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설불모보덕장반야바라밀경(佛說佛母寶德藏般若波羅蜜經) 02. 중권

불설불모보덕장반야바라밀경(佛說佛母寶德藏般若波羅蜜經) 02. 중권

12. 현세품(現世品)

마치 어머니가 아들을 사랑함에 그 아들이 질병에 걸리면
마땅히 부모의 마음이 근심과 괴로움으로 가득하듯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 반야에서 나셨으니
반야가 거두어 주는 것 또한 그러하며

과거ㆍ현재ㆍ미래 삼세의 부처님께서
시방 세계를 두루 살피심 또한 그러하나니
모두 부처님의 어머니인 반야에서 나시어
중생 마음의 움직임[心行]을 거두어 주시지 않음이 없는 까닭이네.



이와 같이 세간의 모든 여래와
연각ㆍ아라한에 이르기까지
모두 일미법(一味法)인 반야바라밀에 도달하여
분별을 벗어나네.



과거와 현재의 큰 지혜를 이룬 모든 보살이
각각 이 법에 머물러 공행(空行)을 행하는 것은
저 모든 보살이 여실하게 알고 있음이니
이런 까닭으로 여래께서 부처를 짓는다고 일컬으셨네.



반야의 등산에는 꽃과 과일이 무성하며
부처님께서 의지하여 머물러 계신 까닭으로 매우 쾌적하고 즐거워
시방의 모든 근(根)이 평등하고
청정한 대중들과 성문들까지 부처님 주위를 둘러싸고 있네.



반야바라밀의 높은 산에는 십력을 갖추신
모든 부처님께서 의지하여 머물러 계시며
삼도(三塗)의 중생들을 모두 구호하고 제도하시나
제도한 후에도 중생상을 일으키지 않으시네.



사자가 산에 의지하여 크게 포효하면
모든 맹수가 듣고 모두 두려워 떨듯
인사자(人師子)이신 부처님께서 반야에 의지하여 포효하면
외도(外道)와 삿된 마군이 모두 놀라고 두려워하네.



마치 태양의 천 가닥 빛이 허공에 머물며
대지를 두루 비추어 모든 모습을 나타내 보이듯
법왕(法王)께서도 또한 그렇게 반야에 머무시며
애욕(愛欲)의 강을 건너는 미묘한 법을 말씀하시네.



색(色)에 상(相)이 없기 때문에 수(受) 또한 상이 없으며,
상(想)과 행(行)에 이르기까지 또한 그러하며
식(識) 또한 이와 같아서 다섯 가지 법이 동일하나니
이 법에는 상(相)이 없음을 부처님마다 말씀하시네.



허공을 일으켜 중생상을 보나
허공은 상이 없어 볼 수 없으며
부처님께서 법을 말씀하시길, 법은 상(相)과 상응하지 않아
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상이 없는 것도 아니라고 말씀하지 않으시네.

13. 부사의품(不思議品)

만약 이와 같이 모든 법을 보며
모든 아견(我見)을 다 버리면
부처님의 수행법과 성문 등의 수행법이
모두 반야에서 성취되나니

마치 왕이 고을마다 행차하지 않아도
왕의 임무가 저절로 이루어지듯
보살이 상을 벗어나 반야에 의지하면
자연스레 부처님의 공덕법을 얻으리.

14. 비유품(譬喩品)

만약 보살이 굳건한 마음을 내어
더없이 훌륭한 반야행을 닦아 행하면
성문ㆍ연각의 경지를 넘어서서
곧 불보리(佛菩提)를 증득할 수 있나니

마치 어떤 사람이 큰 바다를 건너려 할 때
타고 있는 배가 갑자기 부서져
풀과 나무에라도 의지하지 않으면 목숨을 온전하게 부지할 수 없으나
만약 붙들 것을 얻으면 저쪽 언덕에 다다를 수 있는 것과 같네.



