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집대허공장보살소문경(大集大虛空藏普薩所問經) 제6권

대집대허공장보살소문경(大集大虛空藏普薩所問經) 제6권

그 때에 보길상(寶吉祥)보살이 허공장보살에게 물었다.

“어진이여, 그대는 세간을 벗어나는 도가 이미 청정하게 되었습니까?”

허공장보살은 대답하였다.

“선남자여, 그렇습니다. 이미 청정해졌습니다.””무엇이 어떻게 청정해졌다는 말씀입니까?””내가 청정하기 때문에 이미 청정하게 된 것입니다.””내가 청정함이란 어떤 것입니까?””세간이 청정하기 때문에 나 역시 청정한 것입니다.”

보길상보살이 다시 물었다.

“세간이 청정함이란 또 어떤 것입니까?”

허공장보살이 대답하였다.

“선남자여, 물질의 과거가 청정하여 가는 것이 없기 때문이고, 물질의 미래가 청정하여 오는 것이 없기 때문이고, 물질의 현재가 청정하여 머묾이 없기 때문이니, 이와 같이 느낌·생각·지어감·의식의 과거·미래·현재도 그러하여 가고 오고 머무르는 것이 없습니다. 선남자여, 이러하기에 세간이 청정하다고 하는 것입니다.””어진이여, 과연 세간이 그와 같이 청정하다면 무엇을 나타내려는 것입니까?””선남자여, 일체의 법이 다 청정함을 나타내려는 것입니다.””일체의 법이 청정함을 나타내는 것이란, 또 어떤 것입니까?””지혜로써 일체 법의 과거·미래·현재를 아는 것입니다.””일체 법의 과거·미래·현재는 또 어떤 것입니까?””아주 없는 것[斷]도 아니고 언제나 있는 것[常]도 아니기 때문입니다.””아주 없는 것도 아니고 언제나 있는 것도 아닌 것이란, 또 무슨 말씀입니까?””아주 없는 것도 아니고 언제나 있는 것도 아닌 것이란, 곧 나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나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는 것이란, 또 무슨 말씀입니까?””나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는 것이란, 그 어떤 언설(言說)조차 없다는 것입니다.””언설조차 없는 법이 있습니까?””언설조차 없는 법이란, 곧 수(數)가 없는 것입니다.””어진이여, 법이 만약 수가 없다면 어떻게 명수(名數)를 말할 수 있겠습니까?””선남자여, 비유하자면 마치 허공을 명수로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언설이 없는 법도 그러합니다. 다만 명수를 빌려 허공이라고 말할 뿐이니, 이러한 명수는 곧 명수가 아닌 것입니다.””어떤 수를 명수가 아닌 문(門)이라고 하는 것입니까?””명수의 문이란 함이 있는[有爲] 법을 말하고, 명수가 아닌 문이란 함이 없는 법을 말하는 것이며, 또 명수이면서 명수가 아닌 법이란 이러한 함이 없는 법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지혜로써 모든 명수의 법을 멀리 여의고, 함이 있는 명수의 법을 이치대로 관찰하되 어떤 법은 끊고 어떤 법은 끊지 않는다든가, 어떤 법은 증득하고 어떤 법은 증득하지 않는다든가, 어떤 법은 수행하고 어떤 법은 수행하지 않는다든가 하는 그러한 생각을 일체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어떤 한계와 수량까지도 살피지 않아야, 그 때에 비로소 집착이 없게 되고 바라는 것이 없게되니, 바라는 것이 없게 되면 곧 인연으로 일어나는 것이 없고, 인연으로 일어나는 것이 없으면 곧 나가 없는 경지에 들고, 나가 없는 경지에 들면 곧 일체의 것에 집착이 없느니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집착이 없는 것이란, 물질을 덧없다든지 덧없지 않다든지 하여 집착하지 않는가 하면, 느낌·생각·지어감·의식에 대해서도 이와 같이 덧없다든지 덧없지 않다든지 하여 집착하지 않는 것입니다. 또 물질을 괴롭다든지 즐거운 것이라고 집착하지 않는가 하면, 느낌·생각·지어감·의식에 대해서도 이와 같이 괴롭다든지 즐거운 것이라고 집착하지 않는 것입니다. 또 물질을 나라든지 나가 없다든지 하여 집착하지 않는가 하면 내지 의식에 대해서도 이와 같이 나라든지 나가 없다든지 하여 집착하지 않는 것입니다. 또 물질을 청정하다든지 청정하지 않다든지 하여 집착하지 않는가 하면 내지 의식에 대해서도 이와 같이 청정하다든지 청정하지 않다든지 하여 집착하지 않는 것입니다. 또 물질을 공(空)하다든지 공하지 않다든지 하여 집착하지 않는가 하면 내지 의식에 대해서도 이와 같이 공하다든지 공하지 않다든지 하여 집착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집착이 없는 삼마지를 얻는 것이니, 이 삼마지를 얻음에 따라 항상 큰 자비심을 일으켜서 유정들을 제도하되 생사의 번뇌에 허덕이는 것을 보지 않게 됩니다. 왜냐 하면 생사와 열반의 성품에 차별이 없음으로써 모든 유정들에게 열반을 나타내 보이고, 또 스스로가 본래 열반임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보살이 수행하는 반열반(般涅槃)이란 곧 이러한 것입니다.

