시 그 수많은 보살들은 문수사리보살과 함께 홀연히 그 국토를 떠나 인(忍)세계의 한 처소로 와서 앉았다. 그 처소는 문수사리보살의 방으로서, 그 안에 수많은 보살을 다 수용할 수 있음은 문수보살의 위신력(威神力)이기 때문이다. 모든 보살은 다 앉았다. 문수사리보살은 법을 설했다. 그 법의 이름은 총지[陀隣尼]이다.
문수사리보살이 모든 보살에게 말했다.
“여러분은 어떤 법을 총지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말하자면 일체의 온갖 법을 다 알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에 바랄 일이 없으므로 닦는 일이 변함이 없습니다. 생각할 일을 때에 맞춰 충분히 갖추니, 아는 일은 지혜 그대로입니다. 그 법은 그 근본을 다 알고 말한 바가 법 그대로이니, 스스로 보호하여 떨어지지 않고, 보다 높은 경지로 구르기 때문에 모든 법의 행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총지(摠持)란 도의 근본으로서 부처님의 종자[佛種]를 끊지 않고 법의 근원을 놓지 않으며, 승려(僧侶)의 본분을 다 거둬 지녔으니, 모든 법에 위태로움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무엇을 물을지라도 다 답할 수 있으며, 어떤 중생을 보더라도 물리치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두려울 대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하늘을 교화하고자 하면, 하늘의 소원에 따라 다 교화하여 각각 알 수 있도록 하며, 또 용 열차(閱叉 : 夜叉) 아수륜(阿須倫 : 阿修羅) 가류라(迦留羅 : 迦樓羅) 진타라(眞陀羅) 마휴륵(摩休勒 : 滅伽) 사람모양이면서 사람 아닌 존재[人非人] 제석(帝釋) 범천(梵天)과 아래로 일체의 동물(動物)과 나는 새와 기는 짐승에 이르기까지, 각각 그들의 뜻을 알고 그 소원을 따라 다 교화하여 알맞은 자리를 얻게 합니다.
공덕이 있고 공덕이 없음을 환하게 통달하여 모든 사람의 행하고 멈춤을 다 알아보고 그 마음이 땅처럼 단단하니, 세상의 여덟 가지 일1)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도에서 벗어남이 없이 사람마다 지은 그 공덕에 알맞도록 사람들을 가르쳐 깨우치고, 그들이 좋아하는 일을 따르면서 일체가 다 그 은혜를 입도록 합니다.
닦은 계행(戒行)을 일체에게 다 베풀어 알맞게 지니도록 하면서 그 지혜로 두루 들어가지 못하는 곳이 없습니다. 일체를 대신하여 무거운 짐을 짊어졌으나 괴롭게 여기지도 않고 그 마음이 달라지지도 않습니다.
법을 알았다면 그 법으로 중생을 교화해야 합니다. 그 가르침을 받들어 싫어함이 없이 법을 베풀고 설법의 대가를 바라지 않으면서 보살의 선한 근본을 끊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왜냐 하면 부지런히 정진하여 그 근본을 길러야 하기 때문입니다.
보시를 싫어하거나 만족함이 없이 행해야 합니다. 일체를 다 아는 지혜[薩芸若]를 닦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지계(持戒)를 싫어하거나 만족함이 없이 행해야 합니다. 왜냐 하면 모든 사람을 공경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인욕을 싫어하거나 만족함이 없이 행해야 합니다. 부처의 몸을 얻기 때문입니다. 정진(精進)을 싫어하거나 만족함이 없이 닦아야 합니다. 모든 공덕을 모으기 때문입니다. 선정(禪定)을 싫어하거나 만족함이 없이 닦아야 합니다. 바랄 대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혜(智慧)를 싫어하거나 만족함이 없이 닦아야 합니다. 왜냐 하면 생각하지 못할 일이 없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법을 봉록(俸祿)으로 삼아서 스스로 의지하여 살아갈 수 있다면, 일체에 머뭇거릴 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총지(摠持)라고 합니다.
총지란 모든 법을 다 거둬 지니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지니겠습니까. 공(空)의 경지와 모양이 없는 경지와 소원이 없는 경지와 욕심이 없는 경지와 집착의 대상이 없는 경지와 보는 대상이 없는 경지를 지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기는 일도 없고 만드는 일도 없이 짓는 것이 지니는 법입니다.
또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으며, 머물지도 않고 어지럽지도 않으며, 일어나지도 않고 무너지지도 않습니다. 또 지닐 일도 없고 맡을 일도 없으며, 벗어나도 벗어났다는 생각이 없으며, 머물 곳도 없고 머물지도 않습니다. 또 우리도 없고 나도 없으며, 수명도 없고 사람도 없으며, 잡을 일도 없고 놓는 일도 없으며, 진실하지도 않고 허망하지도 않으며, 들을 일도 없고 보는 일도 없습니다. 그리고 허공처럼 칭찬하는 일도 없고, 접촉하는 일도 없으며, 느끼는 일도 없습니다. 이렇게 모든 법을 지니기 때문에 총지라고 합니다.
또 총지법문이 있으니, 모든 법을 환영(幻影)처럼 지닙니다. 비유하면 꿈과 같고 아지랑이와 같습니다. 비유하면 물보라와 같고 물거품과 같습니다. 또 비유하면 환상(幻像)의 변화와 같습니다. 이렇게 모든 법을 다 지니기 때문에 총지라고 합니다.
또 총지법문이 있으니, 무상(無常)으로 모든 법을 지닙니다. 비록 볼지라도 나란 존재가 없고 고요합니다. 모든 법의 근본은 그 속을 벗어났으니, 법에 다툴 일이 없고 떨어지지도 않으며 정한 시기도 없습니다. 이렇게 모든 법을 지니기 때문에 총지라고 합니다.
비유하면 땅은 무엇이든지 다 지니고 있으나 괴롭게 여기지 않는 것처럼, 총지를 얻은 보살은 일체중생의 본보기가 됩니다. 헤아릴 수 없는 겁[阿僧祗劫] 동안 닦아 온 공덕을 다 모아 일체를 다 아는 지혜[薩芸若]를 일으켜마음에 지니지 않음이 없습니다. 이 수많은 공덕을 놓지 않고 지녔으나 번거롭게 여기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일체중생이 우러러보며 살아가는 땅과 같기 때문입니다. 마치 나무 등 만물이 살고 있는 땅처럼 총지를 얻은 보살은 일체중생에게 이익을 베풀어줍니다. 마치 움직이지도 않고 흔들리지도 않고 뜻에 맞추는 일도 없고 미워하는 일도 없는 땅처럼 총지를 얻은 보살은 일체중생을 위하여 공덕법을 일으킵니다. 또 마치 모든 비를 싫어하지 않고 다 받아들이는 땅처럼 총지를 얻은 보살은 모든 부처님과 일체의 보살과 성문과 벽지불의 묻는 법을 싫어하거나 만족함이 없이 받들어 행하며, 일체중생을 위한 설법도 싫어하지 않고 끊임없이 베풀어줍니다.
