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집대허공장보살소문경(大集大虛空藏普薩所問經) 제3권
부처님께서 다시 허공장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보살이 세존의 법보장(法寶藏)을 받아 지니는 것이란 어떤 것인가? 선남자여, 부처님의 법보장은 언제나 다함이 없어서 부처님께서는 그 일체 유정들의 한량없는 근성(根性)과 행의 상에 들어가시는가 하면, 그들의 갖가지 차별과 근성과 행의 상에 따라 법보장을 설하시느니라. 설하시는 법보장이 한량없고 그지없으므로, 이를 세존의 법보장이라고 하느니라. 다시 말하면, 부처님께서는 증득하신 보리와 열반을 처음도, 중간도, 나중도 진리 그대로를 말씀하실 뿐 다른 말씀은 하시지 않느니라. 이른바 진리 그대로의 말씀이란, 저 진여(眞如)의 평등함을 말씀하시는 것이고, 다른 말씀을 하시지 않는 것이란, 설하시는 법이 다 수승한 이치에 의지하여 차별없이 한가지로 평등함을 말하는 것이니라. 그리고 진리를 말씀하시는 것이란, 법의 본래의 성품을 설하는 것을 일컫는 것이니라.
또한 부처님의 법보장이라고 하는 것은, 문자(文字)로써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가령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의 일체 유정들로 하여금 다 아난다(阿難陀)처럼 다문(多聞)제일이 되어서 백천 구지(俱胝)의 겁 동안 한 가지의 이치만을 말하더라도 그 이치를 다 말할 수 없느니라. 이와 같이 그지없는 부처님의 법보장을 보살이 다 법대로 받아 지니되, 일체의 이치에 어긋남이 없고 일체의 문자까지도 잊음이 없게 하느니라. 또 모든 유정들로 하여금 다 환희심을 내게 하고 모든 부처님을 받들어 공양하게 하며 일체의 마군과 외도를 굴복시키고 번뇌를 소멸시켜서 바른 법을 찬탄하게 하느니라. 선남자여, 이와 같은 것을 부처님의 법보장을 받아 지니는 것이라고 하느니라.
다시 선남자여, 부처님께서 저 법의 본래의 성품을 깨달으신 것처럼, 보살도 그와 같이 법의 본래의 성품을 깨달아서 마땅히 받아 지니느니라. 여래가 저 법의 본래의 성품을 깨달은 것이란 어떤 것인가? 이른바 법의 본래의 성품이 다 허깨비와 같아서 성취해야 할 상(相)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고, 법의 본래 성품이 다 꿈과 같아서 그 경계의 상이 없음을 알기 때문이고, 법의 본래 성품이 다 아지랑이와 같아서 끝내 생멸하는 상이 없음을 알기 때문이고, 법의 본래 성품이 다 그림자와 같아서 그 움직이는 상과 본래의 것이 없음을 알기 때문이니라. 또 공(空)의 본래 성품이 끝내 이슬과 같은 것임을 알기 때문이고, 무상(無相)의 본래 성품이 분별이 없는 것임을 알기 때문이고, 무원(無願)의 본래 성품이 집착이 없는 것임을 알기 때문이니라. 또 그 욕심을 여읜 본래의 성품이 일체의 탐욕을 다 멀리 여읜 것임을 알기 때문이고, 그 함이 없는 본래의 성품이 일체의 경계를 다 초월한 것임을 알기 때문이니라.
선남자여, 내가 이와 같이 말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위하여 법의 본래의 성품을 분별해서 알게 하는 것일 뿐이니, 그 증득한 법의 본래의 성품과 모습은 말로 다할 수 없느니라. 만약 보살이 부처님의 법보장을 받아 지니려면, 여래가 깨달은 모든 법의 본래의 성품 그대로를 문자와 언어로써 유정들에게 이와 같이 설법할 줄 알아야만 비로소 보살로서 부처님의 법보장을 받아 지닐 수 있느니라. 다시 선남자여, 보살이 유정들의 본래 청정함을 잘 알아서 성숙시키는 것이란 어떤 것인가?
유정계가 본래 청정한 것은 그 근본 성품이 청정하기 때문이니, 유정들로서는 얻을 수 없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보살이 저 유정들을 성숙시키려면 마땅히 이러한 근본 성품의 청정함을 알아야 하고, 나라든가 유정이라든가 수명이라든가 하는 일체의 소견이 없어야 하느니라. 만약 유정이라는 말만하더라도 곧 전도된 소견에 따르게 되고 무명(無明)과 애욕에 얽매이게 되며, 허망한 분별로 온갖 번뇌망상을 내게 되니, 그 실제의 성품이 없느니라. 보살은 이 허망하고도 전도된 일체의 번뇌를 끊고 유정들을 위하여 이와 같은 법을 널리 설하되, 그 본래의 청정한 성품을 헐지 않고 유정들로 하여금 근본의 성품 그대로를 깨닫게 하며, 보살 자신이 유정이라는 소견을 버림으로써 유정들을 마땅히 올바르게 성숙시키느니라. 선남자여, 이것이 바로 보살이 유정들의 본래의 청정함을 잘 알아서 성숙시키는 것이니라.
다시 선남자여, 보살이 진리 그대로 부처님의 법을 닦는 것이란 어떤 것인가?
진리 그대로라는 것은 저 인연이 있기 때문에 과보가 있음을 말하는 것이니, 마치 보시의 인(因)이 있어서 큰 재물을 얻는 것처럼, 보살이 보시를 행하되 일체지(一切智)의 지혜에 회향해야만 보시바라밀다를 원만히 성취할 수 있느니라. 또 계율의 인이 있어서 사람이나 천인으로 태어나는 것처럼, 보살이 파계한 유정들로 하여금 청정한 계율에 편히 머물게 하되 일체지의 지혜에 회향해야만 계율바라밀을 원만히 성취할 수 있느니라. 또 인욕의 인이 있어서 부드럽게 몸·입·뜻을 장엄하는 것처럼, 보살 스스로도 이롭고 다른 사람도 이롭게 하는 행을 닦으며 위해를 가함이 없이 인욕에 머물되 일체지의 지혜에 회향해야만 인욕바라밀다를 원만히 성취할 수 있느니라. 또 정진의 인이 있어서 일체의 부처님 법을 거두어들이는 것처럼, 보살이 마땅히 큰 정진의 마음을 내어 온갖 선근을 쌓되 일체지의 지혜에 회향해야만 정진바라밀다를 원만히 성취할 수 있느니라. 또 선정의 인이 있어서 바른 지혜를 얻는 것처럼, 보살이 바른 지혜를 구하기 위해 사마타(奢摩他)의 자량(資糧)을 닦되 일체지의 지혜에 회향해야만 선정바라밀다를 원만히 성취할 수 있느니라. 또 반야의 인이 있어서 큰 지혜를 얻는 것처럼, 보살이 모든 집착을 여의되 일체지의 지혜에 회향해야만 선정바라밀다를 원만히 성취할 수 있느니라.