선남자여, 보살이 수행하는 반열반이 무엇인가 하면, 그 어떠한 행을 따질 것 없이 오직 일체지(一切智)의 지혜에 회향하는 것입니다. 일체지의 지혜란, 물질에 대한 요구를 일으키지 않고 느낌·생각·지어감·의식에 대해서도 아무런 요구를 일으키지 않아 요구함이 없는 마음으로 청정한 계율에 머물러서 본래의 서원을 만족하는 것입니다. 또 일체의 법에 대해 더하거나 덜하거나 하여 보지 않고 평등함을 얻어 법계에 머물되, 이로써 보살의 행을 행하여 일부러 어떤 법을 행하는 것이 없으면서도 보살행을 다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보살이 수행하는 반열반의 행입니다.”

보길상보살이 다시 물었다.

“어떤 법을 행하는 것이 없으면서 열반의 행을 행하는 것이란 또 무엇입니까?””선남자여, 보살이 만약 뜻을 일으켜서 저 열반을 관찰한다면, 이는 곧 함이 있는 행이라고 하겠지만, 함이 없는 법을 증득하여 그 함이 없는 행을 행하기 때문에 열반의 행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보살이 어떤 언설(言說)의 표현에 분별을 내지 않음으로써 이를 열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 열반을 피안(彼岸)이라고 하는 것은, 그 피안이 모든 상(相)을 여의는 것이어서 어떠한 상에도 마음이 집착되지 않으므로 이를 열반이라 하는 것입니다. 또 피안을 분별이 없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그 피안이 모든 것에 분별을 일으키지 않으므로 이를 열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 피안을 아뢰야식(阿賴耶識)이 없다고 하는 것은 그 피안이 모든 것에 아뢰야식을 일으키지 않으므로 이를 열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수행하는 것을 보살의 반열반이라고 합니다.”

그 때에 세존께서 허공장보살을 칭찬하셨다.

“훌륭하도다, 훌륭하도다. 정사(正士)여, 보살의 반열반과 부합되는 이 법을 쾌히 설하였도다.”

그러자 이 법을 설할 때에 그 모임에 있던 5백 명의 보살들이 다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었다. 그 때에 허공장보살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여래의 지혜의 광명이 저희들을 비추어줌으로 말미암아 이 변재(辯才)를 얻은 것이지 저희들 스스로의 능력으로 얻은 것은 아닙니다. 마치 태양의 광명이 이 남섬부주(南贍部洲)의 모든 형상을 비추어 주는 것처럼, 큰 조어사(調御士)이신 세존께서 지혜의 광명의 힘으로 저희들에게 모든 법을 깨닫게 해 주심도 그러합니다.”

보길상보살이 다시 허공장보살에게 물었다.

“선남자여, 그대는 지금 무엇 때문에 자신의 지혜를 숨기고, 다 여래께서 가지(加持)해 주시는 힘이라고 말합니까?”

허공장보살이 대답하였다.

“나만이 아니라 일체 보살들의 변재도 다 여래께서 가지해주시는 힘으로 말미암아 얻는 것입니다. 선남자여, 만약 여래께서 이 모든 법을 설하지 않으 셨다면 보살이 어디에서 변재를 얻겠습니까?”

보길상보살이 말하였다.