비유하면 열매를 속에 품은 온갖 종자들이 다 제때에 나올 수 있게 하는 땅처럼 총지를 얻은 보살은 과위(果位)를 속에 품은 모든 공덕법의 종자에 때를 잃지 않습니다. 바로 알맞은 때에 모든 법을 갖추고, 보리수(菩提樹)에 앉아서 일체를 다 아는 지혜를 떠나지 않습니다. 용감한 장수가 병사를 거느리고 적군을 굴복시키지 못하는 일이 없는 것처럼 총지를 얻은 보살은 이렇게 보리수[佛樹]에 앉아서 온갖 마군(魔軍)을 항복시킵니다. 그러므로 총지라고 합니다.
또 여기에 총지법문이 있으니, 모든 법을 가지는 일이 없습니다. 왜냐 하면 영원하면서도 영원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즐거움이나 괴로움도 없고, 몸이 있으면서 몸이 없으며, 사람도 없고 영원함도 없으니, 일체의 온갖 법을 가지는 일이 없습니다. 왜냐 하면 두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땅이 허공을 가지지 아니하듯 총지는 일체의 온갖 법을 가지는 일이 없습니다. 허공이 온갖 존재를 가지지 아니하듯 총지는 모든 법을 가지는 일이 없습니다. 물이 온갖 더러움을 가지지 아니하듯 총지는 모든 법을 가지는 일이 없습니다. 비유하면 열반에 이르렀으나 이른 자리가 없는 것처럼 총지는 가지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총지는 다함이란 말[盡]로 그 다함이 없음[無有盡]을 말할 수 없고 헤아릴 수도 없으므로, 들어가지 못할 곳이 없습니다. 들어가지 못할 곳이 없으므로, 이것을 공계(空界)2)라고 합니다. 그러니 총지와 공은 평등한 것입니다.”
문수사리보살이 이 총지법문(摠持法門)을 설하자, 5백 보살이 다 총지법(總持法)을 얻었다.
또 문수사리보살은 한밤중[二夜 : 中夜]에 보살장(菩薩藏)을 설했다.
“모든 법은 보살장에서 시작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공덕이 있는 법이든지 공덕이 없는 법이든지, 세속의 법이든지 출세간의 법이든지, 죄가 있는 법이든지 죄가 없는 법이든지, 남음이 있는 법이든지 남음이 없는 법이든지, 해탈하는 법이든지 해탈하지 않는 법이든지, 다 이 보살장에 들어갑니다. 왜냐 하면 모든 법을 닦아서 얻지 못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비유하면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가 백억 국토와 백억 일월과 백억 수미산과 백억 대해(大海)를 모두 다 그 안에 받아들인 것과 같습니다. 이와 같이 평범하지 않는 법이거나 도(道)가 아닌 법일지라도 다 그 보살장에 들어갈 뿐 아니라, 성문법(聲聞法)과 벽지불법(辟支佛法)과 보살법(菩薩法)도 다 보살장에 들어갑니다. 왜냐 하면 온갖 행을 다 거두어 지니기 때문에, 성문도 거두어 지니고 벽지불도 거두어 지니며 보살도 거두어 지니기 때문입니다. 마치 본래 뿌리가 깊고 단단한 나무는 줄기와 가지와 잎과 꽃과 열매도 훌륭한 것처럼, 보살장은 일체를 지니지 않음이 없고 일체를 이루지 않음이 없으니, 모든 공덕법(功德法)과 일체를 다 아는 지혜의 마음을 모두 지니는 것입니다.
또 보살장(菩薩藏)은 마치 바다가 크고 작은 온갖 강물을 받아들여 진귀한 보배를 간직하는 것처럼 한량없이 받아들이는 그릇이라고 합니다. 용 열차(閱叉 : 夜叉) 건타라(揵陀羅 : 乾闥婆) 진타라(眞陀羅 : 緊那羅) 마휴륵(摩休勒 : 滅伽) 등을 다 포용하여, 모두에게 알맞은 자리를 만들어주지 않음이 없습니다.
또 그 장(藏)은 헤아릴 수 없는 인연으로 이렇게 무수한 계(戒)를 받아들이고, 그 사이에 쌓은 삼매지혜(三昧智慧)의 소견(所見)으로, 그릇 속에받아들인 온갖 법을 못 보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보살장(菩薩藏)이라고 합니다.
비유하면 바다에 태어난 중생은 그 외 다른 물을 마시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 하면 모두 다 바닷물을 마시면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이 장에 있는 보살도 이 법만을 닦을 뿐, 외도의 법을 닦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일체를 다 아는 지혜의 법미[薩云若法味]만을 끝까지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보살장이라고 합니다.
또 이 보살장은 삼장(三藏)으로 나눠집니다. 삼장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성문장(聲聞藏)과 벽지불장(辟支佛藏)과 보살장(菩薩藏)입니다.
성문장은 다른 사람의 소리를 듣습니다. 왜냐 하면 그 소리를 듣고 법을 알기 때문입니다. 벽지불장은 12인연(因緣)을 인연합니다. 이 인연을 다 추구하여 이 경지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보살장은 헤아릴 수 없는 법에 들어가서 자연히 성불(成佛)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 성문과 벽지불을 따로 나눠서 보면, 그 삼장은 성문과 벽지불의 소유가 아닙니다. 이 법을 설할 때, 그 삼장(三藏)은 각각 행한 대로 얻습니다. 왜냐 하면 이 법을 설할 때, 그 성문과 벽지불과 보살은 각자의 행을 얻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삼장이라고 합니다. 보살법(菩薩法)에 이르면, 곧바로 삼장을 갖추게 됩니다. 왜냐 하면 불법(佛法)을 벗어나지 않는 성문과 벽지불도 갖추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또 삼장학(三藏學)이 있습니다. 삼장학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성문학과 벽지불학과 보살학입니다.
