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설수신세경(佛說受新歲經)
서진삼장(西晋三藏)축법호(竺法護) 한역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바가바께서는 라열기성(羅閱祇城:王舍城)의 가란타(伽蘭) 대나무 동산에 계시면서, 큰 비구들과 함께 해를 지내셨다. 그 때에 존자 대목건련(大目揵連)은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여러분, 비구로서 해를 지냈으면 그대는 마땅히 말하고 가르치며, 훈계하
고 사랑하라. 그것이 제일이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인가. 여러분, 혹 어떤 사람은 반대하고 거슬려 가르치기 어려워, 나쁜 법과 함께한다. 이른바 범행자(梵行者) 또한 말하지 않고 가르치지도 않으며, 훈계하지도 않고 또한 사랑하지도 않는다. 그는 제일이기 때문이다. 여러분, 어떤 것이 반대하고 거슬러서 가르치기 어려운 것인가. 이른바 범행과 함께하는 이도 말하지 않고 가르치지 않으며, 훈계하지도 않고 또한 사랑하지도 않는다. 그 사람은 제일이기 때문이니라.
여러분, 혹 어떤 사람은 나쁜 욕구(欲求)를 가지고 나쁜 욕구와 함께한다. 여러분, 이른바 그 사람이 나쁜 욕구를 가지고 나쁜 욕구와 함께하면, 그 법은 반대하고 거슬러서 가르치기 어려운 것이다. 이와 같이 물듦[染]ㆍ탐욕ㆍ성냄ㆍ원한ㆍ아낌ㆍ미워함ㆍ버리지못함[不捨]ㆍ아첨[諛諂]ㆍ꼭두각시[幻]ㆍ부끄러움이 없음[無羞]ㆍ번뇌[恚結]ㆍ말로 짓는 번뇌 또한 그러하다. 비구가 말하면 그 말을 갚고, 비구가 말하면 여럿에게 퍼뜨리며, 비구가 말하면 비방하여 제각기 말하고 남에게 말해 원수를 맺으며, 나쁜 벗과 널리 사귀고 나쁜 동무와 짝하며, 은혜를 알지 못하고 갚을 줄을 모른다. 여러분, 이른바 그 사람이 은혜를 알지 못하고 또 갚음이 없으면, 이것이 반대하고 거슬러서 가르치기 어려움이니, 여러분, 이것을 반대하고 거슬러서 가르치기 어려운 법이라 하느니라. 이른바 범행과 함께하는 이도 말하지도 않고 가르치지도 않으며, 훈계하지도 않고 또한 사랑하지도 않나니, 그 사람은 이른바 제일이기 때문이니라.
여러분, 비구는 마땅히 스스로 생각하여야 한다. 이른바 그 사람은 나쁜 욕구를 가지고 나쁜 욕구와 함께하나니, 그것은 내가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만일 내가 나쁜 욕구를 가지고 나쁜 욕구와 함께하면, 남도 또한 나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비구는 평등하게 관찰하여 나쁜 욕구를 가지지 말기를 배워야 한다.
이와 같이 물듦ㆍ탐욕ㆍ성냄ㆍ원한ㆍ아낌ㆍ미워함ㆍ버리지 못함ㆍ아첨ㆍ꼭두각시ㆍ부끄러움 없음ㆍ번뇌ㆍ말로 짓는 번뇌도 또한 그러하다. 비구가 말하면 그 말을 갚고, 비구가 말하면 여럿에게 퍼뜨리며, 비구가 말하면 비방하여 제각기 말하고 남에게 말하여 원수를 맺으며, 나쁜 벗과 널리 사귀고 나쁜 동무와 짝하며, 은혜를 알지 못하고 갚을 줄을 모른다. 또한 여러분, 이른바 그 사람이 은혜를 알지 못하고 또 갚음이 없으면, 나는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 만일 내가 은혜를 알지 못하고 또 갚음이 없으면, 남도 또한 나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비구는 평등하게 관찰하여, 갚음이 없지 않기를 마땅히 배워야 하느니라.
여러분, 비구가 만일 해를 지내지 못하였더라도 그대는 마땅히 말하고 가르치며, 훈계하고 사랑하라. 이른바 제일이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인가. 여러분, 혹 어떤 사람은 반대하고 거스름이 없어 교법(敎法)과 함께한다. 이른바범행과 함께하는 이는 마땅히 말하고 가르치며, 훈계하고 사랑하나니, 그 사람은 제일이기 때문이다.
여러분, 어떤 것을 반대하고 거스름이 없이 교법과 함께하는 것이라 하는가. 이른바 범행과 함께하는 이는 마땅히 말하고 가르치며, 훈계하고 사랑하나니, 그 사람은 제일이기 때문이다.