“그대의 말처럼 보살의 변재가 만약 여래로 인하여 생겨났다면 이는 곧 여래의 변재가 보살에게 옮겨지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합니다.”

허공장보살이 말하였다.

“여래의 변재는 옮겨지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 인(因)이 되는 것이니, 말하자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법으로 인하여 보살의 변재가 생기는 것입니다. 마치 무명(無明)이 어떤 행에 옮겨지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 행의 인이 되어 행을 일으키는 것처럼, 여래의 변재도 그와 같이 보살의 변재를 생기게 하는 인이 될 뿐 보살에게 옮겨지는 것은 아닙니다. 또 코끼리나 말이나 사람의 소리가 산골짜기에 옮겨지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 산골짜기의 메아리를 일으키는 인이 되는 것처럼, 여래의 변재도 그와 같이 보살의 변재를 생기게 하는 인이 될 뿐, 보살에게 옮겨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에 보길상보살이 다시 물었다.

“여래께서는 항상 심오한 인연의 법에 대해 말씀하셨고, 또 모든 법은 일어남이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선남자여, 어찌하여 그 일체의 법이 인연으로 일어남이 없습니까?”

허공장보살이 대답하였다.

“어떤 인연을 짓는다면 이는 곧 법이 일어나는 것이지만, 그 인연의 법이 지음이 없기 때문에 일체의 법이 일어남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보길상보살이 물었다.

“여래께서 지금 세간에 출현하신 것이 곧 그 법의 일어남이 아니겠습니까?”

허공장보살이 대답하였다.

“만약 진여(眞如)를 일어나는 것이라고 한다면 여래의 출현하심을 그 법의 일어남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진여를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마땅히 여래의 출현하심을 그 법의 일어남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때문에 일어남이 없는 것을 여래라고 말하기도 하고, 일체의 법을 그 처소에 따라 깨닫는 것을 여래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보길상보살이 물었다.

“선남자여, 그렇다면 여래께서 세간에 출현하심은 무엇 때문입니까?”

허공장보살이 말하였다.

“이 문답은 그만 두기로 합시다.”

보길상보살이 물었다.

“왜 이 문답을 그만 두는 것입니까?”

허공장보살이 대답하였다.

“여실히 법의 성품에 머물기 때문입니다.”

보길상보살이 물었다.

“여실히 법의 성품에 머무는 것이란 또 어떤 것입니까?”

허공장보살이 대답하였다.

“생하지도 멸하지도 않는 것에 머물되 머물지도 머물지 않는 것도 아닌 것을 일컬어, 법의 성품에 머문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법의 성품은 머묾이 없는 것에 머무릅니다. 일체의 법도 다 그러하여 머묾이 없는 것에 머무릅니다. 여래께서도 역시 그러하여 머묾이 없는 것에 머무시니, 생하지도 멸하지도 않는 것에 머무시되 머물지도 머물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이와 같이 머물지도 머물지 않는 것도 아닌 것을 일컬어, 여래께서 머무시는 처소라고 합니다.

선남자여, 여래께서 출현하심으로 말미암아 법이 일어난다고 말하는 것은 치우침에 집착된 소견이고,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도 치우침에 집착된 소견이므로, 이 두 가지의 치우친 소견을 벗어나야만 중도(中道)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선남자여, 여래를 이와 같이 관찰하지 않고 만약 다르게 관찰한다면 올바른 관찰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보길상보살이 다시 물었다.

“여래께서 세간에 출현하신 이 깊고도 깊은 이치는 바로, 생하지도 멸하지 않는 머묾이 없는 처소에 머무시는 것입니다.”

허공장보살이 대답하였다.

