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설본상의치경(佛說本相猗致經)

불설본상의치경(佛說本相猗致經)

후한(後漢)안식국삼장(安息國三藏) 안세고(安世高)한역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사위국(舍衛國)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에 계셨다.

부처님께서는 문득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본래 탐애(貪愛)는 있었으나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다가 지금은 그것이 있는 것을 본다. 만일 본래 있는 탐애가 없는 듯하다가 이제는 있어 분명히 보인다면 그것은 어떤 까닭이 있어 탐애를 있게 하였을 것이다.

탐애가 있는 비구는 근본이 있으니 근본이 없는 것이 아니다. 어떤 것이 비구의 탐애의 근본을 있게 하는가. 이른바 어리석음[癡]이다.

어리석음이 근본이 된 비구도 그렇게 된 근본이 있으니 근본이 없는 것이 아니다. 어떤 것이 비구의 어리석음의 근본이 되는가. 이른바 5개(蓋)이다.

5개 비구도 또한 그렇게 된 근본이 있으니 근본이 없는 것이 아니다. 어떤 것이 비구의 5개의 근본이 되는가. 이른바 세 가지 악행 세 가지 악행이란 몸과 입과 뜻으로 짓는 3악업(惡業)이다.

이다.

세 가지 악행 비구 또한 그렇게 된 근본이 있으니 근본이 없는 것이 아니다. 어떤 것이 비구의 세 가지 악행의 근본이 되는가. 이른바 근(根)을 거두지 않은 것이다.

근을 거두지 않은 비구 또한 그렇게 된 근본이 있으니 근본이 없는 것이 아니다. 어떤 것이 비구의 근을 거두지 않은 근본이 되는가. 이른바 본 생각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본 생각이 아닌 비구 또한 그렇게 된 근본이 있으니 근본이 없는 것이 아니다. 어떤 것이 비구의 본 생각이 아닌 근본이 되는가. 이른바 믿지 않는 것이다.

믿지 않는 비구 또한 그렇게 된 근본이 있으니 근본이 없는 것이 아니다. 어떤 것이 비구의 믿지 않는 근본이 되는가. 이른바 악하고 법답지 않은 것을 듣는 것이다.

법답지 않은 것을 듣는 비구 또한 그렇게 된 근본이 있으니 근본이 없는 것이 아니다. 어떤 것이 비구의 법답지 않은 것을 듣는 근본이 되는가. 이른바 어질지 않은 사람을 섬기는 것이다.

어질지 않은 비구도 또한 그렇게 된 근본이 있으니 근본이 없는 것이 아니다. 어떤 것이 비구의 어질지 않은 근본이 되는가. 이른바 어질지 않은 사람과 함께 모이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비구가 어질지 않은 이와 모이게 됨으로서 어질지 않는 이를 섬기는 것이 충만해지고, 어질지 않는 이를 섬김이 충만해지면 법답지 않음이 충만해지고, 법답지 않음이 충만해짐으로써 믿지 않음이 충만해지고, 믿지 않음이 충만해지면 본 생각이 아남이 충만해지고 본 생각이 아님이 충만해짐으로써 근(根)을 거두지 않음이 충만해지며, 근을 거두지 않음이 충만해짐으로써 세 가지 악행으로 법을 범함이 충만해지고, 세 가지 악행으로 법을 범함이 충만해지면 오개가 충만해지고, 오개가 충만해지면 어리석음이 충만해지고, 어리석음이 충만해짐으로써 세간의 탐애가 충만해진다. 이와 같이 탐애와 즐거움이 충만해지면 차츰차츰 존재[有]가 더해진다.

세상을 건너는 지혜와 해탈에도 근본이 있으니, 근본이 없는 것이 아니다. 어떤 것이 세상을 건너는 지혜와 해탈의 근본이 되는가. 이른바 7각의(七覺意) 7각의(覺意)는 7각지(覺支)의 고역(古譯)이다. 지념(志念)·법해(法解)·정진(精進)·애희(愛喜)·일향(一向)·유정(惟定)·행호(行護)의 일곱 가지(반니원경)가 있고, 또한 의(意)·분별(分別)·정진(精進)·가(可)·의(椅)·정(定)·호(護)의 일곱 가지(나선경)가 있다. 특히 택법(抉法)·정진(精進)·희(喜)·경안(經安)·사(捨)·정(定)·염(念) 각지의 7각지는 널리 채택되어 쓰이는 용어이다.

가 근본이 된다.

7각의도 그렇게 되는 근본이 있으니, 근본이 없는 것이 아니다. 어떤 것이 7각의 근본이 되는가. 이른바 4의지(意止) 4의지(意止)는 신(身)·수(受)·심(心)·법(法)의 4념처를 말한다.

이다.

4의지도 그렇게 되는 근본이 있으니 근본이 없는 것이 아니다. 어떤 것이 비구의 4의지로서 근본이 되는가. 이른바 세 가지 청정행이다.

세 가지 청정 비구도 그렇게 근본이 있어 행을 따르니 근본이 없는 것이 아니다. 어떤 것이 비구의 세 가지 청정행의 근본이 되는가. 이른바 근(根)을 거두어 지키는 것이다.

근을 거두어 지키는 데에도 근본이 있으니 근본이 없는 것이 아니다. 어떤 것이 비구의 근을 거두어 지키는 근본이 되는가. 이른바 본 생각[本念]이다.

본 생각의 비구도 근본이 있으니 근본이 없는 것이 아니다. 어떤 것이 비구의 본 생각의 근본이 되는가. 이른바 믿음이 근본이 된다.

믿음을 근본으로 하는 비구도 근본이 있으니 근본이 없는 것이 아니다. 어떤 것이 믿음을 근본으로 하는 비구의 근본이 되는가. 이른바 법경(法經)을 듣는 것이 근본이 된다.

법경을 듣는 것도 근본이 있으니 근본이 없는 것이 아니다. 어떤 것이 법경을 듣는 근본이 되는가. 이른바 어진 이를 섬기는 것이 근본이 된다.

어진 이를 섬기는 것도 근본이 있으니 근본이 없는 것이 아니다. 어떤 것이 어진 이를 섬기는 것의 근본이 되는가. 이른바 어진이와 모이는 것이다.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어진 이와 모이면 어진 이를 섬길 수 있고, 어진 이를 섬기면 법의 말씀을 들을 수 있으며, 법의 말씀을 들으면 믿음의 근본을 얻게 되고, 믿음의 근본을 얻으면 생각의 근본을 얻을 수 있으며, 생각의 근본을 얻으면 근(根)을 거두어 지킬 수 있고, 근을 거두어 지키면 세 가지 청정을 얻을 수 있으며, 세 가지 청정이 있으면 4의지(意止)를 얻을 수 있으며, 4의지의 근본을 얻으면 7각의(覺意)를 가질 수 있고, 7각의를 가지면 무위(無爲)의 해탈을 얻어 세상을 건널 수 있다. 이와 같이 해탈로 세상을 건너는 것도 차례 차례의 근본이 있어 세상을 건널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제자들은 받들어 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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