성문학(聲聞學)은 그 작용을 헤아릴 수 있으므로, 단지 스스로 밝힐 뿐이기 때문입니다. 벽지불학(辟支佛學)은 중간의 배움으로서 대비(大悲)를 베풀지 못합니다. 보살법은 헤아릴 수 없습니다. 법신(法身)에 들어갔으므로, 대비를 베풀기 때문입니다.
성문은 벽지불의 일을 배우지도 못하고, 벽지불의 일을 알지도 못합니다. 벽지불은 보살의 일을 배우지도 못하고, 보살의 일을 알지도 못합니다. 보살은 성문의 배움을 알면서도 좋아하지 않으니, 여기에 바랄 일도 없고, 여기에서 해탈을 구하지도 않습니다. 또 벽지불의 배움을 알면서도 좋아하지 않으니, 여기에서 해탈을 구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보살의 배움을 알면서 배우기를 좋아하고 스스로 기뻐합니다. 당연히 이 배움을 근거로 해탈을 얻기 때문입니다. 성문을 가르치기 위해 성문의 몸을 나타내고 성문의 행으로 그들을 교화합니다. 벽지불도 이와 같이 교화하니, 이러한 보살의 행을 보살장이라고 합니다.
마치 유리로 만든 그릇이 유리의 빛깔을 내는 것처럼, 보살장에 들어간 보살은 부처님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또 보살장에 들어간 보살은 모든 법을 다 불법으로 보면서, 모든 법을 다 불법으로 배우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왜냐 하면 모든 법을 부처님께서 증득하신 내용과 다름없이 보기 때문입니다.
그 보살장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문자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곳을 가르칩니다. 왜냐 하면 늘거나 줄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불가사의한 광명으로 어둠을 다 비추니, 하는 일은 지혜롭고 이익은 끝이 없습니다. 이렇게 일체를 다 아는 지혜[薩云若]에 들어감으로, 들어가지 못할 곳이 없습니다. 그 배움을 이렇게 배워야만 비로소 배움이라고 합니다. 그 배움으로 다 보살장에 들어가기 때문에 곧 대승[摩訶若那]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대승(大乘)이란 끝없는 지혜이니, 여기에 들어간 보살은 아직 여기에 들어가지 못한 이들을 들어갈 수 있도록 이끄는 것입니다.”
이 때 문수사리보살은 모든 보살을 위하여 설한 보살장(菩薩藏)의 일을 끝냈다.
또 문수사리보살은 세 번째 곳[三處 : 後夜]에서 ‘물러남이 없는 법륜의 금강행[阿惟越致輪金剛行]’을 설하였다. 이 법을 설했을 때, 보살들은 듣고 다 이 일을 깨달았다.
문수사리보살이 말했다.
“그 법륜(法輪)이란 일정하게 구르는 대상이 없습니다. 물러남이 없는 법륜은 대가를 바라는 일이 없으니, 그 마음이 일체중생과 다르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선과 악을 생각하지 않고 평등한 마음으로 법을 배우며, 모든 세계[諸佛刹]를 평등하게 보아 좋고 추함에 집착하지 않으며, 모든 부처님과 평등하여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법륜은 두루 들어가지 못하는 곳이 없습니다. 왜냐 하면 법신(法身)을무너뜨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물러남이 없는 법륜이라고 합니다.
그 법륜은 끊어지는 곳이 없습니다. 왜냐 하면 두 마음의 차별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법륜은 소견 그대로입니다. 왜냐 하면 법륜으로 성불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물러남이 없는 법륜이라고 합니다.
이 물러남이 없는 법륜을 따라 행하는 이는 다 온갖 생각에서 벗어나므로, 이를 믿는 이는 다 반드시 부처님과 같은 경지를 얻습니다. 두 일을 가지고 차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일을 따라서 해탈할 대상을 해탈하니, 여래께서 닦으신 경지[怛薩阿竭所因]와 다르지 않는 것입니다. 그 벗어날 곳을 벗어나면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법에 생각을 두면 해탈하지 못합니다. 왜냐 하면 해탈에는 둘이 없기 때문입니다. 왜냐 하면 몸과 입과 뜻이 없기 때문입니다. 왜냐 하면 해탈이란 몸과 입과 뜻에 따르지 않음을 해탈이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닦는 사람은 자신을 따를 뿐 다른 사람을 따르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물러남이 없는 법륜이라고 합니다.
그 법륜은 색(色)을 굴리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그 색은 자연 그대로 진실하기 때문입니다. 수(受 : 痛痒)와 상(想 : 思想)과 행(行 : 生死)과 식(識)도 역시 굴리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그 식(識)은 자연 그대로 진실하기 때문입니다.3)일체의 법도 굴리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법신(法身)은 법을 굴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를 물러남이 없는 법륜이라고 합니다.
그 법륜은 들어가는 대상이 끝이 없습니다. 왜냐 하면 끊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법륜은 집착할 대상도 없고, 끊기지도 않습니다. 왜냐 하면 그 법륜은 문이 없기 때문입니다. 왜냐 하면 두 마음의 차별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진실한 도리는 구르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법륜은 알 수도 없습니다. 왜냐 하면 그 소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그 형상을 볼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그 진실한 도리는 공(空)하여 해탈의 경지에 도달하나, 도달한 곳이 있을 수 없습니다. 비유하면 허공이 들어가지 못할 곳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 하면 들어가지 못할 곳 없이 본 바탕을 해탈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법륜은 다니는 능력도 있고 걷는 능력도 있습니다. 다니는 능력이란 무엇이며, 걷는 능력이란 무엇이겠습니까. 금강이 온갖 보배를 뚫는 것과 같습니다. 어떻게 그 법을 뚫겠습니까. 비유하면 공(空)으로 일체를 뚫어버림과 같습니다. 이를 근거로 법이라고 이름하며, 온갖 생각에서 벗어남이 금강입니다. 왜냐 하면 일체의 온갖 구하는 대상을 뚫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소원을 벗어난 이[無願者]는 금강으로 뚫어버리듯 아직 해탈하지 못한 모든 이들을 해탈시키고, 법신의 경지에 든 이는 금강처럼 어지러운 모든 것을 공(空)으로 다스리며, 여래의 경지에 든 이는 금강처럼 다 뚫어버리고 소유하지 않습니다. 그 금강처럼 해탈한 이는 해탈하지 못한 이들보다 뛰어나며, 열반에 든 이는 모든 법을 자연 그대로 진실하게 봅니다.”