“그렇습니다. 만약 이 이치를 깨닫는다면 증상(增上)이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증상이란 또 무슨 말씀입니까?””증상은 곧 증익(增益)이란 뜻이니 말하자면,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 허망하게 증익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법이란 본래 증익이 없는 것이므로 그 증익이 없는 것을 평등한 법구(法句)라 하고, 비할 바 없는 법구라고 합니다. 이 평등한 법구와 비할 바 없는 법구는 문자(文字)가 없는 법구이고 분별이 없는 법구이며, 또 거기에는 마음과 뜻과 의식의 행이 없으므로 행이 없는 법구이기도 합니다. 마치 저 공중을 나는 새의 자취는 실제로 남아있지 않지만, 어떤 말을 빌려서 새의 자취라든가 새의 소리라고 하는 것처럼, 여래께서 세간에 출현하심도 그러합니다. 여래의 지혜만이 이 생멸하지 않는 법구의 이치를 깨달으니, 생멸하지 않는 법구의 이치가 곧 일체 법의 제 성품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생멸이 없는 것은 제 성품조차 없는 것이고, 제 성품이 없는 것은 머묾이 없는 것이고, 머묾이 없는 것은 일체 법의 경계이고, 일체 법의 경계는 진여의 경계이므로, 이 진여의 경계에 머묾으로 말미암아 일체의 법을 증득할 수 있습니다. 마치 허공이 평등하기만 하고 아무런 제한이 없는 것처럼, 일체 법의 진리의 경계도 제한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제한이 있다면 일체 법의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나아가서 이 평등한 일체 법의 진리가 곧 나의 경계이므로, 나의 경계를 알면 일체 유정의 경계를 알고, 일체 유정의 경계를 알면 일체 법의 경계를 알기 마련입니다. 이와 같이 나의 경계로부터 일체 유정의 경계, 일체 유정의 경계로부터 일체 법의 경계에 이르는, 경계가 다한 진리의 경계를 열반이라 하고, 또 이 이치를 증득한 자에게 비로소 열반을 증득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 일체의 법은 서로 의지함도 없고 다스림도 없으니, 마치 저 허공을 다스릴 수 없는 것처럼 일체의 법도 그러합니다. 만약 열반에 들고자하는 사람으로서 이 법이 생멸한다는 견해를 지니거나 이 법이 마땅히 생하고 멸해야 한다는 견해를 지니게 되면, 이러한 사람은 곧 생멸의 행을 짓게 되어서 열반의 평등한 성품을 알지 못하게 되고, 이 평등한 열반의 성품을 알지 못함으로써 모든 법에 집착하여 허망한 쟁론(諍論)만을 일으킵니다. 이 때문에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 ‘나의 가르침을 받아 아는 자는 곧 사문으로서 최승의 공덕을 원만히 갖추리라.’ 하셨습니다.”

그 때에 구수(具壽) 아난다(阿難陀)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허공장보살이 스스로 걸림 없는 변재를 증득하여 이러한 법을 설한 것은 매우 기이한 일입니다.”

그러자 허공장보살이 아난다에게 말하였다.

“대덕께서는 그런 말씀하지 마십시오. 제 자신의 힘으로 증득한 것이 아닙니다. 제 자신이 곧 허공이기 때문에 일체의 법도 다 허공과 같은 것임을 알뿐이니, 어찌하여 대덕께서는 제 자신의 힘으로 증득한 것처럼 말씀하십니까?”

아난다가 다시 물었다.

“그대의 몸이 허공이라면 그대는 어떠한 몸으로 불사(佛事)를 일으키는가?”

허공장보살이 대답하였다.

“법의 몸[法身]으로 합니다. 법의 몸이란, 변화가 없으므로 5온(蘊)·12처(處)·18계(界) 등이 일어나지도 멸하지도 않습니다. 또 그것은 전도된 몸이 아니라 뜻한 대로 나타내는 몸이기에 그 뜻대로 성취하는 몸으로써 불사를 일으킬 뿐입니다.”

아난다가 말하였다.

“그렇다면 대사여, 그대는 법의 몸을 증득했다는 말씀입니까?”

허공장보살이 말하였다.

“대덕이시여, 제가 아는 바로는, 법을 떠나서는 몸도 없으므로, 몸이 곧 법이고 법이 곧 몸이어서 법과 몸의 두 가지 상(相)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드린 것입니다.”

아난다가 말하였다.

“대사여, 몸이 곧 법이고 법이 곧 몸이라면, 그대는 아라한(阿羅漢)을 증득했다는 말씀인가요?””어떠한 것을 증득한 것이 없기에 증득한 것이니, 아라한의 정도는 다툼이 없는 법을 잘 통달하고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에 물들지 않는 것입니다.””대사여, 그렇다면 그대는 마땅히 구경(究竟)의 열반의 경지에 도달했겠습니다.””대덕이시여, 아라한이란 본래 열반이 아니니, 왜냐 하면 일체 법의 구경의열반을 알아서 그 열반이란 생각까지도 끊어야만 열반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열반을 말로써 표현하는 것은 다만 유정들에게 분별하여 해설해 주기 위함이고, 또 갖가지 모습을 분별하여 헤아려주기 위함입니다.

