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설불모보덕장반야바라밀경(佛說佛母寶德藏般若波羅蜜經) 01. 상권

불설불모보덕장반야바라밀경(佛說佛母寶德藏般若波羅蜜經)

서천(西天) 법현(法賢) 한역 번역

불설불모보덕장반야바라밀경(佛說佛母寶德藏般若波羅蜜經) 01. 상권

01. 행품(行品)

02. 제석품(帝釋品)

03. 지무량공덕건탑품(持無量功德建塔品)

04. 공덕품(功德品)

05. 복량품(福量品)

06. 수희공덕품(隨喜功德品)

07. 지옥품(地獄品)

08. 청정품(淸淨品)

09. 탄품(歎品)

10. 칭찬공덕품(稱讚功德品)

11. 마품(魔品)

불설불모보덕장반야바라밀경(佛說佛母寶德藏般若波羅蜜經) 02. 중권

12. 현세품(現世品)

13. 부사의품(不思議品)

14. 비유품(譬喩品)

15. 천품(天品)

16. 여실품(如實品)

17. 불퇴지상서품(不退地祥瑞品)

18. 공품(空品)

19. 앙아천자품(昻誐天姉品)

20. 선해방편품(善解方便品)

21. 마업품(魔業品)

22. 선우품(善友品)

불설불모보덕장반야바라밀경(佛說佛母寶德藏般若波羅蜜經) 03. 하권

23. 법왕품(法王品)

24. 아품(我品)

25. 계품(戒品)

26. 환화품(幻化品)

27. 묘의품(妙義品)

28. 산화품(散華品)

29. 취집품(聚集品)

30. 상환희품(常歡喜品)

31. 출법품(出法品)

32. 선호품(善護品)


불설불모보덕장반야바라밀경(佛說佛母寶德藏般若波羅蜜經) 01. 상권

01. 행품(行品)

이 때 세존께서 사부대중(四部大衆) 모두를 기쁘게 하기 위하여 이
『반야바라밀경(般若波羅蜜經)』을 말씀하시어 이익과 안락을 얻게 하셨다.

곧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세상에 있는 보살들은 세간을 위하여
개장(蓋障)1)과 번뇌의 더러움을 소멸시켜 없애고
청정하게 믿는 마음을 내어 적정(寂靜)에 머물되,
반드시 반야바라밀[智度]을 행하여 피안(彼岸)으로 가야 하네.



모든 강물이 염부제(閻浮提)로 흘러
꽃과 과일과 약초가 모두 윤기를 얻나니
용왕(龍王)이 무열뇌지(無熱惱池)에 머물러
저 용왕의 위력(威力)으로 강물을 흐르게 하는 까닭이네.



또한 보살[佛子]과 성문(聲聞) 같은 이들은
법을 말하여 방편설(方便說)로써 다른 사람 가르치고
가장 성스러운 행을 즐겨 행하며 과보(果報)를 구하게 하나니
이것은 모든 여래의 훌륭하신 위덕(威德)이네.



어찌하여 부처님께서 이 법안(法眼)을 말씀하시는가?
모든 제자들이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대로 배워
스스로 깨달아 다른 사람도 가르치는 방편을 삼게 하심이니
이 또한 부처님의 위신력(威神力)이요, 스스로의 힘이 아니네.



더없이 훌륭한 반야는 알 수 없는 것이어서
마음으로 알 것이 아니요, 보리(菩提)로도 알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듣고 나서 놀라지 말라.


저 보살행(菩薩行)을 행하면 부처님의 지혜를 알게 되리.



색(色)ㆍ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이 모두 없어
터럭이나 티끌만큼도 집착할 것이 없고 머물 곳도 없나니
저 보살이 어떠한 법에도 머물지 않으며
수(受)ㆍ상(想)이 없이 행하면 보리를 증득하리.



보살이 출세간의 지혜를 구하려 하면
오온(五蘊)에 실상(實相)이 없음을 비추어 보고
이것을 알고 나서 적정을 구하지 않아야 하나니
그것이 보살이 지혜행을 행하는 것이네.