문수사리보살이 모든 보살을 위하여 이 물러남이 없는 법륜을 다 설했을 때, 보살들은 다 일광명화삼매(日光明花三昧 : 羅毘拘速三昧)에 들었다. 그 보살들이 그 삼매에 들면서, 몸의 털마다 억백천의 광명을 놓자, 그 낱낱 광명마다 억백천의 좌불(坐佛)이 나타났다. 또 그 낱낱 부처님께서는 다른 세상에 이르러서 불도(佛道)를 구하는 이들을 교화하셨다.
다음날 아침 아사세왕은 문수사리의 처소로 사자(使者)를 보내어 자신의 뜻을 전했다.
“때가 되었사오니 부디 대비(大悲)를 베푸시어 보통사람으로 굽히시고 왕림하여 주옵소서.”
이 때 마하가섭(摩訶迦葉)이 5백 비구와 함께 성에 들어가서 공양을 얻으려고[分衛] 길을 나섰다. 그러나 반쯤 가다가 너무 이르다고 생각하여 발길을 돌렸다. 지나는 길에 비구들과 함께 문수사리보살을 뵙고 문안인사를 드리기 위하여 문수의 처소로 가서 모두 문 밖에 멈춰 섰다.
문수사리보살이 마하가섭에게 물었다.
“지금 이렇게 일찍 어디로 가시는 길입니까?”
가섭이 말했다.
“공양을 얻으려고 나선 길입니다.”
문수사리보살이 또 마하가섭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당신과 함께 가서 공양하고 싶습니다.”
마하가섭이 말했다.
“그 말씀만으로도 이미 공양을 충분히 받았습니다, 왜냐 하면 법을 위하여 여기에 온 것일 뿐, 공양을 받기 위하여 온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문수사리보살이 마하가섭에게 말했다.
“모든 비구와 함께 이 공양법회에 가시면 법도 듣고 공양도 하게 됩니다. 왜냐 하면 그 법도 잃지 않고 그 공양도 잃지 않으니, 둘을 한꺼번에 얻기 때문입니다.”
마하가섭이 답했다.
“우리들은 언제나 음식은 참고 먹지 않을지라도 그 법은 반드시 들어야 합니다. 왜냐 하면 온갖 깊은 법은 낱낱이 언제나 이러한 법회가 아니면 들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하가섭은 또 물었다.
“오늘 뛰어난 보살들과 함께 공양할 예정이십니까?”
문수사리보살이 말했다.
“이제 공양법회의 그 사람들은 생사를 떠나지도 않고, 열반에 들지도 않으며, 욕망의 일을 뛰어넘지도 않고, 도를 증득하지도 않습니다. 또 공양법회에 차린 음식도 늘어나는 일이 없고 줄어드는 일도 없으며, 모든 법을 가지는 일도 없고 버리는 일도 없습니다.”
마하가섭이 말했다.
“이러한 보시야말로 더없이 훌륭한 보시입니다.”
문수사리보살이 말했다.
“청을 허락한 것으로 알겠습니다.”
문수사리보살은 홀로 생각하였다.
“이제 마땅히 성(城)에 들어가서 부처님께서 내리시는 감동과 다름없는 감동을 보이리라.”
이렇게 생각한 문수사리보살은 바로 ‘모두가 다 감동하는 삼매[無所不感動三昧]’에 들었다. 그러자 곧 인(忍)세계는 평평한 거울처럼 변하여 모든 언덕과 산 등 일체는 다 사라져 나타나지 않았다. 또 그 광명은 닿지 않는 곳이 없으니, 이 광명으로 지옥중생은 다 괴로움이 없어져서 편안해졌다. 이 광명으로 세상의 모든 사람은 다 탐[婬] 진[怒] 치(癡)가 없어지고 질투심도 없어지고 교만도 없어지면서, 그럴 생각조차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자 모든 사람은 다 자애로운 마음으로 번갈아 서로 보면서 아버지와 어머니처럼 존경하였다.
때 맞춰 땅이 여섯 가지로 진동을 반복하는 가운데, 모든 욕계천자(欲界天子)와 색계천자(色界天子)는 온갖 음악으로 문수사리보살께 공양하면서 하늘 꽃을 비 내리듯 뿌렸다.
문수사리보살이 고요한 경지[止 : 奢摩他]를 떠나지 않고 성문(城門)에 들어서자 성문은 매우 깨끗하고 장엄하게 정돈되었고, 온갖 꽃으로 장식된 교로장(交露帳)은 도로의 두 변을 품었으며, 그 땅은 다 특별히 이름난 꽃으로 깔려 있고, 여러 가지 진귀한 보배의 휘장이 그 위를 덮고 있었다. 그 길의 너비는 여섯 길 석자로서 두 변에는 난간이 둘러져 있는데, 난간의 사이마다 온갖 보배로 변화한 나무들이 줄을 지어 길의 두 변에 늘어섰고, 모든 나무는 보배 끈에 매인 채 연달아 서로 이어졌으며, 그 나무들은 각각 사방으로 40리까지 향기를 풍겼다.
또 두 나무 사이마다 변화하여 못이 생겨났다. 그 못의 주변은 유리로 장식된 보배의 옹벽[擁障]이 둘러져 있고, 그 못 바닥에는 온통 황금 모래가 깔려 있으며, 그 물은 여덟 가지 맛을 내었다. 못 안에는 온갖 꽃들이 피어나고, 오리와 기러기와 원앙새들은 그 사이를 날아다니면서 즐겼다.
또 낱낱 나무마다 밑둥치에는 여러 가지 보배로 만들어진 단[]이 갖춰져 있고, 그 단마다 놓여 있는 진귀한 보배의 향로에서는 각각 다 이름난 향들이 타고 있었다. 그리고 낱낱 단마다 각각 백 명의 여인들이 손에 연꽃과 이름난 전단향(栴檀香)을 들고 서 있었다.
문수사리보살은 이 삼매의 위신력(威神力)으로 변화시키지 못하는 일이 없었다. 문수사리보살은 자리에서 일어나 의복을 바르게 고쳐 입으면서 마하가섭에게 말했다.
“저보다 앞서서 가십시오. 나는 이제 곧 뒤를 따르겠습니다. 왜냐 하면 나이가 많은 어른이며, 또 부처님보다 먼저 사문(沙門)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저보다 앞서서 가야 합니다.”
마하가섭이 즉시 답했다.
“그 법은 앞과 뒤가 없으니, 나이로 어른과 아이를 따지지 않습니다.”
문수사리보살이 말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어른을 정합니까?”