“대사여, 그대의 말씀대로 한다면, 보살은 아라한도 아니고 유정도 아니고 유학(有學)도 무학(無學)도 아니고 벽지불(辟支佛)도 아니고 보살도 아니고 여래도 아니겠습니다.””훌륭하십시다. 구수 아난다시여, 아라한도 아니고 유정도 아니고 유학도 무학도 아니고 벽지불도 아니고 보살도 아니고 여래도 아니기 때문에, 보살이 그 일체의 처소에 몸을 나타낼 수 있고 또 일체의 지위에 머물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법을 설할 때에, 그 모임에 있던 5백 명의 아라한들이 각각 자신이 입고 있던 윗옷을 벗어 허공장보살에게 공양하면서 다음과 같이 외쳤다.

“원컨대, 일체의 유정들로 하여금 다 허공장보살처럼 그러한 변재를 얻게 해 주십시오.”

곧 허공장보살은 부처님께서 가지(加持)하시는 힘으로 아라한들로부터 받은 그 미묘한 법의 옷[法衣]을 다 허공에 감추어 보이지 않게 하였다. 그러자 아라한 비구들이 허공장보살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

“대사여, 지금 받들어 올린 그 많은 법의 옷들은 다 어디에 있습니까?”

허공장보살이 대답하였다.

“모두가 나의 허공의 창고[庫藏]에 있습니다.”

그 때에 세존께서 빙그레 웃으시자, 아난다가 다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무슨 연유로 빙그레 웃으시는 것입니까? 여래께서 웃으신 것은 그 까닭이 없지 않을 것이니, 원컨대 말씀해 주십시오.”

부처님께서 아난다에게 말씀하셨다.

“저 비구들이 받들어 공양한 의복은 허공장보살의 위신력(威神力)으로 말미암아 다 허공의 창고에 들어가는가 하면, 또 그 창고는 저 가사당(袈裟幢) 세계의 산왕(山王)여래의 처소로 가서 불사를 일으키느니라. 저 세계에서 허공장보살이 설법하는 음성은 다 가사로부터 흘러나오므로, 한량없는 보살들이 이 설법하는 음성을 듣고서 다 무생법인을 얻게 되느니라. 아난다여, 마땅히 알아야 하느니라. 이 보살의 수승한 신통 지혜가 이와 같이 갖가지 말로써 유정들을 성취시키기에, 이에 웃음을 짓는 것이니라.”

부처님께서 이 법을 설하실 때에 홀연히 공중으로부터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일월광화(日月光花)가 마치 불빛처럼 한량없이 내렸는데, 그 꽃 가운데에서 다음과 같은 음성이 들려왔다.

“어떤 사람이라도 이 허공장보살이 연설하는 물러나지 않는 법인(法印)을 듣는다면, 그는 곧 청정한 신심을 내어서 반드시 보리의 도량에 나아가리라.”

그 때에 아난다가 다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이러한 꽃들이 어디에서 날아오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대답하셨다.

“아난다여, 저 백천 세계의 주인인 광장엄(光莊嚴)이란 범왕(梵王)이 허공장보살을 공양하기 위해 이러한 꽃을 뿌리는 것이니라.”

아난다가 다시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희들도 다같이 저 범왕을 보기를 원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조금만 기다려라. 너희들도 자연히 다 보게 되리라.”

그러자 때마침 광장엄범왕이 60만 8천에 이르는 범중(梵衆)들에게 앞뒤로 둘러싸여서 저 범천으로부터 부처님 앞에 나아가 엎드려 예배한 다음 오른편으로 세 번 돌고는, 한쪽에 물러나 앉아 합장하고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매우 기이한 일입니다. 세존이시여, 이 허공장보살의 부사의한 변화야말로 청정한 계율의 위덕과 모든 삼마지의 위덕과 신통의 위덕과 지혜의 위덕과 원만한 서원의 위덕과 뛰어난 방편의 위덕과 즐거운 뜻을 더욱 늘리는 위덕과 자유로운 법신(法身)의 위덕과 몸을 장엄하는 위덕과 입과 뜻을 장엄하는 위덕과 그 밖의 일체의 법에 자재로운 위덕을 다 구족하였다고 하겠나이다.