이와 같이 일체의 선한 법에 있어서 인(因)이 있기 때문에 과(果)가 있음을 안다면, 이것이 바로 진리 그대로 부처님의 법을 닦는 것이니라. 다시 말하면, 진리 그대로 닦는 것이란, 가령 나 자신과 일체의 법을 다 진리 그대로 닦되, 나에게 곧 나가 없고 일체의 법에도 다 나가 없음을 알며, 또 내가 곧 공이고 일체의 법도 다 공임을 알아야 하느니라. 이른바 나와 일체의 법이란, 다만 그 명칭만을 빌린 것이므로, 보살이 이와 같이 진리 그대로를 닦아서 일체의 법을 평등하게 관찰한다면 곧 일체의 부처님 법을 구족하는 것이니라. 이것이 바로 보살이 진리 그대로 부처님의 법을 닦는 것이니라. 다시 선남자여, 보살이 신통을 잃지 않는 것이란 어떤 것인가?
이른바 그 일체의 법에 자재함을 얻는 것이니라. 선남자여, 만약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이 자신의 소견을 버리지 못하고서 신통을 일으킨다면, 그는 곧 신통을 다시 잃게 되느니라. 만약 보살이 자신의 소견을 버리고도 예순 두 가지의 모든 소견까지 멀리 여의며 신통을 일으킨다면, 이것을 일컬어 지혜를 갖추고 깨달음을 갖추고 보시·계율·선정을 다 갖추었다고 하느니라. 또한 그 몸과 마음까지 멀리 여의어 지혜를 이미 다 갖추었다고 하느니라.
보살은 안팎이 항상 고요하여 아무런 지음이 없고, 마음이 가고자 하는 바를 두루 알아서 그 선한 마음과 청정한 지혜를 잘 가려 뽑으며 번뇌의 더러움을 없애는 동시에 지혜의 광명을 얻느니라. 그리고 이 지혜 광명은 거리낌이 없어 마침내 복의 자량을 모으고 지혜의 자량을 모으고 사마타의 자량을 모으고 비발사나(毘鉢舍那)1)의 자량을 모으느니라. 또 이 자량으로 말미암아 보시·계율을 장엄하고 인욕·정진을 굳게 하고 선정·지혜를 잘 닦고 대자·대비에 수순하여 편히 머무느니라. 또 그 뛰어난 방편의 법으로 미묘한 신통을 일으켜서 걸림이 없는 자리에 높이 오르고, 내지 보리의 도량에 앉아 신통의 힘으로 일체의 법에 자재함을 얻음으로써 모든 색상을 나타내고 모든 소리를 듣고 모든 마음에 들어가 한량없는 겁(劫)을 기억하느니라. 또 한편으로는 일체 유희의 신통을 얻음으로써 온갖 번뇌를 끊는 동시에 그 뜻대로 변화를 일으키니, 그 일체의 법에 역시 공용(功用)이 없느니라. 선남자여, 이것이 바로 보살이 신통을 잃지 않는 것으로서 그 일체의 법에 자재함을 얻느니라. 다시 선남자여, 보살이 깊고 깊은 법의 이취(理趣)에 드는 것이란 어떤 것인가?
일체의 성문·연각 따위로서는 헤아리기 어려운 것이니라. 선남자여, 이 깊고 깊은 것을 일컬어 인연에 따라 일어나는 이취라고 하느니라. 이른바 무명(無明)은 지어감의 인연이 되고 지어감은 의식의 인연이 되고 의식은 이름과 물질의 인연이 되고 이름과 물질은 여섯 감관의 인연이 되고 여섯 감관은 접촉의 인연이 되고 접촉은 느낌의 인연이 되고 느낌은 애욕의 인연이 되고 애욕은 취함의 인연이 되고 취함은 존재의 인연이 되고 존재는 태어남의 인연이 되고 태어남은 늙고 죽고 근심하고 슬퍼하고 괴로워하는 것의 인연이 되느니라. 이 인연의 모임으로 말미암아 큰 고뇌가 생겨나고 유정들로 하여금 온갖 번뇌에 허덕이게 하느니라. 보살은 능히 이러한 것을 환히 아느니라. 곧 이것을 일컬어 인연에 따라 일어나는 이취라고 하느니라.
다시 인연에 따라 사라지는 이취라는 것은 어떤 것인가? 이른바 무명이 사라지면 지어감이 사라지고 지어감이 사라지면 의식이 사라지고 의식이 사라지면 이름과 물질이 사라지고 이름과 물질이 사라지면 여섯 감관이 사라지고 여섯 감관이 사라지면 접촉이 사라지고 접촉이 사라지면 느낌이 사라지고 느낌이 사라지면 애욕이 사라지고 애욕이 사라지면 취함이 사라지고 취함이 사라지면 존재가 사라지고 존재가 사라지면 태어남이 사라지고 태어남이 사라지면 늙고 죽고 근심하고 슬퍼하고 괴로워하는 것이 사라지느니라. 이러한 인연의 사라짐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큰 고뇌가 사라지므로 유정들로 하여금 청정함을 얻게 하느니라. 이것을 일컬어 인연에 따라 사라지는 이취라고 하느니라. 보살이 만약 이러한 것을 환히 안다면, 그 또한 깊고 깊은 법의 이취에 들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선남자여, 이 모든 것은 부처님의 경계이기 때문에 성문·연각 따위로서는 번뇌 속에서 청정함을 얻을 수 없고, 보살로서도 부처님께서 가호하시는 위신(威神)의 힘을 입어야만 이러한 것을 깨달을 수 있느니라. 다시 말하면, 그 깊고 깊은 것이 바로 살가야(薩迦耶)2)이니, 살가야가 청정하기에 일체의 법도 청정하니라. 왜냐 하면 이 살가야는 아무리 근본을 구하여도 얻을 바가 없고 얻을 바가 없기 때문에 곧 깊고 깊은 것이니라.
모든 부처님께서는 나에 대해 얻을 바 없는 것임을 말씀하시느니라. 나라는 것이 본래 청정하고 나라는 것이 청정함과 마찬가지로 일체의 법도 역시청정한 것이니, 어찌하여 청정하다고 하는가 하면, 저 일체의 법이 본래 나지도 않고 사라짐도 없기 때문이니라. 다시 말하면, 어둠도 없고 밝음도 없고 아뢰야식(阿賴耶識)도 없는 그 진실하고도 수승한 이치가 바로 깊고 깊은 것이니라. 또 그것은 눈의 사라짐도 없고 내지 의식의 사라짐도 없고 아무런 경계도 없고 이러한 경계가 없기에 곧 진실한 것이니라. 이 깊고 깊은 제일의 이치야말로 마음에 집착하는 바가 없고 그 수승함을 누구도 헤아리기 어렵고 보기도 어렵고 깨달을 수도 없기에, 이러한 모든 종류를 가장 깊은 법의 이치라고 하느니라. 그러기에 이 이치의 명칭을 빌려 세간의 이치에 수순하는 것은 다만 저 유정들에게 분별하여 보여 주기 위함이니라. 이것이 바로 보살이 깊고 깊은 법의 이취(理趣)에 드는 것으로, 일체의 성문·연각으로서는 헤아리기 어려운 것이니라.