다음에 또 어떻게 지혜를 증득하는가?
모든 법이 모두 공(空)함을 비추어 보아야 하나니
집착하지도 않고 놀라지도 않고 비추어 볼 때에
스스로 깨닫고 다른 이를 깨닫게 하는 보살이 되네.


색ㆍ수ㆍ상ㆍ행ㆍ식 등 이러한 오온(五蘊)은
보는 것으로도 행하는 것으로도[見行] 알 수 없나니
보살은 오온이 모두 공함을 비추어 보고
상이 없는 교화[無相化]를 행하고도 구(句)2)에 집착하지 않네.



색ㆍ수ㆍ상ㆍ행ㆍ식 등이 없다는 견해를 지니지 않고 수행하여야
이를 일컬어, 상이 없는 행[無相行]이라 하며
만약 그러한 견해로 수행하면 더없이 훌륭한 지혜와
상이 없음과 적정한 삼마지를 증득하지 못하리.



보살이 스스로 적정을 행하는 것은
과거의 모든 부처님께서 함께 기별을 주신 까닭이며
몸의 괴로움과 즐거움 등에 전혀 집착하지 않는 것은
인과법(因果法)의 본성(本性)을 알기 때문이네.



법(法)은 얻을 만한 것이 아님을 알고 행하면
이와 같이 행하는 것이 부처님의 지혜이며
행할 것이 없음을 분명히 알고 나서 행하면
이것이 더없이 훌륭한 반야행(般若行)을 행하는 것이네.



저 존재[所有]가 없다는 것도 증득할 만한 것이 아니거늘
어리석은 이들은 상(相)에 집착하여 있다 없다 말을 하나
있다 없다 하는 두 법이 모두 실제(實際)가 아니니
이를 벗어나 분명하게 아는 것이 바로 보살이네.



보살이 만약 모든 것이 허깨비[幼化]임을 알고
색ㆍ수ㆍ상ㆍ행ㆍ식도 또한 그러함을 알아
적정행(寂靜行)을 행하여 갖가지 상을 벗어나면
이것을 더없이 훌륭한 반야행이라 이름하네.



좋은 도반은 방편(方便)을 써서 『불모경(佛母經)』을 듣고도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않게 하며 이해하고 깨닫게 하지만
나쁜 도반은 똑같이 행하여 다른 이를 교화하더라도
배기(坏器)3)에 물을 담은 것과 같이 견고하지 않네.



어찌하여 보살이라 일컫는가?
어떠한 즐거운 행에도 전혀 집착하지 않고
부처의 깨달음을 구하되 집착이 없나니
이러한 까닭으로 보살이라 일컫네.



어찌하여 마하살이라 일컫는가?
제일의(第一義)를 얻고도 중생 속에 머물며
중생계(衆生界)의 모든 사견(邪見)을 끊어 없애나니
이런 까닭으로 마하살이라 일컫네.



큰 베풂과 큰 지혜와 큰 위덕으로
더없이 훌륭한 불승(佛乘)에 이르고
보리심(菩提心)을 내어 중생을 제도하니
이런 까닭으로 마하살이라 일컫네.



구지(俱胝) 수효만큼의 허깨비와 같은 네 발 달린 짐승들이
많은 사람이 모인 앞에서 모두 머리가 잘린다 해도
모든 세계(世界)가 모두 허깨비임을
보살은 이미 알아 두려움이 없네.



색ㆍ수ㆍ상ㆍ행ㆍ식에 묶여 있어도
실제(實際)가 아닌 줄 알아 풀려나기를 바라지 않으며
보리를 행하고도 마음에 집착이 없으면
이것을 더없이 훌륭한 보살이라 일컫네.



어찌하여 보살이라 일컫는가?
대승(大乘)의 수레[乘]를 타고 중생 제도를 행함에
대승의 체상(體相)이 허공과 같아
보살이 이에 의해 편안한 즐거움을 얻기 때문이네.



대승의 수레는 얻을 만한 것이 아니나
열반의 수레를 타고 모든 곳을 가나니
가고 나면 마치 불이 꺼진 듯 보이지 않아
이런 까닭으로 일컬어 열반에 들어간다고 하네.