여러분, 혹 어떤 사람은 나쁜 욕구가 없어 나쁜 욕구와 함께하지 않는다. 여러분, 이른바 그 사람이 나쁜 욕구가 없어 나쁜 욕구와 함께하지 않으면, 이 법은 반대하거나 거스름이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물들거나 탐욕하지 않고, 성내거나 원한을 내지 않으며, 아끼거나 미워하지 않고, 아첨하거나 꼭두각시질하지 않으며, 부끄러움이 없지 않고 번뇌가 없으며, 입으로 말하여 번뇌를 짓지 않는다. 비구가 말하여도 말로 갚지 않으며, 비구가 말하여도 여럿에게 말하지 않고, 비구가 말하여도 비방하지 않으며, 제각기 말이 있거나 바깥에 내지 않고, 성냄과 원한을 두루 펴지 않으며, 나쁜 벗과 사귀지 않고, 나쁜 동무와 짝하지 않으며, 은혜를 업신여기지 않고, 또 갚음이 없지 않다. 여러분, 이른바 그 사람은 이렇게 교법과 함께하나니, 이것을 반대하거나 거슬르지 않고 교법과 함께하는 것이라 한다. 범행과 함께하는 이는 마땅히 말하고 가르치며, 훈계하고 사랑하나니, 그 사람은 제일이기 때문이니라.
비구는 마땅히 스스로 생각하여야 한다. 여러분, 이른바 그 사람이 나쁜 욕구가 없어 나쁜 욕구와 함께하지 않으면 그것은 내가 사랑하는 바이다. 만일 내가 나쁜 욕구가 없어 나쁜 욕구와 함께하지 않으면 남도 또한 나를 사랑할 것이다. 비구는 평등하게 관찰하여 나쁜 욕구를 가지지 않기를 배워야 한다. 이와 같이 물들거나 탐내지 않고, 성내거나 원한을 내지 않으며, 아끼거나 미워하지 않고, 버리지 않음이 없으며, 아첨하거나 꼭두각시질하지 않고, 부끄러움이 없지 않으며, 번뇌가 없고, 입으로 말하여 번뇌를 짓지 않는다.
비구가 말하여도 말로 갚지 않고, 비구가 말하여도 여럿에게 말하지 않으며, 비구가 말하여도 비방하지 않고, 제각기 말이 있거나 바깥에 말하지 않으며, 성냄과 원한을 두루 가지지 않고, 나쁜 벗과 사귀지 않고, 나쁜 동무와 짝하지 않으며, 은혜를 업신여기지 않고, 또 갚음이 없지도 않다. 여러분, 이른바 그 사람이 은혜를 업신여기지 않고, 또 갚음이 없지도 않으면, 나는 그를 사랑한다. 만일 내가 은혜를 업신여기지 않고, 또 갚음이 없지도 않으면, 남도 또한 나를 사랑할 것이다. 우리 비구들은 평등하게 관찰하여, 은혜를 업신여기지 않고, 또 갚음이 없지도 않기를 배워야 하느니라.
여러분, 비구들은 관찰하여 ‘나는 나쁜 욕구를 가지고 나쁜 욕구와 함께한다’고 알면, 그는 기뻐하지 않아, 곧 나아가 그치고자 한다. 여러분, 비구가 관찰하여 ‘나는 나쁜 욕구를 가지고 나쁜 욕구와 함께하지 않아야 한다’고 알면, 그는 곧 청정한 것을 기뻐하여, 부처님의 경계를 보고, 본 뒤에는 즐거이 행한다.
여러분, 그것은 마치 눈이 있는 사람이 지극히 깨끗한 거울을 가지고 자기 얼굴을 보는 것과 같다. 여러분, 그 눈이 있는 사람이 자기 얼굴에 때가 있는 것을 보면 곧 기뻐하지 않고 나아가 그 때를 없애고자 한다. 여러분, 그 눈이 있는 사람이 자기 얼굴에 때가 없는 것을 보면 곧 깨끗한 것을 기뻐하고, 그것을 본 뒤에는 즐거이 행하느니라.
이와 같이 여러분, 비구는 관찰하여 ‘나는 나쁜 욕구를 가지고 나쁜 욕구와 함께한다’고 알면, 그는 곧 나아가 그 욕구를 없애고자 한다. 여러분, 비구가 관찰하여 ‘나는 나쁜 욕구를 나쁜 욕구와 함께하지 않아야 한다’고 알면, 그는 곧 청정한 것을 기뻐하여 부처님 경계에 머무르고, 그것을 본 뒤에는 즐거이 행한다.
이와 같이 물듦과 탐욕에 머물러 물듦과 탐욕이 아닌 데에 머무르지 않고, 성냄과 원한에 머물러 성냄과 원한이 아닌 데에 머무르지 않으며, 아낌과 미워함과 버리지 않음에 머물러, 아낌과 미워함과 버리지 않지 않은 데에 머무르지 않고, 아첨과 꼭두각시에 머물러 아첨과 꼭두각시 아닌 데에 머무르지 않으며, 부끄러움이 없음에 머물러 부끄러움이 없지 않은 데에 머무르지 않고, 번뇌와 입으로 짓는 번뇌에 머물러 번뇌하지 않고 입으로 짓지 않는 번뇌에 머무르지 않아서, 비구가 말하면 그 말을 갚아, 비구가 말하여도 그 말을 갚지 않은 데에 머무르지 않고, 비구가 말하면 여럿에게 말하여, 비구가 말하여 여럿에게 말하지 않는 데에 머무르지 않으며, 비구가 말하면 비방하여, 비구가 말하여도 비방하지 않는 데에 머무르지 않고, 제각기 말이 있어 바깥에 말하여, 각기 말이 있어도 바깥에 말하지 않는 데에 머무르지 않으며, 성내고 원한하여, 성내고 원한하지 않는 데에 머무르지 않고, 나쁜 벗과 널리 사귀고 나쁜 동무와 짝하여, 나쁜 벗과 사귀지 않고 나쁜 동무와 짝하지 않는 데에 머무르지 않으며, 은혜를 알지 못하고 갚음을 알지 못하여, 은혜를 업신여기지 않고 갚음이 없지 않은 데에 머무르지 않는다.