다시 선남자여, 보살이 연기(緣起)를 아는 그 뛰어난 지혜로써 일체의 치우친 소견을 멀리 여의는 것이란 어떤 것인가? 선남자여, 연기라는 것은 의지할 것이 없는 것이 곧 연기이고, 아무런 일이 없고 성취할 것도 없는 것이 곧 연기이고, 덧없음과 괴로움과 나라고 할 수 없는 것과 고요함이 곧 연기이고, 나도 없고 유정도 없고 수명도 없고 기르는 것도 없는 것이 곧 연기이고, 보특가라(補特伽羅)라든가 사람이라든가 어린이라든가 하는 것이 없는 것이 곧 연기이고, 생하는 것도 멸하는 것도 없는 것이 곧 연기이니라. 또 지닌 것도 없고 공용(功用)도 없고 공(空)하여 상(相)이 없고 고요하여 행이 없고 희론(戱論)이 없는 이것을 일컬어, 희론이 없는 법이라고 하니, 생하는 그대로가 바로 생하는 것이고 멸하는 그대로가 바로 멸하는 것이니라. 다시 말하면, 나도 없고 유정도 없고 수명도 없고 기르는 것도 없고 보특가라라는 것도 없고 사람이라는 것도 없고 어린이라는 것도 없는 것이 곧 어떠한 법을 인연으로 하여 일어나는 것이 없는 것이니라. 그 모든 것에 나라는 주재자(主宰者)가 없기 때문이니, 마치 저 초목과 장벽(墻壁)의 그림자처럼, 일체의 법이 또한 그러하니라. 바깥의 모든 법이 생할 때에 생하는 존재가 없고 멸할 때에 멸하는 존재가 없는 것과 같이, 안의 법도 역시 생할 때에 생하는 존재가 없고 멸할 때에 멸하는 존재가 없을진대, 연기의 법을 제외하고는 사실 그대로 생함도 멸함도 없기 마련이니라. 이와 같이 서로 상응하여 관찰한다 면 그 모든 치우친 소견을 다 벗어나게 되느니라.
다시 치우친 소견이란 무엇인가 하면, 이른바 단멸한다는 소견[斷見]과 항상한다는 소견[常見]이 그것이니라. 생했을 때도 생한 것이 아니요, 멸했을 때도 멸한 것이 아니니,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어 저 단멸한다거나 항상한다고 하는 치우친 소견이 저절로 청정하게 되며, 저절로 청정하게 됨으로써 일체의 치우친 소견이 다 청정하게 되느니라. 이것이 바로 보살이 연기를 아는 그 뛰어난 지혜로써 일체의 치우친 소견을 멀리 여의는 것이니라.
다시 선남자여, 보살이 여래의 인(印)으로써 인을 맺어 진여(眞如)의 끊임[間斷] 없는 뛰어난 지혜를 지닌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여래의 인이란, 끊임이 없고 생함도 없고 변함도 없고 취할 수도 없고 움직일 수도 없고 움직이게 할 수도 없으므로, 일체 세간의 사람이나 천인이나 아수라(阿修羅)들로서도 감히 건드릴 수가 없느니라. 왜냐 하면 여래의 인은 바로 구경(究竟)의 생함이 없는 인이고, 구경의 공한 성품의 인이고, 구경의 무상(無相)의 인이고, 구경의 무원(無願)의 인이고, 구경의 함이 없는 인이고, 구경의 욕심을 여읜 인이고, 구경의 진여의 인이고, 구경의 실제(實際)의 인이고, 구경의 허공의 인이기 때문이니라.
선남자여, 이러한 여래의 인(印)은 마치 허공에 인을 맺는 것처럼 볼 수 없어서 5안(眼)으로도 광명의 모습을 볼 수 없느니라. 오직 그 본래의 인으로써만 그것을 맺기 때문이니, 내지 이와 같이 여래께서 말씀하신 일체의 법도 다 여래의 인으로써 그것을 맺은 것이니라. 이에 비해, 저 인식과 경계의 법은 다 만들고 짓는 법이므로 아무리 그 법을 안락하게 세우려고 하여도 할 수 없으니, 진여의 인으로써 인을 맺는 것만이 끊임이 없느니라.
또 진여에 대해 끊임[間斷]이 없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모든 법을 분별하여서 상·중·하의 차별을 둔다면 그것이 곧 끊임이 있는 것이므로 어떠한 법에도 분별이 없어야만 끊임이 없다고 할 수 있느니라. 즉, 아무리 많은 분별을 내더라도 저 진여에 대해서만은 무너뜨리거나 어지럽게 할 수 없으니, 마치 유정들이 허공을 다니더라도 저 허공이 무너지지 않는 것처럼, 일체의 유정들이 진여 속을 다니더라도 진여는 조금도 무너지지 않는 것과 같으니라. 그러므로 보살이 지혜를 행하는 것도 이와 같아서 그 모든 물질과 법에 대해 진여의 인으로써 그것을 맺으니, 진여에 무너짐과 끊어짐이 없느니라. 이것이 바로 보살이 여래의 인으로써 인을 맺어 진여의 끊임이 없는 뛰어난 지혜를 지니는 것이니라.
다시 선남자여, 보살이 법계(法界)의 깊고 깊은 이취(理趣)에 드는 것이란 어떤 것인가? 일체의 법과 그 모든 법계를 두루 다 평등한 한 가지의 성품으로 보는 것이니라. 법계를 일컬어 이욕계(離欲界)라고 하는 것은 그 모든 번뇌를 여의었기 때문이고, 또 불생계(不生界)라고 하는 것은 취집(聚集 : 5蘊)이 없기 때문이고, 또 불상위계(不相違界)라고 하는 것은 본래 생멸이 없기 때문이고, 또 무왕계(無往界)라고 하는 것은 차별이 없기 때문이고, 또 무래계(無來界)라고 하는 것은 걸림이 없기 때문이고, 또 무주계(無住界)라고 하는 것은 생기하지 않기 때문이고, 또 여여계(如如界)라고 하는 것은 3세(世)가 평등하기 때문이고, 또 무아계(無我界)라고 하는 것은 본래가 청정하기 때문이고, 또 수자계(壽者界)라고 하는 것은 그 자체가 바로 수승한 이치이기 때문이고, 또 무요별계(無了別界)라고 하는 것은 머묾이 없기 때문이고, 또 무아뢰야계(無阿賴耶界)라고 하는 것은 더러움에 물듦이 없기 때문이고, 또 무생기계(無生起界)라고 하는 것은 그 성품이 분명하기 때문이고, 또 여허공계(如虛空界)라고 하는 것은 그 성품이 청정하기 때문이고, 또 여열반계(如涅槃界)라고 하는 것은 희론(戱論)이 없기 때문이니라. 이러한 것을 일컬어 법계의 이취(理趣)에 든다고 하느니라. 보살이 이러한 이취에 들게 되면, 그가 연설하는 낱낱의 말이 다 법계의 이취에 두루 하게 되니, 욕계(欲界)와 법계(法界)가 둘이 아님을 곧 아느니라.