보살이 행하는 것은 얻을 만한 것이 아니지만
처음과 나중과 현재의 세 때가 항상 청정하고
청정하여 두려움이 없고 희론(戱論)도 없나니
이것이 더없이 훌륭한 반야행(般若行)을 행하는 것이네.



큰 지혜를 이룬 보살은 행할 때마다
크게 자비로운 마음을 내어 중생을 위하나
그렇게 하고도 중생상(衆生相)을 일으키지 않나니
이것이 더없이 훌륭한 반야행을 행하는 것이네.



보살이 중생을 위한다는 생각을 내어
모든 고행을 닦으면서 괴롭다는 상[苦相]이 있으면
이것은 아상(我相)과 중생상이 있는 것이니
이것은 더없이 훌륭한 반야행이 아니네.



자신과 모든 중생이 평등함을 알고
모든 법까지도 또한 그러함을 알면
생겨나고 없어짐이 둘이 아니어서 분별도 없나니
이것이 더없이 훌륭한 반야행을 행하는 것이네.



나아가 세계(世界)라고 말하는 것까지도
일체의 생겨나고 없어짐을 벗어난 법이라고 일컬으면
더없이 훌륭하고 비할 것 없는 감로지(甘露智)이니
이런 까닭으로 반야(般若)라 일컫네.



보살이 이와 같이 행할 것을 행하고
방편을 분명하게 알아 버리는 것이 없으며
이 법의 본성이 실제가 아님을 알면
이것이 더없이 훌륭한 반야행을 행하는 것이네.



색(色)에 머물지 않고 수(受)도 없으며
또한 상(想)에 머물지 않고 행(行)도 없으며
다시 식(識)에 머물지 않고 정법(正法)에 머물면
이것을 더없이 훌륭한 반야행이라 일컫네.

02. 제석품(帝釋品)

[환희지(歡喜地)는 보시바라밀을 포함한다.]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항상함[常]이나 항상함이 없음[無常], 괴로움이나 즐거움,
나[我]라거나 내가 없다[無我]는 생각 등이 모두 공하여
유위(有爲)에도 무위(無爲)에도 머물지 않고
상이 없는 행에 머물러야 하나니 부처님 또한 그러하시네.



만약 성문(聲聞)과 연각(緣覺) 등을 구하고
불과(佛果)까지도 또한 그러하면
이 법인(法忍)에 머물지 않고는 얻을 수 없나니
마치 큰 강을 건널 때에 저쪽 언덕이 보이지 않는 것과 같네.



만약 이 법을 듣고 저 선정(禪定)을 얻어
등정각(等正覺)을 이루고 열반을 증득(證得)하여
모든 것을 자기의 몸과 같이 보면
이것이 큰 지혜를 지닌 것이라고 여래께서 말씀하셨네.



불자(佛子)는 반드시 네 가지 보특가라(補特伽羅)에 머물러야 하나니
이것은 큰 지혜행을 행하는 것이니라. 첫째는 참되고 여실한 선법(善法)이요,
둘째는 물러나지 않는 마음이요, 셋째는 번뇌의 더러움을 벗어나서
번뇌도 없고 구하는 것도 없는 이에게 마땅히 공양하는 것이요,
넷째는 좋은 도반과 어울리는 것이니라.



큰 지혜를 이룬 보살은 이와 같이 행하고,
성문법과 연각법을 배우지 않으며
여래의 일체지(一切智)를 즐겨 배우나니
이런 배우는 것이 아닌 것을 배우는 것을 배움이라 일컫네.



색은 감각작용이 없으며 증감이 없다는 것을 배우고
또한 다시 갖가지 종류의 법을 배우지 않으며
일체지를 섭수(攝受)하여 즐겨 배워
이러한 공덕이 있으면 나고 죽는 것을 벗어나리.


색은 지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며
수ㆍ상ㆍ행ㆍ식 또한 그러하며
색성(色性)의 자성(自性)은 허공과 같아
평등하여 둘이 아니며 분별도 없네.