그리고 세존이시여, 이 허공장보살이 몸·입·뜻의 업을 조금도 따르지 않고서 일체의 변화를 다 나타내 보이는 것은, 오직 전생부터 닦아 온 수행의 힘으로 선근을 쌓아서 그 깊고 깊은 부처님의 모든 행을 원만히 갖추었기 때 문입니다. 또 이 모든 행으로 말미암아 큰 사자후(師子吼)를 부르짖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니라, 그러하니라. 범왕아, 과연 너의 말과 같으니라. 그 어떤 보살이라도 다 옛날에 닦은 선근의 힘으로 복덕의 자량(資粮)을 쌓아야만, 이 위없이 바르고 평등한 보리의 서원을 세워서 물러나지 않고 이러한 신통 변화의 일을 나타낼 수 있느니라.”

그 때에 광장엄범왕이 다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이른바 보살의 선근이란 어떤 것이며, 또 어떤 것을 복덕이라 하고, 또 어떤 것을 지혜라고 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대답하셨다.

“범왕아, 선근이란 보살이 모든 유정을 위해 최초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내는 것이고, 복덕이란 그러한 보리의 마음을 내고 나서 일체의 성문·연각이나 그 밖의 유정들을 위해 보시·계율을 수행하여 모든 복덕의 업을 성취하는 것이고, 지혜란 그 쌓은 선근으로써 일체지(一切智)에 회향하는 것이니라. 또 선근이란 청정한 뜻으로써 다른 사람을 깔보거나 속이지 않는 것이고, 복덕이란 수행을 더하여 일체의 복덕을 쌓아 모으는 것이고, 지혜란 그 수승한 뜻을 더욱 더 증장하는 것이니라. 또 선근이란 모든 선한 법에 그 서원을 굳게 하는 것이고, 복덕이란 선한 법의 자량(資粮)을 더욱 모으기 위해 만족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고, 지혜란 모든 선근을 허깨비처럼 관찰하는 것이니라. 또 선근이란 선한 벗을 얻는 것이고, 복덕이란 선한 벗을 버리지 않는 것이고, 지혜란 선한 벗들에게 자주 배우는 것이니라. 또 선근이란 부처님의 법을 구하기를 좋아하는 것이고, 복덕이란 그 들은 것을 잊지 않는 것이고, 지혜란 법락(法樂)을 즐겨하는 것이니라. 또 선근이란 항상 부처님의 법을 구하는 것이고, 복덕이란 설법하되 그 과보를 바라지 않는 것이고, 지혜란 설법하는 것에 인색하지 않는 것이니라. 또 선근이란 항상 법을 듣는 것을 즐겨하는 것이고, 복덕이란 이치대로 관찰하는 것이고, 지혜란 법대로 수행하는 것이니라. 또 선근이란 항상 부처님을 뵙는 것을 기뻐하는 것이고, 복덕이란 항상 부처님께 공양하는 것이고, 지혜란 부처님의 가르침의 법에 수순하는 것이니라. 또 선근이란 출가하는 것이고, 복덕이란 출가하여 모든 성스러운 종족의 행을 닦는 것이고, 지혜란 고요한 곳에 머물기를 좋아하는 것이니라. 또 선근이란 욕심을 적게 하는 수행으로서 만족함을 아는 것이고, 복덕이란 온갖 의복과 음식에 탐착하지 않는 것이고, 지혜란 온갖 대상의 쓰임에 물들지 않는 것이니라. 또 선근이란 4념처(念處)를 올바르게 관찰하는 것이고, 복덕이란 4정근(正勸)을 원만히 갖추는 것이고, 지혜란 4여의족(如意足)을 얻는 것이니라. 또 선근이란 신근(信根)에 들어가는 것이고, 복덕이란 정진의 생각을 닦는 것이고, 지혜란 삼마지의 지혜를 관찰하는 것이니라. 또 선근이란 5력(力)에 머무는 것이고, 복덕이란 7각지(覺支)에 수순하는 것이고, 지혜란 8정도[八聖道]의 지혜에 들어가는 것이니라. 