다시 말하면, 욕성법계(欲性法界)와 진성법계(瞋性法界)가 둘이 아니고, 진성법계와 치성법계(癡性法界)가 둘이 아니고, 치성법계와 번뇌성법계(煩惱性法界)가 둘이 아니고, 번뇌성법계와 욕계성법계(欲界性法界)가 둘이 아니고, 욕계성법계와 색계성법계(色界性法界)가 둘이 아니고, 색계성법계와 무색계성법계(無色界性法界)가 둘이 아니고, 무색계성법계와 공성법계(空性法界)가 둘이 아니고, 공성법계와 안계성법계(眼界性法界)가 둘이 아니고, 안계성법계와 색성법계(色性法界)가 둘이 아니고, 색성법계와 안식계성법계(眼識界性法界)가 둘이 아니고, 안식계성법계와 내지 의계성법계(意界性法界)가 둘이 아니고, 의계성법계와 의식계성법계(意識界性法界)가 둘이 아니고, 의식계성법계와 온계성법계(蘊界性法界)가 둘이 아니고, 온계성법계와 지수화풍성법계(地水火風性法界)가 둘이 아니고, 지수화풍성법계와 내지 팔만사천법온행일체법법계(八萬四千法蘊行一切法法界)가 둘이 아니니라. 보살이 만약 평등한 지혜로 말미암아 이와 같은 법계에 든다면, 곧 그는 능히 일체 법의 평등한 이취를 보게 되리라. 선남자여, 이것이 바로 보살이 법계의 이취에 드는 것이니라.
다시 선남자여, 보살이 금강처럼 견고한 뜻으로 이 대승(大乘)에 머물러서 흔들리지 않는 것이란 어떤 것인가? 선남자여, 보살은 열두 가지 법을 성취해야만 금강처럼 견고한 뜻을 얻어서 세간의 천인이나 사람들에게 무너지지 않느니라. 그 열두 가지 법이란, 첫째는 보리의 마음을 더욱 늘리기 위해 그 견고한 뜻을 무너뜨리지 않는 것이고, 둘째는 보시·계율·인욕·정진·선정·반야를 닦기 위해 그 견고한 뜻을 무너뜨리지 않는 것이고, 셋째는 대자대비를 행하기 위해 그 견고한 뜻을 무너뜨리지 않는 것이고, 넷째는 4섭법(攝法)3)을 지니기 위해 그 견고한 뜻을 무너뜨리지 않는 것이고, 다섯째는 유정을 성숙시키기 위해 그 견고한 뜻을 무너뜨리지 않는 것이고, 여섯째는 모든 불국토를 청정하게 하기 위해 그 견고한 뜻을 무너뜨리지 않는 것이고, 일곱째는 생사를 벗어나기 위해 그 견고한 뜻을 무너뜨리지 않는 것이고, 여덟째는 더욱 선근(善根)을 구족하기 위해 그 견고한 뜻을 무너뜨리지 않는 것이고, 아홉째는 상호(相好)를 장엄하기 위해 무차시회(無遮施會)4)를 열어 그 견고한 뜻을 무너뜨리지 않는 것이고, 열째는 몸과 목숨을 버릴지라도 바른 법을 옹호하기 위해 그 견고한 뜻을 무너뜨리지 않는 것이고, 열한째는 선근을 닦아서 일체 유정들에게 회향하기 위해 그 견고한 뜻을 무너뜨리지 않는 것이고, 열두째는 일체의 부처님 법을 모으기 위해 그 견고한 뜻을 무너뜨리지 않는 것이니라.
선남자여, 보살이 만약 이러한 법을 닦아 무너뜨리지 않는다면, 그가 금강처럼 견고하고 무너지지 않는 뜻을 성취하였음을 마땅히 알아야 하느니라. 또 그것은 금강 보배와 같아서 온갖 보배를 아우르고 그 자체로도 무너짐이 없느니라. 이처럼 보살은 견고한 뜻을 성취하여서 능히 일체 유정들의 번뇌와 수면(隨眠)을 다 뽑고 그 자체로 무너짐이 없게 되느니라. 선남자여, 이것이 바로 보살이 금강처럼 견고한 뜻으로 이 대승에 머물러서 흔들리지 않는 것이니라.
다시 선남자여, 보살이 스스로의 경계를 부처님의 경계처럼 청정하게 하는 것이란 어떤 것인가? 선남자여, 부처님의 경계란 경계가 있는 것이 아니어서 일체의 경계를 여의었기 때문에 청정한 경계이고, 보살의 경계는 스스로의 경계가 있기 때문에 부처님의 경계로 말미암아 청정하게 되기 마련이니라. 이에 청정한 눈의 경계가 곧 부처님의 경계이기도 하지만, 역시 부처님의 경계도 눈의 경계도 없고, 그 경계의 멀고 가까운 것도 없느니라. 왜냐 하면 일체의 경계를 멀리 여의어서 부처님의 경계와 눈의 경계가 없기 때문이고, 일체의 경계와 눈의 경계를 멀리 여읜 것마저 없기 때문이니라. 또 청정한 귀의 경계가 곧 부처님의 경계이기도 하지만, 역시 부처님의 경계도 귀의 경계도 없고 그 경계의 멀고 가까운 것도 없느니라. 왜냐 하면 일체의 경계를 멀리 여의어서 부처님의 경계와 귀의 경계가 없기 때문이고, 일체의 경계와 귀의 경계를 멀리 여읜 것마저 없기 때문이니라. 또 청정한 코의 경계가 곧 부처님의 경계이기는 하지만, 역시 부처님의 경계도 코의 경계도 없고 그 경계의 멀고 가까운 것도 없느니라. 왜냐 하면 일체의 경계를 멀리 여의어서 부처님의 경계와 코의 경계가 없기 때문이고, 일체의 경계와 코의 경계를 멀리 여읜 것마저 없기 때문이니라. 또 청정한 혀의 경계가 곧 부처님의 경계이기는 하지만, 역시 부처님의 경계도 혀의 경계도 없고 그 경계의 멀고 가까운 것도 없느니라. 왜냐 하면 일체의 경계를 멀리 여의어서 부처님의 경계와 혀의 경계가 없기 때문이고, 일체의 경계와 혀의 경계를 멀리 여읜 것마저 없기 때문이니라. 또 청정한 몸의 경계가 곧 부처님의 경계이기는 하지만, 역시 부처님의 경계도 몸의 경계도 없고 그 경계의 멀고 가까운 것도 없느니라. 왜냐 하면 일체의 경계를 멀리 여의어서 부처님의 경계와 몸의 경계가 없기 때문이고, 일체의 경계와 몸의 경계를 멀리 여읜 것마저 없기 때문이니라. 또 청정한 뜻의 경계가 곧 부처님의 경계이기는 하지만, 역시 부처님의 경계도 뜻의 경계도 없고 그 경계의 멀고 가까운 것도 없느니라. 왜냐 하면 일체의 경계를 멀리 여의어서 부처님의 경계와 뜻의 경계가 없기 때문이고, 일체의 경계와 뜻의 경계를 멀리 여읜 것마저 없기 때문이니라. 그밖에 5온(蘊)·12처(處)·18계(界)·12연기(緣起)도 다 그러하니라. 선남자여, 보살이 만약 부처님의 경계에 들어가려면 일체의 경계를 멀리 여의는 것만이 곧 스스로의 경계를 청정하고 평등하게 하는 것이며, 스스로의 경계가 청정하고 평등한 것이 바로 부처님의 경계에 들어가는 것이니라.