망상(妄想)의 본성(本性)이 없듯
피안(彼岸)이나 중생 세계 또한 그러하며
허공의 자성 또한 그와 같으며
지혜나 세간해(世間解) 또한 그러하네.



지혜로 보면 색이 없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모든 상(想)을 벗어나면 피안에 이르나니
만약 어떤 사람이 모든 상을 벗어나면
이 사람은 말과 뜻이 진여(眞如)에 머무는 것이네.



그 사람이 세간에서 항하의 모래 수만큼 오랜 겁 동안
부처님의 말씀이나 중생들이 하는 소리를 듣지 못하더라도
중생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고 본래 깨달으면
이것이 더없이 훌륭한 반야행을 행하는 것이네.


'갖가지의 언어는 모두
더없이 훌륭한 반야의 뜻을 갖추고 있으며
과거 부처님께서 미래세(未來世)에 보리를 증득할 것이라고
나에게 수기(受記)를 주셨느니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네.

03. 지무량공덕건탑품(持無量功德建塔品)

[무구지(無垢地)는 지계바라밀을 포함한다.]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만약 어떤 사람이 항상 반야를 받아 지니고
짓는 행이 모든 부처님의 행에 상응(相應)하면
칼ㆍ검ㆍ독약ㆍ물ㆍ불 등과
모든 마군들까지도 해를 입히지 못하네.



만약 어떤 사람이 부처님께서 멸도(滅度)하신 후에
칠보탑(七寶塔)을 세워 공양하고
이와 같이 천 구지(俱胝)의 불찰(佛刹)에 두루 가득하도록
항하의 모래 수같이 많은 불탑을 세우고

가이없는 천 구지의 중생들이
미묘한 향내 나는 꽃과 도향(塗香) 등으로
삼세에 가이없는 겁(劫) 동안 공양하더라도
그로 인한 공덕의 크기는

『불모경(佛母經)』을 베껴 쓰는 공덕에 미치지 못하리니
모든 부처님께서 이에 의지하여 세상에 나신 까닭이네.


만약 이 『불모경』을 받아 지녀 독송(讀誦)하고 공양하면
그 공덕은 불탑을 지은 공덕보다 몇 배나 훌륭하네.



크게 밝은 반야는 모든 부처님의 어머니[佛母]로서
능히 모든 세계의 괴로움과 번뇌를 제거하며
삼세와 시방(十方)에 계시는 부처님께서
이 경[明]을 배워 위없는 스승[無上師]이 되셨기 때문이네.



반야행을 행하면 유정(有情)들을 이롭게 하고
크나큰 지혜를 배우게 하여 보리를 증득하게 하나니
유위(有爲)ㆍ무위(無爲)의 모든 쾌락과
모든 즐거움이 반야에서 나온 까닭이네.


비유하면 대지(大地)에 모든 씨앗을 심으면
서로 화합하여 갖가지 물질이 생겨나듯
다섯 가지 바라밀과 보리가
모두 반야에서 생겨나네.



또한 전륜성왕(轉輪聖王)이 행차할 때에
칠보(七寶)4)와 사병(四兵)5)이 앞에서 이끌고 뒤에서 따르듯
만약 『불모경』에 의지하여 더없이 훌륭한 행을 행하면
모든 공덕법(功德法)이 모아진다네.

04. 공덕품(功德品)

[발광지(發光地)는 인욕바라밀을 포함한다.]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제석천(帝釋天)이 의문이 있어 부처님께 여쭈었네.

'항하의 모래 수같이 많은 불찰(佛刹)에
부처님 사리[佛界]6)가 두루 가득하여 겨자씨 같은 것이라도
부처님 세계의 반야의 힘[般若力]을 받아들일 수 있나이다.



이와 같이 반야를 분명히 알고 나면
어찌 이 사리에 공양하지 않겠나이까?
비유하면 인간세상에서 사람들이 왕을 존중하듯반야를 지니고 있는 것 또한 그러하나이다.'