또 선근이란 그 마음이 미묘한 이치에 머무는 것이고, 복덕이란 사마타(奢摩他)의 자량(資糧)을 구하는 것이고, 지혜란 뛰어난 비바사나(毘婆舍那)를 얻는 것이니라. 또 선근이란 보시로써 복된 사업을 성취하는 것이고, 복덕이란 계율로써 복된 사업을 성취하는 것이고, 지혜란 수행으로써 복된 사업을 성취하는 것이니라. 또 선근이란 계학(戒學)을 더욱 더 늘리는 것이고, 복덕이란 심학(心學)을 더욱 더 늘리는 것이고, 지혜란 혜학(慧學)을 더욱 더 늘리는 것이니라. 또 선근이란 모든 죄를 참회하는 것이고, 복덕이란 온갖 선한 일에 따라 기뻐하는 것이고, 지혜란 모든 부처님께 권청하는 것이니라. 또 선근이란 모든 소유물을 다 희사하는 것이고, 복덕이란 다 희사하되 그 과보를 바라지 않는 것이고, 지혜란 보시로써 보리에 회향하는 것이니라. 또 선근이란 모든 수행을 계율에 두는 것이고, 복덕이란 그 계율을 지켜서 어기지 않는 것이고, 지혜란 계율로써 보리에 회향하는 것이니라. 또 선근이란 유정들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는 것이고, 복덕이란 악한 말을 듣더라도 다 참아 견디는 것이고, 지혜란 몸과 목숨을 버리더라도 유정을 성취시키는 것이니라. 또 선근이란 선한 법을 부지런히 구하되 지치거나 싫어하지 않는 것이고, 복덕이란 모든 선근을 다 유정들에 회향하여 보시하는 것이고, 지혜란 그 쌓고 모은 선근을 다 보리에 회향하는 것이니라. 또 선근이란 모든 선정을 닦는 것이고, 복덕이란 선정을 닦음으로써 일체의 선근을 얻는 것이고, 지혜란 모든 선정을 닦되 욕계(欲界)를 버리지 않는 것이니라. 또 선근이란 지혜의 힘으로 견문을 넓히는 것이고, 복덕이란 그 견문에 따라 관찰하는 것이고, 지혜란 견문으로 말미암아 지혜를 원만히 갖추는 것이니라. 또 선근이란 유정을 평등한 마음으로 보는 것이고, 복덕이란 자비로운 마음의 선정을 증득하는 것이고, 지혜란 평등한 마음과 자비로운 마음을 마치 허공처럼 갖는 것이니라. 또 선근이란 3지(地)의 자량(資糧)을 닦는 것이고, 복덕이란 4지의 자량을 쌓는 것이고 지혜란 8지·9지·10지1)의 자량을 다 원만히 갖추는 것이니라. 또 선근이란 보살이 초발심을 내는 것이고, 복덕이란 보살이 그 수행에 머무는 것이고, 지혜란 보살이 물러나지 않는 지위에 이르는 것이니라. 또 선근이란 평등한 행을 닦는 것이고, 복덕이란 장엄한 상호를 갖추는 것이고, 지혜란 그 누구도 볼 수 없는 정수리의 모습을 성취하는 것이니라. 또 선근이란 온갖 장엄물로 부처님을 공양하는 것이고, 복덕이란 마음을 항상 은혜롭게 베푸는 것이고, 지혜란 유정들을 다 이롭게 하는 것이니라. 또 선근이란 마업(魔業)에 미혹되지 않는 것이고, 복덕이란 곧 마업을 깨달아 관찰하는 것이고, 지혜란 마업을 초월하는 것이니라. 또 선근이란 큰 자비심을 갖추는 것이고, 복덕이란 뛰어난 방편을 구하는 것이고, 지혜란 반야(般若)를 닦는 것이니라. 또 선근이란 보리의 도량을 장엄하는 것이고, 복덕이란 모든 마군을 쳐부수는 것이고, 지혜란 한 찰나 사이에 그 마음을 지혜와 화합하여 바른 깨달음을 성취하는 것이니라. 범왕아, 이러한 것을 보살의 선근이라 하고 보살의 복덕이라 하고 보살의 지혜라 하느니라.”

그 때에 광장엄범왕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이러한 선근·복덕·지혜의 세 가지 법구의 이치로써 일체의 법을 다 해설할 수 있으니 매우 기이한 일입니다.”

그 때에 허공장보살이 광장엄범천에게 말하였다.