만약 어떤 사람이 굳건하게 믿는 마음을 내지 않고
반야에 의지하여 해탈을 구하면
윤회의 바다에 빠져, 헤쳐 나올 기약도 없이
나고 늙고 죽음을 겪으며 언제나 괴로우리.



만약 어떤 사람이 굳게 믿는 마음으로 반야를 지니고
존재하는 것의 자성(自性)이 없음을 알아 진여(眞如)를 보면
이 사람은 복덕(福德)과 지혜를 얻고 재물을 소유하며
곧 더없이 훌륭한 불보리를 증득하리.



마치 어떤 사람이 물을 배기(坏器)에 담아 쓰면
배기가 견고하지 않아 곧 부서질 것을 아는 것과 같이
견고한 그릇에 물을 담으면 부서지지도 않고
걱정과 두려움도 없어지네.



믿음과 두루 갖추어 보살을 보지 않으면
물러서기를 바라서 반야행과 멀어지나니
능히 믿는 마음을 내어 반야를 지니면
크나큰 보리를 증득하여 이지(二地)를 뛰어넘으리.



바다로 나아가려 할 때에 튼튼하고
큰 배를 만들지 않은 상인이 아직까지 없었나니
튼튼한 배에 의지하면 두려움도 걱정도 없이
많은 진귀한 보물을 얻고 피안에 도달하듯

굳게 믿는 마음을 지닌 보살 또한 이러하여
반야행을 버리고 보리를 멀리하더라도
만약 더없이 훌륭한 크나큰 지혜행을 닦으면
반드시 위없는 보리과(菩提果)를 얻으리.


가령 백 살 노인이 다시 병을 얻으면
이 사람은 혼자 갈 수도 설 수도 없으나
만약 양쪽에 부축하고 모시는 사람이 있으면
뜻하는 대로 다니더라도 두려울 것이 없는 것과 같이

반야의 힘이 미미하고 적은 보살은
보리의 언덕[岸]으로 가더라도 다다를 수 없으나
더없이 훌륭한 방편행을 함께 수행하면
불보리를 증득함에 막히거나 걸릴 것이 없네.

15. 천품(天品)

초지(初地)에 머물러 있는 보살이
굳게 믿는 마음을 내어 반야행을 행하고
위없는 보리를 구하려면 좋은 도반과
지혜로운 이들을 가까이하여야 하네.



크나큰 지혜의 공덕은 어떻게 하여야 얻는가?
반드시 반야바라밀에서 얻게 되나니
이와 같은 모든 불법과 공덕을
모두 좋은 도반에게서 얻네.



육도(六度)의 반야행을 행하여
그 하나하나를 보리에 회시(廻施)하더라도
부처님께서 쌓은 공덕[佛蘊]은 있는 것도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초지의 보살에게는 이와 같이 말하지 말아야 하네.



보살이 수행한 공덕이 바다와 같으며
세간을 구하여 제도하고도 제도했다는 생각이 없으면
보리를 구함이 뜻이 전도(顚倒)되지 않나니
더없이 훌륭한 법을 번갯불처럼 밝게 말하게 되리.



더없이 훌륭한 보리심을 내어
명성이 높아지기를 구하지도 않고 성내는 마음이 없으면
오온ㆍ육식(六識)ㆍ십팔계와 삼승(三乘)을 벗어나
물러나지도 않으며 동요하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네.



이와 같이 법에 걸림이 없으면
깊고 깊은 이치를 통달하여 허망한 생각을 벗어나며
반야를 듣고 굳게 믿어 다른 사람을 교화하나니
이 보살은 물러나지 않는 경지에 있음을 알겠네.



저 깊고 깊은 법은 부처님도 알기 어려워
얻은 사람도 없고 얻을 수도 없으나
중생에게 이익을 주기 위하여 보리를 증득하나니
이것은 처음 발심(發心)한 중생이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네.