부처님 세계의 반야라는 마니보(摩尼寶)는
모든 공덕이 갖추어져 그 값을 비교할 것이 없나니
경함(經函)을 안치한 곳은 그 안에 경전(經典)이 있거나 없거나
경함에 공양하면 모두 보공덕(寶功德)을 얻으리.



부처님께서 멸도(滅度)하신 후에 사리에 공양하는 것은
『반야경』에 공양하는 것만 같지 못하나니
만약 『반야경』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 지녀 공양하면
이 사람은 곧 해탈(解脫)을 증득하리.



먼저 보시를 행하고 다음에
지계(持戒)ㆍ인욕(忍辱)ㆍ정진(精進)과 선정(禪定)바라밀을 행하여
선법(善法)을 받아 지녀 무너뜨릴 수 없이 굳건하면
저 하나하나의 바라밀에서 모든 법이 생겨나네.



마치 염부제에 있는 갖가지의 나무에
백천 구지(俱胝)의 셀 수 없이 많은 빛깔이 있고
비록 하나하나 나무의 그림자가 모두 다르더라도
한량없이 많은 그림자가 똑같이 그림자라는 한 이름으로 일컬어지듯

다섯 바라밀의 다섯 이름이 다르고
반야바라밀에 다시 사하의 이름을 더하더라도
모두 보리를 위하여 회향하여 보시하면
보리라는 이름의 한 가지 맛[一味]으로 모두 귀의하네.

05. 복량품(福量品)

[염혜지(焰慧地)는 정진바라밀을 포함한다.]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저 색(色)ㆍ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 등을
보살이 비추어 보니 모두 항상함이 없고
각각 현행(現行)하여도 알지 못하나니
법도 아니고 생겨나는 것도 아님을 지혜로운 이라야 볼 수 있네.



색도 없고ㆍ수ㆍ상ㆍ행ㆍ식도 없어
이 법은 얻을 만한 것도 아니고 또 생겨나는 것도 아니니
모든 법이 모두 공함을 분명히 아는 이것을
가장 훌륭한 반야행이라 일컫네.



가령 항하의 모래 수와 같은 불찰에 있는 모든 중생을 교화하여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증득하게 하더라도
만약 이 『반야경』을 베껴 써서 능히
다른 사람에게 받아 지니게 하면 그 공덕이 훨씬 크네.



부처님과 같이 수행하려면 어떻게 배워야 하는가?
『반야경』을 굳게 믿고 존중하여 모든 법이 공함을 알면
곧 성문과 연각을 증득하고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에 이르게 되리.



세간에 씨앗이 없으면 나무가 나지 않아
가지ㆍ잎ㆍ꽃ㆍ열매가 전혀 없듯
부처님께서 계시지 않으면 누가 보리심(菩提心)을 가르쳐 줄 것이며
또한 제석천(帝釋天)ㆍ범천(梵天)ㆍ성문과(聲聞果)도 없으리.



마치 태양이 빛을 퍼뜨려 모든 천개[天]를 비추고
널리 갖가지의 일[業]을 성취시키듯
부처님의 지혜와 보리심 또한 그러하나니
지혜에서 모든 공덕법이 생겨나네.



마치 무열지(無熱池)에 용왕[龍主]이 없으면
염부제로 흘러갈 강물이 없고
강물이 없으면 꽃과 열매가 모두 생겨나지 못하며
큰 바다와 그 속에 갖가지의 보배가 없듯

세간에 부처님께서 계시지 않으면 큰 지혜가 없고
큰 지혜가 없으면 공덕이 늘어나지 않으며
또한 불법(佛法)과 불법을 장엄함도 없고
보리의 바다[菩提海]와 그 속에 갖가지의 보배도 없네.



비유하면 세간에 개똥벌레의 반딧불이 있으나
그 반딧불을 한 곳에 모아도
한 줄기 햇빛이 세간을 비추는 것에 비교하면
미진수(微塵數) 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과 같네.

06. 수희공덕품(隨喜功德品)

[난승지(難勝地)는 선정바라밀을 포함한다.]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세상에 있는 성문이 많은 공덕을 쌓고
보시와 지계와 관조행(觀照行)을 행하여도
보살이 한 마음을 내어 수희(隨喜)하여 쌓은 복덕에는
몇 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네.