“범천이여, 한 가지의 법구로도 일체의 법을 다 포섭할 수 있으니, 그 한 가지의 법구란 공(空)의 법구를 일컫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일체의 법이 다 허공과 같기 때문입니다. 또 일체의 법을 다 포섭할 수 있는 한 가지의 법구를 말하자면, 상(相)이 없는 법구가 그러하고 원(願)이 없는 법구가 그러하며 내지 행이 없는 법구와 욕심을 여읜 법구와 고요한 법구와 아뢰야식(阿賴耶識)을 여읜 법구와 법계의 법구와 진리의 법구와 실제의 법구와 생멸하지 않는 법구와 열반의 법구가 각각 일체의 법을 포섭하는 것이 다 그러합니다.

범왕이여, 탐욕을 여의는 법구란 그 탐욕을 여의는 법의 성품이 곧 탐욕 때문이므로 일체 부처님의 법도 이 법의 성품과 같고, 성냄을 여의는 법구란 그 성냄을 여의는 법의 성품이 곧 성냄 때문이므로 일체 부처님의 법도 이 법의 성품과 같고, 어리석음을 여의는 법구란 그 어리석음을 여의는 법의 성품이 곧 어리석음 때문이므로 일체 부처님의 법도 이 법의 성품과 같고 내지 신견(身見)을 여의는 법구도 그 신견을 여의는 법의 성품이 곧 신견 때문이므로 일체 부처님의 법도 이 법의 성품과 같고, 물질을 여의는 법구도 그 물질을 여의는 법의 성품이 곧 물질 때문이므로 일체 부처님의 법도 이 법의 성품과 같습니다. 이와 같이 느낌·생각·지어감·의식을 여의는 모든 법구도 그 느낌·생각·지어감·의식을 여의는 법의 성품이 곧 느낌·생각·지어감·의식 때문이므로 일체 부처님의 법도 이 법의 성품과 같습니다. 또 무명(無明)을 비롯한 12연기(緣起)의 법도 다 그러하므로 일체 부처님의 법도 이 법의 성품과 같으며 내지 생멸하지 않는 법구도 그 생멸하지 않는 법의 성품이 곧 생멸이기 때문이므로 일체 부처님의 법도 이 법의 성품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일체의 법구가 다 법의 성품이 없는 것은 그 법의 성품 없는 법구가 곧 부처님의 법이기 때문이니, 일체의 부처님 법이 다 동일한 법의 성품인 것입니다.

범왕이여, 이것이 바로 한 가지의 법구가 일체의 법을 포섭하는 것입니다. 보살이 만약 이 법문에 들어간다면 곧 한 가지의 법구로 말미암아 일체의 부처님 법에 들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마치 큰 바다가 온갖 강물을 다 받아들이는 것처럼, 이 낱낱의 법구가 일체의 법을 다 받아들이는 것도 그러합니다. 또 허공이 만물의 형상을 다 받아들이는 것처럼, 이 낱낱의 법구가 일체의 법을 다 받아들이는 것도 그러합니다. 이 때문에 이러한 법구가 받아들이는 범위는 한량없고 다함이 없는 것입니다. 또 산사(算師)가 산주(算籌)를 산판 위에 늘어놓아도 그 산주와 산판이 하나가 되어 한량없는 수를 다 계산하게되는 것처럼, 이러한 하나의 법구가 한량없는 법구를 성취하는 것도 그러합니다.

범왕이여, 백천 겁에 걸쳐 이러한 부처님의 법을 말하더라도, 그 부처님의 법은 몸과 마음에 아무런 소득이 없고 또 그 법조차 헤아릴 수 없습니다. 왜냐 하면 일체의 법이 곧 부처님의 법이고 부처님의 법은 곧 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떤 생각으로 분별하고 두루 알기 위하여 이름을 빌려서 부처님의 법이라고 말할 뿐이니, 실제로 그 부처님의 법은 상(相)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고, 법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어서 끝내 상도 없고 법도 없습니다. 이러한 상이야말로 청정한 상이므로 그 본래의 상까지 멀리 여의니, 마치 허공이 하나의 성품인 것과 같습니다.”

허공장보살이 이 법을 설할 때에, 저 2만 2천 명의 범천들이 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내었고, 또 5천 명의 범왕들은 전생에 심은 선근으로 말미암아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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