선남자여, 이와 같이 여섯 종류의 경계가 다 부처님의 경계에 들어가서는 그림자처럼 나타날 뿐 아무런 집착을 일으키지 못하는 것은, 그 일체의 경계를 멀리 여의었기 때문이니라. 여래의 경계가 물듦이 없고 걸림이 없는 것처럼, 일체의 경계가 걸림이 없고 물듦이 없는 것도 그러하니라. 선남자여, 이렇게 깨닫는 것이 바로 보살이 여래의 경계에 들어가서 스스로의 청정한 경계를 성취하는 것이니라.
다시 선남자여, 보살이 다라니(陀羅尼)를 얻어 그 법의 행을 잊지 않는 것이란 어떤 것인가? 선남자여, 보살은 마땅히 이 다라니를 닦아 지녀야 하느니라. 다라니를 닦아 지니는 것이 어떤 것인가 하면, 이것에 서른두 가지 법이 있으니 그 서른두 가지란, 다라니를 닦아 지니기 위해 그 법을 구하는 것이 첫째이고, 다라니를 닦아 지니기 위해 그 법을 좋아하는 것이 둘째이며, 다라니를 닦아 지니기 위해 그 법의 동산에서 즐기는 것이 셋째이고, 다라니를 닦아 지니기 위해 그 법의 흐름에 따르는 것이 넷째이며, 다라니를 닦아 지니기 위해 그 법에 수순하는 것이 다섯째이고, 다라니를 닦아 지니기 위해 그 법을 높이는 것이 여섯째이며, 다라니를 닦아 지니기 위해 많이 들어서 아는 이를 받들어 공양하는 것이 일곱째이고, 다라니를 닦아 지니기 위해 언제나 스님들과 스승에게 아만(我慢)을 버리고 공경히 공양하는 것이 여덟째이며, 다라니를 닦아 지니기 위해 그 법을 더욱 더 만족하게 하는 것이 아홉째이고, 다라니를 닦아 지니기 위해 가르침을 주는 이를 거스르지 않고 수순하는 것이 열째이며, 다라니를 닦아 지니기 위해 그 설법하는 이의 모자란 점을 추궁하지 않고 마치 부처님처럼 공경하는 것이 열한째이고, 다라니를 닦아 지니기 위해 그 들은 법을 다 기억하여 받아 지니는 것이 열두째이며, 다라니를 닦아 지니기 위해 그 정진을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이 열셋째이고, 다라니를 닦아 지니기 위해 그 모든 법에 인색하지 않는 것이 열넷째이며, 다라니를 닦아 지니기 위해 법 보시를 행하되 그로 말미암아 바라는 것이 없는 것이 열다섯째이고, 다라니를 닦아 지니기 위해 그 들은 법의 이치에 따라 짓는 것이 열여섯째이며, 다라니를 닦아 지니기 위해 항상 그 들은 법을 잘 관찰하는 것이 열일곱째이고, 다라니를 닦아 지니기 위해 한계 없이 많이 듣기를 구하는 것이 열여덟째이며, 다라니를 닦아 지니기 위해 항상 그 범행(梵行)을 그치지 않는 것이 열아홉째이고, 다라니를 닦아 지니기 위해 모든 번잡함을 여의고 그 마음을 항상 고요하게 하는 것이 스무째이며, 다라니를 닦아 지니기 위해 항상 그 여섯 감관을 조복하여 부지런히 닦는 것이 스물한째이고, 다라니를 닦아 지니기 위해 그 여섯 경계에 물들지 않게 모든 집착을 버리는 것이 스물둘째이며, 다라니를 닦아 지니기 위해 그 여섯 가지의 화경(和敬)5)을 버리지 않는 것이 스물셋째이고, 다라니를 닦아 지니기 위해 그 일체의 유정들에게 걸림 없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 스물넷째이며, 다라니를 닦아 지니기 위해 인연으로 일어나는 법에 대해 지혜로써 닦는 것이 스물 다섯째이고, 다라니를 닦아 지니기 위해 세 가지 해탈문(解脫門)을 잘 관찰하되 놀라거나 겁내지 않는 것이 스물여섯째이며, 다라니를 닦아 지니기 위해 성스러운 종자인 그 두타(杜多)의 공덕을 버리지 않는 것이 스물 일곱째이고, 다라니를 닦아 지니기 위해 그 수승한 마음으로 바른 법을 옹호하는 것이 스물 여덟째이며, 다라니를 닦아 지니기 위해 유정을 관찰하되 항상 큰 자비심을 일으키는 것이 스물아홉째이고, 다라니를 닦아 지니기 위해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고 그 바른 법을 구하는 것이 서른째이며, 다라니를 닦아 지니기 위해 큰 지혜의 행을 닦아서 어리석음과 의혹을 벗어나는 것이 이 서른한째이고, 다라니를 닦아 지니기 위해 유정들을 게으름 없이 부지런히 성취시키는 것이 서른둘째이니라. 이것이 바로 보살이 다라니를 얻어 그 업을 잊지않는 것이니라.