마하가섭이 답했다.
“지혜를 갖춰야 어른이고, 학문이 매우 많아야 어른이며, 지은 공덕이 많아야 어른이고, 모든 사람의 소행을 샅샅이 알아야 어른입니다.”
마하가섭이 또 말했다.
“문수사리보살은 지혜도 있고 학문도 원만하게 갖췄으며, 지은 공덕도 많고, 모든 사람의 소행도 환하게 압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어른이라고 해야 합니다.”
마하가섭이 또 이어 말했다.
“이렇게 보면 문수보살은 이제 그 연륜(年輪)이 훌륭하니, 어른으로 받들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저보다 앞서서 가야 하고, 저는 기꺼이 뒤를 따라야 합니다.
지금 비유를 들어보려고 하니, 부디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새끼사자를 들어보겠습니다. 새끼사자는 작아서 비록 큰 사자의 담력과 기력은 따르지 못할지라도, 어른 사자에게서 받은 담력(膽力)과 기력의 냄새를 풍기고 다니므로, 온갖 나는 새와 기는 짐승은 그 냄새를 맡고 모두 두렵게 여깁니다.
또 이 사자새끼를 여섯 개의 어금니로 60년을 살아온 큰 코끼리에 비유해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 코끼리를 가죽끈으로 묶어 놓았을지라도, 사자새끼가 그 가죽끈 근처에 들어서면, 그 큰 코끼리는 그 냄새를 맡고 놀라서 가죽끈을 끊어버리고 당장 산으로 달아나 버립니다.
비록 발심한 보살이 아직 공덕의 힘을 갖추지 않았을지라도, 성문과 벽지불이 감당할 상대가 아니니, 온갖 마군(魔軍)이 그 보살을 본다면 놀란 나머지 허리를 움츠리고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그 사자새끼는 큰 사자의 울부짖음과 그 외 온갖 행을 보고도 겁내거나 당황하거나 두렵게 여기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오히려 두렵기는커녕 배로 더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보살도 부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보고도, 그 마음에 겁내거나 당황하거나 두렵게 여기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두렵기는커녕 오히려 배로 더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제가 받은 감동도 당연히 이와 같습니다.”
사리불이 말했다.
“그 훌륭한 어른을 따진다면, 성문과 벽지불보다 보살의 마음을 일으킨 분이 훌륭한 어른입니다. 왜냐 하면 그 구하는 일마다 보살의 마음으로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마하가섭이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문수사리보살은 이 경우에 훌륭한 어른이니, 마땅히 앞서서 가야 하고 우리들은 뒤를 따라가야 합니다.”
그러자 문수사리보살은 앞장서 나섰고, 모든 보살은 그 뒤를 따랐으며, 성문들은 다 또 그 뒤를 따랐다. 길에 들어서자 하늘에서는 꽃이 비 오듯 내려왔고, 땅에서는 여섯 가지 진동이 반복되었으며, 모든 하늘은 즐거운 음악을 연주하였고, 광명은 일체를 밝히지 않음이 없었다. 이 행렬은 곧 왕사성[羅閱祇]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아직 성문 안까지는 들어서지 않았다.
이 때 아사세왕은 문수사리보살이 이른 아침에 2만 2천5백 보살과 5백 비구와 함께 왕사성에 도착하였다는 말을 전해 듣고 홀로 생각하였다.
“우리는 5백 사람의 공양만 준비했을 뿐인데, 이제 마땅히 무엇으로 공양을 마련하며, 모두 다 어디에 앉아야 하는가?”
이 때 휴식심(休息心)이란 천왕(天王)이 금비(金)라는 훌륭한 야차(夜叉 : 閱叉)와 함께 와서 아사세왕과 인사를 나누고 말했다.
“겁내거나 당황하지도 말고 곤란하게 여기지도 마십시오.”
아사세왕이 답했다.
“도대체 무슨 방법이 있기에 곤란하게 여기지 말라고 합니까?”
그들이 답했다.
“문수사리보살께서는 선교방편(善巧方便)의 끝없는 지혜를 일으켜서, 그 공덕의 광명을 원만하게 갖추고 오시는 길입니다. 그 신통의 공덕을 말한다면, 단 하나의 발우 음식만을 가지고 문수사리보살의 권속은 물론, 삼천대천세계의 모든 사람들까지 다 배불리 공양해도 그 음식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 정도의 2만 3천 사람을 두고 근심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곤란하게 여기지 마시라고 한 것입니다. 왜냐 하면 문수사리보살의 공덕은 매우 훌륭하여 끝이 없으니, 이제 다 충분히 마련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사세왕은 이 말을 듣자 기쁘고 근심이 없어졌다. 뛸 듯이 기쁜 마음으로 문수사리보살을 맞아드릴 온갖 일들을 다 갖춘 다음, 꽃과 향을 들고 음악을 연주하면서 곧 밖으로 나갔다. 얼마 후 문수사리보살과 그 일행을 맞이하고 그들과 함께 궁전으로 들어왔다.
이 때 보살들 가운데 보시실견(普視悉見)이라는 보살이 있었다. 문수사리보살은 바로 보시실견(普視悉見 : 三摩陀阿樓耆陀)에게 이 대중을 그 자리에 다 수용할 수 있도록 깨끗이 단장하라고 명했다. 그 보살은 분부를 받들고 즉시 사방을 두루 살펴보더니, 대중이 다 수용할 만한 장소를 마련하였다.
또 이 대중 가운데 법래(法來)라는 보살이 있었다. 문수사리보살은 이 보살에게 의자를 갖추도록 명하였다. 법래보살은 분부를 받들고 손가락 한 번 튀기는 사이에, 2만 3천 개의 의자를 갖춰 놓았다. 그 의자들마다 여러 가지 색깔의 피륙과 이름난 구슬로 아름답게 수놓은 비단 등 기이한 빛깔의 깔개들이 깔려 있었다. 문수사리보살과 모든 보살과 성문은 모두 다 자리로 가서 앉았다.
아사세왕은 문수사리보살 앞에 나아가 아뢰었다.
“준비한 공양이 너무 모자랍니다. 잠깐만 기다려 주시면 이제 다시 그 공양을 마련하겠습니다.”
문수사리보살이 답했다.
“이미 만들어 놓은 공양으로도 충분하니, 더 이상 수고롭게 마음을 쓰지 마십시오.”