중생이 어리석고 다시 눈멀고 어두워
세간에 즐거이 머물며 경계(境界)를 구하나
법은 머무는 곳도 없고 취하여 얻을 것도 없나니
머물 곳 없는 것에서 세간이 생겨나네.

16. 여실품(如實品)

동방의 허공계(虛空界)가 가이없듯
남방ㆍ서방(西方)과 북방(北方)도 또한 그러하며
상방(上方)과 하방(下方), 사유(四維)까지도 그러하나
어떠한 모습도 없고 분별도 없네.



과거ㆍ미래ㆍ현재의
모든 부처님법과 성문법,
모든 것이 여실(如實)하니 얻을 것이 없으며
얻을 것이 없으므로 분별이 없네.



보살이 이와 같은 법을 즐겨 구하고
반드시 방편 반야행을 행하여
가지가지의 상(相)을 벗어나면 이것이 곧 보리니
보살이 이것을 떠나서는 증득할 방법이 없네.



마치 새가 백 유순(由旬)을 날 수 있으나
날개가 잘리면 그 절반도 날 수 없듯
도리천(忉利天)의 천인과 염부제의 사람이
반야를 잃어버린 까닭으로 자연히 악취(惡趣)에 떨어지네.



비록 앞의 다섯 가지 바라밀을
구지(俱胝) 나유타(那由他) 겁 동안 닦고
다시 광대한 원(願)을 바탕으로 지니고 있더라도
방편이 없으면 성문의 지위에 떨어지나니

부처님의 지혜행을 즐겨 행하고 마음을 평등하게 하여
부모와 같이 모든 중생을 살펴보고
반드시 이익을 주는 행과 자비를 행하며
항상 훌륭하고 부드럽고 미묘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펴야 하네.

17. 불퇴지상서품(不退地祥瑞品)

[이 품은 보변광명불지(普徧光明佛地)를 포함한다.]

이 때 수보리(須菩提)가 우러러보며 여쭈었네.

'불퇴지(不退地) 보살은 무엇이 뛰어나며,
말과 소리와 모습을 떠나서 어떻게 말을 하옵나이까?
부처님께서 그 공덕장(功德藏)을 말씀해 주시기 원합니다.'



사문(沙門)과 바라문(婆羅門)의 지위에 머물지 않고
십선(十善)을 행하고 삼도를 떠나서
크나큰 지혜로 갖가지의 상(相)을 벗어나면
마치 산골짜기에서 메아리 소리가 상응하는 것같이 되리.



만약 법에 걸림없는 행으로 교화를 행하고
한결같이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을 훌륭히 말하려 하면
행(行)ㆍ주(住)ㆍ좌(坐)ㆍ와(臥)의 사위의(四威儀)에서
한 생각으로 마음을 관(觀)하면 모두 통달하리.



삼업(三業)이 청정하기가 흰 옷 같고
이양(利養)을 구하지 않기 때문에 즐거이 법을 구하며
마군의 경계를 항복시키고 다른 사람을 교화하며
사선정(四禪定)을 관하면서도 그에 머물지 않네.



명예를 구하지 않고 성내는 마음이 없으면
속가(俗家)에 머물러도 번뇌의 티끌에 물들지 않으며
혹 부귀를 구하거나 도주하여 목숨을 구하더라도
터럭만큼도 욕망의 티끌에 물들지 않네.



본래 적정하여 소유한 것이 없으나
남녀 간에 서로 인연(因緣) 있는 업(業)이 있을 때에
만약 청정에서 물러나지 않기를 바라면
반드시 더없이 훌륭한 반야행을 행하여야 하네.



정변지(正徧知)를 구하고 마음을 부드럽고 순하게 하며
이지(二地)를 구하지 않고 변지(邊地)1)를 벗어나
법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기를 수미산(須彌山)같이 하면
일컬어 물러나지 않는 보살이라 하네.

18. 공품(空品)

색ㆍ수ㆍ상ㆍ행ㆍ식은 매우 깊고
본래 적정하며 모습이 없나니
마치 바다의 깊이를 막대기로 잴 수 없듯
반야의 공덕[般若蘊]을 얻는 것 또한 그와 같네.