여러분, 비구가 관찰하여 ‘나는 은혜를 알지 못하고, 갚을 줄을 모른다’고 알면, 그는 곧 기뻐하지 않고 곧 나아가 그치고자 한다. 여러분, 비구가 관찰하여 ‘나는 은혜를 업신여기지 않고, 갚음이 없지 않은 데에 머무른다’고 알면, 그는 곧 청정한 것을 기뻐하고, 부처님 경계의 행을 보고, 본 뒤에는 즐거이 행한다.
여러분, 그것은 마치 눈이 있는 사람이 깨끗한 거울을 가지고 자기 얼굴을 비춰 보는 것과 같다. 여러분, 눈이 있는 사람은 자기 얼굴에 때가 있는 것을 보면, 곧 기뻐하지 않고 나아가 그 때를 없애고자 한다. 여러분, 그 눈이 있는 사람은 자기 얼굴에 때가 없는 것을 보면 곧 청정한 것을 기뻐한다.
이와 같이 여러분, 비구가 관찰하여 은혜를 알지 못하고 갚지 않는 데에 머무르는 것을 알면, 그는 곧 기뻐하지 않고 나아가 그치고자 한다. 여러분, 비구가 관찰하여 ‘나는 은혜를 알고 갚음이 없는 데에 머무르지 않아야 한다’고 알면, 그는 곧 청정한 것을 기뻐하고, 부처님 경계의 행을 스스로 보아 즐거이 행한다. 즐거이 행하고는 기뻐하고, 기뻐한 뒤에는 몸으로 믿어 행하고, 몸으로 믿어 행한 뒤에는 안락을 알고, 안락한 뒤에는 뜻이 안정하고, 뜻이 안정한 뒤에는 참뜻을 알고 참뜻을 보며, 참뜻을 알고 본 뒤에는 싫어함이 없고, 싫어함이 없은 뒤에는 물듦이 없으며, 물듦이 없은 뒤에는 해탈하고, 해탈한 뒤에는 해탈한 줄을 안다. 그리하여 생(生)은 이미 다하고, 범행은 이미 이루어지고, 할 일은 이미 마쳐, 뒷몸을 받지 않는다는 참뜻을 알게 되느니라.”
현자 목건련은 이와 같이 말하였다. 그 비구들은 존자 목건련의 말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불설수세경(佛說受歲經)
이 경은 거란장경[丹經]에서는 『수세경(受歲經)』이라 하는데, 거란본에는 있고 송본(宋本)에는 없으며, 송장경[宋藏]에서는 『수신세경(受新歲經』이라 하는데, 송본에는 있고 거란본에는 없다.
두 경을 살펴보면 모두 법호(法護)의 번역이라 하였고, 경명은 비록 조금 비슷하나 내용은 크게 다르니, 어느 것이 옳은지 그른지 알지 못하겠고, 또 어찌하여 두 장경에 서로 없는 것이 있는가?
권의 처음과 본(本)이 같고 번역이 다르다”라고 되어 있다.
단역록(單譯錄) 가운데 경함(竟函) 안에는 “『신세경(新歲經』은 축담무란(竺曇無蘭)[진(晉)나라 말로는 법정(法正)]이 번역했다”고 하였고, 주석에서는 “『중아함』의 대본(大本)에는 이들 경전이 없기 때문에 여기에 편집하였다”고 되어 있다.
지금 거란본 『수세경』을 조사해 보건대, 저 『중아함』 23권과 크게 같으니, 참으로 용함(容函)의 중역(重譯) 『수세경』이라 하겠다.
송본(宋本) 『수신세경』은 저 『중아함』과는 완전히 다르나, 경함(竟函)에는 『신세경(新歲經)』이란 이름을 붙였고, 글에 있어서는 비록 다르나 대지(大旨)는 다름이 없으니 아마 저 (중아함)경의 이역(異譯)인 듯하다.
그러나 지금 이 용함에 있는 송장경의 『수신세경』과 저 경함의 『신세경』을 단역(單譯)으로 여긴다면 어찌하여 자세함과 소략함[廣略]의 차이와 번역한 사람의 다름이 있는가? 또 이것(수세경)을 어찌하여 중역에 편집하였는가? 중역으로 여긴다면 저것(수신세경)을 어찌하여 단역에 배열하였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