구지(俱胝) 나유타(那由他)의
가이없는 불찰에 계시는
천 구지의 과거ㆍ현재의 모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이 법보(法寶)는 모든 괴로움을 끊어 없애기 위한 것이니

먼저 더없이 훌륭한 보리심을 내어
정각(正覺)을 이루고 열반에 들기까지
그가 지은 불공덕(佛功德)의 크기[量]로
모두 방편바라밀이 이루어지네.



또 저 성문 중의 유학(有學)과 무학(無學),
유루(有漏)와 무루(無漏)의 모든 선법(善法)을
보살은 평등한 한 마음으로 널리 회시(廻施)하여
반드시 세간을 위하여 보리를 증득하네.



보살은 회시한 후에도 회시하였다는 마음에 머물지 않나니
그 마음에 머물면 중생상(衆生相)이라 일컫고
견해(見解)가 있거나 기억이 남아 있으면
상에 집착한다고[著相] 일컬으니, 보살의 회시가 아니네.



이와 같이 회시하면 상이 없는 베풂[無相施]이 아니어서
이러한 법은 다하여 없어질 것임을 반드시 알아야 하며
법이라 할 것도 없고 베푸는 마음이라 할 것도 없이 행하여야
비로소 회시라고 일컬을 수 있네.



상이 있는 베풂[有相施]을 행하면 이것은 진정한 베풂이 아니요
상이 없는 베풂이라야 보리를 증득하나니
마치 미묘한 음식에 독약을 섞는 것과 같이
백법7)이라는 상에 집착하는 것 또한 이와 같네.


이런 까닭으로 반드시 회시를 배워
부처님과 같이 많은 선법을 모두 알아야
생기는 것이나 모습이 잇는 것이나 위력(威力)이 있는 것이나
모두 그에 수회하여 회시할 수 있네.



공덕을 불보리(佛菩提)에 회시하는
보살의 베풂은 어떠한 상도 없나니
이러한 회시라야 부처님께서 허락하여 인가(印可)하시며
이와 같아야 용맹시(勇猛施)라고 일컬을 수 있네.

07. 지옥품(地獄品)

[현전지(現前地)는 지혜바라밀을 포함한다.]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한량없이 많은 맹인(盲人)들이 길을 보지 못해
한 사람도 성(城)에 들어가지 못하듯
육도행(六度行)을 닦음에 반야바라밀을 빠뜨리면
힘이 없어[無力] 보리를 이루지 못하네.



비유하면 불상(佛像)을 그릴 때에 눈을 그리지 않으면
안계(眼界)가 없어 공덕이 없는 것과 같이
반야바라밀을 받아 지녀 지혜를 행하면
눈도 있고 힘도 있다고 일컫네.


유위와 무위, 흑법(黑法)과 백법(白法)은
티끌과 같아서 증득할 만한 것이 아니며,
지혜로 허공과 같음을 비추어 보는 까닭으로
반야는 세간법을 벗어났다고 일컫네.


보살이 진실로 믿고 부처님의 행[佛行]을 행하여
괴로움을 겪는 나유타 중생들을 제도하여도
이와 같이 집착하면 중생상이 되나니
이것은 반야의 더없이 훌륭한 행이 아니네.



보살이 만약 더없이 훌륭한 행을 행하며
과거에 일찍이 없었던 크나큰 지혜를 구하고
지금 『반야경』을 들으며 부처님과 같다고 생각하면
곧 적정과 불보리를 증득하리.



과거에 나유타 겁 동안 부처님을 믿었으나
반야바라밀을 믿지 않아
성내는 마음과 원한을 가졌거나 비방하였다면
이 사람은 지혜가 모자라는 사람이니 아비지옥(阿鼻地獄)에 떨어지리.



만약 어떤 사람이 모든 부처님의 지혜를 기쁜 마음으로 증득하였으나
모든 부처님의 어머니[佛母]인 『반야경』을 믿고 존중하지 않으면
상인(商人)이 바다에 들어가 보배를 구하나
도리어 본래 가지고 있던 것을 잃어버리고 돌아오는 것과 같네.