보살은 이러한 매우 깊은 법을 알고
진여의 수레[眞如乘]에 머물러 있어 물들일 수 없으며
육진(六塵)과 십이계(十二界)의 체(體)가 공하여
쌓을 공덕[蘊]이 없나니 어찌 얻을 복덕이 있겠는가?

어떤 사람이 저 욕망으로 물든 경계를 생각하고
마음이 여인을 집착하면 마치 눈에 보이는 듯하여
날마다 마음이 그 곳으로 가듯
보살의 사각(思覺)2) 또한 이러하네.



만약 구지겁 동안 보시하고
아라한과 연각의 계(戒)를 지키더라도
반야법(般若法)을 말하고 행하는 것과 같지 못하나니
백천만 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네.



만약 보살이 반야의 이치를 관하며 편안히 머무르고
법을 말하고도 상(相)이 없이
모든 중생에게 회시하여 보리를 증득하게 하면
저 삼계의 스승이 되나니 이와 같을 이가 없으리.



성취라고 말하는 것도 모습은 없으나
공한 것도 실제(實際)도 아니어서 증득할 만한 것이 아니니
만약 이와 같음을 알고 행하면 일컬어 지혜를 깨닫는다고 하나니
뜻이 가이없는 성취를 얻으리.



한 생각에 모든 법을 알아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다른 이들이 말한 것을 믿고
구지 나유타겁 동안 널리 말하더라도
법계(法界)는 늘어나지도 줄어들지도 않네.



이러한 것을 일컬어 부처님의 바라밀이라 하나니
보살은 그 곳에 머물러 법을 말하며
이름과 같이 베풀고도 마음에 집착이 없으며
또한 무상각(無上覺)을 증득하였다고 말하지도 않네.

19. 앙아천자품(昻誐天姉品)

비유하면 등불은 많은 조건[緣]에 의해
기름ㆍ심지ㆍ불 등을 빌어서 빛을 내는데
그 빛은 심지도 불도 기름도 아니지만
불이 없고 심지가 없으면 빛은 있을 수 없듯

혹시 어떤 보살이 처음 발심하여
위없는 보리과(菩提果)를 구하지 않으면
어찌 보리만 증득할 수 없으리요.


또한 적정도 얻을 수 없네.



씨앗에서 나무와 꽃과 열매가 생겨나
씨앗이 없으면 꽃과 열매가 모두 없듯
발심하고도 불보리(佛菩提)를 구하지 않으면
수행하여도 영원히 보리과에서 멀어지네.



씨앗에서 보리와 곡식 등이 생겨나지만
그 과(果)는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듯
부처님의 보리과 또한 허깨비와 같나니
자성(自性)이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네.



비유하면 방울방울 떨어지는 물이 비록 작고 작으나
점점 모여서 반드시 큰 그릇을 넘치게 되듯
무상과(無上果)를 구하기 위하여 처음 발심하였더라도
오래도록 백법(白法)을 수행하면 마침내 증득하게 되리.



공하여 상(相)도 없고 원(願)도 없는 행을 하고도
적정을 구하지 않고 행한다는 상도 없으면
마치 사공이 가운데로 가지 않는데도
양쪽 언덕에는 닿지 않은 채 강을 잘 건너는 것과 같네.



보살이 집착 없이 수행하여야
불보리를 이룰 것이라는 수기(受記)를 받으리니
보리가 존재하는 것 아님을 분명히 깨달으면
이것이 곧 부처님의 반야를 행하는 것이네.



비유하면 돌림병과 기근(饑饉)이 있는 거리를
보살은 오고 감에 두려움이 없듯
소승의 사람도 알고 나면 모두 오고 감에
티끌만한 괴로움이나 번뇌가 없네.