유사문천왕(惟沙門天王)이 부인과 함께 시종들을 거느리고 문수보살의처소로 와서 예를 올린 뒤, 문수보살을 좌우에서 공손하게 모셨다. 석제환인(釋帝桓因)도 큰 부인 수야(首耶)와 함께 천녀(天女)들을 거느리고 왔다. 천녀들은 공양하기 위하여 가지고 온 이름난 향을, 문수사리보살과 뛰어난 보살들과 비구들을 향하여 뿌렸다. 그러나 뛰어난 보살들의 마음은 천녀들의 아름다움에 쏠리지도 않았고, 음악을 따라 움직이지도 않았으며, 꽃과 향을 따라 흔들리지도 않았다.
범천(梵天)은 스스로 매우 훌륭하고 단정하고 나이 어린 바라문(婆羅門)소년으로 변화하여, 부채를 들고 문수사리보살의 오른쪽을 모시고 서서 부채질하였으며, 범천(梵天)의 아들은 모두 다 부채를 들고 보살들과 비구승들의 왼쪽을 모시고 서서 부채질하였다
아뇩달(阿耨達)용왕은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나, 그 법회대중의 바로 위쪽 허공에서 꿴 구슬을 드리우니, 번기(幡旗)처럼 펄럭였다. 꿴 구슬에서는 여덟 가지 맛있는 물이 흘러내리게 되어 있어서, 물을 마시고 싶을 때는 다 이 물을 받아서 마실 수가 있었다. 그 꿴 구슬은 문수사리보살과 뛰어난 보살들과 비구승들의 앞마다 하나씩 따로따로 드리워져 있으므로, 거기에서 흘러나오는 물은 각자가 충분히 마실 수 있도록 공급되었다.
아사세왕은 또 홀로 생각하였다.
“여기에 오신 분들은 아무도 발우를 가지고 오지 않았으니, 이제 무슨 그릇으로 공양하시려는가?”
문수사리보살이 왕의 생각을 알고 말했다.
“이 보살들은 공양하는 곳마다 발우를 가지고 다니는 일이 없습니다. 공양할 때 발우를 생각하기만 하면, 곧바로 이 보살들의 세상으로부터 발우는 저절로 내려 와서, 그들의 손에 놓이게 됩니다.”
아사세왕은 또 문수사리보살에게 물었다.
“이 보살들은 다 어느 세상에서 왔으며, 그 부처님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문수사리보살이 말했다.
“그 세상의 이름은 상명문(常名聞 : 沙陀惟瞿陀)이라고 하며, 그 부처님의 이름은 유정수(惟淨首 : 惟首陀尸利)라고 합니다. 이들은 그 세상으로부터 와서 왕의 공양에 참석한 것입니다. 왜냐 하면 일부러 와서 법문도 듣고왕의 의심도 듣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보살은 발우를 생각하였다. 발우들은 곧바로 날라 왔다. 발우들은 짝을 지어 아뇩달(阿耨達)못으로 들어가서 물 속을 가득 채우더니, 다 저절로 씻겨졌다. 모든 용의 채녀(
女)들은 2만 3천 개의 발우를 들고 와서 상명문(常名聞)세상의 보살들에게 올리자, 그들은 각각 받아서 손에 들었다.
아사세왕은 문수사리보살을 모시고 서 있었다.
문수사리보살이 아사세왕에게 말했다.
“음식을 나누어 드리십시오.”
아사세왕은 분부를 받들어 모두에게 골고루 음식을 나눠 드렸다. 그러나 그 음식은 줄지 않고 이전대로 남아 있었다.
아사세왕은 또 아뢰었다.
“그 음식을 다 골고루 나눠 드렸으나 그 음식은 드리기 전과 다름이 없이 조금도 줄지 않습니다.”
문수사리보살이 말했다.
“지금은 없어졌습니까?”
아사세왕이 답했다.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문수사리보살이 말했다.
“아직도 없어지지 않는 까닭은 당신의 의심과 같기 때문입니다.”
보살들은 모두 공양을 끝내고, 발우를 들어 허공을 향하여 던졌다. 그러자 발우들은 줄을 지어 허공에 떠 있으면서 땅에 떨어지지도 않고, 흔들리지도 않았다.
아사세왕이 또 물었다.
“이 발우들은 무엇을 의지하여 멈춰 있습니까?”
문수사리보살이 답했다.
“이 발우들이 멈춰 있음은 당신의 의심이 멈춰 있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아사세왕이 또 말했다.
“이 발우들은 멈출 곳도 없고, 땅에 있지도 않으며, 의지할 곳도 없고, 처소도 없습니다.”
문수사리보살이 말했다.
“당신의 의심도 마찬가지로 머물 곳이 없으며, 모든 법도 발우와 같이 머물 곳도 없고 떨어질 곳도 없습니다.”
공양이 이미 끝났으므로 아사세왕은 의자를 잡아들고 문수사리보살 앞으로 바짝 다가앉으면서 아뢰었다.
“원하오니 저의 의심을 풀어 주옵소서.”
문수사리보살이 말했다.
“비록 항하의 모래와 같이 많은 부처님일지라도 당신의 그 의심을 설해주실 수 없습니다.”
이 말을 듣자 아사세왕은 너무 놀라서, 마치 큰 나무가 땅에 넘어지듯 의자에서 떨어졌다.
마하가섭이 아사세왕에게 말했다.
“놀라지 마십시오. 왜냐 하면 문수사리보살은 매우 깊이 선교방편(善巧方便)에 들어 있기 때문에 이 의심을 설할 수 있으니, 천천히 물어보십시오.”
아사세왕이 물었다.
“아까는 어째서 ‘항하의 모래와 같이 많은 부처님일지라도 나의 의심을 설할 수 없다’고 말한 것입니까?”
문수사리보살이 말했다.
“왕은 이미 지은 마음의 인연으로 부처님을 볼 수 있다고 말하겠습니까?”
왕이 답했다.
“아닙니다.”
문수사리보살이 물었다.
“마음으로 마음을 일으키면 부처님을 볼 수 있겠습니까?”
왕이 말했다.
“아닙니다.”
문수사리보살이 또 물었다.
“현재의 마음을 움직인다면 부처님을 볼 수 있겠습니까?”
왕이 말했다.
“아닙니다.”
문수사리보살이 또 물었다.
“생사와 해탈의 두 일을 다 붙들어 지닌다면 부처님이 되겠습니까?”
왕이 말했다.
“아닙니다.”
문수사리보살이 또 물었다.
“법을 두고 따라 행한다면 이 법의 혜택을 받겠습니까?”
왕이 말했다.
“아닙니다.”