다시 선남자여, 보살이 만약 이 다라니를 얻고 나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두루 다 간직하여 잊어버리지 않는다면, 그 들은 법을 잊어버리지 않음으로써 밝은 지혜를 깨달아 일체의 다함이 없는 문자(文字)에 들어가느니라. 또 그 모든 언어와 음성에 따라 잘 이해하는 지혜를 얻고, 걸림이 없는 변재로써 유창하게 연설하는 지혜를 얻고, 요의경(了義經)에 의지하고 불료의경(不了義經)에 의지하지 않음으로써 모든 이취(理趣)에 드는 지혜를 얻고, 세속에 들어가서는 세속을 위해 다함이 없이 연설하는 지혜를 얻고, 수승한 이치에 들어가서는 그 이치를 끊임없이 연설하는 지혜를 얻고, 바른 노력의 정진으로써 물러나지 않는 지혜를 얻고, 4신족(神足)으로써 유희(遊戱)의 지혜를 얻고, 모든 감관에 있어서는 분별할 줄 아는 지혜를 얻고, 모든 힘에 있어서는 흔들리지 않는 지혜를 얻고, 7각지(覺支)6)에 있어서는 크게 깨닫는 지혜를 얻고, 8성도(聖道)에 있어서는 바른 이치에 들어가는 지혜를 얻고, 사마타(奢摩他)에 있어서는 고요한 마음에 머무는 지혜를 얻고, 비발사나(毘鉢舍那)에 있어서는 바른 법을 잘 결정하여 분별하는 지혜를 얻고, 지혜 해탈에 있어서는 수순하는 지혜를 얻고, 모든 변설(辯說)에 있어서는 깊고 깊은 지혜를 얻고, 모든 신통에 있어서는 생기(生起)시키는 지혜를 얻고, 모든 바라밀에 있어서는 분별하는 지혜를 얻고, 4섭법(攝法)에 있어서는 근기에 따르는 지혜를 얻고, 모든 음성에 있어서는 말의 갈래를 알아듣는 지혜를 얻고, 법을 결정함에 있어서는 선택할 줄 아는 지혜를 얻고, 경전의 이치를 연설함에 있어서는 끊임없는 지혜를 얻고, 모든 문자에 있어서는 다함이 없는 지혜를 얻고, 모든 유정들에게 있어서는 환희심을 내게 하는 지혜를 얻고, 법을 구하는 자에게는 그의 근기에 맞추어 설법할 수 있는 지혜를 얻고, 부처님의 설법을 듣는 것에 있어서는 설법을 기억하여 다 지닐 수 있는 지혜를 얻고, 모든 문자에 있어서는 그 구절에 들어가는 지혜를 얻고, 더럽거나 깨끗한 것에 있어서는 여실히 깨닫는 지혜를 얻고, 일체의 업(業)의 인연에 있어서는 과보를 깨닫는 지혜를 얻고, 일체의 법에 있어서는 광명의 걸림 없는 지혜를 얻느니라.
선남자여, 이것을 바로 다라니라고 하느니라. 이것을 얻음으로써 몸·입·뜻이 평등하게 되고, 능히 다함이 없는 법의 빗물이 내려 모든 번뇌를 그치게 하며, 일체 부처님의 법을 자라나게 하기 때문이니라. 또 이 다라니를 얻음으로써 깊은 다라니의 이치에 들어가기 때문에 항상 잊음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이것을 일컬어 보살이 다라니를 얻어 그 법의 행을 잊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니라.
다시 선남자여, 보살이 여래의 가지(加持)하시는 힘으로 걸림 없는 변재(辯才)를 얻는 것이란 어떤 것인가? 선남자여, 보살이 만약 여래의 가지하시는 힘을 입는다면 스물네 가지 걸림 없는 변재를 얻게 되느니라. 그 스물 네 가지란, 가장 빠른 변재이고, 날카로운 변재이며, 걸림없는 변재이고, 막힘이 없는 변재이며, 아주 익숙한 말의 변재이고, 매우 깊은 변재이며, 뭇 음성을 나타내는 변재이고, 수승 미묘한 장엄을 갖춘 변재이며, 가라앉지 않는 변재이고, 두려움 없는 변재이며, 갖가지 게송으로 찬탄하는 변재이고, 경전에서 설하는 인연의 생기에 대해 말하는 변재이며, 다른 사람을 굴복시키는 변재이고, 차별되는 다함이 없는 장구(章句)를 설명하는 변재이며, 미묘한 이치를 드러내는 변재이고, 단정 엄숙한 위덕(威德)이 있는 변재이며, 끊임없이 설법하는 변재이고, 뭇 장엄을 갖춘 변재이며, 모든 의혹을 끊는 변재이고, 세간의 법을 벗어난 변재이며, 어긋나거나 잃어버리지 않는 변재이고, 자(慈)·비(悲)·회(喜)·사(捨)로써 유정들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변재이며, 전생의 일을 아는 신통의 변재이고, 모든 부처님께서 가지하시는 변재이니라.
선남자여, 이러한 스물네 가지의 변재를 얻는 것은 스물네 가지의 업을 닦아 성취하기 때문이니라. 그 스물네 가지의 업이란, 스승과 어른들의 가르침을 거스르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가장 빠른 변재를 얻는 것이고, 어디를 가더라도 아첨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날카로운 변재를 얻는 것이며, 모든 번뇌를 여읨으로 말미암아 걸림 없는 변재를 얻는 것이고, 모든 번잡함을 제거함으로 말미암아 막힘 없는 변재를 얻는 것이며, 말로써 이간질을 붙이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아주 익숙한 말의 변재를 얻는 것이고, 인과의 이치를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매우 깊은 변재를 얻는 것이며, 온갖 것을 베풂으로 말미암아 뭇 음성의 변재를 얻는 것이고, 여래의 탑묘(塔廟)를 장엄함으로 말미암아 수승 미묘한 장엄의 변재를 얻는 것이며, 보리의 마음을 버리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가라앉지 않는 변재를 얻는 것이고, 계온(戒蘊)을 잘 옹호함으로 말미암아 두려움 없는 변재를 얻는 것이며, 갖가지 깃발과 일산 따위의 장엄을 베풂으로 말미암아 갖가지 게송으로 찬탄하는 변재를 얻는 것이고, 갖가지 보시로써 여러 스승과 어른들을 공경히 받들어 섬김으로 말미암아 경전에서 설하는 인연의 생기에 대해 말하는 변재를 얻는 것이며, 빈궁한 유정들을 괴롭히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들을 굴복시키는 변재를 얻는 것이고, 다함이 없는 법보장(法寶藏)을 나타내어서 다른 이로 하여금 법에 들어가게 함으로써 차별되는 다함이 없는 장구(章句)를 설명하는 변재를 얻는 것이며, 허망한 말을 없애고 진실한 말을 함으로 말미암아 미묘한 이치를 드러내는 변재를 얻는 것이고, 훌륭한 가르침을 함부로 헐뜯거나 다른 사람의 말을 이간질 붙이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단정 엄숙한 위덕이 있는 변재를 얻는 것이며, 스스로가 간직한 법을 유포함으로 말미암아 끊임없이 설법하는 변재를 얻는 것이고, 다른 사람을 비방하지 않고 환희심으로써 아끼는 물건을 보시함으로 말미암아 뭇 장엄을 갖춘 변재를 얻는 것이며, 스승에게서 들은 법을 그대로 간직함으로 말미암아 모든 의혹을 끊는 변재를 얻는 것이고, 일체의 유정들을 마치 스승과 어른처럼 생각하여서 조금도 괴롭히지 않고 병든 자에게 약을 줌으로 말미암아 세간의 법을 벗어난 변재를 얻는 것이며, 다른 사람의 허물을 책망하지 않고 항상 스스로가 반성함으로 말미암아 어긋나거나 잃어버리지 않는 변재를 얻는 것이고, 평등한 마음으로 모든 유정들을 관찰하되 그들을 열반의 길에 이르게 하고 일체의 이익과 명예에 집착하지 않게 함으로 말미암아 자(慈)·비(悲)·회(喜)·사(捨)로써 유정들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변재를 얻는 것이며, 좋고 부드러운 말처럼 마음을 닦아서 마음의 탁함을 없앰으로 말미암아 전생의 일을 아는 신통의 변재를 얻는 것이고, 대승을 헐뜯지 않는가 하면 소승을 좋아하지도 않고 일체의 유정들을 가엾이 여김으로 말미암아 부처님께서 가지하시는 변재를 얻는 것이 그것이니라. 스물네 가지의 변재의 업을 성취하는 것이란 바로 이러한 것이니라.