20. 선해방편품(善解方便品)

보살이 부처님의 반야를 받들어 행하되
본래 온(蘊)은 생겨나는 것이 아니고
불법과 중생계가 모두 공함을 분명히 알면
공삼매(空三昧)에서 자비스런 지혜[悲智]가 일어나네.



만약 어떤 사람이 가장 훌륭한 덕(德)이 있어
모든 것이 허깨비와 같은 법임을 잘 알아
악(惡)을 타파하는 무기(武器)가 공교(工巧)해지면
한결같이 세간을 위하나니

그 사람이 부모ㆍ아내ㆍ자녀와 떨어져
원수가 많은 먼 길을 가게 되더라도
이 사람의 용맹(勇猛)을 많은 사람이 알고 있어
편안하고 즐겁고 두려움 없이 집에 돌아오게 되리.



큰 지혜를 이룬 보살은 중생을 위하여
최고의 삼마지(三摩地)에 편안히 머물러
네 마군3)을 항복시키고 이승(二乘)을 벗어나며
또한 불보리도 구하지 않네.



비유하면 허공에는 아무것도 없으나
바람ㆍ물ㆍ불ㆍ흙이 모두 의지하여 머물며
세간의 중생도 허공에 의지하여 편안함과 즐거움을 얻으나
허공은 머문다는 생각도 머물지 않는다는 생각도 없듯

보살이 공(空)에 머무는 것 또한 그러하여
세간에 갖가지의 모습을 나타내어
중생을 지혜와 원력(願力)으로써 대하나니
적정하지도 않고 공하지도 않기 때문이네.



만약 보살이 큰 지혜를 행할 때에
공하고 적정한 삼마지에 머물면
이 중에서 어떠한 상(相)도 보지 않으며
또한 다시 상이 아님도 보지 않네.



보살이 이러한 해탈문(解脫門)을 행할 때에
적정을 구하지도 않고 상(相)을 짓지도 않으면
마치 새가 허공으로 날아올라 오고 갈 때에
허공에 머무는 것도 아니고 대지에 머무는 것도 아님과 같네.



또한 어떤 사람이 활 쏘는 법을 익힐 때에
오로지 활 쏘는 법만 익히며 쉬지 않고 여러 해가 지나면
활 쏘는 법이 익어 모든 묘법을 얻어
하나하나의 화살이 명중하지 않는 것이 없는 것과 같이

더없이 훌륭한 반야행 또한 그러하여
지혜와 방편을 닦고 익히면
곧바로 많은 선법[善]이 모두 원만해져
비로소 가장 훌륭한 신통력을 얻으리.



마치 필추가 신통력을 증득하여
신령스러운 변화를 나타내어 허공에 머물면
구지 겁이 지나더라도 행(行)ㆍ주(住)ㆍ좌(坐)ㆍ와(臥)의
네 가지 위의(威儀)가 쇠락하지 않는다.



허공에 머물러 있는 보살도 또한 그러하여
상이 없는 행을 닦아 피안(彼岸)에 이르러도
갖가지의 행을 행하여 세간에 나타내 보임에
구지 겁이 지나도록 쇠락함이 없네.



어떤 사람이 험난한 곳을 지나다가 세찬 바람을 만났을 때
이 사람이 두렵고 위험하다고 생각하면 나아갈 수 없으나
두 손으로 개(蓋)4)를 들고 마음을 오롯이 하면
곧바로 바람 없는 곳에 이르러 앞으로 나아갈 수 있으리.



큰 지혜를 이룬 보살이 대비심에 머물러
지혜와 방편을 양손으로 삼더라도

공하여 상(相)도 원(願)도 없는 법에 집착하여 덮여 있으면
법을 보아도 적정에 머물지 못하네.



어떤 사람이 보배를 구하려고 보물섬으로 가서
보배를 얻어 편안히 집으로 돌아오면
이 사람의 마음이 흡족하고 즐거우리니
그 권속(眷屬)들의 마음에 어찌 괴로움과 번뇌가 있겠는가.