문수사리보살이 또 물었다.
“이러한 법을 짓는다면 의심의 결단을 위해 설할 수 있겠습니까?”
왕이 말했다.
“아닙니다.”
문수사리보살이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당신의 의심은 항하의 모래와 같이 많은 부처님일지라도, 설할 수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만일 어떤 사람이 ‘나는 티끌로 허공을 더럽힐 수 있다’고 말한다면, 더럽힐 수 있겠습니까?”
왕이 말했다.
“더럽힐 수 없습니다.”
문수사리보살이 말했다.
“만일 어떤 사람이 허공의 때를 벗길 수 있다고 한다면, 벗길 수 있겠습니까?”
왕이 말했다.
“벗길 수 없습니다.”
문수사리보살이 말했다.
“부처님께서는 일체의 온갖 법이 다 허공과 같다는 것을 아십니다. 왜냐 하면 근본을 해탈하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법에 근본이 있다거나 해탈이 있다고 보는 일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왕의 의심은 항하의 모래와 같이 많은 부처님일지라도 설할 수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문수사리보살은 또 이어 말했다.
“여래[怛薩阿竭]의 경지는 안의 마음이나 밖의 마음도 얻을 수 없으니, 어느 곳에 의심을 일으키겠습니까. 왜냐 하면 일체의 온갖 법은 본래 다 해탈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무엇 때문에 또 다시 의심을 두겠습니까.”
문수사리보살은 또 이어 말했다.
“근본을 해탈한 이는 더 이상 공에도 집착하지 않습니다. 본래 온갖 법을 소유하지 않기 때문에 해탈이라고 합니다. 또한 자연도 아니고 성취할 일도 없으며, 볼 수도 없습니다. 모든 법은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법은 보이는 대상이 아니므로 볼 수가 없습니다.
모든 법을 말없는 경지[默然]라고 한 말은 생각으로 알 수 없는 경지라는 뜻이요, 모든 법이 생각이 없음은 이미 자연을 초월했다는 뜻이며, 모든 법을 초월하여 벗어남은 나고 죽음이 끊겼다는 뜻이요, 모든 법에 처소가 없음은 바라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법에 바라는 일이 없음은 나고 죽음이 없다는 뜻이요, 모든 법에 평등하여 집착하지 않음은 청정(淸淨)하다는 뜻이며, 모든 법이 다 청정함은 본래 안과 밖이 다 청정하다는 뜻이요, 모든 법에 짝할 대상이 없음은 벗이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법에 벗이 없음은 오직 한마음[一心]뿐이란 뜻이요, 모든 법을 오직 한마음뿐임은 해탈이란 뜻이며, 모든 법이 끝이 없음은 끊을 대상이 없다는 뜻이요, 모든 법에 변과 폭이 없음은 한계[度]가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법에 그 한계를 볼 수 없음은 작용하는 바가 다르다는 뜻이요, 모든 법이 작용하는 바가 달라서 지혜를 구함은 편안할 수 없다는 뜻이며, 모든 법이 무상(無常)함은 두 마음이 없다는 뜻이요, 모든 법이 다 편안함은 초월하여 청정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법을 다 결단함은 구할 대상이 없다는 뜻이요, 자연법(自然法)이 없음은 몸을 얻을 수 없다는 뜻이며, 모든 법에 의심이 없음은 안이 고요하다는 뜻이요, 모든 법을 속임은 참된 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법이 고요함은 안정되어 평온하다는 뜻이요, 모든 법에 우리가 없음은 나의 소유가 없다는 뜻이며, 모든 법이 남음이 없음은 해탈이란 뜻이요,
모든 법에 법을 굴리는 모임[所轉會上]이 없음은 생각이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법에 믿음을 다함은 집착하거나 끊을 대상이 없다는 뜻이요, 모든 법이 한 맛[一味]임은 해탈이란 뜻이며, 모든 법이 안온함은 모양이 없다는 뜻이요, 모든 법이 모양이 없음은 무너뜨릴 대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법이 다 공(空)함은 온갖 구함에서 벗어났다는 뜻이요, 모든 법에 바라는 일이 없음은 삼계(三界)라는 뜻이며, 모든 법이 3계(界)를 끊음은 과거와 미래와 현재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뜻이요, 일체의 온갖 법이 열반과 같다고 함은 아직 생겨나지 않는 것을 생겨나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문수사리보살이 이어 아사세왕에게 말했다.
“당초에 생긴 일이 없습니다. 당초에 생긴 일이 없는 것을, 과연 깨끗하게 맑힐 수 있겠습니까?”
왕이 말했다.
“깨끗하게 맑힐 수 없습니다.”
문수사리보살이 말했다.
“부처님께서는 모든 법이 열반 그대로임을 아시므로, 그 의심을 벗길 수 없습니다. 왜냐 하면 마땅히 바르게 머물러서 모든 법을 보기 때문입니다. 모든 법을 보고 나면, 취하는 일도 없고 버리는 일도 없으며, 또한 모든 법에 머무는 자리를 두지도 않습니다. 이미 모든 법에 머무는 자리를 두지 않았기 때문에 편안한 것입니다. 이미 편안해졌으니 곧 의심이 없고, 이미 의심이 없으니 곧 만들어내는 일이 없습니다. 만들어내는 일이 없는 것은 만드는 주체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 가운데서 마땅히 법인(法忍)을 일으켜야 합니다. 왜냐 하면 스스로 나는 모든 법을 사용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법은 만들 수 없음을 확실히 아는 것[忍]은, 할 수 있는 일이 바로 할 수 없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모든 법에는 만드는 일이 없고 만드는 주체도 없으며 만들 대상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열반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믿는 이는 평등하게 해탈하여 더하는 일도 없고 덜하는 일도 없습니다.
모든 법이 본래 없기 때문에 작용이 없으며, 작용의 주체도 다 본래 없는 것입니다. 그 본래 없는 것은 이것도 아니고, 이것이 아닌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본래 없는 것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이미 달라짐이 없다고 믿었다면, 모든 의심은 이미 다 사라진 것입니다.
그 눈은 더러움도 없고 깨끗함도 없습니다. 눈은 자연 그대로 진실합니다. 그러므로 본래 없는 것입니다. 본래 없는 것은 자연 그대로이기 때문에 눈이라고 합니다. 귀 코 입 몸 뜻도 역시 더러움도 없고 깨끗함도 없습니다. 그 뜻[意]은 자연 그대로 진실합니다. 그러므로 본래 없는 것입니다. 본래 없는 것은 자연 그대로이기 때문에 뜻이라고 합니다.