선남자여, 다시 말하면, 유정들로 하여금 구경(究竟)에 이르게 하기 때문에 변재라 하고, 유정들로 하여금 그 간직한 법을 깨닫게 하기 때문에 변재라 하며, 유정들로 하여금 환희심을 계속 내게 하기 때문에 변재라 하고, 유정들로 하여금 그 근기에 따라 지혜를 얻게 설법하기 때문에 변재라고 하느니라. 선남자여, 이러한 법으로써 공덕의 지혜를 성취하니, 이것이 바로 보살이 부처님의 가지(加持)하시는 힘으로 걸림 없는 변재(辯才)를 얻는 것이니라.
다시 선남자여, 보살이 생사 속에서 자재함을 얻는 것이란 어떤 것인가?
선남자여, 보살이 만약 열두 가지 법을 성취한다면 생사 속에서라도 자재함을 얻게 되느니라. 그 열두 가지 법이란, 첫째 나쁜 벗을 멀리 여의는 것이고, 둘째 선한 벗을 가까이 하는 것이며, 셋째 부처님의 처소에 나아가 그 청정함을 본받는 것이고, 넷째 청정한 계율로써 삼마발저(三摩鉢底)로부터 그 지혜의 방편을 얻어 수행하는 것이며, 다섯째 물러나지 않는 신통을 얻는 것이고, 여섯째 생멸이 없는 모든 법을 관찰하는 것이며, 일곱째 본래의 원력을 원만히 성취하기 위해 생사 속에서라도 다음 생의 몸을 받는 것이고, 여덟째 유정을 관찰할 때마다 큰 자비심을 일으키는 것이며, 아홉째 큰 대비심으로써 선정에 들어 모든 법이 허깨비와 같음을 관찰하는 것이고, 열째 일체의 법이 생멸하지 않음을 아는 것이며, 열한째 꿈과 같은 성질의 법이 바로 허망하지 않은 법임을 여실히 관찰하는 것이고, 열둘째 부처님께서 가호하시는 위신(威神)의 힘으로써 혹 생사를 나타내되 그 생사에 더럽히지 않는 것이니라. 보살이 만약 이 열두 가지의 법을 성취한다면, 그는 곧 한량없는 아승기겁(阿僧祇劫)의 태어나는 곳마다 그 받은 몸을 나타내어 일체의 유정들에게 크나큰 이익을 베풀게 되느니라. 선남자여, 이러한 모든 것은 다 신통의 지혜와 큰 자비의 근본으로 말미암아 건립(建立)되는 것이니라. 이른바 보살마하살이 생사 속에서 신통으로 말미암아 자재함을 얻는 것이란 이러한 것이니라.
다시 선남자여, 보살이 원수와 적을 굴복시켜 4마(魔)를 초월하는 것이란 어떤 것인가? 선남자여, 보살이 만약 허깨비와 같은 지혜로 5온(蘊)의 모든 법이 다 허깨비와 같은 것임을 통달한다면 5온의 마(魔)를 초월할 수 있고,모든 법의 성품이 본래 청정한 것임을 통달한다면 번뇌의 마를 초월할 수 있으며, 인연이 일어나는 법을 통달한다면 생사의 마를 초월할 수 있고, 보리의 마음에서 물러나지 않는다면 자재천(自在天)의 마를 초월할 수 있느니라. 다시 말하면 보살이 이렇게 관찰함으로써 온갖 장애를 일으키는 일체의 마군들이 그 틈을 엿보지 못하리라.
마업(魔業)이란 어떤 것인가 하면, 소승(小乘)을 즐기는 것이 바로 마업이고, 보리의 마음을 옹호하지 않는 것이 바로 마업이며, 유정들을 차별하여 보시를 행하는 것이 바로 마업이고, 태어날 곳을 구하기 위해 계율을 지키는 것이 바로 마업이며, 어떤 색상(色相)을 구하기 위해 인욕을 닦는 것이 바로 마업이고, 세간의 일을 위해 서로 상응하여 정진하는 것이 바로 마업이며, 선정의 맛에 집착하는 것이 바로 마업이고, 지혜를 가짐으로써 저열한 법을 깔보는 것이 바로 마업이며, 생사에 있어서 지치거나 싫어하는 생각을 갖는 것이 바로 마업이고, 온갖 선근(善根)을 짓되 회향하지 않는 것이 바로 마업이며, 번뇌를 견디지 못해서 피하는 것이 바로 마업이고, 자기의 허물을 숨기는 것이 바로 마업이며, 보살에게 질투심을 내는 것이 바로 마업이고, 바른 법을 비방하는 것이 바로 마업이며, 은혜를 배반하여 갚을 줄 모르는 것이 바로 마업이고, 모든 바라밀을 구하지 않는 것이 바로 마업이며, 바른 법을 공경하지 않는 것이 바로 마업이고, 설법하는 것을 아깝게 여기는 것이 바로 마업이며, 이익을 바라고서 설법하는 것이 바로 마업이고, 방편을 버림으로써 유정을 성취하는 것이 바로 마업이며, 4섭법(攝法)을 버리는 것이 바로 마업이고, 계율을 헐뜯거나 깨뜨리는 것이 바로 마업이며, 계율을 지키는 이를 깔보는 것이 바로 마업이고, 성문(聲聞)의 행에 수순하는 것이 바로 마업이며, 연각(緣覺)의 승(乘)에 수순하는 것이 바로 마업이고, 함이 없는 법을 요구하는 것이 바로 마업이며, 함이 있는 법을 싫어하여 여의는 것이 바로 마업이고, 마음에 의혹을 품고서 유정을 이롭게 하지 않는 것이 바로 마업이며, 들은 법을 의심하여 이치에 따라 통달하지 않고 함부로 자기의 뜻을 일으키는 것이 바로 마업이고, 아첨하거나 속이기를 좋아하여 거짓으로 가엾이 여기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바로 마업이며, 거친 말씨로써 꾸짖거나 모욕하는 것이 바로 마업이고, 죄를 저지르고도 싫어하지 않는 것이 바로 마업이며, 자신의법에 염착(染著)하는 것이 바로 마업이고, 들은 것이 적으면서도 만족하게 여기는 것이 바로 마업이며, 바른 법을 구하지 않는 것이 바로 마업이고, 법이 아닌 것을 구하기 좋아하는 것이 바로 마업이며, 장애로 덮이고 얽매인 법에 대해 다스리기를 좋아하지 않는 것이 바로 마업이고, 사문으로서 마음과 입을 청정하게 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마업이며, 사문으로서 더러움을 참아 견디는 것이 바로 마업이니라.