공(空)의 보물섬으로 나아가는 것 또한 그러하여
오근(五根)과 오력(五力)과 선정(禪定)의 보배를 얻으면
보살은 기쁜 마음에만 머물지 않고
모든 중생들을 괴로움과 번뇌에서 벗어나게 하나니

상인이 이익을 얻기 위하여
마음과 성(城)의 모든 거리와 마을을 모두 거쳐
보배가 있는 곳에 이르더라도 머물지 않는 것과 같이
큰 지혜의 선도(善道)5)로 다시 돌아오네.



큰 지혜를 이룬 보살은
성문과 연각과 해탈지(解脫智)를 분명하게 알아
부처님의 지혜에 이르러도 또한 머물지 않나니
하물며 저 유위도(有爲道)를 행하겠는가?

큰 지혜를 이룬 보살이 세간을 위하여
공하여 상도 없고 원도 없는 삼매에 머물러
적정을 얻고도 집착이 없으면
이에 비로소 무위(無爲)를 알게 되리.



비유하면 사람이 태어났을 땐 아무것도 알지 못하나
그 이름을 부르는 까닭에 많은 것을 알게 되듯
보살이 해탈문(解脫門)을 행하면
해탈문에서 많은 것을 알게 되네.



보살이 저 매우 깊은 법을 듣고
모든 근(根)을 밝게 비추며
공하여 상도 없고 원도 없는 법에 머물면
물러남도 없고 생각도 없고 수기를 받음도 없네.


삼계가 꿈과 같고 허깨비와 같음을 관하고
성문과 연각의 지위를 구하지 않음은
부처님께서 법을 말씀하심과 같이 세간을 위함이니
반드시 불퇴지(不退地) 보살이라는 이름으로 수기를 받으리.



모든 중생이 삼도에 떨어질 것임을 알고
발원(發願)하여 찰나에 악도(惡道)를 소멸시키고
진실한 원력(願力)으로 번뇌의 화온(火蘊)을 소멸시키나니
반드시 불퇴지 보살이라는 이름으로 수기를 받으리.



모든 악(惡)과 수요(宿曜)6)와 귀신들이
갖가지 돌림병을 일으켜 세간을 괴롭힐 때
진실한 원력으로 모두 소멸시켜 제거하고도
내가 하였다는 생각이 없나니 반드시 수기를 받으리.

21. 마업품(魔業品)

내가 수기를 받았으나 수기를 받았다[所]는 생각도 없었나니
이 때문에 진실한 원력이 더욱 늘어난 것이요
만약 수기를 받았다는 생각이 들면
일컬어 집착이라 하며 또한 지혜가 적다고 하네.



보살에게 집착이 있으면 곧 마군이 알아서
친근한 벗의 모습을 나타내어 와서 어지럽히거나
혹은 어버이와 칠대 조상[七代人]의 모습을 나타내어
그대의 이름을 부르나니, 이것은 부처님께서 증명하시네.



마군은 셀 수 없이 많은 모습을 나타내어 모두
그대를 가엾게 여겨 이익과 안락을 주기 위함이라고 말하나니
보살이 이것을 듣고 기뻐하면 지혜가 적다 하고
마귀에게 씌었다고 일컫네.



혹 성(城)의 마루 연못과 마을
산림(山林)과 광야(曠野)나 고요한 곳에 머물러 있을 때에
스스로 자신의 덕을 칭찬하고 다른 사람을 비방하면
지혜가 적어 마귀에게 씌인 것임을 반드시 알아야 하네.



비록 성의 마른 연못이나 마을에 머물러 있더라도
성문과 연각이 증득한 경지를 구하지 않으면
이 마음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까닭이니
나는 '이러한 이가 바로 보살이다'라고 말하네.



오백 유순(由旬)이나 되는 험하고 깊은 산에
모든 사나운 맹수들과 여러 해 동안 함께 머무르되
맹수들이 괴롭힌다고 보면 아만(我慢)에 집착한 것이니,
분별이 없으면 보살임을 알겠네.