08. 청정품(淸淨品)

[이 품은 제9 탄품(歎品)을 포함한다.

원행지(遠行地)는 방편바라밀을 포함한다.]

09. 탄품(歎品)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색이 청정한 까닭으로 과(果)가 청정하나니
과와 색은 둘이면서 일체지(一切智)와 같고
일체지가 청정하게 될 때에 이르면
허공계(虛空界)와 같아 끊어지거나 무너지지 않네.



보살은 삼계를 벗어나
번뇌가 다하였으나 태어나고
늙음ㆍ병ㆍ죽음이 없으나 멸도(滅度)를 나타내나니
이것이 곧 반야행을 행하는 것이네.



세간의 욕망과 물질의 진흙탕에,
어리석은 사람이 그 곳에 있으면 바람이 선회(旋回)하는 듯하며
또한 사슴이 집 안에서 뱅뱅 도는 것과 같으나
지혜로운 이는 새가 허공을 날아다니듯 하네.



만약 색에 집착하지 않으면 수(受)와 상(想)에 대한 집착이 없으며,
또한 행(行)과 식(識)에 대한 집착도 없어 청정하나니
이와 같이 모든 번뇌의 더러움을 벗어나서 해탈하는 것을
부처님의 크나큰 지혜행[佛大智行]이라 일컫네.



보살이 이와 같이 크나큰 지혜행을 행하면
모든 상(相)을 버리고 윤회에서 벗어나리니
마치 태양이 라후(羅睺)8)의 장애(障碍)를 벗어나
밝은 빛으로 세간을 두루 비추는 듯하네.



불이 초목과 수풀을 태우면
모든 법성(法性)이 청정해지듯
이와 같이 관(觀)하는 것 또한 관이 아니니
이와 같아야 더없이 훌륭한 반야행이 되네.

10. 칭찬공덕품(稱讚功德品)

[부동지(不動地)는 원바라밀(願波羅蜜)을 포함하고
선혜지(善慧地)는 역바라밀(力波羅蜜)을 포함한다.]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제석천주(帝釋天主)가 부처님께 여쭈었네.

'무엇을 보살이 지혜를 행한다고 하나이까?'


부처님께서 대답하셨네.


티끌만큼 많은 온(蘊)과 계(界)가 없어야 보살이 되네.



보살이 오래도록 수행하면 반드시 알게 되나니
구지(俱胝) 수의 부처님 앞에서 훌륭한 인연을 지은 까닭이네.


처음 배우는 이가 이것을 들으면 삿된 의심을 내어
기쁜 마음으로 구하려 하지도 않고 배우려 하지도 않네.



또 어떤 사람이 깊고 험한 길을 지나다가
문득 먼 곳에서 소 키우는 사람을 보면
마음이 편안하고 도적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지나니
성까지의 거리가 멀지 않음을 알게 된 까닭이네.



만약 더없이 훌륭한 반야바라밀을 듣고 나서
다시 기쁜 마음으로 불보리(佛菩提)를 구하면
이처럼 편안하고 두려움 없어 마음이 아라한과 연각을 뛰어 넘으리.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큰 바다를 보러 갈 때에
먼저 큰 산의 나무와 숲을 보게 되면
이러한 길조[祥瑞]의 경계(境界)를 보고 좋아하나니
반드시 큰 바다에 도달함이 멀지 않음을 알게 된 까닭이네.



보살이 만약 더없이 훌륭한 마음을 내어
이 반야바라밀을 들으면
비록 아직 부처님 앞에서 수기를 받지 않았더라도
이로써 보리를 증득함이 또한 멀지 않네.



마치 봄에 모든 풀과 나무가 피어나는 것을 보고
꽃과 열매를 맺는 것이 멀지 않음을 아는 것과 같이
어떤 사람이 손에 이 『반야경』을 얻으면
보리를 증득함이 또한 멀지 않네.