색(色)은 또한 본래 없습니다. 본래 없는 것은 자연 그대로 진실합니다. 색(色) 수(受 : 痛痒) 상(想 : 思想) 행(行 : 生死) 식(識)도 역시 더러움도 없고 깨끗함도 없습니다. 식(識)은 자연 그대로 진실하여 본래 없습니다. 본래 없는 것은 자연 그대로 진실하기 때문에 식(識)이라고 합니다.
일체의 온갖 법은 더러움도 없고 깨끗함도 없습니다. 모든 법은 자연 그대로 진실하여 본래 없습니다. 본래 없는 것은 자연 그대로이기 때문에 모든 법이라고 합니다.
그 마음도 볼 수 없고, 색(色)도 가질 수 없습니다. 왜냐 하면 마치 환영(幻影)처럼 안에 있다고 말할 수도 없고, 밖에 있다고 말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본래 깨끗하기 때문에 더러움이 없는 것입니다. 그 마음의 근본은 받아들임도 없고 불어나지도 않으며, 번거롭지도 않고 걱정하지도 않으며 근심하지도 않습니다. 이 법을 듣는다면 의심할 곳이 없습니다. 근본이 달라지고 생각이 달라지기 때문에 더러움이 있는 것입니다. 근본이 달라지고 생각이 달라짐이란 본래 없는 것이니, 달라짐이 있도록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왕은 마땅히 근본이 달라지고 생각이 달라진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문수사리보살이 물었다.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나는 허공을 연기와 티끌로 더럽힐 수 있노라’고 말한다면, 허공을 더럽힐 수 있겠습니까?”
왕이 말했다.
“더럽힐 수 없습니다.”
문수사리보살이 말했다.
“그 마음은 본래 청정하기 때문에, 탐[貪] 진[怒] 치(癡)가 없으니, 이본래 청정한 마음에 또 무엇이 온다고 말하겠습니까? 만일 재 티끌 연기 안개 구름 등 다섯 가지가 허공에 나타난다면, 그것들을 다 볼 수는 있으나 허공을 더럽혔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비록 어떤 사람이 ‘이것은 내가 만든 일이다. 내가 만든 일이 아니다’라고 말하면서 그대로 탐 진 치를 두고 있을지라도, 본래 청정한 마음에는 더러움이 일어나지도 않고 의심이 생기지도 않습니다. 왜냐 하면 마음이 본래 작용하는 일이 있을지라도, 뒤의 마음을 막을 수 없고, 뒤의 마음은 앞 마음을 막지 못하며, 현재의 마음도 처소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 지혜를 갖춘 이는 이미 이 작용하는 마음에 바랄 일이 없음을 분명히 알고 바라는 일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청정한 모양입니다. 일체의 온갖 법은 더러움도 없고 밝지 않음이 없으면서, 생기는 일도 없고 처소도 없습니다.
처소가 없는 경지는 부처님이 출생하는 자리이니, 부처님이 출생하는 자리를 모든 법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법은 부처님이 출생하는 자리이므로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지혜는 모든 법을 해탈함이 없이 법으로 모든 의심을 해탈하여, 소유하지도 않고 법을 벗어나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의심은 법신(法身)에 속합니다. 그래서 법신은 모든 법에 들어가지 못함이 없으나 법신이 들어간 곳을 볼 수 없다고 합니다. 왜냐 하면 모든 법이 바로 법신이므로 모든 법이 평등함과 같이 법신도 평등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법은 법신에 들어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법을 설하자, 아사세왕은 기쁜 믿음의 법인[歡喜信忍]을 얻고 뛸 듯이 기뻐하면서 말했다.
“참으로 훌륭하게도 저의 의심을 풀어주셨습니다.”
문수사리보살이 답했다.
“이거야말로 더 큰 의심입니다. 좀 전에 말한 법도 바탕이 없이 텅 비었는데, 어디에서 의심을 얻었으며, 어디에서 의심을 듣고 풀렸다는 것입니까?”
아사세왕이 말했다.
“큰 은혜를 입고 조금 나아졌으니, 이제 저는 목숨이 다할 때까지 근심하지 않고 틀림없이 열반에 이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문수사리보살이 말했다.
“비록 왕이 희망을 가진다고 해도 그 일은 바탕이 없습니다. 왜냐 하면 모든 법은 본래 열반이므로 생긴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사세왕은 곧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억백천의 값에 해당하는 훌륭하고 진귀한 옷[疊]을 가지고 와서, 문수사리보살의 몸에 입히려고 하였다. 그러자 문수사리보살의 몸은 곧 사라져 나타나지 않았다. 그 옷은 그 곳 바로 위 허공에 떠 있었다. 단지 소리만 들릴 뿐, 모습은 보이지 않고 말소리만 들려왔다.
“지금 문수사리의 몸을 보는 것처럼, 왕은 스스로 의심을 보아야 합니다. 의심을 볼 수 없는 것처럼 모든 법도 그렇게 보아야만 보이는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또 이어 공중에서 그 소리가 들려왔다.
“몸이 보이는 분에게 그 옷을 주십시오.”
아사세왕은 문수사리의 다음자리에 앉아 있는 득상원(得上願)이란 보살에게 그 옷을 받들어 올렸다.
그 보살은 말했다.
“만일 해탈(解脫)과 열반(涅槃)을 구한다면, 나는 그대로부터 받을 것이 없습니다. 또 소유욕(所有慾)을 가진 범부에게서도 받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범부는 세속의 일에 묻혀 있기 때문에 받지 않는 것입니다. 또 나한(羅漢)이나 벽지불을 구하는 이에게서도 받지 않으며, 여래의 법[怛薩阿竭法]을 구하는 이에게서도 받지 않습니다.
만일 이 법에 가까이하지도 않고 이 법을 떠나지도 않는다면, 나는 이 물건을 받습니다. 그 베풀어주는 이도 두 마음의 차별이 없어야 하고 그 받는 이도 두 마음의 차별이 없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받은 물건도 해탈보다 뛰어난 것입니다.”
왕은 그 옷을 보살에게 입히려고 하자, 그 보살은 홀연히 사라져버리니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모습은 보이지 않고 단지 그 말소리만 들려왔다.
“그 몸이 나타나 있는 분에게 옷을 주십시오.”
아사세왕은 그 다음 자리에 앉아 있는 견제환(見諸幻)이란 보살에게 그옷을 받들어 올리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