보살이 저 세간에 머물러 있는 것은 세간을 위함이니
오력[力]과 해탈과 삼마지를 얻더라도
그가 산과 들에서의 적정행(寂靜行)에 집착하면
이 또한 저 마귀에게 씌인 것임을 알아야 하네.



비록 성의 마른 연못이나 산과 들에 머물러 있더라도
불보리를 좋아하여 성문ㆍ연각의 이승(二乘)을 벗어나서
이와 같은 행을 닦아 세간을 이롭게 하며
한 생각이라도 저울과 같으면 보살이라 일컫네.

22. 선우품(善友品)

큰 지혜를 지닌 이가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배우면
속히 무상각(無上覺)을 증득하나니
마치 훌륭한 의사가 많은 질병을 낫게 하는 것과 같이
좋은 도반에게서 배우면 마음에 의심이 없으리.



보살이 불보리행을 행하고
저 좋은 도반과 바라밀에 의지하면
더없이 훌륭한 경지에 이르러 능히 조복(調伏)시키며
두 가지 일을 위하여 보리를 증득하게 되네.



과거와 미래, 시방의 부처님께서
이러한 바른 길을 행하신 것은 다른 길이 없는 까닭이니
불보리의 더없이 훌륭한 행을 행하면
바라밀을 번갯불과 같이 밝게 말하게 되리.



저 반야가 공하여 상(相)이 없는 것과 같이
모든 법의 모습[法相] 또한 이와 같음을 알아야 하나니
모든 법이 공함을 분명히 알면
이것을 일컬어 부처님의 반야를 행한다고 이름하네.



색욕(色欲)과 음식에 매여 집착하면
항상 윤회하여 쉼이 없을 것이니
이것은 어리석고 미혹된 사람이 전도(顚倒)된 견해로 보는 것이며
실제가 아닌 법에 대하여 실제라는 망상을 일으킨 것이네.



비유하면 음식을 얻었는데 독이 있다고 의심하여
허망한 견해로 음식을 먹지 않는 것과 같이
어리석은 사람은 허망한 마음으로 나라는 생각을 내며
그 나라는 생각 때문에 나고 죽음이 있네.



또한 항상 모든 번뇌를 말하면서도
모든 번뇌에 대한 상(相)에 집착하지 않고
번뇌와 청정이 모두 없나니
이와 같은 보살이라야 반야를 아는 것이네.



만약 염무제(閻浮提)에 있는 모든 중생이
모두 위없는 보리심을 내어
수천 구지겁 동안 보시하고
모든 중생에게 회시(廻施)하면 보리를 증득하나

또 어떤 사람이 하루 동안
더없이 훌륭한 반야행을 받들어 행하면
천 구지겁 동안 보시한 공덕은 수천 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나니
반야를 행하는 공덕이 무위법(無爲法)이기 때문이네.



보살이 대비한 마음으로 반야를 행하며
중생을 제도하려는 까닭으로
분별[想]을 일으키지 않고 항상 성 안에서 걸식을 행하나니
이러한 공덕으로 일체의 이름 있는 큰 지혜를 얻네.



보살은 사람, 천인(天人) 나아가 삼도(三塗)에서
극심한 괴로움을 받는 중생까지 제도하여
모두 속히 피안에 이르도록 하려고
밤낮으로 반야를 힘써 수행하네.



마치 어떤 사람이 값을 헤아릴 수 없는 보배를 구하려면
반드시 큰 바다에 들어가 모든 험난함을 통과하여
무심(無心) 중에 홀연히 보배를 얻어
근심과 괴로움이 모두 없어지고 기쁨이 한량없듯

보리(菩提)의 보래를 구하는 것 또한 이러하여
반야의 모든 공덕을 힘써 수행하여
집착할 것도 버릴 것도 없는 더없이 훌륭한 보배를 얻으면
보살이 되어 곧 보리를 증득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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