선남자여, 이것도 그러하거니와 내지 저 열 가지의 선하지 않은 업을 행하기 좋아하고 선한 법을 버리는 것이 다 마업이니라. 보살이 만약 이 마업을 초월하려면 네 가지의 법을 성취해야 하느니라. 그 네 가지의 법이란, 보리의 마음을 잊어버리지 않는 것이 첫째이고, 6바라밀을 부지런히 닦아서 방일하지 않는 것이 둘째이며, 뛰어난 지혜에 머물러 유정들을 성숙시키는 것이 셋째이고, 매우 깊은 이치에 머물러 바른 법을 옹호하는 것이 넷째이니라. 선남자여, 보살이 이 법에 상응하여 성취한다면, 결정코 모든 마군과 원수를 무찌르게 되리라. 이것이 바로 보살이 4마(魔)를 초월하는 것이니라.
다시 선남자여, 보살이 한량없는 복덕의 자량(資糧)을 쌓아서 모든 유정들을 위해 의지할 바를 마련해 주는 것이란 어떤 것인가? 선남자여, 보살이 만약 일체 유정들에게 한몸과 같은 큰 자비로운 마음을 일으켜서 선정에 머물되 와서 구하는 유정들을 볼 때마다 모든 것을 다 베푼다면, 다함이 없는 복덕으로 보배로운 손[寶手]을 얻어 유정들로 하여금 널리 수용하게 할 것이니라. 한편으로 그 뜻이 청정하고 마음이 평지와 같아서 높거나 낮음이 없어 무엇을 바라는 유정들에게 다 풍부한 이익을 베풀고, 또한 계율이 청정하기 때문에 집착이 없는 마음으로 모든 감관을 잘 옹호하며, 나아가서는 그 일체 보시의 모임을 마련하는 동시에 다라니를 얻어 변재를 성취하게 되리라.
이와 같이 선근을 쌓고 보리에 회향하여 유정들을 널리 이롭게 하니, 그 바깥의 4대(大)가 일체의 세간을 위해 의지할 바를 마련해 주는 것처럼, 안의 4대 역시 일체의 유정들을 위해 의지할 바를 마련해 주느니라. 보살 자신도 생각하기를 ‘내가 쌓은 이 일체의 선근과 뛰어난 법의 지혜는 그 어느 것도 유정들을 위해 의지할 바를 마련해 주지 않음이 없노라’고 하느니라. 이것이 바로 보살이 한량없는 복덕의 자량을 얻어 모든 유정들을 위해 그 의지할 바를 마련해 주는 것이니라.
다시 선남자여, 보살이 부처님께서 안 계신 세간에 출현하여 유정들을 위해 불사를 일으키는 것이란 어떤 것인가? 선남자여, 보살이 그 도리에 계합함과 계합하지 못함을 분명히 아는 지혜[處非處智]를 내기 위해서는 10력(力)의 업을 닦아야 하고, 번뇌를 끊은 지혜[漏盡智]를 내기 위해서는 4무소외(無所畏)를 닦아야 하고, 서른 가지의 걸림이 없는 지혜를 내기 위해서는 18불공법(不共法)을 닦아야 하고, 부처님 눈의 광명을 얻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알아보는 저 5안(眼)을 닦아야 하고, 일체의 신통을 내기 위해서는 전생을 아는 업을 닦아야 하고, 보리를 원만히 성취하기 위해서는 일체의 선한 법을 닦아 그 몸·입·뜻에 대한 모든 번뇌의 업을 끊어야 하고, 장엄한 상호를 갖추기 위해서는 일체 복덕의 자량이 되는 업을 닦아야 하느니라. 보살이 만약 이러한 법을 닦아 구족한다면, 그야말로 부처님께서 안 계신 세간에 출현하여 유정들을 위해 크나큰 불사를 일으켜 성취할 수 있으리라.
다시 선남자여, 보살이 해인(海印)삼마지를 얻어 일체 유정들의 마음의 행에 더렵혀지지 않는 것이란 어떤 것인가? 선남자여, 저 해인삼마지라고 하는 것은 마치 남섬부주(南贍部洲) 안에는 갖가지의 모습과 갖가지 종류의 유정들이 다 바다 속에서 그 그림자와 형상을 나타내기 때문에 큰 바다라고 일컫는 것처럼, 이러한 일체 유정들의 마음의 종류와 음성의 그림자가 다 보살의 마음의 바다 속에서 나타나기 때문에, 이를 해인삼마지라고 하느니라. 또 저 큰 바다가 한결같은 한 가지의 짠맛인 것처럼, 보살이 한 가지의 법의 맛으로 해탈의 지혜를 성취함도 그러하니라. 또 저 큰 바다가 조수의 시기를 어기지 않는 것처럼, 보살이 알맞은 시기와 알맞지 않은 시기를 관찰함으로써 도량에 앉아 시기를 어기지 않고 보리를 성취함도 그러하니라. 또 저 큰 바다가 썩은 송장을 그대로 두지 않는 것처럼, 보살이 그 일체의 번뇌의 습기와 성문·연각의 마음을 그대로 두지 않음도 그러하니라. 또 저 큰 바다가 사방으로 흐르는 물을 다 받아들이되 늘지도 줄지도 않는 것처럼, 보살이 일체의 법을 다 받아들이되 늘거나 줄지 않음도 그러하니라. 또 저 큰 바다의 넓이가 끝이 없는 것처럼, 보살의 지혜의 바다의 넓이가 끝이 없음도 그러하니라. 또 저 큰 바다가 너무나 넓어서 그 밑을 측량하기 어려운 것처럼, 보살의 지혜의바다를 일체의 성문·연각들이 측량할 수 없음도 그러하니라. 또 저 큰 바다가 한량없는 세계의 의지할 바를 마련해 주는 것처럼, 보살이 모든 유정들의 의지할 바를 마련해 줌도 그러하니라. 이것이 바로 보살이 해인삼마지를 얻어 그 일체 유정들의 마음의 행에 더럽혀지지 않는 것이니라.
다시 선남자여, 보살이 유정들의 마음의 행에 더럽혀지지 않는 것이 마치 허공의 바람과 같아서 아무런 걸림이 없는 것이란 어떤 것인가? 선남자여, 보살이 그 일체의 법에 얽매인 소견을 멀리 여읨으로써 마음에 아무런 집착이 없으니, 마치 큰바람이 허공 가운데서 조금도 더렵혀지거나 물듦이 없는 것과 같느니라. 보살이 일체의 법에 대해 마음의 집착이 없는 것도 그러하니라. 이것을 일컬어 보살의 집착 없는 마음이 저 허공의 걸림 없는 바람과 같다고 하느니라.”