또한 어떤 여인이 아이를 가져 열 달이 차면
반드시 아이를 낳는 것과 같이
보살이 보덕장(寶德臟)을 들으면
곧 정각(正覺)을 이룰 길조가 되네.



만약 반야바라밀을 행하면
색이 늘어나는 것도 줄어드는 것도 아님을 알며
법다운 것이나 법답지 않은 것이나 모두 법계와 같음을 알아
적정(寂靜)을 구하지 않나니 이것이 곧 반야이네.



수행자가 만약 부처님 법을 생각하지 않고
십력(十力)과 사신족(四神足)과 적정도 생각하지 않고
생각과 생각 없음을 벗어나 상(相)이 없는 행에 이르면
이것이 더없이 훌륭한 반야행을 행하는 것이네.

11. 마품(魔品)

[법운지(法雲地)는 지혜의 피안을 포함한다.]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부처님께서 선현(善現)에게 말씀하셨네.


그대는 잘 들어라. 범부와 성문과 연각의 경지(境地),
이것을 곧 여래지(如來地)라 이름하는데
모든 것이 하나와 같기 때문이니 의심을 갖지 말아라.



찬탄할 공덕은 말로는 할 수 없나니
저 변조여래(徧照如來) 때부터
소작지(所作智)를 이루어
위대한 금강(金剛)과 같은 부처의 지위에 머물며

상(相)이 없음을 관찰(觀察)하고 허공에 머물러 계시나니
부처의 씨앗이 끊어지지 않도록 하려는 까닭임을 반드시 알아야 하네.


선현이 부처님께 여쭈었네.

'세존이시여, 무엇이 보살을 방해하는 일[魔事]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네. 보살에게는 방해하는 일이 많으니
내가 이제 그대를 위하여 간략하게 말하리라.


셀 수 없이 많은 마군이 갖가지로 변화하나니
더없이 훌륭한 『반야경』을 쓰려고 할 때에
마치 번개가 사라지듯 속히 천궁(天宮)을 떠나
세간으로 와서 방해하는 일을 하기도 하며
혹 모습을 나타내 보여서 즐거움과 욕망의 말을 할 때
혹시 듣지도 받아들이지도 않으면 도리어 성내고 원한을 가지며

이름과 성(姓)도 또한 가문[氏族]도 말하지 않나니
이와 같이 방해하는 일들을 모두 반드시 알아야 하네.


어리석고 지혜롭지 못한 이들은 방편이 없고
뿌리가 없으니 어찌 가지와 잎 등이 생기겠는가?

『반야경』을 듣고 나서 다른 경을 구하는 것은 마치
온전한 코끼리를 버리고 도리어 다리만을 찾는 것과 같나니
어떤 사람이 온갖 맛있는 음식을 얻은 뒤에도
혹 쌀로 지은 밥을 얻으면 그것을 가장 맛있게 여기는 것과 같네.



보살이 먼저 반야를 얻은 후에
반야를 버리고 아라한과를 즐겨 구하거나
혹 이양(利養)을 즐겨 구하거나
족성(族姓)에 집착하여 가문의 자취에 머물러 있으면

저 정법(正法)을 버리고 법답지 않은 것을 행하는 것이니
이것은 마군이 삿된 길로 이끌어 들인 것이네.


만약 어떤 사람이 이러한 더없이 훌륭한 법을 들으면
반드시 그 법사(法師)를 깊이 믿고 존중하여야 하나니

법사는 마군을 알아서 몸이 쾌적하고 즐거운 것이나
쾌적하고 즐겁지 않은 것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네.


또 셀 수 없이 많은 갖가지의 마귀들이
셀 수 없이 많은 비구들을 어지럽히고 혼란스럽게 하여
이 『반야경』을 지송(持誦)하려 할 때에
값을 헤아릴 수 없는 보배를 얻을 수 없도록 하네.



『불모반야경(佛母般若經)』은 진실로 얻기 어려운 것이지만
처음 발심한 보살이 기쁜 마음으로 구하려 하면
시방(十方)에 계시는 부처님께서 거두어 주시며
어떤 못된 마귀도 해를 입히지 못하게 하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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